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 Finger RAW novel - Chapter 6
6. 신풍방주(神風幇主)
어느새 날은 어두워져서 총총한 별무리 사이로 이제 막 달이 떠
오르고 있었으며 그 달빛을 받은 무수한 산봉우리들이 묘한 감정을
일깨웠다.
지금 이곳에는 여섯 명의 사람이 있으나 누구 하나 크게 인기척
을 내는 사람이 없었다. 오직 들리는 것은 무심한 산새들의 울음소
리뿐이었다.
악소채가 움직이는 것 같더니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수면을 취해서 진기를 많이 회복하였다. 한 번 크게 기지개를 켜고
는 사방을 살폈다. 소영의 바로 옆에서 두구가 코를 골며 잠에 빠
져 있었고 그 건너편에 상팔의 모습이 보였다.
상팔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운기를 조식하고 있었다.
악소채는 상팔을 보면서 생각했다.
‘저 두 상인의 무공이 고강하기도 하지만 저들의 상술 역시 매우
교묘하다. 아마도 강호의 인물중 가장 부자일 것이다.’
천고 이래 무림의 인사들은 재물을 경시하였으며 의를 바탕으로
명성을 떨치며 강호를 유협하였다. 그러나, 중주의 형제 상인은 무
공이 높은 인물이면서도 무협으로서의 명성보다 상인으로서의 명성
으로 강호를 유협하니 자연 여러 금전관계로 사람으로부터 원한을
사게 되었다.
그들은 흙먼지를 뒤집어 쓰는 일이라도 돈이라면 꺼리지 않고 덤
벼들었다.
이러한 상인이 어찌 악소채의 금궁지약을 놓치겠는가?
악소채가 물끄러미 상팔을 내려다 보고 있노라니까 시선을 느꼈
는지 그가 눈을 떴다.
“악 낭자, 깨셨군요.”
악소채는 웃음을 띠며 말했다.
“너무나 피로해서 그만 잠이 들었어요. 두 분을 너무 오랫 동안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악소채는 운기조식하고 있는 소영에게로 다가갔다.
깊은 밤에 불어 오는 바람은 살을 에일 듯이 차가와서 소영의 공
력으로써는 도저히 참아내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몸을 가늘게
떨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운기
조식에 전념하였다.
악소채는 이러한 소영이 측은해 보였다.
“동생! 춥지 않아요?”
“누나, 걱정 말아요. 난 조금도 춥지 않으니……”
옆에서 듣고 있던 상팔이 입을 열었다.
“정말 공자의 굳은 의지에는 놀랐네. 만약에 공가 필요하다면 범
틸로 만든 외투를 주겠네.”
“나는 필요 없소.”
상팔은 엷은 미소를 띠며 다시 말했다.
“낭자! 소형제의 의지가 놀랍구려.”
악소채는 힐끗 상팔을 쳐다 보며 냉소를 터뜨렸다.
“당신들이 강호에서 수 십 년간 장사를 하면서 모은 돈은 아마
강호를 사고도 남을 만큼 많겠지요.”
악소채는 원래 상팔을 비꼬고자 한 말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상
팔의 표정은 조금도 변치 않았으며 도리어 호탕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모은 재산은 강호를 살만큼 많지는 않소이다. 그러나 무
림에서는 어느 누구도 감히 우리 형제를 따르지 못할 것이오.”
악소채는 내심 의아해 하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이 사람은 자신의 모욕도 모르고 도리어 웃음을 띠고 있으니..’
그녀는 소영을 일으키고 그 옆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장건에게
말을 건넸다.
“당신의 상처는 좀 어때요?”
“이젠 괜찮소. 이 정도라면 충분히 길을 떠날 수 있소이다.”
“퍽 다행이군요. 그럼 길을 떠나기로 해요.”
그녀는 말을 끝내고 재빨리 소영을 데리고 걸음을 옮겼다.
그동안 하곤은 두구가 준 영단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했더니 과
연 정신이 맑아지며 온몸에 진기가 되살아 났다.
‘중주쌍고는 돈만 버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영험한 영단도 만드
나 보군.’
하곤은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라 아주 가볍게 판관필을 휘두르며
악소채의 뒤를 바싹 따랐으며 뒤늦게 잠에서 깨어난 두구가 다급하
게 뛰어와 악소채의 길을 막아서며 입을 열었다.
“악 낭자! 우리들과의 약속을 잊으셨단 말이오?”
악소채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잊지 않았어요.”
“악 낭자가 잊지 않고 있다니 다행이오. 악 낭자는 갈 길이 바쁘
다고 하셨으니 굳이 그곳까지 갈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자당의 유
해가 있는 장소를 알려 주시오.”
악소채는 불끈 분노가 치솟았다.
“신풍방의 강적들이 잠시 후면 이곳으로 달려 올 거예요. 그러니
우선 이 위험한 곳을 빠져 나간 다음에 알려 주겠어요.”
옆에서 듣고 있던 상팔이 말참견을 하였다.
“여보게 동생. 우리는 악 낭자를 귀한 손님으로 모셔야 되네. 그
렇게 손님을 푸대접해서야 어디 장사가 되겠나?”
그는 말을 끝내고 어깨를 조금 움직여 악소채의 앞으로 달려나가
며 괴상한 휘파람을 불었다. 그의 긴 휘파람 소리가 막 그칠 즈음
갑자기 건너편 숲에서 개짖는 소리가 들려 왔다.
잠시 후 숲에서 두 마리의 거대한 개가 달려 나와 상팔에게 꼬리
를 치며 매달렸다.
악소채는 미간을 찡그리며 그 두 마리의 개를 쳐다 보았다.
