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 Finger RAW novel - Chapter 74
74. 고개 숙인 독수약왕
이 때였다. 여남은 자 밖에 보이는 풀덤불 속에서 음침한 목소리
가 우렁우렁 들려 왔다.
“으흐흐…. 칠살찬운수는 늙은 거지의 전문적 수법이외다. 이장
주께서는 저당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말소리가 떨어지자, 사람의 그림자가 천천히 걸어 나와 손불사의
앞을 막아 섰다. 전신에 푸른 옷을 입고 작달막한 키에 통통하게
살진 늙은이였다.
손불사는 흰 눈썹을 찡긋 치켜 올렸다.
“신삼괴(申三怪), 네 아직도 세상에 살아 있었군. 정말 뜻밖인
데?”
신삼괴는 으흐흐 하고 음침하게 웃고,
“너도 또한 살아 갈수록 목숨이 길어지는구나!”
손불사의 반응은 냉정했다.
“너는 죽어 마땅할 놈이 죽지 않았으니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
다만 결국은 또 백화산장 문하에 투신하여 심목풍에게 아첨을 떨고
있다니 진정 이 늙은 거지로 하여금 이빨이 시게 하는구나!”
신삼괴 역시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오십 년 전 우리는 황산에서 일전에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그
러나 오늘의 싸움은 반드시 생사를 거는 싸움이 되겠구나!”
“흥! 설마 이 늙은 거지가 네깟놈을 두려워하겠느냐?”
이때 소영이 크게 호통치는 소리가 들렸다.
“부인께서 끝내 지고 싶지 않다면 나 소영의 손이 무정하다고 생
각지 마시오.”
여럿은 눈을 돌려 바라 보았다. 이때 소영의 장검은 신룡이 구름
을 뚫고 나오듯 송이송이 검화를 날리며 이미 금화부인의 온몸을
칼그물 속에 몰아 넣고 있었다.
금화부인의 두 개의 금화는 소영의 검에 눌리어 도무지 독을 쓰
지 못하는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목숨도 위태위태하게 보였다.
격렬한 드잡이 판국에 돌연 소영의 호통소리가 들렸다.
“비키시오!”
흥! 하는 소리가 일어나면서 금화부인의 오른손 금화가 땅에 떨
어졌다. 소영의 일검은 금화부인의 오른팔을 넉넉히 자를 수 있었
다. 그러나 그는 천성이 어진 사람이라 사람을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검의 날카로운 날이 바로 여인의 팔뚝을 치는 순간
손을 뒤집어 칼몸으로 부인의 팔을 쳤던 것이다.
금화부인은 크게 놀라 펄쩍 몸을 날려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
빈 오른손의 놀림은 빨랐다. 어느새 품 속에 넣었는지 한 마리 독
사가 손을 벗어나 곧장 소영의 코 앞으로 날아오지 않는가?
“흥!”
소영은 코웃음을 보내는 동시에 돌연 왼손을 들어 날아 오는 독
사를 잡았다.
금화부인의 안색이 금세 변했다.
“죽이려고 하는가?”
“알 수 없지!”
소영은 담담하게 대꾸하고는 독사를 손에 잡는 순간 다시 그것을
휙 뿌리쳐 신삼괴에게로 던졌다.
신삼괴는 잠자기 검은 빛줄기가 날아 오자 처음에는 놀랐다. 또
한 무슨 암기인지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무공이 고
강함을 믿고 있었고 또한 소영이 잡는 것을 보고는 약세를 보이기
가 싫었다. 그래서 날아오는 물체가 코 앞에 이르자 덥석 손을 내
밀어 잡았던 것이다.
처음에 느낀 늙은 손의 감촉은 우선 미끈미끈하여 이상했다. 늙
은이는 기분이 좋지 않아 즉시 땅바닥에다 팽개쳤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손이 근질근질 하면서도 따가웠다. 독
사에게 물린 것이다.
이 조그마한 독사의 기독은 어떠한가? 아무리 무공이 고강한 사
람 이라 할지라도 두 시진을 살아 남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
신삼괴가 제아무리 장담을 한다고 해고 한 번 물린 독사의 독은 즉
시 핏줄을 타고 심장으로 진입하는 것이었다. 스스로의 공력으로는
막을래야 막을 수가 없었다. 오른팔은 벌써 끊어질 듯 저려 왔다.
