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 Finger RAW novel - Chapter 7
7. 생명의 은인
상팔은 웃음을 띠며 입을 열었다.
“금은 낯설었지만 점차 친하게 될 수도 있지 않소? 내 아직 당신
의 존함을 여쭙지 못하였으니 실례가….. ”
흑의 장한은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흐… 난 신풍방주의 단전호법인 초혼수(招魂手) 상명(常
明)이외다.”
그러자 두구가 말참견을 했다.
“이번의 빛은 잊지 않고 기억하겠소. 훗날 만날 기회가 있으면
그때 꼭 갚으리라.”
“아마 두 분은 오늘밤 살아서 나가기는 어려울 거요. 그래도 훗
날 보자고 하겠소?”
상팔은 그의 뒷말은 듣지도 않고 자신의 주위를 포위하고 있는
여덟 명의 장한을 훑어 보고는 두구에게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
다.
“동생, 무기를 꺼내게. 저놈들의 칼끝은 극독이 묻어 있으니 각
별히 조심하게.”
두구는 곧 품 속에서 빛이 나는 원권(圖圈)과 한 개의 철필(鐵
筆)을 꺼내들었다. 상팔은 손에 쥔 금빛 주판을 흔들면서 외쳤다.
“당신들 중에 누가 먼저 나에게 한 수 가르쳐 주겠소? 아니면 여
덟이 한꺼번에……”
그의 주판은 조그맣지만 순금으로 만들었으며 알이 진주로 되어
있어서 움직일 때마다 달빛을 받아 찬란히 빛났다.
두구는 오른손에 들고 있는 철필로 왼손의 원권을 힘껏 쳤다.
탕!
무딘 쇳소리와 함께 그의 외침소리가 들렸다.
“내 생각으로는 당신들 모두가 한꺼번에 덤벼드는 게 좋겠는데.”
그러나 돌연 여덟 명의 장한이 두 패로 나뉘어져 네 명이 한 사
람을 맡았다. 그들은 상팔과 두구를 에워싸며 천천히 포위망을 좁
혀 갔다.
소영은 두구가 왼손에 들고 있는 원권을 유심히 바라 보더니 매
우 궁금한 듯 하곤에게 물었다.
“아저씨! 두구 아저씨가 들고 있는 원권도 무기가 되나요?”
“공자! 저것은 일종의 괴기한 외문(外門)병기로써 호수권(護手
圈)이라고도 부르네. 병기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무공이 뛰어나
저렇게 작은 병기로도 큰 효과를 낼 수 있다네.”
소영은 그의 말에 이해가 간다는 듯.
“오! 저런 것으로……”
이 때 상팔의 뒤에 있던 두 마리 개도 주인의 싸움을 알았는지
땅에 엎드려 곧 달려들 기세였다.
귀두도를 치켜 들고 두 사람의 칠팔 척 정도 앞까지 다가 온 여
덟 장한은 그 이상 더 가까이 오지 않고 우뚝 멈춰었다.
상팔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힐끗 주승과 반개를 쳐다 보았으나
그들은 싸움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 듯 서로 무릎을 맞대고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상팔이 초조한 마음을 달래고 있는데 돌연 이장 밖에 서 있던 상
명이 진기를 두 손에 집중시키면서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상팔의 앞에 있던 두 장한이 휘파람의 여운을 따라 검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것이었다.
두 명이 몸을 날리자 나머지 여섯 장한들도 제각기 차가운 검광
을 허공에 그리며 두 사람을 사방에서 협공하였다.
그러자 상팔도 손에 든 금주판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리고 맨 선
두의 장한이 내려 친 칼날을 막았다.
순간.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은빛 섬광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두구의 오른손에 있는 철필과 왼손의 호수권은 밤하늘의 허공을
가볍게 꿰뚫면서 내려 쳐 오는 네 개의 귀두도를 막아 냈다. 그는
상대의 공격을 피하면서 대뜸 철판을 휘둘러 역습을 하였다.
일차 공격에 실패한 여덟 명의 장한들은 무슨 약속이나 한 듯 동
시에 몇 발 뒤로 물러나 다시 공격을 하지 않았다.
상팔은 적들이 한 번 공격을 한 후 다시는 공격을 하지 않자 내
심 느끼는 바가 있었다.
‘음! 저 놈들의 이번 공격은 우리의 실력을 시험한 것이었구나.
저런 수법을 기문진식(奇門陳式)이라고 하지. 상대의 무공과 자신
의 무공을 시험하여 비교해 보자는 수작이렷다? 엉큼한 놈들이군.
과연 신풍방의 명성은 뜬소문이 아니었구나.’
상팔은 그들이 모르게 전음입밀을 이용하여 두구에게 말했다.
“이제 상대는 기문진식을 전개할 것이네. 조금 전의 공격은 우리
를 시험하였던 것으로 적들은 아직 진세의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
네. 놈들이 서 있는 방향을 따라서 팔괘(八卦)를 취하고 있으니 절
대로 행동을 가볍게 해서는 안 되네. 내가 저 진을 깨뜨리는 방법
을 알아낸 후에 둘이서 같이 맹공격을 하며 적진을 뚫기로 하세.”
이렇게 되자 쌍방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대치하는 격이 되었다.
얼마 동안을 대치 상태로 있었다.
