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 Finger RAW novel - Chapter 84
84. 흑혈의 주인
소영이 소리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려 바라 보자, 전신에 흑의를
입고 얼굴 역시 검은 수건으로 가린 사람이 밀림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여러 사람이 있는 것을 보자 약간 놀라는 기색이었다.
소영이 낮은 목소리로 상팔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를 놓쳐서는 안 되오. 사로잡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상팔은 소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천천히 앞으로 나서
며 공수를 하면서 입을 열었다.
“우리 형제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노형께서는 그간 연고
없으셨는지요?”
그 흑의인은 의아한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대는 뉘시오? 나는 그대와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 어째서 형제
라 말하는 거요?”
상팔이 얼른 대답했다.
“사해는 모두 형제란 말을 쓰니 제가 노형을 형이라 부른 것도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흑의인은 냉랭하게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우리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니 그렇게 친절한 호칭은 필요
없소.”
이때 상팔과 흑의인과의 거리는 불과 일 장 정도였다.
갑자기 상팔은 대갈일성했다.
“너는 잡수시오 할 때는 먹지 않고 퍼먹으라고 해야만 먹는 성미
로군. 형이라고 부르는 게 불쾌하다면 할 수 없이 개새끼라고 불러
주지.”
흑의인은 약간 어리둥절했다.
상팔은 그가 채 반박할 엄두도 내기 전에 갑자기 뛰어 올라서 창
응박토(蒼鷹搏兎) 일초로써 덤벼들었다. 그러나 흑의인의 솜씨도
뒤지지 않아 상팔이 덤벼들자 오른손을 갑자기 번뜩여 한 자루의
단도를 뽑아 들고 재빠르게 맞부딪쳐 왔다.
상팔은 빈정거렸다.
“녀석 봐라! 그래도 잔재주는 있구나.”
상팔은 왼손으로 일장을 뻗쳐 칼의 공세를 막고 오른손으로는 금
라수법을 써서 흑의인의 칼을 잡아 채려 했다. 그러자 흑의인은 칼
을 휘둘러 한 줄기의 한광을 공중에 그려 내면서 몸을 보호했다.
상팔은 단전의 진기를 내려 재빨리 땅바닥에 내려 섰다. 그리고
는 곧 손을 휘둘러 맨손으로 칼을 뺏는 금라수법을 펼쳐서 흑의인
과 한바탕 맹렬한 싸움을 전개했다.
그러나 흑의인의 칼쓰는 법은 무척 괴이하여 그 변화무쌍함을 종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상팔은 두 번이나 험한 초식을 전개하여
공격했지만 칼을 뺏지는 못했다.
상팔은 은근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사람을 사로잡지 못한다면 내 체면이 말이 아닐 것이
다.’
상팔은 매우 조급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수법을 돌변하여 왼손
으로 교타금령(巧打金鈴) 초식으로 맹렬히 쳐 내고 오른손으로는
금사전완 초식을 사용하여 흑의인의 왼쪽 손목을 향해 찍어 갔다.
상팔은 전력을 기울여 공격을 가했으므로 그 왼손의 장력은 심히
강했다.
흑의인은 칼을 이쪽으로 돌려 막으려 했으나 상팔의 장력에 의해
칼의 기세가 주춤해 버렸다. 상팔은 이 틈을 노려 오른손을 내밀어
단번에 흑의인의 왼쪽 손목을 잡아 챘다. 상팔은 그제야 하하 웃으
며 호통쳤다.
“이 녀석! 너는 이 상노대(商老大)가 십여 초씩이나 손을 쓸만큼
그 솜씨가 제법이구나. 어서 수중의 칼을 버리지 못할까?”
상팔은 말을 하면서 다섯 손가락에 힘을 주자 흑의인은 견딜 수
없는 듯 칼을 버렸다.
상팔은 왼손으로 칼을 집어 들고 오른손으로는 흑의인의 손목을
잡은 채로 소영의 앞으로 끌고 갔다.
장자안은 상팔이 맨손으로 칼 든 사람을 사로잡는 것을 보자 매
우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아! 만약 나도 일찍이 무공을 배웠다면 그들에게 잡혀 이와
같은 곤욕을 치르지 않았어도 됐을 텐데…..”
상팔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고소를 금치 못했다.
‘무공을 배우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인 줄 아는군! 당신이 만약 몇
년 동안 무공을 배웠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잡히기는 마찬가지이며
오히려 당신의 고통은 더 처참해졌을 것이다.’
