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 Finger RAW novel - Chapter 168
168. 영웅(英雄) 대 효웅(梟雄)
우문한도는 그 노인이 소영이라고 생각하였지만 확실치는 않았다.
그러나 청의소년의 지네가 너무나 악독한 것이기에 그가 어떻게 피해 낼는지가 걱정이었다.
‘아, 저 노인도 지네에게…’
우문한도는 눈을 감아 버렸다.
이 때 군호들 틈에서 경탄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문한도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떴다.
황의노인은 별로 당황하지도 않고 손을 뻗어 자색의 지네를 받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심목풍에
게 던졌다.
청의소년과 심목풍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저 지네를 잡다니…’
심목풍은 비록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지만 황의노인처럼 독지네를 잡지는 못하였다. 그는
칠성의 공력을 모아 날아오는 지네에게 장풍을 날려 중간에서 떨어뜨렸다.
“실례했소이다. 귀하도 독을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는 고수임을 미처 몰라 뵈었소.”
청의소년은 오른손을 쭉 뻗어 황의노인의 손목을 짚어 갔다.
이 일초는 매우 거세고 빠르기가 번개 같았다.
황의노인은 다시 장승처럼 움직일 줄 몰랐다.
그는 청의소년의 손이 막 닿으려는 순간에야 손을 슬쩍 밑으로 내렸다. 그리고는 짚고 있던 죽
장으로 청의소년의 관절 사이를 찔렀다.
임기응변하는 평탄한 수법 가운데, 이것은 아무도 예기치 못했다.
너무나 뜻밖의 역습이었고 거리가 가까와 상대는 미처 피하지를 못하였다.
“앗!”
청의소년은 가벼운 비명과 함께 황의노인의 죽장에 손목을 맞고 말았다. 헌데 이상한 일이었다.
일개 가느다란 죽장으로 그다지 세차게 뻗어낸 것 같지도 않았는데 오른팔이 떨어진 듯이 몸부
림쳤다.
청의소년은 고통을 참느라고 입술을 깨물었으나 오른팔이 점차 마비되었다.
청의소년은 황급히 뒤로 일장이나 물러났다. 그러나 황의노인은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를
않았다.
청의소년의 오른팔은 힘없이 축 처졌다. 안색이 창백했다.
이 모양을 보고만 있던 심목풍은 싸늘한 표정으로 천천히 황의노인에게 다가갔다.
그는 황의노인의 한 발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귀하의 존함은 어찌 되시오?”
황의노인은 대답은 않고 두 줄기 싸늘한 눈빛을 심목풍에게 고정시켰다.
심목풍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귀하는 강호에 견식이 부족한 것 같소이다.”
그제서야 황의노인의 입이 열렸다.
“그렇소.”
그는 한 마디라도 더 할까 두려운지 짤막하게 대답했다.
심목풍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이놈은 정체를 숨기는구나.’
“귀하께서는 강호에 나타나지 않으셨다면 소생과도 아무런 원한 관계가 없을 것인데 어찌 우리
의 앞길을 막으시오.”
“소문에 듣기로 그대는 악행을 밥 먹듯 한다더니 그 말이 틀리지 않군.”
그의 말소리는 괴상한 느낌을 주었다.
마치 비파를 한 줄 한 줄 튕기는 것 같았다.
“그럼 귀하께서는 이 일에 간섭하시겠다는 것이오!”
황의노인은 대답 대신 냉소를 터뜨렸다.
“흥!”
심목풍은 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귀하의 성함을 말해 줄 수 있겠소?”
“안 되오.”
이 때 심목풍이 오른손을 휘둘러 일장을 뻗어냈다.
황의노인도 따라서 맞받아쳤다.
펑!
두 고수가 뻗은 장풍이 충돌하는 소리는 우뢰 같았다.
주위는 온통 싸늘한 바람으로 자욱한 먼지가 일었다. 그 진동으로 거대한 체구의 심목풍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뒤로 몇 발 물러섰다.
황의노인도 뒤로 두 발이나 물러섰다.
이번 공격에 있어서 두 사람은 모두 내력을 사용했다.
심목풍은 냉랭한 웃음을 지었다.
“귀하가 어째서 건방진가 했더니 보통 무공을 지닌 것이 아니구려. 다시 내 공격을 받아 보시
오.”
