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 Finger RAW novel - Chapter 29
29. 심목풍의 계략(計略)
석봉선이 소영에게 뻗친 이 일검은 바로 회풍십팔검의 한 절초로
써 회류선탕(廻流旋蕩)이라고 하는 초식이었다.
소영은 왼쪽 어깨의 혈도를 봉쇄시켜 유혈을 방지시키긴 했지만
팔을 쓰는 것이 자연스럽지 못했으므로 석봉선의 이 일검이 비스듬
히 왼팔을 찔러 오자 다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날카로운 칼끝이 팔꿈치 밑을 스치면서 옷이 찢어지고 선
혈이 솟았다.
석봉선의 검세가 소영에게 적중하자 군호들은 내심 기뻤다. 그러
나 그 순간 소영이 오른손을 들어 수라지력으로 석봉선의 오른팔
을 공격하자 석봉선은 손에 들었던 장검을 놓치고 휘청거리다 쓰러
지고 말았다.
소영은 연속 두 번이나 검상을 입었으며 또한 운기하여 수라지력
을 발휘했기 때문에 비록 석봉선에게 중상을 입혔지만 자신의 혈도
를 봉쇄할 만한 진기는 다시 모을 수가 없었다.
자연히 그의 혈도는 다시 풀려서 상처에서 흘러내린 선혈이 그의
옷소매를 완전히 피로 물들였다.
주위에서 관전하고 있던 군호들은 대부분이 수라지력을 모르고
있던 터라 소영이 검상을 입은 몸으로 석봉선을 쓰러뜨리자 놀라움
을 감추지 못했다.
군호들 가운데 오십쯤 되어 보이는 노인 둘이 재빨리 뛰어 나오
더니 하나는 석봉선을 부축해 일으켰으며 또 한 사람은 등에 멘 장
검을 뽑아 들며 외쳤다.
“남파태극문하등곤(南派太極門下鄧坤)이 백화산장 삼장주의 절기
를 지도받겠소.”
그는 미처 소영에게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공격을 취했다. 이
때 돌연 여인의 음성이 들려 왔다.
“당신들은 모두 무림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다고 들었는데 부상
입은 사람을 상대하다니 그게 무슨 영웅이라 할 수 있겠소? 만일에
당신이 결투를 원한다면 내가 당신을 상대해 주리다.”
푸른옷에 검을 쥔 서동 하나가 소영의 앞을 가로막으며 나섰다.
나타난 서동은 바로 변장한 금란이었다.
등곤은 검을 도로 거둬들이고 뒤로 한 발 물러서며 물었다.
“당신은 도대체 남자요, 아니면 여자요?”
금란은 그들이 번갈아 소영을 상대하는 것을 보자 마음이 다급한
나머지 미처 여자의 음성을 숨기지 못한 것이다.
금란은 약간 흠칫했으나 곧 태연하게 대꾸했다.
“내가 여자이든 남자이든 참견 마시오. 우선 내 보검을 굴복시킨
다음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등곤은 냉랭하게 말했다.
“백화산장의 사람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목숨을 바쳐 그 죄를 보
상해도 그것을 다 갚지 못할 악종들이니라.”
등곤이 번쩍 손을 휘두르며 일검을 공격했다. 차가운 검빛이 번
쩍이며 공중을 날았다. 쌍방의 검 끝이 노리는 곳은 모두 치명적인
급소였다.
소영은 등곤의 검초가 절묘한 것을 보고 금란이 그의 적수가 못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차 안의 은란과 당삼고는 축골독환(縮
骨毒丸)을 복용하였으니, 그녀들을 돌보지 않고 도망치지 않는 이
상 살아남는 길은 오직 이들을 격퇴시키는 것이다.
소영은 치미는 분노를 억지로 누르며 옷자락을 찢어 상처를 싸매
고 고개를 돌려 고목대사를 바라보며 차디차게 말했다.
“대사, 이 자들은 우리를 이곳에서 살해하려는 속셈이 분명하오.
소생은 두 번을 양보하여 두 차례의 검상을 입었으니 이제 나 소
아무개가 검을 비정하게 휘둘렀다고 탓하지 마시오.”
고목대사는 나지막하게 염불을 외더니 입을 열었다.
“사무친 원한과 분노는 참기 힘드오이다. 시주께서는 소승의 옛
친구가 올 때까지 조금만 더 참아 주시오. 그가 나타나면 오늘의
격투는 곧 끝장이 날 것이오.”
주위의 군호들은 눈길을 두 사람에게 보내면서 서로 수군거렸다,
이때 별안간 등곤의 날카로운 호통소리가 들려 왔다.
“검을 놓으시오!”
그는 날카로운 장법으로 금란의 오른손을 향해 내려 쳤다. 그녀
의 응변태세는 번개같이 빨랐으나 등곤의 신속한 검을 피해 내지는
못했다.
차가운 빛이 번쩍 스쳐가자 금란의 부드럽고 백옥같이 흰 팔은
마침내 등곤의 검날에 세 치 가량 베이고 말았다. 그러나 금란은
악착같이 반격을 가했다.
그녀의 팔에서 흐르는 선혈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사방에 뿌려졌
으며 주위에서 관전하는 군호들에게도 튀었다.
소영은 한 차례 운공조식을 끝낸 후 체력이 다소 회복되자 손을
휘둘러 재빨리 수라지력을 펼쳤다.
곧이어, 등곤의 비명이 들리더니 그의 몸은 나무토막처럼 뒤로
나가 떨어졌다. 소영은 등곤을 쓰러뜨린 후 황급히 금란에게로 다
가가서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상자를 갖고 빨리 길을 떠나자!”
소영은 재빨리 금란의 손에서 보검을 잡아채어 휘둘렀다. 그러자
검광이 번쩍이며 차가운 검막을 이루어 달려드는 군호들의 공격을
막았다.
그녀는 재빨리 말고삐를 잡고 마차를 몰아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소영의 검세는 연속 변화를 일으키며 덮쳐 오는 두 명의
장한을 쓰러 뜨린 후 호통을 쳤다.
“나의 길을 막는 자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군호들은 소영의 무공이 이토록 높은 것을 보자 두려운 마음이
생겨 아무도 감히 앞장서서 막으려는 자가 없었다.
소영의 용맹은 군호들의 사기를 꺾었으며 무사히 포위망을 뚫고
단숨에 사, 오십 리 길을 달려갈 수 있었다.
그는 그제서야 비로소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그만 기진맥진하여 쓰러지고 말았다.
진기를 모아 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오느라고 결사적인 반격을 하
였으므로 상처가 다시 도져서 피를 많이 흘렸던 것이다.
금란은 깜짝 놀라 마차에서 뛰어내려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셋째 나리…. 셋째 나리…..”
소영이 힘없이 눈을 뜨며 간신히 말했다.
“걱정 마라! 나는 죽지 않는다. 나를 부축해서 마차에 오르게 한
다음 다시 길을 재촉하여라!”
말을 마치자 소영은 다시 기절해 버렸다. 금란은 이를 악물고 자
기의 아픔을 참으며 소영을 질질 끌다시피 하여 마차로 다가갔다.
그때 등 뒤에서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의 상처는 심하냐?”