이때 두구의 불같은 성격은 착잡한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여 왼발
을 크게 내디디며 몸을 돌려 철필로 봉황점두(鳳凰點頭)의 초식을
전개했다.
그의 철필은 바위도 뚫을 듯한 무서운 기세로 여덟 명의 진기를
흩어 놓았다.
두구는 이리저리 몸을 날리며 적이 공격하면 호수권으로 막아 내
고 적이 물러서면 즉시 철필로 뒤를 위협했는데 그 처신이 무척 신
중하였다.
상대의 칼에 맹독이 묻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우선 자신의 신변을 확고하게 보호하면서 틈틈이 기회를 노려
재빠르게 공격했다. 그 움직임은 마치 나비와도 같고 때로는 날아
다니며 쏘는 벌과도 비슷했다.
상팔은 적의 빈틈을 찾아 내어 일격에 끝내려고 했으나 두구가
먼저 손을 썼으므로 그의 계획은 무너지고 말았다.
상대는 두구가 예상 외로 무서운 기세로 공격을 해 오자 그들도
생사를 가리지 않고 맹렬히 반격을 퍼부었다.
“쨍그랑!”
“펑!”
굉음이 요란스럽게 울려 퍼지며 은빛 섬광이 수없이 허공을 스쳤
다. 상팔은 정세가 변하였으니 자연 그들의 공격을 막아 낼 수밖에
없었다.
악소채는 중주쌍고의 모습을 지켜 보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중주쌍고의 명성은 과연 허세가 아니었군. 저 여덟 명의 장한들
의 공세가 무척 사납고 악랄한 데도 중주쌍고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오직 바람소리로만 적의 움직임을 포착하는구나.”
그녀가 중얼거리는 동안 벌써 그들이 싸움은 십여 수를 넘었다.
여덟 장한의 공격은 갈수록 날카로와지고 여덟 개의 귀두로는 사방
에서 종횡으로 중주쌍고를 파고들었다.
그들이 휘두르는 칼은 차가운 바람을 타고 허공을 갈랐다.
쌩!
중주쌍고는 이제 여덟 개의 짙은 검광에 싸여서 멀리서 보면 일
편의 백광만 보이고 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소영은 무의식 중에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이제 끝나는군. 오늘밤 그 뚱뚱이와 홀쭉이 형제는 죽음을 면치
못하겠구나.”
그는 고개를 들어 먼동이 터오는 하늘을 쳐다 보았다. 순식간에
먹구름은 달을 삼켜 버리더니 얼마후 함박눈이 펄펄 내리기 시작했
다. 싸움터는 눈깜짝할 사이에 온통 은빛 세계로 변했다.
한참 동안 요란한 기합 소리와 더불어 칼과 주판, 철필이 부딪치
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어이쿠!
소영은 악소채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누나! 누가 다친……”
그는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비명소리를 듣자 악소채가 몸을
날려 싸움터로 달려 갔기 때문이었다.
“누나… 위험한데……”
소영은 발을 구르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악소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크게 소리치며 불렀다.
“누나! 돌아와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느닷없이 흰 그림자가 돌연 그에게 달려들
었다. 소영은 잽싸게 피했는데 어느 결에 그의 몸이 누구인가에게
안겼다.
그 흰 그림자는 바로 악소채였다.
악소채는 소영을 옆구리에 바짝 끼어 안고 돌아 왔던 길을 달려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상팔과 두구는 맹렬한 기세로 무기를 휘둘렀다.
소영은 악소채에게 안긴 채 사방을 둘러 보며 적을 살폈다. 적은
이제 일곱 명이었는데 악소채의 출현에 크게 놀란 듯 이내 귀두도
를 십자검법으로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소영은 그녀의 숨결이 거칠어졌음을 느꼈다.
‘누나는 나 때문에 어려운 싸움을 하는구나. 나만 없다면 누나는
쉽게 적을 물리칠 수 있을 텐데……’
소영은 결심이 서자 큰 소리로 외쳤다.
“누나! 어서 나를 내려 주어요.”
악소채는 그가 상처를 입고 그러는 줄로 알고 깜짝 놀라서 물었
다.
“왜 그래요? 어디 다쳤어요!”
그녀는 이렇게 물으며 잠깐 소영에게 정신을 판 순간이었다. 왼
쪽 어깨가 갑자기 섬뜩했다. 적의 칼날이 살갗을 스치고 지나갔던
것이다.
그 일장은 매우 날카로워 어깨를 베고 다시 그녀의 가슴을 향하
여 뻗쳐 왔다.
아앗!
악소채는 갑작스런 공격에 비명을 지르며 몇 걸음 물러섰다. 가
까스로 그녀는 상대의 재차 공격을 피했다.
“누나 많이 다쳤어요?”
“괜찮아요. 동생은 아무 일 없어요?”
그러나 그녀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으며 아픔을 참는 듯
작은 신음소리를 내었다.
소영은 죄스러움을 견딜 수 없어 큰 소리로 애원하다시피했다.
“누나! 어서 나를 내려 주어요! 응? 난……”
고수들이 유일한 무기는 정신통일이었다.
아무리 무공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정신을 다른 곳에 쓰게 되면
자연 자세부터가 흐트러지게 마련이다.
악소채는 그의 외침을 듣자 다시 다급하게 물었다.
“동생! 어디 다쳤어요?”
