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 Finger RAW novel - Chapter 86
86. 멀리서 들려오는 피리소리
“사실인즉 그 사람들은 전부 흑색 옷차림을 하고 복면을 하여 컴
컴한 밤중이라서 있늘 것이 마치 나무와도 같았거든…..”
“참 그렇겠군요.”
“만일 무위도형이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암기의 타법으로 그 중
의 한 사람을 맞춰서 쓰러뜨리지 않았던들 이 늙은이는 아마 그것
을 나무로만 생각했을 거야.”
무위도장이 그 말을 받아,
“만일 제가 그 나뭇가지로 쳐 내지 않았던들 그들이 혈승떼(血蠅
: 피를 빨아 먹는 파리)를 풀어 내지 않았을는지도 모르지요.”
“무위도형께서는 원래가 마음이 자비로워 비록 나뭇가지를 꺾어
암기로 사용하긴 했으나 매우 약하게 쳤지. 그 사람은 가벼운 경상
을 입고 몸을 돌리더니 혈승을 풀어 내더군. 나는 형세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손을 휘둘러 장풍을 쳐 내어 혈승의 공습을 저지
시키려 했지. 그때 무위도장께서 나를 잡아 당기어 숲 속으로 들어
왔지. 그러나 그 혈승의 큰 무리는 우리의 뒤를 맹렬히 쫓아 들어
왔는데 부웅부웅 날아 오는 소리가 귀청을 다 멍멍하게 하더군.”
눈길이 사나운 개를 한 번 스치더니 말을 이었다.
“그 순간 이 늙은 나는 사람의 지혜가 저 개만도 못하구나 싶었
지. 저 개는 마치 혈승의 지독함을 직감이나 한 것처럼 한 그루의
동백나무 뒤로 숨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와 무위도형도 곧 저
개의 뒤를 따라 동백나무 숲 속으로 몸을 숨기고는 장풍을 날려 혈
승의 침공을 막았던 것이지.”
그 말에 소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캄캄한 밤에 시야가 분명치 않을 뿐 아니라 혈승의 날아 오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고 정확한데, 이 두 분께서 혈승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니 참으로 운이 좋았구나!’
손불사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그래 나는 날아 들고 있는 것이 마치 왕벌같이 생긴 것임을 발
견했을 뿐 아니라 그 속도가 굉장하며 보통 왕벌보다 훨씬 빠르다
는 것을 알았네. 혈승의 수효는 점점 늘어서 천 마리쯤 되나 보더
군. 물론 나의 장풍 때문에 그 동백나무 안에까지 침입하지는 못했
으나 언제까지나 그런 방법으로 밀고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
다행히 무위도형이 이 때를 잘 맞추어 두 개의 비수를 날려 혈승을
풀어 놓은 두 사람을 상하게 했지. 그 순간 어찌 된 일인지 혈승은
일제히 방향을 돌리더니 쓰러진 그들에게 달려 들어 순식간에 뼈만
앙상하게 남기고 모조리 뜯어 먹더군. 그래서 무위도형과 그 기회
에 도망을 쳤던 것이라네.”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며,
“말로는 이렇지만 그 때의 실정은 생사가 경각에 달린 긴박한 상
태였으므로 지금 생각해 보아도 등골이 오싹해지는군. 나는 평생을
통해 무수한 풍파를 겪어 왔으며 독물을 사용하는 고수도 많이 보
아 왔지만 천 여 마리의 혈승으로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은 꿈에도
상상 못했던 것이었네.”
그들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이미 그 동백나무 밑에까지 당도했
다. 상팔이 황급히 앞으로 나와 반기며,
“두 분께서는 몹시 놀라셨지요?”
하고 말했다. 손불사는 눈을 굴리며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한 번
훑어 보더니 웃는 낯으로 말했다.
“다행한 일이오. 우리는 한 사람도 부상을 당하지 않았을 뿐 아
니라 오히려 두 사람이 더 불었구료.”
먼저 도착한 금화부인이 그의 말을 받아 쏘아 붙였다.
