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106)
6. 여인의 의지
엘이 금탑으로 복귀한 지 일주일이 흘러갔다.
그사이 멜뤼스와 코린트는 자신의 마탑으로 돌아갔다. 여러 국가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마탑의 주인들이니 만큼 한가롭게 금탑에 체류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자신들의 마탑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그들은 이번에 금탑에 와서 정말 많은 것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혼인을 하지 않은 그들에게 손녀같이 귀여운 세레나, 카이나와 친분을 맺게 되었고, 금탑에게 상당한 대가를 받기로 했으니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엘리엔과 아이넨스와의 토론으로 각 각 작은 깨달음을 하나씩 얻었다. 이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중한 것으로, 자신들의 경지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 큰 영향을 끼칠 것임이 분명했다.
마음 같아서는 더욱 오래 머물러서 더욱 큰 깨달음을 얻고 싶었지만 지나친 욕심은 오히려 독이 된다는 걸 알기에 어쩌면 그들은 가장 적절한 때에 돌아간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사이 자신의 수련실로 들어간 엘은 일주일이 지나도 나을 줄을 몰랐다.
하루에 두 번씩 세레나가 준비하는 식사를 해결하는 것이 그에게 큰 변고가 없다는 것을 알려 줄 뿐, 지난 일주 일 동안 엘의 모습을 본 이가 아무도 없었기에 실피르를 비롯한 여인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여인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엘의 수련실 문은 열릴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일주일이 더 흘렀다.
그리고 일주일이 더 흐른, 엘이 수련실에 들어선 지 2 주가 되었을 무렵 마침내 2주간의 침묵을 깨고 그가 모습 을 드러냈다.
수련실을 나선 엘은 부상의 잔재를 말끔히 털어버리 고, 혈색이 도는 평상시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금탑 사람들은 부상을 모두 회복한 엘을 한 번씩 찾았다. 엘은 그들을 만나 자신이 부상을 모두 회복했음을 알렸다.
엘을 한 번씩 만난 사람들은 무언가 의아함을 느껴야 했다.
엘의 기질이 과거와는 상당한 차이가 느껴졌던 것이다.
과거에 엘을 대하면 마치 뭐랄까, 정제되지 않은 어마 어마한 힘이 그의 주변에 산재해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때문에 그 누구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고, 은연중 강렬한 기운을 내뿜었다.
그런데 오늘의 엘은 그런 모습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통제되지 않은 듯하던 힘의 잔재는 찾아볼 수 없었고, 엘에게서 느껴지던 극단적인 느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무척 부드러운 기운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사람들은 엘이 그동안 너무 바쁘게 대륙 각지를 돌아다녀 알게 모르게 예민해졌던 기분이 풀려서 그렇게 되었다 고 생각했다.
엘리엔과 아이넨스가 그렇게 판단했을 정도였으니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엘은 단지 예민했던 기분이 풀린 게 아니다.
그는 한차례 죽을 위기를 넘기고 얻은 깨달음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사람들을 모두 만나 본 뒤 엘은 다시 수련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2주 동안 수련실에 있다가 외부로 나온 까닭은 사람들이 행여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걱정할까 우려한 탓 이다 아직 자신은 모든 걸 정리한 상태가 아니었다.
수련실로 들어선 엘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았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엘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숨을 내 쉬고 들이쉬기를 반복했다.
그러자 대기에 흩어져 있던 마나가 작게 소용돌이치며 엘의 호흡에 의해 그의 내부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바로 단전호흡이었다.
단전호흡에 빠져 들면서 엘의 내부에 있는 마나가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히 그랜드 마스터가 보유한 것과 비견될 정도로 방대 한 마나양. 루이아스와의 전투에서 이 마나를 활용하지 못한 엘은 자신이 엄청난 힘을 잠재우고 있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 었다. 나의 힘은 마법뿐만이 아니었어.’
눈을 감고 생각해 본다.
일이 지닌 힘. 그것은 단전호흡에 의해 극도의 친밀도를 띠고 있는 마나 호응과 지구의 수학 공식을 변형시킨 마법의 빠른 캐스팅이다.
이 두 가지로 엘은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 마법사가 될 수 있었다.
비록 최하위권에 속하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골든 나이트가 있다.
그랜드 마스터와 자웅을 겨뤄도 결코 밀리지 않는 골든 나이트!
8클래스 마법과 그랜드 마스터의 힘이 조합되면 그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이 된다.
그것으로 엘은 누구에게도 무시당하지 않을 수 있었고, 대륙의 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실제로 엘은 다른 초인들과 겨룬다면 누구에게도 패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비록 경험과 실력, 모든 면에서 뒤처지지만 그의 무기는 그러한 차이점을 메우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골든 나이트까지 합세한다면 그는 누구라도 상대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것은 루이아스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다수의 초인을 상대할 수 있었다고 말했지만 엘에게는 제련제강의 마법도 있고, 원거리 캐스팅과 골든 나이트의 숨겨진 힘까지 보유하고 있기에 그가 단독으로 나서면 기꺼이 제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형편없이 패했으니 말이다.
루이아스에게 처참한 몰골이 되어 도망도 못 친 채 모 든 것을 포기하려던 엘은 자신에게 한 가지 무기가 더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바로 자신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방대한 마나다.
