Gold Finger RAW novel - Chapter 131
131. 피할 수 없는 선택
그 골짜기의 깊이는 삼십여 장에 불과했다. 하지만 짙은 안개와 구름이 덮여 있었기 때문에 골
짜기 밑이 잘 보이지 않았다.
소영은 단숨에 골짜기 밑으로 내려갔다. 짙은 구름이 덮혀 있음으로 인해 아무리 사면을 둘러보
아도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때 소문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공자, 서두르지 마세요. 제가 길을 안내하겠어요.”
소영은 비록 마음이 조급했지만 길을 알 수 없으므로 하는 수 없이 그녀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소문이 뛰어 오더니 남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소영이 가운데 서고 백리빙이 소영의 뒤를
따랐다.
약 십 장 가량 걸어갔을 때 소문이 갑자기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그 동굴은 입구가 매우 협소하여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안개가 짙었으므로 이 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찾아내기가 힘들었다.
세 사람이 줄을 지어 들어가서 꼬불꼬불하게 돌아 나가자 갑자기 시야가 환하게 밝아졌다.
두 개의 커다란 등잔에 불이 켜져 있었다. 불빛에 바라보니 지름이 삼 장쯤 되어 보이는 석실이
었다.
석실 안에는 의자나 탁자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고 모든 사람들은 맨땅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악소채는 뒷벽에 바짝 붙어 앉아 있었으며 그 곁에는 홍의를 입은 두 비녀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중년 여승과 호호백발의 노부인이 왼쪽에 앉아 있었는데, 그 소년은 외투를 벗어 버
렸고 손에는 장검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회색 도포를 입은 노인의 곁에 얼굴에 병색이 역력한 옥소랑군이 바짝 다가앉아 있었다.
그리고 청의를 입은 사람과 침대를 들었던 두 사람이 석벽에 등을 붙이고 서 있었다.
소문이 소영과 같이 석실 안으로 들어서자 모두들 시선을 돌려 바라보았다.
악소채는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소문은 빠른 걸음으로 악소채의 곁으로 다가가서 그 홍의 비녀와 나란히 섰다.
중년 여승은 소영을 힐끗 바라본 다음 시선을 악소채에게로 돌리며 냉랭하게 물었다.
“이 사람이 누구냐?”
소영은 악소채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소영입니다.”
옥소랑군이 말참견을 했다.
“바로 내가 말한 그 사람입니다.”
그 호호백발의 노부인이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마침 잘 왔군. 오늘의 일을 완전히 해결할 수 있으니…..”
소영은 사방을 한 바퀴 빙 둘러본 다음 천천히 걸어서 석실의 한 구석에 가서 앉았다. 백리빙은
소영의 곁에 바짝 붙어 다니며 조금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소영은 악소채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 수 없었으므로 그 노부인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때 그 중년 여승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악사매, 저 사람이 바로 소영인가?”
악소채는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그 중년 여승은 수중의 불진을 한 번 휘두르더니 말했다.
“소채, 나는 이미 삼십 년 동안 누구와도 싸워 보지 않았으므로 새삼스럽게 살계를 범하고 싶지
는 않다. 그러므로 이번 일이 어디까지나 평화적으로 해결되기를 바란다.”
악소채는 씁쓰레하게 웃었다.
“저는 무엇 때문에 이렇듯 시끄럽게 다투어야 하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자 호호백발의 노부인이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내 손자가 너를 구원하지 않았다면 너는 지금쯤 해골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네가
배은망덕하다니…..”
옥소랑군이 말을 받았다.
“할머니, 차근차근 얘기하십시오. 이 일은 악낭자만을 탓할 수도 없으니…..”
옥소랑군은 소영을 힐끗보며 말을 이었다.
“만약 소영이 아니었더라면 이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텐데!”
그러자 중년 여승이 말을 이었다.
“소영, 마침 잘 왔소. 우리 자세한 얘기를 해 봅시다…..”
악소채가 갑자기 말을 가로챘다.
“이 일은 소영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모든 일은 저 때문에 일어났으니 할 말이 있으면 저에게
해 주십시오.”
호호백발의 노부인이 갑자기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네 이 배은망덕한 계집애 같으니라구. 내가 너를 해치지 못할 것 같으냐?”
악소채는 고소를 지었다.
“후배는 이런 지경에 처해 있으니 난처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께서는 차라리 저에게
출수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노부인이 대답했다.
“노신이 너에게 손을 쓰지 않는 이유는 네가 없으면 내 손자의 병을 치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악소채는 양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옥소랑군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장대협께서는 무슨 병을 앓고 계십니까?”
