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 Finger RAW novel - Chapter 147
147. 백기를 드는 간웅
소영은 모두가 금화부인에게 대하는 인상이 좋지 않음을 보고,
“저의 말을 여러분들은 믿지 않으시니 금화부인께서 저를 도와 준 몇 가지 사실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영은 금화부인이 인연봉(姻緣峯) 밑에서 심목풍과 악전고투할 때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설명하
였다. 소영의 이야기를 듣고 난 마문비는 고마와하는 얼굴로 금화부인을 바라 보았다.
“소대협께서 이렇게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더라면 금화부인을 부당하게 대접할 뻔 했
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그와 같은 사실을 모르고 그랬으니 용서를 바랍니다.”
“괜찮습니다. 어찌됐건 저는 많은 사람들 틈에 낄 순 없으니까요. 한 가지 나쁜 일을 했어도 나
쁜 사람이고, 백 가지 나쁜 짓을 해도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 입니다. 저는 이미 나쁜
사람으로 낙인이 찍혔으니 천하의 나쁜 일들을 모두 제게 뒤집어 씌운들 어떻습니까.”
금화부인이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부인께선 그렇게 생각하실 수가 있겠지만 저희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대장부는 은
(恩)과 원(怨)을 분명히 가려야 하거늘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소영이 기회를 보아 주조룡의 신분을 밝혔다.
“이 자는 백화산장의 이장주(二莊主)입니다.”
“뭐? 주조룡(周兆龍)이오?”
“그렇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오.”
“그 놈은 심목풍이 강호에서 악행을 일삼을 때 심가의 손발이 되어 선량한 사람들을 무한히 괴
롭혔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도 그 자로부터 해를 입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제 소
대협께서 그놈을 사로잡아 왔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우리가 여태껏 심목풍을 죽이지 못하
였으니 우선 그 놈을 처치하여 지금까지 쌓인 울분을 풀어 보도록 하십시다.”
마문비는 주조룡을 죽이자고 성급히 서둘렀으나 소영이 이를 말리며 차분하게 말했다.
“백화산장 안의 비밀은 심목풍을 제외하고는 이놈이 제일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하니 그 비
밀을 알아 낼 때까지는 이놈을 살려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소. 과연 그렇소. 백화산장의 비밀은 강호의 형세에 큰 관계가 있으니 그러는 것이 좋겠소.
비단 나뿐만 아니라 그자들로부터 해를 입은 사람들은 모두 찬성할 것이오.”
마문비는 좌중을 훑어 보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이곳에는 몇 채의 집이 있습니다. 비록 초가 삼간이나마 비바람을 피할 수 있으니 소대협과 무
위도장은 들어가 쉬도록 하시오.”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먼 발치로 초가들을 바라 보았다.
“이곳은 매우 은밀한 곳이어서 그전에 제가 귀주(歸州)에 있을 때의 일이 생각나는군요. 옛날의
일입니다. 강물 위에 부주(浮州)를 만들어 놓고 마형과 저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했지
요.”
“이번에 우리가 수중사주(水中沙州)를 찾게 된 것도 거기에 연유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초가로 들어 갔다.
“등불을 밝혀라!”
마문비의 말이 떨어지자 두 개의 등잔에 불이 켜졌다.
소영이 방 안을 살펴 보니 마문비의 뒤를 따라 들어 온 사람들은 거의 안면이 있는 군호들이었
다. 다만 그들의 이름이 기억에 잘 남지 않을 뿐이었다.
마문비는 대나무로 만든 걸상을 가리키며 소영에게 말했다.
“소대협, 체면은 그만 차리고 어서 자리에 앉으시오. 소대협의 무기(武技)는 자타가 공인하니 무
림에서는 혜성과 같은 존재요.”
“천만에,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소영이 자리를 사양하니 군호들이 일제히 입을 모아 앉기를 권유했다.
“소대협, 앉으시오.”
소영이 자리에 앉은 다음 마문비는 무위도장을 향해 말했다.
