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 Finger RAW novel - Chapter 25
25. 빗겨가는 구원의 손길
흑의 대한의 얼굴에는 기쁜 표정이 물결처럼 나타났다.
“다르다. 전혀 다르다. 내가 천하를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의
피를 맛보았지만 당신의 피가 가장 좋소.”
소영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강호의 경력이 얕은 그는 흑의 대
한의 말이 과상하게 들렸다.
“보아하니 노선배님은 의술이 매우 높은 것 같은데요….”
“물론, 노부의 의술은 자랑할 만하지. 현세에 천하를 다 뒤져도
나보다 의술에 정통한 사람은 없을 것이오.”
흑의 노인은 옥잔을 내려 놓으며 말을 이었다.
“딸의 병세도…. 노부의 의술이 아니었더라면 벌써 죽었을 것이
오. 그애의 목숨이 천 개라 할지라도 소용없었지.”
“노선배께서 그토록 놀라운 의술을 지니셨는데 어째서 따님의 병
을 고치지 못하십니까?”
흑의 노인은 소영의 질문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노부가 비록 의술에 정통해 있지만 양약(良藥)을 구하기가 몹시
어려웠소. 그런데 마침내 약을 찾았소.”
“그 약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황폐한 이 사당 안에 있소!”
소영은 눈이 휘등그래져서 사방을 둘러 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흑의 대한은 껄껄 웃었다.
“딸은 비록 중병에 걸려 초췌해졌지만 아름다움은 그대로 간직하
고 있네. 내 딸의 얼굴을 한 번 보겠나?”
“조금 전에 제가 아무 것도 모르고 따님에게 실례를 했지만…
어찌 또 실례되는 일을 하겠습니까?”
소영이 거절했으나 흑의 대한은 관뚜껑을 열면서 말했다.
“노부가 옆에 있으니 봐도 괜찮네.”
소영은 관을 들여다 보려고 허리를 구부렸다.
이 때였다. 흑의 대한이 손을 뻗쳐 소영의 허리에 있는 경문혈
(京問穴)을 찔렀다.
“아차!”
소영은 재빨리 손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의 왼쪽 팔 천정(天井)
과 곡지(曲地)의 두 혈도가 마비되고, 뒤이어 오추(五樞)와 유도
(由道)두 혈도가 찍혔다. 전신의 다섯 군데에 혈도를 찍힌 소영은
꼼짝할 수가 없어 그는 전신을 부르르 떨다가 땅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하하, 너는 뜻밖에도 이처럼 공력을 지녔구나. 내공의 힘이 굉
장한데… 하지만 아깝다. 아까와….”
소영은 다섯 군데의 혈도를 찍혀서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아혈(啞穴)은 찍히지 않았기 때문에 말을 할 수가 있었다.
그는 격분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비겁하다! 내가 조심했어야 하는 것인데… 너의 말에 속아 암
습을 당하다니… 사나이로서 죽음을 두려워하진 않지만 너무 억울
하다…”
“흐흐…… 꼬마야, 딸이 무서운 병으로 고생하는 것을 지켜 보
며 약이 없어 애태우는 부모의 속을 알아다오. 어쨌든 네가 내 딸
을 살려 준 은인이기에 먼저 감사하겠다.”
“여보시오! 입에 발린 소리는 치우시오. 나보고 당신의 딸을 살
려달랄 생각이 있으면 좋게 의논할 일이지, 비겁하게.”
“허허, 이런 일은 의논해서 될 일이 아니야.”
흑의 대한은 기침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네 몸의 피를 내 딸에게 주입시켜야 병을 완전히 고칠 수 있다.
피가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너를 죽일 수밖에 없다.”
소영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치료 방법이 있었나? 전혀 듣지 못했는데….”
“흐흐, 노부가 현세의 초인적 의사라는 것을 잊은 모양이군. 이
런 일은 노부에게는 손바닥을 뒤집는 일보다 쉬운 일이다.”
“노부는 네 시진 안에 내 딸에게 피를 넣어 주어야 한다. 내 딸
의 혈맥 속에 네 피가 뛰고 있을 테니 너는 죽었어도 산 것과 다름
없으니 너무 원통하게 생각지 마라.”
흑의 대한의 입에서 네 시진이란 말을 들은 소영은 한 줄기 희망
이 솟았다.
‘나는 은사에게서 운기충혈(運氣衝穴)을 배웠다. 만일 한 시각만
내 몸에 손을 대지 않는다면 나는 스스로 혈도를 풀 수 있다.’
그는 코웃음을 치며 흑의 대한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실은 너를 죽이지 않아도 될 방법이 있긴 하다. 너에게 보혈약
을 칠 일 간 먹인 후 피를 뽑으면 네 생명은 살아날 수 있지. 하지
만 방금 노부가 너의 혈도를 찍으며 보니 너는 이미 놀라운 내공을
지니고 있어. 만일 너를 살려 준다면 반드시 화를 당할 것 같아 아
예 없애 버리려는 것이다.”
“나의 피로 당신의 딸을 살리는 것은 좋지만 나의 생명까지 뺏으
려 들다니 정말 악독한 의사로군.”
“흐흐, 무림의 사람들은 노부를 독수약왕(毒手藥王)이라고 부른
다. 이 칭호가 괜히 붙여진 줄 아나?”
소영은 은근히 진기를 조식하며 혈도가 풀리기를 기다렸다. 그러
나 독수약왕은 이러한 소영을 그대로 놔 두지 않았다. 품 안에서
한 개의 은침(銀針)을 꺼내 들고 한 발 다가섰다.
“노부는 비록 너의 사부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네가 운기충혈의
내공을 할 줄 알 것 같기에 미리 손을 써야겠다.”