‘음, 이 놈들은 저 개를 이용하여 나를 쫓아 왔구나.’
그녀는 내심 감탄하며 소영을 등에 업었다.
상팔은 두 마리 개를 앞세우고 계곡을 빠져 질풍같이 달려 나갔
다. 뒤를 이어 악소채와 두구가 달렸으며 하곤은 장건을 부축해서
는 그 뒤를 따랐다.
얼마후 계곡을 벗어나자 상팔이 걸음을 멈추고 두구에게 말했다.
“동생, 자네는 악 낭자를 따라가며 낭자를 보호하게. 난 먼저 앞
질러가 앞의 동태를 살피겠네. 우리의 앞길에 신풍방의 몇몇 고수
만 만나지 않으면 길은 매우 평탄할 것이야. 그러니 우선 그 늙은
괴물을 먼저 피하기로 하세!”
그러자 두구는 매우 못마땅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금궁의 열쇠가 강호에 나타나지 않으면 악 낭자를 뒤쫓는 무리
들이 수 없이 많을 것인데 언제까지 낭자를 보호하자는 것은 아닐
테지요.”
상팔은 계속 길을 달렸다.
“괜찮네. 우리가 이 포위망만 뚫고 나가면 그 다음 일은 매우 쉽
게 될 것일세.”
상팔은 말을 끝내고 앞을 바라 보니 벌써 악소채와 일행은 삼십
여 장 밖에 달려가고 있었다.
그는 두구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빨리 낭자를 따라 가세.”
그들은 불과 몇 시간 만에 큰 산봉우리를 두 개나 넘었다.
악소채의 등에 업혀 있는 소영은 이제 조금도 추운 줄을 몰랐다.
그는 두 개의 산봉우리를 넘어서자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다 보았
다. 그의 뒤에는 두구가 하곤과 함께 장건을 부축하며 따라 오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비록 누나를 괴롭혔지만 의리는 지키는군. 또한 누
나가 저 사람들을 어렵게 생각하니 저들의 무공도 얕볼 수 없을 거
야.’
소영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돌연 앞의 산모퉁이에서 또다시
개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개짖는 곳에서 검은 그림자가 번쩍이더니 질풍처
럼 악소채의 일행에게 달려 오는 것이었다.
악소채는 재빨리 장검을 움켜 쥐고 적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뒤따라 오던 두구와 다른 두 사람도 표정을 굳히며 임전태세를
갖추었다.
잠시 후 상대는 어둠을 뚫고 악소채의 바로 앞까지 와서는 크게
기침을 하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악 낭자! 나요, 상팔이오!”
이렇게 말하면서 악소채의 앞으로 다가선 그는 무엇에 바쁘게 쫓
긴 사람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입을 열었
다.
“악 낭자, 큰 일이 생겼소이다. 우리가 악 낭자와 흥정한 이번
장사는 어쩌면 크게 밑질 것 같소.”
악소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중주의 형제 상인이 두려워할 인물이라면 아마 강호에서도 크게
명성을 떨치는 고수이겠지요?”
“낭자의 말이 맞소이다. 나는 조금 전에 앞길의 동태를 살피다가
근래에 강호에 모습을 보이지 않던 두 명의 고수를 보았소. 분명
그들도 금궁의 열쇠를 찾으려는 것일 거요.”
상팔은 말을 마치고 또다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악소채는 이런 그의 모습이 내심 재미있어 넌지시 비아냥거렸다.
“당신은 그가 그렇게도 두려워요?”
하고 물으니 상팔은 약간 미간을 찡그리고 대답하였다.
“지금의 무림에서 우리 형제를 당할 사람은 단 몇 사람 뿐이오.
그러나 지금은 낭자를 보호하여야 할 입장이니 굳이 싸움을 걸고
싶지는 않소이다.”
악소채가 다그쳐 물었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내 생각은 그들과 부딪치고 싶지 않소.”
그의 말을 듣던 악소채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정색을
하면서 물었다.
“당신은 아직까지 어떠한 인물을 만났는지 말하지 않았는데…”
상팔은 그제야 생각이 난다는 듯 어깨를 약간 움츠리며 대답했
다.
“그들은 수 년 전에 강호에서 명성을 떨쳤던 인물들이오. 아마
낭자가 직접 보지는 못했어도 자당에게서 얘길 들었을 것이오.”
“그가 어떤 인물인데요?”
상팔은 악소채의 물음에 대답도 않고 몸을 돌려 자신이 돌아 왔
던 길로 다시 달려 가며 입을 열었다.
“악 낭자! 가면서 이야기합시다. 시간이 급하니까.”
그는 말을 끝내고 힐끗 뒤를 돌아 보았다. 그러나 악소채가 좀처
럼 움직이려는 기색을 안 보이자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악 낭자! 낭자와 우리는 이미 문서로써 계약을 한 것이 있소.
앞으로 적을 맞이하게 되면 낭자는 우리를 도와 길을 뚫어야 되오.”
그래도 악소채에게서 별다른 기색이 없자 이번에는 소영을 가리
키며 말했다.
“낭자나 다른 두 일행의 안위는 별로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낭자
의 등에 업혀 있는 소제는 특히 주의해서 보호하시오. 우리들은 막
상 싸움을 하게 되면 그에게 보호의 손을 뻗치지 못할 것이오.”
상팔의 이 몇 마디 말은 과연 즉시 악소채로 하여금 길을 떠나게
만들었다.
악소채가 걸음을 옮겨 놓는 것을 본 상팔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
며 말을 덧붙였다.
“악 낭자, 낭자가 만약 조금만 도와 준다면 지금의 포위망을 아
주 쉽게 뚫을 수 있소이다.”