“도장의 덕망이 높으셔서 강호에서는 모두가 경앙하고 있습니다. 또한 구대문파(九大門派) 가운
데서 제일 먼저 심목풍과의 싸움을 영도하셨으므로 두 번째로 입좌(入座)하실 분은 무위도장이
올시다.”
“여러분들을 위해서 한 일이 없으니 부끄러울 뿐입니다.”
무위도장이 겸손해 하며 소영의 바로 옆에 앉았다.
마문비는 세 번째 자리를 가리키며 부드럽게 말했다.
“백리 낭자, 앉으시오.”
백리빙은 생긋 웃으며 사양했다.
“저는 오빠 뒤에 서 있으면 족합니다.”
다음 자리에는 당노부인과 금화부인을 청했다.
“당노부인과 금화부인 앉으시오.”
당노부인도 자리에 앉기를 사양했다.
“아니올시다. 마총타주(馬總舵主)께서 앉으셔야지요. 이 늙은 몸은 많은 죄를 지었는데 어찌 이
자리에 앉을 수 있겠소.”
이어 금화부인도,
“천첩은 저 주조룡을 다루어야 할 터인즉 앉아 있을 시간이 없는가 하옵니다.”
두 사람이 모두 자리에 앉기를 사양하자 소영이 마문비에게 앉기를 권했다.
“마총타주께서 앉으시지요. 사양 마시고.”
마문비가 자리에 앉았다. 대나무 걸상 네 개 가운데 한 개가 아직 남아 있었다. 나머지의 군호들
은 걸상을 비워 둔 채 모두 땅에 앉았다.
마문비가 좌중을 보며 통성하기를 권했다.
“소대협께서 이분들을 다 아십니까?”
“전에 한두 번씩 뵈온 적이 있으나 이름은 잘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그럼 지금부터 서로 알고 지내도록 하시오.”
마문비가 제일 가에 서 있는 절름발이 노인을 소개했다.
“이분이 파협 상대해(常大海)요.”
“아, 그렇군요! 이분이 바로 상형, 전에 몇 번인가 뵈온 적이 있는데 참 오래간만입니다.”
소영이 반갑게 인사를 하니 그 절름발이 노인도 반가와 마지 않았다.
마문비는 차례차례 군호들을 소개했다.
“이분은 신전건곤(神前乾坤)의 당원기(唐元寄)시고 이분은 삼양신탄(三陽神彈)의 육괴장(陸魁章)
이시며 이분은…..”
마문비가 소개를 할 때마다 그들과 소영은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의형문(意形門)의 장문인인 동공성이시고 이분은 남파태극문(南派太極門)의 석봉선(石奉先)이올
시다.”
인사 소개가 끝나자 소영은 다시 포권을 하며 공손히 인사를 했다.
“여러 동지들, 소영이 인사를 드립니다.”
여러 군호들은 일제히 답례했다.
마문비는 그 자리에 남아 있던 부하들을 모두 소개했다.
“수고들 많이 하셨습니다.”
“소대협,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군호들과의 안사가 끝나자 이 때를 기다리기나 한 듯이 금화부인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얼굴에
웃음을 띠고 상냥하게 말했다.
“여러분, 인사를 마치셨어요?”
“왜 무슨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마문비가 물었다.
“지금 우리는 중대한 일을 협의해야 할 때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제가 알기로는 심목풍이 지금 그의 옛 동료를 만나러 갔는데 그 사람의 무예는 심목풍에 못지
않게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심목풍은 지금 강호의 정세가 자기에게 점점 불리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전면적으로 공격을 가할 것이 틀림 없다고 봅니다.”
금화부인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대략적인 것에 불과하며 자세한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은 심목풍을 빼고
는 오로지 저 주조룡뿐입니다.”
“입을 다물고 있는 주조룡에게서 어떻게 그 비밀을 캐낼 작정입니까?”
“여러분께서 모두가 대협객이시니 지략과 무술을 함께 지니고 계시다는 것을 물론 알고 있으나
이번 일만은 저에게 맡겨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좌중의 대소 협객들은 모두 금화부인에게 시선을 모았다.
금화부인은 자기가 주조룡을 다루어 심목풍의 흉계를 캐내겠다는 것이다.
