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 Finger RAW novel - Chapter 173
173. 그리움으로 병든 소녀
우문한도는 잠시 숙연한 표정으로 고민에 젖어 있더니 백리빙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
다.
“낭자, 진정하시오. 일은 이미 내가 예측하던 그대로요.”
“예측하고 있었다니요?”
“그렇소. 다만 단정을 내릴 수가 없었던 것이오. 내 추측이 틀리기를 바랐는데 불행하게도 예측
그대로 되었구려.”
“무슨 방법이 없겠어요?”
“나도 지금 생각하고 있는 중이오.”
백리빙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더니 탄식처럼 말했다.
“저는 그의 그런 표정을 처음 보았어요. 슬픔도 아니고 분노도 아닌… 얼른 보기에 그것은 절망
에서 생긴 평정 같았어요.”
백리빙은 말끝을 맺더니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만약 그의 무공을 회복시킬 수 있다면…”
우문한도가 무겁게 한숨을 토하며 말했다.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까요?”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만이 할 수 있소.”
상팔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 독수약왕은 천리 길을 멀다않고 달려와 형님의 상처를 치료했으면서 어째서 완전히 낫게 하
지 않았을까요?”
두구가 자기 의견을 말했다.
“그 늙은이는 분명 어떤 속셈이 있어 그랬을 것이오. 후한 예물을 준비해 그를 다시 한 번 불러
오면 될 것 아니겠소?”
백리빙이 한숨을 섞어 말했다.
“진주나 보석 따위로 독수약왕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을 거예요.”
두구가 말했다.
“우리는 천 년 묵은 산삼과 진귀한 명약이 있는데…”
우문한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독수약왕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예물이 아니오.
그것은 단 한 가지…”
“도대체 무엇이오?”
말끝을 흐리는 우문한도가 답답하다는 듯 상팔이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우문한도가 짧게 대답했
다.
“정이오.”
중주이고는 처음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곧 느끼는 바가 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독수약왕은 떠나기 전에 남궁낭자는 진기가 막혀 움직일 수 없으니 소대협 구궁산으로 오라고
했잖소?”
“그랬지요.”
“그곳에 오든 안 오든 그것은 소대협에게 맡긴다고 말했지만… 소대협이 그곳에 안 갈 수 없도
록 만들었던 것이오.”
백리빙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만일 소영오빠가 가지 않으면 무공을 회복할 수 없다는 암시를 준 것이군요.”
“바로 그렇소.”
우문한도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소대협도 구궁산으로 가지 않으면 무공을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오. 그러나 소
대협은 독수약왕의 은근한 협박에 끌려 그곳으로 가긴 싫어할 것이오. 때문에 소대협은 가지 않
을 것 같소.”
“하지만… 오빠는 고통을 견딜 수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낭자께서 나서야 하오.”
“제가요?”
“그렇소. 현재로선 낭자만이 소대협을 구궁산으로 보낼 수 있소. 낭자의 권고만이 소대협의 마음
을 움직일 수 있소.”
백리빙은 미간을 좁히며 잠시 생각하더니 결심한 듯 말했다.
“좋아요. 제가 권고하겠어요.”
“고맙소. 소대협을 생각해서 낭자가 힘써 주어야겠소.”
우문한도는 음성을 훨씬 낮추어 말을 이었다.
“소대협의 한가닥 정이 낭자에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소. 악소채도 그의 정을 끌어 들일 수는
없소. 그 외의 사람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낭자, 마음을 크게 먹으시오.”
백리빙은 고개를 숙인 채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만일 독수약왕이 오빠의 무공을 회복시켜 주기만 한다면 저는 오빠가 여자를 아무리 많이 거느
린다 해도 언짢게 생각지 않겠어요.”
중주이고는 백리빙의 말에 새삼스럽게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백리빙은 그들
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빠가 구궁산으로 가도록 권유하는 것은 제가 하겠지만 모시고 가는 것은 두 분께서 하셔야
되겠어요.”
우문한도가 말했다.
“낭자의 생각이 옳소. 소대협을 중주이고가 모시고 가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오.”
중주이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백리빙이 몸을 일으켰다.
“우문선생의 많은 가르침을 입었어요. 저는 그만 돌아가서 오빠를 설득시켜 보겠어요.”
다급히 덧붙였다.
“소대협에게 구궁산으로 가라고 권고만 하시고 될 수 있는 한 내막을 설명하지 마시오.”
