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10)
9. 마법의 명문 아인하트 후작가
용병 길드로 간 엘 일행은 곧장 세레나와 카이나의 용병 시험을 치렀다.
그리고 용병 시험 결과 그녀들은 각각 B급의 용병패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런 후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는 실피르를 데리고 다시 여관으로 데려왔다. 알카이드 황태자를 만난 이후 실피르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고 있었다.
“잠시 여기서 기다리고 계세요.”
방에 실피르를 데려온 엘은 세레나와 카이나를 데리고 밑으로 내려갔다.
“‥‥‥.”
방 안에 홀로 남은 실피르의 표정은 복잡했다. 어렸을 적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안겨다 준 황태자와의 만남으로 인해 불안감이 뭉클뭉클 솟아났다.
‘왜. 알카이드 황태자가‥‥‥.’
본래 그녀는 엘을 데리고 조용히 아인하트 후작가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녀 본인은 가문 조용한 곳에서 마법을 익히며 생을 보내려 했다.
알카이드 황태자와의 파혼 건도 그녀가 빌미를 제공했다.
파혼되기 전 알카이드 황태자는 실피르에게 집착에 가까운 광기를 보였고, 한 번은 겁탈당할 뻔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그가 무서웠고, 그러던 중 지금은 죽어 버린 남편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알카이드 황태자가 자신을 사랑하는 건지 그런 것은 실피르와 관계가 없다. 단지 여전히 그 감정의 잔재가 남아 있다면 가문에 돌아간 뒤 잠재적인 위험이 있을 거라 생각했을 뿐이다.
그녀는 엘이 가르쳐 준 단전호흡이라는 것으로 자신의 실력은 물론 외모 또한 더욱 예뻐졌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가문으로 돌아갈 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알카이드 황태자를 만나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은 황태자에게 있어 가릴 수 없는 흉터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뭣보다 황태자는 여전히 자신에게 집착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당장에라도 자신을 첩으로라도 들이려고 할 수 있음을 알았다.
실피르는 불안했다.
알카이드 황태자가 자신을 원하는 건 상관없다. 그녀에게 있어 모든 것은 엘이였기에‥‥‥ 엘이 아인하트 후작가에 들어가 훌륭하게만 자랄 수 있다면 그녀는 기꺼이 희생할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실피르는 알카이드 황태자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잔혹하고 포악한 그의 성격을‥‥‥.
그의 성격을 본다면 비단 자신을 첩으로 들이려는 시도만 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거치적거리는 엘을 죽이려 들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불안해하는 것이다.
엘을 위해 황태자의 첩이라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황태자는 자신과 결혼한 뒤 아들이 될 엘을 용납할 리 없을 것이고, 아인하트 후작가 또한 엘을 위해 황태자와 척을 지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갈등했다. 이대로 다시 카시아스 왕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아인하트 후작가 라는 곳이 엘에게 있어 너무나 큰 후광이 될 거라는 걸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엘의 재능이라면 아인하트 후작가의 직계인 그가 후작이 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가문을 위해 모든 짓을 서슴없이 하는 아인하트 후작가인 만큼 아직 자식이 없는 글레톤을 뒤를 이어 아인하트 후작가의 주인이 될 확률이 높았다.
아인하트 후작!
그 자리를 엘이 차지하게 된다면 그녀가 살던 카시아스 국왕도 엘 앞에서 극도의 공경을 표해야 할 것이다.
그만큼 아인하트 후작가의 힘과 위세는 대단했다.
“후, 어떻게 해야하지‥‥‥.”
6클래스 마스터가 된 그녀였지만 정치적인 이해관계는 대략 겉핥기 정도만 파악할 수 있을 뿐, 이렇다 저렇다 결정은 내릴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알카이드 황태자가 자신을 본 이상 일이 쉽게 해결될 거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실피르는 이렇듯 고민에 빠진 것이다.
“엄마, 들어가요.”
그때 엘의 목소리가 들려오며 문이 열렸다. 그리고 엘이 들어왔다.
자신을 쏙 빼닮은 금발과 하얀 피부, 그리고 푸른 눈동자. 그리고 자신을 남장시켜 놓은 듯한 외모. 굳이 다른 점이 있다면 약간 고집 있어 보이는 저 입매가 그녀의 남편과 닮았다. 남편을 잃고 가문에서 축출된 후 자신의 모든 것이 된 아들, 엘.
황태자를 만나고 이도 저도 아니게 된 처지 때문에 그녀는 눈물이 고이는 걸 느꼈다.
만약 자신이 이곳으로 오자고 하지만 않았다면‥‥‥.
자신에게 집착하는 황태자를 생각했더라면‥‥‥.
지금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 마냥 자신의 책임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엘에게 더 미안했다.
자신이 주도한 일에 엘이 끼여 자칫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기에‥‥‥.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다.
황태자는 자신을 주시할 것이고, 그렇다면 더더욱 아인하트 후작가로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7클래스 마스터인 아인하트 후작이라면 엘의 뛰어난 재능을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매직 스톤과 함께 엘의 안위를 부탁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실피르는 그 가능성에 믿음을 걸었다.
소문에 들은 대로라면 그 고집 세고 가문의 영광에 미쳐 있던 아인하트 후작의 성정이 조금 누그러진 것이니 말이다.
그래도 여전히 가문의 영괄을 위한다면 자신을 맞이하고, 매직 스톤을 조건으로 건다면 기꺼이 보호해 줄 것이다.
매직 스톤은 그만큼 가치가 있는 물건이다.
엘에게 허락을 구하지는 않았지만 엘도 자신의 의견에 동의해 줄 것이다. 아직 어린 엘인 만큼 굳이 아인하트 후작가를 고집하는 자신의 생각을 이해를 못하겠지만, 지난 시간 동안 생각한 결과 이 방법이 최고라 판단했다.
그렇게 엘을 바라보던 실피르는 엘의 손에 쥐어진 것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
“헤헤, 안 될까요?”
놀라는 실피르의 모습에 엘이 짐짓 귀엽게 웃었다.
그의 양손에는 술이 한가득 들려 있었다.
그에 실피르가 뭐라 말하려다 멈추었다. 귀엽게 웃던 엘이 걱정이 담긴 어조로 입을 연 것이다.
“엄마가 오늘 그 남자를 만나고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요. 술을 마시면 잠시지만 그러한 것들을 잊을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러니 오늘은 마음껏 마시세요. 제가 옆에서 도와 드릴게요.”
“저희도 도와 드릴게요, 어머님.”
엘의 뒤를 이어 세레나와 카이나가 양손 가득 음식을 가지고 왔다.
술을 마시는 데 꼭 필요한 안주였다.
“하‥‥‥ 언제 이렇게‥‥‥.”
아이들의 예상외의 행동에 실피르가 맥 풀린 표정을 짓 자, 엘을 비롯한 두 여인이 배시시 웃었다.
엘이 음식을 식탁에 놓고 실피르에게 잔을 권하며 말했다.
“내일이면 후작가로 갈 거잖아요? 그러니 오늘 그걸 기념하면서 한잔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저도‥‥‥ 조금 마시고요, 헤헤!”
세레나와 카이나에게는 한없이 어른답지만 실피르 앞에서는 영락없는 아이가 되는 엘.
어린 나이에 천재적인 재능을 지니고서도 오만하지 않았으며, 대륙의 부를 쥘 기회를 가졌음에도 적절한 판단으로 위험을 회피했다.
실피르는 남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자신의 아들이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의 아들‥‥‥.
엘이 권하는 잔을 받아 든 실피르는 술잔에 조르르 따라지는 술을 바라보았다. 영롱한 보랏빛 와인을 바라보며 그녀는 엘의 눈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실피르를 향해 웃음을 짓고 있었다. 너무나 따뜻한 웃음.
자신의 버팀목이 되어 줄 아들에게 망설임 없이 기대고 싶을 정도로 따뜻하고 정이 담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표정 아래 엘은 실피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 순간 더 없이 따뜻하고, 더 없이 정감 있는 목소리로.
“저는 엄마의 판단을 믿어요. 설사 엄마의 판단이 잘못 되어도 저는 엄마를 원망하지 않아요. 모든 게 저를 생각 한, 저를 사랑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걸 아니까요. 그러니 엄마도 당당하게 행동하세요. 엄마는 누구에게도 아쉬울 것 없는 뛰어난 마법사잖아요. 그리고 엄마 곁에는 항상 제가 있어요. 그러니 저희에게 웃음을 보여 주세요. 예쁜 얼굴이 수심에 잠기면 미워져요.”
왜 눈물이 나는 걸까.
이 순간 실피르가 느끼는 감정은 그 무엇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들.
자신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보여 주는 엘의 모습에 그녀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이것이 아들의 사랑일까.
고마워, 엘.
“응, 그럴게. 고마워. 이 엄마를 믿어 줘서.”
그러면서 실피르는 웃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웃는 그녀의 모습은 여태껏 보아 왔던 모습 중 가장 아름다웠다.
엘의 말로 실피르는 마음을 굳힐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좀 더 당당하게 행동하기로 했다.