이걸 어떻게 활용할 수만 있다면 최소한 루이아스에게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한 채 몰리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엘은 지난 2주 동안 몸을 치료하면서 조심조심 내부의 마나를 움직여 보기 시작했다.
아무런 대책 없이 마나를 움직인다는 것은 자살행위와 마찬가지다.
검사들이 가장 경계하는 마나 폭주가 바로 무분별한 마나의 운용으로 일어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 일이 엘에게도 벌어지지 않으리란 법이 없었고, 그것을 인지한 엘은 내상을 치료하면서 천천히, 마나를 외부로 표출해 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외부로 표출되던 마나를 내부로 갈무리할 때, 엘의 주변에 산재해 있던 마나까지 엘의 내부로 갈무리되었던 것이다.
사실 주변에 산재해 있던 마나는 엘이 단전호흡으로 더 이상 흡수하지 못한 마나가 밀도 높게 뭉쳐 있는 것이었다.
체내에 수용할 수 있는 마나의 한계량이 넘었기에 엘은 더 이상 그 마나를 체내에 갈무리하는 것을 포기하고 주변에 산재시켜 놓은 것이다.
그렇게 한 까닭은 외부에 산재한 마나가 그의 마법 시 전 속도에 다소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이미 자신의 몸은 한계치까지 마나를 수용한 상태였다. 더 이상 마나를 끌어들이다가는 온몸이 터져 죽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놀란 엘은 필사적으로 마나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단전호흡을 통해 어떻게든 마나를 갈무리하려고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때, 엘의 내부에서 변화가 생겨났다. 한계치까지 차 있던 마나가 조금씩 응축되더니 이내 전체적으로 마나가 응축되기 시작한 것이다.
마나가 응축되자 마나로 온통 꽉 차 있던 그의 단전에 다소 여분의 공간이 생겨났다.
외부에서 흡수된 마나는 응축된 마나에 덧대어져 덩달아 응축되기 시작했다.
엘은 그것이 나쁜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마나를 외부로 표출했다가 흡수하길 반복했다. 약 다섯 번의 반복 끝에 자신의 주변을 떠돌던 마나를 모두 흡수 할 수 있었다.
‘이게 나에게 이득이 되는 일인가?’
그건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이 현상은 여태껏 한 번 도 겪어 본 적 없는 상황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응축된 마나는 그렇지 않은 마나를 끌어당기는 성질이 있다!’ 큰 발견이라면 큰 발견이었고, 작은 발견이라면 작은 발견이었다.
일단 한 가지 사실을 알아냈으니 이것을 연구해서 어떻게든 자신의 힘으로 만드는 일이 중요했다. 자신이 느끼기에 마나를 이런 식으로 갈무리하는 것은 그랜드 마스터도 하지 못하는 것이니 말이다.
“다른 사람들과 의논을 해 봐야겠어. 일단 모든 마나를 수습했으니 말이야.”
수련실에 들어서고 꼬박 세 시간 동안 마나를 체내에 흡수한 엘은 더 이상 자신 혼자서는 발전할 수 없음을 깨닫고 수련실을 나섰다.
그러자 수련실 밖에서 엘을 기다리는 이가 있었다. 바 로 세레나였다.
“세레나? 네가 왜 여길?” 엘은 세레나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세레나가 이곳 수련실에 오는 건 하루에 두 번이다.
아침 겸 점심때와 저녁때 물론 그건 엘에게 식사를 전달하기 위해 오는 것이다.
가급적 엘의 수련을 방해하지 않고자 식사 때를 제외하고는 수련실에 오지 않는 세레나인데 그녀가 이렇게 밖아서 기다리고 있으니 엘로서는 의외일 수밖에 없다.
엘이 나오자 세레나가 가볍게 미소 지어 보였다.
“엘 님에게 할 말이 있어서 이렇게 왔어요.”
“이런,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고?’ 자신이 수련실에 들어서면 언제 나올지 모른다. 세레나 가 오래 기다렸을 거라 생각하자 엘은 까닭 없이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네, 다행히 엘 님이 일찍 나와 주셨네요.”
“그래? 그럼 다행이네.”
다행스럽게도 세fl나가 오래 기다리지 않았단다. 그녀 의 눈을 보고 그년가 거짓을 말하지 않았음을 느낀 엘은 그녀의 말을 순순히 납득했다.
그러고는 세레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날 찾아온 거야◎ 궁금함을 담은 채 엘이 물었다. 자신에게 할 말이 있다면 밤에 찾아와도 될 텐데 굳이 수련실 앞까지 온 세레나 의 행동에 의문을 느꼈다.
엘의 의아한 시선을 느꼈는지 세레나가 입을 연다.
“잠시 시간 내 주실 수 있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낼 수 있는 게 시간이다.
“응. 물론이지.”
직감적으로 세레나가 무언가 할 말이 있음을 느낀 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불안했다. 자신은 세레 나에게 해 준 것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모두 내가 잘못했기에 일어난 일. 내가 감당해야 옳은 거야.’
내심 마음의 준띠를 단단히 하는 엘, 근래 들어 자신이 세레나와 카이나에게 얼마나 소홀했는지 깨달으면서 느낀 감정이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
세레나는 엘이 심각한 표정을 짓자 의아한 기색을 띠었 지만 이내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엘은 그런 그녀흔 뒤를 따랐다.