그리고는 오른손을 번쩍 쳐들고 거대한 몸을 덮쳐 왔다.
그의 손바닥에서는 날카로운 장력이 뻗쳐졌는데 얼마나 센 힘이었는지 영당 내의 휘장들까지도
흔들거렸다.
황의노인은 이에 지지 않고 왼손으로 일장을 날렸다.
펑!
다시 두 사람의 장풍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충돌했다.
두 사람은 계속 삼 장을 정면으로 나누었다.
구경하고 있던 군호들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오! 저 무서운 장력을 피하지도 않고 맞서다니!”
“야! 심목풍도 힘이 달리는구나.”
“저 황의노인은 어떤 인물이기에 저렇게 무공이 높은가?”
심목풍은 삼장을 공격해 낸 후 급히 손을 거두었다.
“귀하께서 본인의 삼장을 받아 내셨으니 그 고명을 알겠소이다.”
“흥! 나도 답례를 하지.”
황의노인이 짧게 일갈하고는 죽장을 거세게 휘둘렀다.
심목풍은 날쌔게 옆으로 피하면서 삼장을 피하기만 하였다.
그는 죽장 공세를 피해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는 소영이로군. 그대는 죽지 않았지? 안 그런가?”
황의노인은 부인도 시인도 않고 침묵을 지켰다.
그는 대답 대신 죽장을 다시 번개같이 휘둘렀다.
심목풍은 피하지도 않고 냉소와 함께 정면으로 왼손을 뻗쳤다.
심목풍의 이와 같은 방어는 예상 밖의 일이었다.
황의노인의 죽장과 심목풍의 손목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퍽!”
죽장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가닥가닥 쪼개졌다.
장내의 군호들은 이구동성으로 경탄을 내질렀다.
“심목풍의 무공은 이미 신의 경지에 가까와 있어 몸이 강철과 같구나.”
심목풍은 조금도 고통의 빛이 없었으며 오히려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황의노인도 별로 놀라는
기색없이 죽장을 거두었다가 다시 상대의 가슴을 찔러갔다.
마치 긴 창으로 치르는 형상과 같았다.
그러나 심목풍은 그 자리에서 오른손을 내리쳐 죽장을 막아 냈다.
“딱!”
이번에는 분명히 대나무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였다.
장내의 모든 사람들은 또다시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장내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쇠다! 심목풍이 수중에 쇠를 숨기고 있다.”
우문한도는 군호들의 놀람에 호응하여 함께 소리쳤다.
“황의노인! 조심하시오. 상대는 양 손목에 쇠를 붙이고 있소이다.”
이제는 군호들의 경악이 사라지고 한숨이 새어 나왔다.
무림의 많은 고수들이 손목에 팔찌 모양의 강철을 끼고 다녔다.
심목풍은 일장을 막은 후 거대한 신체를 질풍같이 날렸다.
두 사람의 거리는 너무 가까왔기 때문에 죽장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황의노인은 왼손으로 일 초를 내어 상대에게 맞섰다.
육박해 들어가던 심목풍은 돌연 걸음을 멈추고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섰다.
황의노인의 손에 조그만 단검이 쥐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목풍은 냉소를 터뜨렸다.
“흐흐… 역시 너였구나.”
황의노인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상대가 말을 하지 않으니 심목풍은 차츰 불안한 마음이 생겼다.
‘정말일까? 아닐 게다. 그는 불에 타 죽었는데… 그러나 저 단검을 보면 소영이 틀림없고…’
심목풍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기 위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소영은 영웅다운 인물인지라 감히 이름을 바꾸지 않소. 그런데 귀하는 진실을 밝히시지 않으니
분명 소영이 아닌 것 같구려.”
황의노인은 단검을 움켜 쥔 채 눈빛만 빛내고 있었다.
그의 입은 천 근에 눌려 있는 듯 움직일 줄을 몰랐다.
황의노인의 이런 표정은 심목풍에게 불안한 마음을 주었을 뿐 아니라 구경하는 사람들도 영문을
몰랐다.
심목풍은 상대의 확실한 정체를 모르고 있었지만 그가 단검을 쥐고 있는 자세가 더욱 두려웠다.
그 자세는 곧 상승 검법의 맨 처음 자세였다.