“알겠어요.”
백리빙은 급한 걸음으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상팔이 입을 열었다.
“우문형! 독수약왕은 병상에서 헤아나지 못하고 있는 자기 딸을 형님에게 시집 보내려는 생각이
아니오? 그래서 형님의 상처를 치료하는 척하며 어떤 독을 넣은 것이 아닐까요?”
우문한도가 대답했다.
“아마 그런 짓을 하진 않았을 것 같소. 다만 상처를 완전하게 치료해 주지 않았을 뿐인 것으로
생각되오.”
상팔이 코웃음치며 분개한 어조로 말했다.
“그놈… 형님을 잘못 봐도 유분수지 무공을 회복시켜 준다는 조 건으로 형님을 굴복시키려고 들
다니…”
상팔은 허공에 독수약왕이라도 있는 듯 노려보며 소리쳤다.
“야! 이 쓸개 빠진 독수약왕아! 네가 만일 정성을 들여 형님의 상처를 치료했다면, 본래 인정이
많은 형님은 몹시 감동해서 오히려 네 딸을 맞아 들일 가능성도 있었는데… 어리석은 것 같으니
라구…”
우문한도는 상팔의 모습을 보고 피식 웃더니 얼른 엄숙한 표정으로 바꾸며 말했다.
“상형, 이번 일은 매우 중요하오. 두 분은 독수약왕을 만날 때에 어떤 기분나쁜 일이 있더라도
제발 참아 주셔야 되오.”
이 말에 상팔이 공손한 태도로 답변했다.
“나는 다만 이곳에서 몇 마디 푸념을 했을 뿐이오. 형님의 무공이 회복될 수만 있다면 독수약왕
에게 절을 몇 번 하라고 해도 하겠소.”
“하하하, 그런 생각이라면 좋소. 만일 독수약왕이 제시하는 조건이 너무 무리여서 소대협이 고개
를 숙이지 않으려고 하면… 역시 두 분께서 소대쳔을 권고해 주시기 바라오.”
“그것은 매우 곤란한데요. 형님이 한 번 틀어지면 나는 설복할 자신이 없소.”
상팔의 말에 우문한도는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무릎을 쳤다.
“상형! 이렇게 하시오!”
“어떻게요?”
“우문한도가 보기에 심목풍은 아직 죽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고.”
상팔도 손으로 무릎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렇게 하면 형님은 다시 투지를 돋을 것이오. 심목풍이 살아 있다는 것은 형
님에게 있어서 가장 충격적인 문제니까요.”
“그렇소. 헌데…”
우문한도는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불행하게도 심목풍이 정말 살아 있을는지도 모르오.”
“그럴 리가 있겠소.”
“글쎄요. 나도 상형의 말이 맞기를 바라지만… 만일 심목풍이 아 직까지 살아 있다면…”
우문한도는 얼굴에 긴장을 떠올리며 분연히 말했다.
“전체 무림을 위해서라도 소대협은 꼭 무공을 되찾아야만 하오.”
두구가 입을 열었다.
“우문선생, 형님의 무공을 회복시킬 수 있는 사람은 독수약왕뿐이라는 것을 형님도 알고 있소?”
“내 생각엔 총명한 소대협은 이미 알고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
을 뿐이지요.”
“백리낭자가 형님을 구궁산으로 가도록 할 수 았을까요?”
“그것은 백리낭자의 수완에 달린 것이오. 이건 내 짐작이지만…소대협이 십중팔구는 승낙할 것
이오.”
“어째서요?”
우문한도는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말을 이었다.
“백리낭자가 소대협에게 쏟는 정은 대단하오. 그녀는 정성을 다해 권고할 것이오. 그리고 소대협
역시 자기가 아직 무공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그래서 소대협이 허락할 가능
성이 크지요.”
“우문선생은 확신하고 있는 듯한 말씀이군요?”
우문한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 두 분께서는 짐을 챙기시오. 나는 이곳에서 백리낭자를 기다리겠소.”
“그럼 우린 만반의 준비를 해 두겠소.”
상팔과 두구는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사라지자 우문한도는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
쉬었다.
‘사실 나도 자신은 없다. 소영이 과연 구궁산으로 갈까?’
우문한도는 매우 초조한 마음으로, 자주 문으로 시선을 던지며 백리빙을 기다렸다.
한 시진 정도 지났을 무렴에야 백리빙이 나타났다.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자국이 채 마르지 않았
다.