잠시 후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세레나의 방이었다. 세레나가 엘에게 자리를 권한 뒤 자신 또한 자리에 않았다.
엘이 그런 그녀를 보며 물었다.
‘할 말이 있어, 세레나?” 궁금한 것처럼 물어본 엘이었지만 실제 그의 마음은 떨 리고 있었다.
도대체 세레나가 왜 자신을 찾아온 것일까.
설마 자신을 떠난다고 말하려는 건가.
조급하고 불안한 감정이 그의 얼굴에 그대로 투영됐다.
전혀 예상치 못한 엘의 모습에 세레나는 살짝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실은 에리스 공주님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그런 세레나의 말은 엘에게 무척 의외였다.
엘의 표정이 급변했다.
“응? 에리스 공주? 그걸 왜………
엘로서는 세레나의 말이 무척 의외일 수밖에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에리스 공주는 레도프 국왕에 의해 자 신에게 청혼을 하였다.
고귀한 귀족들이 사랑하는 이에게 하는 청혼.
그것은 그들의 드높은 자존심의 상징이자 누구도 거부하기 어려운 달콤한 사랑의 속삭임이었다.
물론 이것은 겉으로 보인 면일 뿐 실제로는 정적을 제 거하기 위한 빌미를 만들기 위해, 정략적인 요소를 성립시키기 위해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
에리스 공주가 엘에게 청혼을 한 것도 그런 것과 같은 맥락이다 톨리안 왕국의 입장에서는 엘의 마음이 행여 왕국을 떠나지 않았을까 무척 불안할 게 분명했다.
7클래스 마법사였던 엘이 어느덧 8클래스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그의 수하인 골든 나이트는 그랜드 마스터와 자웅을 겨룰 수 있는 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으니 말이다.
톨리안 왕국으로서는 소화하기 힘든 먹잇감이라 할 수 있었다.
서부 왕국에 마탑을 세운 8클래스 마법사들은 적게는 세 곳에서 많게는 다섯 곳의 왕국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마탑을 세운다.
그런 반면 톨리안 왕국은 손대기도 어렵고, 자국의 영토라기에도 뭐하던 애물단지 트롤 벨리 하나를 양도하고 8클래스 마탑을 꿀꺽했으니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제 스스로 불안했을 것이다.
그런 불안감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계기가 필요했다.
금탑주인 엘이 톨리안 왕국에 영원한 충성을 맹세하든가, 아니면 직접적으로 인척 관계가 되는 방식 등이 말이다.
마법사들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존재이기에 그들의 충성심을 끌어내는 건 무척 어렵다.
그렇기에 톨리안 왕국은 가장 간단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방법인 인척 관계를 맺는 방법으로 엘에게 접근한 것 이다.
그들로서는 일생일대의 모험이었을 것이다.
엘은 그런 그들의 제안을 멋지게 거절했다. 이미 그에 게는 사랑하는 두 여인이 있으니 그런 여인들에게 미안해 서라도, 뻔히 보이는 톨리안 왕국의 계략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절대 승낙할 수 없었다.
그 결과 한 여인이 크나큰 상처를 입는 결과가 나왔지 만 그것은 엘로서도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
엘 때문에 앞으로 결혼을 할 수 없는 몸이 된 에리스 공주, 그녀를 세레나가 언급하고 나선 것이다. 자연히 엘로서는 마음이 답답하고 찜찜할수밖에 없었다.
엘이 입을 열었다.
“세레나가 믿을지 안 믿을진 모르겠지만 난 맹세코 에리스 공주에게 마음이 없어. 그건 그녀 또한 마찬가지일 거야. 레도프 국왕은 왕국을 위해서 날 인척 관계로 맺어 두려고 한 것일 터. 이번 일로 그녀가 왕국에서 어떤 취급 을 받을지는 상상이 가 무척 미안하지만 그때는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무척 잔인한 말이었다. 하지만 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국의 공주는 그 존재만으로도 상당한 전략적 가치를 지닌다.
국왕의 딸이라 함은 곧 국왕과 혈연관계라는 뜻. 그런 그녀와 혼인을 한다면 한 나라의 국왕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걸 의미한다.
거기에 공주의 외모가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그 왕국에서는 더욱 훌륭한 전략적 가치를 보유하게 되는 셈이다.
국력이 약한 왕국은 강대국의 고위 귀족이나 왕족들과 혼인을 시켜 그들의 배경을 얻을 수 있고, 강대국은 세력이 강한 귀족과 혼인을 꾀하여 강한 왕권을 보유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에리스 공주는 톨리안 왕국에 있어 무척 훌륭한 전략적 무기였다.
당장 주변국들과 자국의 고위 귀족들에게서 청혼이 쏟아졌으니 그런 그녀의 가치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랬기에 엘과 관련된 일로 다시는 결혼할 수 없게 된 에리스 공주는 그야말로 따보지도 못하는 애꿎은 감이 되어 버린 셈이다.
왕국의 입장에서도 청혼을 실패한 그녀의 가치는 한없이 추락할 것이 분명하고, 에리스 공주에 대한 관리는 과거에 비해 한없이 소홀해지고, 초라해질 게 분명했다.
세레나는 엘을 보며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겠어요. 그리고 그 말이 저희를 위한 것이라는 것도 알겠고요.” 그렇게 말하면서 세레나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맺혀 나왔다.
