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121)
제1장 미녀는 괴로워
새하얀 안개가 휩싸여 드문드문 드러난 집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싹함을 느끼게 하였다.
차갑게 내려앉은 공기 속에서 사람들은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분분히 걸음을 옮겼다.
이른 아침, 제 할 일이 산적한 바쁜 아침이었지만 달동네 앞에는 기이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내려오면 꽉 차는 좁은 계단을 향해 수십여 명의 남자가 시선을 집중하고 있던 것이다.
행여나 시선을 뗄까 싶어 여러 명이 교대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은 마치 범죄의 현장 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의 행동이 노골적이라는 것 정도였다.
오랜 기다림을 끝으로 마침내 그들의 목표가 계단 위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사람의 모습이 아닌 코끝을 자극하는 향기였다.
심신을 편안하게 만드는 매혹적인 향은 다리가 풀리고 잠을 이루고 싶을 만큼 편안하고 그윽했다.
그다음, 매끈하게 쭉 뻗은 다리를 시작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모여 있던 남자들은 탄성을 터뜨렸다.
“오오오!”
“여신님들이야!”
“너무 성스러워서 바라볼 수가 없어!”
감탄을 터뜨리는 남자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존재하고 있었다.
바로 교복을 입고 있다는 것.
찰칵찰칵.
그들은 계단을 내려오는 두 여인을 보며 연신 감탄하기 바빴고, 몇몇 학생들은 핸드폰을 꺼내 사진 촬영을 하였다.
어떤 학생은 본인 능력으로 구할 수 없는 수백만 원 상당의 렌즈가 달려 있는 촬영용 카메라로 셔터를 눌러댔다.
여신이라 추앙받는 두 여인은 각기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있었다.
어깨까지 흘러내리는 긴 생머리를 지닌 여인은 청순가련한 이미지의 표본을 보여주었다.
지켜보는 사람이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를 지니고 있었지만, 살짝 반달을 그리는 눈매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부담스럽지 않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보면 볼수록 빠져들 만큼 치명적인 아름다움과 남성의 보호 욕구를 자극했다.
그에 반해 긴 머리를 포니테일 스타일로 묶은 여인은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로 인해 성격이 있어 보였다.
생머리 여인에 비해 부족하지 않은 아름다운 외모와 어우러진 도도함은 또 다른 매력 포인트였다.
담담한 생머리 여인에 비해 포니테일 여인은 심기가 불편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언니, 저걸 두고 봐야 해요?”
“윽박질러도 해결이 안 되니 어떻게 하겠어. 포기를 해야지.”
“그래도요.”
“이렇게라도 알려지는 게 우리의 목적과 부합하는 건 알고 있지?”
“그것만 아니었으면 저것들을 그냥…….”
“위협하면 안 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잖니.”
“에휴! 정말 언니는 성녀가 될 운명을 타고난 게 맞나 봐요.”
포니테일의 여인이 기분 나쁜 것을 숨기지 않고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앙칼진 그녀의 매력이 돋보이는 포인트가 되어 ‘오오!’ 하며 감탄사를 터뜨리는 남학생들이었다.
말이 통하면 설득을 하고, 맞아서 고칠 테면 폭력을 행사해 볼 테지만, 소문은 널리 퍼지고 사람은 수를 더해가니 이제는 포기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후우! 이 세상이 더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도 예쁘게 태어난 게 어디니? 감사하게 여기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도록 해.”
“그건 언니니까 가능한 거죠. 몇 번이나 쥐어 패서 보냈는데 말이 통하지 않네요. 저도 포기해야 하나 봐요.”
“후후, 이곳에는 그런 말이 있던데? 포기하면 편하다고.”
“저도 언니처럼 포기하고 싶은데 성격이 안 돼요.”
어깨를 나란히 한 두 여인이 걸음을 옮기자 남학생들이 조심히 뒤를 따랐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호위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착각할 정도였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이제는 익숙한 듯 두 여인은 신경 쓰지 않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서 그 녀석을 박살 내줬어요.”
