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 Finger RAW novel - Chapter 35
35. 백화산장의 고수들
소영, 주조룡, 금란, 은란 네 사람은 몇 개의 뜰을 지나 망화루
앞에 도착했다.
누각의 문은 굳게 닫혔고, 는 패가 높이
걸려 있었다.
주조룡이 소영을 돌아 보며 말했다.
“마침 큰형님이 좌식(坐息)시간이라 손님을 만나지 않으시겠다
니, 다시 오는 것이 어떻겠소?”
“우리는 형과 동생이라 부르는 사이인데 어떻게 손님이라 하겠
소?”
소영은 좌장을 휘둘러 문을 때리고 높은 소리로 외쳤다.
“빨리 문 열어!”
이 일장은 암암리에 내력을 운기했기 때문에 쌍대문이 삐걱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굳게 닫혔던 쌍대문이 열리자, 경장을 하고
칼을 찬 사나이가 문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는 소영과 주조룡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 보았다.
“누가 문에 일장을 가했소?”
소영이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삼장주 소영이다.”
경장한 사나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문 위에 걸린 목패를 삼장주께선 보지 못했소?”
소영이 아니꼽다는 듯 말을 내뱉았다.
“보았다면 어쩔 테냐?”
“지금 이런 시각에 대장주님은 손님을 만나지 않소. 삼장주께서
는 목패를 보시고도 출수를 했으니 고의로 범한 것 같군요.”
“너, 눈에 보이는 게 없느냐?”
“대장주님의 명령은 산과 같소. 삼장주님이라도 순종하셔야 하
오.”
소영은 갑자기 그 사나이의 뺨을 후려쳤다.
“개새끼! 환장했군. 누구 앞에서 감히 말대꾸냐?”
소영의 출수는 매우 빨랐고, 사나이는 조금도 방어하지 않았다.
사나이의 어금니 두 개가 부러져 입에는 선혈이 가득 고여서 뚝뚝
입술을 비집고 흘러 내렸다.
사나이는 정신을 가다듬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대장주의 명령을 하속배가 어길 수 없소. 설령 제가 이장주와
삼장주를 이 문으로 들여 보낸다 해도 십이 층의 경호인은 두 분을
들여 보내지 않을 거요.”
소영이 냉랭하게 말을 내뱉았다.
“어떤 놈이든지 나를 막을 수 없다. 어서 길을 비켜라!”
소영이 문 안으로 성큼 들어 서면서 사나이에게 부딪쳤다. 사나
이는 풀썩 뛰어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서며 어깨에 꽂았던 칼을 뽑았
다. 소영이 냉랭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죽고 싶으냐?”
“대장주의 명령이 매우 삼엄하오. 이장주와 삼장주께서 굳이 강
제로 들어 가시겠다면 이 하인배는 죄를 짓는 수밖에 없소.”
소영은 그 말을 듣자 눈에 살기를 띠면서 주조룡을 향해 물었다.
“이놈이 윗사람을 알아 보지 못하니 죽이는 것이 어떻겠소?”
주조룡이 대답했다.
“우리 산장의 규칙대로 한다면 그는 죽고도 죄가 남소. 하지만
그는 대장주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
소영이 말을 가로챘다.
“죽어 마땅한 놈이라면 인정을 베풀 것 없소.”
소영은 왼손으로는 십이난화불혈(十二蘭花拂穴)수법을, 오른손으
로는 연환섬전장법(連環閃電掌法)을 사출했다.
그 위력이 너무도 강해, 사나이는 겨우 사, 오 초를 가까스로 받
아 넘기다가 칼을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뿐만 아니라 반신이 빳빳
하게 굳어 버렸다.
소영은 사나이를 발로 차서 거꾸러뜨리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
했다.
“이번이 처음이므로 이쯤에서 그친다. 이 다음에도 만일 뉘우침
이 없다면, 그 때는 너의 모가지가 달아날 줄 알아라.”
소영은 말을 마치자 성큼성큼 걸어서 이 층으로 올라 갔다. 주조
룡은 소영이 지금 매우 흥분되어 눈에 살기를 띠고 있는 것을 보
자, 당장 그를 제지한다면 그에게 원수를 살지도 몰라 조심했다.
주조룡은 원래 위인이 엉큼한지라 자신이 없는 것은 결코 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는 곧장 아무 말도 않고 소영의 뒤를 따라 올라 갔
다. 금란이 은란의 귀에다 대고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우리도 셋째 나리를 따라서 올라 갈까?”
은란이 굳은 결심이라도 한 듯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올라 가요.”
금란과 은란은 나란히 이 층으로 달려 올라 갔다. 이 층에는 흑
색 경장을 한 사나이들이 서 있었다. 왼쪽의 사나이는 안령도(雁翎
刀)를 들고, 오른쪽의 사나이는 한 쌍의 판관필(判官筆)을 들고,
어깨를 나란히 하여 길을 막았다.
