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 Finger RAW novel - Chapter 177
177. 돌아온 절세고인
백리빙은 배에 남아서 우문한도가 돌아 오기를 가슴 태우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우문한도
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백리빙은 기다리다 못해 몸을 날려 그 바위 뒤로 가 보았다.
바위 뒤에는 우문한도의 그림자도 찾아 볼 수가 없었나.
백리빙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거 큰일났구나. 우문선생이 납치를 당한 모양이다. 그러나 그의 무공도 약한 편은 아닌데 어
찌 이토록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가 있단 말인가?’
그녀는 머리를 돌려 못 가운데를 바라보았다. 눈에 띄는 것은 오가는 배뿐이고 소영의 그림자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총명한지라 이릴수록 마음을 굳게 먹어야만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녀는 곧 암암리에 진기를 끌어 모아 몸을 솟구쳐 올려 나무 위로 올라갔다. 나무 위에는 아무
런 매복도 없었다.
백리빙은 나무 꼭대기로 올라 가서 사방을 내려다 보았다.
십여 장이나 높은 절벽 아래 푸른 집 한 채가 보였다.
‘우문한도가 만일 납치되어 갔다면 저 집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가 가저 동정을 살펴
본 다음 어떤 이상이 발견되면 곧 다시 이곳으로 와서 우선 소영을 만난 다음 대거 수색을 해 보
리라.’
백리빙은 이런 결심을 한 다음 곧 나무 위에서 뛰어 내려 와 푸른 집으로 달려갔다.
가까이 가 보니 그 집은 한 채의 농가였다. 지붕 위에 청등(靑藤)이 잔뜩 엉겨 있어 위에서 볼
때는 꼭 지붕이 풀더미처림 보였던 것이다.
싸리문이 활짝 열려 있을 뿐만 아니라 방문도 채 닫히지 않아 그 안에 사람이 살고 있디는 흔적
이 역력했다.
백리빙은 헛기침을 한 번 크게 한 뒤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주인 계십니까?”
순간 안에서 매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빙아야, 들어오너라.”
그 음성은 바로 백리빙이 제일 믿음직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소영의 음성이었다.
백리빙은 곧장 달려 들어갔다.
“오빠도 여기 계셨군요?”
방 안에는 몇 개의 대나무 의자가 놓여 있고 소영과 무위도장 그리고 전엽청과 운양자 등이 앉
아 있었다. 무위도장이 약간 몸을 굽히며 백리빙을 맞이했다.
“낭자도 이리 앉으시오.”
그러나 백리빙은 우문한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무위도장의 인사에 답례도 잊은 채 입을 열었
다.
“오빠, 우문선생이 보이지 않네요?”
소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무위도장과 그 이야기를 하고 있던 중이란다.”
백리빙이 다그쳐 물었다.
“다들 알고 계셨던가요?”
“어떤 사람에게 납치되어 가는 것을 보았지요.”
“그 분이 저더러 부르기 전에는 절대로 올라 오지 말라고 하더니 기 어코 혼자서 납치를 당하셨
군요.”
그녀는 말을 마치자 소영의 옆에 가서 앉았다.
소영은 백리빙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빙아야, 너무 서두르지 마라. 무위도장의 말씀에 의하면 그분이 심목풍에게 잡혀간 것은 아니란
다.”
백리빙은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이곳에 심목풍 외에 또 다른 적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무위도장이 말을 받았다.
“대단한 역량을 지닌 사람이긴 한데 아직까지는 적인지 우방인지 잘 분간을 못하겠습니다.”
백리빙이 반문했다.
“그들이 어떻게 해서 우문선생을 잡아 가게 됐습니까?”
“우문형께서는 빈도와 보름달의 기한을 약속했는데 오늘이 그 마지막 날이지요. 그래서 며칠 전
부터 사제 몇 사람이 번갈아서 그곳으로 마중을 나갔었지요. 그러나 오늘은 마지막 날이니 틀림
없이 올 것이라 생각하며 약간의 안배를 해두었는데…”
백리빙이 말을 가로챘다.
“당신네들이 만나기로 한 장소가 바로 그 두 그루의 잣나무 밑이었나요?”
“그렇습니다. 그곳은 몹시 조용하고 사람의 왕래가 뜸한 데다 높은 나무와 큰 바위가 있어 몸을
숨기기에는 안성마춤이지요. 헌데 오늘 내가 그곳에 갔을 때는 이미 어떤 사람이 먼저 와 있었어
요.”