“난 퍽…..”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옆구리가 마비되면서 그대로 정신을 잃었
다. 소영이 정신을 차렸을 때 따뜻한 햇볕이 눈부시게 비치고 있었
다. 그는 누운 채 사방을 살폈다.
‘어? 내가 왜 이런 곳에 누워 있을까? 누나는 어디에?’
소영은 상체를 일으켜서 다시 주위를 살펴 보았다.
자신은 짚 위에 있었고 주위는 먼지가 겹겹이 쌓여 마치 흉가를
연상케 했다.
옛날에 절이 있던 장소 같았다. 그러나 신상의 모습이 다 헐고
무너져서 예전에 무슨 신을 모시던 곳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신단의 한 구석에 두 사람이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옆에는 죽장이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찌그러
진 솥이 보였다.
두 사람은 고역을 치른 듯 머리와 등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
다. 그들은 모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누구일까? 아마도 운기조식중인가 보군.’
소영은 몸을 일으키려 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쓰러
졌다.
그러자 등을 돌리고 있던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려 소영을 쳐다 보
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공자, 이제 정신이 드나?”
소영은 그제서야 두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다. 그들은 주승과
반개 노인이었다.
“네. 그런데 노승께서는 저의 누나가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소영의 물음을 받아 거지 노인 반개가 대답했다.
“자네 누나는 이미 두 장사꾼에게 구원을 받고 어디론가 갔네.
그러니 걱정할 것은 없네. 편히 누워 있게나.”
반개는 힐끗 주승을 쳐다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자네 생명을 구하느라 하루 밤낮을 꼬빡 이곳까지 달려
왔네, 살려거든 될 수 있는 한 움직이지도 말고 말도 하지 말게.”
“허허허… 지금 자네가 만약에 죽기라도 한다면 영원히 누나를
만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나?”
주승은 전음입밀의 묘수로 반개에게 말했다.
“거지 형, 상팔과 두구, 그 두 놈이 악 낭자를 무사히 구출했을
까?”
반개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글쎄? 내 생각으로는 그들도 무사히 그 포위망을 뚫었으리라 믿
는데 그놈들의 무공또한 우리와 별 차이가 없는 놈이니…..”
소영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 보았다. 그들은 마치 이야기를 주
고 받는 듯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다시 입을 막 열려는데 절 밖에서 무서운 발자국 소리가 들
려 왔다. 소리에 이어 밖에서 누구인지 성큼성큼 절 안으로 들어
섰다.
바람에 날리는 그의 긴 수염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엄을 느
끼게 하였다. 그 도사는 얼굴이 보름달같이 둥굴었고 넓고 큰 청색
도포를 입었다. 그리고 오른손에는 불진(佛塵)을 들고 등에는 커다
란 보검을 메었다.
그 도사의 걸음은 구름을 타고 나는 듯 옮기는 맵시가 매우 가벼
웠다. 그 뒤를 이어 열 예닙골 쯤으로 보이는 도동(道童)이 따라
들어왔다.
주승과 반개는 힐끗 바라 보고 상대의 정체를 알았으면서도 이내
눈을 감고 운기를 조식하는 시늉을 했다.
소영은 한눈에 그 도사가 악인이 아닐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저 중년 도사 처럼 첫인상이 매우 좋아 저런 분 밑에서 무공을
연마해 보았으면……’
소영은 그를 따라 들어온 도동을 자세히 살폈다. 도동은 검은 도
포를 입고 있었으며 혈색은 마치도 복사꽃 같았다.
‘저 도사와 도동은 무슨 일로 이곳에 왔을까?’
중년 도사는 소영과 다른 두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듯 곧장 신단
앞으로 다가가서는 손에 든 불진을 휘둘러 먼지를 날려 보냈다.
그 불진이 일으킨 싸늘한 회오리 바람이 소리도 없어 근처의 바
닥을 깨끗하게 쓸었다.
도사는 참선하는 자세로 앉아 있었으며 도동은 바로 뒤에 서서
그를 지켜 보고 있었다.
소영은 그의 행동에 의아심이 생겼다.
‘저 도사는 보통 인물이 아니로군. 저 등에 지니고 있는 보검으
로 보아도 그렇고 조금 전에 불진을 휘두른 솜씨를 보아도… 그런
데 주승과 반개는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왜 서로 모른 체 할까?
만약 저 도사가 두 노인을 모른다면 이곳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
이고 또 저렇게 태연하지도 않을 것이 아닌가.’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허허허…볼품없는 절이긴 하지만 잠시 들어 가서 쉬어야겠다.”
먼저 들어 선 사람은 횐색 장삼 차림으로 총명함과 기지가 넘쳐
보이는 이십여 세의 청년이었다.
그가 몇 걸음 안으로 들어 서자 그 뒤에 또 한 사람이 눈을 부라
리며 들어 섰다. 그는 얼굴색이 무척 검고 귀가 아주 작았다.
그는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띠고 안으로 들어 서다가, 이미 대
전에 다섯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눈을 뜨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서서 한참 동안 다섯 사람을 훑어 보고서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도장께서는 오늘 어인 일이십니까?”
그러자 이제까지 눈을 감고 있던 중년 도사가 천천히 눈을 뜨며
미소를 지었다.
“성형은 집에서 행복만 누리고 지내면서 강호의 일에는 조금도
간섭을 않더니 뜻밖에 여기서 만났구려.”