엘이 자신들을 위해 일국의 공주가 하는 청혼을 마다했으니 그의 여인으로서 감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의 배경은 어느 것 하나 공주보다 나은 게 없는데…….
세레나가 말을 이어나갔다.
“저희를 생각해 주셔서 정말 감사하지만……..”
지금 이 곳에 에리스 공주님이 와 계세요.”
“뭣이?”
엘의 표정이 급변했다.
에리스 공주가 이곳에 왔다는 것은 그로서도 정말 의외의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엘의 표정을 본 세레나가 말했다.
“그녀는 엘 님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했어요. 그 리고 금탑에 온 것이지요. 카이나는 에리스 공주를 보고 많이 불평을 했어요.”
그 말에 엘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라도 자신의 연인에게 다른 이성이 호감을 가진 채 접근하려 든다면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이건 인간으로서 당연한 감정이다.
“그래서 그녀는 어떻게 되었지?”
지금 이곳에 있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음을 엘은 느꼈다. 그걸 세레나에게 묻는 것이다.
엘의 물음에 세레나가 잠시 우물쭈물했다. 그러더니 이 내 결심을 굳힌 듯 말했다.
“에리스 공주님은 금탑을 습격한 초인들을 격퇴하는 것은 물론 엘 님이 금탑에 돌아오셨을 때의 상황까지 모두 목격한 상태예요. 아마 엘 님이 상대하는 적들의 대략 적인 윤곽은 모두 알았을 게 분명해요.”
“허어……….”
엘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설마하니 에리스 공주가 이렇게 공교로운 타이밍에 금탑을 찾았을 줄 몰랐거니와 자신 또한 에리스 공주가 금탑을 찾아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엘로서는 자연히 에리스 공주가 금탑을 찾은 이유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인가?’
그의 의문은 당연했다. 아직도 엘은 에리스 공주가 자 신에게 딱히 이렇다 할 호감이 없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 이다.
그런 그녀가 왜 금탑에?
이미 목격해서 어쩔 수는 없지만 마도 제국과정이면 좋을 게 하나 없다는 게 엘의 생각이었다.
특히 검과 마법을 하지 못하는 에리스 공주 같은 일반인에게 더욱더 말이다.
떠오르는 여러 생각에 엘이 잠시 침묵을 지키자 세레나가 에리스 공주가 금탑을 찾아와서 했던 말을 해 주었다.
“에리스 공구님은 엘 님을 사랑하신댔어요.”
엘의 눈이 부릅떠졌다.
“뭐, 뭐라고?”
마음을 다스리는 데 능한 엘조차도 이번 맡만큼은 정말 예상하지 못한 바였기에 한동안 표정을 수습하지 못할 정 도였다.
엘은 의문이 가득 담긴 눈으로 세레나에게 묻고 있었다.
정말로 에리스 공주가 그런 말을 한 것이냐고, 농담이 라면 설령 세fp나라도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말이다.
혹여 에리스 공주를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세레나가 거짓을 말하고 있는가를 염두에 둔 상태였다.
그녀의 착한 심정을 안다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엘의 눈빛을 이해한 세레나는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 말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답니다”
세레나의 말에 엘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후우! 정말 골치 아프게 되었군.”
엘로서는 정말 골치 아픈 문제에 직면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에리스 공주의 청혼을 과감하게 뿌리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정략적인 요소로 자신에게 접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각해 봐라. 누군가가 목적을 가지고 결혼을 해 달라 하면 그 누가 선뜻 그것에 응해 주겠는가.
이것은 에리스 공주가 얼마나 아름다운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장 그 마음이 달린 문제였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달라진다.
에리스 공주는 정말 매력적인 여 인이다 두 눈에 담긴 별빛 같은 눈빛과 일국의 공주로서 절로 갖춘 기품과 매력, 그리고 박식함은 누구도 거부하기 힘든 매력 요소라 할 수 있다.
당장 대륙에서 그 비견될 이가 없는 아름다움을 보유한 세레나와 카이나마저도 에리스 공주를 뛰어넘지 못한다.
그런 여인이 자신을 사랑한다니, 엘로서는 정말 의외이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불쑥 자라났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다. 엘은 결코 자신의 인생 중대사에 정략적인 요소를 포함시키고 싶지 않았다.
엘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에리스 공주가 날 사랑한다 하여도 난 그녀를 받아들일 수 없어 내게는 세레나와 카이나가 있으니까. 난 너희 둘의 사랑만으로도 벅차다고 생각해.”
대륙을 위진 시키는 젊은 영웅의 말로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엘의 마음이고, 다짐이었다. 그가 마법을 익힌 것은 가족과 오순도순 살아가기 위함이었지, 정략적인 이유로 여기저기 혼담을 받아 수많은 여인들을 거느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엘의 말에 세레나의 표정이 밝아졌지만 크게 변함은 없다.
“엘 님의 말씀은 정말 감사드려요. 하지만 에리스 공주님과의 일은 어떻게든 엘 님과 공주님 사이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봐요.