‘엘리의 말대로야. 내 판단을 믿자.’
이대로 다른 국가에서 작위를 얻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정치에 미숙한 그녀는 자신이 이용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냉혹하지만 아버지라면 엘리를 잘 이끌어 줄 거야. 엘리는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으니까.’
아무것도 없이 시작하는 것과 배경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은 그 출발점에서 어마어마한 차이가 난다.
실피르는 아인하트 후작가라는 배경을 얻고, 엘이 그곳에서 자신의 재능을 모두 펼칠 수 있기를 바랐다. 엘의 재능은 너무나 대단했으니까‥‥‥.
엘은 모르지만 실피르가 엘 모르게 마나 스캔을 해 본 적이 있다.
그때 엘은 놀랍게도 5클래스 익스퍼트에 해당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딱히 말은 안 했지만 엘은 이미 5클래스 익스퍼트에 든 것이다.
그것으로 실피르는 확신할 수 있었다.
엘은 천재라고. 그리고 아인하트 후작가 비전의 마법을 익히면 다음 세대는 엘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말이다.
실피르는 자고 있는 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엘을 깨우기 위해 다가오는 카이나를 보고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에 카이나가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세레나와 함께 방 밖으로 나섰다.
두 사람이 방을 나서자 실피르도 엘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후우!”
실피르가 나가자 눈을 감고 있던 엘이 눈을 뜨고는 한 숨을 내쉬었다.
아인하트 후작가에 들어서는 문제로 인해 실피르는 아직도 고민이 많은 듯했다.
마음 같아서는 가지 말자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아인하트 후작가가 주는 유혹이 너무나 강렬했다.
물론 엘이 권력에 대한욕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가족과 이별해야만 했던 실피르에게 가족과 다시 만나는 기쁨을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그 뒤의 일은 어떻게 될지는 엘도 모른다.
단지 아인하트 후작이 소문과 달리 전혀 변함이 없고 황태자가 실피르를 보던 그 눈이 그대로라면‥‥‥.
한 차례 큰 사단이 일어날 거란 예감이 들었다.
‘만약 황태자가 어머니에게 허튼수작을 부린다면 절대 용서치 않겠어. 내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엘은 주먹을 굳게 쥐었다.
엘이 일어난 것을 확인한 실피르는 아침 식사를 마친 뒤 곧장 준비를 하고는 여관을 나섰다.
아인하트 후작가는 황궁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함과 동시에 주변에서 가장 큰 저택을 소유하고 있다.
거대한 제도 캐퍼밀에 위치한 곳이라지만 워낙 규모가 큰 곳이라 엘 일행은 무려 두 시간을 걸어서야 아인하트 후작가의 정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말 크네요.”
“와아‥‥‥.”
어느 왕궁 못지않은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아인하트 후작가를 보며 세레나와 카이나가 감탄사를 흘렸다.
‘정말 크네.’
당금 성세를 자랑이라도 하듯, 보기만 해도 질릴 정도로 큰 후작가를 보며 엘도 속으로 내심 놀랐다.
저택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만 해도 그들이 살던 반자크의 성벽 못지않은 높이였으니 오죽하겠는가.
그런 후작가를 보며 실피르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전혀‥‥‥ 변하지 않았네.”
그와 함께 실피르가 마음의 준비를 한 듯 후작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농염함과 싱그러움을 겸비한 늘씬한 금발 미녀가 다가오자 넋을 잃고 실피르를 바라보던 후작가 경비병들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실피르가 착용하고 있는 로브를 알아 본 것이다.
아인하트 후작가는 하루에도 수십 명의 마법사가 오가는 곳이다. 그중에는 고위 마법사도 많았기에 사람을 섣불리 대할 수 없었다.
“이곳은 아인하트 후작가입니다 무슨 용건으로 찾아 오셨습니까?”
자세를 바로 한 경비병이 묻자 실피르 뒤에 서 있던 엘이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제국 최고의 가문이라 불릴 정도로 기강이 잘 잡힌 걸 느낀 것이다.
“가주님, 후작 각하께서 계시나요?”
한 차례 심호흡을 한 실피르가 입을 열었다.
“물론 계십니다만‥‥‥ 자세한 사정은 저 또한 잘 모릅니다. ”
경비병이 알고 모르고 사실이 중요한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말의 내용에는 상대를 가려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가 존재했다.
그러나 실피르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인하트 후작도 정보망을 가지고 있을 터, 자신이 왔다는 걸 알 면 분명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실피르가 경비병을 향해 말했다.
“아인하트 후작 각하께 전해 주세요. 십칠 년 전에 나간 실피르가 되돌아왔다고!”
“실피르‥‥ 실피르‥‥‥ 헉 ! 설마?”
실피르의 이름을 중얼거리던 경비병이 돌연 두 눈을 크게 떴다. 17년 전 후작가에서 쫓겨난 딸의 이름이 바로 실피르였던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곧장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
경비병이 재빨리 후작가 안으로 들어섰다.
사라진 경비병을 보며 실피르의 눈에는 알 수 없는 기대감과 불안감이 동시에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실피르의 모습을 엘이 바라보다가 후작가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엘의 눈은 평소와 전혀 다른 빛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누구보다 차가운 냉정함을 지닌 현자의 눈이었다.
잠시 후, 60대 외모를 한 노인과 40대 중반의 중년인이 빠른 걸음으로 실피르가 있는 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본 실피르가 억눌린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 그리고 오라버니‥‥‥.”
“실피르!”
그렇게 실피르는 17년 만에 가족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남편을 잔인하게 죽인, 그렇지만 한 피로 묶인 가족을‥‥‥.
“미안하구나, 실피르! 내가 미안했다.”
실피르 앞에 다가온 노인, 아인하트 후작은 곱고 하얀 실피르의 양손을 잡으며 연신 사과를 하였다.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울림과 내용이 함께 섞여 미안한 감정이 애절하게 느져졌다.
“흑!”
그 말의 내용에 실피르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그 자존심 높고 가문의 영광만 쫓던 아버지가 지금은 이렇게 늙은 모습으로 자신에게 사과를 하는 것이다.
감정이 복받쳐 올라왔다. 그리고 아버지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만약 자신이 아버지의 뜻대로 따랐다면‥‥‥.
물론 죄송한 마음만 들지 후회는 하지 않는다. 자신은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엘이라는 사랑스러운 아들을 낳았으니까.
하지만 그와 반대로 자신의 일로 아인하트 후작이 겪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죄송한 마음이 절로 들었다.
얼마 전에야 알았지만 자신의 일로 인해 아인하트 후작가의 세력이 눈에 띌 정도로 감소했다고 한다.
게다가 딸까지 내쳐 아인하트 후작이 무려 한 달여 동안 식음을 전폐했다고 한다.
이러한 것들이 복합적으로 섞이니 남편을 죽인 아버지 임에도 원망할지언정 미워할 수 없는 것이다.
가족의 정‥‥‥그것을 엘을 낳고 난 뒤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달은 실피르 였기에.
“널 내치고 난 뒤 내가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잘 돌아왔다, 실피르.”
“죄송해요, 아버지.”
복잡한 상태인 실피르가 할 수 있는 건 이 말뿐이었다.
그런 실피르의 심정을 안다는 듯, 짐짓 고개를 rM덕인 아인하트 후작이 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아들이냐?”
“네, 그이의 아들이에요. 엘리, 인사하렴. 이분이 바로할아버지란다. ”
눈물을 닦아 내며 실피르가 아인하트 후작을 소개하자 엘이 아인하트 후작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엘이라고 합니다. 할‥‥아버‥‥지.”
남들이 듣기에는 감정에 복받쳐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엘은 부르기 싫은 것을 억지로 부른 것뿐이다.
엘은 보았다.
실피르가 그이의 아들이라 할 때 아인하트 후작의 눈에서 스쳐 지나간 눈빛을.
그것이 어떤 걸 의미하는지는 모르지만 결코 좋은 것이 아니란 것은 알 수 있었다.
“오냐, 내가 바로 너의 할아비다. 이제라도 만나서 다행이구나.”
그러면서 아인하트 후작의 손이 엘의 어깨에 올려졌다.
그 순간 글레톤과 엘이 아니면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마나 스캔이 시전되었다.
7클래스 마스터인 그의 마법은 같은 7클래스 마법사가 아니라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고 빨랐단 것이다.
엘은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화들짝 놀랐다. 아인하트 후작이 찰나의 순간 시전한 마법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캐스팅된 것이다.
이것은 엘이 브리온에게 수식을 고쳐 준 것과 거의 비슷한 속도였다.
‘이건가? 이것이 바로 아인하트 후작가의 비전 마법 중 하나인가?’
방금 시전된 마법 캐스팅 속도라면 소드 마스터와 겨뤄도 결코 지지 않을 것이다.
지난 세월 8클래스 마법사를 무려 세 명이나 배출한 아인하트 후작가의 저력은 그만큼 놀라웠던 것이다.
반면, 엘에게 마나 스캔을 시전한 아인하트 후작은 경악에 빠졌다.
‘이, 이건? 저, 정말 사실이란 말인가?’