“하하하… 저는 벌써부터 짐작하였습니다. 무림에 금궁지약이
나오면 강호의 모든 고수들 특히나 소문도 없이 숨어 살고 있는 사
람들이 모두 들먹거릴 것이라고 말입니다.”
중년 도사는 얼굴 가득히 난색을 띠며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명령을 받고 온 것 뿐이지 무슨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
오.”
흰 장삼을 입은 청년은 고개를 돌려 주승과 반개를 쳐다 보며 말
했다.
“두 분은 도장보다 먼저 오셨습니까? 아니면 후에 오셨습니까?”
중년 도사가 대답했다.
“나보다 먼저 와 계셨소.”
반개는 될 수 있으면 조용히 있고 싶었다. 그러나 사정이 이렇게
되자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이거 정말 재미있군. 우연하게 중, 도사, 선비, 그리
고 이 늙은 거지까지 모이니 마치 회의를 하는 것 같군 그래.”
선비라고 불리는 청년은 곧 소매를 걷어올리고 그 속에서 조그마
한 술병을 꺼냈다.
“내 이럴 줄 알고 좋은 술을 한 병 준비해 왔소이다. 한 잔씩 나
누며 반 노인의 말씀대로 서로 이야기나 합시다.”
그러자 제일 먼저 달려들며 입을 연 것은 주승이었다. 그는 벌써
이틀 동안이나 술구경을 못한 터였다.
“술? 좋지? 좋아, 어디 한잔마셔 볼까……
청년 선비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병을 조금 치켜들었다.
“이 매화주는 백 년 동안 묵은 것이외다. 도형께서는 술을 좋아
하셔서 웬만한 것은 양에 차지 않는다고 하여도 이 술은 딱 한 잔
이상은 더 먹지 못할 것이오.”
벌써 대전 안에는 술의 향기로 가득차 주승의 코끝을 유혹했다.
청년 선비는 품 속에서 술잔을 꺼내서 한 잔 따랐다. 병에서 나
오는 술빛은 녹색이었다.
주승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듯 침을 꿀꺽 삼키고 자리에서 벌
떡 일어섰다.
“소승이 성형의 술을 좀 동냥하겠소.”
청년 선비는 돌연 대전이 떠나갈 듯한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이 매화주를 좀 달라는 것입니까?”
“그렇소. 조금 전 성형은 술을 나누어 먹자고 하지 않았소?”
“내가 근 삼 년 동안 강호에 나온 적이 없었는데 오늘 따라 모처
럼 길을 나선 것이 이런 인연을 만들었군요. 오늘의 인연을 축하하
는 뜻에서 내가 술을 올릴 터이니 노형께서는 너무 서둘지 말고 잠
시 기다려 주시오. 우선 다른 분부터 한 잔씩 마신 후에 남는 것은
모두 노형이 드십시오.”
주승은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반 병 정도의 술로 여기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한 잔씩 마시고
나면 무엇이 남겠소?”
“아! 이 술은 나도 겨우 반 잔 정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이 중에 술을 좋아하지 않는 분이 계신다면 그 분은 냄새만
맡아도 취하니 너무 염려 마시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중년 도사가 입을 열었다.
“난 술과 인연이 없으니 사양하겠소.”
청년 선비는 야릇한 미소를 띠며 즉시 술잔을 중년 도사에게 넘
겼다.
좌중의 시선이 술잔을 따라 움직였다.
“도형께서는 마시지 못하시거든 냄새나 맡아 보십시오. 아마 강
호의 어디를 가더라도 이 매화주와 비교할 만한 좋은 술은 없을 것
이오.”
중년 도사는 그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던지 마지못해 술잔을
받았다. 그는 술잔에 가득 담긴 녹색 매화주를 천천히 코 끝으로
가지고 가 냄새를 맡았다.
“과연 좋은 술이군. 내 술은 못하나 짐작컨데 이 술은 사람의 마
음까지도 취하게 할 것 같소이다.”
중년 도사가 칭찬을 늘어놓자 주승이 다시 말참견을 했다.
“만약 내가 술맛을 보면 더 좋은 평을 할 수 있을 텐데…”
“도형께서는 어찌 그렇게 급하시오? 제가 아까 말한 대로 남는
술은 전부 드리겠으니…..”
대전에서는 정말 우스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주승은 술을 달
라고 조르고 청년 선비는 못 먹는다는 중년 도사에게만 자꾸 술을
권하니 자연 언성이 높아지고 시간이 오래 걸렸다.
청년 선비는 중년 도사의 완강한 사양에 쓴 웃음을 지으며 걸음
을 옮겨 중년 도사와 함께 들어 온 흑의 도동에게 다가섰다.
“도형께서 한 잔 드시겠소?”
그러자 흑의 도동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술냄새도 맡지 못합니다.”
청년 선비는 또다시 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역시 무당(武當) 파의 문규(門規)가 엄하군. 그렇다
면 더 권하지 않겠소이다.”
그는 말을 하면서 청년 선비는 반개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맞은
편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래도 반개가 별다른 표정을 보이
지 않자 그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러나 곧 웃음을 띠며 술잔
을 앞으로 내밀었다.
“오래 전부터 진형의 대명은 익히 들었소이다. 제 매화주를 한
잔 드십시오.”
“이 늙은 거지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오직 밥만 좋아하였지 술과
는 인연이 없소이다, 호의는 고맙소만 사양하겠소. 섭섭히 생각지
마시오.”