이때 문득 그녀의 머리에 계약서라는 형식의 글이 생각나자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상팔을 쏘아 보았다.
“당신들은 무공이 높아 그 명성은 자자하지만 당신들의 인간성과
그 행실로 보아 나의 숭앙을 받기는 어려울 것이에요.”
상팔은 갑자기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하하하… 낭자, 미안하오. 내가 낭자에게 미처 앞에 있다는 두
고인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구려.”
“그들은 누구예요?”
상팔은 악소채를 물끄러미 바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악 낭자, 낭자는 혹시 주승(酒僧)과 반개(飯介)라는 칭호를 들
어 본 적이 있소?”
악소채는 그의 물음에 크게 놀랐다.
‘주승과 반개, 두 고인들은 무림에서 의로운 일만 하는 분들인데
정말 그들이 금궁의 열쇠를 노리고 있을까? 아니야. 그들은 다른
일로 이곳을 지나는 중일 거야……’
그녀는 표정을 짐짓 의아하게 바꾸고 입을 열었다.
“다만 그들의 이름만 들었을 뿐 만난 적은 없어요.”
악소채의 등에서 업혀 있던 소영이 궁금한 듯 입을 열었다.
“누나, 그들은 왜 그런 이상한 이름을 써요?”
그러자 상팔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공자, 그들은 중이라네. 그러나 그들은 술과 고기를 마
음대로 먹으며 그 중의 하나는 술을 말할 수 없이 많이 먹는 인물
이오. 언제인가 황학루에서 여러 사람이 모여 술먹는 시합을 할때
삼 일 동안 계속 술잔을 놓지 않고 술을 먹었는데 그 중만은 끄떡
도 하지 않더라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주승이라고 부른
다네.”
소영은 재미난 듯 손뼉을 치면서 다음 말을 꺼냈다.
“그러면 또 하나 반개라는 중은 밥을 많이 먹는 사람인가요?”
상팔은 그만 크게 웃고 말았다.
“하하하..공자의 말이 맞네. 그는 한 끼에 한 말도 부족하다네.”
소영이 재차 물었다.
“그럼 그 두 중은 무공이 높습니까?”
상팔은 두 손으로 크게 원을 그리며 대답했다.
“아주 훌륭하다네.”
“그럼 그 사람과 우리 누나를 비교하면 누가 높을까요?”
상팔은 눈길을 돌려 잠깐 악소채를 보고서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
다.
“그들이 훨씬 강하네.”
소영은 얼굴 가득히 수심을 띠었다.
“그럼 그들도 아저씨들처럼 우리 누나를 괴롭히려는 것이지요?
그 금궁의 열쇠라는 것 때문에…”
“공자! 그리 걱정하지 말게나. 그들이 이곳까지 온 것은 아마 어
디 다른 곳으로 가려고 지름길을 택한 것 같으네. 그리고 나 역시
도 그들이 금궁지약을 뺏으러 오는 것이 아니기를 바라고 있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악소채는 코웃음을 치며 앞으로 달려 나
갔다.
상팔은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크게 당황하여 잽싸게 걸음을 옮
기면서 외쳤다.
“낭자, 내가 길을 안내하겠소.”
이때 장건은 많은 출혈로 인해 거의 빈사상태가 되었다.
하곤 역시도 지쳐서는 장건이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겨도 그를 부
축할 힘이 없었다.
이때 장건은 눈앞이 캄캄해짐을 느끼며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장건이 곧장 앞으로 쓰러지는 순간 돌연 하곤의 옆을 스치는 세
찬 바람소리가 났다. 하곤은 깜짝 놀라 몸을 움찔했다.
그것은 맨 뒤에서 뒤를 살피며 따라 오던 두구가 장건이 쓰러지
는 것을 보고 몸을 날려 그에게 달려 간 것이었다.
두구는 재빨리 장건을 부축하고 혈도를 짚어 출혈을 멈추게 한
다음 품 속에서 영단을 꺼내서 장건에게 먹였다.
“빨리 삼키시오.”
장건이 영단을 입안에 넣기가 무섭게 두구는 대뜸 그를 등에 들
쳐업고 앞으로 내달렸다.
악소채는 등 뒤의 인기척을 느끼고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이오?”
두구는 계속 그들에게 달려 가며 대답했다.
“장건이 졸도를 하였소. 그의 상처가 다시 심해져 출혈이 심했었
는데 내가 응급조치로 그의 혈도를 막아 버렸으니 얼마 동안은 괜
찮을 거요. 어서 길이나 갑시다.”
악소채는 고개를 숙여 두구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다시 앞으로
맹렬히 달려 갔다.
산길을 돌아 얼마나 달렸는지 그 거리는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어느덧 훤하게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얼마를 달렸을까?
갑자기 앞에 가던 두 마리의 개가 요란하게 짖어대는 소리가 들
려 오더니 이어 우렁찬 사람의 외침소리가 들렸다.
“개 눈깔은 사람을 무시한다고 들었는데 너같은 개새끼가 정말로
이 늙은이를 무시하는구나.”
그의 말소리는 악소채 일행의 귀에도 선명하게 들렸다.
상팔은 내심 크게 놀랐다.
‘큰일났구나. 강적을 피하여 일부러 길을 돌아 왔는데도 어떻게
저 늙은 거지를 만나게 되었을까?’
그는 걸음을 멈추고 소리나는 곳을 바라 보았는데 그곳에는 작은
골짜기가 있었으며 그 골짜기 입구에 사당이 한 채 있었다.