실피르가 이곳에 돌아왔다는 것은, 6클래스 마스터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자 그 아들인 엘은 얼마나 성취를 얻었을까 궁금해졌고, 마나 스캔을 시전하였다.
그리고 얻은 정보, 그것은 정말 놀랍다고 할 수밖에 없다.
고작 열일곱 살에 불과한 엘에게서 무려 5클래스 익스퍼트에 해당하는 기운이 느껴진 것이다.
‘정말 놀랍군. 무언가 특별한 비법이 있는 건가? 그렇다면 가문은 한층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할 수 있다. ‘
아인하트 후작의 눈에서 순간 탐욕이 스쳐 지나갔다.
열일곱 살에 불과한 엘을 5클래스 익스퍼트로 끌어 을린 비법.
그것이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실피르가 30대 초반의 나이에 6클래스 마스터에 이른 걸 보아 그 방법이 존재함을 느꼈다.
점점 나이가 들어 8클래스에 대한 욕심을 접고 있는 아인하트 후작에게 친어 그것은 한 가닥 희망이 되어 나타났다.
하지만 아직 그 속셈을 드러내면 안 된다.
실피르는 여전히 상처를 입었고, 가문에 대해 마음을 활짝 연 상태가 아니니까‥‥‥.
아인하트 후작이 생각에 빠지자 글레톤이 나섰다.
“십칠 년 만에 만나는구나, 실피르. 반갑다. ”
“네, 오라버니 ‥‥‥.”
실피르가 대답하자 글레톤은 세레나와 카이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녀들의 미색이 대단하기도 대단했지만 어떠한 신분인지도 궁금했다.
“저들은 누구지?”
“‥‥‥제 제자들이에요.”
하녀라 할 수 없고, 엘의 제자라고 할 수도 없던 실피르가 가장 무난한 대답을 하였다.
“그렇구나.”
그러자 글레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아인하트 후작과 실피르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아버지, 안으로 들어가셔서 이야기를 나누시는 게 어떻습니까?”
글레톤의 말에 아인하트 후작이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음! 그러도록 하자.”
“따라와라.”
글레톤이 앞장서자 그 뒤로 사람들이 따라갔다.
세레나와 카이나는 후작가 안으로 들어설 때부터 불안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제국의 명문가다 보니 공기가 무척 무겁게 느껴진 탓이다.
엘이 그런 두 여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두 여인에게 엘이 빙긋 미소 지어 주었다.
“너무 불안해하지 마. 내가 있잖아? 이럴 때는 나를 믿고 의지해.”
엘의 말에 두 여인의 표정이 밝아진다. 그리고 고개를 Rm덕 이며 대답했다.
“네 !”
“그럼 가자.”
엘이 앞장서자 두 여인이 뒤를 따랐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넓은 응접실에 앉은 아인하트 후작이 실피르의 근황을 물었다.
그 물음에 실피르가 대답했다.
“정신없이 마법 수련을 하면서 보냈어요. 가문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6클래스 마스터가 되어야 했으니까요. ”
“미안하다. 너를 보내고 난 뒤 후회를 해서‥‥‥.”
정말 미안한 표정을 짓는 아인하트 후작을 보며 실피르는 한숨을 쉬었다.
“저 또한 그이와 함께 떠나 아버지께 누를 끼친 건 무척 죄송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전 그이를 진심으로 사랑 했고, 제 행동에는 후회하지 않아요. 아버지는 가문을 위해서 그러신 것이고, 저는 제 자신을 위해서 그런 것이니까요. 가문을 위해서 하신 행동이니 아버지가 제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되요.”
“으음‥‥‥ 그래, ”
무거운 한숨을 흘리는 아인하트 후작 얽힐 대로 얽힌 매듭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기류가 형성되자 분위기도 자연히 무거워졌다.
그때, 글레톤이 분위기를 해소하고자 끼어들었다.
“어쨌든 가문에 돌아왔으니 편히 쉬어라. 그동안 외지에서 적잖이 고생하지 않았더냐.”
“고생이라‥‥‥ 고생을 좀 하긴 했죠. 그보다‥‥ 아버지 !”
“왜 그러느냐?”
갑자기 자신을 힘주어 부르자 아인하트 후작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실피르는 자신 옆에 앉아 있는 엘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버지라면 알아봤을 거라 생각해요. 우리 엘리의 뛰어난 재능을요.”
아인하트 후작이 수긍했다.
“물론이다. 확실히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더구나.”
이 말만큼은 진심이다.
그만큼 엘의 재능은 대단했다. 고작 열일곱의 나이에 5클래스 익스퍼트에 들지 않았던가.
완벽한 아인하트 후작가의 일원만 된다면 글레톤의 뒤를 이어 아인하트 후작가를 맡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엘은 아직 검증된 아이가 아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도 아인하트 후작가에 대한 애정이 없어서는 결코 후계자로 삼을 수 없었다.
그것이 아인하트 후작의 생각이었고, 지금까지 내려온 가법이었다.
그때, 글레톤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 실피르, 혹시 재혼할 생각이 없더냐?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좋은 혼처를 알아봐 줄 수 있다만‥‥‥.”
그 말에 실피르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엘의 눈에서 새파란 안광이 흘러나오다가 이내 갈무리되었다.
“재혼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제 마음속에는 아직 그이가 있거든요. 아마 평생 제 가슴속에는 그이만 남을 거랍니다.”
단호하고 힘 있는 실피르의 대답에 글레톤이 단념한 기색을 보였다. 실피르의 의지가 워낙 굳건해 보였다.
“그렇구나, 그래‥‥‥.”
글레톤 옆에 앉아 있던 아인하트 후작의 눈에 탐탁지 않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순식간에 그 기운이 사라졌지만 아인하트 후작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엘은 그것을 곧장 알아차렸다.
그것으로 엘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아직 아인하트 후작이 마음을 고쳐먹었는지 그것은 모르지만 여전히 실피르와 아버지의 관계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을‥‥‥.
“‥‥‥.”
실피르의 단호하다 싶을 정도로 똑 부러진 대답에 대화가 다시 끊기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때, 응접실 밖에서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작 각하, 일급 마법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일급 마법 편지? 알았다.”
일급 마법 편지라면 무척 중대한 사항이 담긴 편지다.
대답을 한 아인하트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글레톤에게 눈길을 주자 글레톤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인하트 후작은 실피르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만난 지 오래되어 아직 어색한 것 같구나. 잠시 일이 생겼으니 그걸 천천히 둘러보고 오마.”
“고맙습니다, 아버지.”
“고맙긴‥‥‥.”
그러면서 아인하트 후작은 응접실 밖으로 나갔고, 글레톤 또한 아인하트 후작의 뒤를 따라 응접실을 벗어났다.
“어디서 온 일급 편지더냐?”
집무실에 도착한 아인하트 후작은 자신을 이곳으로 향하게 한 일급 편지의 출처를 묻자, 집무실에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가 대답했다.
“황궁에서 온 일급 편지 였습니다. ”
“그래? 갑자기 황궁에서 왜‥‥‥.”
블리어드 제국의 귀족인 아인하트 후작은 현재 황제 쪽과 대립하고 있는 귀족파의 수장이다.
그런데 갑자기 황궁에서 편지가 왜 오는 것인가?
“그럼 전‥‥‥.”
일급 편지는 매우 중요한 사항을 담고 있었기에 마법 편지를 받은 마법사는 눈치껏 집무실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궁금증이 담긴 글레톤의 시선을 받은 채 아인하트 후작이 편지를 펼쳤다.
황궁에서 온 편지를 읽던 아인하트 후작의 표정이 점점 밝아지더니 이내 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크크큭! 그래, 그런 것인가? 황태자가 잠행을 나갔다가 실피르를 본 것이로군. 그러고 보니 과거 황태자는 실피르에게 푹 빠졌었지‥‥‥ 내가 찬성만 한다면 실피르를 첩으로 받아 주겠다라‥‥‥ 재미있군, 재미있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버지?”
글레톤이 묻자 아인하트 후작이 대답했다.
“이번에 황태자가 잠행을 나가는 일이 있지 않았더냐.”
그에 글레톤은 얼마 전 황태자가 황궁을 벗어나 평민들의 생활을 관찰한다는 명목으로 잠행을 나간다는 보고를 본 적이 있다.
“예, 분명 며칠 전에 잠행을 나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황태자가 그때 실피르를 봤던 모양이더구나. 그리고 이렇게 적혀 있더군. 과거 불미스러운 일로 정혼이 파기 되었지만 다시 그 정혼을 부활시켰으면 좋겠다고 말이야.”
“그럼 ‥‥‥.”
글레톤의 눈에 열기가 담겼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얻은 것이다. 황태자와 사돈 관계로 얽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일단 매직 스톤에 대한 비법을 빼내는 것이 중요하겠군요. 그리고 그 뒤에 실피르를 황태자에 보내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구나.”
참으로 잔인한 부자였다.
17년 만에 돌아온 딸에게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안겨 준 황태자에게 다시 보낼 생각을 하다니 ‥‥‥.
하지만 아인하트 후작과 글레톤에게 이러한 것은 당연 한 일이었다.