“저의 이 매화주는 이것 뿐이오. 만약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 어
느 곳에서도 보지도 못할 것이오. 너무 사양만 하지 말고 한 잔 드
시오.”
“나는 정말 먹지 못하니 이 잔을 주승 도형에게나 주시오.”
그는 말을 끝내고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옆에서 보고 있던 주승이 회심의 미소를 띠면서 다가 왔다.
“물건은 확실히 필요한 사람에게 팔아야 하는 법이오. 이 노승은
술을 생명처럼 알고 있으며 설사 그 술에 극독을 섞었다 하더라도
나는 술을 먹겠소. 난 술을 먹고 죽는다면 지금 죽어도 한이 없겠
소.”
청년 선비는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허공을 바라 보다가 돌연
호탕하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하하하… 그렇소이다. 이 값진 술은 임자가 따로 있는 것 같소
이다. 자, 여기 술병과 잔까지 드리리다.”
그는 주승에게 술병과 잔을 건네 주었다.
주승은 술병을 받자마자 병째 들이켰다.
“아, 과연 술 맛 좋구나.”
주승의 말은 청년 선비에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주승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먼지가 쌓여 있는 마루 바닥에 털썩 주저앉
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분들은 모두 나를 의심하는구나. 내가 술에 무슨 독이라도
넣었을까 봐……”
그의 말은 혼자서 중얼거린 것 같기도 하였고 또 다른 사람에게
들으라고 하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말에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이때 중년 도사가 몸을 일으키더니 소영이 누워 있는 곳으로 다
가왔다. 그는 눈을 빛내며 소영을 한참 동안 내려다 보더니 부드럽
게 물었다.
“소시주는 몸이 불편하시오?”
소영은 그에게 퍽 좋은 인상을 받고 있었으므로 웃음을 띠며 고
개를 끄덕였다.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가! 그러나 조그마한 상처라도 잘못하면 생명까지 잃게 되
네. 좀 보여 주겠나? 내가 치료하는 방법을 조금 알고 있으니.”
소영은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악의가 없다고 생각하고 시비
를 가리지 않았다.
“네, 좋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선배님께 감사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중년 도사는 여전히 소영의 앞에 우뚝 서 있을 뿐 그의
상처를 보려고 하지는 않았다.
반개가 소영에게 다가서더니 긴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 애는 이미 이 늙은이가 몇 번 손을 써 보았소. 그러나 별다
른 효과가 없구려. 도장께서 만약 구해 주신다면 늙은이도 감사드
리겠소이다.”
“빈도(貧道)는 다만 조금의 의술을 깨우쳤을 뿐이외다. 내 생각
에 이 소시주의 병세는 선천적인 것 같소이다. 그것이 근래에 와서
받은 외상의 충격으로 악화되었소이다.”
반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소영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렇소. 이 소시주는 양명위경(陽明胃經)에 태을혈(太乙穴)을
점격당하였소. 이것은 중상을 입으면 칠일 이내에 생명을 잃고 경
상은 반신불구가 되는 무서운 것이오. 난 의술에 대하여 잘 모르고
다만 그 중세만 알고 있을 뿐이오.”
“진형의 말씀은 일리가 있소. 그러나 빈도는 부끄럽게도 소지주
를 치료할 능력이 없소이다. 만약 진형께서 허락하신다면 제가 소
시주를 무당산으로 데려가 장문(掌門) 사형에게 보이고 싶소. 그러
면 쉽게 고칠 수 있을 것이외다.”
중년 도사는 소영을 힐끗 쳐다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빈도의 사형은 의술이 능통하며 반드시 소시주의 상처를 치료할
것이니 용단을 내려 주시오.”
반개는 돌연 싸늘한 눈빛을 띠면서 중년 도사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운양자(雲陽子)! 이 늙은 거지는 평생을 두고 많은 고난을 겪으
며 꿋꿋이 살아왔는데 이제 나보고 조그마한 일로 남에게 의지를
하란 말이오? 그건 절대 안 되는 말이오.”
그러나 운양자라고 불린 도사는 조금도 표정을 바꾸지 않고 미소
떤 얼굴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빈도가 설령 다른 마음이 있다 해도 소시주의 병을 치료해 준다
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 아니겠소? 그러니 너무 좁게 생각지 마시
오.”
반개는 한참 눈을 감고 생각하더니 돌연 눈을 번쩍 뜨며 대답했
다.
“좋소. 데리고 가시오.”
운양자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오른손을 들어 흑의 도동을 불렀
다. 도동은 달려가 가볍게 소영을 업었다. 운양자는 나지막한 목소
리로 도동에게 명하였다.
“가라!”
도동은 즉시 비호같이 빠른 동작으로 대전을 나섰다.
이때 돌연 청년 선비의 외침 소리가 대전을 가득 메웠다.
“운양 도형! 잠깐 서시오.”
그가 손짓을 하자 옆에 있던 키가 작고 얼굴이 검은 장한이 앞으
로 달려 나가 흑의 도동의 길을 막았다.
운양자가 냉랭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성(成)형은 이 빈도를 무시해 버리겠다는 것이오?”
“아니오이다. 난 그런 생각은 조금도 없소이다, 강호에서 운양
도형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소영은 흑의 도동에게 업혀 있으면서 험악하게 변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운양자는 불진을 몇 번 휘두르며 걸음을 옮기면서 말했다.
