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 Finger RAW novel - Chapter 93
93. 기생집에 잠입하다
소영은 끓어 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어떤 놈이 암습을 가했는지 눈에 띄기만 해 봐라. 단단히 혼을 내어 분풀이를 하고 말 테니…..’
소영은 주먹을 불끈 쥐며 암암리에 사방을 쉴새없이 경계했다.
두 개의 가도(街道)를 지나 네거리의 입구에 다다랐다. 길 양편엔 각양각색의 점포와 노점(路店)
들이 손닙을 부르며 늘어서 있었다. 노점은 길 복판까지 차지해 들어 왔고 많은 사람들로 인해
걸음을 옮기기 힘들 정도였다.
‘이렇게 복잡해서야 암습을 당하기 꼭 알맞겠다. 골목길을 택해 걷는 것이 안전할 것 같은데…..’
소영은 대여섯 장쯤 앞에 왼쪽으로 꺾어진 골목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들어 가려고 생
각했다.
전음입밀의 술법으로 상팔에게 그 뜻을 알려 주려고 했을 때였다. 그의 앞으로 다가 서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줄곧 소영을 바라 보며 성큼성큼 다가 오고 있었다. 다 떨어진 옷을 걸친 중년
사나이었다.
‘개방 제자가 대강의 남북에 깔려 있다더니 저 사람은 손불사가 나에게 보낸 개방의 제자인 모양
이구나.’
소영이 생각을 하는 사이에 그 사나이와의 거리는 사, 오 척으로 가까와졌다. 그 사나이는 소영에
게 대뜸 말을 걸었다.
“당신이 소대협이오?”
“그렇소. 노형께서는 누구시오? 혹시 개방의…..”
소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돌연 그 사나이가 양손을 동시에 움직였다. 왼손에는 비수를
쥐고 소영을 공격하며 오른손으로는 여러 개의 독침을 뿌렸다. 불과 사, 오 척의 가까운 거리에서
돌연스러운 공격을 가하니 그것을 막아 내기란 지극히 어려웠다. 더욱이 독침의 공격을 막아 낸
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소영은 연달아 암습을 당했었기 때문에 이 사나이에게도 은근히 경계를 하고 있었다. 그
의 양손이 움직이는 것을 본 소영은 칠 장으로 상대방의 공격을 쳐 냄과 동시에 몸을 뒤로 눕히
며 물러섰다. 형세가 매우 다급했으므로 소영은 사람들이 많은 것을 개의할 수가 없었다. 바짝 붙
어서는 상대방의 공격을 철판교(鐵板橋)의 초식을 사용해서 피해 낸 것이었다.
상대방의 무공은 보통이 넘었다. 소영이 민첩하게 뒤로 넘어지며 물러서는 것을 보자 그는 재빨
리 옆으로 몸을 날리더니 왼손에 들었던 비수를 소영에게 던졌다. 그와 동시에 몸을 솟구치더니
뒤로 돌아서 뺑소니를 치기 시작했다.
소영을 향해 던진 그 사나이의 비수는 엉뚱하게도 몇몇 사람들의 발목과 정강이에 박혔다.
“으악!”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대굴대굴 뒹굴었다. 이것을 본 소영의 눈에서는 불똥이 튀었다.
‘죽일 놈, 무고한 사람을 해쳤구나.’
소영은 상대방이 도망치며 던진 비수를 몸을 살짝 뒤틀며 오른손으로 잡아 들었다. 그는 급히 몸
을 솟구치며 그 비수를 도망가는 사내를 향해 힘껏 던졌다.
소영이 비수를 날린 수법은 유선자에게 배운 암기 수법이며 이것은 강호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절학이었다. 더욱이 소영은 울분이 치솟아 있는 힘을 다해 비수를 던진 것이라 그 날아 가는 힘
과 속도는 극히 놀라웠다. 바람을 가르고 공기를 찢으며 비수는 화살보다 더 빠르게 날아 갔다.
소영이 비수를 받아 다시 던질 때에는 이미 사나이는 저만치 달아나고 있었는데 뒤에서 바람소리
가 들리자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바로 이 순간에 날아간 비수가 그의 정문혈(頂門穴)에 깊숙
이 꽂혔다. 칼자루만 남기고 칼날은 모두 꽂힌 것이었다.
“으악!”
사나이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리더니 이를 악물며 이마에 박힌 비수를 뽑아 들었다.
그는 그 비수를 소영에게 던질 듯한 자세를 취해 보이다가 그 자리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큰길에서는 일시에 소란이 벌어졌다.
“살인이다!”
“사람이 죽었다!”
사람들은 놀라움과 공포에 질려 부르짖으며 우왕좌왕 소란을 피웠다. 흡사 난리가 난 듯한 수라
장이었다. 상품을 늘어 놓고 팔던 목판을 들고 달아나는 사람도 있었고, 죽은 사나이의 곁으로 몰
려드는 사람도 있었다.
“무엇이냐?”
“난리가 났냐?”
“누가 죽었냐?”
멋도 모르고 떠들며 뛰는 사람들도 있었다. 거리는 순식간에 혼잡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 들었다.
“빨리 갑시다. 나를 따르시오.”