‘저놈이 상승 무공으로…’
심목풍은 더 공격할 생각을 않고 청의소년과 금화부인에게 소리쳤다.
“자, 빨리 갑시다.”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거대한 몸을 공중으로 솟구쳐 천막의 지붕을 뚫고 밖으로 사라졌다.
금화부인도 곧 그의 뒤를 따라 찢어진 천막 밖으로 나갔다.
청의소년은 운기를 조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보다 행동이 느렸다. 그는 심목풍이 몸을 솟구
쳐 천막 밖으로 나갔을 때서야 번쩍 정신을 차렸다.
그는 상처를 살필 겨를도 없이 금화부인의 뒤를 따라 몸을 솟구쳤다.
“안 된다. 너는 남거라.”
황의노인은 그보다 먼저 몸을 솟구쳤다.
두 줄기의 그림자는 지붕에 뚫린 구멍으로 날아갔다.
황의노인은 한 발 앞섰기 때문에 구멍을 가로막으며 밑으로 일장을 날렸다.
펑!
두 사람은 허공에서 일 장을 주고받았다.
청의소년은 역시 힘이 모자랐다.
더군다나 상대는 위에서 거센 장력을 뻗었기 때문에 같은 장력으로 맞섰지만 몸은 땅으로 떨어
지고 말았다. 청의소년이 땅으로 떨어지자 우문한도가 재빨리 혈도를 짚었다.
황의노인은 허공에서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키고는 가볍게 내려섰다.
심목풍을 따라 온 네 사람 중에서 도망간 것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바로 금화부인이었다.
남옥당은 청의소년에게 부상을 입었고 청의소년은 우문한도에게 혈도를 짚혀 꼼짝 못하고 있었
다.
이제 남은 것은 붉은 가사를 입고 구리 방을을 들고 있는 화상뿐이었다. 무위도장이 재빠르게
장검을 뽑아들고 화상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대사께서는 움직이지 마시오. 대사와는 하등의 원한 관계도 없으니 죽이지는 않겠소.”
흥의화상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에는 정광대사를 포함하여 소영, 백리빙, 우문한도, 무위도장 등이 포위하고 있었다.
흥의화상은 이 포위망을 뚫고 나갈 자신이 없음을 느꼈다.
‘아, 늦었구나.’
그리고는 품 속에서 단검을 꺼내어 스스로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주위의 모든 군호들이 미처
그것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빠른 동작이었다.
홍의화상의 표정은 고통을 참는 듯 크게 일과러졌다.
정광대사는 수중에 들고 있던 계도(戒刀)를 버리고 다급히 홍의화상에게로 다가갔다.
홍의화상은 벌써 숨을 거두고 있었다.
정광대사는 손을 뻗어 그의 인피가면을 벗겼다. 정광대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빈도의 동문 사형제로군.”
옆에서 보고 있던 무위도장도 뒤따라 긴 한숨을 내쉬고 목메인 소리로 말했다.
“안 됐소이다. 본문에도 역시 배반자가 있소이다. 대사께서는 그의 시체를 잘 묻어주고 그를 용
서하시오.”
정광대사는 방울방울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홍의화상을 한참 동안 내려다 보았다. 황의노인은
가볍게 탄식을 하더니 곧 몸을 돌려 휘장 뒤로 걸음을 옮겼다.
무위도장이나 손불사는 그가 소영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했지만 뭐라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어쩔 줄을 몰라하는 사이에 우문한도가 불쑥 앞으로 나서며 황의노인에게 입을 열었
다.
“그인이 길을 안내하겠소이다.”
황의노인은 가볍게 허리를 굽히고 말을 받았다.
“그맙소.”
우문한도는 앞장서서 휘장 뒤에 만들어진 정실 안으로 들어갔다.
정싱 안에서 두 사람만이 마주보게 되자 우문한도가 대뜸 황의노인의 손을 잡았다.
“소대협!”
황의노인은 빙그레 웃음을 머금고 얼굴에 발랐던 약물을 지웠다.
그는 바로 불길에 타 죽었다고 제사까지 지냈던 소영이었다.
그러자 밖으로 소란스러운 발자국 소리가 들리며 손불사, 무위도장, 백리빙 등이 정실로 들어왔
다.
손불사는 소영의 모습을 보고 너무나 반가와서 덥석 그를 껴안았다.
“그대혈! 역시 그대였군.”