마문비는 소영에게 물었다.
“소대협,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주조룡을 다루는 데는 저 금화부인이 제일 적격이라 생각하오.”
“그렇다면 일은 오히려 잘 되었소… 그럼 금화부인께서 수고를 좀 해 주십시오.”
마문비의 응낙하는 말이 떨어지자 금화부인은 두구로 하여금 주조룡의 혈도를 풀어 주게 하였
다.
주조룡은 잠에서 깨어나듯 부스스 눈을 떴다.
금화부인은 주조룡을 내려다 보며 여걸답게 껄껄 웃었다.
“주조룡! 너는 우선 이곳에서 도망쳐 나갈 수 있는가 없는가를 잘 생각해 보아라.”
주조룡은 그제야 정신을 차려 주위를 살펴 보았다. 모두가 자기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라 넋빠진 사람처럼 앉아 있을 뿐이었다.
“주조룡! 똑똑히 보았느냐?”
주조룡은 고개를 끄덕였을 뿐 말을 하지 않았다.
“이만하면 잘 알았을 것이다. 여기서는 너의 그림자도 빠져 나가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란 한 번 나면 한 번 죽는 법이오. 이미 십여 년을 살았으니 지금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소.”
주조룡의 배짱도 대단한 것이었다.
“너는 하나는 알고 둘을 모르는 사람이다.”
“태평성세에 화를 입어 죽는다면 서러울지 모르나 소인은 많은 죄를 지었으니 내 명을 다하지
못할 것이오. 여러분께서는 소인을 가장 비참한 방법으로 죽일 것이오. 소인에게는 이미 참살당할
각오가 서 있소.”
속과 겉이 다를지는 몰라도 주조룡은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금화부인은 그런 따위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
“주이장주께서 선량한 사람들을 잡아다 놓고 고문하는 것을 꼭 두 번 봤지. 그 솜씨 아주 훌륭
하던데… 이 천첩, 어디 한번 그와 같은 방법을 바로 이장주 어른께 써 볼까? 아마 당해 내지 못
할 걸.”
이 말을 들은 주조룡은 그제서야 정신이 난 듯 눈알을 굴리며 좌중을 향해 외쳤다.
“여러분께서는 소인을 어쩌자는 것입니까? 삶아 먹든 구워 먹든 마음대로 하시오.”
좌중의 군호들은 차가운 시선을 보냈을 뿐 광인의 외침으로 흘려 보냈다.
금화부인이 말했다.
“이분들은 모두 너와 이야기하기를 원치 않는다. 네가 갈 길은 두 가지뿐, 무슨 말인지 알아 듣
겠는가?”
“말해 보시오. 두 가지 길이 어떤 것이오. 나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오?”
“내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모른다면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이야기해 주겠다.”
금화부인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엄숙한 표정을 하고 다시 이었다.
“네가 심목풍의 음모를 상세하게 이야기해 준다면 나는 너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고이 돌
려 보내 주겠다. 이제 알겠느냐?”
주조룡은 입을 꽉 다문 채 묵묵부답이었다.
“너는 내 말을 믿지 않느냐?”
“…….”
금화부인은 소영을 향하여 말했다.
“소대협은 나의 말을 보증해 주겠소?”
“물론입니다. 이 소영의 이름을 걸고…..”
“좋아요. 소대협이 나를 믿는다면 나에게 한 가지 권리를 주셔야겠소.”
“그밖에 또 무슨 권리가 있습니까?”
“그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요. 소대협이 주조룡에게 내가 이 자리에 모인 군호를 대표해서 주조
룡을 심문하는 것이며 또 내가 주조룡에게 약속한 일을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보장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면 되는 거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조룡을 향해 입을 열었다.
“주이장주, 금화부인이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하든지 그것은 모두 우리를 대표해서 하는 말이오.
그리고 금화부인이 당신에게 한 약속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 이행을 절대 보장하겠소.”
금화부인은 앞가슴까지 내려 덮은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좌우로 헤치며 주조룡에게 시선을 던
졌다.
“주조룡 이젠 내 말을 믿겠느냐?”