상팔은 군중들이 떠들며 소란을 피우는 것을 보더니 급히 소영의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소영은 짤막한 한숨을 내쉬며 상팔의 뒤를 따랐다.
‘백화산장의 무리들이 각양각색으로 변장을 해서 수시로 암습을 가해 오고 있구나.’
소영은 앞뒤에서 보호하는 상팔, 두구, 전엽청을 훑어 보며 걸음을 빨리했다.
이들이 골목으로 꺾어 들자 한 채의 커다란 집이 보였다. 그 집의 솟을대문이 어찌나 큰지 문의
추녀 밑이 웬만한 집채만 했다.
대문 추녀 밑으로 상팔이 소영을 끌고 들어서더니 인피가면 하나를 꺼냈다.
“형님, 빨리 이것을 쓰시오.”
소영이 인피가면을 받아 얼굴에 쓰자 두구가 품에서 푸른 장삼을 꺼내 소영에게 내 주었다.
“이 옷을 위에다 걸치면 사람들이 형님을 몰라 볼 것이오.”
소영이 급히 장삼을 걸치자 그제서야 전엽청이 다가 오며 숨찬 소리로 말했다.
“거리는 큰 혼란에 빠졌소. 순찰대가 곧 올 것 같으니 우리는 빨리 이곳을 떠나는 것이 좋겠소.”
네 사람은 그 골목을 돌아 다른 행길로 나섰다.
상팔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될 수 있는 한 서로 모르는 사이처럼 꾸밉시다. 그러나 너무 멀리 떨어지지는 말고 서로
호응할 수 있도록 합시다.”
네 사람은 복잡한 거리를 조금씩의 간격을 두고 걸었다. 이 거리에도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이 퍼
져 사람들의 표정이 사뭇 흉흉했다. 길을 한참 걷는 동안 다른 암습자는 만나지 않았다. 아직 식
사를 할 때는 안 되었으나 거리를 쏘다니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한 소영은 객점 안으로 들어
섰다. 소영을 따라 들어 온 세 사람은 각각 하나씩의 탁자를 차지하고 앉았다.
객점에는 이들 말고 서너 명의 손님이 있을 뿐 한산했다. 또한 술과 안주 이외에는 먹을 만한 음
식도 별로 없었다.
네 사람은 각각 술과 안주를 주문했다. 그들이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할 무렵에 네 명의 장정이
객점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 섰다. 이 객점에는 모두 일곱 개의 탁자밖에 없었다. 그런데 소영의
일행 이 네 개를 차지했고 다른 손님들이 나머지를 차지했기 때문에 탁자가 없었다.
들어 선 네 명의 장정은 모두 경장을 했다. 앞장 선 장정은 괴상하게 생긴 무기와 염왕필(閻王筆)
을 메고 있었고 다른 장정들도 단도와 암기 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그들 네 사람은 실내를 쓱 훑어 보더니 앞장 선 사내가 소영의 맞은편에 걸터 앉았다.
다른 세 장정들도 각각 전엽청, 두구, 상팔이 점령한 탁자로 가서 한 사람씩 마주보고 앉았다.
상팔, 두구, 전엽청은 이때 모두 다른 옷을 입고 변장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본색이 쉽게 탄
로날 염려는 없었다.
소영의 맞은편에 앉은 장정은 소영을 한 번 훑어 보더니 아무 소리도 없이 손을 내밀어 술주전자
를 잡았다. 그는 소영에게 양해도 구하지 않고 술을 따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의 주량이 세고
술을 마시는 속도가 아주 빨라 주전자는 금방 바닥이 나고 말았다.
술주전자가 비자 장정은 그것을 탁자에 올려 놓았다.
소영은 그의 일거일동을 지켜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이때 객점의 출입문 가까이에 두구와 마주앉아 있던 장정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 조금 있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는지 모르오. 여러분들은 가만히 앉아 계시오. 괜히 움직
였다가 무고한 희생을 당하지 말고…….”
‘이 객점에 우리 네 사람과 뒤에 앉은 뚱뚱보 세 사람뿐이다. 그렇다면 혹시 이들이 우리의 신분
을 알아 차리고 들어 온 것이 아닐까?’
소영은 이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경계심을 높였다.
이때 아무런 무기도 지니지 않은 노인이 객점 안으로 들어 섰다. 그 노인은 실내를 천천히 훑어
보더니 서서히 상팔의 앞으로 다가섰다.
“여기 합석해도 되겠지요?”
상팔은 무공도 높지만 경험도 매우 많다. 또한 그는 지모가 뛰어난 위인이었다. 노인이 앉으니 상
팔의 앞엔 두 사람의 낯선 사람이 있게 되었지만 상팔은 조금도 불쾌하거나 동요하는 빛 없이 태
연했다. 은근히 상대편을 살펴 볼 뿐이었다.
노인은 태양혈이 툭 솟아 있었다. 안광이 날카롭고 형형한 기백이 엿보이는 표정으로 보아 무서
운 무공을 지녔음이 분명했다.
‘이 노인은 등에 칼을 멘 이 장정들보다 훨씬 무공이 강하겠구나. 이 장정들은 노인에 비해 일개
의 졸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들이 어떤 인물인지 알 수는 없으나 우리를 상대하려고
이곳에 나타난 것은 아닌 모양인데…..’