악소채도 상팔의 눈길을 따라 쳐다 보았다. 사당 바로 앞에 오래
된 소나무가 하나 솟아 있었고 그 소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무엇
을 하는지 열심히 손을 움직이는 한 사람이 보였다.
그는 등을 돌리고 있었는데 그가 입고 있는 옷은 마치도 걸레 조
각같아서 여기저기 맨살이 비쳤다.
자세히 그의 거동을 살펴 보니 그는 밥을 하려는지 불을 지피려
고 했다.
상팔은 천천히 거지 노인 앞으로 걸어가면서 입을 열었다.
“진형! 오랜만이오.”
그러자 그 누더기 옷을 걸쳐 입은 노인이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상형은 복이 많아 갈수록 장사도 잘 되는가 보군.”
상팔은 얼굴 가득히 웃음을 담고 그의 말을 받았다.
“진형 덕택에 많이 남고 또 적게 밑져 그럭저럭 지내고 있소이
다.”
그의 말이 끝나자 곧 거지 노인은 두 마리의 개를 가리키며 물었
다.
“저 개는 상형이 키우는 것이오?”
“그렇소. 얼마 전에 서성에까지 장사를 갔다가 모두 밑지고 단지
저 두 마리의 개만 데리고 왔소이다.”
“상형은 재물이 많은 사람이라 그런지 저 두 마리의 개도 이 늙
은이의 차림을 보고 매우 못마땅한가 봅니다.”
상팔은 그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썼다.
“짐승이 무엇을 알겠소? 대신 내가 이렇게 진형에게 사과를 드리
겠소.”
그는 손을 들어 포권을 한 다음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거지 노인은 상팔의 예는 쳐다 보지도 않고 뒤에 오는 악
소채에게 눈길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상형! 이제 보통이 아니구려. 저렇게 예쁜 처녀도 팔러다니니.”
악소채는 불덩이 같은 분노가 치솟았으나 내심 짚히는 바가 있었
다.
‘저 거지에게 상팔까지도 굽신대는 것을 보니 필시 보통 노인은
아닌가 보구나. 더군다나 상팔은 저 노인과 장사를 하는 것도 아니
고 그럼 혹시 조금 전에 두려워하던 두 고수 중에서 하나인 반개가
아닐까? 모친에게서 가끔 반개의 이야기는 들었으나 실제 보지는
못하였으니 알 수가 있어야지. 어디 좀더 동정을 살펴 보자.’
그녀가 여기까지 생각하였을 때 상팔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
다.
“하하하… 진형도 농담을 잘 하시는구려. 저 낭자는 우리의 귀
한 손님이오.”
이 때 물끄러미 그들의 행동을 바라 보던 두구가 갑자기 장건을
땅에다 내려 놓고서 성큼성큼 거지 노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무뚝뚝한 음성으로 입을 열첬다.
“우리 형제의 장사는 매우 바쁘오! 그러니 진형과 오랫동안 이야
기를 할 시간이 없소이다. 오늘은 여기서 헤어지고 다음 한가한 시
간에 이야기합시다.”
그리고 다시 상팔에게 말했다.
“형님, 어서 우리 길이나 갑시다.”
거지 노인은 두구의 말을 듣고서 파안대소했다.
“허허허… 이제 보니 둘째의 성질이 매우 급하군. 참을성이 없
어.”
“그럼 진형은 고의로 우리 형제를 괴롭히겠다는 것이오?”
거지 노인은 다시 웃음을 터뜨리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대답했
다.
“어찌 감히 그러겠소. 이 늙은이는 지난 몇 년 동안 운수가 나빠
서 하루 세 끼의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였소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많은 보화와 부귀를 얻으며 지냈으니 한 번 정도 장사에 실패를 하
여도 끄떡 없을 것이오. 어떻소? 형제들은 옛정을 생각해서 나에게
찌꺼기라도 남겨 주시겠소?”
두구는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거지 노인을 쳐다 보았다.
“진형께서 우리 형제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탁 터 놓고 말하여 보
시오.”
그러자 거지 노인은 대답 대신에 불쑥 손을 뻗어 솥 속에 있는
밥을 한 웅큼 집어 입으로 가져 갔다.
거지 노인은 밥을 씹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가난뱅이는 부자와 싸움을 하지 않소이다. 만약 그들과 싸운다
면 필시 가난뱅이가 지기 마련이오. 이 늙은 거지는 잠잘 곳도 마
땅치 않고 또한 무공이 뛰어난 고수들을 잘 알지도 못하오. 하지만
갑부는 돈을 써서 여러 고수를 살수 있을 게 아니오?”
거지 노인은 말을 하면서도 연방 손으로 밥을 집어 먹었다.
상팔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우리 같은 밝은 사람은 어두운 일에는 아예 손을 대지도 않소.
진형! 진형이 이곳에 온 것은 필경 그 금궁의 열쇠를 위해서겠지
요?”
“그것도 나 역시 얻고 싶은 생각이 있으나 어디 이런 늙은 거지
에게 복이 있어야지. 당신 같은 사람은 돈이 많으니까 혹시….”
상팔은 가슴이 뜨끔하였으나 짐짓 온화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진형은 누구를 도와주러 온 것이오?”
“이 늙은 거지는 반평생을 혼자 강호에서 떠돌아 다녔소. 만약에
정말로 내가 도와 줄 일이 있다면 그것은 실로 우연한 일이 아니겠
소?”
“저는 우선 한 가지 일을 이야기해야 되겠소이다.”
이제 상팔의 표정은 매우 진지하고 심각해졌다.
거지 노인은 고개가 끄덕일 뿐 밥만 집어 먹었다.
상팔은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힐끗 악소채를 쳐다 보았다.
