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 Finger RAW novel - Chapter 158
158. 무용의 처절한 최후(最後)
이 때 이미 어둠이 깃을 벌리기 시작해 절벽 사이의 깊은 계곡은 앞이 안 보이도록 깜깜했다.
소영은 사방울 두리번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한 오 장 정도는 보이는군요.”
소요자는 말했다.
“잘 되었구려, 소대협께서 오 장 정도밖에 보지 못하니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이미 우리들이 보
이지 않을 것이니까요.”
소영이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그것이 도장께서 우리를 구하는 일과 무슨 관계가 있소?”
“있지요. 빈도는 이미 방법을 생각했소.”
소요자는 낮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빈도는 이대도강법(李代挑薑法)을 써서 가짜 소대협을 한 사람 만들어 오룡대진으로 보낼 작정
이오.”
“설혹 나 대신 오룡대진으로 갈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문제는 간단하지 않을 것이오. 지금 이
계곡을 어떻게 빠져 나가고 또 무슨 방법으로 백리빙을 구해 내지요.”
소요자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불로 오룡대진을 태우면…”
“그럼 가짜 소영도 같이 죽인단 말이오?”
“그건 소대협과 관계 없으니 염려 마시오.”
소영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백리빙은?”
“빈도는 이미 지세를 살펴 보았소. 일단 여기에서 불을 지르면 오룡은 불에 타죽을 수밖에 없소.
뿐만 아니라 심목풍의 진각까지도 태울 수 있소. 그리고 불이 일어나면 백리빙을 데리고 빠져 나
을 사람이 이미 준비되어 있소.”
“그 사람이 누구요.”
“그건 빈도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소대협과는 상관 없소이다.”
소영은 약간 불쾌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상관 있다고 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백리빙을 구할 수 있을 것인가 없
을 것인가도 알 수 있잖겠소?”
“내가 그 사람이 누구라고 말해도 당신은 모를 것이오.”
소영은 입을 다물었다.
‘이 소요자를 어떻게 하든지 사로잡아야 할 텐데… 그래야만 안전하게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있
지. 그러나 소요자의 무공이 고강하니 사로잡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사느냐 죽느냐가 달린
일전을 앞에 두고 나는 극히 조심해야겠다.’
소영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소요자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나를 대신하는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소?”
“보여 드리겠소.”
소요자는 가볍게 세 번 손바닥을 두드렸다. 그러자 수의(水衣;일종의 잠수복)를 입은 사람이 물
속에서 불쑥 나타났다.
‘이 사람이 가짜 소영의 행세를 할 모양이구나. 그러나 이거 야단났는데… 적이 불과 두 명뿐이
었는데 또 한 명이 나타났으니…’
소영은 물에 젖은 그 사나이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소요자가 헛기침을 하더니 사나이에게 명령했다.
“수의를 벗어라!”
사나이는 대답을 하더니 수의를 벗기 시작했다.
소요자는 그것을 지켜 보며 소영에게 말했다.
“소대협은 원래 준수하게 생겼기 때문에 홉사한 인물도 찾기 힘들지요. 그래서 빈도는 신체가
비슷한 사람을 뽑았소. 오룡은 지금 매우 정신이 혼란해 있소. 거기다 무거운 수의를 입은 가짜
소대협을 얼른 가 려 내지 못할 것이오.”
소영은 사나이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사나이의 체격은 소영과 비슷했다.
‘소요자는 매우 치밀하구나. 벌써부터 준비하고 있었으니…’
소영은 이런 생각을 하며 소요자에게 말했다.
“물어 볼 말이 있소이다.”
소요자가 소영을 돌아보았다.
“무슨 말이오?”
“소왕장방의 무공비록을 도장께서 손에 넣으면 어떻게 이곳을 빠져 나갈 생각이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니 소대협과는 의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좋소. 묻지 않겠소. 도장께서 좋을 대로 하시오. 이제 우리는 이곳을 건너 갑시다.”
소영이 불쾌한 어조로 말하자 소요자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우리는 지금 서로 적의 입장에 놓여 있으니 내가 지나치게 조심한다고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마
시오.”
소영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도장께서는 그 무공비록을 먼저 달라고 요구하지는 않겠지요?”