“때렸다고?”
“자꾸 치근덕거리니 어쩔 수 없잖아요. 꼴에 학년 짱이라고 해봤자 결국 그 수준이잖아요.”
“그래도 폭력은 안 좋아. 이곳에서 그렇게 악업을 쌓아두면 그분을 어떻게 뵈려고?”
“괜찮을 거예요! 정절을 지키기 위해 저를 보호한 거니까요! 엘 님도 이해해 주실걸요?”
“하아! 정말 못 말려.”
한숨이 저절로 나오는 생머리 여인이었다. 차원 이동 전, 세레나라 불렸던 그녀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포니테일 여인, 카이나는 당당하기만 했다.
“이 세상에서 누가 그랜드 마스터인 너를 건드릴 수 있겠니?”
“그거야 모르는 일이죠. 보세요, 제가 얼마나 연약해 보여요?”
건강미가 넘쳤으면 넘쳤지, 절대 연약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말을 해봤자 무엇하랴, 저쪽 세상에서도 느꼈지만 그녀의 고집을 꺾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후! 네 일이니 그 부분까지는 뭐라 말을 할 수 없네. 하지만 너무 심하게 하지는 마. 죽으면 어떡해.”
“죽지 않도록 신경 쓰고 있어요. 언니가 말씀하셨으니 주의하도록 할게요.”
“그런데 왜 늦잠을 잔 거야?”
카이나, 이 세계에서 강이나의 이름을 얻은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두 볼은 수줍은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우우, 영어 독해 숙제가 있었어요. 한국에 왔으면 한국말만 잘하면 되지, 왜 영어를 하는 거죠! 난 미국에 갈 생각이 없는데.”
“하지만 넌 국어 성적도 안 좋잖니.”
의표를 찌르는 공격. 강이나의 얼굴에 당혹감이 배가되었다.
“그, 그, 그건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던 거죠!”
“이번에는 잘 볼 자신 있고?”
“칫! 그런데 언니는 숙제하셨어요? 어제 그냥 드라마만 보던데?”
“영어 독해? 수업 이후 쉬는 시간에 다 끝냈는데?”
“그 짧은 시간에요?”
그녀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자신은 영어 사전을 뒤지고 뒤져서 한 시간이나 걸려 푼 숙제였다.
“별로 어렵지 않던데, 왜 그러니.”
누구는 십 분 만에 숙제를 끝내고, 누구는 끙끙거리며 간신히 끝을 낼 수 있었다. 부조리한 세상의 이치를 느낀 그녀는 샐쭉한 눈을 하였다.
“언니 지금 굉장히 얄미운 거 알죠?”
“그래? 그렇다면 고쳐야겠네. 그래서 숙제는 잘했고?”
“일단 하기는 했어요. 칫, 언니가 그냥 해주시면 편할 텐데.”
“그럴 수는 없지. 그러면 공부하는 의미가 없잖니. 그분이 언제 오실지 모르니 열심히 하도록 해. 나중에 꼴등 성적표를 보여주고 싶지 않으면.”
낮게 웃음을 흘리며 말하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포니테일 여성이 쏘아붙였다.
“언니 나빴어! 이럴 때 약 올리고! 우리는 공동 운명체잖아요.”
“동시에 같은 배우자를 둔 연적이잖니.”
“이 언니가 가게 보면서 막장 드라마만 보더니 정말…….”
엘에게 지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유독 드라마나 영화에 대해 관심을 갖던 그녀였다.
유난히 삼각관계라든지 다각관계의 로맨스 구도에 관심을 갖는 걸 보면서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이 세계에 정착한 뒤, 가게를 차리고 시간이 날 때면 주야장천 TV를 켜놓고 막장 드라마를 시청했다.
복잡하게 얽힌 삼각관계는 기본이고, 어제의 남편이 오늘의 남남이 되어 있고, 옆집 남편이 내 남편이 되어 있는 막장 드라마에 전율하며 하나씩 섭렵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덧 자기 스스로 상황을 만들고 즐기는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재밌잖니. 이런 발상이 있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어.”