“뭐라고!”
“흐흐, 독수약왕이 그처럼 쉽게 넘어가지는 않는다.”
말과 동시에 손을 뻗쳐 소영의 천돌혈(千突穴)을 은침으로 찔렀
다.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천돌혈은 임맥(任脈)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너는 이제 운기할
능력이 없어졌다.”
소영은 한 조각 희망마저 무너지자 소영은 무거운 한숨만 내쉬었
다.
‘뜻밖에도 나는 적과의 싸움에서 죽지 않고 전신의 피를 남에게
쏟아 주고 죽게 되었구나.’
독수약왕은 웃으며 관 속에서 자기 딸을 안아 일으켰다. 그는 소
녀를 안고 밖으로 나가더니 잠시 뒤에 다시 들어 왔다.
“자, 내 딸의 생명을 구해 줄 은인에게 가 보실까?”
그는 소영을 안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소영을 안고 들어선 곳
은 바로 옆방이었다.
이 방에는 가구와 몇 가지의 괴상한 도구들이 널려 있었다. 독수
약왕은 소영을 방바닥에 내려 놓았다. 소녀는 깨끗한 요위에 눕혀
져 있었다.
‘이제 바랄 것은 중주이고가 이곳에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 뿐
이다.’
소영이 낙담하고 있는 사이에 날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독수약왕은 두 개의 철관을 꺼냈다. 철관 사이는 가죽으로 연결
되어 있었다.
“흐흐흐. 네가 편하게 죽고 싶으면 노부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것
이 좋다. 만일 끝까지 노부를 화나게 하면 너는 죽을 때까지 고통
을 면치 못할 것이다.”
소영은 분노가 치밀어 이를 바드득 갈았다, 당장 뛰어 일어나 독
수약왕을 일격에 때려 죽이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안
타까울 뿐이었다.
독수약왕은 소녀의 곁으로 다가가더니 두 손으로 소녀의 옷고름
을 풀었다. 백설같은 소녀의 피부가 옷깃 사이로 살짝 드러났다.
독수약왕은 소녀의 몸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거칠게 호흡을 내는
것으로 보아 무척 힘드는 모양이었다.
잠시후 독수약왕이 아닌 다른 사람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것
은 소녀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이었다.
소녀는 쌕쌕 약한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소녀가 숨을 쉬자 독
수약왕은 떨리는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다.
“얘야, 오늘 밤만 지나면 너는 건강해진다. 이 애비가 이제부터
는 너를 데리고 전국의 명승고적을 유람하며 즐거움을 마음껏 안겨
주마. 너는 이제 행복해질 것이다.”
소영은 가슴 속에서 뭉클 치미는 것이 있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더니 독수약왕도 약독한 수
법으로 내 생명을 끊으려고는 하지만 역시 자애스러운 어버이로구
나.’
소녀의 호흡이 점점 높아지더니 정상적인 상태를 되찾아 갔다.
“아버지, 여기가 어디에요?”
“여기는 우리가 타인에게서 임시로 빌린 집이다. 너는 어서 운기
를 조식하여 나의 내공을 받아들이도록 해라. 혈맥이 완전히 유통
되면 즉시 내가 네 병을 고쳐 주겠다.”
독수약왕이 갑자기 입을 다물며 숨소리를 죽였다. 그의 손이 미
끄러지듯 소녀의 혈도를 찍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
는 발소리가 가볍게 들렸다.
순간 소영의 가슴엔 쿵쿵거리며 가벼운 흥분이 일었다.
‘누구든 상관없다. 사람만 나타난다면 나는 큰소리로 구원을 청
해야겠다.’
그러나 소영은 또다시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 버렸다. 독
수약왕의 손이 그의 아혈을 찔러 버린 것이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와지고 있었다.
“이 며칠 동안 우리가 계속 달려 왔어도 용두대가(龍頭代歌 : 두
목, 큰형)와 연락이 되지 않으니….”
그 음성을 들은 소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두구의 음성이
었던 것이다. 두구의 말을 받아 입을 연 사람은 상팔이었다.
“그 심목풍은 매우 간교하고 음흉한 놈이지. 그놈은 어떤 악독한
짓도 다 할 수 있는 놈이야.”
두 사람의 음성은 소영을 미칠 듯한 아타까움 속으로 몰아 넣었
다.
‘중주이고가 바로 문 앞에 있으니 내가 작은 신음소리만 내도 알
아 듣고 달려 올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사
지가 멀쩡하면서도 움직일 수 없으니 절망이다. 형제를 바로 앞에
두고도 나는 찍소리 못하고 죽게 되는구나.’
소영이 절망과 안타까움에 속을 태우고 있는데 다시 두구의 말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심목풍이 우리 소대협을 살해한단 말이오?”
“살해는 않더라도 다른 방법으로 손아귀에 틀어 쥘 것이네. 그놈
은 흉칙스럽고 비상한 놈이야. 그놈이 하는 일은 곁에서 보면서도
모를 정도야.”
“옛날 그놈이 소림파의 고승(高僧) 네 명을 죽이는 것을 나는 목
격했었네. 그 수단이 어찌나 교묘하고 잔인한지 그가 사람이라면
그렇게는 못할걸세.”
“그러니 우리가 무슨 대책이든 빨리 세워 소대협의 소식을 알아
내야 하지 않겠소?”
초조한 듯한 두구의 소리는 소영을 감격시켰다.
두구의 말에 대답하는 상팔의 음성이 들렸다.
“그렇지. 우리는 속히 소대협의 소식을 알아 내야 하네. 보아하
니 다른 방도는 없을 것 같고….. 백화산장으로 가서 모험을 할
수밖에 없겠네.”