“그건… 내가 그 책을 확인해야 되지 않겠소? 그런 뒤에 정정당 당하게 사람과 책을 서로 교환
하는 것이 원칙이지요.”
“의논은 좀 후에 합시다.”
“그건 왜 그렇소?”
“이 물을 완전히 건넌 뒤에 얘기해도 늦지 않소.”
그러자 소요자는 낮은 웃음으로 말했다.
“하하, 소대협께선 수중의 무공을 모르므로 나하고 여기서 다투기 싫다는 말씀이구려.”
이 말에 소영은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교활한 놈이구나. 그건 그렇고… 난생 처음으로 거짓말을 해보려고 했더니 어째 들킬 것 같구
나.’
소영은 일부러 화를 벌컥 내며 입을 열었다.
“도장께서 이 물을 이용해서 나를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그건 무슨 말씀이시오? 내가 소대협에게 비급을 좀 보겠다고 한 것은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
니오.”
“어째서 아니란 말이오?”
“만일 소대협께서 이곳에 오기 전에 그 비급을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면 나는 무엇을 바라고 더
이상 모험을 하겠소?”
이 말은 사실이었다.
‘어쩐다지? 이미 탄로가 난 것이니…’
얼른 말을 못하고 있는데 무용이 차가운 음성으로 말참견을 했다.
“볼 필요 없어요.”
소요자는 무용을 돌아보며 짜증 난 표정을 띠었다.
“당신들은 이미 중독되었으므로 설혹 그 무공비록을 갖는다 해도 배울 시간이 없어요.”
“뭐라고?”
소요자는 깜짝 놀라며 부르짖더니 다그쳐 물었다.
“그게 사실인가?”
“못 믿겠어요?”
“나는 네 할머니가 독을 뿌리는 솜씨가 매우 훌륭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아까부터 네
손을 주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네가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독을 뿌렸
지?”
무용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이 우리 할머니와 왕래했던 때는 아주 옛날의 일이었지요.”
소요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우리가 서로 왕래한 것은 이미 이십 년 전의 일이야. 아마 그 때는 네가 아직 세상에
태어나기 전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뭘 안다고 하세요.”
“그건 무슨 소리지?”
“우리 할머니는 그 동안 은거생활을 하면서 새로이 독약 뿌리는 방법을 연구해 냈어요.”
“무슨 방법인지 몰라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격물전독(隔物傳毒), 즉 칼이나 나무나 옷자락 등 어떤 것이든 이용해서 독을 전할 수 있는 방
법이에요.”
“그러나 우리는 서로 공격하지 않았는데…”
무용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미련하군요. 당신은 지금 어디에 서 있지요?”
“부목 위에 서 있지.”
“그거예요. 많은 통나무를 이용해서 당신에게 독을 전했어요.”
“정말이냐?”
“믿지 못하겠거든 운기를 해서 시험해 보세요.”
“내 몸에 독이 없다고 믿는 것보다는 있다고 믿는 것이 좋을 테니 한 번 시험해 보겠다.”
말하더니 눈을 감고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이것을 본 무용은 소영에게 아무도 모르게 눈짓을 하
더니 손가락을 가볍게 퉁겼다.
무용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소요자가 운기조식을 하느라고 눈을 감는 틈을 잡으려고 일
부러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소요자는 몸에 아무 이상도 없다는 것을 알자 입가에 비웃음을 띠며 말했다.
“깜찍한 계집애, 나를 속이려고?”
무용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말했다.
“내 말은 사실이에요. 한 번 더 해보세요.”
소요자는 반신반의했으나 다시 운기를 시험했다. 그러자 이상한 냄새가 코로 스며들어 신경 저
밑바닥에 가벼운 통증이 일어났다.
‘속았구나!’
소요자는 무당노파의 독 뿌리는 솜씨가 워낙 비상했기 때문에 무용의 말을 믿었다. 그녀가 이런
죄로 속일 줄은 미처 몰랐었던 것이다.
몸에 이상을 느낀 소요자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못된 계집애!”
고함과 함께 왼손을 뻗쳐 무용에게 일장을 가했다.
소영은 무용이 눈짓을 할 때부터 이미 그녀가 무엇을 하리라는 것을 대강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소요자가 무용에게 공격하리라는 것도 예상하고 있었다.