철수 금면인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상사병입니다. 악낭자께서 우리 공자님에게 냉담해진 후로부터 줄곧 삼 개월 동안 바보처럼 멍
청해졌습니다. 밥을 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한나절을 한 마디의 말도 없이 앉아 있기가 예사이지
요. 마치 강철같이 단단한 몸으로 용호처럼 날뛰던 분이 불과 삼 개월 동안에 저 모양이 되고 말
았습니다. 저는 감히 아가씨에게 한 마디 물어 보겠습니다. 아가씨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여러 차
례나 구해 주신 은인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도 속이 편하십니까?”
악소채는 가벼운 탄식을 하면서 옥소랑군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장대협, 무엇 때문에 그다지 괴로와하시는 겁니까? 세상에는 미인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장대협
과 같이 준수한 인물과 그 빛나는 가문은 많은 규방의 처녀들이 꿈에라도 그리워하는 선망이 되
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거늘 어찌 저 악소채를 위해…..”
옥소랑군은 고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푸른 바다를 건너 봐야만 파도의 위험을 아는 것이오. 지금의 내 마음을 악낭자는 알 리가 없
소…..”
백발 노부인이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주착없는 소리 작작해라. 장씨 가문에 너 같은 자식이 있기 때문에 선조의 낯에 똥칠을 하는
거야.”
옥소랑군은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양볼에는 두 줄기의 눈물이 흘렀다.
그 백발의 노부인은 옥소랑군을 한바탕 꾸짖고 난 다음 악소채를 바라보며 냉랭하게 외쳤다.
“비록 내 손자가 주착없는 탓이긴 하지만, 만약 네가 그를 유혹하지 않았다면 그도 이렇듯 너에
게 정을 쏟지는 않았을 게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결국 변신한 너 더러운 계집애를 탓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악소채가 말을 받았다.
“노선배님의 그와 같은 말씀은 이 후배를 너무도 모욕하는 말씀입니다.”
백발 노부인은 성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를 모욕한다면 또 어쩔 테냐?”
악소채는 입술을 실룩거리며 무슨 말을 하려 했으나 끝내 입을 다물고 말았다.
노부인은 화가 가라앉지 않았는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의 일은 모두가 어떤 결말이 나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반드시 끝장을
내야 할 것입니다.”
중년 여승이 천천히 말을 받았다.
“그야 물론이지요. 저는 사명(師命)을 받들고 왔으니 어떻게 하든 사부님의 체면을 세워드려야
할 텐데…소채, 오늘의 정세를 너는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 내가 올 적에 사부님이 나에게 당부하
기를 네가 장형을 위하여 어떤 배려가 있기를 바랬었다.”
“사자(師姉)께서는 저더러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중년 여승은 부드럽게 대꾸했다.
“풍진 세상에는 싸움이 끝날 날이 없지만, 이 언니는 이미 삼십 년 간 인간세상의 싸움에 참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 비록 사부의 명령을 어길 수가 없어 왔지만, 만사가 잘되어 나가기만
바랄 뿐이다. 결코 불행한 참사를 일으키지 않고…..”
중년 여승은 소영을 한 번 바라보고 그의 영준하고 눈부실 정도로 잘난 모습에 정신을 뺏기고
말았다.
옥소랑군도 비록 영준하게 생기긴 했지만 소영에 비한다면 표일한 기운이 부족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만약 이 두 사람을 두고 한 사람을 택하라고 한다면 누구든 소영을 택할 것은 틀림없다.’
중년 여승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싸움의 원인은 바로 네가 변심을 했기 때문에…..”
악소채는 말을 가로챘다.
“사자께서는 어떻게 그렇게만 생각하십니까?”
중년 여승이 입을 열었다.
“네가 아무리 억울하다고 생각하더라도 너와 장대협과는 한 가닥 정이 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
실이다.”
악소채는 중년 여승을 매우 존경하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한동안 말대꾸를 하지 않았다.
악소채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확실히 한동안 교제가 있었어요. 그러나 나는 사전에 장대협에게 언제든지 소영이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이 판명되는 날에는 더 이상 교제를 할 수 없다고 말을 했습니다.”
백발 노부인은 그 말을 듣자 옥소랑군을 돌아보며 말했다.
“준아야,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느냐?”
옥소랑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그녀는 분명히 나에게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회색도포의 노인이 말참견을 했다.
“그렇다면 일은 매우 간단합니다. 우리는 소영을 없애면 됩니 다.”
소영이 눈을 부릅뜨며 일어서려 했으나 악소채가 만류하는 바람에 억지로 참았다.