소영이 눈을 부릅뜨고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희들은 나를 몰라 보느냐?”
안령도를 든 사나이가 서슬이 시퍼래서 대꾸했다.
“망화루에서는 대장주 한 분만의 명령을 받기로 되어 있소. 그외
의 명령은 일절 들을 수가 없소.”
소영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대들었다.
“백화산장에서는 모두들 나를 삼장주라고 부른다. 설마 공연히들
그러는 것이 아니겠지?”
그러자 판관필을 든 사나이가 거만하게 나섰다.
“이 망화루는 대장주님이 거처하는 곳이오. 그래서 경비가 삼엄
하오. 대장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 이외에는 아무도 오를 수 없
소.”
“내가 꼭 올라 가겠다면?”
왼쪽의 사나이가 능글맞게 대답했다.
“우리들은 두 장주님을 알고 있지만, 칼은 눈이 없기 때문에 삼
장주를 알아 보지 못하오.”
소영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오른손을 휘둘러 그에게로 찔러 갔
다. 그 사나이는 미처 안령도를 써 보지도 못한 채, 배에 수라지력
을 맞고 입을 딱 벌리며 피를 쏟고 나동그라졌다.
소영은 시선을 돌려 판관필을 들고 있는 사나이를 보고 외쳤다.
“목숨이 아깝거든 빨리 비켜라!”
그 사나이는 소영의 일격에 동료가 쓰러져서 생사가 분명치 않음
을 보자 엉겁결에 쌍필을 휘둘러 소영의 혈도 두 곳을 공격해 왔
다. 소영은 몸을 비틀어 교묘하게 쌍필을 피하고는, 곧장 달려들어
우장으로 비스듬히 때려 잠력을 밀어내 쌍필을 눌러 버렸다. 그리
고는 그 사나이의 왼팔을 잡고 약간 비틀자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나이의 왼팔이 부러졌다.
“왼팔만 꺾어 징계를 하지.”
소영이 내뱉듯이 말하고는 왼쪽 다리로 사나이의 혈도를 차 버리
고 성큼성큼 삼 층으로 달려 올라 갔다.
그 사나이는 왼팔이 부러져 아픔이 뼈 속까지 스며 들었으므로,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곤 전신의 공력을 운행하여 그 고통을 이기
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다 다시 소영에게 혈도를 채이고 그 자리에
픽 쓰러져 버렸다.
주조룡은 소영이 경호인을 연달아서 상해하며 미친 듯아 달려 올
라 가는 것을 보자,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편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 망화루의 경호인들은 한층씩 올라 갈수록 그 무공이 높아지
는데, 소영이 이런 식으로 돌파해서 올라 간다면, 반드시 층을 더
할수록 더 격렬한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게다가 이 사람들은 모두
백화산장의 정예 고수들이므로, 심목풍이 결코 이들이 모조리 상하
도록 좌시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곧 형제간에 반목
하는 참극이 연출될지도 모른다.’
주조룡이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일행은 어느 새 삼 층으로 올
라 왔다. 삼 층에는 오십쯤 되어 보이는 늙은이가 있었다. 그는 왼
손에는 철방패를, 오른손에는 단도를 들었으며 얼굴 빛깔은 무쇠
빛깔처럼 검고 단단해 보였다.
이 늙은이는 문을 가로막고 서서 소영과 주조룡이 올라 오는 것
을 보고도 잠자코 있었다.
소영은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나를 알 테지?”
늙은이는 소영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대꾸만 했다.
“당신은 우리 백화산장의 삼장주요.”
소영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내 신분을 알고 있으면서 어째서 예의를 표시하지 않는가?”
“망화루에서는 심대장주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에게 절을 해 본
일이 없소.”
소영은 순간 비위가 상했다.
“넌 허세가 대단하군.”
소영은 말을 잠깐 끊었다가 별안간 외쳤다.
“빨리 비켜!”
늙은이는 여전히 코웃음을 쳤다.
“삼장주께서는 제가 좋은 말로 권유할 때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이오.”
소영이 다그쳐 물었다.
“내가 꼭 올라 가겠다면?”
늙은이는 오른손의 단도로써 철방패를 한 번 두드렸다.
“당신이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 거지요.”
소영이 내뱉듯 말했다.
“그렇다면 조심하게.”
소영은 홱 일장을 쳐 냈다.
늙은이는 왼손의 철방패를 비스듬히 내밀어 소영의 장풍을 막으
며 오른손의 단도를 단봉료운(丹鳳了雲)초식으로 옆으로 말아 올렸
다. 소영의 장풍은 철방패에 부딪치자 곧 옆으로 미끄러져 버렸다.