소요자가 장풍으로 무용을 향해 때리자 소영은 몸을 약간 틀면서 소요자의 장풍을 옆으로 쳐냈
다. 그러자 무용이 소영에게 주의를 주었다.
“소대협! 소요자를 상풍(上風;바람이 불어 오는 방향)으로 가지 못하게 해요!”
소요자에게 독을 뿌릴 테니 바람받이로 몰라는 말이었다. 이 말을 들은 소요자는 호흡을 중지하
며 상풍쪽으로 움직였다. 그는 상풍쪽으로 움직이면서 공격을 퍼부어 소영을 하풍쪽으로 몰아넣
으려 고 했다.
소요자가 맹렬한 공격을 하자 소영은 번개처럼 몸을 날려 그의 공격을 피하며 오른손으로 반격
을 가했다.
‘이크!’
소요자는 강한 장풍을 미처 막아내지 못하고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 때 푸른 옷의 사나이와 검은 옷의 사나이가 소영을 향해 협공했다.
‘어물거리다간 물에 빠지겠다.’
소영은 오른손을 가볍게 움직이며 탄지신공으로 검은 옷의 사나이를 공격했다.
탄지신공은 수라지력보다 훨씬 강하며 상대방이 모르는 사이에 강한 지력으로 명중시킬 수 있는
데에 그 장점이 있는 것이다.
소영을 향해 장풍을 날리며 접근하던 검은 옷의 사나이는 갑자기 오른쪽 가슴에 심한 충격을 받
았다.
“으윽!”
가벼운 비명과 함께 그는 물 속으로 첨벙 빠져 버렸다. 이것을 본 소요자는,
‘저놈은 육지에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 물로 끌어들여 잡을 수밖에 없지.’
생각하며 물로 뛰어 들었다.
‘흥, 네 놈이 나를 물에 빠뜨려서 굴복시키려고 하는구나.’
알아차리고 재빨리 사나이의 혈도를 찍었다.
사나이는 소영에게 혈도를 찍히면서도 소영을 후려쳤다. 그 장풍은 매우 강했다.
‘이 놈의 장력은 소요자보다 못하지 않구나.’
소영이 움찔하는 사이에 그 사나이는 재빨리 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이것을 본 소영은 다시 놀랐다.
‘저놈이 사용하는 무공이 무엇인지 모르겠구나. 내가 혈도를 찍었는데도 움직이니… 팔다리에
신경이 없단 말인가?’
소영은 푸른 옷의 사나이의 왼팔을 잡고 혈도를 누를 때 부목이 뒤집힐까봐 강하게 잡아당길 수
가 없었다. 그래서 가볍게 잡아당기며 혈도를 찍었던 것이다.
소영은 그 사나이가 물로 뛰어드는 것을 보고 흠칫 놀랐으나 그 사나이가 물 속에서 몸부림치는
것을 보고는,
‘흥, 그러면 그렇지. 네가 무감각일 수야 없지. 다급하니깐 우선 물로 뛰어든 것이구나.’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이 때 배가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뒤집으려고 하는구나.’
소영은 천근추(千斤墜)의 신법으로 간신히 부목을 고정시킨 후 무용을 돌아보며 말했다.
“용낭자, 물에다 독을 뿌리시오!”
그는 물 속에 있는 사람들이 들으라고 큰소리로 말했다.
무용은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그녀는 물 속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소요도장! 당신네 세 사람은 이미 중독되었어요 우리가 물로 뛰어 내리면 당신네들은 죽는 길
밖에 없어요.”
소요자가 머리를 물 위로 불쑥 내밀며 무용에게 외쳤다.
“우리가 너를 생포하면 해독약을 구할 수 있다!”
이 말을 들은 무용은 빙긋 웃으며 응수했다.
“어디 다음대로 되나 해봐요. 소대협, 우리는 저쪽 육지로 뛰어 내려요.”
육지와 거리는 눈 짐작으로 불과 일 장밖에 안 되었다.
‘일 장쯤 뛰어 내리기는 쉬운 일이다. 할 수 없이 져야겠다.’
소요자는 이렇게 생각하며 급히 무용에게 말했다.
“나하고 담판하지 않겠느냐?”
무용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담판이요? 글쎄… 하고 싶지만…”
“서로 공평하게 하겠다면 나는 응하겠다.”