백리빙이 다그쳐 물었다.
“그게 누군데요?”
무위도장은 느릿느릿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었지요. 그 사람은 책 한 권을 들고 그곳에 앉아서 읽고 있었는데 그도 마치 사
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빈도는 그 자를 딴 데로 쫓아 보내려고 했지만 적당한
방법이 그 당시에 생각나지 않더군요.”
백리빙이 되물었다.
“그후 어떻게 됐어요? 그리고 그 사람이 심목풍의 부하가 아니라는 것을 도장께서는 어떻게 장
담할 수가 있어요?”
무위도장은 담담하게 웃었다.
“그 후 저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저의 무당 문하들에게 지시를 내렸어요. 당신네들을
중도에서 모셔 오라고. 그러나 당신네들이 훌륭한 솜씨로 변장을 하고 오는 바람에 알아 볼 수가
없었다오. 게다가 전사제의 말에 의하면 우문선생 혼자서 오실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이래저래
여러분들을 놓치고 말았지요. 그래서 나는 이거 큰일났다고 생각하며 곧 나의 얼굴에 분장했던
약물을 닦아 버리고 못 가에서 배회했지요. 그러다가 다행히 소대협을 만나서 그 약속한 장소로
허둥지둥 되돌아 왔지만 이미 때가 늦었어요.”
백리빙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우문선생이 납치당하는 현장을 목격했던가요?”
“보았지요.”
백리빙이 다그쳐 물었다.
“그런데 왜 뒤쫓지 않았어요?”
소영은 품속에서 박쥐 모양으로 생긴 물건을 꺼냈다.
“이렇게 생긴 괴상한 암기에 밀려나고 말았지, 나와 무위도장이 절벽 밑까지 쫓아 갔을 때 그
자는 우문선생을 옆구리에 끼고 절벽 위로 뛰어 올라 숲속으로 들어가 버렸어. 그러면서 이런 암
기를 쳐냈는데 그 때 마침 내가 앞에 서 있었기 때문에 천 년 묵은 교피 장갑을 끼고 이것을 받
아냈지…”
백리빙은 소영과 무위도장이 우문선생이 납치되어 간 경과를 태연히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우문선생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데 저들이 저처럼 태연할까?’
이 때 무위도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자는 소대협께서 맨손으로 자기가 던진 박쥐표를 받아내는 것을 보자 탄복하며 오늘 저녁
초경 무렵에 그 절벽 밑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했소.”
백리빙이 반문했다.
“도장께서는 그 자의 말을 믿습니까?”
“이 절벽 위로 올라 가서 숲으로 가는 길은 두 줄기밖에 없소. 빈도는 이미 사람을 보내고 통로
를 지키게 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소대협께서 이미 약속을 했으므로 오늘 밤에 만일 그 자가 약
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산에 불을 질러 버리겠소. 그 숲은 사방 오만 리는 족히 될 넓이지
만 마른 잡초와 낙엽과 덩굴이 많으므로 잘 탈 것입니다.”
백리빙은 그 말을 듣자 심목풍이 자기네들을 태워 죽이려고 하던 것이 생각나서 소름이 오싹 끼
쳤다.
백리빙은 소영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빠, 그들이 꼭 올까요?”
“나와 무위도장이 재삼 생각해 봤지만 그들은 절대로 불맛을 보려고는 하지 않을 거야.”
백리빙이 다시 물었다.
“오빠는 어떻게 그들이 심목풍의 부하가 아니라는 것을 단언할 수가 있어요?”
소영이 대답했다.
“어쨌든 그들이 우리의 적이라면 나를 해치려 할 텐데…”
무위도장이 말을 덧붙였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만약 심목풍의 부하라면 이미 우리들에게 손을 썼을 것입니다.”
이 때 갑자기 선부(船夫)차림을 한 사나이가 들어와서 무위도장에게 허리를 굽혔다.
“그 잣나무 밑 바위 옆에 또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어떻게 생긴 인물이냐?”
“가벼운 도포를 입은 노인입니다. 거리가 워낙 멀어서 그 모습을 똑똑히 달아 볼 수는 없었습니
다.”
무위도장이 소영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들의 추측이 틀림 없소. 그는 오해를 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지금 나타난 노인이 바로 그
들이 기다리고 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자 소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다면 제가 가 보고 오겠습니다.”