소영은 몸을 굽혀 단도를 피하면서 늙은이의 옆구리를 힘껏 걷어
찼다. 늙은이는 왼팔을 낮추어 철방패로써 아랫도리를 막으며, 오
른손에 든 단도를 번개처럼 휘둘러 소영의 오른쪽 다리를 베려고
했다.
이때 소영은 그의 문호가 매우 엄하게 봉해져 있는 것을 보고 내
찼던 다리를 재빨리 도로 거두었다.
늙은이는 그 틈에 달려 들어 철방패로 몸을 보호하며 단도로 공
격해 왔다. 소영은 할 수 없이 다섯 보 후퇴했다. 소영은 곧 장세
를 바꾸어 연달아 사 장을 내리쳤다.
늙은이는 일시적으로 눌려서 수세를 취했지만 전신 상하를 철방
패와 단도로 지키는 까닭에 조금도 빈틈이 없었다. 십여 합을 싸웠
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은란이 이때 등에 꽂았던 장검을 뽑아 들고 소리쳤다.
“셋째 나리, 검 받으세요.”
이 두 비녀는 주조룡이 옆에 있는데도 조금도 꺼리는 빛이 없었
다. 주조룡이 소리를 질러 비녀들을 제지하려는 순간 소영이 대갈
일성했다.
“놓아라!”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일장으로 늙은이의 오른팔을 때렸다. 순
간, 늙은이는 손에 들었던 단도를 떨어뜨렸다. 소영은 일초를 성공
시키자, 그를 토망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오른 발로 늙은이의
왼팔을 차서 철방패마저 떨어뜨렸다. 그러고 나서 재빨리 왼손의
다섯 손가락을 뻗쳐 늙은이의 왼손 어깨를 눌렀다.
소영은 냉랭한 소리로 말했다.
“너는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범하였으니 어떤 죄에 해당하는
가?”
늙은이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못 들은 척 했다.
소영은 정색을 하면서 냉랭한 소리로 다시 외쳤다.
“넌 살고 싶겠지?”
이때 주조룡이 끼어 들었다.
“삼제, 살인해서는 안 되오.”
소영은 애당초 늙은이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므로, 그 말
이 떨어지자 장세를 거두며 물러섰다.
“이장주의 명령이니 너를 살려 주겠다.”
이때 느닷없이 음흉하고 냉랭한 웃음소리가 크게 들려 왔다.
“삼제는 격노한 가운데서도 둘째 형의 명령을 들으니 그 정의가
놀랍구려.”
소영이 고개를 들어 바라 보니 심목풍이 사층의 층계 입구에 서
서 내려다 보고 있었다. 주조룡이 허리를 굽혀 포권례를 올렸다.
“큰형님께 인사드립니다.”
심목풍이 손을 가로저었다.
“이제는 지나치게 예의를 갖출 것 없소.”
금란과 은란은 죽음을 각오한 바이지만 막상 심목풍이 나타나자,
그만 놀라서 전신을 바들바들 떨며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너희들은 삼장주를 모시고 먼길을 갔다 왔으니 공을 세운 사람
들이다. 어서 일어나거라.”
금란과 은란은 심목풍이 뜻밖에 부드럽게 대하자 어리둥절했다.
심목풍은 소영을 바라 보며 입을 열었다.
“이 형이 왕년에 많은 원수를 맺어 놓아 부득불 망화루의 문단속
을 좀 삼엄하게 했더니 하속배들이 삼제까지 막아 버렸구려.”
주조룡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 망화루엔 누구든지 맘대로 들어 갈 수 없는 것은 백화산장에
서는 다 아는 사실인데, 어째서 큰형은 오늘따라 이처럼 겸손해졌
을까?’
심목풍이 다시 말을 이었다.
“삼제가 먼 길에서 돌아 왔으니 형이 좀 위로를 해야겠소. 빨리
올라 오시오. 그리고 이 형이 두 분과 의논할 일도 있고….”
소영은 몇 번이나 부모님은 어디에 계시냐고 물어 보고 싶었지만
억지로 참았다. 심목풍이 앞장 서서 걸어 갔다.
각 층의 경호인들은 올라 갈수록 그 형상이 냉혹하고 괴상했다.
십 층 이상의 경호인들은 모두 흰 수염을 날리는 늙은이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냉랭한 표정으로 심목풍마저 못 본 척 했다.
소영이 그들을 자세히 살펴 보니, 그들은 모두 눈에 정기가 넘치
는 고수들이었다. 십삼 층에는 이미 풍성한 주석이 마련되어 있었
다. 그리고 푸른 비단옷을 입은 아름다운 비녀 네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심목풍이 상좌에 앉고, 소영과 주조릉이 좌우에 앉았다. 금란과
은란도 끼어 앉았다.
심목풍이 잔을 들어 소영에게 권했다. 소영은 술잔을 들어 마시
려고 하다가 자자기 무슨 생각이 난 듯 술잔을 도로 놓으며 입을
열었다.