“이 늙은이야! 왜 나는 치지 않지? 뻔히 세 사람이 늘었는데 어
째서 두 사람이라고만 하는가?”
손불사는 그제서야 그녀를 발견한 듯이 담담히 웃으며 대꾸했다.
“아니! 이건 또 누구요? 야아, 정말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
난다더니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소?”
금화부인은 차갑게 웃었다.
“손노인! 혈승떼에게 죽지 않았으니 그 늙은 목숨을 잘 보존해야
겠구료. 심옥풍이 이미 삼 개월 내에 당신의 목숨을 빼앗겠다고 맹
세를 했을 뿐 아니라 전무림에 그 말을 퍼뜨렸다오.”
손불사는 태연히 받았다.
“이 늙은이는 이렇게 많은 나이를 먹도록 아직 그 어느 누구의
협박에도 넘어가 본 적이 없었지. 허나 어쨌든 그런 말을 전해 주
니 고맙구료.”
금화부인도 냉랭하게 말했다.
“심목풍이 자신이 없으면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니
각별히 조심해야겠소이다.”
듣고 있던 무위도장이 이때 갑자기 입을 열었다.
“손선배님! 저것이 무슨 소리인가 좀 들어 보시오.”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귀를 기울여 들어 보니 한가
닥의 악기소리가 고요하게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그 음악소리는
아주 기이했다. 퉁소소리 같기도 하고 비파소리 같기도 하였으며
또한 가만히 들어 보면 마치 두 가지의 악기를 합주하는 소리 같기
도 하였다.
손불사가 나직이 말했다.
“저 소리는 마치 심목풍을 격퇴시킨 그 음악소리 같군.”
무위도장도 끄덕였다.
“저도 그런 것 같습니다.”
소영은 재빨리 몸을 솟구치더니,
“도대체 어떠한 인물인가 소생이 가 보고 오겠습니다.”
하더니 이미 두 장 밖으로 달리고 있었다.
손불사도 그의 뒤를 따라 갈 생각을 했다.
“무위도형께서는 이곳에 잠시 계십시오. 나도 그를 따라 가 보고
오겠소.”
이에 무위도장이 황급히 외쳤다.
“노선배님! 조심하십시오. 되도록 충돌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 손불사의 몸은 두 장 밖으로 솟구
치고 있었다.
금화부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도대체 이것이 어찌 된 일입니까?”
무위도장은 숨을 크게 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참으로 믿기 어려운 사실이오. 만일 제가 직접 두 눈으로 보지
않고 남에게 들은 이야기라면 나도 믿으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세
상에 그렇게 기이한 일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금화부인은 답답한 듯 재촉했다.
“도장님! 그렇게 돌려 이야기하지 마시고 어서 요점을 말씀해 주
십시오.”
무위도장은 그녀를 힐끗 쳐다 보더니 자세히 이야기했다.
“그날 저녁 심목풍이 백화산장 내의 고수들을 인솔하고 빈도와
손노선배님을 포위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 형세로 본다면 만일
서로 출수하게 되면 빈도와 노선배는 심목풍의 패거리들에게 포위
되어 피를 보게 될 위기였지요. 그러나 바로 쌍방이 검을 빼들고
싸우려던 찰나, 갑자기 어디선가 한 가닥의 기이한 음악소리가 들
려 왔지요. 그래서 혈전을 면하게 되었지요. 다시 말해서 빈도와
손노선배의 목숨이 구출된 셈이지요.”
그러자 금화부인은 호탕하게 웃으며 무위도장의 말을 가로챘다.
두구는 그녀를 못마땅한 듯 힐끔 쳐다 보더니 차갑게 쏘아 붙였
다.
“무엇이 그리 우습소?”
금화부인은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마치 대낮에 꿈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군요.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인데요.”
“빈도가 직접 경험한 일이며 절대로 거짓이 아니오. 부인이 못
믿겠다면 할 수 없는 노릇이오. 그러나 이것은 빈도 혼자 겪은 일
이 아니고 손노선배님도 같이 겪었으니까요.”