상팔이 이런 생각을 하며 침착한 데에 비해 전엽청은 성질이 급했다. 그는 노인이 상팔의 앞에
앉는 것을 보고 불끈 아니꼬운 생각이 치밀어 곧 손을 쓰려고 했다.
그러나 소영이나 상팔이 너무도 침착하게 앉아 있으므로 화를 눌렀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갔다. 돌연 소영의 앞에 있는 장정이 벌떡 일어났다. 그는 노인 곁으로 다
가가서 읍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장주님, 그들이 여태껏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니 오지 않을 모양입니다.”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그들이 우리에게 약속을 했는데 어길 리는 없어. 우리가 조금만 더 기다려 보도록 하자.”
‘아하, 이들이 누구와 약속을 한 모양이구나. 그런데 하필이면 이렇게 좁은 객점에서 만나기로 했
을까?’
소영은 이런 생각을 하며 조금은 마음을 놓았다.
상팔은 음성이 귀에 익은 듯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누구인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노인을 어디서 보았을까 생각하며 자주 노인의 얼굴에 시선을 던졌다.
노인 곁에 앉아 있던 뚱뚱한 장정이 상팔의 거동을 수상하다고 생각했는지 퉁명스럽게 물었다.
“왜 사람을 그리 힐끔거리오? 얼굴에 무엇이 묻었소?”
상팔은 흠칫하며 얼른 얼굴을 돌렸다. 그러나 염왕필을 멘 장정은 여전히 상팔을 의심이 가득 찬
눈으로 노려 보며 퉁명스레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상팔은 짐짓 죄송스럽다는 태도를 꾸미며 대답했다.
“네, 저는 마차를 모는 마부입니다.”
그러자 장정은 비호같이 손을 뻗쳐 상팔의 손목을 움켜 잡았다. 손을 빼면 신분이 탄로 날 것 같
아 상팔이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노인이 손을 흔들며 입을 열었다.
“괜한 시비를 걸지 마오!”
염왕필을 멘 장정은 노인을 몹시 존경하는 모양이었다. 즉시 상팔의 손목을 놓아 주었다.
상팔이 안도의 숨을 내쉬는데 문이 열리며 한 청년이 들어 섰다.
푸른 장삼을 본 소영은 가슴이 섬뜩했다.
‘심목풍이 이미 이 근처에 나타난 것이 아닐까?’
방금 들어 선 청년은 심목풍의 제자인 단굉장(單宏章)이었던 것이다. 단굉장은 실내를 두리번거리
더니 노인의 곁으로 다가 서며 물었다.
“어느 분이 주어른이시오?”
노인이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내가 바로 낙양의 주문창(朱文昌)이라 하오.”
단굉장은 포권을 하며 공손하게 말했다.
“아, 그러시오? 대명은 오래 전부터 들어 왔습니다. 막상 이렇게 뵙게 되니 영광입니다.”
“원, 별말씀…. 형씨의 성함은 어찌 되오?”
“소생은 성은 단이고 이름은 굉장입니다. 여기 청첩장이 있으니 주선배께서 보시기 바랍니다.”
주문창은 단굉장이 내주는 청첩장을 펴 보더니 물었다.
“노형은 심장주와 어떤 관계가 되시오?”
“바로 저의 사부님이십니다.”
“아, 그럼 심장주에게 이렇게 전하시오. 나를 이처럼 초청해 주시니 곧 가겠다고…..”
“네, 이미 진(秦), 우(尤), 허(許), 세 노선배께서 초청한 장소를 향해 떠났으니 주 노선배께서도
빨리 오십시오.”
“단형은 안심하십시오.”
단굉장은 포권을 하며 물러갔다. 단굉장이 빠른 걸음으로 객점을 나가자 주문창도 서서히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네 명의 장정이 우르르 몰려 나갔다.
그들이 나가자 소영은 하인을 불러 술과 술잔을 새로 가져 오라고 했다.
술잔을 거두던 하인이 소영에게 말했다.
“은자(銀子)가 있는데요.”
소영은 술잔을 들여다 보았다. 과연 오전짜리 은전이 하나 들어 있었다. 그 장정이 술값으로 남기
고 간 것이 분명했다.
‘그 사람은 건방지긴 하지만 남의 공술이나 얻어 먹으러 다니는 건달패는 아닌 모양이군.’
소영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상팔이 고개를 쳐들며 중얼거렸다.
“주, 진, 우, 허. 이들은 무림의 사대현(四大賢)이렷다.”
소영은 몸을 일으켜 상팔과 마주앉으며 물었다.
“상형, 그 주문창이란 노인을 알고 있소?”
“모르오. 허나 주문창의 이름은 귀에 익도록 들었소. 무림의 사대현인 중에서 주문창이 우두머리
격이지요. 강호의 시비에 참여치 않고 있던 이 네 사람을 심목풍이 찾을 줄이야……”
상팔은 미간을 모으며 잠간 생각하는 눈치더니 말을 이었다.