우문한도는 초조한 마음으로 다급하게 물었다.
“낭자, 소대협을 설복했소?”
백리빙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처음엔 가지 않겠다고 완강히 거절했어요. 제가 울며 애걸하자 비로소 허락하더군요.”
“낭자, 정말 수고하셨소.”
우문한도는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하며 다시 물었다.
“언제 떠나기로 결정했소?”
“빠를수록 좋겠지요.”
“나는 이미 중주이고에게 짐을 꾸리라고 했소. 만일 낭자께서 동의한다면 곧 떠날 수도 있소.”
백리빙은 미간에 주름을 지으며 말했다.
“오빠의 상처가 아직 완쾌되지 않아 걸을 수가 없어… 그런데 어떻게 지금 떠나지요?”
“물론 무리지요. 허나 나는 사람을 시켜 포장마차를 준비해 놓았소. 깊은 산길에선 가마로 사용
할 수도 있는 것이오.”
백리빙은 처연한 기색으로 앉아 있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문 채 밖으로
나갔다.
한참 후에 포장마차가 도착했다. 우문한도는 마차를 자세히 점검한 후 소영을 조심스럽게 옮겨
태웠다.
상팔과 두구가 마부석에 나란히 앉자 우문한도와 백리빙은 마차 옆으로 비켜 섰다.
“이랴!”
상팔의 채찍이 말 잔등을 갈기자 마차는 쏜살같이 앞으로 내달렸다.
중주이고는 계속 마차를 몰았다. 말이 지치면 다른 말로 바꾸고 식사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쉬
지 않고 달렸다.
깜깜한 밤길을, 비가 쏟아져 질척거리는 산길을, 뙤약볕이 피부를 태우는 한낮의 들길을 마차는
계속 달렸다.
그렇게 달린 지 며칠 후, 마차는 드디어 구궁산 밑에 이르렀다. 먼동이 틀 무렵이었다.
“잠깐 말을 멈추게!”
상팔의 말에 두구는 마차를 세웠다. 상팔은 우문한도가 그려준 지도를 한동안 들여다 보더니,
“여기서부터는 마차가 다닐 만한 길이 없군.”
하며 마차에게 뛰어 내렸다. 두구가 뒤따라 내려섰다.
두 사람의 말을 떼어 내고 가마를 만들었다. 마차가 워낙 작고 가벼웠기 때문에 바퀴와 끌채를
떼어내니 훌륭한 가마가 되었다.
두 사람은 가마를 메고 산길로 접어들었다. 길은 험하고 꾸불꾸불했으며 암석과 밀림 때문에 주
위를 제대로 살필 수가 없었다.
우문한도는 구궁산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독수약왕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우문한도는 독수약왕이 소영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산 속으로 들어
가는 몇 개의 중요한 길을 지도 위에 상세히 그려 놓았다. 그래서 중주이고가 길을 잃고 산속을
헤맬 염려는 없게 했다.
가마에 흔들리면서도 소영은 별로 말이 없었다. 무엇인지 깊은 상념에 잠긴 표정으로 중주이고
에게 자신을 내맡기고 있을 뿐이었다.
상팔이나 두구도 소영에게 쓸데없는 말을 걸지 않았다. 지도에 명시된 길을 따라 점점 산속 깊
이 파고들 뿐이었다.
점심 때가 가까와질 무렵, 이들은 한 개의 산봉우리에 이르렀다. 앞에서 가마를 메고 있던 상팔
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한 그루의 거대한 소나무 밑에 작은 절이 한 채 있었고 절 옆에는 풀잎으로 지붕을 덮은 정자가
하나 있었다.
그 정자에는 나무탁자가 있었고 두 개의 찻잔과 과일그릇에 과자와 과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상팔은 절과 정자를 유심히 살펴 보더니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두제, 우리 잠깐 쉬었다 가세.”
“그럽시다. 이왕이면 차나 한 잔 마시고 갑시다.”
두 사람은 나무 그늘에 가마를 내려 놓았다. 상팔이 소영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형님, 차를 드시겠소?”
소영은 손은 저으며 대답했다.
“난 그만 두겠으니 어서 두 분께서나 드시오.”
소영은 가마 속의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졸음이 오니 자겠다는 표시였다.
상팔과 두구는 서로 눈짓을 하고 정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상형, 이곳은 지도에 그려져 있는 곳과 같군요. 독수약왕은 왜 이런 곳에서 살까요?”