“좋아요. 그럼 당신은 물 속에서 이 부목을 저쪽 육지까지 밀어주세요. 그럼 내가 해독약 세 알
을 드릴게요.”
“내가 그걸 어떻게 믿지?”
무용은 약간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의 형세로 보아 당신은 믿기 싫어도 믿어야 될 텐데요?”
소요자는 눈살을 찌푸린 채 무용을 쏘아 보더니,
“좋다. 그 조건을 내가 수락할 테니 대신 보증인을 세워라.”
“보증인이요? 여기서 무슨 보증인을 세운단 말이에요?”
“그 곁에 있는 사람이면 된다.”
“소대협 말이에요?”
“그렇지, 소대협을 보증인으로 세우면 내가 응낙할 수 있지.”
무용은 소영을 돌아보고 생긋 웃으며 물었다.
“소대협께서 이 용아의 보증인이 되어 주시겠어요?”
소영은 무뚝뚝한 어조로 소요자에게 말했다.
“소요자! 당신이 더 이상 간계를 부리지 않고 평안하게 우리를 바래다 주겠다면 내가 보증하겠
소.”
“좋소. 소대협이 보증해 준다면 나는 믿을 수 있으니까.”
소요자의 머리가 물 속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부목이 건너편 둑을 향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무용의 꾀를 빌어 무사히 물을 건너게 되는구나.’
두 사람은 몸을 날려 육지에 훌쩍 내렸다.
뒤에서 소요자가 물방울을 닦으며 나타났다. 그는 소영과 무용의 앞으로 걸어오며 입을 열었다.
“소대협은 약속을 어기지 않겠지요.”
“그럴 리가 있겠소, 소영은 무용을 돌아보며 말했다.
“용낭자, 해독악을 소요도장에게 드리시오.”
무용은 품속에서 약갑을 꺼내 세 알의 환약을 손바닥에 쏟았다. 이어 그것을 소요자에게 던져
주며 차갑게 말했다.
“만일 나의 할머니가 당신의 유혹을 받고 강호에 나오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고 있었
을 거예요 나는 우선은 가슴 속에 이 빚을 넣어 두겠어요.”
이 말을 들은 소요자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그는 무용의 시선을 얼른 피하며 소영에게 말을
걸었다.
“소대협의 무공이 극도로 진전되어 빈도는 계획이 모두 어긋나게 되었군요.”
“도장께서는 여전히 이 소영과 담판할 생각이시오?”
소요자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저었다.
“빈도는 지금 아무런 힘도 없기 때문에 담판이 이루어질 수 없지요.”
소요자는 몸을 돌리며 물에다 대고 소리쳤다.
“빨리들 올라와라.”
그러자 왼팔을 축 늘어뜨린 푸른 옷의 사나이가 검은 옷의 사나이와 함께 걸어 나왔다.
소요자는 그들에게 약을 나누어 주었다.
“먹어라!”
그러나 자신은 그대로 한 알의 약을 쥐고 있었다. 이것을 본 소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소요도장, 당신은 약을 의심하고 계신 모양인데, 그렇다면 이 보증인은 무엇 때문에 세우셨소.”
그제서야 소요자는 약을 입에다 털어 넣었다.
“이미 정세가 이렇게 되었으니 두 분께서 독을 더 뿌릴 필요도 없겠지요.”
소영은 다시 한 번 피식 웃으며 푸른 옷의 사나이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는 사나이를 훑어보며
소요자에게 물었다.
“도장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해도 되겠소?”
“무엇이오?”
“이 분은 어떤 무공을 닦았는지요.”
소요자는 소영이 바라보고 있는 사나이를 힐끗 쳐다보더니 대답했다.
“아주 드문 무공이지요. 강시공(疆屍功)이라고 하는…”
“예, 그랬었군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우리는 바로 오룡대진으로 가야 할 테니 여기서 헤어집시다.”
소요자는 잠깐 이마에 주름살을 잡으며 생각하는 표정이더니 공손하게 말했다.
“오룡대진은 매우 흉악한 것이니 몸조심하시오.”
“이미 알고 있으니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그럼 이만 가겠소이다.”
소요자는 몸을 날려 사라졌다. 뒤를 이어 두 사람도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소영은 그 모습을 보다가 무용을 돌아보았다. 무용은 별이 총총한 하늘을 바라보며 무엇인가 하
염없는 생각에 젖어 있었다.