“풍문에 의하면 그 사대현은 무공이 매우 높다 하오. 허나 성질이 괴상해서 무림 인물과 교제를
않고 있다오. 살벌하고 음모와 피비린내가 가득한 무림에서 그들은 독자적인 노선을 걷고 있답니
다. 그들은 일체 강호의 일에 간섭치 않고 은거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무림의 사
대현이라도 부른답니다.”
소영이 말했다.
“그들이 속세를 떠난 것을 나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소. 하지만, 무공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서도
강호에서 악이 선을 누르며 기승을 부리는 것을 외면한다는 것은 대영웅이니 대현인이니 하는 칭
호를 받을 만한 일은 못 되잖소?”
상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씀이 옳군요.”
소영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심목풍이 이곳 악주성 내에 도착한 모양인데….. 우리의 행방이 이미 드러났으니 오래 머무르지
말고 우리 이제 갑시다.”
소영은 술값을 계산했다. 돈을 받으며 하인은 소영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소영이 쓴 인피가면은
푸르둥둥하고 누렇기도 했으며 귀밑엔 시커먼 털이 솟아 있어 몹시 흉칙하게 보였다.
소영이 객점을 나서자 상팔이 곁에 다가 섰다.
전엽청과 두구는 뒤떨어져 따라 왔다. 이들 네 사람은 성내의 형세를 대강 살펴 볼 수 있었다.
저녁이 되고 어둠이 깔릴 무렵에 네 사람은 외따른 곳에 있는 한 채의 부두집으로 들어 갔다. 두
명의 무당파 제자들이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소영과 상팔 등은 인피가면을 벗고 다른 모습으로 변장했다.
전엽청은 푸른 도포에 귀공자 차림을 하고 얼굴에도 약간 손질을 가했다.
상팔은 장삼에 호박같이 생긴 모자를 쓰고 까만 화의(和衣)를 입었다. 얼굴에 인피가면을 쓰니 그
차림새가 확 달라졌다.
두구는 인피가면에 세 갈래의 턱수염을 달고 허리엔 장검을 찼다. 귀공자의 호위병과 같은 모습
이었다.
소영은 가면에 자그마한 모자를 쓰고 푸른 옷을 입어 전엽청의 시종으로 가장했다.
네 사람이 변장을 마치자 무당 제자 하나가 입을 열었다.
“잘 되었습니다. 그럴 듯한 변장이군요. 저의 장문께서는 이미 손 노선배님과 오경에 이곳에서 만
나시기로 약속이 있습니다.”
“좋소, 당신들은 이곳을 잘 지켜 주기 바라오.”
소영이 말하자 다른 무당 제자가 전엽청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삼사숙은 강남순찰사 정대인의 둘째 아들 정지청(程志靑)으로 행세하시는 것입니다.”
“알았다.”
전엽청은 소영을 바라 보며 말했다.
“소대협, 제가 이름을 하나 붙여 드리지요. 정령(程領) 어떨까요?”
“좋군요.”
소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네 사람은 간단한 음료를 마시고 어두운 골목을 빠져 나갔다.
이들이 큰길에 당도하니 이미 검은색의 포장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마부석에 있던 무당 제자 하나가 뛰어 내리며 이들에게 말했다.
“손 노선배께서 마차 안에 계십니다.”
네 사람은 포장 마차의 안으로 들어 갔다.
손불사는 변장을 풀고 본래의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나는 변장하는 데에는 습관이 되지 않아서…. 내 본래 면목이 좋아.”
손불사가 웃으며 말하자 소영이 물었다.
“노선배님은 개방의 인물들을 몇 명이나 찾으셨습니까?”
“나는 이미 여러 명의 어린 거지들을 찾아 대기시켰소. 우리의 행동은 모두가 무위도장이 계획한
것이니 그대로 따르면 되겠소. 이 늙은이가 한 마디 일러 두고 싶은 말은…..”
“…….”
“그 삼강서우(三江書寓)에 들어 간 뒤 누구든 사정을 봐 주어선 안 된다는 것이오. 내 제자의 보
고에 의하면 심목풍이 이미 성내에 많은 고수들을 이끌고 왔다니 만일 맞붙게 되면 절대 인정사
정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오.”
“오늘 저녁에 심목풍과 만나게 될는지도 모르겠군요.”
“하하, 심목풍은 소대협이 간다는 것을 알면 밤이 열이라도 기다리고 있을 걸…..”
손불사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삼강서우의 계집애들은 대부분이 뛰어난 무공을 지녔다니 각별히 조심해야 될 것이오. 절대로
가락과 관현소리에 현혹되는 일이 없도록 정신 바짝 차려야 하오.”
“안심하십시오.”
전엽청이 대답하자 손불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개방 제자들과 함께 밖에서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손불사는 전엽청에게 눈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 무위도장은 치밀한 계획과 앞뒤를 맞추는 재능이 뛰어난 분이더군. 확실히 보통 사람과는 견
줄 수 없는 분이야.”
전엽청은 자기 사형을 칭찬하자 매우 기분이 좋았다.
“황송합니다.”
손불사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나는 이런 차림으로 기원(妓阮)에 들어 갈 수 없으니 여기서 헤어지는 것이 좋겠군.”
손불사가 마차에서 훌쩍 뛰어 내렸다. 곧바로 채찍 휘두르는 소리가 들리며 마차가 움직이기 시
작했다.