“말해 보시오.”
금화부인은 품 속에서 일곱 치 가량 되어 보이는 뱀을 꺼냈다. 대가리에 붉은 벼슬이 달린 괴상
하게 생긴 것이었다.
“이장주, 이 뱀이 보이느냐? 이 뱀은 사독이 강하기가 이를 데 없어 사람이건 짐승이건 한 번
물리기만 하면 황천으로 가게 된다. 한 번 붉은 독기를 쏘여 보겠느냐?”
“그만, 그만! 금화부인께서는 내게 무엇을 이야기하라는 겁니까?”
죽음을 각오한 사람도 일단 죽음이 눈 앞에 닥치면 겁이 나는 법이다. 악독한 주조룡 역시 죽는
것이 두려웠다.
“좋다. 역시 주조룡은 영리한 사람이다.”
소영과 마문비, 그리고 좌중의 군호들에게 차례로 시선을 옮기며 금 화부인은 회심의 미소를 지
었다.
“심대장주는 옛동지를 만나러 갔다는데 그 동지란 어떤 사람이냐?”
“내가 말을 해도 부인께서는 믿지 않을 것이오.”
“여하간 말을 해 보아라.”
“그 사람이 중이라는 것 외에는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소.”
“중이라?”
“그렇소.”
“그 중은 어떠한 무기를 가지고 있느냐?”
“아직 그 중을 만나 본 일이 없소이다. 그런데 심대장주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는 손가락이 하나 없다고 했습니다.”
“손가락이 하나 없다?”
이 말이 떨어지자 소영은 귀가 번쩍 트였다. 삼성곡(三省谷)에서 있었던 옛일이 머리에 떠올랐
다. 스승 장산패가 어검술(馭劍術)을 써 어떤 중의 손가락을 잘랐던 일이 생각났다. 그러면 혹시
그 중이 아닐까?
마문비가 상대해에게 말했다.
“상형께서는 견문이 넓으시니 심목풍과 사이가 가까운 중이 어떤 사람인가 생각 좀 해 보시오.”
상대해는 한동안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손가락이 하나 끊어진 중이 누군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소인이 알기로는 그 대사께선 이 수십 년 동안 강호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조룡의 말을 들은 금화부인은 시선을 그에게서 옮기지 않았다.
“손가락이 하나 없다니 찾아 낼 수 없지 않겠느냐?”
하고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음성을 가다듬고 말하였다.
“심목풍은 이미 무림의 정세가 그에게 불리하여졌음을 알고 각대문파와 그들 문중 안에서 싸울
계략을 세우고 있다는데 그게 사실이냐?”
“그런 일은 의논한 일은 있었으나 아직 확실한 건 아닙니다.”
“그건 어째서 그러냐?”
“손가락이 하나 없는 그 대사와 만난 뒤에야 결정될 것입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묻겠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이니 네가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한
다면 곧 돌려 보내 주겠다.”
“소인, 대략 짐작을 하겠으나 그게 어떤 일입니까?”
“지금 심목풍이 세우고 있는 계획이 무엇인지 말을 하여라.”
“그러나 계략을 세운 당사자 즉 심목풍 이외에는 거기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
습니다.”
주조룡은 이야기의 줄거리에서 교묘하게 빠져 나가 좀처럼 그들 일파의 음모를 실토할 것 같지
않았다.
“모두 다 이야기하라는 것은 아니다. 아는 대로 말하라.”
“그저 다그쳐 말하라고만 하시니 소인 매우 답답합니다.”
“그럼 묻겠다. 심목풍이 각대문파 안에 첩자를 두어 비밀을 탐지해 낸다는 말이 있으며 또 그
첩자들은 모두 높은 지위를 가진 자들이라는데 그들 이름을 알고 있느냐?”
주조룡은 고개를 저었다.
“각대문파 안에 첩자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며 그들의 신분이 어떻고, 이름이 무엇인지는 심목풍
이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네가 모른다니 그게 될 말이냐? 너는 이장주가 아니냐?”
“소인 마음 속으로 짐작은 갑니다만 확실하다고 장담은 못하겠소이다.”