백발 노부인은 옥소랑군을 돌아보며 말했다.
“준아야, 너는 저 더러운 계집애의 생명을 몇 번씩이나 구해 줬을 뿐만 아니라 그 아주머니에게
애걸하여 그녀를 제자로 거두어 들이도록 해 주었는 데도 그녀는 이제 와서 날개가 다 자라니 너
를 거들떠 보지도 않는구나!”
그녀의 이와 같은 몇 마디 말은 그 어투가 매우 강경하였지만 그 말뜻에 있어서는 오히려 처량
한 느낌마저 풍기고 있었다.
악소채는 예쁜 눈을 깜빡거렸다. 양볼에 두 줄기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녀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만 두고 말았다.
옥소랑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할머니, 모두가 지나간 일들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얘기를 하지 마십시오. 내 병은 아마 약으
로는 치료하지 못할 것입니다. 악낭자가 이미 변심을 했다면 우리는 이 이상 더 추궁할 것 없습
니다.”
옥소랑군은 이때 갑자기 기침을 하느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백발 노부인은 처량함과 안타까운 눈으로 옥소랑군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원한에 찬 시선으로 소
영을 노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하에 미녀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거늘 너는 어찌하여 내 손자와 다투어 악소채를 뺏으려 하
느냐?”
소영은 눈썹을 치뜨며 말했다.
“노선배님의 말씀은 잘못입니다.”
백발노인은 옥소랑군을 돌아보면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좋다. 나는 일생 동안 누구에게도 부탁을 해 본 일이 없다. 하지만 지금 너에게 한 가지 부탁하
겠다. 당연히 그 보답은 하겠다.”
소영은 속으로 그 일이 매우 난처한 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
다.
“무슨 일입니까?”
백발노부인은 강경하게 잘라 말했다.
“네가 곧 이곳에서 떠나 주기 바란다.”
‘나는 목숨을 걸고 금궁에 들어갔으며 천리 길도 멀다 하지 않고 이곳으로 달려와서 악누님을
도와주려고 하는데 내 어찌 쉽사리 이곳에서 떠날까 보냐…..’
백발 노부인은 소영이 얼른 대답을 하지 않자 거절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먼저 입을 열었
다.
“내가 지불하는 대가도 역시 적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무림에서는 우리 백운산장을 제외하고는
심목풍과 대적할 사람들이 별로 없다.”
“…..”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가령 있다고 하더라도 끝내는 힘이 달려 목적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나는 백운산장 중
의 무공이 가장 강한 세 명의 고수로 하여 너를 도와 심목풍을 대항하게 할 것이며, 꼭 필요하다
면 나도 나서서 너를 도와주겠다. 이 정도면 크지 않느냐?”
소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심목풍과 후배가 대적해야 할 일과 악누님과 영손과의 사이의 다툼은 별개의 것입니다. 이 일
을 결코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백발 노부인은 속으로 소영을 몹시 미워하고 원망하는 눈치였다. 그녀는 악소채와 중년 여승이
석실로 돌아오기 전에 아마도 그 일을 처리하려는 듯했다. 그래서 그녀는 소영의 이야기를 더 들
으려 하지 않고 양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럼 너는 이 일에 꼭 참견하겠다는 거냐?”
“당신네들과 악낭자 사이의 일이 평화스럽게 해결된다면 나는 결코 참견하지 않겠지만, 만약 여
의치 못하여 싸움이 벌어진다면 참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대화를 듣고 있던 삼절사태는 암암리에 길게 한숨을 불어냈다.
“악사매, 지금 소대협이 이야기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다. 그의 사정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지금까지 지나온 일에 대해서는 따질 필요도 꾸짖을 필요도 없다. 너 또한 적지 않
게 과오를 범했으니 어떻게 처신할 셈이냐? 정리를 외면하여 결국 일을 이 지경에까지 벌여 놓았
으니……”
말을 마친 삼절사태는 처연히 악소채를 건너다 봤다.
악소채의 얼굴에 서글픈 미소가 감돌았다.
“만약 옥소랑군 한 사람이 이 몸을 만나러 왔다면 제가 목석이 아닌 이상 어찌 그의 크나큰 덕
과 애정을 모르는 척하겠습니까? 하오나 지금 장대협은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와서 이 몸을 핍
박하려고 하니 이것은 도리에 어긋난 일인가 합니다.”
악소채의 잔잔한 눈동자에 고뇌의 빛이 스며들었다.
조용히 이 말을 듣고 있던 삼절사태가 핀잔을 하였다.
“그러나 장노선배께서 손자를 염려하여 오신 것을 나무랄 수야 없지 않느냐?”