상팔은 비호같이 몸을 날리는 소영의 신법을 주시하더니 가벼운
탄성을 질렀다.
“세상 일이란 신기하군요. 오 년 전만 해도 소대협은 약하디약한
일개 서생이었건만 오 년 후인 오늘에 와서는 강호에 명성을 떨치
는 영웅이 되었으니……”
한편 소영은 경공의 축지법을 전개하여 그 음악소리를 따라 단숨
에 오 리쯤 달려 갔다. 계속 달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등불이 새
어 나오고 있는 한 채의 초가집에 다다랐다. 그러나 그 초가집에서
는 이미 그 기이한 음악소리가 들려 오지 않았다.
소영은 발을 멈추고 그 초가집 앞에 서서 안의 동정을 살폈다.
손불사가 뒤를 쫓아 와서 나지막한 음성으로 물었다.
“소제, 무엇이라도 발견했나?”
“소생의 판단으로는 그 음악소리가 바로 이 초가집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번 들어가 보도록 하지.”
“좋습니다. 먼저 문을 두드려 보고 들어가 보도록 합시다.”
광야에 고립된 이 한 채의 초가집은 사방이 잡초로 덮여서 더욱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두 사람은 그 초가집 문 앞으로 다가 서서 문을 두드리려고 했
다. 그러나 문은 꽉 닫힌 채였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귀를 기울였
다. 그러나 집 안에서는 끝내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사람이 사
는 것 같지도 않았다.
손불사는 나이가 이미 환갑이 다 되었지만 그 다급한 성질만은
젊었을 때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다짜고짜 손을 들어
일장으로 나무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여보시오! 아무도 없소?”
그러자 집 안에서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어떠한 사람이기에 이토록 무례하오?”
손불사는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가 언뜻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참았다. 만일 이 초가집 안에 정말로 그 음악을 연주한 사
람이 있다면 그에게 성질을 낼 수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마른 기침
을 한 번 하고 점잖게 말했다.
“소생은 손불사라 하오.”
집 안에서는 다시 그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댁은 남자요? 아니면 여자요?”
손불사는 흠칫 놀라며 이내 생각했다.
‘요즘 무림 중에 새로 출도한 사람들이 혹 나를 모를 수도 있겠
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선배인 손불사라는 것쯤은 이름만으로
도 알고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더구나 이 늙고 굵직한 목소리가
당당히 대장부의 음성인데 어찌하여 여자냐고 묻는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고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남녀의 음성도 분별 못하시오?”
초가집 안에서 여전히 차디찬 음성이 새어 나왔다.
“당신은 내 음성이 남자 같소? 아니면 여자 같소?”
손불사는 얼떨떨해졌다. 그는 그의 질문이 이상하여 다시 속으로
궁리해 보았다.
‘이 자의 음성은 남자의 목소리가 분명한데, 그러나 그가 만일
당당한 남자라면 어째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
손불사는 워낙 평생을 두고 보아 온 것과 경험이 많았으나 순간
적으로 그의 질문이 납득이 되지 않아 소영을 보고 물었다.
“소제, 그 사람이 남자 같소? 아니면 여자 같소?”
소영은 서슴없이 말했다.
“남자의 음성 같습니다.”
“내 생각에도 그런 것 같은데……”
하더니 음성을 높여 대답했다.
“당신은 분명히 남자일 것이오!”
그러나 그 얼음장 같은 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천만에!”
손불사는 어이가 없어서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소리쳤다.
“지금 그 음성만 해도 틀림없는 남자의 음성이 아니오?”
하고 오른손에 운공하고 있던 내력의 경기를 발휘하여 대문의 복
판을 내리쳤다. 문고리가 부서지며 삐걱 하고 대문이 활짝 열렸다.
그들이 막 들어 가려고 했을 때 갑자기 한 줄기의 강경한 암경이
밖으로 뻗쳐 오는 것이 아닌가.
그 경력은 기세가 몹시 맹렬할 뿐 아니라 대단히 거세었다.