“용낭자!”
소영이 부르자 무용은 얼굴을 소영에게 돌리며 대답했다.
“예, 왜 그러세요?”
“백화산장에서 가장 무서운 인물이 오룡대진이라는 것을 아시고 계시오?”
“오룡대진은 모두 몇 명이에요?”
“다섯 사람이오.”
무용은 눈꼬리를 초생달처럼 가늘게 하고 웃으며 말했다.
“다섯 사람이라면 무엇이 그리 무서워요?”
“모르는 소리… 오룡대진의 변화에 대해서는 나도 모르지만 심목 풍이 오룡대진을 가장 중시하
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오.”
“오룡을 만나 본 적이 있어요?”
“오룡 전부를 보지는 못했지만 그 중 한 사람과 격투했던 적은 있었소.”
“그래요. 어떻게 생겼어요? 왜 사람보고 용이라고 해요?”
“그 사람들이 입은 옷은 괴상하게 생겨 번쩍거리며 창이나 칼로도 뚫을 수 없다오.”
“그래요?”
“그뿐만 아니라 심목풍이 마약을 사용해서 그들의 용기를 초인적으로 만든 모양이오. 도무지 죽
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오.”
“그렇군요.”
소영은 하나의 조약돌을 발끝으로 툭 찼다.
“용낭자는 그 오룡들을 대할 때 독만 뿌리면 되오.”
“알겠어요.”
소영은 주머니에서 단검을 꺼내 들며 말했다.
“갑시다. 용낭자는 무거운 옷을 입었기 때문에 움직이기가 매우 둔한 것 같구려.”
“관심을 가져 주어 고맙지만… 괜찮아요.”
“이번 일은 매우 위험하오. 나는 낭자를 미처 돌봐 줄 틈이 없을 것 같으니 조심해야 됩니다.”
“예 알았어요.”
“그럼…”
소영은 성큼성큼 걸음을 떼어 놓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가며 무용은 속으로 생각했다.
‘소영은 평소에 항상 호기롭기만 하더니 오늘따라 이토록 세심하게 주의하는 것을 보니, 오룡은
정말 무서운 상대인가 보다. 정신을 똑바 로 차려야겠다.’
두 사람이 십 장쯤 걸어 갔을 때였다. 갑자기 그들의 앞쪽 두 군데에서 불빛이 번쩍하더니 하나
의 검은 그림자가 불쑥 나타났다.
“이쪽으로 오시는 분이 소영이오?”
소영은 진기를 모아 가슴을 보호하며 대답했다.
“그렇소만… 당신은 누구요?”
그러자 바위 위의 검은 그림자가 대답했다.
“나는 이름없는 소졸이므로 밝혀도 알지 못할 것이오.”
말을 마치자 그 검은 그림자는 바위 뒤로 사라졌다. 그러자 사방에서 십여 개의 횃불이 타오르
며 계곡을 환하게 밝혔다.
‘흠, 내가 이들과 대결할 필요는 없지. 진세가 발동하기 전에 먼저 뚫고 나가는 것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자 소영은 무용에게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용낭자, 정신 바짝 차리고 이곳을 어서 뚫고 나갑시다.”
무용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영이 막 뛰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번쩍이는 옷을 입은 두
명의 괴한이 나타나 소영의 앞을 막았다.
소영은 한 걸음 떼어 놓던 발을 멈추면서 무용에게 말했다.
“용낭자! 뒤로 조금만 물러 서시오.”
무용은 물러서는 대신 두 사나이를 노려보았다. 그들은 번쩍이는 비늘옷으로 두 눈만 빼놓고 전
신을 감싸고 있었다. 그들은 손톱을 길게 길렀고 그곳에는 핏빛인 빨간 물이 들어 있었다.
‘저 손톱에는 독이 있겠지? 정말 무서운 괴물이다. 만일 여러 얘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나는 놀
라서 까무라쳤을 거야.’
두 괴한을 노려보며 이런 생각을 하던 무용은 갑자기 뒤에 있던 손을 앞으로 뻗치며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하얀 분말이 괴한들을 향해 소리 없이 날아갔다.
독가루가 날아 오는 것을 발견한 왼쪽의 괴한이 오른손을 들어 번개 같이 내둘렀다. 그러자 강
렬한 장풍이 무용을 향해 곧장 몰아 닥쳤다.