“소제가 몇 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소.”
심목풍이 웃으며 대답했다.
“무슨 말이든 다 해 보시오.”
소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제가 양친을 뵈오러 고향으로 찾아 가는 도중에 많은 무림의
인물들이 길을 막고 나섰소. 그들이 소제의 소지품을 조사해 봐야
겠다기에 소제는 스스로 부끄러움이 없었으므로, 내 손으로 떳떳하
게 상자를 열어 그들에게 보여 주었소. 그런데 뜻밖에도 그 상자
안에는 사람의 머리가 들어 있었소.”
심목풍은 그 말을 듣자 웃기만 했다.
“그들은 사람의 머리를 보자 어떤 반응을 나타냈소?”
소영은 심목풍이 그의 음모를 폭로하면 뉘우치는 빛을 보일 줄
알았다. 그러나 심목풍은 놀랍게도 이토록 태연한 태도를 취하는
게 아닌가?
소영이 화가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금란이 용기를 내어 말했
다.
“그 사람들은 사람의 머리를 보자, 화를 내면서 삼장주님이 살인
범이라고 떼를 썼습니다.”
심목풍은 고개를 연방 끄덕이며 웃음 띤 얼굴로 대답했다.
“그들이 갑자기 친한 사람의 머리를 보고 강호의 소문이 사실이
라는 확증을 얻었을 테니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소영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큰형님이 그 상자에 머리를 넣어 소제더러 가지고 가라고 하신
뜻은 무엇이오?”
심목풍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은 이 형이 삼제에게 이름을 낼 기회를 마련하려는 것이었
소.”
소영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소제가 보기에는 이것은 남의 칼을 빌려서 나를 죽이려는 계획
인 것 같소. 내가 무림영웅들의 공격을 받아 죽어 버린다면 어떻게
이름을 낼 기회가 생기겠소?”
“그 점에 대해서 삼제는 안심해도 좋소. 이 형은 삼제가 위험을
당하기만 하면, 곧 누가 달려 가서 구하도록 배치해 놓았었소. 그
뿐만 아니라 나는 삼제의 무공을 믿고 있었소.”
“그러면 일부러 그러셨단 말인가요?”
“맞았소. 그것은 모두 이 형이 계획적으로 한 것이오.”
소영은 그 말을 듣자, 마음속에 짚이는 것이 있어 분통이 터지려
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그렇다면 소제의 부모님을 잡아 온 것 또한 대장주님의 안배였
군요?”
심목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백화산장은 많은 원수를 가지고 있소. 그들은 나를 뿌리채
뽑아 버려 후환을 없애려고 발버둥치고 있소. 만일 이 형이 두 노
인들을 백화산장으로 모셔 오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면, 아마
다른 무림인에게 잡혀 갔을 것이오. 그렇게 된다면 그야말로 큰 야
단이 아니겠소?”
소영은 심목풍의 표정이 너무도 태연하고, 자기가 이렇게 격분해
서 질문할 것도 미리 예측하고 있었던 것 같은 태도를 보자, 속으
로 느끼는 바가 있었다.
‘이놈은 이미 준비를 다 해 놓은 것 같다. 그렇다면 내가 성을
내어 덤벼 들어 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는 일이다. 반드시 이놈이
상상치 못한 일을 해야만 되겠다.’
소영은 생각이 이에 미치자, 억지로 화를 누르고 일어서서 포권
하고 읍을 했다.
“큰형님의 용의주도한 점을 소재는 감격해 마지 않습니다.”
심목풍은 소영이 이렇게 나오리라는 것을 전혀 예상치 못해서 어
리둥절하며 잠시 놀라는 빛을 띠었다. 그러나 그는 곧 정색을 하면
저 너털웃음을 한바탕 웃어젖혔다.
“이 형이 일찍이 삼제는 지략과 용맹을 겸비한 사람이라고 보아
왔는데, 과연 잘못 보지는 않았군.”
심목풍은 엄지손가락을 내밀어 보이면서 말을 이었다.
“대장부는 굽힐 줄도 알고, 펼 줄도 알아야 하는 법. 삼제는 이
미 인생의 묘미를 터득한 것 같군요.”
소영은 억지로 웃는 얼굴을 보였다.
“소제는 부모님을 한 번 뵙고 싶습니다.”
심목풍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대와 나는 형제지간이니 춘부장과 영당(令堂) 또한 나의 부모
와 마찬가지가 아니겠소. 두 노인장에게 조금도 불편을 드리지 않
으니 그점에 대해서 삼제는 안심하시오.”
소영은 역시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제는 벌써 수 년 간 부모님의 얼굴을 뵙지 못했소. 자식된 마
음으로 사모의 정이 절실하여 한시 바삐 양친을 뵙고자 하오.”