깜짝 놀란 금화부인은 즉시 몸을 날려 신삼괴에게 다가갔다. 즉
시 손을 놀려 신삼괴에 의해 팽개쳐진 독사를 거두어 들이면서, 다
른 손은 어느새 품 속에서 붉은 알약 한 알을 꺼내어 신삼괴에게
넘겨 주었다. 이 모든 동작은 실로 순식간에 이루어진 것이다.
“어서 복용하세요!”
신삼괴는 반생을 강호를 떠돌아 다닌 늙은 구렁이로 아는 것도
많고 본 것도 많았다. 이 시간이 자기에게는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긴박한 순간임도 잘 알고 있었다. 어찌 거드름을 피워 물리칠 것인
가? 즉시 환약을 입 속에 집어 넣어 꿀꺽 삼켜 버렸다.
주조룡이 급히 묻는 소리.
“신형, 상세는 어떠시오?”
신삼괴는 대답할 여력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목구멍으로 넘어간
단약을 녹이느라고 그러는지 오만상을 찌푸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금화부인이 계속해서 일렀다.
“이 시각엔 다시 싸울 수 없습니다. 반드시 이, 삼 일은 쉬어야
합니다.”
주조룡은 형세가 글렀다고 여긴 모양인지 돌연 채찍을 들어 말의
엉덩이를 후려 갈겼다.
“이랴!”
건강한 말은 즉시 말머리를 돌리며 질풍처럼 네 굽을 놓고 달리
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새 손불사가 따라붙고 있었다.
“주조룡! 게 섰거라!”
소리와 함께 노인의 무시무시한 일장이 갔다.
“히히힝!”
말울음소리가 크게 일어나는 가운데 주조룡의 몸은 돌연 안장을
떠나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거꾸로 풀덤불 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말이 네 굽을 꺾고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사람은 피했으나 말은
호 되게 얻어 맞았던 것이다.
옆으로 벌렁 자빠지자 네 굽을 허우적거리다가 그대로 조용해지
고 말았다.
벌써 날은 땅거미가 짙게 내려 깔렸다.
손불사가 머리를 돌렸을 때 그곳에는 금화부인도, 신삼괴도 없었
다. 쌍쌍이 숨어 버린 것이다.
손불사는 닭 쫓던 개 모양이 되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욕지거리
를 퍼부었다.
“개 방귀 같은 놈들, 주조룡 듣거라! 나 늙은 거렁뱅이가 조만간
너를 산채로 잡아다 쳐 죽이고 말겠다.”
그 말에 응답이나 하듯, 돌연 사방에서 피융! 하는 화살소리가
일어났다. 일제히 화살을 쏘아대는 것이었다.
화살은 곧장 손불사에게로 날아 왔다.
“흥!”
그는 크게 코웃음을 치고 나서 갑자기 쓰러져 죽은 말의 시체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을 따라 이리저리 흔
들었다. 날아 오는 화살은 대부분 말의 시체에 꽂히거나 땅에 떨어
졌다.
소영은 소리쳤다.
“차츰 야색이 짙어 가니 포위를 뚫기가 어렵지 않겠습니다. 노선
배께서는 빨리 돌아 오십시오. 새로운 대책을 강구합시다.”
손불사는 이 소리를 듣자, 말의 시체를 털썩 땅바닥에 내동댕이
치고 휙 몸을 날려 소영의 신변으로 다가 왔다.
“적의 몇몇 수뇌 인물이 부상당했네. 왜 이 때를 이용하여 포위
를 뚫고 달아나지 않는가?”
소영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부모님께서는 모두 무공을 익히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밤이라
띳집 사방에 수많은 매복이 있을 텐데 어찌 그들이 쏘아대는 강궁
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날이 밝으면 우리는 물론 적이 쏘아대는 화살이나 암기를 볼 수
는 있으나, 적도 또한 우리를 똑똑히 볼 수 있으니 그간의 이해득
실을 소대협은 다시 생각해 보시오.”