덜컹거리며 마차가 달리자 소영이 전엽청에게 말했다.
“될 수 있는 한 손을 쓰지 않도록 하시오. 자칫 잘못 하다가는 심목풍이 파견한 무리들이 눈치채
게 될 우려도 있으니까…..”
전엽청은 고개를 끄떡였다.
잠시 후, 마차의 속도가 갑자기 느려졌다. 삼강서우에 가까와진 것이다. 포장을 들치고 바라 보니
길에는 사람들이 와글와글 붐비고 있었다. 길 양편엔 꽃등이 줄줄이 높이 매달려 있었고 장안의
일류 부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호색한 얼굴로 길을 메우다시피 걷고 있었다. 사람들 때문에 마
차는 행진을 못하고 멈춰 섰다.
두구는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길로 뛰어 내렸다.
“쓸데없는 사람들은 길을 비켜라?”
호통치며 손으로 사람들을 홱 밀쳤다. 그러자 칠, 팔 명의 사람들이 짚단처럼 나둥그러졌다.
두구는 청모를 쓰고 긴 칼을 찼기 때문에 고관대작의 호위병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기세만은 무
림 그대로였다.
명조(明朝)에는 가끔 고관대작들이 사적으로 이런 기원을 찾는 일이 있었다. 그 호위 무판들은 대
개가 신분을 뽐내고자 지금 두구의 복장처럼 차리길 좋아했다. 이런 차림새가 눈에 띄면 행인들
은 차림새만 보고도 고관의 호위병으로 알고 조심을 하였다.
두구에게 떠밀려 넘어진 사람들은 기분이 몹시 언짢았지만, 두구의 차림새와 호화스러운 마차를
보고는 감히 입을 열어 대항하지 못했다. 비실비실 뒤로 물러서며 길을 터 줄 뿐이었다.
마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해서 잠시 후에는 삼강서우 앞에 멎었다. 상팔이 먼저 내리고 그 뒤를
소영과 전엽청이 따라 내렸다.
“들어 갑시다.”
두구가 앞장 서더니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 갔다.
소영은 전엽청의 뒤를 바짝 따라 붙었다.
이들이 내리자 마차는 되돌아 달려가 버렸다. 이 삼강서우는 악주성 내에서 가장 이름이 높은 기
원이었다. 기생들은 하나같이 요염하고 가무에 뛰어났다. 기원이 여러 곳에 많고 특히 이 주변에
는 기원들이 하나의 거리를 이루었으나 삼강서우만큼 흥청거리는 곳은 없었다.
전엽청이 대문을 들어 서자 두 명의 하인이 정중하게 맞이했다.
두구가 하인들 앞을 가로막으며 묵직하게 말했다.
“우리 공자님을 놀라시게 하지 마라.”
“네, 알아 모시겠습니다.”
두 하인이 동시에 대답하자 상팔이 유창한 관어(官語 : 관가에서 쓰는 말)로 입을 열었다.
“우리 공자께선 너희 삼강서우의 이름을 오래 전부터 들어 오시던 차에 이번에 특별히 시간을 내
어 구경오신 것이다. 특등객으로 모시도록 해라. 우리 공자께서는 기분이 좋으시면 돈을 물쓰듯
하시니까 알아서 모셔!”
상팔은 여러 지방의 언어 풍습에 정통해 있었다. 그의 유창한 관어는 아무도 의심치 못할 정도였
다.
소영은 두 하인을 살펴 보았다. 옷차림은 평범했으나 미간에 오만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상팔의 유창한 관어에 대답도 못하고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이 두 명의 하인은 무림 인물이 변장한 것임이 틀림없구나. 그러기에 이토록 손님 접대가 서툴
고 쩔쩔매지. 그리고 보니 이 삼강서우에는 엄중한 경계망이 있는 모양이지?’
소영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두구가 쩌렁쩌렁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우리 나리가 하신 말씀을 들었나?”
두 하인은 서로 마주보더니 왼쪽에 있는 사람이 입을 열었다.
“소인 원래 아는 것이 없으니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하더니 북쪽에 있는 하나의 방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기에 빈 방이 하나 있으니 들어 가시지요. 소인이 곧 아가씨들을 불러드리겠습니다.”
상팔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리 공자께서 어떤 신분이라고 이런 혼잡한 곳에서 흥을 돋을 수 있단 말이냐?”
두구가 집안을 둘러 보더니 인공으로 만든 자그만 산을 가리키며 하인에게 물었다.
“저 언덕 뒤에는 무엇이 있느냐?”
“그곳은 후원입니다. 오늘 저녁 그곳은 단골 손님들로 이미 꽉 차 있습니다.”
“쫓아 버리면 되지.”
두구는 샙어 뱉듯 말하더니 그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갔다.
두 하인은 이런 일을 처음 당하는지라 어쩔 줄을 모르고 멍청히 있을 뿐이었다.
전엽청이 싸늘한 음성으로 짐짓 중얼거렸다.
“이 집에선 기생 장사를 그만 둘 모양이지?”
그러자 상팔이 매우 황망한 어조로 말했다.