소영은 정중히 포권을 하고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소영의 목소리는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것이었다.
손불사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소대협이 무사한데 어찌 내가 평안치 않겠소?”
그는 실로 오랜만에 호탕한 웃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무위도장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소대협께서 등이협과 폐(弊) 사제에게 맡긴 두 권의 책도 빈도가 맡아서 잘 보관하고 있소이
다.”
소영은 그에게 눈길을 돌리며 물었다.
“도장께서는 그 책을 읽어보시지 않으셨소?”
무위도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빈도는 책 이름만 보았을 뿐 안에 있는 내용은 들추지도 않았소.”
“왜 읽지 않으셨소?”
“빈도는 이제 늙었소. 그런 것은 젊은이가 보는 것이오. 더군다나 빈도는 계속 적에게 대항하였
던 까닭에 그 책을 읽을 여유가 없었소.”
소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장의 인품에 새삼 감격했소이다. 후배는 언제까지나 도장을 존경하겠소.”
백리빙이 앞으로 나서며 얼굴을 붉혔다.
“오빠! 제가 잘못했어요.”
그녀는 짐짓 울상을 지었다.
“무슨 일인데…?”
“오빠의 부탁을 어겼어요. 오빠는 나에게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하셨지요? 그런
데… 나는 말해 버렸어요.”
소영은 피식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네가 말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문한도가 말을 받았다.
“원, 별말씀을…”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빙아 너를 나무라지 않겠다.”
백리빙은 더욱 얼굴을 붉혔다.
“오빠, 조금 전에 영당 안에서 모두 보았지요?”
“무엇을 보았다는 것이냐?”
“악언니 말이에요. 언니는 벌써 떠나셨어요.”
소영은 그제서야 생각난 듯 주위를 둘러보고 다그쳐 물었다.
“정말 갔느냐?”
백리빙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악언니와 저는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저는 좀 더 기다려 보자고 말렸지만… 그리고 조그만 종
이쪽지만 남겼어요.”
소영은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쓴 입맛을 다셨다.
“그럴 것이다. 악누님은 항상 마음대로 행동하니까.”
우문한도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 지금 긴급한 일로 불초와 소대협이 단독으로 의논할 것이 있소이다. 그러니…”
손불사가 가벼운 기침을 하고 말을 받았다.
“무공에는 이 늙은이도 소대협을 따르지 못하오. 그리고 지혜도 우문선생 보다 못하오. 모든 것
이 나보다 나으니 두 분 마음대로 하시오. 우리는 그동안 자리를 비켜 드리리다.”
우문한도는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고맙소이다. 잠시면 되니까…”
그리고는 옆에 마련되어 있는 정실을 가리켰다.
“소대협, 이곳으로…”
소영은 의아한 생각으로 건너쪽 정실로 들어갔다.
그는 뒤따라 들어오는 우문한도에게 다그쳐 물었다.
“우문선생, 무슨 일이시오?”
우문한도는 돌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대협, 가슴 속에 몰려 있는 피를 토하십시오. 그리고 진기를 모으시오.”
소영은 눈빛을 빛내며 한참 동안 그를 응시하였다. 그리고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두 눈을 감
았다.
잠시 동안이 지나자 돌연 소영이 검붉은 피를 울컥 토해 냈다.
소영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우문선생에게는 못 당하겠소. 내가 부상당하였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소?”
우문한도는 가볍게 미소를 보였다.
“소대협의 상처는 그리 큰 것이 아니오. 그리고 이 한 모금의 피는 악낭자를 위한 것이기도 하
오.”
소영은 눈썹을 잔뜩 치켜세웠다.
“우문선생은 무슨 뜻에서 그런 말씀을 하시오?”
“소대협은 이 늙은이를 중히 여기시니 불초도 그에 보답을 하는 것이오. 악낭자와 소대협 간의
일에는 되도록 참견하지 않으려 했지만 부득이하게 되었소.”
소영은 그에게 숨은 비밀이 있다고 느꼈다.
‘필시 그는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도 나와 악누님간의 일을…’
“우문선생께서는 무슨 말씀이신지 어서 가르쳐 주시오.”
우문한도는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남옥당이나 옥소랑군은 모두 무공이 고강하오. 그러나 그들은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암투를
벌이고 있소. 그 첫 희생자가 남옥당이지요. 그것은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소.”