제국 최고의 명문가 아인하트 후작가!
그 명성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꼭 희생해야 했기에‥‥‥.
그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한편, 실피르를 비롯한 엘과 두 여인은 아인하트 후작가 내에 있는 방을 배정받았다.
그들이 배정받은 방은 수백 개의 방을 가지고 있는 아인하트 후작 저택 내에서도 가장 고급에 속하는 방이었다.
개개인마다 모두 방이 배정되었지만, 실피르가 극구 주장하여 실피르와 세레나 카이나가 한 방을 쓰고, 바로 옆을 엘이 쓰게 되었다.
애초에 짐들을 모두 아공간에 넣어 뒀기에 방에서 씻고 나온 엘은 실피르가 머물고 있는 방으로 갔다.
여인들도 모두 목욕을 했는지,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새하안 피부에 약간 홍조가 어린 얼굴, 그리고 촉촉한 머릿결은 향긋한 향기를 동반하고 있었다.
기분 좋은 향기에 엘은 기분이 조금 풀어지는 걸 느꼈다.
실피르가 문 앞에 멀뚱하게 서 있는 엘에게 말했다.
“왔니? 앉으렴.”
“네.”
여인에게서 풍기는 은은한 향기를 맡으며 엘은 방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엘은 아름다운 세 여인을 찬찬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목욕을 마친 뒤라 그런지 그녀들의 표정은 모두 밝았고, 편안해 보였다.
언제까지 이렇게만 살았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능력이 있으면 그것이 불가능한 게 바로 세상이다.
이곳이나 전생 대한민국에서나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그녀들을 바라보던 엘이 실피르에게 시선을 주었다.
실피르도 엘의 시선을 느꼈는지 엘을 마주 보았다.
엘이 실피르를 향해 말했다.
“할 말이 있어요.”
“해 보렴.”
실피르가 말해 보라는 듯 제스쳐를 주자, 엘이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할아‥‥‥ 아니, 아인하트 후작의 눈치가 이상해요. 그냥 이대로 나가서 저희들끼리 살면 안 될까요?”
엘은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캐퍼밀에 퍼진 소문 그대로 행동하는 아인하트 후작의 모습에 감정 기복이 심했던 실피르는눈치 채지 못했지만 냉정하게 시태를 살피던 엘은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아인하트 후작의 행동이 가식이고,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애당초 엘은 아인하트 후작가에 들어올 생각이 없었다.
단지 어머니인 실피르의 가족이고, 그녀가 가족을 원망하는 가운데 한 줄기 그리움이 있었기에 아인하트 후작가에 온 것이다.
엘에게 있어 아인하트 후작가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에게 슬픔을 가져다준 그곳,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마법을 배움에 있어 부족한 것도 없었다. 거기에는 귄력이란 걸 제대로 실감해 보지 못한 엘의 무지도 끼어 있었다.
아인하트 후작가의 위세를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엘의 관점에서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기에 굳이 아인하트 후작가로 갈 필요를 못 느꼈다.
하지만 엘은 실피르가 아인하트 후작가로 가겠다고 할 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위해서 한 말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이면에는 가족을 한 번쯤 만나고 싶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순순히 따라나선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왔을 때 아인하트 후작이 실피르에게 대하는 행동을 보고 이상함을 느꼈다. 간간히 스쳐 가는 불길한 눈도 눈이지만 무언가를 바라는 듯한 느낌도 받았기 때문이다.
그때, 엘의 머리에서 번개같이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바로 마법사에게 있어 무한한 가치를 가져다주는 물건, 매직 스톤이다.
아인하트 후작가가 대단한 위세를 가졌다면 필시 엄청난 정보력 또한 지니고 있을 터, 그렇다면 매직 스톤의 개발자가 자신임을 아인하트 후작이 모를 리 없던 것이다.
그것을 깨닫자 엘의 뇌리에 순식간에 하나의 스토리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슬프고 절망스러운 이야기였다.
실피르가 들으면 희망을 잃어버릴, 하지만 진실을 꼭 들려주어야 하는 그런 이야기였던 것이다.
확신은 없지만 그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아니, 틀림없다.
지금이라면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 엘은 실피르가 상처 받길 원하지 않았다.
“저는 후작 같은 걸 바라지 않아요. 제가 원하는 건 엄마를 모시면서 행복하게 사는 거예요.”
“엘리‥‥‥.”
실피르가 엘의 이름을 부르며 고운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6클래스 마스터인 그녀의 감각이 어찌 가만히 있을까.
아인하트 후작의 환대를 받기는 했지만 이미 6클래스 마스터에 이른 그녀의 감각은 말하고 있었다.
아인하트 후작의 태도가 약간 이질적이라고‥‥‥ 그의 행동은 진심이 아니라고‥‥‥.
하지만 오랜만에 가족을 만났다는 것에 느끼는 반가움과 원망, 그리고 여러 개의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여 차마 다른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6클래스 마스터라고 하나 반자크에서만 근 10년 이상을 살아왔다. 세상을 많이 겪은 것도 아니고, 주변에 많은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사람 관계에 밝은 것도 아니다.
6클래스 마스터답게 정신이 깊고 성숙했지만 가족 관계에 있어서는 아직 미숙했다.
왜, 그런 말도 있지 않던가.
그랜드 마스터를 죽이려면 본인을 찾지 말고 그의 가족들을 찾으라고. 그만큼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을 동요케 할 사람은 가장 가까운 가족밖에 없는 것이다.
‘엘리의 말이 옳을지도‥‥‥ 하지만‥‥‥ 만약 엘리가 후작이 된다면‥‥‥.’
실피르는 훗날 후작이 된 엘의 모습을 떠올렸다.
당당한 청년으로 자라나 제국 최고의 천재라 불리며 후작가를 이끄는 엘의 모습.
엘이 발견해 낸 특유의 비법과 아인하트 후작가의 비전이 합쳐지면서 다섯 배 이상 단축된 마법을 시전하는 엘은 분명 제국의 최고 실세로 떠오를 것이다.
설사 접목을 못 시키더라도 엘의 천재적인 재능과 아인 하트 후작가의 비전이 합쳐진다면 그 상승효과는 대단할 것이다.
대륙의 모든 마법사들에게 추앙을 받으며 아인하트 후작가를 빛내는 엘의 모습을 생각하니‥‥‥ 절로 두근거리는 실피르였다.
제국 최고의 귀족, 한 왕국의 국왕도 무시하지 못하는 대귀족이자 대마법사.
이것이 바로 실피르가 바라는 엘의 모습이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존중받으면서 모든 마법사들에게 존경받는 그런 이가 되는 것. 바로 그런 모습이었다.
엘은 바라지 않지만 실피르는 엘이 이렇게 되길 바랐다.
권력이란 게 아직 어떤 건지 구체적으로 모르는 엘이지만 훗날 그것을 깨달을 때는 자신을 이해해 줄 것이다.
엘의 미래를 위해서라고 생각하자 실피르는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래, 아버지는 분명 매직 스톤을 바라고 있을 거야. 가족으로서 대하는 것이 아닌, 협상자로서 대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는 이게 나아.’
마음을 굳힌 실피르가 엘을 바라보았다.
빤히 마주치는 두 개의 푸른 눈동자.
그것들은 그 무엇보다 밝은 빛을 담고 있었다.
서로를 걱정하는 마음이 더없이 순수한 것이다.
실피르가 엘에게 말했다.
“엘리, 이 엄마를 믿어 주렴. 엄마는 엘이 잘되길 바란 단다. 아직‥‥‥아직 엘리가 엄마의 마음을 이해 못하지만‥‥‥ 훗날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거란다. ”
“엄마‥‥‥.”
엘은 아무런 말도 못했다. 그리고 순간 자신이 생각한 결론을 말해 주고 싶었다.
아인하트 후작은 자신들을 진심으로 반긴 것이 아니라고‥‥‥ 목적이 있던 것이라고.
하지만 지금 이것은 아무런 물증도 없는 생각일 뿐, 공연히 실피르에게 상처를 주는 격이 될 수 있다.
“‥‥‥.”
엘이 침묵을 지키자 실피르 또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푸른 눈동자에 아름다운 빛을 담은 채 엘을 응시할 뿐이었다.
자신의 뜻대로 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이해를 바라는 감정을 담은 채로 말이다.
똑똑.
그때 누군가 노크를 했다. 그리고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목욕 다 하셨나요?”
“아, 네 다 했답니다. ”
실피르의 대답에 여성이 자신이 찾아온 용건을 말하였다.
“후작 각하께서 찾으시는데‥‥‥ 아가씨의 의향이 어떠신지‥‥‥.”
마침 잘됐다는 표정을 짓는 실피르. 아인하트 후작이 자신을 찾는 이유는 십중팔구 매직 스톤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 분명했다.
그녀 또한 애초에 이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아인하트 후작가라면 분명 자신과 매직 스톤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 것이기 때문이다. 매직 스톤을 활용하여 엘을 가문의 일원으로 만들려는 생각이었기에 실피르는 긍정적인 대답을 하였다.