“후배의 생각으로는 먼저 사방의 매복을 소탕한 후에 다시 부모
님을 모시고 포위를 돌파하는 것이…..”
“좋아! 소대협의 생각대로 하지요.”
소영은 장검을 치켜 들고.
“저는 왼쪽에서 띳집을 돌고 노선배께서는 오른쪽으로 돌아 한
차례 매복을 소탕한 후에 집 뒤에서 합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비
록 전부 소탕하지는 못한다 해도 반이라도 해치운다면 포위를 뚫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소대협의 의견에 따르겠소.”
소영은 발길을 돌렸다.
손불사 역시 옆으로 돌았으나 몇 걸음 가다가 우뚝 걸음을 멈추
고 물었다.
“소대협, 늙은이는 한 가지 미심쩍은 일이 있소. 대협의 가르침
을 받아야겠소.”
소영 역시 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금화부인이 암기를 사용한 독사는 그 주독이 비할 데 없이 강렬
하거늘 아우는 어찌 아무 두려움 없이 그 뱀을 받았는가?”
소영은 소리 없이 웃으며,
“후배의 손에는 천년교피장갑을 끼고 있어서 극독이 두렵지 않습
니다. 그러니 독사가 물지 못한 것이지요.”
“아, 그랬던가?”
노인은 머리를 끄덕이며 길게 한숨을 불어 냈다. 먼 옛날의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신삼괴는 옛날 노부와 황산에서 하루낮, 하룻밤을 줄곧 악투를
벌였지. 신삼괴의 무공이 높아 이 늙은 거지가 꺾어낼 수가 없었
소. 그 후 그는 소림의 무아대사에게 상하여, 이로부터 종적을 감
추고 다시 강호에 나타나지 않았지. 그런데 뜻밖에도 백화산장에
잠적해 있을 줄이야…..”
그는 잠깐 쉬었다가 사방을 한차례 살핀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신삼괴는 옛날부터 그 이름을 강호에 떨치었소. 그 위명으로 말
하면 절대 심목풍의 아래에 있지 않을 것이오. 헌데 어찌하여 심목
풍의 밥을 얻어 먹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손불사의 말을 듣고 소영은 문득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각대문
파에는 모두 심목풍의 첩자가 잠입해 있는 것이다. 그러니만큼 심
목풍은 앉아서도 무림의 정세를 손바닥 들여다 보듯 환히 알고 있
었다.
또한 각대 문파에 잠입한 첩자가 그곳에서 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 문파 내의 움직임을 소상히 알 수가 있는 것이
다. 심목풍이 싸울 때마다 승리하고 전무림을 굽어 보는 오만심을
갖게 된 것도 앞에 말한 연원이 있는 까닭이 아닌가?
손불사는 소영이 잠시 말이 없는 것을 보고는 물었다.
“소대협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소?”
“이 일을 말하자면 길어집니다. 일후에 노선배께 상세히 말씀드
릴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소영은 이렇게 말하고 발길을 돌렸다. 손불사는 더 듣고 싶었으
나 소영이 말하기를 피하고, 또 때가 때인만큼 이내 몸을 돌림과
동시에 떨어진 곳에 있는 풀덤불 속을 향하여 호된 일장을 날려 보
냈다.
마치 속에 있는 화기를 풀어 보듯이.
그러자,
“아이쿠!”
하는 비명이 일어나면서 덤불속에 숨어 있던 사나이가 데굴데굴
굴러 풀덤불 밖으로 나왔다.
한편 소영은 손에 든 장검으로 한바탕 풀섶을 베었다. 돌연 풀덤
불 속에서 번쩍 단검 한 자루가 나왔다.
“챙!”
하고 쇠와 쇠가 맞부딪는 소리. 적의 단검은 비록 소영의 창검을
막았으나 엄청난 소영의 잠력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단검은 멀리 이십여 자 밖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손불사는 큰 소리로 호통을 내질렀다.
“주조룡과 금화부인은 모두 패하여 달아났다. 너희들이 아직도
이곳에 남아 있다니 스스로 죽음을 불러 들이는 결과이니라!”