무위도장이 말을 받았다.
“빈도의 생각에는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소대협께서는 이미 오늘 밤에 약속을 하였으
니 좀 더 두고…”
소영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된다고 했소. 도장께서는 계획대로 일을 진행 시키십
시오. 제가 가보고 오겠습니다.”
소영은 다시 백리빙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너는 여기서 무위도장의 분부에 따르도록 해라.”
백리빙이 나직이 대답했다.
“요즘 저의 무공이 많이 발전했어요.”
소영은 빙그레 웃었다.
“알고 있어. 그러나 두 사람이 모험할 필요는 없어. 나는 이미 무위도장과 적을 상대할 수 있는
대책을 세워 놓았으니 너는 무위도장의 분부에 따르기만 하면 돼.”
소영은 말을 마치자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무위도장이 입을 열었다.
“이 박쥐 모양을 한 암기의 입엔 독침이 가득 들어 있소. 그래서 서투른 사람이 손으로 막든, 무
기로 막든 잘못 건드려서 이 쇠박쥐를 진동시키면 곧 독침을 뿜어 내게 마련이오. 만약 소대협께
서 받아내지 않았더라면 빈도는 아마 이 박쥐의 입에 든 독침에 상했을 것이오.”
백리빙은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사라져 가는 소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
었다.
“도장, 우리 가서 오빠를 도와 줘야 하지 않겠어요?”
무위도장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오. 우리는 한 번의 실수는 하였을 망정 두 번 다시 실수를 해서는 안 되오. 빈도는 이미
중요한 길목마다 사람을 안배해 놓았으니 그가 어느 쪽으로 가든 우리의 감시망을 빠져 나가기는
힘들 것이오.”
백리빙이 말을 이었다.
“만약 그가 우리 오빠를 해치게 되면 어떡하지요?”
“소대협의 무공을 당해 낼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백리빙은 걱정스런 모습이었다.
“그들이 무공을 한다면 물론 우리 오빠를 해치지 못하겠지만 그러나 강호의 인물들은 모두가 지
모를 많이 쓰므로 그들이 혹시 암암리에 기습을 할까 두렵습니다.”
무위도장이 말을 이었다.
“낭자께서 그다지 마음을 놓지 못하겠다면 내게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만…”
백리빙이 반색을 하며 물었다.
“무슨 방법인데요?”
“집 뒤에 소 한 마리가 있으니 낭자께서 목동 차림을 하고 소를 타고 가게 되면 소대협과 그 자
가 의심을 품지 않게 될 것입니다.”
백리빙은 그 말을 듣자 크게 기뻐했다.
“도장의 방법은 과연 고명하십니다. 제가 곧 변장을 하겠습니다.”
잠시 후 백리빙은 목동 차림을 하고는 소 위에 올라 탔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 잣나무 밑으로
향해 소를 몰았다.
한편 소영은 나는 듯이 달려 그 잣나무 아래로 갔다.
거기에는 과연 흰 수염을 가슴까지 늘려뜨린 한 노인이 서서 주위를 살펴 보고 있었다. 그러나
소영이 가까이 가는 데도 이 노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소영은 일부러 인기척을 냈다. 그러나 노인은 여전히 싸늘한 시선으로 소영을 힐끗 바라보고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소영이 만약 이 때 인피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다면 멋적어서 붉어진 얼굴이 드러났을 것이다.
소영은 끓어 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참으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선배…”
노인은 소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곧 몸을 돌리며 물었다.
“이 노부에게 할 말이 있나?”
“그렇습니다. 노선배님께서는 이곳에서 누굴 기다리고 계십니까?”
노인은 코웃음을 쳤다.
“흥, 너는?…”
소영은 역시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후배는 명을 받들고 왔습니다.”
“누구의 명을 받들고 왔느냐?”
소영은 이미 무위도장과 계획을 짜 놓은지라 웃으면서 대답했다.
“노선배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는 분의 명령을 받고 왔습지요.”
그러자 노인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가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
소영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분은 저기 보이는 저 푸른 집안에 계십니다. 노선배님께서는 저를 따라 오시지요.”
그러자 노인은 화를 버럭 냈다.
“그가 직접 나를 모시러 올 일이지 거가 그를 찾아 가야 한다고… 나는 지금 천 리 길을 멀다하
지 않고 여기까지 왔거늘 그는 나를 완전히 잊었단 말인가?”