“성형이 나를 귀찮게 하지 않겠다면 반가운 일이오.”
청년 선비는 운양자의 옆을 바짝 따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운양 도형을 귀찮게 하지 않으려는 것은 도형의 보검과 불
진이 무서워서 그러는 것은 절대로 아니오. 다만……”
그는 말을 하며 계속 뒤따랐다.
운양자는 내심 불쾌한 마음이 있었지만 짐짓 웃음을 띠었다.
“성형, 무슨 이야기요? 내 귀담아 들으리다.”
청년 선비는 대답을 않고 소영을 주시하였다.
“운양 도형께서 달려 이 공자를 데려가려는 것은 정말로 치료를
하려는 것입니까?”
“그렇소.”
“내가 보기에는 굳이 데려갈 필요가 없겠는데……”
청년 선비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나에게 의술의 재능은 비록 뛰어나지 않지만 저 정도의 상처는
능히 고칠 수 있으니 여기서 고칩시다.”
“빈도는 이미 진형의 승낙을 얻어 이 소시주를 데리고 가는 길인
데 어찌 성형이 중간에 나서서 귀찮게 하오?”
청년 선비는 바보스런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도 사람의 생명을 구해 주는 것을 무엇보다도 기쁘게 생각하
는 사람이오. 오늘 모처럼의 기회이니 내가 이 공자를 고치게 해
주시오.”
운양자는 이제 음성까지도 날카롭게 변하였다.
“빈도의 의술로도 이 시주의 상처를 치료할 수가 없어 부득이 무
당산으로 데려 가는 것인데 어찌 성형은 그리 큰 소리를 치시오?
성형은 자신의 의술을 너무 높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소이다.”
“아니오. 그것은 도형의 생각이오. 난 무림의 도동들에게서 의술
을 인정받았소. 그래도 나의 의술을 못믿겠단 말이오?”
두 사람은 계속 걸음을 옳겨 이제는 그들이 만났던 절도 멀리 보
였다.
“빈도가 성형의 명성을 듣기로는 다만 백수서생(百手書生)이라는
호칭은 들었어도 의술에 능하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외다.”
“그것은 도형이 요즘 강호 소식을 듣지 못한 때문이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대뜸 운양자의 옷 소매를 붙잡고 외쳤다.
“아참, 그것을 생각 못했었군. 운양 도형께서 정 나를 믿지 못하
겠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내 의술을 시험해 보시겠소?”
운양자는 소영을 바라보면서 심각하게 대답했다.
“아무리 어린 시주라 하지만 사람의 목숨은 무엇보다 귀한 것.
또한 죽음은 한 번뿐인데 어찌 성형에게 환자를 마음 놓고 맡길 수
있겠소?”
청년 선비는 자신의 뜻이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가 않자 한 가지
묘책을 짜냈다.
그는 표정을 바꾸어 부드러운 말로 물었다.
“이 공자는 무당파의 문하요?”
“무당 문하는 아니지만 이미 부탁을 받았소.”
청년 선비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입을 열었다.
“누구에게 부탁 받았소?”
운양자는 화가 치밀었지만 싸울 때가 아니라 생각하고 꾹 참았
다.
“성형도 옆에서 보지 않았소? 빈도가 진형의 부탁을 받고 나온
것을… 이제와서 무슨 엉뚱한 수작을 부리려는 것이오?”
청년 선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운양 도형! 난 그때 정신을 다른 곳에 두고 있었으므로 미처 그
것을 듣지 못했소이다. 그러니 정 그 공자를 데려 가고 싶으면 다
시 절로 돌아가 내 앞에서 진형의 대답을 들으시오.”
운양자는 청년 선비의 고집에 할 수 없이 그의 말대로 하기로 했
다. 가던 길을 되돌아 다시 주승과 반개가 있는 곳으로 달려 갔다.
그들이 다시 대전으로 들어서자 반개는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웬 일이오?”
청년 선비는 무엇보다도 먼저 주승을 찾았다.
‘내 술을 얻어 먹었으니 그는 틀림없이 내 편을 들어 주겠지.’
주승은 신단 모퉁이에서 술병을 가슴에 얹고 코를 골면서 세상 모
르고 자고 있었다.
그는 미 간을 찌푸렸다.
‘저 술꾼을 믿고 왔는데… 이렇게 되었으니 반개에게 부딪쳐 보
자.’
청년 선비의 표정은 매우 부드러워졌다. 두 손을 앞으로 모으며
허리를 굽혀 반개에게 예를 올렸다.
청년 선비는 예를 마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대협, 조금 전에는 제가 너무나 경솔하게 행동하여서 죄송스
럽습니다. 어른께서는 혹시 강호에서 저의 의술에 대해서 들은 바
가 없습니까?”
그는 반개가 대답할 여유를 주지 않고 다시 말을 이었다.
“진형께서는 만약 저의 의술을 믿어 주신다면 제가 즉시 이 자리
에서 저 공자의 상처를 치료하겠습니다.”
반개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였다.
소영은 그 청년 선비를 다시 한 번 유심히 살펴 보았다. 비록 이
목구비가 반듯하고 두 눈에서는 신광이 번뜩이고 있었지만 그의 마
음은 매우 엉큼하게 보였다.
소영은 재빨리 입을 열어 반개의 그릇된 생각을 일깨워 주려 하
였다.