심목풍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두 분 노인장께서는 휴식 중이시오. 소제는 너무 급하게 서두를
것 없소. 노인장 두 분께서 피로를 회복하신 후에 뵈어도 늦지 않
을 것이오.”
소영은 화가 치밀어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은란이 급히 가벼운
지풍으로 소영의 다리를 때리자. 소영은 탁자를 손으로 가볍게 두
드리며 말했다.
“큰형님이 그처럼 배려해 주시니 절을 한 번 해야겠소이다.”
소영이 옷깃을 여미며 정말 절을 하려고 하자, 심목풍은 오른손
을 휘둘러 암경을 몰아치며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삼제, 너무 어려워할 것 없소. 내 삼제에게 할 말이 있소.”
소영은 마침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제자리에 가서 앉았다.
“큰형님, 무슨 분부라도 있으십니까?”
“이 형이 이번에 다시 강호에 나와서 속으로는 은근히 삼제가 나
의 강적이 되지 않을까 염려해 왔었는데 오늘 삼제가 그처럼 임기
응변을 잘 하는 것을 보니, 나의 선견지명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증명할 수가 있었소.”
“큰형님은 너무 과찬을 하십니다.”
“옛부터 두 영웅은 나란히 설 수가 없다고 했소. 이 보잘것 없는
백화산장에서 어떻게 이 형과 삼제가 버티어 나갈 수 있겠소?”
“큰형님은 너무 의심이 많소이다. 소제는 조금도 영웅이 될 생각
이 없소이다.”
“만약 삼제가 명리를 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형제는 길이
달라 끝내는 서로 반목하여 원수가 되고 싸우게 될 것이오.”
소영은 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큰형님은 내 부모님을 잡아다가 인질로 삼고, 나더러 백
화산장을 위해 목숨을 바치도록 하려 했군요?”
심목풍이 담담하게 웃었다.
“미연방지를 한 것이 뭐가 잘못이오?”
소영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으나 심목풍은 여전히 태연한 표
정으로 술잔을 들었다.
“삼제, 앞에 있는 잔을 비우는 것이 어떻겠소?”
심목풍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웃었다. 소영은 술잔을 들면서
천천히 물었다.
“큰형님이 소제를 그처림 높이 평가했다면 왜 몰래 나에게 독수
를 쓰지 않고, 연만하신 내 부모님을 잡아다 고통을 주려하오?”
심목풍은 여전히 담담하게 웃었다.
“이 형이 춘부장과 영당을 모셔 온 것은 결코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오.”
소영은 더 이상 끓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여 상을 탁 치며
일어섰다.
“큰형님이 그처럼 무정하시면서 소제가 의리 없다고 나무라지 마
시오.”
소영은 서슴지 않고 옷자락을 뚝 찢었다.
“우리 형제는 이제 옷을 찢어 의를 끊고, 땅을 그어 절교하는 바
요.”
심목풍은 큰소리로 웃어젖혔다.
“우리 혈제에게 조만간 이 날이 올 줄 알고 있었소”
심목풍은 갑자기 웃음소리를 그치고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
다.
“우리 형제는 이로써 의리가 끊어졌으니, 지금부터 지모로서 강
호에서 패권을 다툴 것이오.”
소영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
“소제는 강호를 쟁패할 마음은 없소.”
소영은 순간 자신이 매우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고, 심목풍은 정
식으로 도전할 의사가 있음을 눈치챘다.
심목풍은 여전히 냉랭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설령 강호를 쟁패할 마음이 없다고 하더라도, 내가 무림
의 패권을 잡는 데 있어서 당신은 거추장스런 존재요.”
심목풍은 잠간 동안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내일 정오에 망화루로 와서 춘부장과 자당을 만나시오. 나는 당
신과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소.”
소영은 공수를 하면서 말했다.
“내일 정오에 약속대로 오겠소.”
“멀리 전송하지 못하오.”
“그러실 필요 없소.”
소영은 돌아서서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왔다. 금란과 은란도 일어
서서 따라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때 주조릉이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앉아라!”
두 비녀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 듯 주조룡을 힐끗 한 번 돌아 보
고는 그대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이년들이 정말…”
주조룡은 벌떡 일어나서 두 비녀에게 덤벼들려 했다.
이때 심목풍이 오른손을 휘들러 장력을 쳐내서 주조룡을 막았다.
“가도록 내버려 두시오.”
금란과 은란은 돌아서서 심목풍에게 큰절을 했다.
“대장주님, 감사합니다.”
심목풍이 냉랭하게 대답했다.
“감사할 것 없다. 너희들은 소영을 따라 갔으니 이제 내 백화산
장의 사람이 아니다.”
금란이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쇤네들은 어디까지나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금란은 은란을 이끌고 소영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 갔다.