“공자께선 지체가 높으신 분인데 어찌 이런 하인과 다투십니까? 내일 소인이 명첩을 한 장 써서
악주부에 보내 이 집을 좀 혼내도록 하겠으니 노여움을 푸십시오.”
그럴 듯하게 둘러대니 두 명의 하인은 더욱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들은 전엽청의 일행이 진짜 관가에 있는 사람들로 알고 고개를 푹 숙이고 물러서고 말았다.
‘나도 평생에 기원 출입은 처음이지만 너희 두 명도 역시 기생집의 일꾼 행세를 하는 것이 처음
인 모양이구나.’
전엽청은 이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그들은 하인들이 물러서자 두구의 뒤를 따라 갔다.
두구는 이미 상팔에게 삼강서우의 내력과 형세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는 대담하게 후원의 대
문 앞으로 다가가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빨리 문 열어라!”
삐이걱 하며 문이 열리더니 중년 사나이가 나타났다. 그는 문 앞에 버티고 선 채 냉랭하게 물었
다.
“당신, 누굴 찾소?”
“계집질하러 왔다.”
사나이는 두구를 훑어 보더니 역시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후원의 별당은 이미 만원이 되었으니 내일 일찍 오시오.”
그가 문을 닫으려고 했으므로 두구는 무릎으로 문을 버티어 닫지 못하게 하며 노한 음성으로 소
리쳤다.
“건방진…. 저리 꺼져! 우리 이공자께서 특별히 이곳을 찾아 오 셨는데 네가 감히 공자님의 기분
을 상하게 할 작정이냐?”
사나이가 얼굴에 핏대를 세우며 두구에게 대항하려고 했을 때 전엽청과 소영이 다가 왔다. 전엽
청은 그 사내와 두구가 충돌할까 봐 얼른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이 문을 아주 빨리 연 모양인데…. 좋았어. 사례금을 두둑이 주도록 해라.”
“네.”
상팔이 대답하고 품 속에서 금조각 하나를 꺼내 사나이에게 주었다.
“어서 우리 공자께 감사하다고 인사드려라.”
사나이는 금조각을 보더니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것은 고관대작이 아니고서는 뿌릴 수 없는 거액
이었던 것이다.
금조각을 받아든 사나이는 태도가 돌변해서 허리를 굽혔다. 이 틈을 이용하여 전엽청은 안으로
들어 섰다.
사내가 급히 막으려 했을 때는 소영, 상팔, 두구까지 모두 안으로 들어선 뒤였다. 이들 네 사람의
기세가 당당하고 차림새가 관가 사람들 같으니 사나이는 더 막지 못했다.
두구가 앞장 서서 들어가 모퉁이 하나를 도니 다른 사나이가 나타나서 앞을 막으며 물었다.
“손님께선 객실을 정하셨습니까?”
“아직 정하진 않았네. 제일 크고 조용하고 호화스러운 방을 주게.”
그 사나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좋습니다. 소인을 따라 오십시오.”
그 사나이는 몸을 돌려 안으로 걸어 갔다.
소영은 걸음을 옮기며 주위를 유심히 살펴 보았다. 뒤뜰의 풍경은 앞뜰과 달랐다. 앞뜰에는 모든
방에 불이 밝혀졌고 처마 밑엔 초롱불이 매달려 있었다. 그치지 않고 노래와 악기소리가 시끄럽
고 진짜 기생집의 분위기를 물씬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달랐다. 지붕 위엔 커다란 등불이 여러 개 켜져 대낮처럼 뜰을 밝히고 있었고 복
도엔 모두가 오색찬란한 꽃등이었다. 방문은 모두 두꺼운 천으로 가려져 불빛이 새어 나오지 않
았고 사람들의 말 소리도 알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나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후원의 별채는 특수한 설계로 꾸며 고급의 손님만 받는 모양이구나. 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
나는지 밖에서는 짐작조차 못하게 꾸몄으니 기생집 같지 않다.’
소영은 이런 생각을 하며 전엽청의 뒤에 붙어 서서 긴 복도를 걸었다. 복도 끝에 다다르자 안내
하던 사나이가 방문 하나를 열었다.
“자, 이리로 드십시오. 소인이 곧 기녀들을 불러 오겠습니다.”
두구는 긴 복도의 끝까지 데려온 것이 수상하다고 생각하며 사나이에게 물었다.
“방 안에 사람이 있나?”
“손님이 있다면 제가 어찌 또 손님들을 이곳으로 모시겠습니까?”
“좋아. 네가 들어가서 불 좀 켜라.”
사나이는 안으로 들어 갔다.
두구는 문 앞에 서서 진기를 모아 가슴을 보호하며, 사나이를 따라 들어 가지는 않았다. 불빛이
번쩍하더니 한 가락의 초에 불이 붙었다. 불이 밝혀지자 두구는 비로소 안으로 들어 갔다.
방은 매우 넓어 사방 이 장은 되었다. 사방 벽에는 짙은 자색의 휘장이 드리워져 있고 탁자며 바
닥에 깐 주단이며 보료 등 모두가 최고급품을 사용해서 우아하게 꾸며져 있었다.
“소인이 기녀들을 불러드리겠습니다.”
사나이가 나가려고 하자 두구가 입을 열었다.