“무슨…”
“불초는 그들을 나무라지 않소. 남자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은 응당 있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
오?”
소영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악누님은 항상 언행이 단정하여 함부로 행동하지는 않소. 옥소랑군이 누님을 따른다는 것은 어
느 정도 이해가 가오. 그는 누님을 여러번 구해주고 많은 시일을 같이 지냈으니까 말이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 말은 독이 서린 가시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남옥당과 무공자는 전연 엉뚱한 인물이오. 그들은 누님과 얼마 대면도 없었는데, 그들이
마음대로 누님을 좋아하는 것이니 결코 누님만을 탓할 수는 없지 않겠소.”
우문한도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니오. 불초는 악낭자를 탓하는 것이 아니오. 소대협께서는 악낭자에게서 보통 사람과 다른 점
을 느끼지 못하였소?”
소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오.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없소.”
우문한도는 소영에게 바싹 다가앉았다.
“자세히 생각해 보시오. 그녀를 볼 때마다 그 인상이 쉽사리 지워지지 않소이다. 그 인상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 가슴 속에까지 파고드오. 그녀는 언제나 그림자처럼 상대의 마음을 따르고 있는
것이오.”
“글쎄요. 아직 나에게는 그런 느낌이 없군요.”
우문한도는 더욱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소대협은 아직 나이가 어린 것 같소. 그렇지 않으면 그녀를 친누이로 알고 있을 것이오. 그러니
까 그녀가 천하 일색이라도 별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오. 그러나 이제는 소대협에게도 애정이란
것이 생길 무렵이오.”
소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문선생의 말뜻을 이제 조금 알겠소. 그러나 그런 것은 사람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는 것이오.
나는 악누님을 나무랄 수 없소.”
“소생은 관상술을 조금 알고 있소. 악낭자의 얼굴은 내미가 서린 얼굴이오. 그런 상은 천 년에
한 사람이 나올 정도요.”
“그렇다면 더욱 누님의 잘못이 아니지 않소.”
“그렇소. 악낭자도 잘못이 없고 남옥당이나 무공자에게도 잘못이 없소. 만약 잘못이 있다면 하늘
이 그런 기상을 내렸다는 것이오. 악낭자의 발길이 스친 곳이면 뭇 남자들이 마음을 억제하지 못
할 것이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우문선생의 말씀도 맞소. 지금까지의 모든 화근이 누님의 미모에 기인하는 것이구
려…”
“그렇다고도 할 수 있소. 더군다나 심목풍까지도 그녀에게 정신을 쏟고 있을 정도요.”
소영은 이 말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심목풍이… 그 놈까지도 누님을…?’
그의 안색을 대뜸 창백하게 되었다가 곧 붉어졌다.
그는 오랫동안 말을 잊고 있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우문선생, 일이 그렇다면 악누님을 어떻게…”
소영은 미처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은 그녀가 될 수 있는 대로 강호에 나다니지 말아야 되오. 인적을 끊고 지내면 자연 우리
의 적도 없어질 것이오. 악낭자가 늙으면 그 특유의 매력도, 뭇 남자를 뇌쇄시키는 웃음도 사라질
것이오.”
소영은 잠시 희색을 보이더니 곧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좋지만 누님께서는 탈을 듣지 않을 것이오. 더군다나 쾌활한 성격인데 은거해 살 수는
없을 것이… 그렇다고 누님을 가두어 둘 수도 없는 일이고…”
“또 한 가지 방법이 있소.”
소영은 눈빛을 빛내며 다그쳐 물었다.
“무엇이오?”
“인피가면을 쓰는 것이오. 인피가면으로써 천부적인 미모를 감추는 것이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법은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구려.”
“자, 이 정도로 끝마칩시다. 그동안 소대협의 기혈은 거의 가라앉았을 것이오. 이제는 잠시 휴식
만 취하면 될 것이오.”
소영도 자신의 상처를 알고 있었다.
‘이대로 움직일 수는 없지.’
그는 그대로 앉아 운기를 조식했다.
우문한도는 느린 걸음으로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또다른 몇 가지 일이 있지만 그것은 소대협께서 완쾌된 다음에 하기로 합시다.”
소영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역시 우문선생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현인(賢人)이다.’