소영은 곧 백화산장을 나와 버렸다.
금란과 은란도 뒤를 따랐다. 세 사람은 묵묵히 길을 걸어 어느새
오, 육 리를 걸었다.
금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셋째 나리, 거기 가시려고 맘먹었을 때 이러리라고 짐작하셨어
요?”
소영은
휴우!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강호의 사람들이 심목풍을 맹수처럼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군.
그 사람은 과연 음험하고 매우 독랄하구나.”
은란도 가볍게 탄식을 했다.
“대장주는 애당초 셋째 나리가 고향으로 돌아 가시는 길에 살인
을 하도록 만들어서, 셋째 나리로 하여금 아무 데도 발붙일 곳이
없도록 만들려는 계획이었어요. 그래서 셋째 나리가 백화산장에만
몸을 바치도록 말예요. 그러나 뜻밖에도 셋째 나리는 인용(仁龍)을
겸비하셔서, 연달아 핍박을 받으시면서도 함부로 살인을 범하지 않
았어요. 그러므로 셋째 나리의 인협(人俠)의 기상을 대장주는 매우
미워하고 괴로워한 나머지, 셋째 나리의 부모님을 납치하여 인질로
삼으려한 것이에요.”
두 비녀는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셋째 나리,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갑니까?”
소영이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우리는 우선 숨을 만한 곳을 찾아 휴식을 취하도록 하자.”
금란은 말했다.
“쇤내가 아는 바로는 이 백화산장의 사방 백 리 이내는 가는 곳
마다 백화산장의 밀정이 잠복해 있어요.”
소영은 그말을 듣자 눈을 번쩍였다.
“놈들이 내눈에 띄기만 하면 당장 요절을 내버릴 테다.”
은란이 말참견을 했다.
“저희 생각으로는, 셋째 나리께서는 부모님을 만나 보시기 전에
는, 역시 백화산장의 사람들을 죽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소영은 그 말을 듣자, 가슴이 메어 오고 뜨거운 눈물이 솟았다.
금란이 품 속에서 비단 손수건을 꺼내서 소영에게 주며 상냥한 목
소리로 위로했다.
“셋째 나리의 부모님깨서는 모두 착하신 분들이니까 하늘이 도우
실 거예요. 나리께서는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셋째 나리께서는 오
히려 용기를 내고 정신을 차려서 선후책을 강구해서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부모님을 구출하셔야 되는 거예요.”
소영은 비단 손수건을 받아 눈물을 닦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백화산장에는 고수가 구름떼같이 몰려 있고, 또한 복병이 겹겹
으로 둘러싸고 있으니, 내 비록 그들을 두려워하지는 않지만 부모
님을 구출하기란 무척 힘드는 일이다.”
은란이 말을 받았다.
“그 말씀이 옳아요. 저희들은 비록 생각은 간절하지만 무공이 얕
아서 나리를 도울 수가 없으며, 나리께서 혼자 구출하시기는 어려
워요. 그러니 협력자를 구하는 것이 좋겠어요.”
소영은 이를 갈며 탄식했다.
“내가 어리석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림인들의 질시의 대상이
되었으니 어디 가서 협력자를 구하겠느냐?”
금란이 상냥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이 일은 역시 일시에 해결될 수는 없으니 우리는 쉴 곳을 찾아
서 천천히 쉬면서 의논하기로 해요.”
소영은 문득 그 황폐한 절간이 생각났다.
“가자, 쉴 만한 곳으로 안내하겠다.”
세 사람은 곧장 상승경공을 전개하여 북쪽 교외를 향해 달려 갔
다. 소영은 익히 아는 길이라 경공을 써서 두 비녀를 끼고 불과 밥
한 끼 먹을 시간이 경과되자, 그 절간에 도착했다.
소영은 두 비녀를 데리고 곧장 대전의 뒷뜰로 들어 가서 동편에
있는 월랑(月廊)방으로 들어 갔다.
달포 전에 그는 중주이고와 약속을 했었다. 만일 강호에 큰 변고
가 생겨 연락이 어럽게 될 때는, 자기가 와서 남쪽 벽가에 있는 관
속에 중주이고가 넣어 둔 보고서를 보기로 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날 소영은 약속대로 왔지만, 독수약왕과 일생 병으로
고생하면서 근근히 숨만 붙어 있는 그의 딸을 만났을 뿐이었다.
지금 소영은 이곳에 오게 되자 불현듯 그 때의 일이 생각나서,
두 비녀를 데리고 그 방으로 들어 간 것이다.
은란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셋째 나리님, 쇤네가 전에 여기 와서 셋째 나리를 기다렸지만
만나지 못한 일이 있어요.”
소영이 천천히 대답했다.
“알고 있다, 너는 금화부인을 만났고, 그녀는 대장주에게 그 사
실을 고해 바쳐 너를 애꾸눈이며 쇠다리를 한 늙은이에게 시집보내
게 하겠다고 협박했지.”