소리를 지르며 노인은 계속해서 훅훅 하고 손바람을 쏟아 냈다.
무겁고 거센 장력은 태풍처럼 풀덤불을 휩쓸었다.
두 사람이 손을 쓰자 그 위세는 자못 대단했다. 편각지간에 벌써
칠, 팔 명의 장한이 나둥그러졌다.
그러나 반대로 풀덤불에 아직도 은신하고 있는 고수들은 비명소
리에 갑자기 격동되었다. 계속해서 터지는 활 시위 소리…. 화살
이 빗발같이 날아 왔다. 화살과 동시에 수많은 암기도 함께 쏟아져
왔다.
소영은 전에 한차례 독수약왕에게 시전한 대로 비무검의 수법으
로 내력을 충족시키다가 돌연 화살이 날아 오는 곳을 향하여 쏘아
냈다. 검광은 허공은 뚫고 나가 한 바퀴 풀숲을 휩쓸었다. 비명이
일어나고 피와 사람의 팔다리가 한꺼번에 튀었다.
손불사 역시 내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번개치듯 적을 휩쓸었다.
이 무림 양대 고수의 전력을 집중한 위력은 과연 사람의 심금을 떨
어 울리는 결과를 나타냈다. 벼락이 사방에서 떨어지고 우뢰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것 같았다.
결국 매복해 있는 자들은 반수 이상이나 떨어져 나갔다. 나머지
무사들은 스스로 대적하지 못한다기보다 무서운 결과에 정신을 차
리지 못했다. 분분히 일어나 사방으로 달아났다.
대략 한 공기 밥을 먹을 시간이 지났다.
이제 사방을 에워싸고 있던 매복은 말끔히 사라졌다. 두 사람은
벌써 집 뒤꼍에서 만났다.
“노선배, 무양하십니까?”
“하하…. 덕택에 괜찮소. 자, 이제 혼란한 이 틈을 타서 우리는
곧 탈출해야 하오.”
“노선배님 말씀이 옳습니다.”
독수약황이 두 사람을 맞았다.
“백화산장의 인물들은 물러갔소?”
독수약황은 한바탕 헛기침을 토해 내고는
심목풍은 그대를 미워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졌겠군. 이제 우리는
어서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오.”
“좋습니다. 노선배께서는 어서 따님을 안으십시오. 즉각 출발합
시다.”
소영은 이렇게 말하고 큰 걸음으로 부친의 신변으로 걸어 갔다.
“아버님, 제 등에 업히십시오. 길을 떠나야 하겠습니다.”
노인이 입을 열기도 전에 금산반 상팔이 몸을 날려 이르렀다.
“형님께서는 적을 막는 것이 긴요한 일입니다. 아버님은 제가 업
어 모시겠습니다.”
소대인은 민망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어떻게……”
상팔은 즉시 몸을 돌려 굽혔다.,
“지금은 형세가 매우 위급합니다. 아버님께서는 사양하지 마십시
오.”
금란은 전처럼 소부인을 업었다.
“자! 그럼!”
소영은 검을 잡고 앞장을 섰다. 손불사가 그 뒤를 따르고 이어
소대인을 업은 상팔과 소부인을 업은 금란, 그리고 독수약왕이 딸
을 안고 따랐다. 일행이 대문 밖으로 나와 머리를 들어 보니 어둠
속 정북방에서부터 몇 개의 횃불이 바람처럼 밀려 오는 것이 보였
다. 손불사는 소영을 돌아 보며,
“저 화공은 필시 백화산장의 무리들일 것이오. 불을 밝히고 당당
히 오고 있는 품이 백화산장의 정예고수들인 것 같군.”
소영은 소리를 낮추어,
“지금 형세를 보면, 그들과의 싸움을 피하는 것이 상책인 것 같
소.”
그는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정남방을 향하여 나아갔다. 그들은
아직 적의 포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바람같이 걸음을 재촉하니 순식간에 사, 오 리를 달렸다. 갑자기
말발굽소리가 일어나더니 한 필의 쾌마가 숲 속의 오솔길을 따라
달려 가는 것이 보였다.