“네, 뵙겠다고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
그리고 멀어지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엘이 실피르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어렴풋 짐작한 것이다.
그런 엘을 바라보며 실피르가 싱긋 웃었다.
“그럼 엄마는 다녀오도록 할게. 엘리는 세레나와 카이나가 심심하지 않게 해 줘. 만약 갔다 오고 심심했다고 하면 혼난다?”
애써 분위기를 풀려는 그녀의 모습에 엘이 피식 웃었다.
“그러세요. 너무 재미있었다고 하게 만들어서 같이 못 놀아서 아쉽다고 후회하게 해 드릴 테니까요.”
“아유, 예쁜 엘리‥‥‥.”
자신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맞장구 쳐 주는 엘이 고맙고 귀여워 실피르가 빙긋 웃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방문 쪽으로 향했다. 아인하트 후작에게 가기 위함이다.
방을 벗어난 실피르의 자취를 쫓듯, 문을 바라보던 엘의 눈이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다 이내 표정을 풀고는 세레나와 카이나를 보며 말했다.
“자, 그럼 뭘 하고 놀아야 엄마가 후회를 하게 될까‥‥‥.”
아인하트 후작 집무실에 도착한 실피르가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아버지.”
“아, 실피르구나. 들어오너라.”
실피르의 목소리에 즉각 대답이 들려왔다. 그리고 들어 와도 좋다는 아인하트 후작의 말에 실피르가 집무실 문을 열었다.
“어서 오너라.”
집무실 안에는 아인하트 후작만이 앉아 있었다. 본래라면 글레톤도 옆에 있어야 하겠지만 현재 글레톤은 벌여 놓은 일들을 수습하러 나간 상태였다.
실피르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정보원을 쾌 움직였으니 말이다.
“여기 앉거라.”
아인하트 후작이 권하는 자리에 실피르가 다소곳하게 앉자, 집무실 내에 있던 하녀가 막 끓인 차를 실피르 앞에 놓고는 고개를 숙인 뒤 집무실을 벗어났다.
곧이어 집무실에 그윽한 차향이 가득 차기 시작했고, 아인하트 후작이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차를 한모금 마시면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내가 너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는 이제 가족의 관계도 회복했으니 서로에게 숨김이 없어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아인하트 후작의 말에 실피르는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매직 스톤 때문에 자신들을 환대했을 거란 생각이 들어 씁쓸했다.
만약 자신의 생각이 사실이었다면 아인하트 후작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물론이에요.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실피르의 말에 아인하트 후작의 표정이 환해졌다. 의외로 일이 쉽게 풀리는 것이다.
아인하트 후작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럼 숨기지 않고 말하겠다. 나는 네가 매직 스톤의 개발자라고 알고 있다.”
매직 스톤!
마나석을 대신해 주는 역할을 하며, 끊임없는 소모성 마법 아이템으로 그 가치는 어마어마하다고 할 수 있다.
아인하트 후작인 지금 그걸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꿍꿍이를 드러낸 것이다.
매직 스톤이라면 아인하트 후작가는 비약적인 도약을 꿈꿀 수 있다.
우선 재력 면에서 가히 두 배에 가까운 부를 축적할 수 있고, 제국 내에 존재하는 마법사들에게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것은 결국 아인하트 후작가의 위상이 상승하는 효과를 낳을 것이며, 그렇다면 추후 제국의 주도권을 황제파가 아닌, 아인하트 후작가가 이끄는 귀족파가 쥐게 될 것 이다.
매직 스톤은 실피르의 상상을 뛰어넘어 그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실피르도 매직 스톤의 가치를 어느 정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매직 스톤 하나로 디벨 상단이 대륙 100대 상단에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실피르 본인 또한 마법사였기에 매직 스톤의 가치가 대단하다는 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매직 스톤은 저희와 관련이 되었어요.”
그녀는 자신이 개발자라고 하지 않았다. 매직 스톤의 개발을 엘이 해냈다는 것은 엘을 더욱 띄워 줄 수 있는 요소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기에 말함에 있어 거리낌이 없었다.
“역시 그랬구나.” 아인하트 후작은 실피르 본인이 개발했다는 말을 하지 않자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본래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어찌됐건 간에 실피르가 매직 스톤과 관련이 된 게 확인된 것이었으니 말이다.
잠시 실피르를 바라보던 아인하트 후작이 말을 꺼냈다.
“나는 네가 우리 가문으로 되돌아왔으니 매직 스톤에 대한 비밀도 우리 가문에 전해 주었으면 한다. 그것으로 네가 완벽한 아인하트 후작가의 일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쫓아냈던 딸에게 요구하는 것치고 너무나 당당한 주장 이었다.
이런 말을 꺼내기가 무안하여 얼굴이 붉어질 법도 하건만 아인하트 후작의 안색은 태연했다.
가문을 위해 뻔뻔함도 자처할 수 있는 이가 바로 아인하트 후작이었던 것이다.
실피르도 아인하트 후작이 너무 뻔뻔하게 나오자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애써 숨긴 채 말했다.
“물론이에요. 가문에 왔으니 매직 스톤의 비법을 알려 드릴 용의가 있어요.”
“정말이더냐?”
아인하트 후작의 표정이 밝아졌다. 의외로 실피르가 자신의 말을 쉽게 승낙한 것이다.
하지만 실피르도 지난 17년을 허송세월로 보낸 것이 아니다. 마법사로서 일감을 얻어 낼 때 종종 하던 협상 실력은 그녀의 몸에 그대로 배어 있던 것이다.
아인하트후작의 얼굴이 득의의 빛으로 빛날 때 실피르가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조건?”
순간 일그러지는 아인하트 후작의 얼굴. 의외로 실피르가 만만치 않음을 느꼈다.
“네, 조건이요. 아버지 입장에서도 그리 손해는 아니에요.”
“말해 보아라.”
“엘리를‥‥ 엘을 후작으로 만들어 주세요!”
쿵!
순간 뇌리에 번개를 맞은 듯한 충격을 느낀 아인하트 후작 내내 평정심을 유지하던 그의 평정심이 실피르의 말로 인해 흔들렸다.
“지, 지금 그 말‥‥ 진심이더냐?”
떨리는 아인하트 후작의 어조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실피르가 고개를 끄덕 였다.
“물론이에요. 사실 매직 스톤을 만든 것도 엘리에요.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죠. 아마 아버지가 마나 스캔을 펼쳐 보았을 거라 생각하지만‥‥‥ 엘은 열일곱의 나이로 이미 5클래스 익스퍼트에 들었어요.”
“으음!”
실피르의 말에 아인하트 후작이 신음을 흘렸다.
그 또한 자신의 손자인 엘이 천재라는 것에 동감하는 바였다.
현 대륙에 현존하는 열 명의 8클래스 마스터 중 열일곱의 나이에 5클래스를 이룩한 마법사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엘은 현존하는 8클래스 마스터들보다 재능이 뛰어나다고 봐야 옳았다.
만약 여기에 아인하트 후작가의 비전 마법들이 곁들어 진다면? 필시 블리어드 제국 전체가 들썩일 만한 대단한 마법사가 탄생할 것이다.
생각만 해도 두근거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그 가치가 높은 매직 스톤을 개발하다니. 만약 매직 스톤과 가치가 비슷한 물건들을 연이어 개발한다면 아인하트 후작은 일약 블리어드 제국을 넘어 대륙에 명성을 쩌렁쩌렁 울리는 가문으로 설장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상일 뿐, 확신이 될 수 없다.
고민하는 아인하트 후작에게 실피르가 재촉했다.
“대답해 주세요, 아버지.”
“음, 그건 생각해 볼 문제다.”
가문을 위해 연기도 서슴지 않았던 아인하트 후작이 확실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가문을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지만 후계자에 대한 것에 거짓을 고할 수는 없었다.
아인하트 후작은 약간 맥이 빠진 표정을 짓는 실피르에게 말했다.
“일단 매직 스톤의 비법을 내게 알려 주거라. 그럼 천천히 고민한 뒤에 결정을 내리겠다. ”
실피르가 단박에 거절했다. 그녀는 이곳에서 답을 듣고 싶었다.
“그럴 순 없어요. 이곳에서 결정을 내려 주세요.”
그녀에게 있어 매직 스톤은 최후의 패나 마찬가지다.
아인하트 후작이 확실한 답을 들려주지 않는 이상 그 비법을 알려 줄 생각이 없었다.
“정말 이렇게 나올 것이더냐?”
일이 잘 풀리다가 마지막에 막혀 버리자 아인하트 후작이 성이 난 표정으로 실피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실피르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녀는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남편을 죽인 가문으로 다시 돌아온 이유는 한 번 쯤 아버지와 오빠의 얼굴이 보고 싶기도 했지만 우리 엘리를 아인하트 후작가의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서였어요. 엘리가 권력의 중앙에 서 있으면 저와 같은 권력의 희생자가 되진 않을 테니까요! 엘리라면 충분히 아버지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천재예요. 아버지가 확답을 내려 주지 않는 이상, 저 또한 양보할 생각이 없어요.”
여자는 연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한 것인가?