그녀는 전신이 오싹해지며 두 손에 힘이 쭉 빠져 품 안에 부축한
소영을 힘없이 놓쳐 버렸다. 이때 흰 손이 쓱 뻗쳐 오더니 쓰러지
는 소영을 재빨리 받아 들고 천천히 땅에다 눕혔다.
그러자 금란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조용히 땅에 꿇어 앉았다.
“대장주님께서 오시는 것을 미처 몰라 뵈어 소녀는 멀리 마중을
못하였으니 저의 죄를 대장주님께서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어나거라! 내가 오리라는 것을 네 어찌 알 수 있었겠느냐.”
금란은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다. 심목풍의 거대한 체격이 바로
코 앞에 있었다.
이때 멀리서 말 울음소리가 들려 오며 몇 필의 건마가 질풍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심목풍은 소영을 번쩍 들어 마차에 올려 놓았다.
“빨리 마차를 출발시켜라. 그러나 너무 빨리 달리지 말고 저 말
들이 쫓아오게끔 하여라. ”
금란은 묵묵히 마차에 뛰어올라 채찍을 휘둘러 쏜살같이 마차를
몰았다. 뒤쫓는 말발굽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며 바싹 따라붙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비명소리가 흙먼지 속에서 일어났다. 금란은
뒤돌아 보지 않고서도 심목풍이 뒤쫓는 사람에게 손을 쓴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람들은 백화산장에 대해서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품고 있으
며, 또 셋째 나리에 대한 오해도 이미 깊다. 대장주가 마차 속에
몸을 숨기고 암기를 날려 공격해 오는 무림 인물들을 상하게 했으
니, 이 앙갚음은 이제 모두 셋째 나리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훗날
셋째 나리는 변명할 기회가 있다 하더라도 아무도 곧이 듣지 않을
것이다. 만약에 셋째 나리께서 무림의 각대 문파의 연합공격을 받
게 되면, 천하에 발붙일 곳이 없어져 할 수 없이 백화산장으로 돌
아가서 다시 대장주의 명령에 복종해야 되리라.’
그녀는 대장주의 명령을 어기려는 생각으로 채찍을 휘둘러 마차
의 속력을 재촉했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포장 속에서 심목풍의
굵다란 외침이 들렸다.
“마차를 좀 천천히 몰아라!”
그녀는 심목풍의 호통을 듣자 더는 어길 수가 없어서 말고삐를
잡아당겨 마차의 속력을 줄였다. 그러자 또다시 말발굽소리가 가까
이 들리면서 처참한 비명이 뒤따라 일어났다.
이러한 비명 소리는 자그만치 아홉 번이나 계속 되었다.
그때 돌연 마차 속에서 심목풍의 음성이 들렸다.
“마차를 멈추어라.”
마차가 멎자 심목풍의 거대한 몸집이 구부정하게 나오더니, 손을
들어 금란의 어깨를 두드리며 부드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금란아! 셋째 나리는 너에게 대우가 좋더냐?”
이 지극히 보기 힘든 친절하고 부드러운 미소는 금란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되살려 주었다.
그녀가 심목풍에게 순결을 잃던 밤에도 그는 이렇게 온화하게 웃
었던 것이다. 더불어 그가 말하는 좋은 대우가 무엇인지를 알기에
그녀는 서서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셋째 나리께선 모든 사람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계시는 분이신
데 어찌 저같은 비천한 종년을 눈여겨 보시겠습니까?”
심목풍은 여전히 미소를 띤 얼굴로 말을 받았다.
“그가 아무런 호감도 없이 너와 은란을 데려가겠다고 자청했겠느
냐? 네가 열심히 셋째 나리의 시중을 잘 든다면 훗날 반드시 너희
들의 사이를 맺어 줄 것이다.”
“저같은 종의 몸으로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세월이 흐르면 정이 생기기 마련이니 자연히 그는 너를 아껴 줄
것이다.”
그는 웃음을 거두면서 숙연하게 말했다.
“그가 깨어난 후에 방금 있었던 사건을 이야기해 주면 안 된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 왔었다는 이야기도 해서는 안 된다. 만일 네가
내 말을 잘 이행한다면 훗날 너를 그의 첩으로 만들어 주겠다.”
그는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지금 그는 이미 많은 사람들과 원수를 맺었다. 앞으로는 오직
백화산장으로 돌아 오는 길만이 그에게 남아 있을 뿐이다. 이해득
실은 뻔한 것이니 너는 잘 생각해서 행동하여라. 그럼 나는 이만
떠난다.”
금란은 황급히 그를 불렀다.
“대장주님, 은란 동생과 당삼고가 복용한 축골독환이 시한이 되
었습니다. 대장주님께서는 자비심을 베풀어 그녀들을 구할 수 있는
해독약을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만약 소영이 깨어나 어떻게 그녀들이 해독을 했는가 물을 때 뭐
라고 대답하겠느냐?”
“그것은 제가….”
심목풍은 잘라 말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이미 내가 준비해 온 바가 있다. 그러니 너는
아무 염려 말고 어서 길을 떠나라!”
금란이 어찌 더 이상 그의 분부를 거역할 수 있으랴. 그녀는 몸
을 날려 마차 위에 오르더니 채쩍을 휘둘렀다. 마차는 다시 쏜살같
이 달리기 시작했다.
단숨에 칠, 팔 리 길을 비호같이 달려 온 다음 그녀는 비로소 말
고삐를 잡아당겨 마차를 멈추었다.
소영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으며 어느새 상처에는 약
이 발라져 있었고 유혈도 멎었다.
금란은 서서히 손을 뻗쳐 추궁과혈(推宮過穴)의 수법으로 소영의
몸을 더듬어 몇 군데 막힌 혈도를 찾아 낼 수 있었다.
그녀가 잠시 몸을 주물러 주니 소영의 혈도는 곧 풀렸다. 소영은
가볍게 숨을 뱉으며 서서히 눈을 뜨고 금란을 쳐다 보았다.
그리고 자기의 상처에 바른 약을 보고 입을 열었다.
“네가 나에게 약을 발라 주었느냐?”
금란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영은 일어나 앉으며 당삼
고와 은란을 바라 보며 말했다.
“그 사람들이 우리를 더 이상 추격해 오지 않았더냐?”
“저는 셋째 나리를 마차에 모신 후 즉시 전속력으로 마차를 몰고
달려 왔기 때문에 그들이 추격했는지의 여부는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금란은 죄책감에 고개를 숙이고 감히 소영을 쳐다
보지 못했다.
“아아! 그들의 분노를 풀기도 어렵지만 흑백도 가려내기 전에 나
를 그렇게 억누르고 공격하니 참으로 견디기 힘드는구나.”
금란이 그를 위로했다.
“강호는 원래가 시비 투성이며 이곳에 몸을 둔 이상 은혜와 원한
에 얽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소영은 불만이 가득하여 말했다.
“말은 비록 그렇다마는 그래도 그들은 먼저 흑백을 가려냈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들은 오래 전부터 깊은 원한을 품어 왔으니 이미 사리를 따질
수 없었겠지요.”
소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그들을 탓할 수도 없지. 대장주는 그 많은 사람들
과 원수를 맺은 증거물을 내 마차에 올려 놓았으니. 이것은 고의로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수작이 아니겠느냐?”