“하오나 노부인을 제외하고도 많은 사람이 오지 않았습니까?”
삼절사태는 무거운 신음소리를 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매는 비록 정이라는 한 글자를 끊을 수는 있겠지. 그러나 사부의 분부를 거역할 수는 없다.”
악소채는 이 말에 놀라는 시선을 들었다.
“사부께서 제자로 하여금 어찌하라 하셨습니까?”
“사부께서는 심산유곡의 도통한 스님임이 틀림없지만 사매는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분께
서는 누가 뭐라 해도 옥소랑군의 할머니가 아니냐?”
이 말에 악소채는 가슴이 섬뜩해졌다. 그러나 이윽고 평정을 회복했다
“사부님과 사매가 어떤 말씀을 교환하셨는지 말해 주십시오.”
“사부님께서는 내가 여기에 올때 분부하시기를, 이곳 사정과 형편을 자세히 알아보고 너에게 어
떤 잘못이 없는지 잘 살피라고 하셨다.”
악소채의 얼굴은 엄숙하게 변했다.
“저는 이미 사실대로 말하였으니 저에게 잘못이 있는지 없는지는 아실 게 아닙니까?”
삼절사태는 소영을 한 번 바라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대협은 아직 이 세상에 살아 있다. 너는 그와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단 말이지?”
“사자…..”
악소채는 당황하여 급히 삼절사태의 말을 막았다. 그러나 삼절사태는 말을 이었다. 그녀의 음성
에는 싸늘한 냉기마저 감돌었다.
“아까 말한 대로 너에게 어떤 고난도 감수할 수 있는 각오가 서 있다면 나머지 일에 대해서는
과히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밖의 일은 자연히 해결되게 마련이다.”
말이 끝나자 소영을 한 번 바라보고는 차분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황급해진 악소채는 그녀의 뒤를 따르며 다급히 말했다.
“사자, 그것은 소영 동생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입니다. 사자는 저의 뜻을 모르고 계십니다.”
삼절사태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만약 소대협이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이때쯤 너는 이미 장씨 집안의 며느리가 되었을 것이
다. 지금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은 오로지 소대협이 이 세상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삼절사태의 이 말은 혼자말로 중얼거리는 것 같았으나 분명히 악소채와 소영이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말이 떨어지자 악소채는 갑자기 삼절사태의 앞으로 달려가려 했으나 소영이 이를 가로막고 악소
채의 팔을 잡아채듯 했다.
“누님은 잠깐 물러서십시오. 사태께서 나를 찾으셨으니 그것은 바로 나의 일입니다.”
삼절사태는 왼손을 들어 악소채를 제지하며 쌀쌀하게 말하였다.
“비켜라! 길을 비켜라! 나는 나대로의 생각이 있느니라.”
악소채는 삼절사태의 의중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삼절사태는 소영에게로 돌아서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한 것이 무슨 말인지 당신은 알았소?”
“예,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옥소랑군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 문제를 반드시 풀어야 할 텐데…이것이 이 천승(賤僧)이
간절히 바라는 바요.”
“그런데 사태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이 문제를 풀으시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매우 간단하오. 이것은 소대협 바로 당신의 생사에 관한 문제이니까요.”
자기의 생사에 관한 문제라는 말에 소영은 쌀쌀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사태께서는 내가 그 사람들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한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은 우리 불문지도(佛門之道)에서 벗어
나는 일이며 더욱 그러한 살생은 소승은 원치 않소.”
악소채는 앞으로 일어날 지도 모를 어떤 일에 대비하여 마음을 가다듬고 이들을 주시하고 있었
다.
소영은 삼절사태의 말을 반박하고 난 뒤 그녀가 어쩌면 습격을 가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불의의 일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악소채의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쉴새 없이 스치는데 삼절사태는 악소채를 향해 말을 이었다.
“네가 만약 사부님의 참뜻을 알고 너의 그릇됨을 뉘우쳐 사자의 처지가 매우 난처해졌음을 안다
면 나와의 싸움은 마땅히 하지 않아야 옳은 일이다.”
“저는 이미 저의 처지를 모두 말씀드렸고 제가 갈 길을 밝혔으므로 사자께서는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하셨을 텐데…..”
삼절사태는 말을 가로막았다.
“너의 처지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렇다고 너의 행동을 그대로 좌시할 수도 없다. 지금 너는
양자 택일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다. 장씨 집안의 며느리가 되느냐, 아니면 싸움을 벌이느냐,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
악소채는 비로소 그들의 진의를 알았다. 악소채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저는 사자께서 한 발자국만 물러서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오직 그것만이…..”
