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 Finger RAW novel - Chapter 83
83. 향기를 풍기는 짐승
소영은 그 흑의괴인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자 속으로 이렇게 생각
했다.
‘이런 두 개의 독한 혹이 달렸으므로 스스로 자기의 추한 모습이
부끄러워서 사람을 만나기를 꺼리는 모양이다. 그래서 이 원시림
속에 숨어서 사는구나. 이런 사람의 성질은 괴상하기 마련인 것이
다. 그렇다면 내가 양보해야지.’
소영은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은 저희들과 아무런 원한 관계가 없으니 결코 침해할
마음은 없으시겠지요?”
그 괴노인은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노부는 이미 이곳에서 열여덟 사람을 죽였는데 이제 그대들 두
사람까지 합하면 꼭 스무 명이 되는구먼. 전에 죽은 사람들도 나와
결코 아무런 원한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었지.”
소영은 이 말을 듣자 어처구니가 없어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
다. 소영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 사람이 이토록 잔인하니 여기에 계속 남겨 두어서 사람을 해
치게 해서는 안 되겠구나.’
상팔은 한바탕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우리가 노형의 금지(禁地)에 들어 왔으니 당신에게 피살되는 것
은 마땅하다고 칩시다. 그러나 우리가 죽기 전에 노형에게 한 가지
물어 볼 말이 있소. 아낌없이 가르쳐 주시기 바라오. 그러면 우리
는 이곳에서 노형의 손에 죽는다 하더라도 그 은혜는 구천에서라도
잊지 않겠소.”
그 노인은 냉랭하게 웃었다.
“좋소 말해 보시오.”
상팔이 말을 이었다.
“어젯밤에 어떤 사람이 노형의 이 금지를 지나갔는데 노형은 알
고 계시오?”
노인은 역시 냉랭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누구든 이곳을 지나갔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죽음을 당했을
거요.”
상팔이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죽었다고 하더라도 시체는 이 자리에 남아
있어야 할 게 아니오?”
노인은 그제서야 고개를 가로저었다.
“삼 년 이래에 두 분은 처음으로 이곳에 도착한 사람이오.”
상팔은 어리둥절했다. 도무지 노인의 말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상팔은 애원하듯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몇 명의 도적을 추격하다가 이곳에 이른
것이오. 사실은 이 개가 길을 인도한 것이오. 만약 사람이 이곳으
로 지나가지 않았다면 이 개 역시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하지는 않
았을 것이오. 노형은 한번 잘 생각해 보시오. 우리는 모두 같은 무
림의 친구이니 노형께서는 좀 가르쳐 주시기 바라오.”
노인은 그 말에 화를 벌컥 냈다.
“노부와 교분을 맺으려 하지 마오. 노부는 일평생 어떤 친구도
사귄 적이 없소.”
소영은 화가 치밀어 올라 날카롭게 외쳤다.
“우리들은 개가 길을 안내하여 이곳까지 추격해 왔으니만큼 절대
로 틀림이 없을 것이오. 그런데 그대는 한마디 말로 부인하는 것을
보니 아마 그 사람들과 한 패인 것 같소.”
노인은 화가 잔뜩 났다. 그는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럽쇼! 이 녀석, 간덩이 한번 크구나. 노부에게 그처럼 무례하
게 대하다니……”
노인은 말을 함과 동시에 장풍을 뻗쳐 냈다.
소영은 곧 좌장을 뻗쳐 맞서 갔다. 쌍장이 맞부딪치자 펑! 하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두 사람은 각각 일 보씩 뒤로 밀려났다.
소영은 속으로,
‘이 늙은이의 장력이 이처럼 원숙해 있으니 절대로 얕봐서는 안
되겠구나!’
생각하고 스스로 경각심을 높였다.
노인은 적이 놀란 듯한 시선으로 소영을 한참 동안 바라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녀석! 대단한데…..”
“무엇이 대단하오?”
흑의노인이 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부는 여기서 수십 년 동안 살아 오면서 이 연못가에 접근해
오는 사람들을 십팔 명이나 죽였지만 한 번도 노부가 연속 이 장을
쳐내 본 적이 없었다.”
소영은 비꼬듯 말했다.
“그래서 놀랐단 말이오?”
상팔이 하하 하고 웃어젖혔다.
“노형의 손바닥이 흡사 피로 물든 것처럼 새빨간 것을 보니 노형
은 틀림없이 홍사장(紅沙掌)을 익혀 왔구료?”
흑의노인이 대답했다.
“그렇소. 이 수십 년 내에 내 홍사장으로부터 목숨을 건진 사람
은 한 사람도 없었소.”
흑의노인은 우장을 들어 다시 쳐내려 했다.
“잠깐만!”
흑의노인은 쳐다 보며,
“할 말이 뭐요?”
상팔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형은 그동안 열여덟 명의 사람을 죽이면서 그것도 모두 일장
으로 해치웠다고 하지 않았소. 그러나 오늘의 일장은 이미 과거의
예를 깨뜨렸을 뿐만 아니라 소대협에게 약간의 상처조차도 입히지
못했으니 앞으로 누가 누구의 손에 죽을지 모르는 일이 아니오? 만
약 다시 싸워서 우리들이 노형의 손에 피살된다면 스물의 숫자를
무난히 채울 수 있지만 반대로 노형께서 우리들의 손에 부상이라도
입는다면 그야말로 밑지는 장사가 아니겠소?”
흑의노인은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노부는 절대로 그대들의 손에 부상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소.”
그는 오른손을 휘둘러 다시 소영의 가슴을 향해 일장을 쳐냈다.