독수약왕이 낮은 소리로 일렀다.
“이건 반드시 백화산장의 파발꾼일 것이다.”
소영은 이미 땅에서 돌멩이 하나를 주워 들었다.
“누구냐? 멈추지 못할까!”
그 사람은 듣지 못했는지 여전히 말을 달려 달아났다.
소영이 곧 몸을 돌려 두어 번 솟구쳤다가 떨어지자 벌써 말을 따
라 붙었다.
“서라!”
소리와 동시에 그의 손에 들렸던 돌멩이가 날아갔다.
“으윽!”
비명이 일어나고, 사나이는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소영이 가까이 이르렀을 때 돌연 사나이의 품에서 빛줄기 하나가
허공으로 뻗어 올라가더니 돌연 아득한 공중에서 일성 포향과 함께
작렬했다.
“흥!”
두구는 크게 코웃음을 치더니 급히 달려갔다.
“그 놈이 아직도 죽지 않았군!”
그는 사나이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펴 보았다. 땅바닥에 엎드
려 움직이지 않았다.
“이상한데?”
두구는 손을 내밀어 사나이의 몸을 뒤집었다.
“억!”
사나이의 코와 입은 선혈로 물들었고 벌써 숨이 끊어져 있었다.
원래 소영은 가까운 거리에서 돌을 날렸고, 또 때가 때인지라 자
기의 공력이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음을 잊고 힘껏 격중시켰기
때문이었다. 또 사나이가 맞은 곳도 중요한 혈도 중의 하나인 후심
이었다. 그래서 사나이는 한순간에 숨이 끊어졌던 것이다.
소영은 이 사나이의 충성심에 재삼 탄복을 금치 못했다.
두구가 중얼거렸다.
“죽으면서도 신호불을 발출했으니 대단한 놈이로군!”
말과 동시에 사나이의 시체를 힘껏 걷어 차니 시체는 피를 날리
며 여남은 자 밖으로 날아갔다.
독수약왕은 이때 먼 하늘에 작렬하며 떨어지는 불꽃을 보고 있었
다.
“우리의 방향이 이미 적에게 탐지되었으니 여기서 다시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소영은 먼저 자리로 돌아 왔다.
“동쪽으로 나아감이 좋을 듯하오.”
일행은 즉시 동쪽을 향해 달렸다.
얼마를 가니 여러 가지 나무가 뒤섞인 잡목림이 나왔다.
소부인은 금란의 등에 업혔으나 오랫동안 흔들림에 시달려 제정
신이 아니었다.
“영아, 좀 쉬었다 가자꾸나!”
소영은 어머니 분부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머님 말씀이 옳습니다. 이미 험경을 지났으니 좀 쉬어 가도
되겠…..”
바로 이때-
잡목숲에서 돌연 불빛이 번쩍했다. 여러 사람은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보고 있는 동안 불꽃은 두 개의 횃불로 화하였다.
“이 횃불은!”
소영이 앞으로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돌연 숲 속에서 착 가라앉
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셋째 아우, 줄곧 쉬지 않는군. 천타금강이나 동요나한이라 해도
더 지탱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백화산장에서는 이미 침상을 치우고
기다리고 있다. 아우는 무슨 연고로 장중으로 와 쉬려 하지 않는
가?”
그것은 바로 심목풍의 목소리였다.
“흥!”
손불사가 코웃음을 치고 한 마디 했다.
“심목풍, 그대는 아직도 이 늙은이를 볼 낯짝이 있느냐?”
서로 대치한 가운데 여기 저기서 부싯돌을 치는 소리가 일어나면
서 잇따라서 몇 자루의 횃불이 더 밝혀졌다.
소영은 시선을 쓸어 횃불을 헤아려 보았다. 횃불 뒤에 고요히 움
직이는 검은 그림자들-
소영은 그 뒤에서 움직이는 그림자들이 횃불마다 수가 비슷함을
알아 보았다. 하나, 둘…. 모두 열 명 정도의 흑의대한이 횃불을
따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밖에 횃불 든 자의 옆에는 각각 강궁을
겨누고 있는 두 사람의 강철같은 궁로수-
“이미 모두 배치를 끝냈군!”