“확실하지 않아도 좋다. 아는 대로 말해 봐라. 짐작이 가는 사람의 이름이 무어냐?”
“그럼 알고 있는 것은 모두 말씀드리겠소이다. 그러면 부인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소인을 돌려
보내 주시렵니까?”
무슨 말이라도 좋다. 거짓말을 한들 제아무리 신통(神通)하다는 금화부인이기로서니 백화산장에
가 보지 않은 이상 속을 것이 아닌가. 어떻게 해서라도 목숨을 부지하여 이곳을 빠져 나가는 게
상책이다. 주조룡의 속셈은 이런 것이었다.
“그야 여부가 있나?”
주조룡은 무슨 대견한 비밀이라도 일러 바치는 듯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소림문파(小林門派)에서 암약하는 첩자들 이름에 법(法)자가 하나 있고, 곤륜문파(崑崙門派)에
잠입한 첩자는 김씨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을 만나 본 일이 있소?”
마문비가 물었다.
“만나는 봤습니다. 허나 그들은 언제나 검은 복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누구인지 잘 모르
겠습니다.”
마문비는 화를 벌컥 냈다.
“그런 말은 하나마나가 아니오. 이름에 ‘법’자가 들어 있는 중은 소림사에도 한 두 사람이 아닌
데 어떻게 그 사람을 가려 낼 수 있단 말이오?”
주조룡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 물음의 대답은 소림사의 장문인 이외에는 아무도 할 사람이 없습니다. 소인 이미 그 중의
이름 가운데 법자가 들어 있다고 밝혔으니 장문인께서 손을 쓰신다면 곧 꼬리가 잡힐 것입니다.”
“흠…..”
말을 마친 주조룡이 무위도장의 얼굴 빛을 살피며 말을 이으려는데 소영이 입을 열었다.
“도장, 이장주의 말이 모두 사실이오?”
“내가 알기로는 모두 사실인 것 같소.”
소영의 시선은 마문비에게 옮겨졌다.
“총타주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문비는 성품이 섬세하고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라 얼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여 소영에게 되물었
다.
“소대협께서는 어떻게 보시는지?”
소영은 강호에 발을 들여 놓은 후 만고풍상을 다 겪은 마문비가 팔이 하나 잘린 뒤부터는 더욱
여러 군호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는 지금까지 언제나 무위도장의 말을 믿어 왔습니다.”
“그렇다면 소대협께서 적절히 처리하시오.”
마문비는 주조룡에 관한 일을 소영에게 맡기려는 눈치였다.
금화부인은 다시 심문하기 시작했다.
“주조룡, 이 말을 들었겠지?”
“들었소.”
“마총타주, 소대협, 무위도장 모두 너의 말을 의심치 않으니 너는 곧 여기서 풀려나게 될 것이
다. 그러니 그 대은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무당문파(武當門派)의 첩자가 누군지 말하는 것이 도
리가 아니겠느냐?”
주조룡은 무위도장을 바라 보았다.
“도장, 소인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귀파문중에 첩자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누군지는 소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동문서답식으로 횡설수설이다.
“나는 당신의 말을 믿겠소. 본 문중에서 어떤 사람이 백화산장에 들어 갔건 그것은 무관한 일이
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왜냐하면 무당파는 이미 당신네 백화산장파에 쫓겨 강호에 유랑하는 처지에 있으며 무예가 출
중한 몇몇 사람은 내가 측근에 데리고 있고 또 삼원관(三元觀)에 남아 있던 본파의 제자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당신네 백화산장파의 손에 죽었으니 말이오. 본파는 후일 반드시 복수할 것이오만
은.”
“그 일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당파의 고명한 사람들이 모두 빠져 나
갔다는 것은 백화산장에서 이미 알고 있습니다.”
주조룡의 얼굴에는 열기가 가시고 냉정한 빛이 흐르기 시작했다. 조금 전 금화부인이 꺼낸 홍관
괴사(紅冠怪蛇)를 보았을 때와는 전연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는 침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
다.