소영은 속으로,
‘이 늙은이를 굴복시키지 않으면 절대로 사실을 토해 내지 않을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소영은 오른손을 재빨리 뻗쳐 손가
락으로 그 노인의 완맥을 노려 찍어 가며, 왼손으로는 다급히 일장
을 쳐냈다.
흑의노인은 비록 생김새는 보잘것 없이 추하게 생겼지만 무공은
만만치 않았다. 그 쌍장의 공세는 날카롭기 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원숙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소영은 다시 연환섬전장법을 펼쳐 공격을 개시했다. 그리하여 이
십여 합을 겨룬 후에는 소영이 차츰 우위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소영이 이처럼 우위를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지난날 배워 두었
던 남일공의 연환섬전장법에 의한 것이었다.
이 연환섬전장법이란 장법 중의 정화(精華)로 그 초식마다 남일
공의 심사숙고한 심혈의 결정이 서려 있었다. 말하자면 남일공은
필생의 정력을 모두 이 장법의 연구에 기울였던 것이다.
거기에다 소영은 수정을 가하여 지금 소영이 발출하고 있는 장법
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 장법은 전연 격파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장법만으로도 소영은 한때를 주름잡을 수 있는 것이다.
흑의노인은 이 젊은이의 장법이 이처럼 신기할 줄은 꿈에도 생각
하지 못했다. 흑의노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속으로 약세를
느끼면서 몇 초를 지탱해 보았지만 소영의 질풍같이 밀려 오는 장
풍에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소영은 속으로 부모님이 걱정되어 오래 싸움을 끌고 싶지 않았
다. 그래서 암암리에 수라지력을 운기하여 격투를 벌이면서 갑자기
손가락 한 개를 뻗쳐 지풍을 몰아쳤다.
흑의노인은 이때 눈코뜰 새 없이 장풍을 막기에만 바빴으므로 소
영이 암암리에 쳐낸 지풍을 방비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소영이
쳐낸 지풍에 장문(章門) 요혈이 찍히고 말았다. 소영의 지력은 너
무도 강했으므로 노인은 더 버틸 수가 없었다. 곧 다리에 힘이 쭉
빠져 노인은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상팔이 야유하듯 말했다.
“당신은 열여덟 명을 죽인 보답을 오늘에야 비로소 톡톡히 받고
말았구료.”
상팔은 오른손을 내밀어 흑의노인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면서 말
을 이었다.
“그대가 만약 두 사람을 더 죽여 스물의 숫자를 채우고 싶다면
이제 단 한 가지 방법밖에 없소.”
흑의노인은 혈도를 찍혔지만 말은 할 수 있었다.
“무슨 방법이오?”
상팔은 곧 대꾸했다.
“내가 묻는 말에 사실대로 대답만 하면 되오. 만약 한 마디라도
거짓말이 섞였다가 나에게 들키는 날이면 그 때는 진짜 혼이 나고
말 거요.”
노인의 위인은 비록 냉랭하고 오만하지만 죽음은 두려운지 연거
푸 네, 네, 하고 대꾸했다.
“어서 말씀해 보시오. 노부가 알고 있는 것이라면 모두 알려 드
리겠소.”
상팔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어젯밤과 오늘 아침 사이에 이곳을 지나간 사람이 었었지요?”
흑의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이곳을 지나치려면 노부 몰래는 갈 수 없
소이다.”
상팔은 우격다짐으로 다시 물었다. 그러나 노인은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지난 삼 년 동안에 이곳을 지나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
소이다.”
흑의노인은 소영과 상팔을 훑어 보면서 입을 열었다.
“두 분이야말로 이곳에 온 유일한 사람이오.”
상팔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보아하니 톡톡히 쓴 맛을 보지 않고는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
을 모양이군.”
상팔은 곧 오른손의 식지를 내밀어 그 노인의 왼쪽 뺨에 붙은 큰
혹을 찔렀다. 노인은 매우 아픈 듯 비명을 지르며 이마에는 식은
땀이 배어 나왔다. 아마도 혹은 노인의 몸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인
듯 아픔을 금치 못했다.
상팔이 다그쳐 물었다.
“말하겠소, 안하겠소?”
노인은 줄곧 아픔을 참느라고 오만상을 찌푸리면서도 입으로는
한결같은 대답을 했다.
“분명히 지나간 사람이라곤 없었소.”
소영은 양미간을 찌푸렸다.
“우리는 영견(靈犬)의 안내를 받아 이곳까지 왔소. 만일 지나간
사람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알고 이곳까지 왔겠소?”
흑의노인은 개를 한참 동안 바라 본 후 입을 열었다.
“그 연유는 이러하오. 이곳에서 서식하는 이상한 짐승이 있는데
그 짐승이 발산하는 기이한 향내를 맡고 개가 유인돼 온 거요.”
상팔이 되물었다.
“무슨 짐승이길래 향내를 발산할 수 있단 말이오?”
흑의노인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 이름은 노부가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놈이 지나간 후면
반드시 이상한 향기가 로에 스며들지요. 그래서 그놈이 나타날 때
마다 반드시 많은 호랑이나 표범 종류의 맹수들이 뒤따라 왔어요.
하지만 그놈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지요.”
상팔은 다그쳐 물었다.
“그렇다면 그 이상한 짐승은 지금 어디 있소?”
흑의노인은 어물어물하며 밝히려 들지 않았다.
상팔이 단호하게 말했다.
“좋아, 기어코 맛을 봐야겠군!”
상팔은 오른손을 날려 다시 그 사람의 혹을 향해 찔러 갔다. 상
팔은 원래 태어날 때부터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그는 두구의 험상
궂은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아무리 화를 내고 있을 때라도, 도무지
그 표정에는 노기가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자 흑의노인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
“노부가 바른 말을 하리다.”