“서두르지 마라. 우리 공자님은 지체가 높으신 분이니 내가 직책을 맡은 이상 소홀히 할 수 없다.
공자님에게 화가 미쳐선 큰일이니 좀 조사를 해야겠다.”
두구는 벽을 가린 천을 들쳐 세밀히 검토하더니 사나이에게 말했다.
“가 봐라. 술을 빨리 올리고 제일 아름다운 기녀들만 우선 들여보내라. 우리 공자께선 흥이 나시
면 이곳에서 하룻밤 묵으시게 될는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너희들이 어떻게 대하느냐의 수단에 달
렸다.”
“나리는 네 분이신데 왜 두 기녀만 부르십니까?”
“공자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두구가 불쾌한 어조로 말하자 사나이는 아무 소리도 못하고 나갔다. 그가 나가자 전엽청과 소영
은 방으로 들어가 앉았다.
상팔은 여전히 문 밖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소영이 낮은 음성으로 전엽청에게 말했다.
“저쪽 복도에서부터 이곳 객실까지 두 겹의 문호가 있는 것이 어째 기원같지 않은데요.”
“내가 이미 벽을 조사했으나 적의 매복이나 이상한 장치를 발견하지 못했소.”
두구의 대답에 소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백화산장의 망화루에는 층층마다 무서운 암기 장치가 매복되어 있소. 이 삼강서우도 심목풍이
경영하는 곳이라면 응당 보이지 않는 장치가 있을 거요. 우리는 방심하지 말고 각별히 주의해야
됩니다.”
이때 상팔이 헛기침을 하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아름다운 아가씨구먼.”
사람이 온다는 신호로 알고 전엽청은 급히 자세를 똑바로 하고 앉았다.
소영이 전엽청의 옆에 섰고 두구는 한쪽으로 물러가서 섰다.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주렴이 젖혀지더니 네 명의 미소녀가 향수냄새를 물씬 풍기며 나타
났다.
앞에 선 소녀는 소복차림을 했고 엷은 화장에 머리엔 붉은 꽃을 꽂았다. 그 뒤의 소녀는 녹색의
치마 저고리에 역시 간결한 차림새였다. 뒤에 두 소녀는 핏빛처럼 붉은 옷에 짙은 화장을 했으며,
그녀들 뒤에 시녀가 한 명 따르고 있었다.
시녀는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입을 열었다.
“여기 계신 네 분이 우리 삼강서우에서는 가장 인기가 있는 분들입니다.”
전엽청은 기녀들을 훑어 보더니 간결한 차림의 두 기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금조각 하나씩 드려라.”
시녀를 따라 들어 섰던 상팔이 얼른 금조각을 두 개 꺼내 시녀에게 주며 말했다.
“이것은 공자께서 앞에 있는 두 낭자에게 주는 것이다.”
시녀는 금조각을 받으며 얼떨떨한 표정을 짓더니 붉은 옷을 입은 두 기녀에게 나지막하게 말하고
는 먼저 나가버렸다.
“갑시다.”
붉은 옷의 두 기녀는 매우 기분이 나쁜 듯 입을 삐쭉거리며 홱 돌아서서 나가버렸다.
“낭자, 앉으시오.”
전엽청이 방에 남은 두 기녀에게 말하자 그녀들은 대담하게 앉았다. 소영은 그녀의 일거일동을
주시하며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전엽청은 어려서부터 무당산에서 성장했으므로 한 번도 여자와 마주앉아 본 적이 없었다. 이제
두 기녀와 마주앉은 그는 무슨 말을 꺼내야 좋을지 몰랐다. 그가 이곳에 온 목적은 기녀들과 술
타령을 하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심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동안 두 기녀만 바라 보던 전엽청은 그대로 앉아 있기가 쑥스러워 입을 열었다.
“낭자들은 삼강서우에 온 지 오래되었소? 이름이 무엇이오?”
흰옷을 입은 기녀가 대답했다.
“소첩은 백매(白梅)라 하옵고 이 애는 동생인 녹하(綠荷)라 하옵니다.”
녹색의 옷을 입은 기녀가 말을 이었다.
“박명한 여자들이라 이런 곳에 오게 되었습니다만….. 이곳에 온 지는 얼마 안 되었어요.”
‘이 여자들은 말하는 솜씨를 보니 다루기 쉽지 않겠다.’
전엽청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주안상이 들어 왔다. 주안상을 들고 들어 온 시녀가 두구를
힐끗 바라 보더니 보조개를 지으며 말했다.
“두 분 나리께서도 시중이 있어야 되잖겠어요?”
“이젠 늙어서 그런 생각이 없네.”
상팔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두구도 한 마디 했다.
“우리 공자 앞에서 버릇없이 까불지 마라. 너는 명재촉을 하고 싶으냐?”
시녀는 혀를 낼름 하더니 방을 나갔다.
백매가 술주전자를 들어 전엽청의 잔에 따르며 애교를 띠고 말했다.
“나리의 존함은 어찌 되시나요?”
“내 성은 정이라 하오.”
“정공자를 모시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천기가 한잔 올리겠어요.”
백매는 자기 술잔에 술을 따라 쭉 들이키더니 다시 술을 채워 전엽청에게 주었다.