“심대장주께서는 이롭지 않은 일은 결코 하지 않는 분입니다. 그는 이로움이 눈 앞에 있어야만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삼원관에는 단 한 사람의 고수도 들여 보낸 일이 없으며 그곳의
풀잎 하나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알겠다. 이제 남은 것 한 가지만 더 묻겠다. 그것을 대답하면 곧 돌려 보내 주겠다.”
금화부인이 물었다. 주조룡은 수궁하는 눈치로 금화부인을 바라 보았다.
“남은 것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심목풍의 음모는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가 언제 어떻게 싸움을 벌이려는지 아는대
로 말해 보아라.”
“그 대사를 만나기 전에는 석 달 안에 거사할 계획이었습니다. 그 방법은 각파에 침투하고 있는
첩자들과 내응(內應)하며 기독(奇毒)을 뿌리는 것입니다.”
무위도장이 무릎을 세우며 이장주에게 물었다.
“그 기독이란 어떤 것이오?”
“그 독은 한 번 사람이나 짐승의 목으로 들어 가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직사하는 무서운 것입니
다.”
“그 방법은?”
“우물이나 음식물에 섞는 것입니다.”
백화산장파는 기독공법을 쓰려는 것이었다. 주조룡의 말을 듣고 있던 좌중의 군호들은 모두 하
나같이 놀랐다.
주조룡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이 계략은 그 대사와 심대장주가 만나기 전의 것이며, 그분들이 만난 뒤에는 시일과 방
법이 달라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음모가 심목풍과 그 중이 만난 다음 달라진다면 기독을 뿌려 각파문중의 사람들을 파리
목숨 때려 잡듯 하려는 것보다 더 혹독할 게 아니겠는가?
“정말 모르느냐?”
그를 노려 보는 금화부인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네, 모릅니다. 소인이 알고 있는 것은 모두 말씀드렸습니다.”
“또 하나가 남아 있다.”
“무엇이 또 있습니까?”
“이것은 너에게 묻는 것이 아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소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힘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금화부인은 음성을 부드럽게 했다. 지금까지 주조룡을 죄인 다루듯 힐책했으나 지금 와서는 그
를 대하는 정도와 언어가 모두 달라졌다.
“이장주. 나를 데리고 갈 수 있겠소?”
“데리고 간다니, 부인을 말씀입니까?”
“주이장께서는 이미 심대장주의 음모를 폭로하였으니 만약 심목풍이 이것을 안다면 주이장주를
살려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장주가 백화산장에서 소외되면 너무 쓸쓸하지 않겠소? 이와 같은
일이 탄로나면 이장주와 나는 같이 죽음을 당할 것이니 황천에 가서라도 말벗이 될 게 아니겠
소?”
주조룡은 어안이 벙벙했다. 금화부인이 아무리 술수(術數)가 높은 여걸이라 해도 원수와 더불어
원수의 소굴로 들어 가겠다니 될 말인가? 금화부인이 도대체 어떠한 계교를 부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이없는 일이외다. 부인께서는 무엇 때문에 위험을 자초하는 것입니까?”
“내가 백화산장에 들어 간 뒤에 만약 이장주께서 나를 배신하여 심목풍에게 밀고를 한다 해도
그가 당장에 나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오. 그렇게 되면 내가 주이장주를 심문하듯 심목풍도 나를
심문할 것이 아니겠소? 그러면…..”
“부인의 뜻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금화부인은 당노부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와 당노부인의 몸에는 아직 독기(毒氣)가 있어 십여 일 후가 되면 그 독으로 인해 죽게 될지
도 모르오. 나는 아직 할 일을 못 다하여 죽고 싶지 않소. 내 여명을 지탱하려면 몸의 독을 풀 수
있는 해약(解藥)이 있어야 해요. 이장주께서 나의 청을 응낙하신다면 나는 심목풍을 속여 넘길 수
있습니다.”
“지금 가도 됩니까?”
“물론…..”
주조룡이 일어서니 금화부인은 손을 흔들며 좌증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들, 나는 지금 길을 떠날까 합니다. 후일 다시 만날 날이 있지 않겠습니까?”