“그 우문한도는 독수약왕의 거처를 알지 못하네. 이곳은 분명히 산을 오르내리다 쉬는 곳에 불
과할 거야.”
“우문한도는 우리더러 어떻게 독수약왕을 만나라고 했지요?”
“독수약왕이 우리를 기다리며 찾기를 바라는 것이지.”
“아하, 그러니까 우리는 재수가 좋기만을 기다리는 거군요.”
“우문한도는 경솔한 말을 하지는 않네. 우리에게 이곳으로 오도록 지도에 그려 준 것은 나름대
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일 것일세.”
두 사람은 정자로 올라가며 주위를 유심히 살폈으나 아무런 이상한 것도 발견치 못했다.
“우선 먹고 보세.”
“그럽시다.”
두 사람은 차를 마시고 파일을 하나씩 먹었다. 그래도 나타나는 사람이 없어 정자 아래로 내려
서던 두 사람은 흠칫 놀랐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독수약왕이 소영의 앞에서 무엇인가 얘기하고
있었다.
“어디 숨어 있었을까요?”
“나무 위였겠지.”
상팔은 헛기침을 하며 독수약왕을 불렀다.
“궁형!”
독수약왕은 얼굴을 돌리더니 웃음을 띠며 말했다.
“두 분께서 수고가 많으셨소. 내가 이미 몇 가지의 실과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소.”
‘독수약왕은 이미 우리들이 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구나.’
상팔은 이런 생각을 하고 가마 앞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남궁형의 거처는 어디요? 이곳에서 멀리 있소?”
“바로 부근에 있소. 자아, 갑시다. 이 늙은이가 앞장을 서겠소.”
독수약왕은 몸을 돌리더니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상팔과 두구도 급히 가마를 들고 그의 뒤를
따랐다.
독수약왕의 걸음은 몹시 빨랐다. 길이 험한데다 가마를 들었으니 상팔과 두구는 경공을 발휘하
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독수약왕의 뒤를 바짝 쫓았다.
얼마 동안을 달려 거대한 산의 허리에 다다르니 울창한 대나무 숲이 나타났다. 대나무 숲 옆에
는 한 채의 기와집이 있었다.
“이곳이 내 처소요. 안으로 들어갑시다.”
독수약왕은 공손하게 말하더니 먼저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상팔과 두구도 망설이지 않고 따라
들어갔다.
가마를 봉당에 내려 놓자 소영이 천천히 일어서더니 대청으로 올라섰다. 그는 독수약왕이 권하
기도 전에 의자에 앉았다.
대나무 숲에 둘러싸인 집은 매우 깨끗했다. 대청은 물론 마당까지도 말끔히 청소되어 있었다.
소영이 의자에 앉자 독수약왕이 싱글벙글하며 입을 열었다.
“소대협, 과연 은원(恩怨)을 분명히 하는 의협 인물이구려. 상처가 아직 완쾌되지도 않았는데 곧
구궁산으로 달려오다니…”
소영은 독수약왕을 힐끗 쳐다보고 입을 열지 않았다. 이 때 상팔과 두구가 대첨으로 올라와 소
영의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소영이 대답하지 않자 독수약왕은 돌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딸애가 소대협을 몹시 보고 싶어 하던데 소대협께서 이토록 친히 행차했으니 분명 놀라
움과 기쁨에 어쩔 줄을 몰라 쩔쩔맬 것이오.”
‘정말 아무 기리낌도 없이 잘도 털어 놓는구나. 아무리 딸에 대한 정이 깊다 하더라도 이토록
예의도 모르고 떠벌이다니… 염치도 없고 넉살 좋은 영감이군.’
코웃음을 쳤다. 소영은 전혀 아무 소리도 못 들은 척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
나 독수약왕은 소영의 태도야 어떻든 상관없다는 듯 싱글거리며 안을 향해 소리쳤다.
“옥아! 빨리 나와 봐라! 소대협께서 너를 보러 왔다!”
소영은 내색은 않고 있었지만 독수약왕이 제멋대로 떠드는 것이 몹시 비위에 거슬렸다. 당장 욕
이라도 퍼붓고 싶은 것을 억눌렀다.
‘어디 마음대로 지껄여 봐라. 꼴이나 두고 보자.’
이 때 사뿐사뿐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주렴을 들치고 한 소녀가 나타났다.
소녀는 푸른 옷을 입었고 긴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독수약왕의 딸 남궁옥이구나.’