‘백화산장은 겹겹이 경계망인데 당신들이 어떻게 뚫겠소? 지금
눈앞에 있는 문을 열기만 하면 나를 만날 텐데….’
소영의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독수약왕은 소영이 진기를 끌어 모으는 것을 눈치채고 재빨리 손
을 놀렸다. 그는 소영의 현기혈(玄機穴)을 찍으며 전음입밀(傳音人
密 : 다른 사람에게 조금도 들리지 않게 의사를 전달하는 수법)을
사용해 소영에게 말했다.
“어리석은 생각을 하면 심장을 뚫어버릴 테다.”
소영은 희망을 끊어버린 채 울분만 씹었다.
“이 편지를 관(棺) 속에다 두고 갑시다. 만일 소대협이 이곳에
온다면 우리의 행방을 알 수 있도록 해야지요.”
“그게 좋겠네.”
두 사람의 발소리가 방문 앞을 떠났다. 그들이 기척이 완전히 사
라지자 독수약왕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네가 만일 어리석은 생각을 한다면… 그 때는 내가 너무 잔인
하다고 욕할 시간도 없게 될 것이다.”
말을 마친 그는 뒷창문을 훌쩍 뛰어 넘어 밖으로 사라졌다.
독수약왕은 잠시 후 들창문을 넘어 들어 왔다.
그는 방안으로 들어서면서 중얼거렸다.
“중주이고는 평생을 다른 사람과 손잡고 일했던 적이 없었는데
…. 그 놈들이 어떻게 해서 용두대가란 자를 받들고 있을까?”
독수약왕은 소영을 힐끗 바라 보았다.
“오늘 밤 누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기를 빌겠다.”
그는 철관을 집어 들고 한동안 만지작거리더니 소영의 곁으로 다
가앉았다.
‘아! 이제 내 피를 뽑으려는 모양이로구나!’
소영은 전신에 전율을 느꼈다. 그의 예상대로 독수약왕은 예리한
철관의 끝을 소영의 왼팔 혈관에 꽂았다. 독수약왕은 엄숙한 표정
으로 숨을 죽인 채 조심스럽게 철관의 다른 끝을 소녀의 오른팔에
찔렀다.
그러자 소영의 피가 철관을 통해 소녀의 혈관으로 빨려 들어 가
고 있었다.
‘결국 나는 몸에 피 한 방울도 남기지 못한 채 죽고 말겠구나.’
죽음을 각오하고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한 소영이었지만 막상 피가
빨려 나가는 것을 의식하니 공포와 전율을 금할 수 없었다.
독수약왕은 소영과 소녀의 얼굴을 주의해 보고 있더니 갑자기 오
른손을 뻗쳐 소영의 가슴을 눌렀다.
“네 혈도가 마비되어 피가 제대로 흐르지 못하는구나.”
그는 손바닥을 통해 뜨거운 기류를 소영의 심장으로 밀어 넣었
다. 그러자 소영의 왼팔로 전신의 피가 한데 모여 뭉클뭉클 뿜어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소영은 크게 놀라 진기를 모으려고 하였으나 마음뿐이었다. 산송
장이나 다름없는 그로서는 한 움큼의 진기도 모을 수 없었다.
독수약왕은 소영의 심장에서 손을 떼더니 소녀의 오른손을 잡으
며 그녀의 심장에 귀를 대었다.
잠시 그런 자세로 있던 독수약왕은 감개무량한 듯 떨리는 음성으
로 중얼거렸다.
“얘야, 나의 귀여운 딸아, 칠 년 동안 너는 계속 죽음의 문턱에
서 지냈다. 그 고통이야 얼마나 컸겠니? 하지만, 나 역시 너에 못
지 않은 걱정과 고통으로 날을 지새웠단다. 그러나 이제 안심이다.
이 청년의 피가 마침 너에게는 영약이 된 것이다. 오늘 밤만 지나
면 너는 완전히 건강해진다.”
독수약왕은 기쁨을 못 이겨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얘야, 내일부터 우리 부녀 사이에는 온통 행복뿐이다. 나는 너
를 데리고 네가 가고 싶다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겠다.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이면 무엇이든지 주겠다.”
감개무량한 듯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소영의 콧날이 시큰해졌
다.
‘좋은 아버지다. 딸에게는 둘도 없는 아버지다. 하지만 나는 뭐
냐? 피를 뽑혀 죽게 되다니…. 저들 부녀를 위해서는 좋은 일이지
만 너무 억울하구나.’
독수약왕은 다른 철관을 꺼내더니 소녀의 왼팔에 꽂았다.
“얘야, 이제 젊은이의 싱싱한 피가 네 심장에서 혈관으로 마구
뛰어다닐 수 있게 나쁜 피를 뽑아야겠다.”
그는 철관의 한쪽 끝을 입에 물더니 힘껏 빨았다. 입으로 빨아
낸 피를 그릇에 뱉아 내고 다시 피를 빨고, 이런 동작을 반복하며
소녀의 몸에서 나쁜 피를 뽑아 내고 있었다.
‘내 몸의 피는 지금 엉뚱한 사람의 심장으로 들어가는구나. 이제
나는 사라지고 소녀의 몸속에 내 피만이 남겠구나. 얼마나 지나면
나는 완전히 사라지는 것일까? 사라진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소영은 허공에 둥둥 뜬 것 같은 묘한 기분 속에서 한 방울씩 빨
려 나가는 피를 마음 속으로 헤아리고 있었다.
이 때였다. 요란한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 왔다. 뒤이어 날카로
운 여자의 음성이 터져 나왔다.