전엽청은 그 술잔을 받아 입술로 맛을 보더니 백매에게 돌려 주었다.
“낭자의 성의를 무시해 미안하오. 나는 원래 술을 조금도 못하오.”
“공자님, 술을 못 드신다면 요리나 많이 드시와요.”
녹하가 은저(經書)로 닭고기를 한 점 집으며 말했다.
“저희 자매가 정공자의 사랑을 받게 되니 몹시 영광이에요. 나리께서 술을 입에도 대지 못하신다
니 술을 더 권하지는 않겠어요. 그 대신 안주나 드시와요.”
그녀는 전엽청의 입으로 고깃점을 가져 갔다. 먹을 수도 안 먹을 수도 없게 된 전엽청은 매우 난
처했다.
‘먹자니 안 될 일이오. 그렇다고 거절하자니 겁장이로 보일 테고 이거 일이 난처하게 되었는
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전엽청이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하나의 손이 나타나더니 녹하가 들고 있는 젓
가락을 잡았다.
“우리 공자께서 어떤 신분이라고 낭자는 이토록 무례하게 구시오?”
그것은 소영이었다. 소영은 손가락에 진기를 모아 젓가락을 통해 녹하의 손으로 보냈다.
‘너희들의 거동이 아무래도 하류계 여성 같지는 않다. 너희들이 무공을 지녔는지 어디 시험 좀
해 보자.’
이런 생각에서 소영은 젓가락을 통해 내력의 공격을 한 것이었다. 녹하는 소영을 바라 보며 눈을
두어 번 껌벅이더니 갑자기 가느다란 비명을 지으며 젓가락을 놓았다. 이것을 본 소영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흥, 그러면 그렇지. 내가 뻗친 내력이 비록 세지는 않았지만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얼굴이 부어 오르고 눈이 충혈되어 비명을 질렀을 것인데 너는 고의적으로 젓가
락을 떨어뜨리며 놀란 척하고 있군. 그것은 너무 엉터리 연극이야.’
“낭자, 왜 그러시오? 엄살이 대단하군.”
녹하는 소영을 노려 보더니 전엽청에게 애교가 뚝뚝 떨어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공자님, 이 서생은 무례하군요.”
전엽청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담담히 웃었다.
“낭자는 왜 그러시오? 어디 다치기라도 했소?”
“비록 부상을 당하진 않았지만 깜짝 놀랐어요.”
“그가 낭자의 손가락도 건드리지 않고 살도 닿지 않았거늘 무엇을 그리 놀랐다는 것이오?”
녹하는 화난 표정을 지으며 전엽청에게 반문했다.
“공자께선 정녕 보시지 못하셨단 말씀이세요?”
“글쎄. 난 영문을 모르겠는데…..”
녹하는 몸을 일으키며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천기는 비록 이런 곳에 몸을 담고는 있지만 어렸을 적에는 글도 읽었사와요. 또한 기방(妓房)에
도 어엿이 행규(行規)가 있는 법이옵니다. 공자께서 천기를 아껴주시는 것은 감사하옵니다. 또한
공자께서 천기를 경박하게 보신다 해도 할 수 없사와요. 그러나 일개 종의 몸으로 천기에게 그토
록 무례하게 대하다니….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천기는 이런 모욕을 당할 수가 없사옵니다.”
“얘, 어서 앉아라! 이 정공자께선 풍채와 인품이 우아하고 고결하신 것으로 보아 고관대작의 직계
임이 분명하시다. 네가 어찌 잠깐의 수모를 빙자해 공자님께 무례를 범하려고 그러지?”
녹하는 못 이기는 척 자리에 다시 앉았다.
백매가 전엽청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공자께선 너무 불쾌하게 생각지 마시와요. 천기의 동생은 워낙 성미가 급해서….. 그 성질 때문게
많은 단골손님들을 뺏기기도 한답니다. 호호호, 옛말에 대인은 소인을 나무라지 않는다 하였으니
공자께서 천기의 동생을 더 꾸중하시지 않으실 줄 믿사옵니다. 동생의 무례한 죄를 대신해서 천
기가 술을 올리겠사와요.”
백매는 술잔을 들어 잔을 비우더니 다시 술을 따라 전엽청에게 내 주었다.
‘흥, 잘들 논다. 기껏해야 너희들이 술과 음식을 권하는 수작밖에 안 부리는구나. 필경 이 음식에
는 무슨 곡절이 있으렷다.’
소영이 그녀들을 더욱 의심하여 경계하는데 전엽청이 술잔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마시는 시늉을
했을 뿐 도로 잔을 내려 놓았다.
백매는 더 이상 권하지 못하고 이번에는 소영에게 얼굴을 돌려 추파를 던지며 말했다.
“소관(小官), 오늘 저의 동생 녹하는 정공자께서 부르신 것이에요. 우리의 행규로는 한 사람에게
불린 이상 다른 사람의 시중을 들 수는 없어요. 그러나, 오늘 저녁 정공자께서 녹하의 시중을 거
절하신다면, 내일 일찍 오세요. 녹하가 시중을 들도록 하겠으며 그땐 어떤 행동을 해도 녹하가 화
를 내지 않을 것이에요.”
이 말을 들은 소영은 인피가면 속으로 얼굴을 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