“저 악낭자의 자당께서 가지고 있는 금궁지약은 이미 우리에게
팔렸소이다. 진형께서 금궁의 열쇠 때문에 이곳에 오셨다면 유감스
럽게도 조금 늦으셨습니다.”
거지 노인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물었다.
“그럼 벌써 상형이 그 금궁의 열쇠를 수중에 넣었단 말이오?”
“그렇소이다. 그러나 저는 아직까지 금궁지약(禁宮之藥)을 본 일
이 없소. 다만 저 악 낭자가 우리에게 팔겠다고 약속을 하였을 뿐
이오.”
거지 노인은 움직이던 입을 멈추고 한참 동안 악소채를 쳐다 보
았다.
“이 악 낭자가 악운고의 딸이오?”
그러자 상팔보다 먼저 악소채가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그 분은 저의 모친이신데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지 노인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
쳤다.
“아! 늦었구나. 악 낭자, 정녕 자당께서 돌아가셨단 말이오?”
악소채는 새삼스럽게 다시 치밀어 오는 슬픔을 느꼈다.
“어머니는 이미 여러 날 전에 돌아가셨어요.”
거지 노인은 돌연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한숨을 내쉬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이 늙은 놈은 평생에 남에게 빚을 진 일이 없었는데 오직….”
그는 채 말을 끝내지도 않고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상팔에
게 얼굴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이 늙은 거지가 이곳까지 찾아온 것은 단지 하늘의 뜻이오. 내
가 그동안 당신들 형제와 다툼이 없었던 것은 내가 당신들의 금은
재화에 뜻이 없어서였소. 그러나… 그러나 이 금궁지약만은 분명
재화와는 다르오. 그래서 나도 지금 신경을 써 왔던 것이오. 나는
절대로 당신들 부자들과 다투는 것은 싫소이다.”
옆에서 듣던 두구가 싸늘한 웃음을 띠며 거지 노인의 말을 받았
다. 그의 표정은 매우 표독스러웠다.
“늙은 거지야! 그런 약은 수작은 부리지 마라. 기왕에 우리 형제
를 괴롭히려면 그렇게 다른 사람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어. 강호에
서 우리 형제의 세력은 이삼 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야. 우
리는 그동안 많은 수난을 겪었지만 모두 물리쳤어. 이제 너같은 늙
은 거지를 무서워할 우리가 아니다. 네가 기어이 무공으로 덤벼들
겠다면 기꺼이 받아 줄 테니까 서슴치 말고 덤벼 보아라. 내 일찍
부터 반개라는 이름을 들어 오던 차에 오늘 너의 실력을 보고 싶구
나.”
거지 노인은 입가에 쓴웃음을 흘리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둘째의 무공이 높다는 것은 소문을 들어 잘 알고 있네. 나도 오
늘에서야 둘째의 무공을 보게 되어 기쁘기 한이 없군.”
상팔은 겉으로는 거지 노인을 공경하는 척 했으나 속으로는 음흉
한 수작을 꾸미고 있었다.
‘저 늙은이는 이제 쉽사리 자리를 비켜 주지 않을 것 같다. 그러
니 일찌감치 손을 써서 결정을 내려야 되겠구나.’
반개도 내심 꿍꿍이속이 있었다.
‘내 비록 무공이 뛰어나다 하더라도…저 두 놈은 그래도 강호에
서 고수격인데 쉽게 당해 낼 것 같지가 않군. 그러나 혹시 악….’
상팔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거지 노인에게서 몇 발 뒤로 물러
났다.
그는 두구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둘째야! 저 늙은이의 무공은 매우 높고 날카로우니 주의하여야
한다.”
그러나 두구는 재빨리 왼손으로는 자신의 가슴을 보호하고 오른
손은 길게 내뻗으며 몸을 옆으로 돌려 거지 노인에게 덮쳐 갔다.
그의 손이 막 거지 노인의 명치에 닿으려는 순간 거지 노인은 왼쪽
발을 살짝 들어 몸을 한 바퀴 돌려 가볍게 첫 번째 공격을 피하고
는 근처의 산이 떠나갈 듯 큰 소리로 웃었다.
“허허허……”
이때 거지 노인의 웃음을 받아서 맞은편 작은 숲 속에서 또 하나
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허허허……”
거지 노인과 또 하나의 웃음소리는 묘한 화음이 되어 산을 뒤혼
들었다. 상팔과 두구의 놀람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으며 악소채도
호기심을 가지고 괴정체의 웃음소리가 난 숲을 주시하였다.
잠시 후 숲 속에서 하나의 흰 그림자가 마치 밤하늘의 유성처럼
쏜살같이 일행에게 달려 왔다.
그가 가까이 오자 대뜸 일행의 코를 찌르는 술냄새가 바람을 타
고 날아 왔다. 그는 키가 크고 신체가 건장했는데 머리를 빡빡 깍
은 중이었는데 그는 흰색의 장삼을 걸쳤으며 목에는 염주를 걸고
있었다.
그 중은 취기가 서려 붉게 충혈된 눈을 부라리며 중주쌍고를 번
갈아 쳐다 보더니 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또 어떤 조무래긴가 했더니 중주의 부자 나으리들이시군.”
이렇게 말하면서 왼손을 등 뒤로 가지고 가 잠시 뒤적거리더니
조그만 술병을 꺼내 들었다.
그는 거지 노인이나 악소채 일행은 안중에도 없는 듯 연거푸 술
을 들이키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커! 이것 참 맛 좋은 술이로구나. 정말 술은 내 인생이야.”