은란이 의아한 듯 반문했다.
“셋째 나리께서 그것을 어떻게 아세요?”
소영이 천천히 대답했다.
“그때 나는 방에서 독수약왕에게 잡혀 피를 뽑히고 있었어.”
은란은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을 계속했다.
“금화부인은 셋째 나리를 참 좋게 생각하고 있던데요?”
금란이 이 말을 듣자 미간을 찌푸렸다.
“만일 금화부인이 백화산장에 있다면 셋째 나리가 돌아오셨다는
말을 듣고는 반드시 나타나서 만났을 텐데… 보이지 않는 것을 보
니 아마 백화산장에서 떠났나 봐.”
은란이 입을 열었다.
“금화부인이 아직 백화산장에 있다면, 셋째 나리를 도와 줄 수
있을 텐데…..”
그들이 서로 말을 주고 받는 사이에 문 앞에 이르렀다. 칠이 벗
겨진 방문은 꽉 닫혀 있었다.
소영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독수약왕을 만났던 일이
생각나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 곳은 인적이 드물 뿐만 아니라 방안에는 관이 있고, 또 이
낡은 절에는 지키는 중도 없는데 이 문은 왜 잠겼을까?’
금란은 소영이 망설이고 서 있는 것을 보자, 참다 못해 낮은 소
리로 외쳤다.
“셋째 나리, 왜 들어 가지 않으세요?”
“너희들은 여기서 잘 경비해라.”
소영은 오른손에 약간 힘을 주어 문을 밀었다. 삐걱 하는 소리와
함께 먼지가 풀썩 일며 문이 활짝 열렸다.
소영은 안을 둘러 보았다. 관이 여기저기 몇 개 흩어져 있었으며
그 광경은 전날과 조금도 다른 점이 없었다.
소영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 갔다. 곧 남쪽 벽가에 있는 관으로
가서 손에 힘을 주어 관 뚜껑을 밀어 젖혔다.
갑자기 관 속에서 맑은 새소리가 들려 왔다. 안을 들여다 보니
그 속에는 정밀하게 만들어진 새장이 하나 들어 있었고 새장 안에
는 비취 빛깔의 앵무새 한 마리가 쉴새없이 날뛰고 있었다.
금란은 새장을 꺼내어 손에 들고는 사랑스러운 듯 한참 동안 살
펴 보고 있다가 다시 관 속으로 넣었다.
그리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 새는 너무도 아름답다!”
소영은 잠자코 말이 없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여러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중주이고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처음 여기에 왔을 때는,
독수약 왕과 병에 걸린 그의 딸을 만났다. 그런데 두 번째인 지금
은 앵무새를 만났구나. 이 새는 새장만 보더라도 그 주인이 얼마나
이 새를 사랑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아무래도 주인이 이 새를
관 속에 넣어 둔 이유는 이곳은 황폐한 절이라서 인적이 드물고 비
밀 장소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안심하고 넣어 두었겠지….’
소영은 생각이 이에 미치자 소리내어 웃어버렸다.
은란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셋째 나리께선 뭣이 그리 우스운지요?”
소영이 대답했다.
“이 새를 여기다 둔 사람은 필경 이곳이야말로 사람의 발자취가
닿지 않는 안전한 장소라고 생각하여 두었겠지만, 바로 우리들에게
발견되고 말았잖느냐? 그게 우습단 말이다.”
금란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쇤네가 새를 감정하는 재주는 없지만, 이놈은 전신이 우아한 비
취 빛깔인 것만 보아도 훌륭한 새인 것 같아요. 정말 나는 이 새를
가지고 싶어요.”
은란이 말참견을 했다.
“이 앵무새를 관 속에 넣어 둔 지 쾌 오래된 듯 하군요.”
소영은 그 말에 의아심을 느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보세요. 저 새장 속에는 모이가 다 없어지고 물도 말랐어요. 적
어도 이틀 이상의 시간이 경과했을 거예요.”
소영이 그 말을 듣고 새장 안을 들여다 보니 은란의 말대로 모이
와 물이 전혀 없었다.
소영은 그만 양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군. 이 앵무새의 주인은 정말 멍청한 사람이군.”
금란이 입을 열었다.
“쇤네의 소견으로는 이 새장의 주인은 아마도 해를 입은 것 같아
요.”
소영은 어리둥절해서 잠자코만 있었다.
은란이 말을 받았다.
“금란 언니의 말이 옳아요. 이 백화산장으로부터 수십 리 이내의
지역에는 가끔 살인이 있어요.”
금란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뭣 때문에 이 사랑스러운 새를 이곳에다 버려 두고
갔을까요?”