또다시 소영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 소영은 백화산장에 대해 죄를 진 일이 없는데 그들은 어째서
이처럼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는 것일까?”
금란은 암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셋째 나리는 비록 무공이 고강하나 천하의 무림 인물들과 원한
을 맺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오해를 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나에게는 두 분의 형제가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곳에는
없지. 그들 형제의 명성과 지위면 이 일을 해결해 줄 수 있을 텐데
…..”
금란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 두 형제분은 어떤 인물입니까?”
“중주이고…”
금란은 소영의 말에 깜짝 놀랐다.
“중주이고라면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 같습니다.”
“그 두 사람의 무공은 고강하며 강호의 경력도 매우 풍부하다.
강호에서 일어나는 모든 흉계는 이들 두 사람의 눈을 벗어날 수가
없지. 하지만 지금 그들이 이곳에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금란은 무엇인가 한동안 골똘히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셋째 나리에게 그렇게 유력한 협력자가 있다면 먼저 우리는 그
분들의 행방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이 있겠느냐? 천하는 이렇게 넓으며 사람은 헤
아릴 수 없이 많은데….”
“셋째 나리와 중주이고 사이에 무슨 암기라도 없습니까?”
소영은 금란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 큰소리로 외쳤다.
“있지! 있고 말고. 네가 이야기하지 않았더라면 잊어버릴 뻔 했
구나.”
금란은 눈을 빛내며 자신감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럼 됐습니다. 셋째 나리께서는 길을 가시면서 중도에 암기를
남겨 두어 행방을 표시해 놓으면 중주이고가 그 암기를 보는 즉시
우리의 뒤를 따라올 것이니 자연 만나게 될 것입니다.”
소영의 얼굴에는 희색이 떠올랐는데 어쩐 일인지 이내 한숨섞인
어조로 말했다.
“만약에 그들 두 사람이 이곳을 지나가지 않는다면 아무리 암기
를 도중에 남겨 둔다 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 아니냐.”
“일은 이왕 여기까지 도달하였으니 조급한 생각을 버리시고 너무
괴로워 마십시오. 중주이고가 강호를 곳곳이 살펴 보는 안목이 있
다면 암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좋아! 중주이고가 암기를 보고 쫓아오는 것은 운수에 맡기고 밑
져야 본전이니 해 봐야겠다. 너는 마차를 몰면서 갈림길이 나오면
멈추고 내게 알려야 한다. 그리곤 암기를 남겨 두도록 하자.”
마차는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힘차게 달렸다. 금란은 정신을 차
려 주위의 갈림길을 살피며 마차를 몰다가 십자로에 이르렀다.
그녀는 말고삐를 당기면서 소영에게 보고했다.
“셋째 나리, 십자로입니다.”
그는 마차의 포장을 헤치고 가볍게 몸을 날려 땅에 내려섰다. 그
것을 본 금란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아니! 상처가 모두 완쾌되셨습니까?”
소영 역시 자신의 상처가 이렇게 빨리 완쾌될 줄은 생각하지 못
한 듯 의쓱한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웃음을 띠며 말했다.
“나는 완쾌됐다. 네 상처는 좀 어떠냐?”
금란은 기쁜 듯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셋째 나리께서 염려해 주신 덕택에 저도 많이 좋아졌습니다.”
“네가 훗날 남과 겨루게 될때 쉽게 상처를 입지 않도록 내가 몇
초의 검식을 전수해 줄 것이다.”
금란은 방긋이 웃으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는 갈림길에 암기를
남겨 놓았다. 소영이 일을 다 마칠 때까지 다행히 추격해 오는 사
람들이 없었다.
금란은 소영이 다시 마차에 오르자마자 채찍을 휘둘러 질풍처럼
달렸다. 마차가 갑자기 달리는 바람에 은란이 몸의 균형을 잃고 옆
으로 넘어졌는데 그와 동시에 은란이 비명을 지르며 데굴데굴 구르
는 것이었다.
소영은 재빨리 오른손을 뻗쳐 은란의 혈도 세 곳을 연속 찍었다.
가슴이 얼어 붙는 듯하던 은란의 비명소리가 차츰 멈춰졌으며 뒹
굴던 몸도 진정이 되었다.
소영은 가볍게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과연 축골독환은 무서운 것이구나.”
금란은 고개를 돌려 당삼고를 힐끗 바라 보았다. 그녀는 단정히
앉아 있었으며 매우 평온한 안색이었고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금란은 이상하다는 듯 소영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모두 축골독환을 복용했는데 어찌 은란만이 발작을
일으키고 당삼고는 아무 일 없을까요?”
소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지! 독약의 성질로 따진다면 두 사람은 아직 발작할 시간이
되지 않았지. 그러나 조금전 마차가 갑자기 출발할 때 은란이 충격
을 받아 그녀의 독성이 일찍 발작한 것이다.”
은란은 소영에게 몇 곳의 혈도를 찍힌 다음 뒹구는 것은 멎었으
나 근육이 오그라지는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기에 아픔에 못 이겨
구슬같은 진땀을 흘렸다.
금란은 손수건을 꺼내 은란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며 그 자
신도 아픔을 같이 하는 듯 눈물을 흘렸다. 마침내 그녀는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셋째 나리, 이 몸은 죽어 마땅하오니 셋째 나리께서는 중벌을
내려 주십시오.”
소영은 금란의 갑작스런 말에 어리둥절했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사실은 아까 대장주님이 다녀가셨습니다.”
소영은 이 말에 그만 흠칫하며 외쳤다.
“뭐라고? 그렇다면 나는 왜 그것을 몰랐지?”
“그때 셋째 나리께서는 출혈이 심한데다 격심한 피로로 인해 정
신을 잃었던 것입니다.”
소영은 고개를 숙여 자기의 상처를 살펴 보더니 물었다.
“그럼 이 상처에 바른 약은 대장주가 발라 준 것이냐?”
금란은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그리고… 그 분은 많은 사람들이 셋째 나리에게 원한를 품
게 하였습니다.”
소영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대장주님은 셋째 나리인 척 마차 안에 몸을 숨기고 뒤쫓아 오는
사람들을 공격하였습니다.”
“뭐라고?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얼마나 다친 것 같더냐?”
“그들의 비명소리가 너무나 처절하게 들렸으므로 소녀의 생각엔
그들이 다시 살아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소영의 눈에 냉랭한 빛이 나타나더니 노기찬 음성으로 물었다.
“그는 어디로 갔느냐?”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 셋째 나리에게 절대 알리지 말라고 경고
한 다음 즉시 가버렸습니다.”
소영은 한숨을 쉬며 탄식조로 중얼거렸다.
“나는 어째서 그것을 조금도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셋째 나리의 혈도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그럼 네가 나의 혈도를 풀어 주었단 말이냐?”
금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 마차는 이제 강호에서 피맺힌 원한의 목표가 되었으니 우리
가 계속 이 마차를 타고 길을 재촉한다면 아마 앞으로 많은 괴로움
이 따를 것입니다.”
금란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셋째 나리의 무공은 비록 뛰어나지만 아직 몸에 입은 중상도 완
쾌되지 않았거늘 어찌 많은 무림 고수들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제 생각으로는 우선 적세를 피하여 상처가 완쾌된 다음 다시….”