제국의 8클래스 마법사와 자웅을 겨뤄도 밀리지 않는 다는 아인하트 후작 앞에서 실피르는 한 치의 기죽음 없이 그와 맞서고 있었다.
아인하트 후작의 시선을 당당히 맞서고 있는 그녀의 주변에서는 패기가 뿜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아인하트 후작이 실피르에게서 처음 느낀, 그런 패기였다.
아인하트 후작은 처음 보는 실피르의 모습이 무척 생소하게 느껴졌다.
“결국 그런 결정을 내렸구나. 알겠다. 일단 방으로 돌아가라. 내 충분히 생각해 볼 테니.”
이내 그는 성이 난 표정으로 실피르의 말에 답했다.
실피르 또한 아인하트 후작에게 고개를 살짝 숙인 뒤 말했다.
“아버지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할게요.”
그렇게 말한 실피르가 발걸음을 돌렸다.
돌아서서 방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유난히 당당하게 보였다.
“아, 오셨어요?”
세레나, 카이나와 함께 탁자를 둘러싸고 유심히 살피던 엘이 실피르가 방으로 돌아오자 그녀를 반겼다.
그들이 하고 있는 놀이는 ‘알까기’란 놀이로, 동전과 탁자만 있으면 손쉽게 할 수 있는 지구의 놀이였다.
실피르의 등장에 세레나와 카이나는 알까기를 멈추고 그녀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인사했다.
“어머님, 오셨어요?”
“어서 오세요.”
“아, 응. 일이 끝나서 왔지. 엘리가 재미있게 놀아 줬니?”
실피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자 세레나와 카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까기란 놀이인데 힘의 조절과 각도가 조합되어야 잘할 수 있는 고난이도 게임이에요.”
“재미있겠다.”
엘의 설명에 실피르가 두 눈을 반짝였다. 지구에서는 흔했지만 이골에서 알까기는 무척 흥미로운 놀이였다.
그런 실피르의 모습을 보며 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가셨던 일은 잘되셨어요?”
“응? 아‥‥‥ 응! 잘됐어.”
대답하는 실피르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진 걸 엘은 놓치지 않았다.
아인하트 후작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매직 스톤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원활하게 진행이 되지 않았을 확률이 높았다.
서로가 원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엘은 그것 때문에 실피르의 안색이 어두운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엘은 그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에게 따로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 이리 오세요. 같이 하면 더 재미있어요.”
“그럴까? 얼마나 재미있는 놀이 일지 궁금하네.”
엘의 부름에 실피르가 짙은 호기심을 담고 다가오자 엘이 알까기에 대해 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신성한 후작가에서 피 튀기는 여인들의 알까지 대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잠시 방에서 짐을 가져오겠다는 핑계를 댄 엘은 실피르의 방에서 나왔다.
방을 나오는 순간 엘의 안색은 무섭게 굳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직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서먼(Summon)! 매직 글래시스(Magic Glasses)!”
파아앗!
그의 외침과 함께 눈 부분에 네모난 모양이 생겨나기 시작하더니 눈 양옆으로 쭉 뻗어나가 귀에 걸쳐졌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안경이었다.
그것도 과거 프로 게이머 이준혁이 쓰던 금빛 테, 금빛 렌즈 안경이었던 것이다.
지구에서 쓰던 안경이 지금 이곳에 재림한 것이다.
엘은 안경테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역시, 눈이 안 좋은 건 아니지만 안경을 써야 집중력이 더 올라간다니까.”
단순히 집중력이 올라가서 마법 안경을 제작한 것이 아니다.
마법 안경 자체에 마나의 흐름을 더욱 원활하게 바라볼 수 있는 매직 아이(Magic Eye)가 걸려 있었고, 방금 전 펼친 소환 마법 또한 걸려 있었다.
즉, 집중력을 높임과 동시에 마나의 흐름을 더욱 잘 파악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던 것이다.
이곳의 마법사들의 전투 방식을 본 엘은 무작정 공격 마법을 펼치는 게 능사가 아니라 보조 마법을 적절히 펼치면서 공격 마법을 시전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다른 마법사들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남들보다 빠른 캐스팅을 할 수 있는 엘에게 그런 전투 방법은 더 효과 적이다.
아직 실전을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과거 프로 게이머의 경력에서 유닛 하나의 능력을 최대한 살리는 컨트롤은 본인에게도 적용되고 있었기에 걱정은 없었다.
“그럼 가볼까. 인비저빌리티(Invisibility)!”
7클래스에 올라선 엘은 5클래스 마법인 인비저빌리티를 시전어만으로 시전할 수 있다.
마법이 시전됨에 따라 엘의 몸이 투명해졌고, 단전에 뭉쳐 있는 엘의 마나는 대기에 퍼진 마나와 호응하기 시작했다.
단전호흡으로 인해 대기의 마나와 거의 동화된 엘의 모습은 엘보다 한 단계 더 높은 마법사가 아니면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가자, 후작의 마음을 알아보러.”
복잡한 후작가 저택을 이리저리 오가며 엘의 몸이 아인 하트 후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마법사 가문답게 곳곳에 탐지 마법과 마법 트랩 등이 설치되어 있지만 7클래스와 단전호흡으로 마나와 호응이 다른 마법사보다 월등한 엘이 무난하게 피해 갈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공간 이동 같은 건 좌표 자체를 비틀어 버려서 후작가 사람만 알고 있는 좌표가 아니면 결코 오갈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저택 외부까지 이런지는 모르지만 저택 내부는 그야말로 도망갈 수 없는 덫을 쳐 놓은 것과 같았던 것이다.
설사 7클래스 마법사라 하여도 함부로 저택 내부를 탐지하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일반적인 7클래스가 아닌 엘은 약간 주의를 기울이는 정도로 마법들을 피해 갈 수 있었다.
이윽고, 집무실에 도착했다.
집무실에는 두 사람이 존재하고 있었다. 바로 아인하트 후작과 글레톤이었다.
엘의 신형이 집무실 위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숨소리까지 죽인 채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평소 나누던 내용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 내용은 엘에게 있어 경천동지할 만한 엄청난 내용이었다.
엘이 엿들을 준비를 마치자 마치 준비한 것처럼 그들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아인하트 후작은 연신 차만 마시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던 글레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인하트 후작의 기분이 좋지 않음을 느낀 것이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아버지?”
“실피르에게 매직 스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매직 스톤!”
글레톤은 나직이 외치며 재빨리 아인하트 후작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리고 단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결과가 좋지 않았으니 아버지가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라.
“실피르가 뭐라고 했기에 그러십니까?”
그 말에 아인하트 후작이 글레톤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
“자신의 아들을 후작의 후계자로 키워 달라더군.”
“으음!”
아인하트 후작의 말에 글레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도 그럴 것이 후작가 후계자라 하면 글레톤 본인인 데, 후계자로 삼아 달라고 한 것은 바로 자신을 겨냥한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후작가 후계자로 인정받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서른 이전에 5클래스에 들거나 그 후 7클래스에 들지 못하면 후계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바로 아인하트 후작가의 가법이었다.
그런데 감히 후계자 자리를 거론하다니‥‥‥.
얼굴에 붉은빛을 띠고 있는 글레톤을 보며 아인하트 후작이 말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라. 실피르의 말이 없었어도 엘이란 녀석은 충분히 후계자 자리에 도전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으니깐.”
“그게 무슨‥‥‥‥.”
엘에게 마나 스캔을 해 보지 않았기에 아직 엘의 성취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는 글레톤.
그러나 명석한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고, 이내 아인하트 후작이 무슨 뜻으로 말한 것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의 입이 헉!하고 벌어졌다.
글레톤은 떨려 나오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그 엘이란 녀석이 5클래스에 들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인하트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직접 마나 스캔을 해 보았다. 틀림없는 5클래스 익스퍼트였다. ”
“마, 말도 안 돼! 열일곱의 나이로 5클래스 익스퍼트라니‥‥‥.”
경악하는 글레톤을 보며 아인하트 후작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서 후계자 자리에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십칠 년간 외부에 있던 아이다. 그 재능이 실로 탐나는 것이지만 우리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지.”
“그 말씀은‥‥‥?”
한 줄기 기대를 품고 묻는 글레톤을 보며 아인하트 후작이 툭 던지듯 말했다.
“우리 가문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너도 황태자가 보낸 편지의 내용을 기억하고 있지 않더냐?”
“아‥‥‥ 그렇군요!”
마법 편지에 엘을 제거해 달라는 황태자의 부탁을 떠올린 글레톤이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실피르가 엘에게 무슨 교육을 시켰는지 모르지 않더냐. 가문에 대한 원망을 품고 쫓겨난 아이다. 오늘 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엘에게 무슨 교육을 시켰을지 모르지.”
“분명‥‥‥ 가문에 대한 증오가 섞여 있겠군요!”
“오늘 대화하면서 아직 우리의 처사에 원망이 가시지 않는 눈빛이었다. 분명 엘을 후계자로 내세워 과거의 원한을 갚으려 할지도 모르지.”