장풍을 미처 피하지 못한 무용은 몸이 한 바퀴 팽그르르 돌았다. 그러나 빨리 균형을 잡아 설
수 있었다. 소영은 급히 뒤로 다섯 자 가량 물러서며 무용에게 말했다.
“낭자, 뒤로 물러 서시오. 저들은 두꺼운 경장을 했기 때문에 독을 무서워하지 않는 모양이오.”
이 때 오른쪽의 괴한이 소영에게 탄려들었다. 소영은 허리를 굽히며 여덟 자 정도 옆으로 피해
냈다.
왼쪽 괴인이 다시 무용에게로 덤벼들었다. 무용은 당황하여 옆으로 급히 피했다. 그러나 괴한의
공세는 무척 빨랐다. 그의 손톱에 무용의 옷깃이 걸리자, 찌익!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옷이 찢어
졌다. 아슬아슬하게 옷만 찢겼지 피부는 긁히지 않았다.
무용의 옷이 찢겨지고 흰 살결이 드러나자 그녀는 혼비백산했다. 이 때 소영을 공격하던 괴한이
다시 그녀에게로 덤벼들었다.
“낭자! 조심하시오!”
소영은 크게 외치고 급히 오른손을 뻗으며 탄지신공을 발출했다. 급했기 때문에 괴한에게 쫓아
갈 시간이 없었다.
강한 탄지신공을 오른팔에 맞은 괴한은 몸을 부르르 떨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 틈을 이용
해 무용은 소영의 곁으로 달려왔다.
탄지신공은 괴한을 부상시키지 못했다.
괴한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소영에게로 덤벼들었다.
소영은 재빨리 공중으로 뛰어 오르며 왼손으로 강한 장풍을 날렸다.
괴한은 정면으로 소영의 장풍을 받아 냈으나 견디지 못하고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무서운 적수다.’
소영은 괴한들의 예리한 손톱을 막아 내기 위해 교피장갑을 꺼내 끼었다. 이 때 괴한이 다시 소
영에게 장풍을 날리며 덤벼들었다.
‘음, 네놈들의 내공이 얼마나 센지 어디 시험해 보자.’
소영은 몸을 피하지 않고 칠성의 공력으로 괴한의 장풍을 맞받았다.
두 사람의 장력이 맞부딪치자,
펑!
폭음이 일어나며 괴한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소영도 어깨에 심한 진동을 느꼈다.
‘이들과 무작정 싸우다가는 시간만 끌 뿐 이길 가망성이 없겠다. 어떤 묘법을 써서 이들을 물리
칠 수밖에 없겠는데…’
소영이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갑자기 바람을 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좌우 양쪽에 세
명의 괴한이 또 나타났다.
‘드디어 오룡이 모두 출현했구나.’
소영은 다섯 명의 괴한을 노려보며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옷이 찢길 때부터 피한에게 큰 두려움을 느끼고 있던 무용은 또 세 명의 괴한이 나타나자 더욱
겁이 났다.
“또 세 명이 나타났어요.”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소영에게 속삭였다. 소영은 오룡을 노려보며 말했다.
“모두 다섯 명뿐이니까 더 나타날 놈은 없소.”
소영은 음성을 월씬 낮추며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에겐 목숨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오. 옷매무새를 잘 정리하고 두려움을 잊어 버
려요.”
무용은 재빨리 찢어진 옷자락을 잡아맸다. 그러나 피부를 모두 가릴 수는 없었다.
‘내가 무용을 데리고 와서 제대로 보호하지도 못하고 이토록 가련한 모습으로 만들다니…’
소영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무용에게 말했다.
“용낭자, 낭자를 이곳까지 데려온 것이 잘못이었소.”
무용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제 걱정은 하지 말고 적이나 상대하세요, 난 자신을 지킬 수 있어요.”
무용은 자살하려던 마당에서 소영에게 구원을 받은 후 새삼스럽게 세상이 즐거운 것으로 느껴졌
다.
‘이분이 날 구해 주셨다. 난 결코 불행하지 않다. 죽을 필요가 없어 행복하게 즐겁게 살 테야.’