“이 계집애야! 만일 바른 대로 말하지 않으면 이 칼로 토막토막
잘라버리겠다.”
이 음성은 소영의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금화부인이다. 금화부인이 나타났다.’
소영은 구세주를 만난 듯 기뻤으나, 그 기쁨은 순간적이었다.
‘나는 움직일 수도 소리를 칠 수도 없다. 중주이고는 문 앞에까
지 나타났다가 사라졌으며, 금화부인이 아니라 사부님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잖은가?’
금화부인의 말에 대답하는 다른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부인께선 시녀를 오해하지 말아요. 시녀는 매복했던 사람에게서
셋째 나리가 이곳으로 왔다고만 들었을 뿐이어요. 셋째 나으리의
행방은 정말 몰라요. 셋째 나으리에게 시녀가 받은 은혜 태산같은
데… 만약 그분이 돌아가신다면 시녀도 뒤를 따라….”
“흥, 한 마디 묻겠는데 너는 너의 셋째 나으리를 좋아하지?”
금화부인의 질문에는 가시가 돋혀 있었다.
“시녀는 비천합니다. 감히 그런 망상을 하겠어요? 자주 나으리를
뵈오며 평생을 곁에서 시중들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분에 넘치
는 영광이지요.”
“내가 보기엔 네 소원이 이룩되기 어려울 것 같다. 나는 너를 죽
이지는 않더라도 반드시 대장주에게 알려 네가 병신에게 시집가도
록 만들겠다.”
옥란의 애원하는 소리가 들렸다.
“부인! 시녀는 셋째 나으리에게 조금도 외람된 생각을 품지 않고
있습니다. 제발 시녀를….”
“나는 일단 꺼낸 말은 세상 없어도 실행하는 성미니까… 내일
당장 너의 대장주에게 얘기하겠다.”
두 여인의 말이 뚝 그쳤다. 이때 독수약왕은 이미 수혈을 중단한
채 밖의 동정에 신경을 모으고 있었다.
그는 단검을 움켜 쥐고 문을 노려 보며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이 사당에는 두 개의 빈 관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다. 이런 곳
에 그가 무엇하려고 오겠느냐? 다른 곳으로 가서 찾아 보자.”
두 여인의 말소리는 다시 끊어졌고 멀찌감치 사라지는 기척이 잠
시 들려 왔다.
‘그들이 여러 곳으로 날 찾아다니고 있는데…. 사람을 눈앞에
두고도 그냥 돌아가다니… 얇은 문짝 하나가 전혀 다른 세상으로
갈라 놓았구나.’
소영은 이제 더 생각할 기력조차 없어 어둠만을 주시하고 있었
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흘렀다.
독수약왕이 갑자기 무엇이 생각난 듯 소영에게 물었다.
“그 두 여자가 너를 찾으러 온 것이냐?”
그는 소영의 얼굴을 바라 보더니 철관을 소영의 혈관에 다시 꽂
았다.
이때 문 밖에서 다시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두 사람 이상 되
는 듯했다.
‘누구일까? 백화산장까지 갔다가 되돌아 온 사람들일까?’
소영은 정신이 번쩍 들어 신경을 모았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말
한 마디도 없이 문 앞을 스쳐 사라지고 말았다.
독수약왕은 잠시 망설이더니 철관의 한쪽을 소녀의 팔뚝에 꽂았
다. 그는 매우 다급해져 몸을 날려 뒷창문을 넘어 갔다.
소영은 피가 혈관을 통해 빨려 나가는 것을 의식하며 여러 가지
상념에 젖어들었다.
‘이제 그만이다. 부모님과 나는 영영 사별이구나. 오 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악소채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 때였다. 소녀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더니 갑자기 몸을 일으켰
다. 인기척을 느낀 소영은 몸을 돌려 소녀의 얼굴을 보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댁은 누구예요? 저의 아버지는 어디 가셨나요?”
소녀의 맑은 음성이 소영의 고막을 헤치고 들어 왔다. 소영은 무
엇이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말을 할 수가 없어 입술만 달싹달싹
움직일 뿐이었다.
소영의 왼팔에서 철관이 뽑히며 소녀의 탓하는 음성이 들렸다.
“아버지가 또 사람을… 나를 완전히 살려 낼 수 있다 하더라도
나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끊으면서 살고 싶지는 않아. 아버지는 왜
쓸데없는 짓을 하실까?”
소녀의 얼굴이 소영의 얼굴 앞으로 다가 왔다. 참으로 눈처럼 희
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정말 미안해요. 제 아버지는 의술이 높다고 자부하면서도 소녀
를 고치지 못했어요. 오직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은 젊은이의 피
와 소녀의 피를 바꾸는 방법밖에 없다며 피를 찾아 돌아다니셨지
요. 저는 이따금 혼수상태에 빠져서는 며칠씩 깨어나지를 못하기
때문에 제 힘으로 막을 수 없을 때도 있답니다.”
소녀는 말을 멈추고 소영의 얼굴을 바라 보더니 물었다.
“왜 아무 말씀도 안하세요? 알았어요. 저의 아버지가 당신의 혈
도를 찍었겠군요.”
소영은 말을 못하니 눈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소녀에겐 댁의 혈도를 풀어드릴 능력
이 없어요. 저는 아버지에게 댁의 혈도를 풀어드리도록 전하겠어
요. 우선 당신의 상처를 치료해 드릴게요.”
소영은 왼팔에 붕대가 감기는 것을 느꼈다.
‘이 소녀는 정말 힘이 약하군. 밥그릇 하나도 제대로 들고 다닐
수 없겠다. 그런데 그처럼 악독한 아버지 밑에 이토록 따스하고 아
름다운 딸이 있다니… 이 소녀의 병은 꼭 이런 방법으로밖에 고칠
수 없을까?’