소영은 남궁옥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그 때는 밤이 어둡기도 했고, 독수약왕에게 피를
뽑히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똑똑히 볼 수 없었다.
남궁옥은 몸이 좀 가냘프고 안색이 약간 창백했으나 매우 아름다운 용모였다.
남궁옥은 소영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들어서자마자 대번에 알아보고 귀밑을 발
그레 물들이더니, 수줍은 미소를 띠며 몸을 숙였다.
“소오빠, 이 동생을 아직 기억하고 계세요?”
소영은 몸을 일으켜 답례를 하며 대답했다.
“남궁낭자, 그 동안 몸은 좀 좋아지셨소?”
남궁옥은 독수약왕을 힐끗 쳐다보더니 또렷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버지가 심혈을 기울이신 덕분에 소녀는 죽음에서 생명을 건질 수 있었어요. 제 병을 고쳐 주
신 후 아버지는 저에게 무공을 가르쳤어요. 저는 열심히 연마했지만 도중에 그만 부주의로 진기
가 막혔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아무 성과가 없어요.”
소영은 독수약왕을 돌아보았다. 그는 딸과 소영이 친밀하게 대화하는 것이 몹시 즐거운듯 만족
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독수약왕이 나쁜 사람인지 좋은 사람인지 분별하기 어렵지만 천하에서 가장 딸을 아끼고 사랑
하는 아버지임엔 틀림없다.’
소영이 이런 생각에 젖어 일종의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는데 남궁옥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오빠, 요즘은 지내기가 어때요? 평안했어요?”
소영은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강호를 방황하여 발길 닿는 곳에 집을 삼고 있었지요.”
“그렇다면 너무 고생스럽지 않아요?”
그러자 독수약왕이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바보야! 너의 소대협은 강호에서 제일인자라고 내세우는 만인이 존경하는 영웅이다.”
남궁옥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요. 저는 벌써부터 소오빠가 영웅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이들 부녀의 대화에 소영은 씁쓸하게 웃으며 한 마디 했다.
“부끄럽소이다.”
그러자 남궁옥은 가벼운 미소를 소영에게 보내더니 상팔과 두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두 분이 상팔과 두구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어요.”
상팔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낭자는 기억력도 좋군요.”
남궁옥은 생긋 웃더니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소영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이것을 본
독수약왕이 상팔에게 눈짓을 해보였다.
‘흠, 자리를 비켜 달라?’
상팔은 소영을 한 번 돌아보고, 두구에게 눈짓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형님, 우리들은 우선 물러가 있겠소.”
상팔은 소영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두구가 따라 나가자 독수약왕이 만족
한 미소를 띠며 소영에게 말했다.
“소대협, 잠깐만 앉아 계시오. 노부가 먹을 것을 좀 가져 오겠소.”
소영은 이미 독수약왕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남궁옥과 이야기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 일부러 자리를 뜨는구나.’
소영은 잠깐 망설였으나 남궁옥의 영롱한 눈동자가 자기를 주시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할 수 없
이 독수약왕에게 말했다.
“노선배께서 수고해 주시겠소?”
독수약왕은 빙그레 웃으며 머리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실내에 파른 사람이 없게 되자 남궁옥이 소영의 곁에 있는 대나무의자에 앉으며 말을 걸었다.
“오빠는 만사가 순조롭게 이루어져 이름을 날리게 되었으니 옥이도 퍽 기뻐요.”
소영이 부드러운 웃음을 띠며 겸손하게 대답했다.
“천하꼭 영웅들은 수시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오. 나는 다만 다른 사람들보다 한 걸음 일찍 발
을 내디딘 것뿐이오.”
“아버지가 그러시는데 심목풍은 이미 죽었고 오빠는 앞으로 편안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다던데
요?”
소영은 가볍게 머리를 저었다.
“현재로선 확실히 단언할 수 없소. 심목풍이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는 아직 의문이오.”
남궁옥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깝게도 나는 진기가 경맥에서 갈라지고 말았어요. 그렇지 않았으면 열심히 무공을 배워 오빠
를 도와 줄 수 있었을 텐데…”
대청에서 소영과 남궁옥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밖에서도 중주이 고와 독수약왕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상팔은 우문한도의 당부가 있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공손한 어조로 독수약왕을 대하려 하고
있었다.