가문에 의해 사랑하던 남편이 죽었다. 단지 자유를 꿈 꿨다고, 사랑하는 사람과 살았다고 해서 그녀의 모든 것 이었던 남편이 죽은 것이었다.
오직 가문의 영광을 찾는 이들이 이해하지 못할 감정이었고, 실피르 또한 오직 권력과 명예를 좇는 이들을 이해 할 수 없었다.
결국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처지인 것이다. 누가 옳고, 누가 틀렸건 간에 말이다.
“실피르 본인도 6클래스 마스터니, 자칫 가문에 원한이 더 커진다면 큰 사단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염려가 담긴 글레톤의 말에 아인하트 후작이 우습다는 듯이 말했다.
“큰 사단이라니. 본가에 소속된 6클래스 마법사만 해도 이십 명이 넘는다. ”
그럼에도 글레톤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하지만. 실피르로 인해 그 사건의 진실이 알려질 수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거짓으로 치부하겠지만‥‥‥ 황제파 귀족들은 이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
아인하트 후작이 코웃음 쳤다.
“이래서 네가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다. 실피르의 이야기에는 황태자의 이야기도 섞여 있다. 황태자를 추종하는 그들이 과연 치명적인 비수로 되돌아올 수 있는 사건을 파헤치려 할까?”
“그건‥‥‥.”
할 말을 잃은 글레톤. 아인하트 후작의 말이 옳았던 것이다.
말을 잇지 못하는 글레톤을 보며 아인하트 후작이 혀를 찼다. 그리고 걱정이 담긴 어조로 말했다.
“다른 건 신경 쓸 필요 없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실피르가 그 녀석이 루비어스 백작가 출신이란 걸 안다는 것이다.”
“헉! 그, 그걸 알고 있다니‥‥‥.”
화들짝 놀라는 글레톤. 그것은 자칫 아인하트 후작가에 치명적인 것이 되어 날아올 수 있는 사항이었던 것이다.
“실피르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는 모른다. 이번 기회에 입이 가벼운 녀석들을 한번 청소해야겠지.”
“저, 정말 실피르가 알고 있던 것입니까? 레이언 루비어스가 우리 가문에 의해 사로잡혀 세뇌가 되었다는 것을?”
순간 아인하트 후작의 표정이 무시무시하게 변했다.
그는 노호성을 터뜨렸다.
“놈! 그 입 다물어라!”
아인하트 후작의 노성에 찔끔하는 글레톤. 그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명심하여라! 비록 외부에 사일런스 마법을 둘러치고 방비에 중시했다고 하나 언제 어디서나 듣는 귀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아인하트 후작은 참으로 철저한 사람이었다.
8클래스 마법사라 하여도 쉽사리 접근할 수 없는 이곳에 몇 개의 보완 장치를 해 놓고서도 이런 주의를 기울이다니 ‥‥‥.
잠시 침묵이 지나가고, 아인하트 후작의 무거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타국의 인재들을 비밀리에 납치하여 가문의 힘으로 삼은 것은 우리 가문에 있어 반드시 숨겨야할 비밀이다. 앞으로 그것을 언급할 생각은 하지도 말아라.”
글레톤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아,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그럼 됐다.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한 것이니. 한 번 실수를 했으니 다음에 실수하는 일은 없겠지.”
그렇게 말한 아인하트 후작이 눈을 감았다. 무언가 생각을 하고 있음이다.
글레톤은 그런 아인하트 후작을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본래부터 조심스러웠지만 방금 전 일로 한층 더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럼 실피르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인하트 후작은 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을 글레톤은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바라보았다. 실피르의 처우는 아인하트 후작가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실피르에 얽혀 있는 것이 매직 스톤과 황태자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엘까지 실피르와 얽혀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아인하트 후작가가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것들이었다.
곰곰이 하나씩 따져 보던 아인하트 후작이 입을 열었다.
“황태자의 제안과 매직 스톤, 엘의 재능.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다. 만약 너라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시험이다. ‘
순간 글레톤의 뇌리에 스친 생각이다.
아인하트 후작은 지금 자신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방금 전 실수로 점수가 깎였으니 그것을 만회할 기회를 주는 것이기도 했다.
분명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으니 아인하트 후작이 스스로 생각해 놓은 것들이 있을 터. 하지만 자신을 시험하고자 자신의 의견을 묻는 것이다.
글레톤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잠시 후, 하나씩 꼼꼼히 따져 본 글레톤이 입을 열었다.
“우선 황태자에게 답장을 보내겠습니다. 기꺼이 당신의 청을 받아들여 실피르를 첩으로 보내겠다고 말입니다. 그 다음 실피르의 아들인 엘을 조용히 제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엘의 목숨을 담보로 매직 스톤의 비밀을 요구 하면, 실피르의 성격상 분명 제 발로 비법을 바칠 것입니다.”
“호오‥‥‥ 근데 그것이 전부더냐?”
약간 감탄이 섞인 아인하트 후작의 어조. 하지만 그 속에는 무언가 부족한 듯한 느낌을 담고 있었다.
그것을 파악한 글레톤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혈육에게 조금이나마 잔인하다고 생각하여 언급하지 않았는데 철혈의 아인하트 후작은 이것까지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아닙니다! 매직 스톤의 비법을 취한 뒤 실피르를 강제로 황태자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마법사의 능력을 폐쇄시켜서라도 말입니다. 그 뒤 엘을 세뇌하여 가문의 충성스러운 마법사로 만들겠습니다. 황태자에게는 엘과 비슷한 아이 하나를 죽여 그 시신을 그럴듯하게 꾸며서 보여 주면 됩니다.”
길게 이어진 글레톤의 말. 그 내용은 너무나 패륜적이고, 이기적인 내용이 가득했다.
세상에, 여동생의 아들을 납치하여 협박하겠다니? 그에게 있어 조카가 아닌가? 조카의 목숨을 제거하면서까지 매직 스톤을 얻으려고 한단 말인가?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는 그의 모습이 아인하트 후작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단지, 조금 꺼려하는 기색이 있었지만‥‥‥ 엘을 세뇌하고 실피르를 제압하여 황태자에게 보내려고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가문을 위해서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아인하트 후작과 다를 바가 없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아인하트 후작이 명령만 내린다면 그렇게 할 태세였다.
“내가 생각한 것과 같군, 훌륭하다. ”
아인하트 후작의 입에 흡족한 웃음이 맺혔다.
그에 안심한 글레톤도 마주 웃음을 지었다.
이 얼마나 비정한 가족이란 말인가!
실로 패륜적인 생각을 오히려 칭찬한다.
외부로 새어 나가면 누구도 분노를 금치 못할, 그런 이야기가 지금 흡족한 웃음을 동반한 채 오고 가는 것이다.
아인하트 후작이 글레톤에게 말했다.
“이번에 기회를 주겠다. 방금 네가 말한 것들을 계획으로 짜서 내게 보고하라.”
글레톤의 대답이 만족스러워서일까?
아인하트 후작은 글레톤에게 기회를 주었다.
엘을 납치하여 실피르에게서 매직 스톤의 비법을 빼내고 그녀를 제압한 뒤 황태자에게 보낸다! 그리고 엘을 세뇌시켜 가문의 마법사로 만든다!
가문의 재력을 높일 수 있고, 정계의 위치를 더 확고히 할 수 있으며, 가문의 전력을 높일 수 있는 기회였다.
한마디로 아인하트 후작가의 도약을 좌우할 수 있는 계획을 글레톤에게 맡긴 것이다.
이는 글레톤을 후계자로 인정한다는 선언과도 같았고 후작 본인의 권력 일부분을 글레톤에게 주겠다는 말과 같았다.
물론 전권은 후작이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번 일을 잘 처리한다면 글레톤의 위치는 아인하트 후작에 의해 한 단계 더 높아질 것이다.
글레톤의 표정이 환해졌다. 이것이 기회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힘차게 외쳤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켜보겠다.”
짤막하게 말한 아인하트 후작이 다시 눈을 감았다.
글레톤은 그런 아인하트 후작을 힐끗 바라보다가 이내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계획을 세울지 윤곽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로 가득 찼던 집무실에 조용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들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엘은 수십 번이나 변하는 마음을 부여잡고 있었다.
집무실 위에서 엘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니야, 엄마는 그런 적이 없어. 오히려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숨겼지, 그런 짓은 안 했다고. 그런데‥‥‥감히 엄마를 그렇게 매도하다니.’
아인하트 후작과 글레톤의 이야기를 속으로 끊임없이 반발하는 엘.
만약 더 들을 이야기가 없었다면 당장 내려가 말했을 것이다. 실피르는 그런 적이 없노라고. 그건 당신들의 착각이라고.
하지만 정신을 기울여 이야기를 엿들을 때 놀라운 이야기가 발을 멈추게 했다.
‘루비어스 백작가? 설마‥‥‥.’
그 녀석이란 말에 엘은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감상 그 말이 자신의 아버지를 뜻할 확률이 높아 보였다. 그리고 이어진 아인하트 후작과 글레톤의 말에 마침내 경악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말도 안 돼! 루비어스 백작가가 죽은 아버지의 가문이었다니 ‥‥‥.’