“안 된다! 첫 번째 싸움은 반드시 내가 맡아야 한다.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때 불쑥 얼굴을 내민 것은 소영이었다.
“악누님이 그렇게도 사태와 싸우기를 원치 않는다면 이 싸움을 나에게 양보하는 것이 어떻겠
소?”
“쓸데 없는 소리! 이 싸움엔 동생이 관여할 필요가 없어요. 쓸데 없는 곳에서 쓸데 없는 시간만
허송하지 말고 어서 이곳을 떠나 줘요. 소문(素文)아, 네가 대신 이분을 전송해 드려라.”
소영은 호탕하게 웃었다.
“누님, 일이 이렇게 험악하게 되어 가는데 내가 이곳을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악소채에게는 천하에 둘도 없는 소중한 소영이다. 사태가 험악하게 변하면 변할수록 한시 바삐
이곳을 떠나게 해야 했다.
“누이의 말도 들을 때는 들어야 해요. 이곳은 머무를 곳이 못돼요. 내가 죽기 전에 사자께 부탁
해 동생을 떠나 보내도록 하겠어요. 사자는 나와 오랫동안 같이 지내온 분으로 정분이 두텁고 또
이번 일은 동생과는 전혀 무관하니 나의 청을 거절하지는 않을 거예요.”
소영을 아끼는 악소채의 간곡한 말이었다.
“누님과의 정분이 두터운 삼절사태께서는 나를 놓아 줄지 모르겠으나 장씨 일파는 용서하지 않
을 것입니다. 내가 단혼애 계곡에서 살아 남는다 하더라도 후일 반드시 그들 손에 잡혀 죽을 것
이니 그때 가서 내가 단신 고전하는 것보다 차라리 지금 이 자리에서 누님과 함께 싸워 승부를
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천만에, 동생은 이미 무림 중의 영웅이오. 천하의 무림들이 동생에게 걸고 있는 기대는 마치 가
뭄에 비를 바라는 것과 같은 것이니 비록 죽는다 해도 죽을 때와 죽을 곳이 따로 있는 것이오.
후일 무림정의를 위하여 싸울 생각은 않고 어찌 이와 같은 명분없는 싸움에서 목숨을 버리겠다고
하오?”
악소채는 자기는 지금 죽는 한이 있더라도 무림의 영웅인 소영만은 천하의 위인이 되기를 간곡
히 바라는 것이다. 소영을 아끼는 그녀의 집념은 단장의 절규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때였다.
“우리가 몇 해 동안 서로 도우며 같이 지내온 정분을 생각하여 선공의 기회를 준다. 자 공격해
라!”
삼절사태의 선전포고였다.
이때 비호처럼 뛰어든 소영이 악소채를 감싸듯 옆으로 밀어붙이며 외쳤다.
“누님은 물러나시오!”
마치 철없는 아이를 질책하는 노성과도 같았다.
소영은 지금까지 누이라고 부르는 악소채를 선녀인 양 보아 왔다. 그녀를 알게 된 후부터 지금
까지 단 한 번이라도 그녀의 말을 무시하거나 거슬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위급을 요하
는 판국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악누님을 위해서라면…..’
그런데 그렇게도 끈질기게 삼절사태에게 도전했던 악소채였으나 소영의 이 일갈에는 순순히 응
하며 뒤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역시 악소채는 소영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한 떨기의 꽃이었다.
악소채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했던 소영은 비로소 마음을 놓고 삼절사태와 대적했다.
“나의 누님 악소채는 사태와 함께 동문수학한 사람이오. 그러니 수도 연수로 보더라도 누님은
사태의 적이 될 수 없소.”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라 삼절사태는 내심 적잖이 당황했다.
소영은 말을 이었다.
“사태께서 그녀와 기어이 싸움을 벌인다면 승부는 명약관화한 일이오. 나는 내 눈앞에서 누님의
죽음을 보기 싫소.”
삼절사태는 웃으며 말했다.
“소대협, 그것은 쓸데 없는 걱정이오. 마지 못한 판국에 비록 싸움을 할지언정 나는 결코 사매의
목숨을 뺏으려는 것이 아니오. 그녀가 패하면 몇 군데 상처를 입힐 뿐이오.”
“정히 그러하오?”
“나와 악소채는 몇 해 동안을 동문수도한 정분이 있소.”
“그럼 악누님 대신 나와 싸운다면?”
“그때는 각기 자기의 무예를 믿고 승패를 가리는 것이오. 생사를 판가름하는 것이지요.”
“당신의 무예가 훌륭하다는 것을 알고 있소.”