“약왕께선 소대협을 완치시킬 수 있는데도 일부러 손을 중간에서 떼고, 소대협이 이 먼 길을 오
도록 한 이유가 무엇이오?”
그리움으로 병든 소녀 상팔의 말을 들은 독수약왕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딸애가 소대협을 보고 싶어하며 늘 노부에게 그의 이야기를 해 왔소. 나에겐 하나뿐이며 내 목
숨보다 소중한 딸의 소원을 내 어찌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보고만 있겠소?”
“그렇다면, 약왕의 소원대로 소대협은 이곳에 왔소. 약왕은 어떤 준비가 되어 있소?”
독수약왕은 묵묵히 대나무 숲을 바라보더니 가벼운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소대협의 인격에 대해 노부 역시 존경을 금할 수 없소. 당신네들이 이곳에서 삼 일 간만 머물
러 주신다면…”
“나는 평생의 의술과 묘약을 총동원해서 그의 질환을 고치겠소. 지니고 있던 무공도 고스란히
되찾을 수 있도록 하겠소.”
이 말에 상팔과 두구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상팔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
하며 입을 열었다.
“약왕께서 소대협을 고쳐 주겠다니 지극히 감격할 뿐입니다.”
독수약왕은 처량하게 느껴지는 어조로 말했다.
“애초의 내 생각은… 소대협과 내 딸이 어쩔 수 없이 결혼하게 한 뒤에 그의 내상을 치료해 줄
생각이었소. 그러나…”
“…”
이제 소대협과 내 딸이 이야기하는 것을 대하니… 노부는 생각 을 고쳐 먹었소.”
“그것은 훌륭한 생각이오. 우문한도의 추측과 일치하는군요.”
상팔의 말을 바로 뒤이어 두구가 독수약왕에게 물었다.
“약왕께서 생각을 고친 이유는 무엇이오.”
이 질문에 독수약왕은 얼굴에 그늘을 지었다.
“나는 소대협을 대하는 딸의 눈에서 광채가 번쩍이는 것을 보았소. 곧 내 딸이 소대협을 얼마나
흠모하고 있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오. 그러나, 내 딸애는 성질이 칼날 같소.”
“…”
“만일 내가 억지로 두 사람을 결합시킨 후 나중에 이 사실을 딸이 안다면… 그녀는 평생토록 나
를 저주하며 스스로 그늘 속에 묻혀 지낼 것이오. 당신들은 자식이 없으니 모르지만, 자식을 가진
부모들은 그 자식의 앞날까지도 예측할 수 있다오.”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던 상팔이 다시 물었다.
“약왕의 말씀을 듣고 보니 깨닫게 되는 점이 많군요. 그런데, 약왕께선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
오?”
“두 분께서 소대협에게 전해 주시모. 이곳에서 삼 일 동안만 머물러 달라더라고. 삼 일 안에 노
부는 그의 내상을 치료하고 무공을 되찾도록 하겠소.”
“…”
“노부로서도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해야겠소.”
“무슨 조건이오?”
“소대협이 딸애에게 좀 부드러운 태도를 취해 주었으면 하는 부탁이오. 내 딸이 그 동안이라도
즐겁게 보낼 수 있도록…”
“…”
“내 딸애는 어려서부터 줄곧 병마와 싸우며 자라 왔소. 그래서 단 하루도 활짝 웃는 얼굴을 못
보았소. 그런데, 오늘 그 애는…”
독수약왕은 목이 메어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소대협이 딸애를 즐겁게 대해 준다면, 반은 노부의 구명지은(求命之恩)에 보답하는 길이고, 나
머지 반은 내 딸애에게 동정심을 베풀어 주는 것이지요. 어떻소? 이 조건이 너무 각박하오?”
상팔과 두구는 잠시 동안 대답을 못했다. 상팔은 독수약왕의 부정에 감동을 금치 못하며 입을
열었다.
“혈육의 정이란 깊이가 한량 없구려. 감동을 금치 못하겠소이다. 우리들은 소대협을 힘 닿는 데
까지 설복시켜 보겠소.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무엇이오?”
“삼 일 후에 약왕께선 어떻게 하실 작정이며 남궁낭자는 어떻게 되는 것이오?”
“그것은… 우리 부녀의 일인 만큼 여러분께서 너무 염려하실 필요는 없소이다.”
세 사람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상팔이 침묵을 깨뜨렸다.
“약왕에게 몇 마디 듣기 싫은 말을 물어 봐도 괜찮겠소?”