손불사는 집 안의 동태를 눈여겨 보기도 전에 아무 경황 없이 본
능적으로 일장을 맞받아 쳤다. 두 줄기의 장력이 맞부딪치자 일진
의 광풍이 일었다.
손불사는 전신의 진동을 느끼며 그만 물러 서고 말았다.
이때 쾅 하는 소리가 들리며 활짝 열렸던 대문이 갑자기 닫혔다.
소영은 자신이 상대의 장력을 받아 치지는 않았으나 손불사가 밀
려 나오는 것을 보자 속으로 놀랐다. 어떠한 인물이기에 이토록 강
한 공력을 발휘한단 말인가 하고 감탄을 하며 손불사에게 물었다.
“노선배님, 상대를 똑똑히 보셨습니까?”
“못 봤어……”
하더니 음성을 낮추어 말했다.
“소제, 우리는 고명한 인물을 만났으니 섣불리 출수를 해서는 안
되겠어.”
“그럼 이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그럴 필요는 없지.”
하더니 음성을 높여서 말했다.
“이 늙은 몸이 그대께 한 가지 가르침을 받고자 하오니 하교 있
으시기 바랍니다.”
초가집 안에서는 다시 차디찬 음성이 들렸다.
“무슨 일입니까?”
“조금 전에 저는 일종의 악기소리를 들었는데 혹 그대께서 연주
하셨는지요.”
“그 음악을 연주하던 사람은 이미 이 곳을 떠났소이다.”
손불사는 황급히 물었다.
“그 분은 어디로 가셨습니까?”
“끝없이 넓은 이 천지에 어디로 갔는지 어찌 알겠소?”
소영은 살며시 그 집 대문을 만져 보며,
‘저 손노선배님의 장력으로 이 대문을 가루로 만들기는 식은 죽
먹듯 쉬운 일일 텐데. 저 집 안의 사람이 일종의 장력을 뻗쳐 적당
한 균형을 이루게 하여 이 나무문이 장력의 힘으로 부서지는 것을
막았으니 그 사람도 손노선배와 같은 공력을 지녔겠구나.’
하고 생각이 미치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손불사도 평생에 드물게 만난 강적임을 알아차렸는지 더 이상 출
수치 않고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서서히 입을 열었다.
“귀하의 장력이 웅휘한 것을 보니 절대로 보통 사람은 아니신데
좀 배알을 허락해 주십시오. 이 늙은이가 정녕 귀하와 상대할 자격
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그가 이렇게 은근히 싸움을 거는 것은 상대가 문을 열고 맞아 주
지는 않더라도 무슨 다른 대꾸라도 있겠지 하는 의도에서 그랬던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안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손불사는 치미는 울화를 억지로 누르면서 노성으로,
“귀하는 사람을 너무 무시하는 것 같소.”
하며 또 다시 일장을 내리쳤다. 그러자 와지끈 하고 대문은 산산
조각이 나며 흩어졌다. 이런 상황은 손불사의 생각과는 크게 어긋
났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잠시 어리둥절하였다.
소영은 재빨리 안으로 달려 들어 갔다. 그리고 집 안을 살펴 보
았다. 어찌 된 일인지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그는 급히 방으로
뛰어 들었으나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없었으며 그곳에 있던 사람
도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다.
손불사는 등불에 비친 방구석에서 한 장의 편지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급히 주워 들었다. 그들이 등불에 비쳐 본 그 종이
에는,
소영은 얼떨떨해졌다. 그는 편지에서 눈을 돌리고 손불사에게 말
했다.
“그렇다면 이곳에 숨었던 사람은 우리를 돕고 있는 사람이군요?”
손불사는 신중히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심목풍은 워낙 귀신같은 계략을 꾸미는 놈이라
확실한 내용을 알기 전에는 행동을 할 수가 없는 일이지.”
소영도 수긍했다.
“노선배님 말씀이 옳습니다.”
그들은 다시 편지로 눈을 돌리고 계속 읽어 내려 갔다.