그는 천천히 운기를 조식하며 자신이 무아지경으로 빠짐을 느꼈다.
얼마나 지났을까.
소영은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영이 눈길을 드는 것과 동시에 방울을 굴리는 듯한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오빠, 이제는 괜찮아요?”
백리빙은 언제 갈아 입었는지 여장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본래의 모습을 보니 그녀가 더욱 예뻐보였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언제 들어 왔느냐?”
“조금 전에요. 우문선생이 가르쳐 주었어요. 오빠가 부상을 당했다니까 모두 걱정을 해요.”
소영은 빙긋 미소를 보냈다.
“괜찮다. 조그만 상처였으니까.”
백리빙은 품에서 편지를 꺼내 들었다.
“오빠, 이것은 악언니가 떠나면서 준 것이에요. 두 개를 주었는데 하나는 오빠에게, 다른 하나는
나에게 준 것이에요.”
소영은 다급하게 그 편지를 받았다.
한눈에 보아 악소채의 글씨였다.
소영은 안의 편지를 꺼내 들었다.
소영은 편지를 다 읽었지만 무슨 뜻인지를 선뜻 간파하지 못하였다.
‘누님은 나를 원망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랑을 간접적으로 표시한 것인가?’
그가 힘없이 편지를 내리니 백리빙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오빠, 언니가 뭐라고 하셨어요?”
소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무거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나보고 너를 잘 대하여 주라는군.”
백리빙은 눈을 크게 뜨고 잠시 멍청하게 서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하고 급기야 눈물을 글
썽이기 시작했다.
크게 방울 진 눈물이 분홍빛 뺨으로 흘러 내렸다.
그녀의 앵두 같은 입술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소영은 깜짝 놀라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빙아야, 왜 그러느냐?”
백리빙은 어깨를 흔들었다.
“저도 왜 그러는지 몰라요. 기쁜 것인지 괴로운 것인지를 분간하지 못하겠어요.”
그녀는 마침내 흐느껴 울었다.
“악언니는… 오빠와…”
흐느낌 때문에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였다.
소영은 직감적으로 모든 것을 눈치채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백리빙의 백옥 같은 손을 살며시 잡았다.
“빙아야, 이제 울지 말아라. 누가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라. 너도 남옥당의 말을 들었지 않느냐.
그는 악누님이 선녀라고 하지 않더냐? 그래서 아무도 누님과 결합하지 못한다고…”
백리빙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심각하게 말했다.
“오빠는 악언니의 마음을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무얼 모른단 말이냐?”
“악언니는 오빠를 천생 배필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나 언니도 나처럼 말을 못하는 것뿐이에
요.”
소영은 자신도 모르게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내쉬는 한숨은 거의 악소채와 백리빙 때문이었다.
“빙아야, 너는 누님과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
“악언니는 여러 가지 말을 했어요. 그러나 오빠와 나에 대한 이야기만 한 걸요.”
“그래? 누님은 나에 대하여 무어라 말하더냐?”
백리빙은 잠시 사이를 두고 대답했다.
“언니를 생각지 말라고 하였어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누님이 남긴 편지에도 그렇게 씌어져 있다.”
“아니예요. 악언니는 비록 그렇게 말하지만 본 뜻은 틀려요.”
백리빙은 갑자기 무엇이 생각난 듯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오빠, 우리 언니를 도와 원수를 갚도록 해요. 네?”
소영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 동안 생각하였다.
“그렇다. 누님을 도와 이모님의 복수를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나… 나에게는 그보다 더 큰 강
호의 운명이 매달려 있으니…”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빙아야, 미안하다. 내 마음은 아마 너보다 더 급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무림의 상황은 매우 중
요한 시기에 놓여 있다. 나는 우선 이 일부터 해결해야 될 것이다.”
“오빠는 악언니의 복수를 돕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아니다. 너는 무엇인가 잘못 생각하고 있어. 지금 강호의 천하 영웅들이 한 자리에 다 모였지
않느냐? 백화산장을 쳐부수기 위해서 말이다. 이런 때 내가 빠진다면 그들의 사기에도 많은 영향
을 줄 것이다. 빙아야, 너는 강호 무림의 장래를 생각해 보았느냐?”