이것은 분명 삼절사태를 비웃는 말이었다.
“좋다! 훌륭하다는 그대의 무예 솜씨를 보여랏!”
삼절사태는 자신도 모르게 동굴 뒷편으로 물러나 소영의 거동을 살폈다.
사태는 소영의 열화 같은 기백에 완전히 위압되고 말았다. 동굴 뒤에서 바라보는 사태의 눈에는
나이 어린 소영이 태산처럼 보였다.
‘만만치 않은 적수다. 나이는 비록 어리나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위인이다.’
이런 생각이 뇌리에 스치자 사태는 기가 점점 꺾여옴을 느꼈다.
삼절사태는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고 조용히 말했다.
“나와 사매가 싸움을 한다는 것은 수도한 경력과 동도한 정의로 보아 소대협의 말대로 옳은 일
은 아니오. 그러나 소대협이 사매를 대신한다면 원하는 바는 아니나 대적해 주겠소.”
기세등등하던 삼절사태는 완전히 풀이 죽은 듯했다.
“사태께서 나의 적수가 되어 주신다니 어떤 무술을 택하겠소?”
그녀는 무엇을 생각하는 듯 대답이 없었다.
“장풍, 지풍, 검, 창, 부(斧), 어느 것을 택하겠소?”
“권장병도(券掌兵刀)에 한정할 게 아니라 자기가 가진 장기(長技)를 모두 쓰는 것이 좋겠소.”
신기의 통달을 자처하던 여승이라 되도록 여러 가지 무예로 경합을 해 보려는 속셈이었다.
“좋소! 선공의 기회를 주겠소.”
“아니오. 내가 양보하겠소.”
“정히 그렇다면 먼저 실례하겠소.”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소영은 한 손을 들어 손뼉을 딱! 하고 쳤다.
지난 몇 달 동안 소림의 탄지신공법(彈指神功法)과 화산 담운청의 검법을 익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마 정진했기 때문에 신공 검술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내공도 출동하였다.
장세(掌勢)가 손에서 떨어지자 장풍이 일진의 강풍으로 변했다.
절묘한 신기에 득도한 사람은 어떤 싸움에서든 한 손을 내밀기만 하면 상대방의 공법을 알아낼
수 있다. 소영이 일진의 장풍을 일으키자 삼절사태는 이 강적의 기선(機先)을 제어하기 위해 재빨
리 왼손을 들어 이지공법(二指功法)으로 반격을 가했다. 소영의 맥문(脈門)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대단한 솜씨로군!’
소영은 오른손을 내리고 왼손을 번쩍 들었다. 이지공을 막기 위한 장법이었다.
소영의 장법은 원래 남일공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인데 남일공은 필생의 정력을 기울인 장법의 개
조였다. 장법을 익힌 소영은 그밖에 연환섬전칠십장(連環閃電七十掌)을 새로 창안 연마하여 일약
무림의 영웅이 되었던 것이다.
삼절사태는 처음 당하는 일이라 일여신기(一如神技)한 이 장법에 적이 놀랐다.
‘이 위인의 장법에는 당할 도리가 없구나.’
수세에 몰린 삼절사태는 몸을 한바퀴 돌리면서 두어 걸음 뛰어 나가 소영의 일격을 피했다.
소영은 소리쳤다.
“미숙한 장법이라 부끄럽소.”
말은 노호와도 같았고, 두 손은 번개처럼 움직였다. 쌍장을 연속해서 쳐내는 소영은 어느 새 팔
장의 장풍을 퍼부었다. 이 팔 장의 장풍은 눈 깜박할 사이에 쳐낸 것이라 대적한 삼절사태에게
숨돌릴 여유도 주지 않았다. 팔 장은 섬광처럼 빠르기도 했으나 또한 장력의 강함은 비길 데 없
는 것이었다.
삼절사태는 이미 소영의 적수가 아니었다. 경합을 벌인 지 불과 촌각인데 벌써 수세에 몰린 삼
절사태는 소영의 팔 장을 피하기에 바빴다.
악소채는 기뻤다. 그녀 역시 소영의 장법이 이렇듯 출중한 줄은 미처 몰랐었다. 놀랍도록 무서운
장풍을 계속 퍼붓는 것을 보고 마음이 흡족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한편으로는 은근히 걱정이 생
겼다.
‘소영이 혹시나 실수를 하여 삼절사태를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동문수도한 사자와 사매의 정은 끊을 수가 없었다.