“후우! 그래도 작작해요. 엘 님이 언니의 그런 모습을 보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오히려 새롭다고 하지 않을까?”
“절대로요!”
“그러면 조금 섭섭할 것 같은데. 그래도 재미있으니 다음에 한 번 해보자.”
막장 드라마에 심취한 그녀에게 물들지 않기 위해 강이나는 양손으로 귀를 막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피하고 싶었지만 신호에 걸려 있어 피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전 싫거든요! 절대 안 할 테야!”
“안 해주면 밥 안 준다?”
“이제 먹는 걸로 협박하시는 거예요? 언니 나빴어! 나 그냥 갈래요.”
홱하니 고개를 돌린 그녀가 한 걸음 성큼 내딛으며 갈 때 뒤에서 한차례 소란이 일어났다.
“우와악!”
“조심하라고 새끼야!”
욕설이 터져 나오며 빠른 속도로 차 한 대가 지나갔다. 신호를 위반한 것은 차량 측이었지만 누구도 차를 욕할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욕을 먹은 학생은 차를 피하면서 엎어졌는데 손바닥이 긁혔는지 피가 배어나고 있었다.
“저런.”
안타까운 듯 혀를 찬 생머리 여인이 다가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괜찮으세요?”
“네? 아, 아, 네, 넵! 괜찮습니다. 괜찮고말고요.”
여신님이 다가와 말을 걸어주자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 대답한다.
하지만 손바닥에서는 여전히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숨을 푹 내쉰 세희는 가방을 뒤적이다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약은 없고 이 정도만 있네요. 이거라도 쓰세요.”
“헉? 가, 감사합니다.”
“그럼 조심하세요.”
임금님에게 성은을 입은 궁녀마냥 연신 허리를 굽히며 감사의 인사를 건네는 학생을 보며 미소를 지어준 그녀가 발걸음을 옮겼다.
“왜 도와줘요.”
“다친 사람을 외면할 수는 없잖니. 안타깝네, 치료 마법을 시전하면 바로 나을 수 있는 상처인데 도와줄 수가 없어서.”
“흥! 언니는 너무 착해서 문제라니깐.”
그러면서 시선은 손수건을 받고 좋아하는 남학생에게 슬쩍 향했다. 찰나의 틈이었지만 그것을 포착하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후후, 그러면서 너도 걱정했잖니. 우리 착한 이나.”
“어린아이 취급하지 말아요! 여기서는 언니랑 동급생이라니까요!”
“그래그래, 우리 착한 이나.”
그녀의 교복 웃옷에는 강이나라는 붉은 명찰이 자리했다.
어린아이 취급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이나였다. 하지만 머리를 쓰다듬는 기술이 어찌나 뛰어난지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으며 느끼고 있다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손을 뿌리쳤다.
“이, 이러지 마요!”
“후후, 부끄러워하기는. 그럼 가자.”
“칫! 왠지 말려드는 기분이란 말이야.”
입술을 삐죽인 이나는 입을 닫고 순순히 뒤를 따랐다. 집에서 나온 지 약 십여 분이 지난 끝에 두 사람은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중 아침의 학교는 언제 와도 활력이 넘치는 곳이다.
티격태격하던 두 여인이 교실에 모습을 드러내자 시끌시끌하던 분위기가 이내 조용해진다. 어느덧 고등학교를 대표하는 명물이 되어버린 두 여인은 어딜 가나 시선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
“후, 이러면 어디 움직이기도 힘든데.”
“언니가 말했잖아요, 기왕이면 예쁜 게 좋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요.”
“수학 문제도 그런 응용력으로 풀면 반 꼴지를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
“이익! 나 꼴등 아니거든요?”
“하지만 앞에서 세는 것보다 뒤에서 세는 게 더 빠르잖니.”
말로는 절대 그녀를 이길 수 없다 판단한 이나는 분한 표정을 짓고는 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그때 두 여인의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조금 전 손수건 성은을 입었던 남학생이었다.