소영은 금란의 말을 막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만약 우리가 마차를 버리고 도망친다면 혹시 그들의 눈을 피할
수 있을지 모르나 변명할 기회는 영원히 없어질 것이다.”
“지금의 오해는 아마 셋째 나리 혼자서는 결코 설명하시지 못할
것입니다. 저의 뜻은 다만 일시로 적의 칼날을 피하여 훗날 다시
방법을 생각해 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영은 단호히 잘라 말했다.
“대장부가 어찌 잔꾀를 부리겠느냐? 더구나 은란과 당낭자가 복
용한 축골독환의 독성이 발작할 시간이 눈 앞에 닥쳤다. 만약에 우
리가 마차를 버리고 변장하여 떠난다면 백화산장에서 약을 갖고 오
는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찾을 수 있겠느냐?”
금란은 소영의 태도에 감격해서는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셋째 나리의 영웅심에 크게 감격합니다. 저는 셋째 나리의 곁에
서 시중을 들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소영은 씁스레 웃으며 말했다.
“나를 추켜 올리지 마라. 당당한 칠척의 체구로서 너희들의 안전
을 보호해 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너의 도움을 받았으니 실로 부
끄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엄구나.”
이때 갑자기 질풍같이 달려 오는 말발굽소리가 들려 왔다. 그리
고 한 줄기 차가운 빛이 포장을 뚫고 날아 들어 왔다.
소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날아 들어 온 암기를 손으로 받아 내며
금란에게 말했다.
“너는 이 두 사람이 그들에게 당하지 않도록 잘 보살펴라.”
“저는 있는 힘을 다해 받들겠습니다.”
소영은 마차에서 뛰어 내리며 고개를 들어 뒤를 보았는데 두 필
의 건마가 벌써 칠, 팔 척 밖에 우뚝 서 있었다.
하늘색 장삼을 입고 흰 수염을 가슴까지 늘어뜨린 그는 바로 단
목정이었다. 그의 곁에는 푸른 옷을 입은 아름다운 소녀가 엄숙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등에는 비스듬히 장검을 메고…..
소영은 두 사람을 훑어 보고는 공손히 가슴에 손을 모으고 인사
했다.
“알고 보니 단목대협이시군요.”
단목정은 냉랭하게 대꾸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이렇게 만나게 되었구려. 우
리가 힘들여 손을 쓰지 않아도 당신을 찾아 계산을 할 사람이 이제
곧 올 것이오.”
그리고는 말머리를 돌리더니 쏜살같이 달려 갔다.
소영은 물끄러미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 보며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나를 추격해 왔을까? 그리고 왜 나를 보더
니 다시 되돌아 갔을까?’
이때 옆에서 금란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 왔다.
“셋째 나리, 빨리 길을 재촉해야 됩니다.”
소영은 비로소 정신이 든 듯 중얼거렸다.
“그렇다. 필경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금란은 소영의 말이 이해되지 않아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셋째 나리,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소영은 금란을 지그시 바라 보며 말했다.
“나는 그 단목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필경 우리의 상세가 어
떤가 살펴 보러 온 거다. 금란! 내 생각으론 우리의 앞길은 험악한
고비가 많을 것 같다.”
금란은 마음의 걱정과는 달리 상냥하게 말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듯이 셋째 나리와 같
은 정인군자(正人君子)는 필경 하늘의 도움을 받으실 것입니다.”
소영은 다시 마차에 올라갔는데 은란은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
어 있었다. 그녀는 몹시 고통스런 표정이었으며 당삼고는 여전히
얼빠진 듯 앉아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금란은 채찍을 휘날리며 말을 몰아 마차는 다시 화살처럼 앞으로
달려 갔다. 약 이, 삼 리 가량 달려 왔을 때 갑자기 네 필의 말이
처량하게 울부짖더니 쓰러지면서 죽어 버렸다.
마차에서 뛰어 내린 소영은 네 필의 말을 자세히 살펴 본 후 탄
식하며 말했다.
“네 필의 말은 모두 독이 묻은 암기에 맞아서 죽었다. 단지 암기
는 몹시 가늘고 작아서 내가 발견하지 못했구나.”
금란은 다급하게 물었다.
“그럼 아까 그 단목정이 뻗친 암수입니까?”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의 짓일 것이다.”
금란은 의외로 밝은 표정을 짓더니 웃음을 띠며 말했다.
“오히려 잘 됐습니다. 이제 셋째 나리는 할 수 없이 마차를 버리
고 변장을 하신 다음 길을 떠나야 합니다.”
소영은 침통한 말투로 말했다.
“일은 네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그들에
게는 무슨 음모가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들이 쓰러진 네 필의 말 옆에서 이야기를 주고 받을 때 어디선
가 갑자기 날카로운 호통소리가 들려 왔다.
소영과 금란은 흠칫 놀라며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소영이 재
빨리 고개를 돌려 사방을 훑어 보았으나 남쪽으로 이십 장쯤 떨어
진 곳에 장원이 하나 있을 뿐 아무리 살펴 보아도 인가를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 날카로운 호통소리는 바로 그 장원에서 들려 온 모양이었다.
금란도 주위를 한 차례 훑어 본 다음 소영에게 말했다.
“셋째 나리,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든지 길을 재촉해야 됩니다.”
소영은 묵묵히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우선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가 은란과 당삼고를 편히
쉬게 한 다음 방법을 강구해 보자.”
금란은 멀찌감치 있는 장원을 바라 보며 물었다.
“저 장원으로 가자는 말씀입니까?”
“너도 아까 그 호통소리를 들었지? 그 호통소리는 바로 우리들의
주의를 끄느라고 지른 것이다.”
“맞아요! 그들은 함정을 파놓고 우리를 걸려들게 하려는 것이군
요.”
소영은 씁스레 웃으며 말했다.
“우리의 처지는 비록 험악하나 아직 절망적이지는 않다. 다만 곤
란한 일은 독물에 중독된 두 낭자를 데리고 다니는 것 뿐이지.”
금란은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결심한 듯 말했다.
“셋째 나리, 혼자서 길을 떠나십시오.”
“그럼 너희들은 어떻게 하느냐?”
금란은 잠시 망설이는 듯 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백화산장에 구원을 청하겠습니다.”
“큰 장주가 아직 곁에 있다면 몰라도 이곳은 백화산장과는 이미
수백 리 떨어진 곳이다.”
“저의 품속에는 백화산장의 충천화포(沖天火泡)가 있습니다. 이
것을 터뜨리기만 하면 즉시 큰 장주의 귀에 들릴 수 있을 것입니
다.”
금란은 잠시 이야기를 멈추더니 다시 이어갔다.
“큰장주께서 세 개의 충천화포를 저에게 주실 때 재삼 분부를 하
였습니다. 아주 위급할 때에만 사용하라구요….이 화포는 백화영
유(百花令諭)보다도 빠릅니다. 이 화포를 발사시키면 비록 천 리
밖이라도 몇 시간 안에 소식을 접할 수 있습니다.”
금란은 이어 말을 계속했다.
“백화산장에서는 영통한 신합(편지 전하는 비둘기)을 많이 기르
고 있습니다. 우리를 추격하는 사람들이 충천화포를 보면 즉시 서
신을 써서 비둘기 발에 묶어 큰 장주에게 보고를 하게 되는 것이지
요.”