노부인 장씨와 옥소랑군을 따라온 여러 사람들은 형세의 귀추가 이미 정해졌다고 생각했다. 삼
절사태를 제압하는 소영이 있는 한 장씨 일파의 계교는 허사였고 사태가 소영을 사로잡는다는 것
도 가망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한편 소영의 팔 장 공법에 밀려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삼절사태는
소영의 장풍이 잠시 멈춰지자 재빨리 등에 메고 있던 불진(拂塵)을 빼어 휘두르기 시작했다. 순간
여러 줄기의 그림자가 마치 실오라기처럼 하늘에 가득찼다.
형세가 일변되자 삼절사태는 불진을 높이 들고 입을 열었다.
“소대협의 장법은 가상할 만하나 내가 이제 새 공법을 쓰니 조심하오.”
소영은 단전(丹田)에 진기(眞氣)를 한 모금 들이키고 재빨리 몸을 돌려 두어 걸음 물러섰다. 소
영의 호신법도 빨랐으나 삼절사태의 불진 공격은 실로 절묘한 것이어서 끝내는 불진 끝에 달린
사포에 소영이 맞아 옷이 찢어지고 살갗이 갈라지며 피가 흘렀다.
언뜻 보기에는 매우 부드러운 것 같은 불진의 사포이나 그 끝이 소영에게 일단 닿았다 하면 옷
이든 살이든 모두 찢어졌다. 마치 날카로운 칼날과 같은 것이었다. 사태의 불진이 이번에는 소영
의 어깨에 명중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삼절사태는 그 이상 공격하지 않았다.
자신만만했던 삼절사태의 얼굴에는 다시 두려움과 놀라운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관전하던 장씨
일파와 여러 행자들은 어리둥절했다.
불진으로 소영의 어깨를 내리쳤을 때 불진을 잡은 오른팔이 갑자기 떨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
다. 그것은 소영의 몸에 강한 반탄지력(反彈之力)이 있었기 때문에 불진의 사포를 따라 삼절사태
의 팔로 흘러 들어간 것이었다.
삼절사태는 다시 한번 놀랐다. 이 어린 나이에 언제 이렇게 훌륭한 호신술을 익혔을까?
이는 실로 무림에서도 보기 드문 재동이라 두려워하는 한편 감탄도 했다. 사실 반탄지력은 호신
술의 극치인 것이다.
‘안 되겠다.’
삼절사태가 다른 공법을 생각하고 있을 때 소영의 오른손에 번쩍하는 것이 있었다. 칼날이 시퍼
런 단검이었다.
소영은 단검을 움켜쥐고 한 발 한 발 다가서며 말했다.
“사태의 초술(招術)이 비범하니 나는 단검을 쓰겠소.”
그러나 즉시 반격은 가하지 않고 칼을 겨누어 쥔 채 삼절사태를 노려보고 있었다.
소영의 단검을 든 자세로 보아 검법도 역시 비상하리라 생각한 사태는
“소대협의 사부는 어떤 분이시오?”
소영은 말을 하지 않았다. 이마에서 어깨에서 흘러 내리는 피가 옷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싸움을 잠깐 멈춰 주어요!”
소영의 위급함을 보고 참다 못해 달려든 백리빙이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오?”
“소녀의 오빠는 너무 심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저렇게 피가 흐르지 않아요? 상처를 동여맬 동안
만 참아 주십시오.”
삼절사태가 대답을 하기 전에 노부인 장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싸움을 벌이면 피차 간에 죽고 사는 것은 순간의 일인데 어찌 싸움 도중에 상처를 매어줄 수
있단 말이냐.”
노부인 장씨는 삼절사태로 하여금 공격을 계속하게 하고 소영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심산이었다. 사실 소영도 불진 공격에는 수세에 긍긍했던 것이다.
그러나 삼절사태는 노부인 장씨의 말을 못들은 척하며 백리빙에게 말했다.
“낭자는 소대협과 어떤 사이가 되는 것이오?”
“네, 저는 그의 의동생입니다.”
“알았소. 그의 상처를 매어 주시오.”
백리빙은 허리춤에서 꺼낸 가루약을 상처에 바르고 흰 수건으로 상처를 동여맸다. 소영에 대해
남몰래 연정을 불태우고 있는 백리빙인지라 여러 사람들의 눈길 따위는 아랑곳없이 정성을 다하
였다. 악소채는 시종 묵묵히 이 정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백리빙이 이렇듯 넘치는 정을 억제하지 못하는데 반하여 악소채는 그렇지 않았다. 나쁜 일이나
슬픔을 좀처럼 밖으로 나타내지 않았으며 소영에 대한 연모의 정 또한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다.
백리빙의 사랑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나 악소채의 정념은 심산유곡에 피어 있는 청초한 백합
과 같은 것이었다.