소영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 나는 선천적으로 삼음절맥(三陰絶脈)의 절증(絶症)에
걸렸었다. 그런데 지금은 절증이 고쳐졌고 높은 무공도 배웠다. 이
소녀가 아직까지 죽지 않을 것을 보면…. 반드시 세상에는 소녀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약이 있을 것이다.’
소영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독수약왕이 바람처럼 창문을
넘어 들어 왔다.
그는 소녀와 소영을 보고 깜짝 놀란 음성으로 물었다.
“얘야! 너 언제 깨어났니?”
“깨어난 지 오래되었어요. 제가 저분의 상처에 붕대를 감아드렸
는데… 아버지, 어서 저분의 혈도를 풀어 주세요.”
“안 돼!”
“아버지…. 어버지가 정말 저의 청을 거절하시면 전….”
소녀는 금방 혀라도 깨물고 죽어버릴 듯한 표정을 지었다.
독수약왕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탄식했다.
“사람의 뜻으로 하늘의 뜻을 어길 수 없다더니… 너는 일생 동
안을 절증과 싸우며 고통을 받아야 할 운명인 모양이구나.”
독수약왕은 가볍게 손을 놀려 소영의 아혈을 풀어 주었다.
소영은 아혈이 풀리자 즉시 자신있는 어조로 말했다.
“따님이 병세를 수 년 동안 끌어 오면서도 죽지 않는 것을 보니
반드시 고칠 의약이 있을 것이오.”
독수약왕은 이제까지의 태도와는 달리 선량한 표정을 지었다. 그
는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서글픔이 가득찬 음성으로 말했다.
“내 의술이 높기 때문에 저 애의 생명을 이제까지 유지시킨 것이
오. 아무런 약도 없소.”
“그렇지 않소. 세상에는 우리가 상상도 못할 영약도 많소. 당신
이 약왕이라는 칭호는 듣고 있지만, 세상의 모든 약을 알지는 못할
거요.”
“노부가 못 고치는 병은 천하의 어떤 명의도 못 고칠 것이오.”
“아버지, 이분은 아직 몇 곳의 혈도가 풀리지 않았는데 왜 풀어
준 후 얘기하시지 않아요?”
“얘야, 너는 이 젊은이의 무공이 얼마나 높다는 것을….”
독수약왕은 갑자기 입을 다물더니 재빨리 손을 놀려 소영의 혈도
를 풀어 주었다.
“그분의 무공이 어때요?”
소녀가 묻는 순간에 소영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독수약
왕이 급히 물러서면서 소영에게 말했다.
“내 딸은 허약하고 또한 선량하니 당신과 아무런 원한관계도 없
소. 우리 나가서 대결하지. 내 딸을 다치게 하면 안 된다.”
소영은 전신에 진기를 돌려 보았다. 아무런 이상도 없는 것을 발
견한 그는 희미한 웃음을 띠고 말했다.
“급히 서둘 것은 없다. 내가 당신하고 싸울 것인지 아직 결정하
지 않았으니까.”
소녀가 고개를 돌려 소영에게 말했다.
“두 분이 싸우면 안 돼요. 반드시 한 분은 크게 다칠 거예요. 저
의 아버지가 당신을 해치려고는 했지만 모두가 저 때문이에요. 제
가 건강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테고… 당신이 아버지에게 분풀
이를 하고 싶거든 우선 저에게 보복하세요. 더욱이 저의 아버지는
매우 고강해서 당신이 상대할 수 없어요.”
소영은 천돌혈에 꽂혀 있던 은침을 뽑아 내며 독수약왕에게 말했
다.
“당신같이 잔인하고 흉악한 사람에게 이런 선량한 딸이 있다니
놀랍소. 부녀간에 일선일악(一善一惡)을 나누었으니 두 사람이 하
늘과 땅 사이로군.”
“네가 감히 이 노부를 훈계할 생각이냐?”
독수약왕이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소영을 향해 손가락을 뻗쳐 혈
도를 찍으려고 했다.
소영이 가볍게 옆으로 두 걸음 비켜 서자 독수약왕은 깜짝 놀라
며 소리쳤다.
“나가자! 우리 밖에서 나가서 대결하자! 내 딸을 상하게 하지 마
라. 그 애는 일생에 나쁜 짓이라고는 한 번도 안했다.”
소영은 소녀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제 보니 독수약왕이 갑자기 놀란 것도 무리가 아니군. 내가
손가락만 까딱해도 이 소녀를 처치할 수 있기 때문이구나. 딸 걱정
이 되어 기가 죽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소영은 피식 웃으며 그 자리에 앉았다. 이것을 본 독수약왕은 얼
굴이 새파랗게 변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내가 만일 이 소녀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눈 한 번 깜빡이는 일보다 쉬울 것이다.”
소영이 조롱하듯 말하자 독수약왕은 당황하며 애원했다.
“그 애의 몸은 무척 허약하다. 네가 슬쩍 밀기만 해도 생명이 끊
어질 것이다. 제발 그런 짓은 말아라.”
“하하, 당신이 딸을 사랑하는 마음의 절반만 가지고 세상 사람들
에게 의술을 베푼다면… 당신은 신수약왕(神手藥王)이라는 칭호를
듣고도 남았을 텐데…..”
“내 딸에게 손을 대지 마라. 우리 타협하자.”
소영은 고개를 돌렸다. 소녀는 잠이 들어 있는 듯 했다.
‘이럴 수가 있나? 방금까지도 나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순식
간에 깊은 잠에 빠지다니 정말 약한 소녀로구나.’