그러자 선뜻 그 중의 앞으로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가 깜빡 그것을 잊었소. 반개와 주승은 마치 한 몸처럼 떨
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주승은 취한 눈초리로 상팔을 잠시 노려 보더니 몸을 가누지 못
하고 비틀거렸다.
“두 분 장사가 그 동안 잘된 것을 축하하오이다.”
상팔은 마음이 꺼렸으나 짐짓 웃음을 띠고 말했다.
“덕택에… 주승의 염려로 그럭저럭 지내고 있습니다.”
주승은 오른손으로 상팔을 가리키며 호탕하게 웃었다.
“허허허… 그럭저럭 지낸다? 그러나 오늘만은 당신들이 계산을
잘못하여 장사가 많이 밑질 것 같소.”
두구는 차가운 눈빛으로 코웃음을 쳤다.
“흥! 당신 둘이 상대를 하겠단 말이오? 그렇다면 우리 형제는 몇
수 정도로 일을 끝낼 수 있소이다.”
“두구!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마시오. 우리 두 늙은이 말고도 다른
사람이 또 있소.”
상팔은 주승의 대답을 듣고 내심 가슴이 뜨끔하였다.
‘저 중은 비록 술에 취하여 몸을 비틀거리지만 그의 기지와 총명
은 보통 사람을 넘는 것 같군! 조심해야겠다.’
이렇게 생각되자 태도를 바꾸어 두구를 나무랐다.
“동생! 그렇게 어른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네.”
그리고 주승에게 손을 모으며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
“저는 주승의 이해를 바라겠소이다. 동생은 성격이 워낙 급해서
그런데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다른 사람은 누구시옵니까?”
“허허허… 나는 술만 있으면 모든 것이 부럽지 않소. 그리고 저
늙은 거지는 배만 부르면 되고. 우리 두 늙은이는 필경 부자들의
안중에도 없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
상팔은 주승의 말에 가시가 돋혀 있는 것을 느끼고 걱정이 되었
다.
‘이제 두 명이 되었으니 더욱 상대하기가 어렵게 되었구나. 저
두 늙은이와 서로 자웅을 겨루면 아마 백여 수가 되어도 승부는 나
지 않을 것이니 차라리 시간만 끌 것이 아니라 빨리 맞부딪쳐 버려
야….. ‘
상팔의 계산은 역시 장삿속이었다.
“우리 형제는 두 분을 오래 전부터 숭앙하고 있었소이다.”
주승은 입가에 엷은 웃음을 흘리며 비웃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두 분의 장사가 잘 되어 수많은 재화를 거두어 들이는 것은 귀
찮은 사람을 묘하게 떼어 버리는 재질이 있기 때문인가 보구려.”
“아니오이다. 그저 정직하면 재물이 생기는 것으로 우리 형제는
바로 그것을 신념으로 삼고 장사를 하오이다. 더구나 우리가 번창
하는 것은 강호의 많은 친구들이 우리를 신용하여 뒤를 밀어주기
때문이오.”
그러자 갑자기 주승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두 분은 이것을 모르고 있구려. 날마다 산에 오르면 언젠가는
범을 만나게 되오. 오늘 두 분은 범을 만난 격이니 어쩌시겠소?”
“두 분이 만약 우리들을 괴롭힌다면 우린 정말 큰 수난을 면치
못하는 것이오. 그런데 아직도 뒤에 있다는 인물들을 밝히지 않았
소이다.”
주승은 한동안 악소채를 뚫어지게 바라 보더니 입가에 미소를 지
었다.
“그렇게 알고 싶소? 나와 저 늙은이 이외에도 또 다른 무림의 고
수들 이 금궁의 열쇠를 얻으려고 몰려들고 있소.”
“그것은 우리도 잘 알고 있소. 그 정도를 두려워할 우리가 아니
오.”
반개가 입을 열어 말참견을 하였다.
“신풍방의 고수들이 바로 뒤쫓고 있는데도?”
이번에는 두구가 말참견을 했다.
“신풍방의 고수들은 이미 몇 명 만나 보았으나 그들은 모두가 형
편없는 놈들이오.”
주승이 또 입가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신풍방의 고수라도 물론 당신들의 생각 밖이겠지요. 신풍방 중
에서도 이번에는 방주인……”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별안간 일행의 옆 절벽 위에서 몇
마디의 날카롭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게 섯거라!”
그러자 주승은 웃음을 거두고 재빨리 반개의 옆으로 가서 책상다
리를 하고 점잖게 앉았고 상팔은 눈빛을 날카롭게 번쩍이며 절벽
위를 주의깊게 살폈다.
그리고는 무엇을 보았는지 눈썹을 곤두세우고 악소채에게 다가가
서 조그맣게 말했다.
“악 낭자! 일이 복잡하게 되었소. 낭자는 저기 커다란 암석 옆으
로 몸을 피하시오. 우리는 저들과 사생결단을 내야 할 판이니….”
절벽 위에서 번쩍이던 그림자는 순식간에 일행의 시야에 그 모습
을 드러냈다. 그들은 몇 사람인지 계속 나와 일행에게 달려 오는
것이었다.
악소채는 재빠르게 소영을 등에 업고 상팔이 가리켰던 건너편 암
석으로 달려 갔다. 그곳은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은신처였다.
상팔은 곧 주위에 흩어져 있는 적의 세력을 눈여겨보고 내심 두
려운 마음으로 두 마리 개의 목에 걸려 있던 긴 쇠사슬을 풀어 주
었다.
나타난 사람들은 모두 밤길에 편리한 가벼운 복장을 하고 있었으
며 수중에 검을 움켜 쥐고 있었는데 검은 달빛을 받아 번쩍였다.