“자아! 우선 관이 있는 이 방에서 하룻밤 휴식을 취한 후 내일
떠나기로 하자, 그 때까지 만일 앵무새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새장을 열고 앵무새를 놓아 주자.”
소영은 말을 마치자 천천히 금란과 은란의 얼굴을 훑어 봤다.
“어떠냐? 무섭지 않으냐?”
금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섭지 않아요.”
“좋아. 우린 오늘 밤 여기에 앉아서 새자꾸나.”
소영은 말을 하면서도 중주이고가 나타나 주었으면 하는 희망을
가슴에 품었다.
황폐한 절간에 밤이 점점 깊어지자, 무서움이 더해 갔다. 이따금
새장 속의 앵무새가 처량하게 울어 밤의 적막을 깨뜨렸다.
은란이 느닷없이 말했다.
“저놈은 틀림없이 배가 고플 거예요. 빨리 놓아 줍시다.”
소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만약 앵무새의 주인이 밤중에 돌아 와서 자기의 아끼는 새가 어
디에 있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무어라 대답하겠느냐?”
은란이 말을 받았다.
“아니에요. 정말 그 사람이 이 새를 사랑한다면 새의 먹이가 이
미 떨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을 거예요.”
은란은 조용히 관 뚜껑을 열고 새장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상
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셋째 나리, 이놈을 놓아 줄까요?”
“마음대로 해라.”
은란은 새장의 문을 열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빨리 날아 가거라!”
비취빛 새는 새장 밖으로 나와서는 곧 날아가지 않고, 은란의 머
리 위를 한 바퀴 빙 돈 다음, 날개를 치며 창문을 향해 날아 갔다.
금란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저 새는 좀 신비한 데가 있다.”
은란은 새장을 천천히 관 속에 도로 넣어 두고, 관뚜껑을 원래대
로 덮어 놓았다.
그리고는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 새의 주인이 지금 돌아오더라도, 우리들이 모두 모른다고 해
버리면 그만일 거예요.”
소영은 눈을 감고 운기조식을 했다. 소영이 운기하며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고 눈을 떠 보니, 두 비녀는 여전히 관 위에 멍청하게
앉아 있었다.
소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쉰 다음 입을 열었다.
“왜 여태껏 운기조식을 하지 않고 그렇게 앉아 있느냐? 내일은
생사를 걸고 싸워야 할 텐데.”
금란이 대답했다.
“쇤네는 앞으로 셋째 나리에게 다가 올 일에 관해서 생각해 봤어
요.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신통한 계책이 없군요.”
소영이 타일렀다.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는데 걱정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은란이 갑자기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셋째 나리님은 대장주를 굴복시킬 자신이 있으세요?”
소영이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한 마디로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제아무리 위인
이 음흉하고 무공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나는 조금도 그를 무서워
하지는 않는다.”
이때 은란이 말참견을 했다.
“셋째 나리, 쇤네가 몇 마디 귀에 거슬리는 말씀을 드리더라도
노여워하지 마세요.”
소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봐라.”
은란이 말했다.
“셋째 나리가 아무리 무공이 높고 용기가 있다고 하더라도 혼자
의 몸으로는 도저히 백화산장의 무수한 고수들을 상대할 수 없을
테니 내일은 참으시기 바랍니다. 만일 참지 못하여 당장에 손을 쓰
시더라도 싸움을 고집하지 마시고 또 금란과 저의 안전 따위도 돌
아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저 포위를 뚫고 나가시기만을 바랄 따
름입니다.”
소영은 눈을 깜짝거리며 은란의 말을 받았다.
“자식이 되어 가지고 부모의 슬하에서 효도를 다하지 못하는 것
도 이미 인생의 큰 죄를 지은 셈인데, 더욱이 나로 말미암아 부모
님이 고생을 하고 계시거늘 내 어찌 만 번 죽은들 내 목숨을 아까
와 하겠느냐!”
은란이 다시 말을 이었다.
“셋째 나리, 심목풍이 나리의 부모님을 잡아 온 목적은 셋째 나
리를 굴복시키기 위함이니, 셋째 나리께서 계속 무사하기만 하면
심목풍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마는 겁니다.”
그녀는 은근히 소영에게 내일의 약속에 가지 말라고 내비쳤다.
소영도 그 말의 뜻을 알아차렸다.
“이 일은 너희들이 신경을 쓸 문제가 아니다. 도리어 내게 한 가
지 생각이 있다. 너희들은 내일 정오의 약속에 나와 함께 갈 것 없
이 이 기회에 도망쳐 버리는 게 좋겠다.”
은란은 그 말에 쓸쓸히 웃었다.
“저희들이야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다만 셋째 나리께서.
…..”
소영은 손을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이 일에 관해서 더 이상 얘기하지 말자. 너희들도 쉬어야 하니
까.”
은란은 그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두 눈을 감고 운기조식하기 시
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