이때 독수약왕이 급히 등불을 켜들고 소영의 앞으로 다가 왔다.
“네가 만일 내 딸에게 손을 대어 죽인다면….. 나는 반드시 만
명의 소녀를 죽여 불쌍한 내 딸의 생명을 보상하겠다.”
“당신의 딸을 죽인 사람은 나인데 어째서 애매한 소녀들을 죽이
겠다는 거지?”
“내가 만 명의 소녀들을 죽이겠다는 것은, 그녀들이 내 딸의 동
반자가 되리라는 것이다. 그래야 내 딸이 혼자서 심심하지 않지.
그런 후에…. ”
“그런 후에?”
“다시 너를 죽여 복수한 다음 천하의 무림인물들을 모두 독살시
키고 말겠다.”
소영은 독수약왕의 끔찍한 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독수약왕은 자기 딸을 살펴 보더니 아무 이상이 없음을 발견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독수약왕은 격동했던 마음을 가라앉히더니 말을 이었다.
“불쌍하게도 내 딸은 네 생명을 구해 준 대신 자기 자신은 다시
또 벼랑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으니….”
소영이 몸을 일으키며 독수약왕에게 말했다.
“우리 밖의 풀밭으로 나갑시다.”
“왜?”
독수약왕이 의아해서 묻자 소영은 입가에 미묘한 웃음을 흘렸다.
“내가 좀 교훈시켜야겠다.”
“뭐라고?”
독수약왕은 고함을 치며 벌떡 일어섰다.
“너의 무공이 대단한 것은 나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너는 내
상대가 못 된다.”
소영은 소녀와 훨씬 떨어진 곳에 있는 문 가까이에 서며 말했다.
“내가 당신의 딸 옆에서 떨어지지 않으면 당신은 감히 나에게 덤
비지 못하지. 허지만 나는 연약한 소녀를 방패로 삼고 살지는 않
소. 자, 지금 내가 멀찍이 떨어졌으니 당신 딸을 다칠 염려는 없
어.”
“어린 네가 그토록 호기로운 줄은 미처 몰랐다. 이제 노부도 너
하고 어린애같은 싸움은 하기 싫다…..이제 가도 좋다.”
소영은 냉정하게 말했다.
“당신이 나의 혈도를 찍고 내 몸의 피를 뽑았으니 이대로 끝날
수는 없지.”
“흥, 너는 정말 노부와 한번 맞서 보겠다는 것이냐?”
소영은 잠시 말문을 닫았다.
그의 시선이 벽에 기댄 채 잠들어 있는 소녀의 백합처럼 흰 얼굴
에 머물렀다.
‘가련한 소녀… 너무도 착하고 가련한 소녀로다.’
소영은 독수약왕에게 정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당신은 내 몸의 피를 빼내어 죽이려고 했으니 마땅히 응분의 댓
가를 받아야 하오. 허나 당신의 딸은 내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니.
… 은혜와 원한이 서로 비긴 것으로 하고 그만 두겠소.”
소영은 몸을 돌려 문 앞으로 걸어갔다. 독수약왕은 그를 잡지 않
았다.
소영은 관이 들어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두 개의 관이
뚜껑이 열린 채로 놓여 있었다.
관 속을 살폈으나 아무 것도 없었다.
‘중주이고는 이 관 속에다 편지를 남겨 두었을 텐데 지금은 뚜껑
이 열려 있고 편지는 사라졌으니… 남겨 두었던 편지는 누군가 꺼
내간 모양이구나.’
소영은 누가 편지를 꺼내 갔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렇지. 금화부인과 옥란이가 왔었으니 그녀들이 꺼내 갔을 것
이다. 중주이고가 나를 찾으러 백화산장으로 갔을 텐데… 그 철통
같은 경계망을 뚫고 들어갈 수가 있을까? 설혹 들어 갈 수가 있다
고 하더라고 그들의 무공으로는 다시 빠져 나올 수가 없을 텐데.’
소영은 초조한 마음을 누를 수 없었다. 지금쯤 상팔과 두구가 심
목풍의 손아귀에 잡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급히 몸을
날렸다.
백화산장을 향해 달리던 소영은 문뜩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뇌
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도 소용없다. 나는 백화산장의 셋째 장주라는 신분이다. 중주
이고가 위기에 처해 있다 해도 나는 그들을 구할 수 없다.’
소영은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다시 걸음을 옮기긴 했지만
꺼림직했다.
백화산장의 어귀에 다다른 소영은 걸음을 멈추며 한숨을 내쉬었
다. 선뜻 들어 설 수가 없었다.
이 때였다. 주조룡이 앞쪽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며 큰소리로 물
었다.
“삼제! 어디를 갔었소.”
소영은 당황하는 기색을 얼른 감추며 대답했다.
“말도 마시오. 전신의 피를 모두 빨려 말라 죽을 뻔 했소이다.”
늘 차가운 표정의 소유자인 주조룡의 얼굴에도 놀라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급한 어조로 물었다.
“삼제, 무슨 말이오. 죽을 뻔하다니 어느 놈이 감히 삼제에게 손
을 대어 죽이려고 했단 말이오?”
‘일의 경과를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다. 거짓말을 꾸며야 할 텐
데…’
소영은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심목풍은 알고 보니 흉악하기 그지없는 위인이다. 더욱이 몇 마
디의 유혹과 위협으로 옥선자의 그림을 나에게서 빼앗았다. 나는
아무래도 발을 잘못 디딘 것이다. 겉으로는 형제처럼 대해 주지만
언제 나에게도 손을 쓸지 모른다.’
소영의 생각은 꼬리를 물었다.