그제서야 백리빙은 떠오르는 생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기도 하군요. 이곳의 사정도 긴박하니… 오빠는 대권을 쥔 중요. 위치에 있으니 떠날 수도
없고.”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내 뜻을 아는 것 같군.”
그리고는 주위를 둘러 본 다음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빙아야, 지금 곧 밖으로 나가서…”
백리빙은 그 다음 말도 듣치 않고 불쑥 말을 꺼냈다.
“왜 나가라는 거예요?”
“밖에 나가서 손노선배와 우문선생, 무위도장을 모시고 오너라.”
백리빙은 자신의 경거망동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얼굴을 붉혔다.
“그들과 앞으로의 대책을 의논하여야겠다.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은 매우 빠른 결단을 필요로
하고 있다.”
백리빙은 고개를 고덕이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소영은 그녀의 뒷모습물 유심히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세 사람이 들어왔다. 백리빙도 맨 뒤를 따르고 있었다.
소영은 주위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여러분, 앉으십시오.”
우문한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소대협께서 우리를 불렀다니 무슨 경사라도 있소?”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들과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고 싶어서입니다.”
손불사가 이에 호응했다.
“좋지. 그래 소대협은 무슨 좋은 방안이라도 있소?”
“없소이다. 그러나 심목풍보다 우리가 먼저 손을 써야 될 것 같소.”
우문한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좋은 생각이오.”
“나의 뜻은 빠르면 빠를수록 우리에게 유리하다고 보오. 우리는 이 길로 심목풍의 소굴을 뒤엎
어 그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켜야 되오.”
소영은 눈길을 돌려 우문한도를 보며 다음 말을 이었다.
“저는 다만 그러기를 바랄 뿐 자세한 계책은 없소이다. 그외 자세한 것은 우문선생께서 직접 수
고해 주셔야겠소.”
우문한도는 심각한 표정으로 얼마 동안 침묵을 지켰다.
장내의 모든 인물들은 우문한도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곳에 모여 있는 고수들은 별로 많지가 않소. 만약 백화산장과 정면으로 대결한다면 우리가
불리하오.”
소영이 말을 받았다.
“무엇이 불리하단 말이오? 제가 심목풍을 막고 여러분들과 다른 사람들은 나머지를 맡으면 될
게 아니오?”
우문한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백화산장을 얕볼 수는 없소. 그리고 소대협과 심목풍은 누가 이길지도 모르오.”
“그럼 정면으로 싸운다면 승산이 없다는 것이오?”
“그렇소.”
우문한도는 대답을 하고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교묘한 계책을 세우면 어느 정도의 승산은 있을 것이오.”
“그럼 우선 금화부인을 만나볼 수밖에 없군요.”
옆에서 듣고만 있던 손불사가 끼어들었다.
“지금 남옥당이 정신을 차렸으니 그에게 자세한 내막을 캐 봅시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것이 좋겠구려. 그가 말할 수 있소?”
우문한도가 대답했다.
“한두 시간이 지나야 되오.”
“어느 분이 그의 독상을 치료해 주셨소?”
무위도장이 웃음을 띠며 말했다.
“어느 분이겠소? 우문선생 이외에 누가 그런 재주를 지니고 있겠소?”
우문한도는 얼굴을 붉혔다.
손불사가 화제를 바꾸었다.
“소형제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말씀하십시오.”
“소대협이 심목풍을 죽이려고 하는데 늣밖에 일이 복잡해지지 않은 것 같소?”
“아니오. 조금도 복잡해진 것이 없소. 다만 그가 물러난 여세를 이용하여 계속 밀고 나가자는 뜻
이오. 만약 시간이 지연되면 그에게 방어할 준비를 갖추게 할 뿐이오. 또한 우리는 이곳에 모인
인물 이외에 또 다른 사람이 없지 않소?”
손불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소대협의 말에도 일리는 있소. 그러나 이 늙은이는 자꾸만 딴 생각이 드는구려. 소대협이 다른
원인으로 서둘 것이라고 말이오.”
소영은 더 숨길 수가 없음을 알았다.
“저는 심목풍을 죽인 후 그 뒷일은 여러분께 맡기겠소. 저는 또 다른 일이 있으니 뒷수습을 할
시간이 없소이다.”
“무슨 일이오?”
이번에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소영에게 쏠렸다.
소영은 힐끗 백리빙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저의 누님이오. 악누님을 도와야 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