소영이 대답했다.
“그건 두 분 사이의 일이니 제가 감히 무어라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말씀을 직접 만나서
하십시오.”
노인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노부가 가서 만나 보도록 하지.”
이들이 막 걸츰을 옮겨 놓으려는데 사람의 그림가가 번쩍이더니 유성처럼 달려오는 한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순식간에 소영의 앞으로 다가와서 길을 가로막았다.
소영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그는 사십 정도 되어 보이는 보통 체격이었으며 긴 바지에 단삼
(短衫)을 입고 있었다.
그의 몸차림의 매우 경쾌해 보였으며 눈에는 광채가 번쩍이고 어디로 보나 내외의 공력을 겸비
한 고수 같았다.
이 때 그 흰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이 차가움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또 누구냐?”
사나이는 소영을 한 번 힐끗 바라본 다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사람을 맞으로 온 사람입니다만 노선배님께서는 노인은 소영을 한 번 바라보고는 의아한
듯 물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소영은 이미 이 노인이 절기를 지닌 고수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므로 만일 노인과 맞붙게
된다면 많은 시간을 끌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겉으로는 시치미를 딱 떼고 모르는 척하고 대답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달려 온 사나이가 소영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이분은 노선배님의 동행이 아니십니까?”
노인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도 명을 받들고 노부를 마중 나온 자냐? 무슨 연극들을 하고 있는 거냐?”
사나이가 소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요?”
“저는 이 노선배님을 모셔 오라는 명령을 받고 온 사람이오.”
사나이가 말을 이었다.
“이 노선배님이 뉘신지 당신은 알기나 하오?”
소영은 속으로 어차피 손을 쓰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저는 알고 있소만 당신에게 알려 줄 수가 없소이다.”
그러자 사나이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허튼 수작 마라!”
사나이는 말을 마치자 갑자기 몸을 날려 소영을 향해 일장을 쳐냈다. 소영은 곧 좌장을 들어 사
나이의 일장을 맞받으며 입으로는 냉랭하게 외쳤다.
“귀하가 이렇게 사람을 해치려는 저의는 어디 있소?”
두 장이 맞부딪치자 펑, 하는 소리가 났다.
순간 그 사나이는 진동을 받아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은 갑자기 하하, 하고 웃어젖혔다.
“한 번 겨루어 보아라. 누가 이기나. 이 노부는 이기는 자를 따라가리라.”
사나이는 노인의 말을 듣고는 소영에게로 덮쳐 오며 주먹을 휘둘러 공격을 가해 왔다.
소영도 오른손을 휘둘러 마주 공격해 갔다. 한바탕 악투가 벌어졌다.
그 사나이는 무공이 대단했으며 따라서 공세 또한 맹렬했다.
그러나 소영의 무공은 지금 초인적인 경지에 이르러 있었으므로 장풍을 휘두르고 지풍을 퉁겨
내자 가볍게 그의 맹렬한 공격을 물리칠 수 있었다.
사나이는 단숨에 이십여 초를 공격해 갔지만 소영은 거뜬히 그것을 막을 수 있었다.
노인은 소영이 막기만 하고 공격하지 않는 것을 보자 이렇게 외쳤다.
“왜 공격을 하지 않느냐?”
소영은 미소를 지으면서 그제야 반격을 개시하여 불과 삼 초 만에 그 사나이의 혈도를 찍어 버
렸다.
노인은 그 광경을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소영은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저는 소영이라 하옵니다.”
노인이 소영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당신이 바로 현째 강호인의 존경을 받고 있는 소영이오?”
“제가 바로 보잘것 없는 소영입니다.”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내가 아는 소영은 멋이 있고 남아답게 생겼다고 들었는데, 당신 같은 그런 용모가 어
찌…”
소영은 얼굴을 가렸던 인피가면을 벗어 버렸다.
“노선배님께서 들으신 소영과 닮았습니까?”
노인은 소영을 다시 한 번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렇군. 비슷한 것 같은데…”
값자기 노인의 안색이 일변했다.
“아아, 그렇군. 자네는 노화상의 초청을 받고 와서 그를 도와 주려 하는구먼!”
소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후배는 쌍방을 다 모릅니다. 그러니 누구의 초청을 받고 왔을 리가 없습니다. 다만
저에게는 이곳에 나오지 않으면 안 될 사정이 있었습니다.”