“진 아저씨! 전 이 사람에게 치료받지 않을 테예요. 저는 도장
어른을 따라 가겠어요. 아저씨도 조금 전에 대답을 하셨잖아요.”
청년 선비는 눈을 부라리며 냉랭하게 말했다.
“무당산은 이 곳에서 천리 길인데 아마 자네 상처로는 그곳까지
가지도 못하고 죽을 것이네. 그래도 가겠다는 것인가?”
“난 가다가 죽어도 저 도장 어른을 따라 가겠어요.”
그러자 청년 선비의 안색이 분노로 인하여 붉게 변하면서 무어라
말을 하려는데 반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공자는 이 늙은 거지가 운양 도형에게 부탁한 것이니 만약
앞으로 다시 어느 누구라도 간섭을 한다면 그것은 나와 주승에게
도전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가만 있지 않겠소.”
그는 이야기를 하면서 운양자와 청년 선비를 번갈아 보았다.
운양자는 회심의 미소를 띠며 청년 선비에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백수서생!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오늘 못다한 말은 다음 기회로
미룹시다.”
청년 선비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도형! 내가 졌소. 무사히 무당산에 도착하기를 바라오.”
그의 말 속에는 무서운 가시가 돋혀 있었다. 운양자는 그의 말에
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손을 모아 다시 반개에게 예를 올리고
대전을 나섰다.
소영을 업고 있는 도동의 나이는 어렸다. 그러나 걸음은 무척 가
볍고 빨라서 앞서가는 운양자의 뒤를 바짝 쫓았다.
소영은 차가운 바람이 귓전을 스쳐 지나가고 또한 얼굴에도 덮쳐
와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동의 등에 얼굴을 묻었
다. 얼마를 그렇게 달렸다. 갑자기 도동이 걸음을 멈추고 움직이지
않았다.
소영은 궁금한 생각에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자신의 바로
눈앞 을 험준하고 매우 높은 산봉우리가 가로막고 있었다.
운양자는 사오 척 앞에서 불진을 흔들며 주위를 유심히 살피더니
고개를 도동에게 돌리며.
“얘야, 소시주를 내려 놓고 여기에서 잠깐 쉬자. 요기를 해야겠
다.”
하고 소영을 염려하자 흑의 도동이 이마에 흐른 땀을 씻으며 물
었다.
“사부님, 그 백수서생이 뒤를 쫓아 오면 어떻게 합니까?”
“그건 염려 말아라. 그 놈은 우리를 쫓아올 생각은 하지 않을 것
이다. 만약 그가 따른다면 반개와 주승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그제서야 도동은 천천히 소영을 내려 놓으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
다. 운양자는 도동의 모습을 눈여겨 보았다.
“얘야. 그렇게 힘드냐?”
운양자는 옷소매에서 음식을 꺼내 들고 소영에게로 다가왔다.
“소시주, 두려워할 것 없네. 빈도는 절대로 소시주에게 해를 입
힐 사람이 아니네. 시장할 터이니 어서 먹게나.”
소영은 그가 내미는 음식을 받아 먹으며 내심 많은 생각을 하였
다.
‘이 도장은 내 병을 고쳐만 주려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서 다른
무엇을 얻으려는 것 같다. 그러나 난 조금 전의 백수서생이라는 청
년에게는 내 몸을 맡기고 싶지 않다. 설령 이 도장이 나쁜 사람이
라고 하여도 나는 이미 결정한 일이니 조금의 후회도 없다.’
그의 머릿속은 희망과 고뇌가 뒤범벅이 되어 어지러웠다.
잠시 후 몇 개의 산을 넘고 몇 개의 개울을 지나 잠시도 쉬지 않
고 길을 재촉하니 소영을 업고 있는 도동의 피로는 극도로 달하였
다.
이렇게 하룻밤이 지나고 그 다음 날이 거의 기울 즈음 갑자기 소
영의 몸에 열이 나기 시작하고 주체할 수 없는 진통이 일어났다.
‘내가 이렇게 죽더라도 내 자신이 자청해서 길을 따라나선 것이니
저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누나를 만나 보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은……”
그는 미처 생각을 끝맺지 못하고 정신을 잃어 버렸다.
소영은 얼마가 지났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누군가 몸에 뜨
거운 두 손으로 쉬지 않고 그의 몸을 치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
다. 상처는 이 따금씩 뜨끔뜨끔 아파왔다.
이윽고 그는 가슴이 후련하고 정신도 맑아져 마치 새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 번쩍 두 눈을 떴다.
눈을 뜨고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하얀 수염을 길게 늘이고 상투
를 튼 얼굴이 등근 노인이었다. 그 노인은 자기의 시선과 마주치자
얼른 미소를 띠며 계속 손을 움직여 자신의 몸을 주물렀다.
소영은 고개를 조금 옆으로 돌려 주위를 살펴 보았다.
그 노인의 바로 뒤에는 자신을 이곳까지 데리고 온 운양자가 매
우 숙연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소영이 미소로 인사를 하는데 돌연 온 몸이 뜨거워지며 노인의
손이 닿는 곳마다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잠시 후 노인이 긴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손을 거두어 들이며 소
영을 바라 보았다.
“소시주! 지금은 좀 어떤가?”
소영은 그 노인의 엄숙한 위풍에 눌려 공손히 대답했다.