공주님이 계속해서 엘 님에 대한 사랑 을 품고 있다면 그것 또한 공주님에게 큰 비극 아니겠어요? 저 또한 에리스 공주님을 받아들이는 건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모든 건 엘 님이 처리하셔야 할 문제. 그래 서 저는 공주님이 엘 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그 걸 알고 계신 상태에서 엘 님이 한 번쯤 그녀를 만나 봐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나긋나긋한 세레나의 말에는 한 껌 틀림이 없었고, 구구절절 옳은 말들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말에 엘로서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찾아온 여인이 있는데 그녀를 만나 보지도 않는다는 건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가혹한 처사였다.
“세레나의 말이 무엇인지 잘 알겠어. 그럼 세레나의 말 대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지.”
세레나가 미소 지었다.
“네, 제 말을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감사하다니. 세레나, 넌 내 부인이 될 여자야. 당연히 나에게 조언을 해 주고, 내 행동에 관여할 권한이 있어. 그러니 다시는 그런 일로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마. 내가 섭섭하니까.”
‘내 부인’ 이라는 구절에서 세레나는 마음이 찡해졌다.
그러고는 다시 빙그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엘 님. 그럼 감사하지는 않고 정말 고마워요”
끝까지 고맙다고 맡하는 그녀의 모습에 엘도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하하, 내가 졌군,”
그렇게 말하면서 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가시려고요?” “이왕 말이 나온 김에 가는 게 낫겠지. 괜히 시간만 끌 어 봤자 좋을 게 없잖아. 안 그래?’
“그건 그렇죠.” 남녀 간의 일은 시간을 끌수록 좋지 않은 게 다반사다.
연애 맹탕인 세레나도 최소한 그것은 알았기에 엘의 말에 순순히 동의했다.
“잘 이야기해 볼 테니까 너무 걱정은 하지 마.”
“네, 알겠어요.”
세레나를 다독인 엘은 그녀의 방을 벗어났다.
그리고 긴 금탑의 복도로 나온 엘.
“에리스 공주가 금탑에 왔단 말이지. 그렇다면 접객실에 있겠군.”
엘의 발걸음이 손님이 편하게 머물게 하기 위한 접객실로 향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지?’
에리스 공주는 불안했다.
무엇이 불안한지는 그녀도 처음에는 잘 몰랐다.
처음 금탑주를 보았을 때 까닭 없이 그가 불안해 보였고, 두 번, 세 번 그를 볼 때마다 그에 대한 불안감이 점점 증폭되는 걸 느꼈다.
그것은 그 누구도 모르는 여인의 직감. 상대방에게 호 감을 가졌을 때에서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그런 감각이었다.
사람들의 눈에는 금탑주의 모습이 분명 이러할 것이다.
어린 나이에 8클래스라는 지고한 경지에 오른 천재 마 법·라. 왕국의 중추를 이루는 마탑의 탑주.
자신감이 넘치고 추후 대륙의 판세를 좌지우지할 인재.
하지만 에리스 공주의 눈에 비친 엘의 모습은 결코 그러한 모습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당당함을 표현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속에 포함된 내용물은 마치 뭐랄까, 극도의 긴장감과 불안감이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에리스 공주는 당연히 그것이 자신의 착각이라 여겼다.
대륙에서 금탑주에게 불안감을 심어 줄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는 단신으로 성국과 맞섬으로써 전설이 되었고, 8클래스 마법사 게이런즈를 단신으로 죽인 뒤 8클래스의 경지에 올라 스스로 그 명성을 확고히 했다.
그렇게 앞날이 창창한 금탑주에게 불안감이라니?
그것은 당치도 않은 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의문은 오늘이 되어서야 풀렸다 그녀는 여태껏 금탑주에 대한 단면밖에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엘은 그녀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거대한 존재와 맞서 왔던 것이다.
9클래스 마법사.
이 얼마나 지고한 경지란 말인가.
마법사들 사이에서 클래스 간의 차이란 매우 까다롭고 부담되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 보기에는 단지 숫자 하나의 차이로 보이 지만 정작 마법사들 본인들이 느끼기에는 그 숫자 하나 차이가 절대적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당장 7클래스 마법사들이 수십 명 모인다고 해도 8클래스 마법사 하나를 어쩌지 못한다.
이 예가 마법사들 간에 한 단계 차이가 얼마나 큰지 단적으로 알려 주고 있지 않은가. 마치 소드 마스터 이하의 검사들이 그랜드 마스터의 마나 장악에 의해 본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처럼.
사실 한 단계 차이가 이토록 극심한 차이를 보이는 만큼, 8클래스 마법사와 9클래스 마법사 간의 차이가 어느 정도일지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거기에 그를 따르는 다수의 초인들. 직접 눈으로 목격했으니 그녀가 할 말이라고는 정말 대단하다는 감탄사 섞인 말밖에 없었다.
초인들 간의 격돌은 마치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어마어마한 여파를 발휘했으니 말이다. 단지 그녀가 본 것은 온 세상이 부서지는 듯한 강렬한 힘의 여파와 간혹 흐릿하게 보이는 초인들의 움직임뿐이었다.
그런 그들과 여태껏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니.
그제야 그녀는 엘이 왜 불안해하고 긴장했어야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대륙의 모든 사람들은 이런 금탑주의 모습을 모르고 있어. 만약 그가 없었다면 마도 제국은 진즉에……. 대륙을 통일했을 거라 말하려던 에리스 공주는 그 자리에서 흠칫했다.