노인이 반문했다.
“그건 무슨 말인가?”
“제 친구가 이곳에서 누구와 만나기로 약속을 했었는데 어떤 사람이 제 친구를 노선배님으로 오
인하여 데리고 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쩔 수 없이 나선 것입니다.”
노인은 그제야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랬었구먼!”
노인의 음성은 갑자기 또 냉엄하게 변했다.
“듣자하니 자네가 금궁에 들어 갔다고?”
소영은 어리둥절했다.
“그렇습니다만…”
노인이 물었다.
“금궁의 건축 솜씨가 어떻던가?”
소영은 노인이 값자기 금궁의 얘기를 꺼내자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건축의 솜씨가 기묘하고도 정교하더군요.”
노인은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음, 이 노부의 솜씨도 그 정도면 대단하지?”
소영은 그 말을 듣자 마치 머리를 쇠망치로 얻어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소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노인을 자세히 뜯어 보았다.
“노선배님께서…”
노인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건축은 이 노부의 솜씨일세.”
“그렇다면 포일천 노선배님이시군요?”
“그렇지, 바로 노부야.”
소영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노선배님께서는 금궁 속에서 돌아가시지 않았던가요?”
포일천은 천천히 말을 받았다.
“자네는 여태껏 자기가 파 놓은 무덤에 자신이 묻혀 죽는 것을 본 일이 있는가?”
소영은 가벼운 탄식을 했다.
“노선배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그 금궁을 건축한 것은 그 십대 고수들 열 명을 일망타진하려는…
”
포일천은 탄식하듯 말을 받았다.
“열 명이 아니라 그 장미화상까지 합하면 모두 열한 명이지, 단지 무림에 열 명이라고 잘못 알
려졌을 뿐이야.”
노인은 갑자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노부는 단지 그들의 지혜를 시험해 보려 한 것이지. 그래서 출구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들이 거
의 그 안에서 죽어 버릴 줄이야…”
소영이 물었다.
“거의가 그 안에서 죽어 버렸다니 그렇다면 살아 나온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장미화상 한 사람뿐이지.”
“노선배님과 장미화상 두 분이 그 안에서 빠져 나오셨다면 어찌하여 금궁 안에는 또 열 구의 시
체가 남아 있는 것입니까?”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응수했다.
“그렇지. 그 중의 한 사람은 노부의 제자야. 그가 내 대신 금궁에서 죽었지.”
소영은 그제야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맞군요. 그런데 노선배님께서는 금궁에서 빠져나온 후 수십 년 동안이나 강호에 출현
하지 않으셨다가 이번에 나오신 것을 보니 아마 무슨 큰일이 있으신 것 같군요.”
노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노부가 십대 고수를 금궁에 생매장하고 나서는 강호는 노부의 천하라고 생각하고 한창 흥이 나
있는 판에 장미화상이 돌연 노부를 찾아올 줄이야.”
소영이 말을 가로챘다.
“그래서 두 분께서는 한바탕 겨루셨나요?”
포일천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직이 말했다.
“그렇지, 그는 노부에게 마음이 검고 비겁하니 영웅 자격이 없다고 욕설을 퍼부었지. 그가 금궁
에서 죽어간 고수들의 복수를 하겠다고 해서 한바탕 악투를 벌였었지. 결국은… 둘 다 부상을 당
했지만…”
소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믿을 수 없는데요?”
포일천이 말을 받았다.
“너는 나이가 너무 어리므로 우리가 다투고 할 때는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다.”
포일천은 말을 잠시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노부는 장미화상과의 격투에서 실은 패한 셈이지, 그러나…”
소영이 말을 가로챘다.
“노선배님이 암수를 써서 장미태사를 부상시켰단 말씀입니까?”
포일천은 그 말을 듣자 눈이 휘둥그래졌다.
“네 말이 맞았다. 노부는 장미대사가 이겼다고 마음 놓고 있는 틈에 독가루를 그에게 끼얹었지.”
소영은 탄식을 했다.
“장미대사께서 노선배님을 악랄하고 비겁하다고 한 말이 맞는군요.”
포일천은 소영의 질책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장미대사는 독가루에 중독되자 미친 듯이 도망을 가버렸다. 그 후 나도 수년 동안이나 용양을
한 끝에 다시 상세를 회복했지. 그후 심한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장미대사의 독을 풀어 주려고 해
독약을 가지고 그를 찾아 나섰지만 도무지 그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지.”