짤막한 편지 끝에는 그 누구의 글이라는 서명도 적혀 있지 않았
다. 손불사는 그것을 다 읽고 난 뒤에 소영에게 말했다.
“이 쪽지는 잘 소지해야 되겠군.”
그러나 소영은 잠시 주저하더니,
“남길 필요 없습니다!”
하고 그것을 등불에다 살라 버렸다.
손불사는 소영을 보며 물었다.
“이 글의 내용을 보니 자네와 몹시 친숙한 사이 같군 그래.”
“예, 그렇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도대체 누구
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군요.”
“현재 눈앞에 닥친 형세로 보아 우리는 더 이상 양친을 찾아 낼
수 없을 것 같군.”
“흐음! 그가 서명도 안하고 신분도 밝히지 않았으니 어찌 소생이
마음을 놓을 수 있겠습니까?”
“소제, 내가 몇 마디 권고해야겠는데 자네는 어디까지나 침착해
야겠네. 지금 처해 있는 이런 상황하에서 자네가 아무리 초조해 봤
던들 소용이 없는 일일세. 그 사람이 만일 우리에게 트집을 잡으려
면 필연 이 쪽지에다 그것을 비쳤을 것인데 내가 종합해서 생각해
본 바로는 이 글 속에는 위협의 말이라고는 한 마디도 없으며 내
그동안 쌓아 온 경험으로 보아 글 쓴 사람은 절대로 소제에게 악의
가 없는 듯하네.”
이때 손불사의 손에 들었던 등잔불은 이미 기름이 다 닳아 깜박
거리더니 꺼져 버리고 말았다.
소영은 어둠 속에서 긴 한숨을 내뱉더니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
었다.
“이제야 겨우 한 가지 일에 대해 실마리를 잡게 됐군요.”
“무슨 일인데?”
“심목풍을 격퇴시킨 음악소리와 소생의 부모를 데려 간 사람이
동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손불사는 무릎을 탁 치더니 감탄하듯 외쳤다.
“허어! 영웅은 소년층에서 나온다더니 틀림없구나! 이 늙은이는
정말 이제는 흙에 들어갈 때가 되었구나. 그것을 미처 생각해 내지
못했다니…..”
소영은 입가에 씁쓰레한 웃음을 지으며 힘없이 말했다.
“생각이 벌써 났었던들 무슨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물론 관계가 있지. 그날 저녁 자네는 중상을 입어 몸
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을 때 나와 무위도장은 심목풍이 인솔한 많
은 고수들에게 호숫가에서 포위를 당하고 있었지. 그때 마침 바람
을 타고 흘러 온 기이한 음악소리만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벌어졌을
텐데….. 그렇게 되면 나와 무위도장은 그날의 고비를 넘기지 못
했을 뿐 아니라 운양자 등 무당락의 문하생 전부와 마문비 등이 아
마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뻔했지. 그런데 소제의 양친을 모시고
있는 사람이 심목풍을 격퇴시킨 바로 그 사람이라면 절대 안심해도
될 것일세.”
소영은 손불사의 말에 마음이 다소 놓였다. 그는 차분한 음성으
로 물었다.
“노선배님,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무위도장 등 여러 사람이 몹시 궁금하여 기다리고 있을 테니 우
리는 우선 그 동백나무 숲으로 가서 다시 대책을 강구해 보도록 하
지.”
“지금으로써는 그렇게 하는 도리밖에 없겠군요.”
두 사람은 초가집을 나와 오던 길을 다시 되돌아 갔다.
손불사는 길을 재촉하면서 입을 열었다.
“소제, 잠시 후 무위도장 등이 기다리는 곳에 가서는 될 수 있으
면 그 쪽지에 관한 이야기는 안하는 게 좋겠어.”
소영은 의아한 듯 물었다.
“그건 왜요?”