아무리 자신이 한 왕국의 공주라 하여도 대륙의 전력을 너무 낮게 잡아 평가한 것이다. 비록 제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언제나 신음을 흘리는 왕국들이지만 지난 긴 세월 동안 그들이 비축한 힘은 결코 만만하게 볼 성질이 아니었다.
왕국들은 틈이 나는 대로 막대한 지원을 퍼부어 기사들 의 성장을 장려했으며, 그 결과 각 왕국에서는 상당수의 소드 마스터가 탄생하게 되었다.
거기에 제국과 거듭된 전쟁으로 단련된 각국의 정예병 들 또한 결코 만만하게 볼 성질이 못 되었다.
즉, 엘이 대륙을 위해 힘써 온 것이 맞으나 그가 없었다면 대륙이 마도 제국에 의해 제패되었을 거란 말은 조금 어폐가 있었다.
물론 그 사실에 동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테지만 말이다 “내가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후우, 내 처지가 참으로 기구하네.”
문득 자신이 무슨 생각에 빠져 있나 고민하던 에리스 공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자신은 금탑주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자 이곳 에 왔다.
헌데 자신은 금탑에 벌어진 일 때문에 받은 충격으로 엉뚱한 고민을 하고 있으니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마침 금탑주님의 몸이 모두 나았다고 하셨으니 내 마음을 전하자. 그리고 홀가분하게 왕궁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녀는 금탑주가 자신의 마음을 받아 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금탑주에게 전하고 싶었다.
그것은 여태껏 공주의 삶을 살아오면서 한 번도 자신의 마음에 솔직할 수 없었던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기도 했다.
게다가 이번에 카시아스 왕국에서 주최된 왕국들 간의 회의가 끝났다고 한다. 총사령관을 다이어드 공작으로 하 고, 각국에서 정예병들을 차출하여 전선에 파견하기로 말이다.
모든 회의가 끝난 만큼 각국의 국왕들이 자국으로 돌아 갈 것이 분명했다.
레도프 국왕이 왕궁에 도착하였는데 자신이 왕궁에 없다면 뭐라 할 것이 분명할 터.
금탑주와 혼인하는 데 실패한 자신이 여러 가지 걱정거리를 국왕에게 안겨 준다면 왕국에게도 더욱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때문에 에리스 공주는 내일쯤 모든 일을 끝맺음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그녀가 결심을 굳힐 때였다.
그녀가 머무는 방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에리스 공주는 순간 긴장한 기색을 띠었다.
현재 시간은 야심한 밤. 따라서 자신의 방으로 올 인물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도둑?’
잠시 밖에 있는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은 그녀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도둑 따위가 감히 금탑에 들어설 수 있겠는가 설사 황궁에 침입할 수 있는 도둑이랄지라도 다크 포그에 의해 입구가 완전 차단된 금탑을 침입할 수는 없다.
‘그럼 도대체 누가…….
빠르게 회전하던 그녀의 머리는 방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엘리미스입니다. 공주님,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이의 방문에 잠시간 굳은 에리스 공주.
설마하니 엘이 찾아올 줄이야. 에리스 공주로서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놀란 에리스 공주가 한동안 침묵하자 방 밖에 서 있던 엘의 음성이 다시 들려온다.
“공주님. 주무십니까?”
아직 밤이 깊지는 않았지만 일찍 잠을 잔다면 충분히 잘 수 있는 시간이다.
방밖에 서 있던 엘은 방 안에서 아무런 대꾸가 없자 에리스 공주가 잠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발걸음을 막 돌리려던 찰나, 방 안에서 에리스 공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자고 있지 않아요. 들어오셔도 됩니다, 금탑주 님.”
에리스 공주의 목소리에 엘의 몸이 멈칫했다. 이윽고 그는 방 문고리를 잡았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엘이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에리스 공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볼 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다.
카이나는 활발하고 건강미가 넘쳐나고 세레나는 무엇이든지 포용해 줄 것 같은 포근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면, 에리스 공주는 마치 인형과 같은 단아함과 지적인 느낌이 동시에 들었다.
비록 그 마음은 받아들일 수 없다지만 이런 여인이 자신을 좋아해 주다니, 남자로서 정말 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엘이 방 안에 들어서자 에리스 공주가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곳에 앉으세요, 금탑주님.”
“예,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엘은 약간 멋쩍은 표정을 지으면서 에리스 공주가 권한 자리에 착석했다.
사실 이런 야심한 밤에 여성의 방에 들어서는 것은 무척 실례가 되는 행동이다.
자칫 레이디에게 씻을 수 없는 소문을 제공하고 그녀의 명예에 누를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은 금탑이다.
소문을 퍼뜨릴 그 누구도 없으며, 이미 에리스 공주는 금탑주에 의해 그런 소문이 퍼질 여지가 일찌감치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조건들이 충족되었기에 엘이 아침까지 기다릴 것 없이 이렇게 밤에 그녀를 찾은 것이다.
자리를 권한 에리스 공주는 엘을 조용히 바라본다.
다시 봐도 정말 멋진 청년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을 좋아하는 데 외모가 결정적일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은 외관이다.
그리고 그 사람을 겪으면서 그 사람의 내면을 단편적으로나마 알게 되고, 모든 요소들이 종합되어 어떤 사람인 가에 대해 판단을 내리게 된다.