상팔은 속으로 우스움을 금치 못했다. 처음에 이 사람을 보았을
때는 그 기세가 자못 등등하여 천하라도 호령할 만한 위인인 것 같
았다. 그러나 막상 죽음이 눈앞에 다가 온다고 생각하니 그는 질겁
을 하며 얼간이가 되고 만 것이다.
소영은 그 흑의의 두 혹이 한쪽에서는 피가 흐르며, 다른 쪽에서
는 고름이 질질 흐르는 것을 보자, 그가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소
영은 상팔을 바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놓아 줘서 천천히 얘기하도록 하오.”
상팔은 소영의 말이 떨어지자 곧 그의 멱살을 놔 주었다.
“당신이 만일 다시 또 바른 말을 하지 않고 허튼수작을 한다면
이번에는 당신의 혹 두 개를 몽땅 잘라 버리겠소.”
흑의노인은 한바탕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이상한 짐승은 여기서 십 리 가량 떨어진 흑혈(黑穴) 속에
서식하고 있소.”
상팔이 다그쳐 물었다.
“흑혈이란 무엇을 말함이오?”
흑의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흑혈의 내력은 노부 역시 모르고 있소. 그러나 그 앞에 세워둔
비석에 흑혈이란 두 글자가 씌어져 있어 노부도 그대로 부를 따름
이오.”
상팔이 말을 받았다.
“좋소. 그야 어쨌든 말을 계속하시오.”
“그 비석 아래에는 동굴이 하나 있지요.”
흑의노인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이 밀림 속에는 원래 햇빛이 잘 통하지 않는다오. 그 흑혈은 매
우 깊은 동굴이어서 몇 자 정도만 걸어 들어 가도 무척 어두워 지
척을 분간할 수가 없게 되오.”
상팔이 말을 가로채었다.
“당신은 거기에 가 본 적이 있소?”
흑의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노부가 그 흑혈에 가지 않았다면, 지금 양쪽 뺨에 붙어 있
는 이 보기 흉한 혹도 생겨나지 않았을 거요.”
소영은 그 말을 듣자 어리둥절했다.
“대체 어찌 된 영문이오?”
흑의노인은 말을 계속했다.
“이 얘기는 이미 십여 년 전의 일이오. 노부가 그 이상한 짐승을
쫓아 흑혈에 들어 갔었소. 그러나 동굴 속에서 일장 정도 걸어 갔
을 때 나는 어떤 사람에 의해 혈도가 찔려 버렸소……”
소영은 그 말을 듣자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그 흑혈 속에 사람이 들어 있었단 말이오?”
흑의노인의 대답은 이어졌다.
“그 사람이 흑혈에 살고 있는지의 여부는 노부도 단정지을 수 없
지만, 그러나 노부가 그에 의해 혈도가 찔린 후 두 사람이 주고받
는 대화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소. 남자와 여자의 음성이 들려 왔기
때문에 두 사람이라는 것을 곧 알 수 있었소.”
상팔이 말을 가로챘다.
“그렇다면 노형의 얼굴에 붙은 이 두 개의 혹은 날 때부터 있었
던 게 아니란 말이오?”
“그렇소. 노부의 양 뺨에 붙은 이 두 개의 혹은 그들의 소행이
오. 그들이 무슨 독물을 내 얼굴에 바르자 곧 이 두 개의 독혹이
생겨난 것이오.”
흑의노인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런데 그 중 남자는 나를 죽일 참이었지요. 하지만 여자가 내
목숨을 살려 주어 이곳에서 그들을 위해 이 연못을 지키도록 하자
고 고집을 피웠던 것이오.”
고영이 호기심이 동하는 듯 다시 물었다.
“그 남녀의 생김새는 어떠했소?”
흑의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노부는 줄곧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소.”
상팔이 다시 물었다.
“그대는 어째서 도망가지 않았소?”
흑의노인은 천천히 대답했다.
“내 양 뺨에 이처럼 보기 싫은 혹이 생겨나 하루종일 고름과 피
가 질질 흘러 내리는데 어찌 또 세상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겠소.
하물며 이, 삼 개월마다 한 차례씩 약물을 복용하지 않으면 양 뺨
의 혹은 갑자기 부어 올라 그 아픔이 뼈를 에이는 듯하오. 그러므
로 내가 가령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을 겁내지 않고 이곳에서 도망
친다고 해도 이 혹이 발작하면 복용할 약물이 없으므로 죽음을 면
할 수 없을 것이오.”
소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알고 보니 그랬었군요.”
상팔이 말참견을 했다.
“그러면 삼 개월마다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한 번 복용할 해약을
가져다 주는군요.”
흑의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하지만 사람이 가져 오는 게 아니오.”
소영은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사람이 가져다 주지 않는다면 무엇이 가져 온단 말이오?”
흑의노인은 천천히 대답했다.
“한 마리의 흰 원숭이가 가져 오지요.”
소영은 상팔을 한 번 바라 본 다음 손을 내밀어 그 노인의 혈도
를 되살려 주었다.
“알고 보니 당신도 남에게 이용을 당하고 있는 불쌍한 신세이군
요. 하지만 당신이 이곳에서 계속 열여덟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너
무 잔혹한 일이 아니오?”
흑의노일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노부 역시 어쩔 수 없었소. 그 흑혈의 주인이 어떤 사람이든 이
연못의 십 장 이내에 접근해 오는 사람은 다 죽여야 하며 절대로
한 사람이라도 살려 보내서는 안 된다고 나에게 분부를 했소. 만약
노부가 그의 분부를 거역하는 날에는 약물을 보내 주지 않는다고..