소영은 흑의인을 훑어 보며 입을 열었다.
“이놈! 얼굴의 망사를 벗어라.”
상팔은 빙그레 웃었다.
“친구, 자네가 한 조각의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감싼 의도가 무엇
인가. 감히 사람을 대하지 못할 무슨 사연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상팔은 말을 함과 동시에 왼손을 들어 흑의인의 얼굴에 가린 검
은 수건을 벗겨 버렸다. 호기심에 차서 그를 바라 보고 있던 사람
들은 순간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흑의인의 얼굴 한가운데는 커다
란 구멍이 뚫려 있었던 것이다. 코는 온데간데 없었다.
소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흑혈 주인의 수단은 너무도 잔인하여 백화산장보다도 더한 것
같군!”
소영은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며 흑의인을 가엾다는 듯 바라 보았
다.
“그대의 코는 깎이었나?”
흑의인의 표정은 반발심으로 굳어져 있었으나 소영의 말을 듣자
갑자기 훅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소. 잘려 버렸소.”
소영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소영이란 사람인데 결코 형씨를 해하지는 않을 거요. 흑혈
의 주인에 관한 사실을 저에게 알려만 주신다면 저는 책임지고 당
신을 안전하게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 주겠소.”
흑의인은 그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늦었소.”
소영은 다그쳐 물었다.
“무슨 까닭이오?”
이때 흑의인은 갑자기 무거운 신음소리를 내며 시커먼 피를 한
모금 토해 내고는 숨을 거두어 버렸다.
소영은 상팔을 바라 보며 탄식조로 입을 열었다.
“흑혈 주인의 수단이 이처럼 악독하니 그대로 보아 넘길 수가 없
소. 반드시 그놈의 소굴을 없애 일거에 그의 기업을 뭉개 버려야
하오. 백화산장, 사해군주 외에도 강호에 악독한 놈이 다시는 등장
하지 않도록 말이오…..”
상팔도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강호엔 살기가 감돌고 있어 그야말로 수천 년 내에 일찍이
없었던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듯한데 형님께서는 그 먹구름 속을 뚫
고 비치는 한 줄기의 태양과 같은 존재요. 어서 빨리 악의 무리를
소탕하고 강호를 평안케 했으면 좋으련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바탕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장자안은 급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 어서 이 휘장 속으로 들어 오시오. 피파리가 곧 출현할
것이오.”
상팔이 옆에 쭈그리고 앉아 개에게 낮은 음성으로 무어라고 지시
를 하자 개는 갑자기 쏜살같이 뛰어 나갔다.
이때 왕방은 이미 휘장을 들어 올리며 그 속으로 들어 갔다. 그
러나 소영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버티고 서서 풀숲의 한가운데를
응시하고 있었다.
상팔은 소영을 밀면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
“어서 휘장 속으로 들어 가시오. 이 일은 모험할 일이 아니오.”
소영은 여전히 버티고 서서 대답했다.
“그 피파리와 금지네가 정말 사람을 잡아 먹을 수 있을만큼 무섭
다고는 믿을 수 없소.”
그러자 장자안이 소리를 질렀다.
“두 분도 어서 들어 오시오. 조금만 더 늦으면 큰일나오.”
상팔은 소영을 밀다시피 하여 휘장 속으로 들어 갔다.
“우린 먼저 상황을 살펴 본 다음 행동을 개시합시다. 만일 그 피
파리가 사람을 해치지 못한다면 우리가 다시 나가서 활동을 해도
늦지 않을 것이오.”
소영이 상팔에게 끌리다시피 휘장 속으로 들어 가서 막 몸을 일
으키려는 찰나 그 넓은 풀숲 한가운데서 갑자기 직경이 석 자 정도
의 큰 구멍이 열리며 길이가 한 치 가량 돼 보이는 검은 벌레가 분
수처럼 솟구쳐 올랐다.
장자안은 급히 소리 질렀다.
“누군가가 고의로 피파리를 방출했소. 여러분은 크게 조심하여야
하오. 사방의 휘장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그 피파리의 배에는
독이 가득 들어 있으므로 누구든지 한 번 물렸다 하면 숨을 거두게
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이에 무수한 피파리가 날아 나왔다. 직경이 십
여 장에 달하는 풀숲 위에는 파리소리뿐이었다.
소영은 시선을 모아 그것들을 바라 보았다. 피파리는 검푸른 빛
깔이었다. 그리고 날개의 힘이 매우 강하여 날아다니는 속도가 기
가막히게 빨랐다. 그것들은 풀숲 위를 종횡무진으로 번개처럼 날아
다녔다.