그런 면에서 엘은 일단 외모로 따진다면 백 점 만점을 주고 싶은 인물임이 분명했다.
부드러운 실크와 같은 금발과 그의 어머니인 실피르를 빼닮은 아름다운 얼굴. 거기에 금빛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안경까지. 그 요소 하나하나가 그의 외모를 더욱 돋보이게 해 주고 있었다.
자리에 앉은 엘은 잠시 에리스 공주를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우선 야심한 밤에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엘의 정중한 사과에 에리스 공주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딱히 잠이 오지 않는 밤이기에 결코 실례될 것이 없답니다.”
“예, 공주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공주님을 찾아온 것은 드릴 말이 있어서입니다”
에리스 공주가 조금 놀랐다.
“제게 할 말이 있다고요”
“예, 아마 저나 공주님에게 중요한 내용이 될 것입니다”
엘의 말에 에리스 공주는 절로 긴장감이 팽팽하게 당겨지기 시작했다.
서로에게 중요한 내용이라면 한 가지다. 바로 두 사람 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일 것이다. 에리스 공주는 갑작스러운 엘의 말에 순간 당황했다.
그러다가 이내 표정을 수습하고는 당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무슨 내용인지요?”
어차피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만큼 그녀는 당찼다.
“예, 그러니까…….. 일단 이곳까지 찾아오신 공주님께 제가 인사를 드려야 하는 게 당연하고…. 그때 파티에서 의 말도 더하고자 해서입니다.”
너무 당당한 에리스 공주의 태도에 순간 당황한 엘은 말까지 더듬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수습하고는 에리스 공주에게 시선을 주었다.
“예, 우선 금탑에 방문해 주신 공주님을 진심으로 환영 하는 바입니다. 머무시는 동안 금탑을 둘러보시길 원했는데……음, 안 좋은 것들을 보게 되어서 탑주인 제 입장에 서 무척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엘이 말하는 안 좋은 것들이란 금탑에서 벌어진 전투들을 말하는 것이리라.
에리스 공주는 그 말에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안 좋은 모습이라 말씀치 마세요. 제가 보기에 그 모습은 대륙을 위해, 그리고 저희들을 위해 싸우시는 모습 이었던걸요. 엘 님이 그렇게 말하시면 그때 전투를 위해 나서셨던 분들 모두에게 누가 되는 것이라 생각해요.”
“아……. 그녀의 말에 무언가를 느낀 엘 느낀 바가 있는지 엘이 사과했다.
“그렇군요.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모습에 에리스 공주는 미소 지었다.
“보통 높은 경지를 개척하신 분들은 그 자존심이 남다르죠. 때문에 남의 말을 쉽게 인정하려 들지 않는답니다.
그것이 그분들의 유일한 결점일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금 탑주님께는 그런 모습조차 볼 수 없군요. 정말 금탑주님은 대단하세요.”
이보다 더 극찬일 수가 없다 에리스 공주의 말에 엘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과찬에 어쩔 줄 모르게 만드시는군요. 저는 공주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에리스 공주가 웃음 지었다.
“세상에 금탑주님이 대단하지 않다면 과연 누가 대단 할까요. 금탑주님은 너무 자신을 폄하하지 마세요. 대륙 사람들의 눈에는 정말 대단한 존재가 당신이니까요.” 말을 잠시 멈춘 에리스 공주가 말을 이었다.
“그 누가 이십 대에 8클래스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 까요? 그 누가 대륙을 위해 초인들과 맞설 생각을 할까요? 안 그런가요, 금탑주님?”
이미 세레나에게 대략적인 이야기를 모두 들은 터라 에리스 공주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은 엘에게 적잖이 부담되는 말이었다.
엘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공주님의 말은 반 정도만 맞았습니다. 분명 제가 나선 것은 맞으나 전 남을 위해 나선 것이 아닙니다. 8클래스의 경지를 개척한 것은 제가 앞으로 살아감에 있어 도움 이 되기 위함이며 대륙의 초인들과 맞서게 된 것은 그들의 사상과 내 사상이 맞지 않아 결국 대립할 수 밖에 없기 에 택한 것입니다. 결코 대륙인들을 위한다는 거창한 대의명분은 없습니다. ”
엘은 진심이었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남을 걱정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걱정한다.
그러한 맥락으로 생각하면 된다.
엘은 자신을 위해서 8클래스의 경지를 개척한 것이고, 마도 제국과 맞서는 것 또한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이다.
대륙인들을 구하겠느니 뭐니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수 적인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은 에리스 공주에게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 인가 보다.
그녀는 한 치의 물러섬없이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백 명을 죽이면 살인마이며, 만 명을 죽이면 영웅이라 합니다. 어떠한 것에 중점을 두었는가는 오직 금탑주님에 게만 국한될 뿐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금탑주님의 행동이 자신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니 엘로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의도하지 않아도 자신이 하는 행동은 어느덧 대륙 전체를 위한 일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왕이면 누이 좋고 매부가 좋다고, 자신을 위한 일을 하면서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것 또한 더욱 좋은 것이다.
그렇게 여긴다면 좋겠다고 생각한 엘은 피식 웃으며 에리스 공주를 바라보았다.
왠지 자신을 납득시키려는 그녀의 행동에 웃음이 흘러나온 것이다.