“그럼 됐다.”
소영이 무심코 눈길을 돌리니 이십여 장쯤 떨어진 곳에서 여태껏
눈에 띄지 않았던 초가집이 보였다. 소영은 즉시 그곳을 가리키며
금란에게 말했다.
“우선 저 농가로 가서 이들 둘을 편히 쉬게 한 다음 의논하자.”
금란은 은란을 업고 당삼고를 부축하면서 앞에서 걸었으며 소영
은 두 개의 나무 상자를 들고 뒤에서 따라갔다.
가까이 가 보니 그 외딴 초가집은 거대한 용나무 밑에 세워져 있
는 농가였다. 두 쪽의 나무로 만든 사립문은 반쯤 열려 있었으며
아무런 인기척도 없이 고요했다.
소영은 크게 기침을 하며 소리쳤다.
“아무도 없소?”
그러자 안에서 노파의 음성이 들려 왔다.
“누구요?”
소영은 큰소리로 말했다.
“지나는 길에 잠시 들렸습니다. 두 낭자가 불행히 병에 걸려 보
행이 어려워서 잠시 쉬었으면 하는데 승낙해 주시겠습니까? ”
사립문이 서서히 열리더니 백발의 노파가 죽장을 짚고 천천히 걸
어 나왔다.
“황무지의 이 오두막은 누추하여 귀빈을 맞이할 수 없소. 그러나
손님이 괜찮으시다면 안으로 들어 오시오.”
그는 연방 노파에게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할머니….”
그 노파는 금란이 업고 있는 은란을 힐끗 보더니 백발을 저으며
말했다.
“집을 나서면 곤란을 겪게 되는 것이오. 손님들은 미안해 하지
말고 무슨 부탁이든지 이 늙은이에게 말씀하시오.”
소영은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저희는 약간의 휴식을 취한 다음 즉시 떠나겠습니다. 할머니에
게 어떻게 감히 수고를 끼치겠습니까?”
노파는 소영과 은란을 유심히 훑어 보더니 죽장을 짚고 천천히
내실로 들어 갔다.
소영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 보며 생각했다.
‘아무리 보아도 이 노파는 이런 벽촌 출신이 아닌 것 같구나…’
이때 문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전(錢) 아주머니 계십니까?”
내실에서 노파의 음성이 들려 왔다.
“무슨 일로 나를 찾소?”
소영이 슬며시 내다 보니 경장을 한 장한이 농가의 사립문 밖에
서서 포권을 하며 말했다.
“소생은 주인의 명령을 받고 노선배님께 전할 말이 있어 왔습니
다.”
내실에서 전 아주머니의 음성이 들려 왔다.
“나는 지금 기분이 좋지 않고 집 안에는 귀빈도 계시니 오늘은
만나지 않겠소. 일이 있으면 훗날 만나서 합시다.”
그러자 그 장한은 다급하게 말했다.
“일이 긴박하오니 부디…..”
그러자 내실에서 전 아주머니의 노한 음성이 들렸다.
“오늘 만나지 않겠다는데 당신 귀에는 들리지 않소?”
장한은 다급하게 말했다.
“제가 온 일은 노선배님 댁에 온 손님들과 관계가 있으니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전 아주머니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소영은 자리에
서 벌떡 일어서며 나직하게 금란에게 말했다.
“저 사람이 우리를 찾는 일이라면 내가 나가서 물어봐야겠다.”
소영이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갑자기 그 장한이 놀라 외마디 비
명을 지르며 황급히 도망쳤다. 내실 안에서 다시 전 아주머니의 음
성이 들려 왔다.
“나쁜 놈 같으니, 좋게 말할 때 듣지 않고… 그 놈은 오히려 권
하는 술을 받지 않고 벌주를 마셨구나.”
금란이 나직이 속삭였다.
“셋째 나리, 전 할머니는 아마 이곳에서 은거하는 고수일 것입니
다.”
이때 또다시 전 아주머니의 음성이 들려 왔다.
“손님들은 아무 염려 마시고 편히 쉬시오. 이 오두막은 비록 초
라하오나 안전만은 보장할 수 있소이다.”
전 아주머니는 다시 말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곳에 오랫동안 머무를 수는 없소이다.”
소영은 천성이 남에게 굽히기 싫어하는 성품이라 즉시 대답했다.
“할머니 안심하십시오. 우리는 절대로 할머니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으며 우리 일행은 지금 즉시 떠나겠습니다.”
전 할머니는 곧 말을 보냈다.
“화가 몹시 났구려.”
소영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두 개의 상자를 집어 들며 말했
다.
“금란! 어서 가자, 그들은 필경 우리의 앞 길을 모두 막았을 것
이다. 할 수 없이 그들과 충돌을 감행해야겠구나.”
금란은 은란을 업고 당삼고를 부축하며 소영의 뒤를 따랐다. 그
러자 별안간 내실과 객실 사이의 휘장이 열리며 그 전 아주머니가
문을 가로막으며 냉정하게 말했다.
“잠간만! 나는 아직까지 아무런 보상 없이 이 오두막에 손님을
초대해 본 적이 없소. 물건을 놓고 가시오.”
소영은 재빨리 생각을 굴렸다.
‘이렇게 황량한 곳에 희노무상(喜怒無常)한 무림 고수가 살고 있
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충돌을 면할 길이 없을 것같군.”
“할머니께서는 저에게 어떤 물건을 남겨두라는 말씀입니까?”
“오오! 보아하니 당신은 이 늙은이와 충돌을 하겠단 말이구려”
소영은 곧 대꾸했다.
“형세가 저를 그렇게 하게끔 강요를 하니 저 또한 어쩔 수 없군
요.”
전 아주머니는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너같은 어린 나이에 그런
호기가 있다니 실로 가상하구나.”
전 아주머니는 잠시 멈추었다가 계속했다.
“나의 삼 장을 받아라! 막아 내든지 피하든지 마음대로 해라. 다
만 네가 아무 상처도 없이 나의 삼 장을 피해 낸다면 너희들을 놓
아 주겠다.”
소영은 냉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다만 할머니께서 손을 뻗치신다면 소생은 기꺼이 받아드릴 용의
가 있소.”
전 아주머니는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나는 용맹스러운 영웅들을 좋아한다. 너는 내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오른손에 잡았던 죽장을 버렸다. 동시에
번개같이 일장을 뻗쳐 왔다.
소영은 그녀의 일장을 피하지 않고 오른손을 날려 마주쳐 갔다.
서로 맞부딪친 일장은 쌍방의 장력이 비등하여 승부를 가려 내지
못했다.
전 아주머니는 약간 놀란 듯 오른장을 거둬들이는 듯하다가 다시
잽싸게 뻗쳐 갔다. 소영도 암암리에 이를 악물고 다시 일장을 맞받
아 뻗쳤다.
순간 전 아주머니의 어깨는 요동치며 휘청거렸다. 소영도 역시
몸의 중심을 잃고 뒤로 두 발 물러섰다.
전 아주머니의 얼굴에는 이미 웃음이 사라졌다. 그녀는 오른장을
번쩍 쳐들고 망설이며 감히 뻗쳐 내지 못했다. 그녀는 이 마지막
일장 역시 소영을 격퇴시킬 자신이 없어 함부로 출수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장세를 서서히 걷어 들이며 냉랭하게 물었다.