상팔과 두구는 유리한 지형을 골라 서로 등을 맞대고 적을 맞이
할 태세를 갖추었다.
소영은 암석 뒤에 숨어서 적의 수를 헤아려 보았다.
그들은 모두 이십 명으로 중주이고를 포위만 하였지 좀처럼 공격
하지 않았다. 아마 누구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절벽 옆 골짜기에서 두 줄기의 불빛이 보이더니 질풍같
은 기세로 일행에게 달려 왔다. 그 두 개의 불빛은 너무나 밝아 눈
이 부셔 등불과 함께 나타난 사람을 볼 수가 없었다.
소영은 바위에서 조금 더 몸을 내밀고 그를 쳐다 보더니 흠칫 놀
라며 자기도 모르게 악소채의 손을 꼭 잡았다.
그들의 모양은 마치 장례의 행렬 같았기 때문이었다. 등을 들고
있는 두 명은 모두 키가 크고 얼굴은 뼈만 남은 귀신 같았다.
그리고 그 등불 뒤에는 또 신체가 건장한 네 명의 괴한이 옷소매
를 어깨까지 걷어 올리고 따라 왔다. 또한 그 뒤에 또 네 명이 따
랐다.
그들은 먼저 네 명보다는 조금 지위가 높은 듯 전신을 검은 비단
옷으로 감싸고 허리에는 갖가지 색의 허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소영은 앞으로 벌어질 싸움을 상상하고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악소채는 그가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귓속말로 말하면서 손을 꼭
쥐었다.
“동생! 두려워할 것 없어요.”
소영은 악소채를 쳐다 보며 생각하였다.
‘여자인 누나도 두려움을 모르는데 하물며 사내 대장부가 체면과
위신도 없이 이게 뭐람. 나도 누나처럼 용기를 갖자.’
소영은 악소채의 손을 살며시 빼고 고개를 내밀어 다시 눈 앞의
광경을 응시하였다.
중주이고는 강호를 떠돌아 다니며 벌써부터 신풍방의 실력이나
또 방주의 무공을 많이 들었으나 실제로 방주를 보지는 못했다.
두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형님, 이들이 이렇게 나타난 것은 무슨 생각으로…… ”
“동생, 너무 두려워 맙시다, 신풍방이라는 세 글자만 보아도 그
들이 거짓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네. 그러니 우리는 그들의
속임수를 역이용하여 승리를 거두세. 잠시만 기다리면 저들이 무슨
흉계를 꾸미는지 알 테니까 동생은 경거망동하지 말게.”
이때 등불을 높이 쳐들고 있던 두 사람이 돌연 걸음을 멈추고 두
손을 어깨 위로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러자 뒤따르던 네 명의 장한
이 소매를 걷어 올린 팔을 앞으로 모으며 양쪽으로 갈라섰다.
그동안 밝은 불빛 때문에 자세히 보지를 못하여 아무 것도 없는
듯하였으나 이제 막 네 명의 장한이 양편으로 갈라서면서 어깨에
메고 있던 커다란 신상(神像)을 내려 놓는 것이었다.
신상은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으며 높이가 칠, 팔 척 정도로 머리
는 말만큼 컸으며 짙은 남색을 띠고 있었다. 그 신상의 얼굴 모양
은 매우 괴상망측스러워 코는 돼지코 같았고 입은 메기입같이 큰
것이 무엇을 집어 삼킬 듯 크게 벌리고 있었는데 송곳같이 날카로
운 이가 여러 개 드러나 있었다.
또 하나 괴상한 것은 그 신상의 팔이 네 개나 되었다. 앞의 두
팔은 한데 모아 가슴에 세우고 뒤의 두 팔은 제각기 다른 것을 들
었다. 왼손에는 영패(令牌)를 들고 있으며 오른손에는 장검을 움켜
쥐고 있었다.
이때 또 다른 네 명의 장한이 나타났다.
그 검은 옷에 원색의 허리띠를 두른 네 명은 바로 신상 앞까지
다가와서는 일제히 허리를 굽혀 중주이고에게 예를 올렸다.
그리고는 그 중 왼쪽 끝에 있던 사람이 성큼성큼 중주이고에게로
다가왔다.
상팔은 신경을 그에게 곤두세우고 유심히 살펴 보았다.
그의 허리에 두른 원색의 띠에는 단전호법(壇前護法)이라는 글씨
가 새겨져 있었다.
그 사나이는 중주이고 앞에서 잠깐 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을 번
갈아 날카롭게 쏘아 보더니 몸을 돌려 악소채가 숨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두구는 재빨리 달려 나가 그의 앞을 막으며 소리쳤다.
“서라!”
그리고는 오른팔을 뻗어 그의 가슴을 향해 장력을 날렸다. 그 흑
의 장한은 가볍게 몸을 옆으로 날리면서 왼손을 휘둘러 두구의 장
력에 정면으로 맞섰다.
두 사람의 장력은
펑!
하는 소리를내며 허공에서 부딪쳤다.
두구는 그 여파로 주춤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저 놈의 장력이 보통이 아니로군.’
이때 그 흑의 장한도 역시 가슴이 뜨끔한 장력의 여파를 맛보았
다.
“당신은 누구인가?”
그의 말은 간단했으나 차갑기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상팔이 두구 대신 대답했다.
“하하하… 우리들은 중주의 형제 상인이오. 형제가 같이 장사를
하오니 당신들이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모두 말하여 보시오. 내 당
신들이 마음에 들어 아주 싸게 팔겠소. 비단이오? 아니면 금은보화
요? 가격은 이 자리에서 바로 한 마디로 정할 터이니 어서 말해 보
시오.”