“목하 강호의 실정은 참으로 시끄러운지라 자네가 예를 들어 풍
연(風煙) 중의 밝은 고수라 친다면 그 백화산장의 일전은 자네의
이름을 날리게 했을 뿐 아니라 특히 무림 안에서는 이미 자네만이
심목풍을 상대해 낼 수 있는 상징으로 꼽고 있는 형편이지. 아마
자네는 아직까지 무림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신의 위치가 얼마나 중
요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겠지. 심목풍이 백방으로 손을 써서 자네
의 양친을 생포하려는 속셈도 자네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으려는 흉
계라네. 그는 속으로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지. 즉, 앞으로 강호에
서 그와 대항할 수 있고 그가 강호를 휩쓸고 패권을 잡아 군림하려
는 계획을 저지할 능력이 있는 자는 자네뿐이라는 것을 말일세. 이
늙은 나는 자네보다는 좀 낫다고 봐야지. 양친의 항방을 알고 있는
사람이 적을수록 자네에게 조금이라도 유리한 것일세.”
소영도 납득이 간 듯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노선배님의 말씀이 옳군요. 만일 그 분들이 물어 온다면 어떻게
대답을 해야 되겠습니까?”
“사실대로 말해 줘야지. 그러나 반만 말일세.”
두 사람의 경공은 모두 절정에 달하고 있는지라 이야기를 몇 마
디 나누는 동안에 어느새 이미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동백나무 숲
에 당도했다.
무위도장과 중주이고 등은 속으로 몹시 초조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때라 두 사람이 돌아 오자 반색을 하고 달려 나왔다.
금화부인은 아직 체력이 회복되지 않아서 몸을 동백나무에 기댄
채 소리쳤다.
“퉁소 부는 사람을 만나 보았습니까?”
하고 묻자 소영이 대답했다.
“단지 그 소리만을 들었을 뿐 그 장본인은 보지를 못했지요.”
무위도장도 나서며 물었다.
“가셨던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손불사는 소영의 입에서 말이 불쑥 튀어 나올까 두려워서 핫핫
하고 웃으면서 자기가 그의 말을 받아 대답했다.
“이 늙은이와 소제가 초가집 한 채를 발견하고 그 앞에 쫓아 갔
을 때만 해도 그 퉁소소리는 초가집 안에서 들렸었는데…..”
금화부인이 말참견을 했다.
“왜 들어 가서 만나 보도록 하지 그랬어요?”
손불사는 금화부인 쪽으로 눈길을 돌리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내가 그 집 대문 앞에 서서 몇 마디 말을 하는 동안 초가집 안
에 있던 사람은 그 틈에 그만 집 뒤로 도망을 쳐 버렸더군요. 아무
런 인기척이 없어서 나하고 소제가 그 초가집 속으로 뛰어 들었을
때에는 이미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보이지가 않았지요.”
무위도장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우리와 만나기를 꺼려하는가 보군요.”
손불사가 끄덕이며 결론을 내렸다.
“아마 그런 모양이오.”
상팔은 소영을 쳐다 보며 말했다.
“형님, 사나운 이 개들이 비록 취각이 예민하긴 하지만 이처럼
많은 시간이 흘렀으니 쫓아 가도 소용이 없겠군요.”
“지금부터 쫓아 가 봐야 이미 소용이 없으며 일이 기왕에 이쯤
됐으니 지금 당장 조급해 봐야 어쩔 수 없는 노릇이오. 그러니 지
금 그의 뒤를 쫓는 것은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위도장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면 소대협은 지금부터 어디로 가실 작정이신가요?”
“귀파의 제자와 마문비 등 모두가 그 호숫가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우선 그곳으로 가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소영의 제안을 듣자 무위도장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 소영이 어째 갑자기 부모의 행방을 찾는 일을 포기하고 방침
을 바꾸었을까?’
무위도장은 워낙 침착한 인물인지라 이러한 의혹이 속으로 일기
는 하였으나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이때 묵묵히 듣고 있던 두구가 입을 열었다.
“소제들이 무능하여 양친을 남에게 납치당하게 하였습니다만 하
늘 끝까지라도 쫓아 가서 두 분을 모셔 와야 옳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소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두형의 진심에는 나로서 십분 감격하는 바이오. 그러나 지금의
전세로써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그 많은 부상당한 친구들
을 모른 체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