…”
상팔이 불쑥 입을 열었다.
“당신은 흑혈로 가는 길을 알고 있지요?”
“알고는 있지만 이제는 다시 갈 수 없게 되었소.”
상팔이 말을 이었다.
“우리들과 함께 갑시다. 우리들이 당신의 신변을 보호해 줄 테니
까….”
흑의노인은 두 눈이 휘둥그래지며 두 사람을 한참 동안 지켜 보
았다.
“두 분의 무공이 비록 높기는 하지만 그 흑혈의 주인과는 상대하
기 힘들 것이오.”
상팔은 한바탕 코웃음을 쳤다.
“당신은 가고 싶든, 안 가고 싶든 어차피 가야 하오. 그대가 만
약 가지 않으려 한다면 우리는 억지로 끌고 가는 수밖에 없소.”
흑의노인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결국 그대들이 그 남녀를 만난다면 생명을 잃게 되기 마련인데
그렇다면 나도 덩달아서 죽어야 하는 결과가 되지 않소.”
상팔이 윽박질렀다.
“그대는 살아 봤자 앞으로 남의 노예로밖에 살 수 없으니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속시원하지 않겠소?”
흑의노인은 그 말을 듣자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마치 쇠망치로
머리를 얻어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이십여 년 동안 노부가 어찌 이 일을 생각해 내지 못했을까?’
상팔이 다그쳐 물었다.
“이제야 생각이 트였소?”
흑의노인은 침착한 목소리로 천천히 대답했다.
“당신의 한마디 말이 나를 깨우쳐 주었소.”
소영이 다짐을 했다.
“그럼, 우리들을 데리고 가겠다는 말이군요.”
“좋소. 그대들을 데리고 가든 안 가든 죽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
소영은 조금 전 흑의노인이 그처럼 죽음을 겁내던 꼴을 생각하자
실소가 흘러 나왔다.
상팔은 흑의노인에게 공수를 하면서 예를 표했다.
“노형의 존함은? 우리들은 아직 통성명을 하지 않았군요.”
“소제는 왕방(王方)이오.”
상팔은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바로 구두표자(九頭豹子) 왕방이시군요.”
왕방은 끄덕였다.
“그렇소. 귀하는?”
“금산반 상팔이오.”
왕방이 다그쳐 물었다.
“중주이고…..”
상팔이 말을 받았다.
“바로 맞았소. 중주이고 중의 첫째요. 왕형은 무림인들과의 왕래
가 그동안 없었으며 줄곧 혼자서 지내 왔는데 용케도 저의 형제들
을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왕방은 한바탕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일생 동안 친구 사귀기를 싫어하고 게다가 이런 밀림 속에
서 십여 년 간이나 파묻혀 있었으므로 성격이 너무도 괴팍하게 변
해 버렸소. 그래서 조금 전에 많은 무례를 범했는데 두 분께서는
너무 허물하지 말아 주십시오.”
상팔은 하하 하고 웃어젖혔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허물없이 대하지 않았소. 그런데 왕형은 어
째서 여태껏 친구 하나도 사귀지 않았습니까?”
왕방은 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원래 강호를 종횡무진하며 떠돌아 다녔으므로 친구를 사귈
여가가 없었고 밀림 속에 갇힌 후부터는 더욱 혼자서 살아 왔으니
까…..”
상팔은 빙그레 웃었다.
“그래서 왕형은 지금 두 명의 친구를 사귀려 하는구료.”
왕방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러나 소제는 너무도 추한 모습이어서……”
상팔이 말을 가로챘다.
“왕형께서 만약 싫어하지 않으신다면 소제는 왕형과 한번 사귀고
싶소.”
그 말을 듣자 왕방은 기쁜 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게 정말이오?”
상팔이 거들었다.
“정말이지 않구요.”
왕방이 무슨 대꾸를 하려는데 갑자기 어디서 이상한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소영은 놀란 표정으로,
“무슨 소리요?”
하고 물었다. 상팔의 앞에 웅크리고 앉았던 개가 별안간 왕! 하
고 짖으며 빠른 속도로 앞을 향해 달려 갔다.
왕방이 다급히 말했다.
“상형! 어서 개를 못 가게 막으시오. 그 짐승이 곧 여기에 나타
날 거요.”
상팔이 양손으로 입을 벌리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날쌔게
달려 가던 개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상팔의 곁으로 되돌아 왔다.
소영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조금 전의 개 짖는 소리에 놀라 혹시 그 짐승이 놀라서 도망가
지나 않았을까요?”
“그 짐승은 삼 일 만에 한 번씩 이 연못에 와서 목욕을 하지요.
오늘 그 짐승이 목욕을 하는 날이니, 우리들은 곧 숨어야 하오.”
상팔은 그 말을 듣자 개를 부등켜 안고 커다란 나무 뒤에 가서
숨었다. 소영과 왕방도 역시 뒤따라서 몸을 숨겼다.
이들이 막 몸을 숨기자마자 곧 한 줄기의 이상한 향내가 바람을
타고 풍겨 왔다.
왕방이 소영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그 짐승이 곧 나타날 거요.”
소영은 시선을 모아 주위를 살피다 밀림 속에서 흰 털이 보기 좋
게 자란 사슴 비슷하기도 하고 또한 양 같기도 한 이상한 짐승 한
마리가 천천히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 짐승은 연못가에 다다르자 한참 동안 연못의 물을 멀거니 바
라 보고 있다가 갑자기 풍덩 연못 속으로 뛰어 들어 갔다.
소영이 낮은 목소리로 왕방에게 물었다.
“이 짐승이 무슨 쓸모가 있소?”