‘중주이고가 아까 사당 밖에서 심목풍에 대한 얘기를 했다. 나를
염려하는 그들의 마음은 거짓이 없을 것이다. 심목풍은 과거에도
무림에서 널리 알려진 악당이었던 모양이다. 그러기에 모든 무림
영웅들이 그를 원수처럼 미워하게 되었던 것이지. 나는 어쩌다 이
런 악의 무리들이 득실거리는 함정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을까?’
실로 심목풍은 매우 간악하고 무서운 인물들이었다. 그는 많은
무림 사람들을 죽여 원한 관계를 맺어 놓고, 더 발붙일 수가 없게
되자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었다. 지금 그는 다시 강호에 나설 야욕
을 품고 여러 가지 계획을 꾸미고 있는 것이다.
그의 부하들은 무림의 각 문파마다 잠복해서 여러 가지 정보를
캐내고 있었다. 또한 심목풍은 많은 악당들과 손을 잡았으며 무림
을 진동시킬 커다란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그것을 하나하나 가까
운 것에서부터 착수하기 시작했는데 소영은 멋도 모르고 거기에 끌
려 들었던 것이다.
소영이 거짓말을 꾸미려고 머리를 짜고 있는데 주조룡이 약간 짜
증섞인 음성으로 다그쳐 물었다.
“삼제, 왜 대답은 않고 답답한 표정으로 있소? 삼제가 누구를 만
났으며 왜 피를 뽑을 뻔 했는지 나에게 얘기해 줄 수 없소?”
소영은 한참 궁리에 몰두해 있다가 주조룡이 되묻는 바람에 얼떨
결에 사실대로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그 사람은 무슨 독수약왕이라고 합디다. 소제가 잠깐 실수를 해
서 그에게 혈도를 찍히고 말았소. 그는 나의 몸에서 피를 빼어 자
기 딸의 난치병을 고치겠다고 합디다.”
소영은 사실대로 말해 놓고 아차했지만 이미 뱉어진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소영의 말을 들은 주조룡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독수약왕이라고? 그는 놀라운 무공과 의술을 지녔다고 큰형님에
게 들은 적이 있는데… 그는 큰 형님과 매우 교분이 두터운 사이
라오. 그래 그 사람은 동생을 어떻게 풀어 주었소? 동생의 신분을
밝히니 바로 풀어 줍디까?”
“아니오. 그의 딸이 소제를 구해 주었소.”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소?”
소영의 머리에 백합처럼 흰 얼굴에 소녀가 떠올랐다. 그는 주조
룡에게 그 소녀가 있는 곳을 알려 줄 마음은 없었으나,
‘이미 나는 사실대로 말하고 말았다. 더 숨겨도 소용 없는 것이
다.’
“북쪽으로 가면 사당이 하나 있소. 아직 그곳에 그들 부녀가 있
을지는 모르지만….”
소영은 사실대로 말했다.
“그랬었군, 큰형님께서는 삼제의 안부가 걱정되어 이미 열 두패
의 사람을 풀어 놓았소. 사방으로 삼제의 행방을 찾으라고 명령해
서 풀어 놓았는데… 지금 큰 형님이 망화루에서 삼제를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갑시다.”
“가서 대장주님께 사과드리는 것이 마땅하겠지요?”
“큰 형님은 늘 엄숙한 표정이며 우리 백화산장의 사람들은 누구
든지 그분을 존경하고 있소. 그러나 큰형님은 삼제만은 몹시 아끼
고 계시지. 큰형님은 삼제를 몹시 아끼고 계시오. 삼제는 참으로
신중히 생각하고 행동을 조심해야겠소.”
주조룡도 소영에게만 항상 친절을 베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표정은 매우 차갑고 엄숙했다.
소영은 주조룡이 아니꼬왔으나 웃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큰 형님을 만나서 소제가 사과도 하고 벌도 받겠소.”
“강호의 일은 매우 위험이 많고, 지금은 무림의 질서가 문란해
져서 더욱 위험하오. 삼제는 강호에 나온 지 얼마 안 되고 경험도
얕아 악독한 무리들의 손아귀에 잡힐 염려가 많소. 그러니 앞으로
는 절대로 혼자 나돌아다니지 마시오.”
소영은 다시 분노가 치밀었으나 짐짓 태연하게 말했다.
“둘째 형의 말씀이 옳소. 하나 소제는 부모님을 보려고 은사님을
떠나 산을 내려 왔소. 뜻밖에도 도중에서 주형을 만나 큰형님에게
소개되었고 의형제를 맺어 두 분 형님께서 수제를 아끼고 호의호식
을 시켜 주어도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심정은 어쩔 수 없소. 소제는
내일 두 분을 작별하고 부모님을 뵈러 고향으로 갈 생각이오.”
이 말에 주조룡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큰 형님께서 삼제에게 거는 기대가 큰데 삼제가 백화산장을 떠
나다니 허락지 않을 거요.”
“사람의 본분은 무엇이오? 첫째, 부모님께 효도를 해야 되잖겠
소? 두 분 형께서 정녕 소제를 동생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동생이
지닌 효심을 외면할 수가 없을 것이오.”
주조룡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곤란하니 큰 형님 앞에서 삼계가 직접 말씀 드리시오.”
잠시 후, 두 사람은 망화루에 다다랐다.
등불이 대낮처럼 주위를 밝히고 있는 망하루에 심목풍이 혼자 창
가에 앉아 야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상하다. 중주이고가 이미 이곳에 들어왔다면 이렇게 조용할리
가 없을 텐데… 심목풍도 저토록 태연한 안색이고…’
소영은 주조룡의 뒤를 따라 십삼 층의 망화루로 올라 갔다.
두 사람이 들어 서자 심목풍은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자리에서
일어 섰다.