‘사람을 비판하여 깎아내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드높여 주려고 애쓰는 모습이라니…… 정말 재미있구나.’
굳이 자신을 높여 주려는 에리스 공주의 행동에 엘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렇군요. 공주님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제 말을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완벽하게 무시당할 수도 있는 말을 엘은 끝까지 들어주고 수긍하는 빛까지 보이자 에리스 공주가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엘은 고개를 저었다.
“옳은 말을 수용하는 건 당연한 것입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해야 할 상황인데 공주님이 감사하다니요.” 그렇게 말한 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조금씩 사라졌다.
어느덧 진중한 표정으로 돌아온 엘이 입을 열었다.
“이제 제가 공주님에게 찾아온 연유를 밝혀야겠군요. 전 솔직히 공주님이 금탑에 찾아온 게 무척 의외입니다.”
엘의 말에 에리스 공주의 표정이 스르르 가라앉았다.
그리고 물었다.
“왜 의외지요? 제가 금탑에 찾아온 것이 그렇게 잘못된 일인가요?’
엘이 고개를 젓는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단지 공주님에서는 엄연히 한 나라의 공주이시며 외부로 쉽게 외출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닙니다. 게다가 왕궁에서 금탑까지는 무척 먼길이지요.”
“……”
에리스 공주는 묵묵히 엘의 말을 들었다.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에 엘이 계속해서 말을 잇는다.
“다시 말하지만 공주님은 고귀하신 분입니다. 그런 분 이 이렇게 먼 길을 왔다는 건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내일 워프 게이트를 열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전 더 이상 고귀한 신분이 아니에요.”
에리스 공주가 엘의 말을 끊었다.
자신의 말이 끊기자 엘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사이 에리스 공주가 할 말을 내뱉고 있었다.
“금탑주님에게 청혼이 거절당한 순간부터 전 더 이상 왕국의 고귀한 공주의 신분으로 있을 수 없게 되었어요. 전략적으로 무척 유용한 가치를 지닌 제가 한순간 결혼할 수 없는 몸이 되었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요. 물론 금탑 주님을 원망하는 건 아니에요. 제가 이곳까지 온 까닭은 금탑주님에게 할 말이 있어서랍니다.”
애절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에리스 공주의 눈빛에 엘은 순간 마음이 철렁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재빨리 마음을 추스른 엘은 애써 에리스 공주의 시선을 외면했다.
“공주님은 고귀하신 분입니다. 공주님께서 청하신다면 제가 얼마든지 왕궁으로 갈 수 있습니다.”
자신을 피하려는 기색이 역력한 엘을 보자 에리스 공주의 표정이 처연해졌다.
짧은 순간 에리스 공주의 표정이 여러 번 변했다.
그리고 무언가 결심을 굳혔는지, 입술을 꼬옥 깨문 그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 내용은 엘에게 있어 청천벽력의 소리였다 “전 당신을 좋아해요.”
“………”
“처음에는 몰랐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당신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어요. 무엇이 계기인가 고민해 보면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당신을 좋아하는 건 틀림없어요. 저 에리스는 엘리미스, 당신을 사랑해요.”
직설적인 에리스 공주의 말에 엘은 극도로 당황했다.
세레나에게 이야기를 듣긴 했어도 설마하니 그녀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나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자신을 사랑한다니. 엘로서는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한참 동안 긴 침묵을 유지하던 엘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공주님의 마음, 무척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하지만 전 이미 책임져야 할 두 여인이 있습니다. 공주님의 마음은 그저 제 마음에 묻어 두고 싶을 따름입니다”
“……….”
완곡한 엘의 거절에 에리스 공주가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살갗이 터져 피가 흘러내렸지만 그녀는 그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에리스 공주가 엘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당신이 제 마음을 받아 주지 않아도 제 마음은 이미 정해진 상태예요. 어차피 왕국에서도 버려질 몸, 제 남은 삶을 다 바쳐서라도 당신의 마음을 얻고 말겠어요. 금탑은 대륙 십대 상단 중 하나인 디벨 상단을 거느리고 있다고 들었어요. 설마하니 여인 하나를 금탑에 들여 놓을 능력이 없을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왕궁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던 에리스 공주가 계획을 급히 변경했다.
엘은 정말 자신의 마음을 가슴에만 묻어 둘 생각이었던 것이다.
에리스 공주의 입장에서 이대로 절대 물러설 수 없었다.
인간은 무척 욕심이 많은 동물이라서 처음의 목적을 이루면 그다음 더욱 큰 것을 성취하려 든다.
에리스 공주 또한 처음에는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마음을 받아들여 주지 않고, 예상 보다 더욱 차갑게 대하는 모습에 울컥하여 금탑에 남겠다고 한 것이다.
엘의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고 당혹스러웠을 터였다.
하지만 에리스 공주 또한 그에 못지않게 당혹하고 있었다.
이미 멈출 수 없는 길을 오고 말았다.
이대로 물러서는 것은 애초에 자신의 마음을 밝히지 못 한 것보다 더욱 못하다.
그녀가 결연한 표정으로 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법을 전개하고, 무슨 수를 써서 저를 떼어 놓으려고 해도 마찬가지예요. 전 당신이 저를 받아 줄 때까지 결코 물러서지 않을 거예요.”
에리스 공주의 말에 압도된 엘은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에리스 공주는 금탑에 남게 되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