장자안은 가볍게 탄식을 했다.
“휴우! 저렇게 무서운 독물들을…….”
소영도 그 말에 더욱 경각심을 높이며 시선을 돌려 바라 보았다.
휘장 밖에 있는 일구의 시체 위에 피파리가 산더미처럼 달라 붙
었다. 그 시체는 피파리가 달라 붙자 눈깜짝할 사이에 수축되어 잠
시 후에는 껍데기와 뼈다귀만 남았다.
상팔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장형, 이 피파리는 과연 지독하군요. 저 피파리를 제압할 수 있
는 무슨 방법은 없소?”
장자안이 천천히 대답했다.
“지금 저것들을 제압하지는 못하오. 다만 저것들이 지하의 소굴
속으로 들어 간 다음 불을 질러 태워 죽이는 수밖에 없소.”
이때 왕방이 깜짝 놀라 소리질렀다.
“피파리가 몰려 왔소!”
그는 손을 들어 쳐 내려고 했다. 알고 보니 이미 수십 마리의 피
파리가 사람의 냄새를 맡고 휘장 밖에 몰려 와 있었다.
장자안이 급히 소리질렀다.
“손을 쓰지 마시오. 가령 일장에 몇 마리의 피파리를 죽여 없앤
다 하더라도 휘장을 격파하여 그들이 날아 들어 오게 되면 우리 네
사람은 살 생각은 말아야 하오.”
왕방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만약 그것들이 점점 많이 몰려 와서 휘장을 뚫고 들어 오면 어
떻게 하오?”
장자안이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염려할 것 없소. 이 휘장은 매우 품질이 우수한 것으로 견고하
기 이를 데 없소.”
두 사람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그 피파리들은 이미 휘장에
달라 붙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그것들은 공간이 없을 정도로 휘장
에 달라 붙어 햇빛조차 가릴 지경이었다.
소영은 재빨리 천 년 묵은 교피 장갑을 꺼내서 손에 끼고 입을
열었다.
“상형은 아래쪽을 살펴 피파리가 들어 오지 못하게 막고, 왕형은
위를 살펴 막으시오.”
장자안은 깜짝 놀라 말했다.
“손에 피파리가 닿게 해서는 안 되오. 반드시 독의 침입을 받을
것이오.”
상팔은 손에 들고 있던 비수를 왕방에게 건네 주었다.
“왕형! 이 휘장 속에서는 장검을 사용할 수 없으니 이 단도로써
휘장 속으로 들어 오는 피파리를 상대하시오.”
왕방은 손을 내밀어 비수를 받아 들었다.
상팔은 원래 경험이 풍부하므로 휘장 안으로 들어 오기 전에 미
리 나뭇가지를 하나를 꺾어 가지고 들어 왔다. 그 나무 막대기는
길이가 한 자 가량 됐으며 굵기는 오리알만 했다. 상팔은 그것을
꼭 쥐고 있었다.
이때 휘장의 사면에는 피파리가 꽉 달라 붙어서 비린내가 확 풍
겨 들어 왔다. 그리고 너무도 많은 피파리가 휘장에 겹겹이 달라
붙어 있었으므로 햇빛을 확 가려 휘장 속은 마치 암실처럼 어두웠
다. 상팔은 시선을 모아 사면의 휘장을 살펴 보며 한편으로는 나직
이 장자안에게 말했다.
“장형, 당신은 피파리를 양육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므로 틀림없
이 피파리들을 물러 가게 하는 방법도 알 수 있을 것이오. 우리는
이 휘장 속에 너무 오랫동안 갇혀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되오.”
장자안이 막 무슨 대답을 하려는 찰나 갑자기 한 줄기의 냉랭한
음성이 들려 왔다.
“너희들은 이미 피파리떼에게 갇혔다. 내가 언제든 암기를 쳐 내
휘장을 찢어 버리기만 하면 피파리가 즉시 휘장 속으로 스며들어
가서 너희들의 피를 완전히 빨아 먹어 치울 것이다. 이 피파리는
지금 겹겹으로 포위를 하고 있으므로 너희들이 어떠한 재주를 가졌
다 하더라도 항거할 수는 없다.”
소영은 낮은 음성으로 장자안에게 물었다.
“장형, 저 사람은 누구요?”
장자안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그 주인의 음성과 흡사해요.”
왕방이 말참견을 했다.