이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으면서도 소영의 마음은 기이하게 가라
앉아 있었다.
화광은 서서히 움직였다. 그 뒤에 각각 병기를 뽑아 든 무사들도
움직였다. 대오가 정연했다. 이리하여 순식간에 적은 사면 팔방을
에워싸고 말았다.
소영은 암암리에 횃불의 수효를 세어 보았다. 모두 스물네 개였
다. 그의 입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흘러 나왔다.
‘심목풍과 아직 몸을 나타내지 않은 고수들을 계산에 넣지 않고
라도 사방을 에워싼 무사는 열 명씩 쳐도 이백사십 명…. 거기다
가 횃불을 들고 있는 자와 좌우의 궁노수들을 합하면 모두 이백사
십사 명-
백화산장에서 소영은 이미 이 무사들을 신물이 날 정도로 지도해
왔다. 그들의 무공이 비록 무림 중 제일급의 서열에 들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강호에 나가면 웬만한 현을 지배할 수 있는 일기당천의
무서운 용사들이 아닌가.
게다가 이들은 하나하나가 오랜 훈련으로 일단 접전이 벌어질 경
우 에는 죽을둥 살둥 미치광이처럼 숨이 넘어갈 때까지 늘어 붙는
종자들이었다.
중주이고와 금란 등은 소대인 부부를 풀밭에 모셨다. 독수약왕
역시 딸을 노인들 신변에 눕혔다. 중주이고, 금란, 옥란, 그리고
독수약왕 다섯 사람은 거동이 불편한 세 사람들을 가운데 놓고 빙
둘러섰다. 스물네 자루의 횃불이 타고 있으니 주위는 대낮같이 밝
았다. 독수약왕은 몸을 숨기고자 했으나 도리가 없었으므로 아예
허리를 펴고 당당히 버티고 서 있었다.
사방을 에워싼 흑의 무사들은 여남은 자쯤 되는 거리에서 이쪽을
네 모꼴로 둘러싸고 있었다. 병기가 부딪히는 소리도 없었고 숨조
차 쉬고 있지 않은 듯 사방은 일시 무덤처럼 고요했다.
다시 심목풍의 목소리가 울려 왔다.
“소형제, 하잘것 없는 백여 무사가 그대를 당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 형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머지 마흔여덟의 궁노수가 있다. 이
사람들은 그대의 양친을 향해 강궁을 당길 것이며 암기를 사출해
낼 것이다. 그 끝에 독을 발라서…..”
소영은 얼굴이 흑빛이 되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손불사
가 약왕을 돌아 보고 한 마디 했다.
“약왕, 싱목풍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이미 당신을 보았을 것
이오. 구태여 모르는 척할 필요가 없지 않소?”
독수약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목소리는 싸늘했다.
“강호의 친구들은 모두 심목풍 심대장주를 가리켜 정이 차고 의
리에 경박하다고 한다. 그러나 노부와 그는 정리가 깊고 교분이 돈
독했다. 오늘의 국세는 아마도 내가 나가 수습하여야 할 것이니..”
그는 잠간 말을 끊었다가 갑자기 목청을 돋구었다.
“심형, 이 형제가 보입니까?”
어둠 속에서 심목풍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미 보았네.”
얼음같이 차고 잔잔한 소리였다.
독수약왕은 심목풍이 더 말할 여유도 주지 않고,
“심형은 아우에 대하여 잘 알고 있을 것이외다. 내 딸 완아는 바
로 이 동생의 생명이오. 여기선 소영이 수차 딸애의 목숨을 구한
연고로 아우는 부득불 그에게 보답해야 하오.”
“흥! 조카딸의 병세는 이제 불치병으로 낙인이 찍혔는데 그 누가
그 애를 고칠 수 있단 말인가? 소삼제 역시 마음이 있다 해도 능력
은 없을 것이오.”
“사정은 심형이 추측한 바와 다르오. 소형은 죽음을 무릅쓰고 여
아를 위해 영약을 찾아 내었소. 이미 딸애의 고질병은 완전히 치료
되어 앞으로 열흘이나 보름 정도만 휴식한다면 보통 사람과 같아질
것이외다.”