소영은 여러 사람들의 면전에서 약을 바르며 상처를 매만지는 백리빙이 그리 달갑지 않았으나,
백리빙이 자기를 위해서 싸움을 멈추게 하고 상처를 돌보아 주는 것은 고마웠다.
삼절사태와의 대결에서는 참패를 당한거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상처를 동여맨 백리빙은 소영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오빠, 만약 오빠가 오늘 단혼애 계곡에서 죽는다면 악소채 낭자도 결코 혼자 살아 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오빠가 허락하신다면 나도 이곳에 뼈를 묻고 싶어요. 저승의 반려가 되겠어요. 그러니
마음을 놓고 용기를 내어 싸우세요.”
이 말에 소영은 적이 힘을 얻었다.
말을 마친 백리빙은 악소채를 한 번 바라보고는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악소채는 백리빙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시종 담담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백리빙이 제자리로 돌아가자 삼절사태가 소영에게 물었다.
“아직도 싸울 생각이 있소?”
소영은 천천히 진기를 단전에 모으며 말했다.
“내 비록 무거운 상처를 입었으나 아직도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다시 싸움을 벌이기 전에 사태께 한 가지 말씀 드릴 것이 있소이다.”
“무슨 말이오?”
“내 손에 쥐어져 있는 이 칼은 날카롭기가 쇠덩이를 흙베듯 하니 사태께선 그리 알고 조심하시
오.”
삼절사태는 소영의 오른손에서 번쩍이는 단검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하였다.
‘이 사람의 늠름한 기개는 참으로 칭찬할 만하다. 무예를 익힌 햇수로 보아도 의당 내가 불진과
같은 무기를 먼저 쓰지 않았어야 할 것이었는데 더욱 일격을 가하여 그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았
던가. 아무도 이 사람의 투지를 꺾을 수는 없는가 보다.’
“알겠소. 명심하겠소.”
삼절사태가 말을 마치자 소영의 단검은 승룡인봉(乘龍引鳳), 섬광과 함께 바람을 끊었다.
그러나 삼절사태의 초술도 만만치 않아 옆으로 비켜 서며 칼을 피하고는 불진을 휘둘러 역습을
가했다.
소영이 적을 노리는 호랑이처럼 긴장하고 있는데 반하여 삼절사태의 초술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소영은 재빨리 삼절사태의 목을 겨누던 단검을 아래로 내리며 불진을 내리쳤다.
그러나 그것은 빗나가고 말았다. 원래 삼절사태는 내공의 초술이 비범한지라 그녀가 불진을 한
번 휘두르면 부드러운 사포(絲布)는 변화무쌍한 그림자를 펴냈으며 소영의 전신을 뒤덮기도 하였
다.
그러나 소영의 검술도 범상치 않아 정중온기(正中蘊基), 기중장정(奇中藏正)하여 연타를 계속하
는 사태의 불진 공격을 막아냈다.
두 사람이 싸움을 시작한 지 벌써 십여 차례의 경합을 벌였으나 용호 백중은 실로 막상막하여서
쉽게 승부가 나지 않았다.
삼절사태는 사력을 다하였다. 횡격종타(橫擊從打)하는 그의 공법이 능하긴 하였으나 소영의 단검
에는 아무 소용이 없었으며 그에게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불진이 제구실을 못하자 여러 가지 무기로 공법을 시도했으나 모두가 허사였다.
그들은 다시 맞붙어 싸우기를 다섯 차례, 숨을 몰아쉬고 난 사태가 말을 건넸다.
“그대는 누구에게 검술을 배웠소?”
“나의 스승은 성이 장(莊)이며…..”
하고 무심코 말을 내뱉다가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부님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니
다. 그는 곧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나 삼절사태의 질문은 집요했다.
“혹시 장산패(莊山貝)가 아니오?”
사부의 이름을 알아 맞추자 소영은 적이 놀랐다.
“그러하오. 사태께선 그분을 어떻게 아시오?”
삼절사태의 눈에는 일말의 우수가 깃들어 무엇인가 옛날을 회상하는 것 같더니 곧 표정을 감추
고 쌀쌀하게 말하였다.
“그저 이름을 들었을 뿐이오.”
그녀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불진을 휘두르며 다시 공격해 오기 시작했다.
소영은 사태의 불진을 가볍게 피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사태는 출가 수도한 승려로 어떻게 사부님의 이름을 알고 있을까?’
생각하면 그리운 사부님이었다. 당장에라도 뛰어가 뵙고 싶은 마음을 억제한 소영은 서서히 반
격의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