“그렇소. 바로 그 흑혈 주인의 음성이오.”
소영은 그제서야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상형, 그놈이 있는 곳과 이곳과의 거리는?”
“이 장 안팎인 것 같소.”
소영이 말을 받았다.
“내 판단과 비슷하군.”
소영은 시선을 장자안에게로 옮겼다.
“저놈은 어찌하여 피파리를 겁내지 않소?”
“제 생각으로는 피파리가 감히 침입하지 못하게 해약을 바른 것
같소. 그렇지 않다면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휘장 안에 숨어 있었
을 것이오.”
소영이 다그쳐 물었다.
“뭐라구요? 그렇다면 피파리를 제압할 수 있는 약물이 있단 말이
오?”
장자안이 천천히 대답했다.
“그렇소. 몇 가지 약물을 배합한 다음 일종의 기이한 향내가 풍
기는 약을 배합한 것 같은데 피파리는 그 향내를 맡으면 곧 멀리
피해 버리지요.”
소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그놈이 휘장 속에 숨어 있다면 내가 그놈을 상대할 수 있
게 될는지 모르지만 만약 약물을 발랐다면 쉽게 상대할 수 없소.”
상팔은 가슴이 섬뜩했다.
“장형은 그 약물을 조제할 수 없소?”
장자안은 고개를 저으며,
“그 기서에는 기록돼 있는데 단지 두 가지 주약(主藥)을 구하기
가 쉽지 않소. 조제할 수는 있지만 재료가 없어서 조제하지 못하는
것이오.”
이때 그 냉랭한 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방금 내가 한 말을 그대들은 다 들었겠지? 지금 그대들이 갈 길
은 두 길뿐이다. 마음대로 선택해라. 그 하나는 내가 휘장을 찔러
피파리가 그대들의 피를 빨아 먹게 하는 것이오, 다음은 내 명령에
복종하여 나의 흑혈 속으로 들어 와서 내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다.”
소영은 그 말을 듣자 코웃음을 쳤다. 그도 말로써 반박하려는데
상팔이 이를 말렸다.
“이런 악독한 사람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 강호의 도의를 지킬 필
요는 없소. 군자는 속이는 것을 죄로 알지 않는다고 했소. 소제가
그와 상대하겠소.”
그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갑자기 높은 음성으로 외쳤다.
“그대는 뉘시오?”
그 냉랭한 음성이 대답해 왔다.
“나는 흑혈의 주인이다.”
상팔은 비웃듯 말했다.
“흑혈의 주인이라고? 나는 멀리 강남 강북 어디 안 가 본 곳이
없는데 흑혈의 주인이란 말은 처음 듣소.”
“내가 무림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강
호에 출현한다면 반드시 무림을 진동시켜 천하가 감탄하게 만들 것
이다.”
소영이 끼여 들었다.
“이 피파리떼들을 믿고서?”
“피파리와 금지네는 내가 양육한 두 가지 독물에 불과하지만, 그
대들이 이 피파리떼의 공격을 피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
다.”
상팔이 말했다.
“우리들이 그대의 흑혈에 들어 가면 어떻게 되는가?”
흑혈의 주인은 단호하게 말했다.
“아주 간단하게 처리된다. 그대들이 흑혈에 들어 와 내 부하가
되겠다면, 한 알의 약물을 복용하여 오관 중에서 눈이나 코나 그대
들이 맘대로 선택해서 한 가지만 내게 제공하면 흑혈의 문하제자가
된다.”
상팔은 그 말을 듣자 소름이 오싹 끼쳤다.
‘그건 또 무슨 규정일까?’
그러나 상팔은 여전히 높은 음성으로 외쳤다.
“그대는 우리들의 이름을 알고 있는가?”
흑혈의 주인이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만약 내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그대는 틀림없이 중주이고 첫째
인 금산반 상팔일 것이다.”
상팔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또 한 분은?”
흑혈의 주인은 이내 대답했다.
“그 이름은 강호에서 쟁쟁한 소영! 그렇소?”
상팔은 소영을 바라 보며 낮은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보아하니 그는 고의로 우리를 여기까지 유인한 것 같소. 하지만
소제는 아직 흑혈의 주인이란 말을 들은 적이 없으니 필시 여기에
는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소.”
소영도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을 받았다.
“그가 단번에 우리들의 이름을 알아냈는데 정말 의아스러운 일이
군요.”
흑혈의 주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왕방, 네가 감히 나를 배반하다니 너의 죄는 백 번 죽여도 시원
치 않겠다.”