“네. 좀 나은 것 같습니다. 노도장께서는 운양 도장의 사형이시
지요? 무당파의 장문(掌門)이시구요?”
백염(白炎) 도인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빈도는 무위(無爲)라고 하네. 소시주의 병세는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이제 막혔던 혈맥을 터 놓았으니 아직 말을 많이
하지 말게. 소시주가 완전히 나으면 그때 많은 이야기를 하도록 하
세나.”
소영은 백염 도인의 겸손한 말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였
다. 그는 쑥스러운 표정을 보이지 않으려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저의 악 누나는 어디에 있나요? 누나는 무사한가요?”
무위도장은 무어라 대답을 하지 않고 한참 동안 소영을 쳐다 보
더니 손짓으로 운양자를 내보냈다.
이제 넓은 실내에는 무위도장과 소영만이 남았다. 무위도장은 몹
시 피로한 듯 눈을 감고 운기를 조식하였다.
소영도 잠을 청하였다. 거의 반나절을 자고 난 후 소영은 상쾌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이제는 옆구리의 상처도, 가슴의 불 같은 뜨거움도 깨끗이 사라
진 느낌이었다.
그는 다시 주위를 살피려고 눈길을 돌리다가 바로 자기 옆에 앉
아 있는 무위도장과 시선이 마주쳤다.
‘아직도 내 곁에 있었구나!’
소영은 무슨 죄를 진 사람처럼 깜짝 놀라며 얼른 고개를 돌려 그
의 시선을 피했다.
밖은 벌써 어두웠다.
소영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 침상에서 내려 가려는데
무위도장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밤도 깊고 바깥 날씨는 무척 추우니 밖으로 나가지는 말아라.
넌 조금 전에 약을 먹었으니 이 단실(丹室) 안에서 마음대로 몸을
움직여라. 그래야만 약효과도 더 빨라진다.”
무위도장은 이제 말을 놓았다. 그러나 소영에게는 이것도 과분하
였다.
‘무당파의 장문인은 그 인품이 숭고하여 나같은 어린아이에게도
가볍게 대하지 않는구나.’
소영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아직도 흰 연기를 내고 있는 화로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무위도장은 뒤에서 쳐다만 보고 있을 뿐 다른 말은 없었다. 그
화로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나는 흰 연기가 계속 나왔다. 소영은 그
연기를 내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는 몇 걸음 더 다가가서 그 화로 속을 들여다 보려고 했다. 그
러나 그곳에서 나오는 열이 어찌나 강한지 깜짝 놀라서 뒤로 몇 걸
음 물러났다.
‘저 화로에는 도대체 무엇이 타고 있길래 저토록 뜨거울까? 또
저향기를 담은 흰 연기는……’
소영은 다시 화로로 다가가 고개를 숙여 들여다 보았다. 그 안에
는 빨갛게 불길이 솟아 오르는 가운데 청색 유진이 움직이고 있었
으며 흰색 연기는 그 이상한 물체 밑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소영은 돌연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옛날에 아버지께서도 저렇게 연단(煉丹)하고 계셨는데……’
그는 고개를 돌려 무위도장에게 물었다.
“노도장님께서는 연단하고 계십니까?”
“허허… 잘 알아맞히는구나. 너를 위하여 약을 만들고 있지.”
“제가 먹을 약을 만들고 계시다니요?”
“그래. 앞으로 삼 일만 지나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소영은 적잖이 놀라며 긴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노도장님! 도장님은 어째서 처음 보는 저를 이처럼 아껴 주시는
것 입니까?”
“우리 무당파는 자비로서 사람을 구해 주고 있다. 어찌 너라고
외면하겠느냐? 감사를 하려거든 운양도장에게 하여라.”
소영은 얼마 동안 무위도장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본 뒤에 무뚝뚝
하게 말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요. 노도장께서는 자
비로만 하는 일이 아니라 저에게서 무엇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까?”
무위도장은 마치 소영의 입에서 이처럼 대담한 말이 나오리라고
는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질문을 받자 한동안 멍하니
소영을 바라 보기만 하고 무어라 말을 못했다.
무위도장은 미간을 찡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빈도가 너를 치료하여 준 것은 다른 또 하나의 이유가 있을는지
몰라도 너의 생명을 건져 주고 또 너를 훌륭한……”
이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위도장은 말을 멈추고 외쳤다.
“누구냐?”
문 밖에서 낮은 대답이 들렸다.
“제자, 급한 일이 있어서 찾아 왔습니다.”
“들어 오너라.”
그의 말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며 검은 수염을 기른 귀가 큰 중년
도사가 들어 왔다.
검은 수염의 도사는 운양자와 나이는 비슷하게 보였으나 무위도
장에게 대하는 태도는 매우 공손했다.
“무엇이냐?”
“누군가 산에 올라왔습니다.”
무위도장의 안색이 약간 변하였다.
“어떻게 생겼더냐?”
“저는 그 자의 얼굴을 보지 못하여 무어라 말씀드릴 수 없음을
죄송하게 생각하옵니다. 별것은 아니지만 혹시 사부님께서 걱정하
실까 염려되어 알려 드리는 것입니다.”
“알았다.”
소영은 그 중년 도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문 있는 곳으로 달
려갔다. 그러자 무위도장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
소영은 눈을 빛내면서 무위도장을 뚫어지게 바라 보았다.
“악 누나가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나가 알아 보겠어요.”
그는 재빨리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