“너는 누구의 제자냐?”
소영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소생의 은사는 문파를 세우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 성명을 밝힐
수 없습니다.”
전 아주머니는 눈에 날카로운 빛을 번쩍이며 번개같이 오른장을
들어서 전력을 다해 뻗쳐 왔다. 쌍방의 장력이 충돌하는 순간 요란
한 폭음이 울리자 소영은 그 맹렬한 장력으로 인해 눈 앞에 불꽃이
번쩍 튀며 단번에 너덧 발자국 물러났다.
전 아주머니 역시 몸의 중심을 잃고 뒤로 세 발짝 물러났다. 소
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삼장은 이미 끝났는데 할머니께서는 또 무슨 조건을 내세우시겠
습니까?”
전 아주머니는 길을 터 주며 말했다.
“자! 어서들 가거라.”
소영은 나무상자 두 개를 들고 큰 걸음걸이로 사립문을 나섰다.
그러자 사, 오 장 밖에 경장차림을 하고 등에 단도를 꽃은 두 명
의 장한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소영을 쏘아 보고 있었다.
금란은 급히 소영의 등 뒤로 바싹 다가서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셋째 나리! 저들은 아마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소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 소영의 이름을 팔고 다니는 사람이 무림에서 명성을 떨치고
뭇사람들의 존경과 두려움을 받고 있는 이유를 너는 알고 있느냐?”
“저는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손이 악독하여 살인을 많이 하였기에 모두들 그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만약에 저 사람들이 나의 앞길을 막고 있다면
나 소영도 할 수 없이 저들을 죽이는 수밖에 없다.”
금란은 소영이 요즘에 수없이 많은 분노를 참고 견디어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 분노가 자제력을 끊고 치솟아
올라 나중의 결과는 생각치도 않고 일을 저지르려는 것을 보자 금
란의 가슴은 떨렸다.
이때 호통소리가 들려 왔다.
“귀하가 바로 백화산장의 삼장주요?”
소영은 들었던 나무상자를 내려 놓으며 냉랭하게 대꾸했다.
“그렇다면 어쩌겠소?”
소영은 등에 멘 장검을 뽑아 들었다.
이때 금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말렸다.
“셋째 나리, 일시적인 울분을 참지 못하시면 평생 씻지 못할 원
한을 사게 되오니 진정하십시오.”
금란의 간곡한 충고가 귀에 들리자 소영은 평온을 되찾으며 살기
가 사라졌다. 그는 들고 있던 장검을 내리며 조용히 물었다.
“두 분께서는 무슨 볼 일이 있으신지요?”
그중 한 사람이 나서며 대꾸했다.
“당신은 길을 오며 연속 아홉 명의 무림고수를 살해했으니 실로
악독하기 짝이 없구려.”
소영이 그들의 모습을 훑어 보았다. 옷차림이나 태도로 보아 강
호의 유명한 인물같지는 않고 졸개인 듯 싶었다. 그러나 무례한 태
도로 자기를 대하는 것에 울화가 치밀은 소영은 매서운 눈초리로
그들을 쏘아 보며 소리쳤다.
“두 분은 죽음이 두렵지 않소?”
나머지 한 사람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당신의 적수가 못 된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러나 우리
형제에게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호기가 있소. 천하영웅들은 당
신을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소. 우리 형제가 악독한 당신의 검에
대항하다 죽는다면 반드시 무림의 숭앙을 받을 것이오. 이런 영광
을 얻는데 죽은들 무슨 한이 있겠소?”
소영은 약간 놀라며 한숨섞인 말투로 물었다.
“그럼 두 분은 죽음을 찾아온 것이란 말이오?”
“그것도 아니오. 우리는 주인의 명령을 받고 당신에게 이를 말이
있어서 온 것이오. 우리 주인께서 주연을 차려 놓고 당신에게 참석
할 용의가 있느냐고 물으라 하셨소.”
소영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나머지 한 사람이 덧붙였다.
“백화산장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흉계로써
사람을 죽이더군요. 그러나 우리는 절대로 비겁한 수법은 쓰지 않
을 것이오. 만약 당신이 우리 주인의 초청에 응하지 않는다면 우리
는 피로써 갚을 것이오.”
소영은 장검을 걷어들이며 결연히 말했다.
“두 분은 앞장 서시오. 소생은 귀주인을 만나 보고 싶소.”
두 장한은 아마 소영이 응하지 않으리라고 짐작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더니 말했다.
“그럼 우리 형제가 앞장 서겠소이다.”
소영은 황급히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는 소생이 개인문제를 해결할 동안 잠시 기다려 주시
오.”
그리고 금란을 향해 말했다.
“너희들은 가거라. 그들을 데리고 다시 백화산장으로 말이다.”
금란은 조용히 말했다.
“셋째 나리, 저희들 걱정은 마십시오. 그리고 그들을 만나면 가
급적이면 충돌을 피하십시오.”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것은 나도 알고 있다. 다만 내가 걱정되는 것은 저 두 사람의
독성이 발작할 시간이 닥친 것이다. 네가 만약 백화산장으로 돌아
가지 않는 다면 두 사람의 목숨은 위태롭다.”
금란은 침착하게 말했다.
“당낭자의 마음이 어떤지 그것은 제가 모르오나 은란 동생의 마
음은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독성이 발작하여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백화산장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할 것이 틀림없
습니다.”
소영은 하늘을 우러러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
“셋째 나리께서 저희들을 짐으로 느끼지 않으신다면 저희는 어디
까지나 셋째 나리의 곁을 따르고자 원하고 있습니다.”
소영은 이 하늘 아래 금란, 은란이 의지할 곳이 없다는 것을 깨
닫자 결연히 말했다.
“좋다! 그럼 같이 가기로 하자.”
그리고 몸을 돌려 두 장한의 뒤를 따랐다. 앞장선 두 장한은 약
칠, 팔 리쯤 지나오자 다음 무성한 숲으로 들어 갔다.
이때 앞장서서 길을 인도하던 장한이 큰 소리로 외쳤다.
“백화산장의 삼장주께서 연회에 참석하러 오셨습니다!”
어느새 소영의 앞은 넓은 잔디 위에 약 사십 가량 되어 보이며
수염이 턱을 둘러 싸고 번쩍이는 범눈을 가진 늠름한 사나이가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소영은 그 사람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소생은 초청을 받고 왔습니다. 주인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신지
요?”
그 털보 대한은 소영의 모습을 보자 처음부터 줄곧 번쩍이는 눈
빛으로 아래위를 훑어 보고 있었다.
소영이 포권을 하고 묻자 비로소 눈길을 거두어 들이며 그도 역
시 포권을 하고 대답했다.
“바로 소생이 주인이오. 당신의 말투로 보아 바로 백화산장의 삼
장주이시군요.”
“그렇소. 귀하께서는 무슨 볼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털보 대한은 별안간 앙천대소하더니 급히 손을 뻗쳐 소영의 오른
팔을 향해 일장을 날리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이렇게 순진하고도 늠름한 청년이 그처럼 악독한 짓을 하다니,
참으로 사람의 겉모양만 보고는 모르겠구려.”