왕방은 상팔을 바라 보았다.
“만약 우리가 그놈의 손에 잡히게 된다면 어떤 참혹한 형벌을 당
할지도 모르니 차라리 피파리에게 먹히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그
의 수중에 들어 가고 싶지 않소.”
그는 놀라고 두려워하는 빛이 역력했다.
소영은 손을 천천히 내밀며 낮은 소리로 왕방에게 말했다.
“왕형, 그 비수를 나에게 주시오.”
왕방은 이미 혼비백산해 있었으므로 소영이 시키는 대로 비수를
소영에게 건네 주었다.
소영은 오른손으로 비수를 고쳐 잡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소영은 평생 기습을 해 보지 않았는데 오늘은 상황이 다르니
할 수 없이 수단 방법을 가릴 여지가 없소.”
상팔이 대답했다.
“우리는 이미 그놈의 간사한 계략에 걸려 들어서 여기에 갇히게
되었으니 어떤 수단으로 반격을 하더라도 떳떳하지 못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오.”
소영이 이윽고 힘있게 말했다.
“좋소! 상형은 다시 그놈에게 말을 거시오. 나는 그놈이 서 있는
위치를 알아 내야겠소.”
왜냐하면 휘장 밖에는 피파리들이 수없이 겹겹으로 몰려 시야를
흐리게 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리를 들어 그의 위치를 짐작하려는
것이었다.
상팔이 높은 소리로 말했다.
“노형은 스스로 흑혈의 주인이라 칭했고 또한 하필이면 이런 햇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 생활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떳떳이 고개를
들고 남의 앞에서 살 수 없는 사람인 것 같소.”
흑혈의 주인은 그 말을 듣자 냉랭한 목소리로 웃어젖혔다.
“내가 연마한 무공은 여느 것과는 달라 그대들도 추측할 수 없는
것이오.”
소영은 미리 암암리에 공력을 끌어 모으고 정신을 가다듬어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흑혈의 주인이 있는 곳을 확인하게 되자 갑자기
오른손을 날렸다. 그러자 비수가 휘장을 뚫고 나갔다.
휘장이 찢어지자 곧 몇 마리의 피파라가 날아 들어 왔다. 그러나
소영은 미리 준비해 있다가 오른손을 휘둘러 두 마리의 피파리를
당장에 때려 죽였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쏜살같이 뻗어 찢어진 휘
장을 감싸 쥐었다.
소영의 동작은 과연 번개처럼 빨랐다. 장자안이 피파리를 건드리
지 말라고 소리쳐서 경고하려고 했었으나 그의 말이 채 나올 겨를
도 없이 소영은 두 마리의 피파리를 때려 죽이고 오른손으로는 찢
어진 휘장을 봉해 버린 것이었다.
수십 마리가 길다란 주둥이로 소영의 손을 마구 물어 뜯었다.
장자안은 대경실색하여 소리를 질렀다.
“소형, 피파리에게 손등을 물려서는 절대로 안 되오.”
소영은 빙그레 웃었다.
“상관 없소. 손에 장갑을 끼고 있으니까…..”
장자안이 말을 이었다.
“피파리의 입은 뾰죽하게 튀어 나와서 손에 장갑을 끼고 있다 하
더라도 방지하기 어려울 것이오.”
“이 장갑은 보통 것과는 달라 예리한 칼날로도 상하게 할 수 없
는 것이오.”
장자안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수십 마리의 피파리가 소영의 손등을 물어 뜯는데도 그가 아무렇
지도 않은 것을 보자 어안이 벙벙해져서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
었다.
상팔은 소영의 회선수법이 천고의 일절(一絶)이라는 것을 잘 알
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그 한 칼이 저 흑혈의 주인에게 상처를 입혔으면 좋으련만. 그
렇게 된다면 힘을 모아 구름처럼 몰려드는 이 피파리들을 상대할
수도 있을 텐데……’
상팔은 그러기를 바라면서 정신을 곤두세워 자세히 들어 봤지만
오랫동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편 휘장 안의 사람들도
모두 숨을 죽이고 조용히 있었으므로 사방에는 무거운 정적이 내리
덮었다.
차 한 잔 끓일 시간이 족히 지나갔는데도 여전히 흑혈의 주인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상팔은 양미간을 찌푸리며 이렇게 생각했다.
‘이상한데, 흑혈의 주인이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슬며시 물러
났단 말인가?’
소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 휘장 속에 언제까지 갇혀 있을 수는 없소. 어떤 방법
을 생각해 내서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하오.”