“그렇다면 이 형은 그대에게 축하술을 드려야겠군!”
잠시 침묵이 흘렀다.
독수약왕은 잠시 생각을 굴리고 나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서로의 의가 금란으로 하여 맺어졌고, 이후 친분이 보통
이 아니었소이다. 또한 이 아우는 당신을 위해 많은 심력을 기울여
왔소이다. 백화산장이 오늘의 성황을 이룬 것도, 또 근 천여 명의
죽음을 돌보지 않는 무사들을 거느리게 된 것도…. 비록 이 아우
가 으뜸의 공을 차지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그러나 하나, 둘 수를
따지자면……”
심목풍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옳은 말이오 그대는 나를 위하여 백화산장의 기업을 닦은 셈이
오. 그러니 설마 그대가 타인을 위하여 그 닦여진 기반을 흔들려고
는 하지 않을 것이오.”
“그것을 이 아우가 어찌 감히…..”
독수약왕은 얼른 심목풍의 말을 가로막고는 휴우 숨을 내쉬었다.
“하오나 아우는 심형에게 한 가지 청구할 일이 있소이다.”
“말하라!”
독수약왕은 또 잠깐 침묵하였다가 입을 열었다.
“소형은 딸애의 목숨을 살려 주었소이다. 그러므로 아우는 소형
의 부모를 구출하기에 이른 것이오. 지금 만일 심형이 이 포위를
열어 이들을 가게 한다면 아우는 이로써 빚을 완전히 청산하게 되
는 것이오. 그 이후는 다시 우리는 좋은 형제지간이 될 수 있으리
라. 그리고 난 후 아우는 전심전력으로 딸애의 몸을 보살펴 불과
삼 년 내지 오 년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그녀를 무림에 둘도 없는
고수로 만들 것이오. 그리하여 우리 부녀는 전력으로 심형을 도와
무림을 제패하려는 대업을 완성시킬 것이외다.”
“하하…. 삼 년 내지 오 년이란 세윌이 비록 짧지는 않다고 하
나 나 심목풍은 그대를 기다릴 수 있소. 그러나 당장 무림 중의 각
대문파에서는 기다려 주지 않을 것이오. 나 심아무개가 보는 바로
는 삼 년 이내에 무림의 대국은 결정을 보아 혹시 그대가 나의 시
체 앞에 와서 추위에 떨고 있어야 할지 모르오.”
“그렇다면 심형은 소제의 체면을 생각해 주지 못하겠단 말이오?”
돌연 손불사가 큰 소리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 때는 그 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당년에 그대 독수약왕은 백
화산장을 위하여 고기를 기르는 물이며, 말을 살찌게 하는 여물이
되었지.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네. 지금 백화산장에는 날갯죽지를
단 무사가 구름같이 많소. 그러니 독수약왕은 전처럼 중요한 존재
는 아니오. 결국 이처럼 의미없는 입씨름을 할 것이 아니라 이 늙
은 거지는 약왕 당신더러 때를 모르는 늙은이라 할 수밖에 없군.”
“흥!”
독수약왕은 코웃음을 치고,
“우리 형제의 일에 그대 거지가 쓸데없이 참견할 건 없다.”
심목풍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영은 나의 조카딸을 구해 주었다. 그대는 또한 열두 명의 무
사를 독으로 죽이면서 소영의 양친을 구하였다. 이로써 피차의 빚
은 청산되었다고 생각지 않는가?”
약왕은 헛기침을 토해 내고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사람을 구하려면 살게끔 구해야 하는 것이오. 제가 소형의 양친
을 구해 준 이상, 다시 심형에게 사로잡혀 백화산장으로 달아나는
것을 원치 않소이다. 그러나 오늘밤 심형께서 주위에 둘러선 무사
들로 하여금 포위를 풀게 해 준다면 이후는 다시 소형의 일로 입씨
름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외다.”
독수약왕의 어조는 제법 강경했다.
심목풍은 낮게 신음소리를 토해 내고는 기분나쁜 음성으로 다시
힐난하였다.
“아우는 무슨 연고로 이렇게 선심을 쓰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