“무슨 쓸모가 있는지는 소제 역시 잘 모르지만 제가 알기로는 그
흑혈의 주인은 이 짐승을 상당히 귀여워하고 있는 것 같소.”
소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소! 우리가 만약 저 짐승을 잡을 수만 있다면 그 흑혈의 주
인은 틀림없이 우리들을 추적해 올 거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일부
러 그 흑혈에 들어 가서 그들을 찾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을 거요.”
왕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제 역시 그렇게 생각되기도 하오만, 속단할 수는 없구료. 그
흑혈의 주인이 이 짐승을 끔찍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십 년 동안
의 관찰로써 아는 바이지만 그러나 십 년 동안에 흑혈의 주인은 한
번도 흑혈에서 나오지 않았으니 우리가 가령 짐승을 사로잡더라도
그를 유인해 낼 수 있을는지….”
이때 갑자기 밀림이 떠나 갈 듯한 날카로운 포효소리가 들려 왔
다. 소영은 그 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무슨 소리요?”
“한 마리의 사자요. 이 짐승이 목욕할 때마다 진기한 여러 가지
짐승들이 몰려 오곤 하지요. 소제는 비록 그 동안에 혼자서 고독을
되씹으며 살아 왔지만 한편으로는 기괴한 짐승들을 많이 볼 수 있
었소.”
왕방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한바탕 괴상한 소리가 공중에서 들
려 왔다. 소영은 큰 나무 뒤에 숨어서 고개를 쳐들어 공중을 바라
보았다.
화려한 빛깔의 날개를 지닌 한 마리의 거대한 새가 유유히 연못
가에 있는 작은 나무 위에 내려 앉았다.
왕방이 설명을 덧붙였다.
“저 새는 수콩작이오. 원래 암수 두 마리가 있었는데 암놈은 어
디로 날아가 버렸소. 아니 혹시 어디서 어린 새끼를 기르고 있는지
도 모르오. 이미 보름 전부터 나타나지 않았소.”
소영은 속으로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상한 짐승의 몸에서 풍기는 향기가 어찌 이다지도 강렬하단
말인가? 이처럼 많은 새와 짐승들을 모을 수 있을 만큼…..’
소영이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귀가 따가울 정도로
여러 종류의 새소리가 공중을 가득 채우며 연거푸 수십 마리의 기
이한 새들이 밀림 속에서 날아 나와 연못가에 내려 앉았다. 이 불
가사의한 정경을 바라 보고 있던 소영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해 보는 것이었다.
‘이 짐승은 이처럼 많은 짐승을 끌어 모을 수 있는 힘을 가졌으
니 정말 신기하기도 하구나! 내가 만약 저 짐승을 잡아서 훗날 악
누나를 만났을 때 노리갯감으로 준다면 악누나는 매우 기뻐할 텐
데…..’
다시 한바탕 성난 포효가 울려 퍼지면서 털이 곱슬곱슬한 사자
한 마리가 연못가로 다가 와서 잔디밭 위에 엎드렸다.
소영은 암암리에 운기를 하여 잔뜩 경계했다. 왼손으로 품 속을
더듬어 한 개의 동전을 꺼내서 손에 쥐었다. 사자가 행동을 취하기
만 하면 곧 출수하여 상대할 생각이었다.
이때 왕방이 낮은 소리로 일러 주었다.
“소대협은 안심하시오. 이 짐승의 또 한 가지 신기한 점은 어떠
한 맹수든 간에 이 짐승을 보는 순간부터는 매우 유순하게 되어 도
무지 그 짐승을 해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오.”
소영은 의아한 듯 반문했다.
“정말 그렇소?”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그 흰 털을 가진 이상한 짐승은 갑자기 연
못에서 껑충 뛰어 나와서 곧장 서쪽을 향해 달려 갔다.
왕방이 급히 입을 열었다.
“야단났소. 이 짐승은 맹수와 흉조(凶鳥)는 무서워하지 않지만
사람을 제일 두려워하고 있소. 더욱이 이놈의 귀는 민감하기 짝이
없어 우리들이 한 말을 다 들은 것 같소.”
소영이 재빨리 뛰어 나왔다.
“어서 뒤쫓아 갑시다.”
소영은 진기를 끌어 모아 연못을 단숨에 뛰어 넘었다.
이때 상팔 또 한 나무 뒤에서 뛰어 나왔다. 상팔이 데리고 있던
개가 컹컹 짖으면서 곧장 사자를 향해 덤벼 들었다. 그러자 그 털
이 곱슬곱슬한 사자는 한바탕 으르렁거리면서 개를 향해 마주 덤벼
들었다.
이때 소영은 이미 맞은편 언덕에 당도하였다. 성난 사자가 눈을
부라리는 것을 보고 개가 사자에게 이기지 못하리라 염려하여 오른
손을 날려 수중의 동전을 재빨리 쳐냈다.
그 수법은 매우 정확할 뿐만 아니라 그 위력 또한 대단한 것이었
다. 그리하여 동전은 비호같이 날아 사자의 왼쪽 눈을 명중시켰다.
순간 사자는 아픔을 참지 못하여 비명을 지르듯 으르렁거리더니 방
향을 바꾸어 도망쳐 버렸다.
이 소리에 놀라 수십 마리의 진기한 새들이 모두 푸드덕 날개소
리를 내며 일제히 날아 밀림 속으로 들어 갔다.
소영은 앞장 서서 그 이상한 짐승을 뒤쫓았다. 상팔과 왕방도 소
영의 뒤를 따라 달려 갔다.
그러나 밀림이 워낙 무성하여 소영은 경공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
했다. 그래서 그만 그 짐승의 모습을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한 줄기의 향내만은 아직도 코 속에 스며들고 있었다. 다
행히 개가 후각이 예민하므로 이번에는 개가 앞장 서서 길을 인도
했다.