소영은 재빨리 오른손을 쳐들어 털보를 향해 뻗쳤다. 두 사람의
손이 맞부딪치는 순간 상상외로 아무 소리도 나지 않고 조용했다.
한참 후 그 털보 대한은 소영의 오른손을 놓으며 칭찬을 했다.
“삼장주, 과연 훌륭한 솜씨오.”
소영이 겸손하게 물었다.
“과찬의 말씀이오. 귀하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소생은 보천성(步天星)이라 하오.”
두 사람은 손을 마주잡는 순간 이상하게도 친밀한 감정이 솟아
적의가 크게 감소됐다.
소영은 조용히 물었다.
“보형께서 사람을 보내 저를 이곳으로 오게 한 이유는 무엇입니
까?”
보천성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몇 분의 무림친구들이 삼장주를 만나 보고 싶어 하오. 소생도
물론 그 중의 한 사람이오.”
보천성이 손뼉을 치자 동쪽 숲에서 흰색 승복을 입은 약 오십 세
쯤 되어 보이는 승려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소영은 이 승려를 보자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들었으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보천성은 그 중을 가리키며 소개했다.
“이 대사께서는 바로 소림문하의 지광대사(智光大師)이시오.”
소영이 공손히 예를 올리자 지광은 합장을 하고 불호로써 답례했
다. 보천성은 다시 손뼉을 쳤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쪽 숲에서 건
강한 신체에 흰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온 대한 하나가 등에 한 쌍의
일월청강륜(日月靑鋼輪)을 매달은 채 서서히 걸어 나왔다.
소영은 그를 보는 순간 말을 걸려고 하다가 문득 생각이 달라져
서 입을 다물었다.
보천성은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분은 초곤산 초대협이오. 사람들은 성수철담(聖水鐵膽)이라
고 칭한다오.”
소영은 다시 포권하여 절했다.
“초대협, 소생은 소영이라 하오.”
초곤산은 소영을 지그시 바라 보며 입을 열었다.
“소문은 많이 들었소.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
각하오.”
소영은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 사람은 마치 나를 모르는 척 하는구나. 왜 그럴까?’
소영이 처음 악소채를 따라 견식을 넓히면서 만났던 인물들은 어
린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소영을 기억
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세 번 손뼉을 치자 서쪽 숲에서 두 사람이 걸어 나왔
다. 한 사람은 호리병을 든 승려였으며 다른 한 사람은 다 떨어진
누더기 옷에 더러운 거지꼴을 하고 있었다.
보천성은 두 사람을 가리키며 소영에게 소개했다.
“이 두 분은 강호에서 뭇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풍진기객(風塵奇
客)인 주승(酒僧)과 반개(鈑介)시오.”
소영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며 공손히 말했다.
“두 분의 명성은 많이 들었습니다.”
보천성이 다시 손뼉을 네 번 두드리자 북쪽 숲에서 흰 수염의 노
인 하나가 지팡이를 끌고 왼발을 절룩거리며 걸어 나왔다.
바로 소영이 백화산 장에서 본 일이 있는 상대해(常大海)였다.
상대해는 과연 옛날의 원한을 아직도 가슴에 품고 있는 듯 보천
성이 소개도 하기 전에 그의 말을 막고 입을 열었다.
“한달 전, 삼장주가 그 심목풍의 보호 아래 우리를 쫓아 낸 위풍
과 그 살기를 우리는 아직 잊지 못했소.”
소영은 잔잔히 미소지으며 말했다.
“귀 사도께서는 오해를 하고 계십니다. 보아하니 입으로는 설명
이 어렵겠구려.”
상대해는 크게 비웃었다.
“내가 직접 목격을 한 것이니 어쩌겠소? 설마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단 말이오?”
소영은 해명할 말이 가슴에 가득했으나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풀
어야 할지 몰라 다만 한숨만 짓고 묵묵히 서 있었다.
보천성은 그들을 번갈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여러분은 서로 알고 있는 사이니 내가 소개할 필요가 없군요.”
그리고 말을 계속했다.
“우리가 오늘 삼장주를 이곳으로 초청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삼
장주에게 몇 가지 물어 볼 말이 있어서 모셔온 것이니 솔직히 대답
해 주시오.”
소영은 마음을 다지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 무엇이든 마음껏 질문하시오. 제가 알고 있는 데까지는
성의껏 대답할 것이며 또한 결코 거짓이 없을 것이오.”
지광대사는 합장을 하고 불호를 한 번 외운 다음 소영에게 물었
다.
“삼장주께서 아까 연속으로 아홉 명의 고수들을 격사시킬 때 소
승의 사제 하나가 삼장주의 손에 목숨을 잃었소. 그런데 삼장주께
서는 무엇 때문에 독수를 뻗어 그의 목숨을 빼앗았는지요?”
주승은 몽롱히 취기어린 눈으로 소영을 훑어 보더니 중얼거렸다.
“아깝구나, 아까워! 아깝게도 훌륭한 구슬이 흙탕 속에 빠졌구
나.”
그러자 반개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들의 원한은 깊소! 저런 사람은 이미 감정이 마비된 사람이
오. 그와 말을 나누는 것보다는 오히려 힘을 아껴 소에게 비파를
퉁겨 주는 것이 훨씬 낫겠소.”
소영은 불쾌한 생각이 들었으나 애써 자신의 감정을 억제했다.
마른 기침을 두어 번 한 뒤 대답하려고 했으나 적당한 말이 떠오
르지 않았다.
이때 돌연 초곤산이 입을 열었다.
“삼상노어옹(三湘老漁翁)은 온순하고 겸손한 사람이오. 당신과는
아무런 원한도 없거늘 어째서 당신은 절독한 암기를 사용하여 그분
의 목숨을 빼앗았소? 내가 그의 원한을 갚아 주지 않는다면 삼십
년간의 우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소영의 가슴을 후벼파는 것 같았다.
그러나 머리만 점점 복잡해질 뿐 한 마디의 말도 하지 못했다.
주승은 고개를 들어 반개를 흘끔 쳐다 보며 말했다.
“야 이 거지야! 네가 말해라.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유를 말하는
데 우리는 이유도 없이 싸움에 끼어들 수야 없지 않냐?”
반개는 허리에 찬 큰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더니 밥을 한 주먹
움켜 쥐고 입 속으로 털어 넣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신행추풍객(神行追風客)은 우리 주승, 반개와는 풍진삼우(風塵
三友)라 하오. 그런데 당신은 우리의 친구 목숨을 빼앗았소. 우리
가 그의 복수를 해주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은 우리 풍진삼우가
당신들의 백화산장을 두려워한다고 비웃을 것이오.”
보천성은 가볍게 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 심목풍은 흉명이 높을 뿐만 아니라 수 많은 사람과 원한을
맺었소. 그가 여태껏 죽인 사람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이 많
소이다. 십 년 전에 천하 영웅들이 합세하여 그를 공격했을 때 무
림 인물들은 그때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었으나 뜻밖에도 십 년 후
그는 다시 강호에 나타났으며 또 당신과 같은 좋은 협력자를 얻은
것이오.”
소영은 마침내 속에서 피가 끓는 울분이 치솟아 자신을 억제할
수 없게 되자 소리쳤다.
“닥치시오! 당신들은 무슨 근거로 그 사람들을 모두 내가 죽였다
고 말할 수 있소?”