그녀는 소영에게로 왈칵 기우는 마음을 가슴 속에 벅차게 끌어 안으며, 언제 죽으려고 했더냐
하는 듯 평화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옷이 찢기고 피부가 드러나자 무용은 두려움에 앞서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귀밑이 확확
달아 오르며 가슴은 두 방망이질을 하고 있었다.
소영은 무용이 두려움과 수치에 어쩔 줄 모르는 것을 보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용낭자, 오룡도 사람들임엔 틀림 없소. 다만 몸에 이상한 비늘옷을 입었기 때문에 피물처럼 보
일 뿐이오. 납자가 비호대진을 돌파할 때의 그 용기를 다시 살린다면 이 오룡대진도 별것 아닐
것이오.”
이 몇 마디는 무용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그녀는 얼굴을 활짝 펴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사람이라면 내가 두려워할 것이 뭐 있어요?”
무용은 양 손에다 독침 하나씩을 꺼내 들었다. 마음이 다소 안정된 듯한 무용의 태도를 본 소영
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 때 다섯 명의 괴한은 두 사람을 포위한 채 서서히 접근해 오고 있었다. 소영은 그들을 훑어
보며 날카롭게 외쳤다.
“여러분은 그 두꺼운 비늘옷만 믿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기 이 보도는 철을 베고 바위를 가르는
위력을 지니고 있소. 여러분은 미리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소영은 말을 하면서 다섯 사람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그들은 소영의 말을 듣자 접근하던 걸
음을 중지했다.
‘흠, 이 단검이 보도라는 것을 알아 보는 저들의 눈은 보통이 아니구나.’
소영은 가벼운 두려움을 느꼈으나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여러분은 이 보검의 위력을 한 번 보시겠소.”
말과 동시에 앞을 향해 무섭게 돌진했다.
‘아무래도 이번 싸움은 고전을 면할 수 없겠구나. 얼른 결판을 내는 것이 유리하겠다.’
이렇게 생각한 소영은 먼저 공격을 시도한 것이다.
소영이 공격하자 한 괴한이 정면으로 소영에게 덤벼들었다. 그와 동시에 좌우 양쪽에서도 협공
해 들어왔다. 여섯 개의 빨간 손이 각각 다른 방향에서 소영을 찍으려고 덤벼들었다.
소영은 재빨리 발을 구르며 공중으로 뛰어 올라 세 괴한의 공격을 교묘하게 피해 냈다. 공중으
로 솟구쳤던 몸을 단전의 힘을 이용해 급강하 하며 한 명의 괴한을 향해 단검을 휘둘러갔다.
“윽!”
괴한은 짧은 비명과 함께 뒤로 물러섰다. 손가락 하나가 소영의 단검에 잘려 나간 것이다.
일순간 싸움은 정지되었다. 일장 정도의 거리에서 서로 대치하여 공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숨막히는 긴장이 흐르고 있을 때 갑자기,
“아악!”
고막을 찢는 듯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소영은 흠칫 놀라며 비명이 들린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
소영은 깜짝 놀랐다. 무용이 한 명의 괴한에게 붙들려 있었다. 괴한의 손톱에 긁힌 무용은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이놈!”
화가 치밀은 소영은 땅이 흔들릴 정도로 고함을 치며 몸을 솟구쳤다.
그는 괴한에게 덤벼들어 어검술(馭劍術)을 전개했다.
이 어검술은 장산패가 소영에게 전수해 준 검법 중에서도 가장 으뜸가는 검법이었다. 워낙 높은
경지의 내력이 필요한 검법이라 평소 소영은 한 번도 효과를 보지 못했던 검법이었다.
지금 소영은 자신도 모를 사이에 어검술을 전개했던 것이다. 무용을 구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무
의식중에 전개한 검법이 어검술이었다.
소영이 뛰어 오르자 한 괴한은 소영의 등에서 달려들며 공격하고 무용을 잡고 있는 괴한도 정면
에서 공격할 자세를 취했다.
소영은 뒤에서의 공격을 느끼자 정면을 찌르던 단검을 돌려 뒤를 찌르는 것과 동시에 몸을 밑으
로 끌어 내렸다. 검광이 공중에 무지개를 그린 순간,
“으아악!”
처절한 비명이 밤공기를 가르며 뒤에서 공격하던 괴한의 몸이 풀썩 떨어졌다. 소영의 단검은 괴
한의 비늘옷을 뚫고 심장 깊숙이까지 파고들었던 것이다.