이윽고 그들의 눈앞에 전개된 풍경은 돌변했다. 갑자기 시계가
환히 트이며 이 울창한 원시림 속에 텅 빈 공간이 나타났다.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상팔은 이 공지의 넓이는 직경이 십 장
정도는 되리라고 측정했다.
이 공지에는 부드럽고 무성한 풀이 가득 자라나 있었다. 사방에
빽빽이 들어차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고목의 밀림과는 전연
딴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소영은 왕방을 돌아 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은 도대체 어느 곳이오?”
왕방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 역시 이곳에는 와 본 적이 없었소.”
하고 대답했다.
소영이 다시 물었다.
“이곳이 혹시 흑혈이 아니오?”
왕방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흑혈은 한 그루의 커다란 노송 아래 있소. 거기에도 공지가 있
긴 하지만 노송의 가지와 잎사귀에 짙게 가려져 햇빛을 볼 수가 없
소.”
상팔이 입을 열었다.
“개를 놓아서 그 짐승을 찾도록 해 봅시다. 이곳은 그 짐승이 서
식하는 곳인지도 모르오.”
상팔은 개가 마구 날뛸까 봐 개를 붙잡고 있었다.
소영이 대답했다.
“급히 서두르지 마오.”
소영은 몸을 굽혀서 푸른 풀을 한 움큼 뜯어 손바닥에 올려 놓
고, 그 풀을 한참 동안 들여다 보았다.
이윽고 소영은 입을 열었다.
“왕형께서는 그동안 이 밀림에서 이십여 년 동안 살아 오시면서
이처럼 부드러운 풀을 본 적이 있소?”
왕방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지 못했소.”
상팔도 몸을 굽혀 역시 풀을 한 움큼 뜯어 쥐었다.
“이 풀은 매끄러우면서도 솜같이 부드럽군요.”
소영이 말을 받았다.
“문제는 바로 여기 있소. 이처럼 고목이 하늘을 찌를 듯이 울창
한 원시림 속에 이런 풀이 자랄 리 있겠소? 분명히 이 풀은 다른
곳에서 옮겨다 심은 것이오.”
상팔이 말참견을 했다.
“그렇소. 이곳은 확실히 이상한 곳이오.”
소영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 풀을 제외하고는 조금도 다름 없는 밀림이 들어차 있으니 문
제의 핵심은 바로 이 풀밭에 있는 것이오.”
상팔이 말을 받았다.
“그렇소. 바로 이 풀밭에서 우리는 어떤 비밀을 캐 낼 수가 있을
것이오.”
소영은 들고 있던 장검을 휘둘러 한 곳의 풀을 베고 그 아래를
살펴 보려고 했다. 바로 이 때였다. 어디선지 무겁고 칭착한 목소
리가 들려 왔다.
“이 풀 밑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악독한 물체가 양육되고 있소.
당신의 무공이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지만 감히 그것들과 대항할 수
가 있을는지?”
이 소리는 너무도 뜻밖이었으므로 소영과 상팔 모두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이들이 천천히 소리나는 곳을 바라 보자 바퀴 달린 의자
하나가 서서히 밀림에서 굴러 나오고 있었다.
그 의자는 매우 이상했다. 의자의 네 귀퉁이에는 대나무 기등이
서 있었고 기둥과 기둥 사이는 푸른 비단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리
고 그 의자에는 남색 장삼을 입고 머리에는 유건을 쓴 안색이 창백
한 중년 사내가 앉아 있었다.
소영은 이를 보자 매우 이상한 생각이 들어 낮은 소리로 상팔에
게 속삭였다.
“저 사람은 매우 이상하군요. 어째서 의자의 사면을 휘장으로 가
리고 있을까요?”
“아무튼 이 밀림 속에는 괴상한 일이 무척 많으니 우리들은 십분
유의해야 할 겁니다.”
그 사람은 굴러 다니는 의자를 밀어 풀숲가를 돌아 상팔 등이 있
는 곳에서 일장의 거리에 다다랐다.
상팔이 소영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이 사람이 풀숲을 지나서 오지 않고 풀숲가를 빙 돌아서 오는
것을 보니 이 풀 속에는 틀림없이 어떤 비밀이 있는 것 같소.”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요.”
그들은 의자 위에 앉아 있는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무릎
위에는 한 장의 붉은 담요가 덮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한 개
의 그물이 놓여 있었다. 그의 이와 같은 차림은 볼수록 이상하기만
했다.
상팔은 몇 번 잔기침을 한 다음 공수를 하며 입을 열었다.
“이곳은 친구의 거주지입니까?”
그 사람은 처음에는 고개를 가로저어 부인을 하다가 다시 고개를
끄덕여 수긍을 하며 훅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요.”
상팔은 소영을 힐끗 쳐다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친구의 말뜻은 좀 모호하군요. 똑똑히 말해 줄 수 없겠소?”
그 사람은 말을 이었다.
“이곳은 내 거주지가 아니오.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 오 년 이상
이나 살아 왔소. 그러니 내 거주지라고 할 수도 있지 않겠소?”
상팔은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군요. 정말 일리 있는 말이오.”
소영은 그 위인이 매우 부드러우며 처음 볼 때의 괴상한 인상과
는 딴판이므로 곧 포권을 하고 입을 열었다.
“친구의 존함을 물어 봐도 좋소?”
그 사람은 대꾸했다.
“나의 성은 장이며 이름은 자안(自安)이오.”
소영은 말을 받았다.
“오오! 장형이었군요. 저는 소영이오.”
장자안이 말을 이었다.