“두 분께서 할 말이 있거든 서슴지 말고 이야기해 보시오. 노부는 끝까지 듣고 성의껏 대답하겠
소.”
상팔이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물었다.
“남궁낭자의 절증이 완전히 치료되었소?”
독수약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대협이 노부를 데리고 가서 찾아낸 버섯을 먹고 완치되었소. 그런…”
“…”
“내 딸의 명이 기구해 절증이 완치되자마자 뜻밖에도 진기가 경맥에서 갈라져 버렸소.”
“어째서 그렇게 되었소?”
“그것은… 소대협과 관련이 있소.”
“관련이라니 어째서 소대협과 관련이 있단 말이오?”
독수약왕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말해 보았자 두 분은 아마 믿어지지 않을 것이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좀…”
“옥이가 한창 진기를 순환시킬 당시 노부는 무의식중에 소영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보냈소.
이 말을 들은 딸애의 심신이 대뜸 격동을 일으키더니 그만 진기가 경맥에서…”
“그런 일도 있소?”
상팔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한 어조로 말하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번에는 두구가 입을 열었
다.
“약왕께선 여전히 강호의 일에 대해 관심이 큰 모양이군요.”
“그렇소. 늘 심목풍의 활동을 주시할 필요가 있었소. 심목풍은 소대협을 가장 두려운 적으로 생
각했소. 그 다음이 바로 노부요. 그래서 나는 항상 강호의 정세를 파악하며 심목풍과 겨를 태세를
갖추어 왔소.”
상팔과 두구는 서로 마주 보다가 마침내 상팔이 대답했다.
“약왕께선 안심하시오. 우리들은 형님이 이곳에서 삼 일 동안 묵게 할 자신이 있소. 다만…”
“다만 무엇이오?”
“잠시 동안만 영애를 형님의 곁에서 떨어지도록 해 주시오. 그래야 우리가 형님에게 자세한 설
명을 할 수 있잖겠소?”
“그야 물론이지요. 그럼 노부는 우선 두 분에게 감사 드리겠소.”
독수약왕은 주먹을 모아서 가슴 앞에 대며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상팔과 두구도 급히 답례를 하였다.
“별말씀을… 우리들은 힘 닿는 데까지 노력할 뿐인데 이런 인사는 감당키 어렵습니다.”
“아무튼 서로 잘해 봅시다.”
독수약왕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에 눈을 주며 두구가 낮은 음성으로 상팔에게 말했다.
“독수약왕은 자부심이 강하기로 유명하고, 무림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있지 않소.”
“그렇지.”
“그런 인물이 자기 딸을 위해 이렇게까지 남에게 고개를 숙이다니 상팔이 가볍게 웃으며 농담처
럼 말했다.
“그러기에 우리처럼 홀아비가 제일 좋다는 것일세. 영웅의 사기는 짧지만 자식에 대한 애정은
깊다는 말이 있잖나?”
“글쎄요. 그렇게 생각하니 홀아비 신세가 좋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거 너무 삶에 재
미가 없는 것 같아서… 하하하.”
“허허허, 두제도…”
두 사람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어딘지 공허한 울림이 있는 웃음이었다.
독수약왕이 객실로 들어서니 소영과 남궁옥은 한참 재미있게 이야기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웃
음이 담뿍 담긴 딸의 얼굴을 본 그는 콧날이 시큰했다. 목이 메이는 것을 느낀 그는 헛기침을 하
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얘야, 너는 약을 먹고 휴식할 시간이다. 소대협께선 이곳에 또랫동안 머무를 예정이니 이제 그
만 물러가거라. 약을 먹고 와서 다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충분하니까…?”
남궁옥은 독수약왕을 바라보며 빙그레 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대답했다.
“아버지, 저는 지금 정신도 맑고 건강도 좋아요. 한 번쯤 약을 걸러도 괜찮을 것 같아요.”
“옥낭자, 아버님의 말씀이 옳소. 나는 이곳에 며칠 머무를 예정이니 낭자가 약을 먹고 휴식을 취
한 후에 다시 얘기해도 늦지는 않소.”
남궁옥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짐하듯 소영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오빠는 나를 기다려 주겠어요?”
“나는 한 번 말한 것은 어기지 않는 성질이오.”
남궁옥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수줍은 미소로 얼굴을 붉히더니 내실을 향해 들어갔다. 독수약
왕은 소영을 힐끔 쳐다보더니 남궁옥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