보천성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 사람들은 삼장주가 탄 마차 뒤를 바싹 쫓아갔었는데 당신이
아니면 또 누가 했단 말이오?”
소영은 흥분한 듯 외쳤다.
“목격한 사람이 있소?”
보천성이 곧 대답했다.
“내가 보았소.”
소영은 치솟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다시 소리쳤다.
“당신이 분명히 목격했단 말이오?”
그러자 보천성은 갑자기 노기 띤 음성으로 숲을 향해 외쳤다.
“둘째 어른의 시체를 가지고 오너라.”
그러자 숲에서 대답하는 소리와 함께 두 명의 장한이 한 구의 시
체를 들고 급히 달려 왔다.
보천성이 그들에게 분부했다.
“이곳에 내려 놓아라.”
두 명의 장한은 시체를 내려 놓고 물러났다. 그 시체는 눈을 번
쩍 뜬 채로 입가에는 핏자국이 있었다.
보천성은 비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의 동생은 착하고 매우 어진 사람이오. 나의 악독한 성격과는
정반대요. 그와 같은 선량한 사람에게 이처럼 비참한 결과가 올 줄
은 미처 몰랐었소. 그러니 그가 어찌 눈을 감고 죽을 수 있겠소이
까?”
보천성은 비통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날카롭게 말했다.
“삼, 사 장 떨어진 거리에서 그가 마차에 다가섰을 때 쓰러지는
것을 직접 보았소. 그래도 잡아 뗄 작정이오?”
소영도 마침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그 마차 안에 오직 나 혼자만 타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
있단 말이오?”
“그 마차 안에는 오직 지금 여기 있는 네 사람밖에 없소. 그런데
당신 말고 또 누구란 말이오?”
소영은 마침내 울분이 치밀어 치를 떨며 외쳤다.
“그들은 비록 마차를 추격하다가 피살됐지만 범인은 결코 내가
아니오.”
보천성은 노기 찬 음성으로 그를 힐난했다.
“내가 직접 보았는데도 당신은 교활한 변명을 하다니…다만 분
한 것은 당시 나는 동생의 죽음으로 비통한 나머지 끝까지 마차를
추격하여 당신을 잡지 못한 것이 분할 뿐이오.”
소영은 노기찬 음성으로 대꾸했다.
“당신들이 흑백도 가려내기 전에 나를 의심하는 것은 너무 경솔
한 짓이오.”
이때 금란이 돌연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셋째 나리, 순금은 불길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나리께서는 너
무 급하게 서두르지 마시고 차근차근 저분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하십시오.”
주승은 손짓으로 금란을 가리켰다.
“당신은 누구요?”
금란은 당당한 자세로 대답했다.
“나는 금란이라 하오. 모두 의리있는 인물이라고 자부하는 당신
들은 어찌 이렇게 경솔하시오?”
초곤산은 그의 음성이 마치 여자같이 가냘프다고 느껴졌으나 남
장을 하고 있었기에 그녀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너는 여자냐, 아니면 남자냐?”
금란은 당돌하게 대답했다.
“여자요. 그러나 나는 당신들 같은 건장한 남자들이 분명치 않게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우리 여인들보다 현명하지 못하다
고 느꼈소.”
“흥! 당신들의 이 엄숙한 얼굴들을 보니 실로 가소롭구려.”
초곤산은 쳐들었던 장세를 거두어 들이며 말했다.
“호남은 여인과는 다투지 않는다. 내가 이런 신분에 너같은 연약
한 여인과 다투겠느냐.”
보천성은 등에 꽂았던 은피리를 뽑아 들면서 냉랭히 말했다.
“당신이 어떤 수단으로 암기를 썼든 연속 아홉 명이나 되는 고수
를 쓰러뜨렸으니 그것으로도 충분히 당신이 고명하다는 것을 증명
할 수 있소. 나 보천성은 당신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소.”
소영도 재빨리 장검을 뽑아 들며 냉정히 말했다.
“기왕에 입으로 자세히 해명할 수 없는 바에야 우선 무공으로 상
하를 겨뤄 보고 그 다음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금란! 너는 빨리 비
켜라.”
보천성은 은피리를 번쩍 쳐들었다.
“내 초를 받으시오!”
그는 번개같이 은피리를 휘두르며 소영을 향해 찍어 갔다. 소영
의 장검은 즉시 기봉등교(起鳳騰較)의 초식으로 수세와 공세를 곁
들여 뻗쳤다. 그는 그 일검으로 보천성의 은피리를 막아 내며 손을
휘둘러 앞으로 찔러 갔다.
보천성은 몸을 치솟아 그것을 피하며 우렁찬 기합소리와 함께 은
피리를 휘저으며 반격해 갔다.
은빛이 번쩍이며 피리의 그림자가 하늘을 덮은 채 밑으로 떨어졌
다. 그는 비통한 감정에 지배되어 전력을 기울여 맹렬한 기세로 공
격을 퍼붓는 것이었다.
소영도 장검을 휘두르며 보천성의 공격을 받아 치열한 악투가 벌
어졌다. 보천성의 적법(笛法)은 일초 일초 연속적으로 공격을 하여
적으로 하여금 반격할 기회를 허용치 않았다. 이것은 가장 무서운
적법이며 보통 사람들은 삼십 초를 받아 내기가 어려운 초식이었
다. 그러나 아깝게도 그는 소영을 만났기에 그 날카로운 적법도 위
세가 격감하여 맥을 추지 못했다.
소영은 장산패에게 검술을 배우면서 천하 각파의 절초를 모두 익
혀 두었기 때문에 응변에는 뛰어났었다.
그의 검초는 매우 풍부하며 변화무쌍했다. 보천성의 적세(笛勢)
를 가볍게 피해 내고 있는 사이에 그것을 관전하고 있던 주위의 군
호들은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와 같은 어린 나이에 이토록 훌륭한 무공을 익혔다는 것은 도
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그들은 삼십여 합을 겨루었다.
소영은 별안간 춘풍화우(春風化雨)의 초식으로 적세를 막아 내며
말했다.
“소생은 이미 적법을 지도받았소. 그러나 별로 신통한 것도 아니
구려. 자! 이제부터 내가 반격할 차례요. 조심하시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소영은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보천성
은 점점 기세가 꺾여 기선을 잃었다. 그는 소영과 몇 초를 겨룬 후
마침내 소영을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수십 년
간 길러 온 내력으로써 상대방의 장검을 날려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들어맞지 않았다. 그가 힘껏 내력을 뻗쳤는
데도 소영의 장검은 손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의 내력은
도로 은피리에 딸려 즉시 밑으로 내려 갔다. 이것은 바로 검술 속
에 점(粘)과 활(滑) 두 가지의 운용이었던 것이다.
우선은 음유(陰柔)의 힘으로 보천성의 강력한 반격을 받아 들이
고 검세는 은피리를 따라 내려 가며 보천성의 은피리를 움켜 쥔 오
른손을 노렸다.
이때 보천성이 들었던 은피리를 떨어뜨렸다.
만약에 이때 보천성이 은피리를 빨리 버리지 않았다면 그의 팔은
끊어졌으리라.
소영이 급히 뒤로 두어 발 물러나며 뻗었던 힘을 거두고 말했다.
“미안하게 됐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