“아아! 여러분은 내가 오 년 만에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오. 나는
그 동안에 줄곧 맹수들과 진기한 새들만 보고 살았소.”
소영이 말을 받았다.
“장형의 말투를 들어 보니 장형은 자원해서 이곳에 사는 것이 아
닌 것 같은데요?”
장자안은 갑자기 무릎을 덮은 담요를 걷었다.
“내 양 다리는 이처럼 이 의자에 묶여져 있어서 한 발자국도 걷
지 못하오. 여기는 밀림 속이라 이 굴러 다니는 의자 역시 이 공지
에서만 왔다갔다 할 수 있을 뿐이오.”
소영은 그에게로 시선을 돌려 자세히 바라 보았다. 그의 다리는
쇠가죽으로 만든 질긴 끈으로 꽁꽁 묶여져 있었는데, 오래된 탓인
지 그 끈은 자흑(紫黑)색으로 변해 버렸다.
소영은 그 광경을 바라 보자, 이 끈은 비록 견고하지만 몸에 무
공을 지닌 사람이라면, 사 오 년의 내력으로 충분히 끊을 수 있으
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영은 곧 입을 열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장형은 왜 다리의 끈을 끊도록 노력해 보지
않았소?”
장자안은 소영을 한 번 훑어 보더니 하하 하고 웃어제쳤다.
“소형과 이 분들은 모두 무림의 고인인 것 같구료…..”
상팔이 대답했다.
“내 변변치 않은 무공은 약간…..”
장자안이 말을 이었다.
“내 다리를 묶어 놓은 이 끈은 여러분의 눈으로 볼 때는 별로 대
단한 것이 못 되지만 닭 한 마리도 제대로 잡을 힘이 없는 이 연약
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다리에 묶인 끈을 푼다는 것이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오.”
소영은 가볍게 탄식했다.
“장형은 무림의 사람이 아닌데 어째서 이런 변을 당했소? 이와
같은 방법은 절대로 보통 사람의 복수 수단이 아닌 것 같은데….”
장자안이 입을 열었다.
“이건 바로 나의 호기심이 지나쳤던 탓이오. 나는 어려서부터 기
기괴괴한 책을 좋아하여 각처로 기서(奇書)를 수집하러 돌아 다녔
소. 그리고 나의 집안에는 약간의 재산이 있었으므로 밤낮으로 독
서에만 열중하였지요.”
그는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우러러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윽고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십 년 전인 것 같소. 저는 한
권의 기서를 수집했는데 그 책은 원래 일대의 화성 시천도의 소유
였는데 어떻게 그것이 흘러 나와서 나의 수중에 들어 오게 되었소.
그리고 그 책에는 시천도의 친필로 쓴 필적이 남아 있었소. 나는
그 책을 침식을 잊다시피 하며 열심히 읽었소. 그리고 수 년 동안
이나 연구를 거듭하였소.”
상팔이 말을 받았다.
“그게 무슨 책이며, 거기에 무엇이 씌어 있길래 장형으로 하여금
그처럼 침식을 잊어 가며 열중케 하였소?”
장자안이 대답했다.
“그것은 한 권의 고서(古書)였지요. 누구의 저서인지는 표지가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잘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것은 의서였어
요. 거기에는 단방(單方), 연독(鍊毒), 해독(解毒) 및 각종의 독물
을 양육하는 방법이 수록돼 있었소.”
상팔이 말을 받았다.
“그럼 약서(藥書)로군요.”
“약서라고만도 할 수 없소. 기술된 범위가 상당히 넓기 때문이
오. 특히 연독, 해독의 방법은 일찍이 들어 보지 못했던 괴상한 것
이었소. 그리고 그 책을 지은 사람은 비단 지식이 풍부할 뿐만 아
니라 많은 여행을 하여 산간벽지의 구석구석까지 샅샅이 다 기록해
두고 또한 수십 종의 기독(奇毒)한 물건의 생산지와 그 잡는 방법
까지 기록해 두었소.”
상팔이 다시 물었다.
“당신은 그것을 시험해 본 적이 있소?”
“나는 그것을 읽던 도중 호기심이 생겨 노자를 준비한 다음 하인
하나를 데리고 멀리 운검에 가서 책에 씌어 있는 대로 실험해 본
결과 과연 열세 종류의 독사를 잡을 수 있었소.”
소영은 눈이 휘둥그래지며 되물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소?”
장자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오. 그뿐더러 나는 책에 기재된 방법대로 이십삼 종의 뱀
을 키웠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야만적인 성격을 온순하게 길들여
내 맘대로 조종할 수도 있게 만들었소.”
상팔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과연 일찍이 듣지 못했던 일이로군.”
장자안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뱀을 길들이는 방법이 들어맞자, 다시 호기심이 생겨 일
년 후에 책에 기록된 대로 천중(川中)으로 들어가 봤는데 과연 거
기서 다시 몇 마리의 독물을 잡았소. 이렇게 되자 내가 독물을 잘
양육한다는 소문이 진리(鎭里) 사이에 널리 퍼졌소. 그러나 그로
인해 나는 많은 고통을 당하게 되었소.”
상팔이 말을 받았다.
“숱한 사람들이 그 독물을 보러 왔기 때문이오?”
“그 가장 큰 번뇌는 내가 무의식중에 이독공독(以毒攻毒)의 방법
으로 이웃 사람들의 독창(毒瘡)을 고쳐 준 데에서 비롯된 것이오.
그로 인해 나의 이름이 뜻밖에도 떠들썩하여 하나에서 열, 열에서
백의 입으로 퍼져 나가 치료를 부탁하러 오는 사람들이 끊일 새가
없었으며, 심지어는 백 리 밖에서 찾아오는 사람들도 수두룩했소.”