포일천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노부는 실망한 나머지 외딴 곳에 한 채의 집을 짓고 방안에 틀어 박혀 세월을 보내며 다시는
강호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노부의 생각으로는 그렇게 되면 말라 죽을 것이라 짐작했는데 오
히려 이상하게도 날이 갈수록 노부의 건강은 좋아지며 무공 또한 커다란 진전을 보인 것 같았
네.”
소영이 말을 받았다.
“그런데 노선배님께서 이번에 그 집을 버리고 나온 뜻은 무엇입니까?”
“작년에 노부는 장미화상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지. 오늘 여기서 만나자는… 그래서 노부는
편지를 받은 칠 일 만에 그 집을 버리고 강호로 나왔지, 왜냐하면 언제든 한 번은 그 집에서 나
와야 할 테니까. 하루라도 빨리 난가서 강호의 동정이나 살펴 볼 양으로 말이야. 그래서 자네의
쟁쟁한 이름도 듣게 되었지.”
소영이 물었다.
“노선배님께서는 장미대사를 만나시면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포일천은 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입을 열었다.
“노부가 구대 고수를 생매장해 버렸을 뿐만 아니라 악랄한 수법으로 장미대사마저 부상시켰으니
그가 나를 칼로 저민다 하더라도 달게 받아야지. 허지만 노부가 그 동안에 정진한 무공은 죽기
전에 한 번 증명해 보여야지.”
소영은 포일천의 말이 장미대사와 생사의 판가름을 해보겠다는 뜻임을 곧 알 수 있었다.
포일천은 긴 한숨을 내쉰 다음 다시 말을 이었나.
“노부가 수십 년 동안 조용한 가운데서 터득한 무공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장미대사와 대결하는
수밖에 없지. 지금의 무림에서는 그 적수가 없을 테니까…”
소영이 되물었다.
“노선배님의 말씀을 들어 보니 장미대사와 한 번 겨루어 보겠다는 말씀이시군요?”
포일천이 대답했다.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지. 허지만 노부는 다만 무공을 시험해 보고자 할 뿐이야. 그 다음에 이
기든 지든 자결을 할 작정이니까.”
‘이 노인은 과연 괴팍스러운 성격을 지녔구나. 보통 사람의 생각으로는 감히 예측도 못할 정도
로…’
이 때 목동 한 명이 소를 타고 소영에게로 다가오다가 소영을 몇 번 바라본 다음 방향을 돌려
멀어져 갔다.
포일천은 그 목동을 뚫어지도록 바라본 다음 말했다.
“저 목동은 무림인의 변장임에 틀림없다.”
소영은 이미 그 사람이 백리빙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노인은 굉장한 안력을 지녔구나.’
소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노선배님께서는 저의 신분을 아셨으니 제가 이번 일에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을 자연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나이는 진짜 노선배님을 마중 나온 사람입니까?”
“그렇지. 노부가 어서 그의 혈도를 풀어 줘야겠구나.”
포일천은 곧 허리를 굽혀 그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그 사나이는 비록 혈도를 찍혀 말은 할 수 없었지만 귀로 들을 수는 있었다. 그래서 그 동안에
두 사람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있었으므로 그들의 신분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는 혈
도가 풀린 다음에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소영이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께서는 지금 장미대사를 만나러 가실 생각입니까?”
“그렇지.”
소영은 포권을 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 후배가 한 가지 염치 없는 부탁을 해야겠는데 들어주시겠는지요?”
“무슨 일인데? 어서 말부터 해보렴.”
“노선배님께서 장미대사를 만나실 때 후배는 저의 친구 몇 사람과 함께 노선배님의 뒤를 따라
선배 고인들을 배알하고저 합니다.”
포일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노부는 응낙할 수가 있지만 장미대사가 너희들을 만나 주려는지가 의문이구나.”
소영이 재빨리 말을 받았다.
“노선배님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저희들은 따라 갔다가 만일 장미대사가 거절하면 다시 돌아오겠
습니다.”
포일천이 반문했다.
“친구가 몇이나 되며 그들은 도대체 어떤 신분을 가진 사람들인가?”
“무당 장문인 무위도장과 운양자, 전엽청 그리고 북천존자의 공주 백리빙입니다.”