한 명의 괴한이 시체로 변하자 나머지 네 명은 못박힌 듯 우뚝 서고 말았다.
이 때 무용은 아직도 괴한의 손에 붙들려 있었다. 그녀는 통증을 참으려고 이를 악물며 여전히
양 손에 쥔 독침은 놓치지 않고 있었다.
네 명의 괴한이 일순간 넋을 잃은 듯 멍하니 서 있자 무용은 이 틈을 이용해서 괴한을 떼밀며
뛰쳐 나왔다. 무용은 괴한의 손톱에 왼손이 확 잡히는 순간,
‘이젠 죽었구나!’
하는 절망을 느꼈으나 본능적인 생명욕에 의해 마구 몸부림을 쳤었다. 그러나 괴한의 힘은 완강
했다. 날카로운 손톱을 그녀의 손목 근육에 박은 채 놓아 주지 않았다.
괴한의 손에서 벗어난 무용은 얼른 자신의 손목을 보았다. 몸부림치느라 괴한의 손톱에 처참하
게 찢긴 손목은 허연 뼈마디가 드러나 보였다.
‘이제 난 죽었구나! 도저히 살 가망이 없어.’
무용이 입술을 깨물고 있는데 무용을 놓친 괴한이 쫓아 왔다. 그녀는 이미 죽을 각오를 했기 때
문에,
“소대협! 짧은 시간이었지만 용아는 몹시 즐거웠어요. 인연이 있으면 저승에서 만나요!”
이 때였다. 날카롭고 긴 부르짖음이 밤공기를 가르며 들려왔다.
피맺힌 외침과 동시에 오른손에 쥐고 있던 독침을 괴한의 눈을 향해 힘껏 던졌다.
괴한은 무용의 이런 반격을 미처 예상하지도 못했고 거리가 매우 가까웠기 때문에 피할 겨를이
없었다.
“으악!”
비명을 지르며 우뚝 멈춰서더니,
“이 계집애야!”
이를 뿌드득 갈며 무용을 두 손으로 잡아 챘다. 동시에 두 손에 힘을 주어 무용을 두 쪽으로 찢
더니 이 장 밖으로 냅다 집어 던졌다.
무용이 괴한의 손에서 벗어났다가 독침을 던지고, 사지가 찢겨 내동댕이쳐진 것은 지극히 짧은
순간의 일이었다. 소영이 그녀를 구해 주려고 했을 때는 이미 시간이 늦어 있었다.
“용낭자!”
눈에 불이 번쩍이는 것을 느끼며 소영은 괴한에게 성난 표범처럼 덤벼들었다. 이 때 독침을 맞
은 괴한은 고통을 못 이겨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소영이 이를 갈며 단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도 괴한은 정신이 혼미해지고 눈앞이 가물거려 미
처 피해낼 여유가 없었다.
동료가 독침에 맞고 또 소영의 단검에 찔릴 위기에 직면하자 두 명의 괴한이 동시에 소영의 뒤
에서 덤벼들었다.
그러나 이미 소영의 단검은 독침을 맞은 괴한의 왼팔을 쳐서 잘라 버린 뒤였다. 뒤에서 공격을
가해 오자 소영은 재빨리 몸을 옆으로 돌리며 오른발로 부상당한 괴한의 궁등이를 힘껏 걷어 찼
다.
소영에게 궁등이를 차인 괴한은 이미 피아간을 구분할 능력이 없었다. 앞으로 뛰어 나가며 전신
의 힘을 오른손에 끌어 모아 힘껏 앞으로 내뻗었다.
소영만 보고 달려들며 공격하던 한 괴한은 동료의 강한 장풍을 피할 겨를이 없었다.
“흑!”
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땅에 벌렁 나자빠졌다.
소영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민첩하게 몸을 날려 쓰러진 괴한의 등을 단검으로 찔렀다.
동시에 정신을 못 차리고 비틀거리는 괴한의 옆구리를 발로 힘껏 내찼다.
전세는 역전되었다. 두 명의 괴한이 죽고 한 명이 부상당하니 두 명만이 남게 되었다.
오룡진이 쑥밭으로 변하자 소영은 여세를 몰아 나머지 두 명의 괴한을 향해 덤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