아버지는 아무런 연줄이 없는 마법사라 들었다. 그런데 기억을 잃은 귀족가 출신이었다니‥‥‥ 그것도 아인하트 후작가에 의해 세뇌가 되었다고 한다.
이제야 모든 그림이 그려졌다.
대륙 멀리 떨어져 꽁꽁 숨어든 실피르는 다름 아닌 남편 때문에 사로잡혔다. 황태자가 파견한 추격자들도 한몫 했지만, 그것은 세뇌라는 전제가 깔려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왜 대륙 반대편까지 도망간 실피르가 잡혔는지 의문이었는데‥‥‥ 그 진실이 이곳에서 밝혀졌다.
‘게다가 대륙 각지의 유능한 인재들을 납치하여 세뇌를 해‥‥‥?’
이 사실이 밝혀지면 아인하트 후작은 대륙으로부터 엄청난 지탄을 받을 것이다. 아니, 자칫 가문의 존립마저 위협받을 수 있는 엄청난 사항이었다.
엘은 모든 정신을 집무실로 기울였다. 이야기의 흐름으로 보아 더욱 중요한 이야기가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다 다를까, 아인하트 후작이 기회를 주자 글레톤은 엄청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감히 엄마를 황태자에게 보내겠다니! 게다가 자신을 사로잡아 엄마로 하여금 매직 스톤의 비밀을 말하게 한단다. 그리고 모든 비밀을 듣고 난 뒤에 엄마의 마법사 능력을 제거하고 자신을 세뇌하겠다고 한다.
분노가 치밀었다. 그리고 자괴감이 들었다.
왜, 왜 자신은 좀 더 모질지 못해서 엄마가 이곳으로 걸어오게 한 것인가.
자만했던가. 오만했던가.
남들보다 월등한 성취에는 그러한 것들이 숨어 있었던 건가.
충분히 엄마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기적이지만 엄마의 재혼을 못하게 하고 오직 엄마의 사랑을 받고 싶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아끼는 엄마의 행복을 위해서.
그런데 이게 무엇인가.
후작가의 꿍꿍이를 알고자 이곳에 왔다. 그런데 그들의 내심은 너무나 패륜적이었다.
하나뿐인 딸을 황태자에게 보내 황실과 끈을 연결시키려는 아버지와 오빠. 그리고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으려는 음흉한 속셈.
모든 게 자신이 가진 행복을 빼앗으려는 행위였다.
그래서 더욱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만 이용하려고 했다면 이해한다. 하지만 엄마, 실피르의 마음속 상처인 정략적 혼인을 다시 부활시키려 하다니‥‥‥.
이 일을 엄마가 알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될 것이다.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또다시 받게 되는 것이다.
엘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동시에 단전의 마나가 꿈틀거렸다.
마법을 시전하려는 것이다.
아인하트 후작가는 블리어드 제국에서 손꼽히는 대가문이다. 가문 자체 능력만으로도 국가 하나와 맞먹고, 지난 세월 숨겨 온 힘은 너무나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다.
게다가 제국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다. 아인하트 후작가를 상대하려면 제국 전체를 상대로 해야 한다.
7클래스 마법사인 엘의 능력으로 도망갈 수는 있을지언정 정면으로 맞설 수 없는 곳, 7클래스 마법사가 무려 두 명이나 존재하는 곳이 바로 아인하트 후작가인 것이다.
물러서야 한다.
뒷일을 도모해야 한다.
차분히 힘을 기르고, 때를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엘은 그럴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그의 분노가 너무나 컸다.
7클래스의 정신 수양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단지, 단지 지금은 앞에 존재하는 아인하트 후작가를 모조리 지워 버리고 싶었다.
콰콰콰콰-!
단전에서 움직인 마나가 노도처럼 들끓어 올랐다. 동시에 주변의 마나가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며 엘의 주변에 배열되기 시작했다.
“으음! 이, 이건?”
“이, 이것은‥‥‥.”
갑작스러운 마나 흐름에 당황한 표정을 짓는 아인하트 후작과 글레톤.
그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은 엘은 마법을 캐스팅하고 있었다.
그가 시전할 수 있는 최고의 마법, 7클래스 마법을 말이다. 보통 마법사라면 10분에서 30분 동안 캐스팅을 해야 한다.
하지만 엘은 달랐다.
그의 수식어는 다른 마법보다 다섯 배 이상 짧았고, 마나 호응 또한 다른 마법사보다 족히 몇 배는 더 우위에 있었다.
같은 경지의 7클래스 마법사가 시전하는 마법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농밀한 마나 속에서 빠른 속도로 마법을 캐스팅한 엘이 마침내 시전어를 외쳤다.
“엔드리스 플레임 시드(Endless Flame Seed)!”
파파팟!
엘의 주변에 모여든 무시무시한 양의 마나가 일제히 마법으로 시전되었다.
그를 둘러싸듯 수십 개의 마나 서클이 엘의 주변에 퍼졌다.
동시에 엘이 짤막하게 외쳤다.
“범 (Bomb)!”
꽈과과과광!
꾸르르릉!
수십 개의 마나 서클이 동시에 불꽃으로 변하며 터져 나갔다.
한 번에 수천 명의 사람을 살상할 수 있는 7클래스 마법.
그것이 지금 아인하트 후작가 저택 중앙에 위치한 집무실에서 시전된 것이다.
저택 겹겹이 펼쳐진 방어 마법도 엘의 마법을 막아 낼 수 없었다.
단전호흡의 존재로 기존의 마법보다 훨씬 강한 위력을 지닌 엘의 마법은 모든 것을 파괴했다.
집무실이 위치한 저택 하나가 통째로 날아갔다. 일행이 머물고 있는 저택은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화르륵!
불의 지옥이 펼쳐졌다.
엘이 펼친 7클래스 마법은 그 범위가 넓지는 않지만 위력 면에서는 7클래스 화염계 대표적인 마법, 플레임 스트라이크보다 더욱 강력한 마법이다.
방금 전 거대한 건물이 위치한 이곳은 붉은 불꽃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지옥으로 변해 있었고, 부서진 잔해와 함께 스산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 속에는 반투명한 막 안에 위치한 두 사람이 서 있었다.
7클래스 마법에도 끄떡하지 않은 그들, 바로 아인하트 후작과 글레톤이었다.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이대로 끝내기에는 내 분노가 너무나 크거든.”
하늘에 떠 있는 엘은 그들을 보며 천천히 내려왔다.
두 사람은 엘을 황망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 안 그러하겠는가.
가문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곳에서 7클래스 마법이 시전되었다.
그 범인으로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실피르의 아들 엘이었다.
천천히 내려오던 엘은 지면 10m위 정도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음성은 그들이 한기를 느낄 정도로 스산하고 진한 살기를 내포하고 있었다.
“당신들, 오늘 끝없는 절망을 맛보게 해 주겠어. 이 말은 진심이야. 나와 엄마를 건드린 것을 평생 후회하게 해 주겠어.”
그와 함께 엘의 뒤에서 은은한 금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공간의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키 이 잉 ! 키 이 잉 !
요란스러운 공간의 균열음과 함에 엘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의 앞을 가로막는 이에게 오로지 절망만을‥‥‥ 그리고 모든 것을 파괴하라. 골든 나이트!”
파아앗!
순간 금색 광채가 폭발하듯 퍼져 나오며 시야를 앗아 갔다.
그와 함께 공간이 열리며 금빛 수려한 모습의 기사가 매끄러운 몸놀림으로 걸어 나왔다. 3m에 이르는 당당한 몸집과 주변에 은은하게 서린 금빛 광채.
훗날 골든 메이지라 불리며 그의 수호신이라 불리게 되는 골든 나이트의 공식적인 첫 등장이었다.
[편집자후기]냐하하, 안녕하세요. 징그럽게 볼 거라고 큰소리 뻥뻥 쳤던 대로!
또다시 돌아왔답니다!
이거 뭐야. 왜 아무도 안 반겨 주는 것 같은 느낌이‥‥‥아, 나. 이미 버림받은 건가.
길드 슬레이어 후기에서 밝힌 대로 이번 달 제 담당 신작들에는 몇 가지 조건을 걸었습니다.
이 골든 메이지도 마찬가지였죠.
‥‥‥역시 몇 질을 완결한 작가님은 다르시더군요.
덕분에 저번 주에 이어 쉬지도 못하고 이번 주도 밤샘.
후우‥‥‥ 정말 왜 이러고 사니?
어쨌든 지금도 원고를 기다리며 잠 못 자 토끼처럼 충혈된 눈으로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고 있습니다.
12시‥‥‥.
‥‥‥1시‥‥‥.
후우‥‥‥.
한숨 한 번 쉬니까‥‥‥ 2시.
키보드를 베개 삼아 꾸벅꾸벅 졸다가 일어났더니,
얼굴에 키보드 자국-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헉 ! 3시네?
그렇게 또‥‥‥4시.
에효, 오매불망 작가님의 연락과 원고를 기다리다가 오늘도 잠이 들어야겠네요.
흑흑. 뻐꾸기가 벌써 다섯 번 울었구나.
내일 출근할 수 있을지나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