“둘째, 셋째 어서 앉으시오.”
주조룡과 소영은 공손히 인사를 했다. 심목풍은 두 사람의 인사
를 받더니 소매 속에서 한 폭의 그림을 꺼냈다. 그는 그 그림을 소
영에게 내주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 옥선자의 그림은 내가 이미 감상했소. 살아 있는 사람을 그
대로 화폭에 옮긴 듯한 그림이오. 그러나 전설처럼 사람이 움직이
진 않더군. 삼제가 잘 간직하시오. 절대로 잃어버려선 안 되오. 만
일 이것을 파손시키거나 잃어버리면 금화부인에게 변명할 길이 없
지 않소?”
소영은 그림을 받으면서 의아하게 생각했다. 항상 차갑고 엄숙한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무섭게 대하던 심목풍이 오늘따라 온화해진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큰형님, 이 그림은 잘 간수하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벌을
받으려고 왔습니다.”
“벌을 받다니? 어떤 잘못을 저질렀기에 그러나?”
소영은 여전히 웃음을 띠고 있는 심목풍의 태도에 점점 의아스러
움이 커졌다. 그리고는 주조룡을 힐끗 바라 보다가 심목풍에게 시
선을 돌리며 말했다.
“제가 혼자서 백화산장의 밖으로 나갔습니다.”
“하하, 아우는 삼장주의 신분인데 행동의 구속을 받을 필요가 없
지. 더군다나 나는 이미 알고 있었으며 또 동의도 했지 않았던가?
아마 삼제는 나를 너무 완고한 사람으로 보았던 모양이지?”
“큰형님께서 사람들을 풀어 제 행방을 찾으셨다는데 어찌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심목풍은 소영의 말을 막으며 역시 웃음을 띤 얼굴로 말했다.
“아우가 무사히 돌아왔으니 나는 이제 안심했소. 그런 사소한 일
을 캐낼 필요가 없소.”
“시간이 늦었으니 어서들 가서 쉬도록 하오.”
소영은 급히 입을 열었다.
“제게 어려운 청이 하나 있습니다.”
“무슨 청인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말해 보게.”
심목풍이 다시 의자에 앉으며 묻자 소영이 입을 열었다.
“제가 무공을 배우기 위해 집을 떠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부모님을 만나 뵙고 싶은 심정이 태산보다 높은데… 집에 좀 한
번 다녀오고 싶습니다.”
심목풍은 쾌히 승낙했다.
“물론 그래야지. 자식의 도리로서 부모님을 만나 뵙지 않을 수야
있겠나? 그것이 뭐 그리 어려운 부탁이라고 망설인단 말인가?”
심목풍이 선뜻 승낙하자 소영이 오히려 어리둥절해졌다.
소영은 용기가 생겨 주저없이 다음 말을 이었다.
“제가 부모님을 뵙고 싶은 생각은 오래되었으나 오늘 갑자기 심
해졌습니다. 마음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 가고 싶은데… 내일
떠나도 되겠습니까?”
“허허, 타관생활 몇 년에 젖생각이 나는 모양이군? 다녀 오게.
내일 점심때 내가 송별잔치를 베풀어 주겠네.”
소영이 감격해 하자 심목풍은 기분이 흡족한 듯 껄껄 웃었다.
“원칙적으로 따지지면 내가 도리어 미안할 뿐이야. 삼제와 같이
부모님을 뵈어야 하는데… 그러나, 지금 할 일이 많기 때문에 내
가 며칠씩 이곳을 비우고 떠날 수는 없고… 내일 충분한 예물이나
준비해 줄 테니 아우는 안심하고 내려가 쉬게.”
심목풍이 친형처럼 부드럽게 대하니 소영은 마음에 깊은 감격을
느꼈다.
‘이처럼 경우를 알고 우애가 두터운 분을 어찌 흉악하다고 할 수
있겠나?’
주조룡이 옆구리를 쿡 찌르는 바람에 그는 급히 심목풍에게 인사
를 하고 망화루에서 내려 왔다.
주조룡이 소영에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
“큰 형님께서는 삼제에게는 정말 커다란 은혜와 아량을 베풀고
계시군. 삼제는 부모님을 만난 후 속히 돌아오는 것이 좋겠소. 큰
형님에게 너무 걱정을 끼치는 것도 도리가 아니니까.”
“돌아오는 것은 소제가 부모님을 뵈온 뒤에 결정할 것이오.”
소영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주조룡에게 은근히 물었다.
“오늘밤 우리 백화산장을 염탐하러 온 사람은 없었소?”
“없었소. 그런데 삼제가 갑자기 왜 그것을 묻소?”
“금화부인이 종남이협에게 도전한 것은 무당패 때문에 일어난 일
이 아니오? 무당파에서 우리의 행동을 살피러 이곳에 염탐군을 보
낼 것 같기에 한 소리지, 별다른 뜻은 없소.”
“그런 추측은 현명하군. 그러나 그 따위들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
구 염탐군을 들여 보낼 수 있겠소?”
두 사람은 서로 막사가 갈라지는 곳에서 인사를 나누고 소영은
곧장 난화정사로 돌아 왔다. 그가 안으로 들어서니 금란과 옥란이
대청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소영을 발견한 그녀들은 뛸 듯이 반
가운 표정을 지으며 댓돌 아래로 내려 섰다.
“드디어 돌아오셨군, 저희들이 얼마나 찾았는지….”
옥란이 응석부리듯 말했으나 소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머리
속은 중주이고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대청으로 올라 선 소영은 두 소녀를 보고 물었다.
“오늘 밤 누가 우리 백화산장으로 염탐하러 오지 않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