금화부인이 주조룡을 따라 나서자 소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총타주, 영을 내려 주시오.”
“배를 내어 강을 건너도록 하여라.”
마문비의 말이 떨어지자 검은 장삼을 입은 거구의 사나이가 그를 따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떠난 다음 마문비는 소영에게 딴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왜요?”
“이곳은 이미 주조룡이 알고 갔으니 혹시 백화산장으로 돌아간 주조룡이 심목풍에게 알리면?”
“걱정 없습니다. 설령 그가 심목풍에게 우리의 거점을 알릴지라도 당장에 쳐들어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 아니오?”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심목풍이란 위인은 승산이 없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곳에 우리의 문중의 여러 군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네들에게 대적할 만한 고수
가 없다는 것도 자기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고로 그는 절대 경거망동치는 않을 것이며 주조
룡도 내통(內通)의 의심을 사게함을 두려워할 것이 틀림 없습니다.”
“소대협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되오. 암중이거(暗中移去)를 하지 않아도 된다면 마음을 놓을 수
있소. 요즘 강호에서는 소대협의 사문(死聞)이 나돌고 있으니 웬일이오? 그와 같은 풍문은 백화산
장과 항거하려는 무림 동도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할 것이니 나는 크게 유감스럽게 생각
되오. 이것은 필시 심목풍의 흉계임에 틀림없소.”
“그런 소문이 퍼질 만도 했습니다. 언젠가 그들과의 싸움에서 크게 고전을 한 때가 있었는데 아
마 그들 앞에서 사라진 내가 꼭 죽었으리라 믿었겠지요.”
소영은 당시를 회상하듯 잠시 눈을 감고 무엇인가 생각에 잠기는 듯 했다. 마문비는 소영에게
그와 같은 위험한 고비를 넘긴 일이 있다는 것은 처음 듣는 일이었다.
“허, 그런 일이 있었구려. 내 지금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소.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소”
“네, 그 때가 바로…..”
소영은 무당노파를 만났을 때부터의 이야기를 자세히 하였다. 그의 혈투담을 듣고난 군호들은
실로 경탄을 금치 못했다.
“무림 동도에게는 천만 다행한 일입니다. 소대협께서는 봉흉화길(逢凶化吉)하셨으니.”
좌증의 군호들이 웅성거릴 때 소영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런데 전형과 등이협께서 무사히 돌아오셔야 할 텐데…..”
소영은 그들의 전도를 걱정했을 뿐 등일뢰와 전엽청이 무공 비록을 지니고 있는데 대해서는 아
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군호들이 놀라기 때문이었다.
절름발이 노인 상대해가 소영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문을 열었다.
“소대협. 이런 말씀 드려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만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일이 있는데요.”
“별말씀을… 저에게 물어 보고 싶다는 건 어떤 말씀인지?”
“나는 소대협께서 주조룡을 백화산장으로 되돌려 보낸 일을 납득할 수 없습니다.”
여러 군호들 가운데서 유독 상대해만이 주조룡을 풀어준 데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다. 소영은
좌중을 살피듯이 군호들에게 눈길을 보낸 뒤 자기의 견해를 털어 놓았다.
“여러분들은 물론 그 주조룡이란 자가 심목풍의 그늘 밑에서 갖은 악행을 일삼아 많은 사람들을
괴롭혀 왔고 여러분들 가운데도 화를 입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백화
산장으로 금화부인과 함께 돌려 보냈다는 데에 더욱 불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소영은 상대해에게 시선을 옮기며 다시 말을 이었다.
“주조룡이 비록 백화산장의 이장주라고는 하나 그의 지략이나 무예로 보면 한낱 졸개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극소한 것입니다. 그는 심목풍이란 거목 밑에서 자란 독버
섯과도 같은 자이므로 쓸모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살려 그를 이용하는 것이 더욱 현명한 일
이며, 따라서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금화부인께서동행한 목적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
입니다.”
좌중은 죽은 듯이 조용했다.
잠시 후 무거운 침묵을 깨고 마문비가 입을 열었다.
“소대협, 과연 옳은 말씀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