포일천은 다시 무슨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좋아, 노부가 데려 가지. 하지만 그 장미대사가 만나지 않겠다 해도 나를 탓하지는 말아라.”
소영은 매우 기뻤다.
“빙아야! 빨리 이리로 오너라.”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수십 장 밖에서 소를 타고 있던 목동이 돌연 소등에서 뛰어 내려소영에게로 달려왔다.
“저 사람은 누구냐?”
포일천이 물었다.
“백리낭자입니다. 제가 조금 전에 노선배님께 말씀 드린…”
포일천은 백리빙을 바라보며 말했다.
“영존(令尊) 북천존자는 노부와 잘 알지.”
소영이 얼른 백리빙에게 말했다.
“이 분은 포일천 노선배님이시다. 빨리 인사를 올려라.”
백리빙은 곧 포일천에게 큰절을 했다.
“노선배님께 인사를 드립니다.”
포일천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는 소영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우리 이제 그만 가볼까?”
소영이 난처한 듯 말했다.
“무위도장 등 세 사람이 동행해야 할 텐데요.”
“그들은 지금 어디 있는지?”
“저 푸른 집에 있습니다. 노선배님께서도 저리로 가셔서 차 한 잔 드시고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
까?”
포일천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장미대사가 참아 낼는지?”
그는 시선을 사나이에게로 돌렸다.
“자네가 장미대사의 명을 받들고 노부를 마중 나왔나?”
“예, 그렇습니다. 후배가 노선배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포일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장미대사께서 거처하고 계시는 곳이 여기서 먼가?”
“십 리도 채 못 됩니다. 저 산에만 오르면 당도할 수 있지요.”
포일천이 다시 물었다.
“노부가 이들에게 잡혀 있는 것을 그도 보았겠지?”
“예, 그럴 겁니다.”
“그럼 됐어. 노부가 잠시 쉬었다가 가도 괜찮겠지.”
포일천은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정 겁이 난다면 먼저 돌아가서 장미대사에게 노부가 잠시 어디 들렀다가 가겠다고 하더라
고 말씀 드려라. 그렇지 않다면 우리와 같이 가도 좋다.”
사나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저도 노선배님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좋아, 우리 들렀다가 가도록 하지.”
포일천은 앞장서서 푸른 집을 향해 걸어갔다.
무위도장 등은 소영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라 반색을 하며 소영을 맞이했다. 소영은 무위도장에
게 속삭이듯 말했다.
“도장, 이 분이 바로 금궁을 건축하신 포일천 노선배이십니다.”
무위도장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렇다면 이 분이 바로 교수신공…”
“바로 맞았습니다.”
무위도장은 곧 일어나서 포일천을 향해 포권을 했다.
“실례했습니다.”
포일천은 미소를 지었다.
“원 별말씀을, 우리가 서로 모르는 사이이니 당신이 노부를 몰라 보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요.”
이 때 운양자와 전엽청도 모두 그 자리에 있었다.
포일천은 황급히 말했다.
“장미대사가 초조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서 길을 안내하거라.”
포일천은 따라 온 그 사나이에게 손짓을 했다.
그 사나이는 곧 앞장서서 걸었다.
이 때 소영은 무위도장에게 나직이 말했다.
“도장, 따라 가서 구경 좀 합시다. 제가 응낙을 받았으니까.”
무위도장은 기쁜 표정이었다.
사나이를 따라 포일천, 소영, 무위도장, 백리빙, 전엽청, 운양자의 순서로 열을 지어 걸어 갔다.
이윽고 이들은 절벽 위의 숲 있는 곳에 이르렀다.
숲속 깊숙이 자리잡은 홍루(紅樓)의 일부분이 엿보였다.
포일천이 흥루를 바라보며 말했다.
“바로 저 안에 계신가?”
“그렇습니다.”
이들은 걸음을 서둘러 곧 밀림 속에 있는 홍루의 문전에 이르렀다.
사나이가 포일천을 돌아보며 말했다.
“노선배님께서는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들어가서 보고를 하고 오겠습니다.”
“갔다 오너라.”
사나이는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은 퍽 조용하고 쓸쓸해 보였다. 결코 사람이라고는 눈에 띄지 않았다.
소영이 무위도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도장께서는 이곳에 오랫동안 머물렀으니 홍루에 대해서 아시는 바가 있겠지요?”
무위도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끄러운 얘기오만 이곳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으면서도 이 집이 있다는 것은 몰랐소. 오늘 비
로소 와 보게 된 것이오.”