흑의 장한은 중주의 형제 상인이라는 말에 눈을 번쩍이며 상팔에
게 몇 발 다가서면서 냉랭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본방의 방주께서 보내신 두 고인을 당신들이 해쳤나 보군.”
두구가 피식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쓸모없는 고인은 마땅히 없애야 되오.”
흑의 장한은 그의 대답에 관심이 없는 듯 고개를 돌려 상팔에게
물었다.
“저 낭자의 성이 악가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어느 사이에 암석 뒤에서 튀어 나왔는지
악소채가 말을 받아 대답하였다.
“그래요. 내가 악소채예요. 무슨 전할 말이라도 있어요?”
상팔은 내심 깜짝 놀라며 재빨리 말참견을 하였다.
“악 낭자는 우리 손님이니 무슨 볼 일이 있으면 우리에게 물어
보시오.”
흑의 장한은 냉랭한 미소를 띠며 두 말 없이 발길을 돌려 신상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 갔다.
상팔은 기회를 틈타 두구에게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동생, 오늘의 정세는 매우 험악하겠구려. 우리는 이렇게 많은
적을 상대하여 싸워 보기는 처음이야.”
그는 고개를 돌려 잠깐 주승과 반개를 쳐다 보고 다시 말을 이었
다.
“저 주승과 반개는 우리와 뜻이 같으니 우리를 도와 주지는 않을
것이네. 그러나 이러한 형세로서는 너무나 우리의 힘이 딸리니 묘
수를 써서 저들 두 늙은이의 도움을 받아 이 포위망을 뚫어야 되
네.”
상팔은 다시 주승과 반개를 쳐다 보았다.
“내 생각으로는 저 두 늙은이가 금궁지약보다도 악 낭자의 신변
을 더 염려하고 있는 것 같네. 저 술취한 중놈은 워낙 총명한 두뇌
를 가졌으니, 가만히 앉아서 이익을 얻자는 속셈일세. 그러니 우선
악 낭자를 이 싸움에 끼어들게 하면 자연 주승과 반개도 그녀를 구
하려고 뛰어들 것일세.”
두구는 회심의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팔은 신상이 있는 곳을 쳐다 보았다.
그곳에는 네 명의 흑의 장한들이 신상 앞에 무릇을 꿇고 앉아 고
개를 숙이고 무슨 분부를 기다리는 듯하였다.
소영은 두 눈을 부릅뜨고 괴상하게 생긴 신상을 쳐다 보았다.
그런데 돌연 신상의 왼팔이 서서히 밑으로 움직이며 들고 있던
영패를 땅에 떨어뜨리는 것이 아닌가?
소영의 놀라움은 매우 컸다.
“누나… 누나, 저것 봐요. 저게 움직여요.”
그러나 악소채는 아무 대답 없이 그냥 소영의 손을 꼭 잡으며 신
상을 주시하였다.
신상의 왼손이 다시 원래 대로 올라 가면서 돌연 그 보기 싫게
벌려진 입에서 여자의 말소리가 흘러 나왔다.
악소채는 그 말을 들으려고 온 신경을 귀에 모았다.
상팔과 두구도 커다란 의아심과 호기심을 가지고 그 목소리를 들
으려 하였으나, 그 맑은 음성은 조용하고 짤막하게 끝났다.
신상의 분부를 받은 네 장한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번에는 오
른쪽 흑의 장한 혼자서 중주이고에게 다가서는 것이었다.
두구는 재빠르게 몸을 날려 그의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우리 형제는 강호를 돌아 다니면서 수없이 많은 괴물을 보았소.
그런 엉터리 속임수로 우리들을 속이려면 아예 말을 꺼내지 마시
오. 당신들은 우리 상인에게 무엇을 원하고 있소? 어디 당신들의
의견을 들어 보아 우리 장사나 흥정하여야 되겠소이다.”
흑의 장한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러나 조금 전의 장한과는 대조
적으로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방주께서 결단을 내리셨소이다. 당신들이 본방의 두 고인들을
해한 것은 다시 논하지 않고 다만 저 악 낭자만 우리에게 넘겨 주
면 당신들의 생명을 건져 주겠다 하였소.”
상팔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방주의 속임수에도 허점이 있구려. 가격이 너무나 엄청나서 우
리는 이런 흥정은 하지 않겠소이다.”
“흐흐흐… 그렇다면 당신들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격이 되오.”
상팔은 무엇이 우스운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장사를 하려면 먼저 이익과 손해를 따지는 법이오.
방주께서는 너무나 욕심이 많으셔서 우리 전문적인 상인보다 한 수
더 높게 나오시는구려. 그러나 우리는 밑지는 장사는 하지 않소이
다.”
그러자 흑의 장한도 돌연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경주(敬酒)를 마시지 않고 벌주를 마시겠다면 할 수 없지!”
흑의 장한은 손을 번쩍 들어 머리 위에서 몇 번 움직이니 곧 여
덟 명의 장한이 달려 와 귀두도를 번뜩이며 두 사람을 포위했다.
그 여덟 명의 장한이 달려 온 동작으로 보아 그들도 무공이 높은
고수임을 알 수 있었다.
흑의 장한이 뒷걸음으로 거리를 넓히면서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스스로 택한 일이니 거절하지 마시오.”
상팔은 그의 말이 끝나자 곧 품 속에서 금빛 찬란한 주판을 꺼내
어 한 번 휘두르니 요란한 굉음이 주위에 울려 퍼졌다.
“친구! 잠깐만 기다리시오.”
상팔의 말에 흑의 장한은 자못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유언이라도 있소? 그렇다면 어디 유언이나 들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