상팔이 말을 받았다.
“그 흑혈의 주인은 형님의 회선수법에 명중되어 부상을 당해서
슬며시 물러 갔는지도 모르오.”
상팔은 다시 장자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장형, 휘장 밖의 피파리들을 물리칠 좋은 방법은 없소?”
장자안은 일개 서생이었지만 생사에 관해서는 담담하며 차분한
기색을 보여 주었다.
“현재 유일한 방법은 밤이 깊어 날씨가 차가워졌을 때 그것들이
스스로 물러나게 되는 길뿐이오.”
상팔은 그 말에 약간 의아한 빛을 띠었다.
“그렇다면 이 피파리들이 추위를 탄단 말이오?”
장자안이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피파리들에게는 두 가지 특성이 있소. 그 한 가지는 이것들
은 식성이 놀라워 열두 시간 내에 무엇이든 먹지를 못하면 곧 날개
에 힘이 빠져 사람을 해칠 능력이 없어지며, 또 한 가지는 한랭을
매우 두려워하여 추위에도 견딜 수 없으며 또한 반대로 햇빛도 오
래 받을 수 없다는 것이오.”
소영이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이대로 몇 시간이나 기다려야 한단 말이오?”
장자안은 여전히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들이 스스로 물러가는 길밖에 다른 양책을 나로서는 생각해
낼 수 없구료.”
소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마냥 참고 기다릴 수 있도록 흑혈의 주인이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오. 우리가 휘장 안에 갇혀 마음대로 그의 손에 맡겨질
바에야 차라리 힘껏 뚫고 나가서 그와 자웅을 겨루는 게 나을 것이
오.”
장자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망갈 기회를 포착할 수가 없소. 이 휘장을 한 걸음만 벗어나
면 곧 피파리가 사면 팔방에서 공격을 가해 올 것이오. 그때 만약
한 번만 물린다면 뜨거운 차 한 잔 마실 사이에 독이 발작하여 전
신이 마비되어 무공을 잃고 피파리에게 피를 빨려 죽는 길밖에 도
리가 없소.”
장자안은 말을 잠깐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 여러분이 갑옷 속에 몸을 숨긴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는
한 가망이 없소.”
소영이 이 말에 무슨 대꾸를 하려는데 갑자기 퍽! 하는 소리가
나며 한 줄기의 차가운 빛이 휘장을 뚫고 들어 왔다. 그러나 소영
의 수법은 번개같이 빨랐다. 게다가 천 년 묵은 교피 장갑을 끼고
있었으므로 칼을 겁내지 않고 오른손을 내밀어 덥석 쥐었다.
받아 쥔 칼을 자세히 들여다 보니 그것은 한 자루의 버들잎처럼
납작하게 생긴 유엽비도(柳葉飛刀)였다.
상팔은 급히 수중의 막대기를 휘둘러 윙윙거리며 찢어진 구멍을
통해 들어 오는 두 마리의 피파리를 쳐서 떨어뜨렸다.
그러나 피파리들은 인기척을 듣자 찢어진 휘장 구멍으로 다투어
서 들어 오기 시작했다.
소영은 급히 들고 있던 비도를 던져 버리고, 오른손을 들어 올려
비도에 의해 찢어진 휘장을 감싸 쥐었다. 소영은 두 손으로 휘장의
두 구멍을 막고 있는 것이었다. 만약 흑혈의 주인이 다시 암기를
뻗쳐 내서 또 다시 휘장의 한 곳을 찢어 버린다면, 그 때는 피파리
가 제멋대로 날아 들어 와서 네 사람은 몰사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상대는 칼 한 자루를 던진 다음, 오랫동안 암
기를 쳐 내지 않았다. 시시각각으로 죽음이 임박해 오는 이때 경험
이 많다는 상팔도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오히려 그는 장자안을 바
라 보며 묻는 것이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오?”
“난들 그것을 어떻게 알겠소.”
기실 상팔도 그에게 물어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
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는 막힐 듯한 분위기를 배겨날 수
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 갑자기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휘장 속에 갇혀 있는 게 뉘시오?”
이 목소리를 듣는 순간 소영과 상팔은 깜짝 놀랐다.
상팔이 나직이 속삭이듯 말했다.
“형님, 저것은 금화부인의 목소리가 아니오?”
“그렇군요. 그런데 그녀가 어떻게 여길 왔을까? 혹시 이 흑혈의
주인 역시 심목풍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