소영이 말했다.
“이 집은 몹시 괴상하게 지었군요. 보통 사람이 사는 주택 같지는 않습니다.”
이 때 포일천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람이 살기엔 몹시 불편한 집이군!”
이 때 그 사나이가 다시 나왔다.
“장미대사는 계신가”
“예, 노선배님께서 빨리 듭시도록 기다리고 계십니다.”
소영이 사나이에게 물었다.
“우리들은 들어갈 수 없소?”
사나이가 대답했다.
“제가 말씀 드렸더니 노선사(老禪師)께서 소대협은 후배 중의 총아(龍兒)이시니 잘 대접해 드리
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소영이 말을 받았다.
“과분하신 말씀입니다.”
사나이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여러분들의 얘기를 했던 바 모두 만나 보시겠다니 여러분들도 함께 드십시오.”
대청 안에서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포시주이십니까?”
포일천은 하하, 하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대사, 그 동안 안녕하셨소?”
포일천은 천천히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소영도 뒤따라 들어갔다.
대청 안에는 도포를 입고 눈을 지그시 내리감은 노승이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흰 눈썹이 길게 자라 감은 두 눈을 덮고 있었다.
그리고 노승의 뒤에는 서른 대여섯 살 가량의 청의인이 서 있었으며 그 오른쪽에는 우문한도가
앉아 있었다.
“소대협, 포시주 모두들 앉으시오.”
포일천이 먼저 나무의자에 앉자 소영과 무위도장 등도 모두 따라 앉았다.
소영은 우문한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문선생, 별고 없으셨습니까?”
우문한도는 미소를 지었다.
“예, 소대협의 덕분에… 그런데 저의 실수가 오히려 전화위복이되어 노선사님을 찾아 뵙게 되었
군요.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장미대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히려 이 늙은이에게 강호의 정세를 알게 해주었지.”
소영은 장미대사를 눈여겨 바라보았다. 그의 긴 눈썹은 눈을 덮고 있었으며 긴 수염은 또한 땅
바닥에까지 닿을 정도였다.
그리고 양쪽 볼에는 상처 자국이 있었는데 마치 예리한 칼로 살을 도려낸 것처럼 움푹 파여 있
었다.
그는 말을 하면서도 눈은 그대로 감은 채였다.
포일천이 돌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포모는 이 날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소. 노선사께서 이렇게 저를 부른 것은 틀림없이 옛 빚을
갚으시겠다는 게 아닙니까?”
장미대사가 입을 열었다.
“노승은 원래 주인의 예를 갖추려고 했지만 포시주께서 그토록 바쁘시다면 생략하는 수밖에 없
겠구려.”
포일천이 대답했다.
“강산은 변해도 본성은 변하지 않는 것이오. 저는 아직도 그 급한 성미가 남아 있소. 그러나 노
선사께서는 먼저 저를 부른 이유부터 설명해 주시오.”
장미대사는 즉시 대답했다.
“노승은 부처님의 무변한 불법에 부끄러운 얘기입니다만 저의 가슴 속에 맺힌 원한의 덩어리를
풀어 버릴 수가 없구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저도 수십 년 동안 그것 때문에 불안을 느껴 왔습니다. 원래 자결을 해야
만 옳았을 일이지만 노선사께서 아직도 세상에 살아 계시리라고 믿은 노승은 어쩔 수 없이 죄많
은 목숨을 이어가며 노선사의 탁견(卓見)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아, 노승이 우문시주에게 들은 바에 의하떤 당금 강호에서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소. 만일 장산패, 남일공, 유선자가 합력하며 소대협을 길러 내지 않았던들 오늘날의 강호는 참
혹한 정경이 되고 말았을 거요. 모든 것이 다 인과응보라 그 화근은 수 십 년 전 포시주가 너무
도 공명심을 가졌던데 기인하는 것 같소.”
장미대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지난 일을 회상하는 듯했다. 이윽고 그는 말을 이었다.
“포시주께서도 아시겠지만 그 십대 고수들은 처음부터 그 무공의 고하가 가려졌던 것이오. 허지
만 이들은 시종 미묘한 균형을 유지해 왔소. 바꾸어 말한다면 그분들이 영원히 승부를 가려내지
않음으로써 각자가 모두 자기의 강렬한 신념과 자부심에 살 수 있었던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