소영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사람을 구해 준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인데, 장형은 어째서 그
것을 즐거이 받아들이지 않았소?”
“기실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은 모두 책에 기록된 단방뿐이며 의술
에 대해선 그 기초도 모르고 있으니 어떻게 사람의 병을 고쳐 줄
수 있겠소.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단방은 영험하기 그지없어 약을
쓰기만 하면 병이 완쾌되었소.”
그는 잠깐 동안 말을 끊고는 훅 하고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이
윽고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 그래서 내가 거절하면 거절할수록 그들은 더 몰려들기 때
문에 한 가지 금례(禁例)를 내려 버렸소. 무릇 중병에 걸려 곧 죽
게 된 사람이라야만 내가 구해 주겠다고…..”
그는 다시 잠시 동안 말을 끊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이렇게 금례를 내리고 나니 좀 조용해지긴 했지만, 나의
이름은 이미 강호에 널리 알려지고 말았소.”
그는 다시 하늘을 우러러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 오 년 전의 어느날 밤, 깊은 밤중이었소. 나는 영문도 모
르고 누군가에 의해 이곳으로 잡혀 왔었소. 그리고 그에게서 몇 가
지의 독물을 양육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소. 그리고 나는 이 의자에
묶인 것이오. 일의 경과는 복잡한 것 같지만 막상 말을 하려고 하
니 이처럼 간단하군요.”
상팔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양육한 독물들은 지금 어디에 있소?”
“바로 이 풀 밑에 있소.”
소영이 다시 물었다.
“무슨 독물들이오?”
“원래는 그 종류가 수십 종에 달했는데, 몇 년 동안 선택과 도태
를 거치는 동안에 현재 두 가지 독물만이 남게 되었소.”
상팔이 다시 물었다.
“그 독물들은 이름이 있소?”
“물론이오.”
소영이 다그쳐 물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 남아 있는 두 가지의 독물은 그 이름이
뭐요?”
“그 중 한 가지는 혈승(血蠅)이고 또 한 가지는 금지네라 하오.”
상팔이 말참견을 했다.
“금지네는 나도 들은 적이 있는데 혈승이란 말은 일찍이 들어 보
지 못했소.”
장자안이 설명을 했다.
“그 두 가지 독물을 비교해 본다면 혈승의 독은 금지네보다도 더
하오.”
그는 말을 끊고 한참 동안 상팔 등을 주시한 다음 다시 말을 이
었다.
“…… 그것은 남강(南疆)에서 생산되는 독한 파리요. 강호에
비록 독물을 사용하는 사람이 많지만, 감히 혈승을 잡으러 가는 사
람은 거의 없소.”
소영이 물었다.
“그 이름을 혈승이라 했으니 보통 파리와 비슷한가요?”
장자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양에 있어서는 보통 파리와 비슷하나 보통 파리보다는 월
등하게 크오. 그리고 그 입이 교룡과 같이 뾰죽하고 단단하며 피를
빨아 먹기를 좋아하므로 혈승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오.”
상팔은 빙그레 웃었다.
“만약 그것만으로 그친다면 독물이란 말을 붙일 자격도 없지 않
소?”
“그렇소. 겨우 그것뿐이라면 그들 역시 천신만고를 겪어 가면서
이 독물을 키우지는 않을 것이오.”
소영이 장자안에게 물었다.
“그 땅 밑의 피파리와 금지네의 숫자는 대체 얼마나 되오?”
“금지네는 약 천 마리 이상쯤 되고 피파리는 아예 계산할 수가
없을 정도요. 어림수로 말해도 만 마리 이상일 거요.”
소영이 다시 물었다.
“대체 누가 이 두 가지 독물을 당신에게 키우라고 부탁했었소?”
장자안이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
“말씀드리기 창피한 노릇이지만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 주인
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소. 그와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은
언제나 달도 없는 캄캄한 밤중뿐이오. 그뿐더러 그들은 나와 얘기
할 때 언제나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도무지 그 정체를 알 수가 없
소. 하지만 그들이 남녀 두 사람이라는 건 확실하오.”
왕방이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그들이 흑혈의 주인이 아니오?”
“그렇소. 나도 어렴풋이 흑혈이란 말을 들은 것 같소.”
왕방이 자신있게 말했다.
“그럼 틀림없이 흑혈의 주인이오.”
소영이 말을 이었다.
“장형, 제가 몇 마디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더라도 크게 허물하
지 말아 주시오.”
“소형, 무슨 말씀이신지는 모르지만 기탄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장형, 그들이 이 독물을 키우는 목적은 반드시 인간을 해치기
위해서일 것이오. 그래서 저는 그들의 악랄한 행위를 미연에 방지
하기 위해 이 독물들을 없애 버리고 싶은데 무슨 묘책이 없겠소?”
소영은 말을 마치자 장자안의 대답을 기다릴 여유도 없이 품 속
에서 비수를 꺼내 들었다.
“내가 먼저 장형을 묶어 놓은 끈을 끊겠소.”
“그럴 필요 없소. 내 양 다리는 이미 수 년 동안 묶여 있었으므
로 흐르던 피가 말라 버리고 맥박이 통하지 않아 줄을 끊는다고 하
더라도 움직이지 못할 것이오.”
상팔이 말참견을 했다.
“그런 생각 마오. 장형이 만약 걸어 갈 수 없다면 내가 업고라도
가겠소.”
“형씨의 그 성의에 저는 감격할 뿐이오.”
장자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날카롭고 차가운 음성이 들
려 왔다.
“장자안! 너는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순간, 장자안의 얼굴빛은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