우물쭈물하던 그는 두 여인을 보고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가 필사적으로 용기를 쥐어짜 내 입을 열었다.
“아까는 정말 감사합니다, 세희 여신님!”
“편하게 세희라 불러도 되는데요. 한명준 씨.”
세레나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가 이곳에서는 한세희라는 이름을 갖게 된 세희가 남학생의 붉은 명찰을 보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제가 어찌 감히! 아, 죄송합니다. 어쨌든 감히 이름으로 부를 수 있겠습니까. 손수건은 정말 감사합니다, 세희 여신님. 가보로 간직할게요!”
“돌려주시지 않으려고요?”
“예? 아, 그게 그러니까 돌려줘야 하긴 하는데 그 뭐냐, 여신님에게 받아서 너무 기뻐서 말실수를…….”
당황한 그는 횡설수설하면서 알아듣지 못할 말을 반복했다.
세희는 곱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돌려주지 않으셔도 되니 잘 간직해 주세요. 다음부터는 신호등 잘 보고 다니시고요.”
“예? 예! 물론이죠. 그, 그리고 손수건은 가,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멀어지는 남학생이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을 지켜보던 이나는 세희를 바라보는 주변 시선이 바뀌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저쪽 세계 성녀를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성녀 나셨네, 성녀 나셨어.”
저쪽 세계에서도 성녀로 선택되더니 이쪽 세계에서도 성녀 취급이다. 황당한 듯 중얼거리는 이나였지만 그 속에는 은근한 부러움이 숨어 있었다.
‘칫! 나는 왜 저렇게 안 되나 몰라.’
자신이 갖지 못한 걸 남이 갖고 있으면 은근히 부러운 법이었다.
차원을 넘어온 두 여인의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적인 등교 시간이었다.
세희와 이나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정확히 네 달 전이었다. 이미 다른 세상에서 충분한 삶을 살아온 그녀들은 차원 이동 마법을 감행하면서 그동안 정들었던 육체를 그 세계에 되돌리고 이곳에서 새로운 육체를 구성하였다.
두 여인에게 있어 영혼의 반려인 엘은 전투 마법사임과 동시에 뛰어난 매직 아이템 제작자이기도 하였다.
이 세계에 소속되지 않은 두 여인을 데리고 오면서 엘은 그가 익혔던 제련제강의 마법과 연금술을 바탕으로 창안한 새로운 마법으로 두 사람의 육체를 구성하는 데 성공했다.
세희와 이나의 외모는 전 삶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희는 은발과 푸른 눈동자가 검게 변했고, 이나는 상징과도 같았던 붉은 머리와 눈동자가 검게 변했을 뿐, 다른 부분은 동일했다.
시전자의 의지로 형태를 변화하는 제련제강의 묘리가 두 여인의 전생 모습을 그대로 구현해 낸 것이다.
지닌 힘은 모두 잃었지만 자질마저 그대로 빼닮아 새로운 육체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뛰어난 자질을 바탕으로 전생의 실력을 되찾아가고 있었지만, 두 여인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한 번씩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하였다.
“후우!”
“왜 그렇게 심란한 표정을 지어요, 언니.”
“그냥 조금 답답해서.”
“엘 님 때문이죠?”
어린 시절부터 함께 살아왔기에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꿰뚫어 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응, 시간이 지나도 오시질 않으니 걱정이 되네.”
“잘하실 거예요. 9클래스만 해도 역사상 몇 이루지 못했던 경지인데 엘 님은 10클래스라는 지고한 경지에 도달하셨잖아요? 신의 반열에 오르신 분을 우리가 걱정하는 것도 웃기죠. 아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우리 곁에 나타나실 거예요.”
“신의 반열이라면 우리는 신의 부인인가?”
“그렇지 않을까요? 마법의 신을 따르는 두 명의 미의 여신! 말하고 보니 맞는 말 아니에요? 사람들이 여신이라고 해주잖아요.”
“이나, 너는 미의 여신보다는 전쟁의 여신이 어울릴 것 같은데. 쿡쿡.”
낮게 웃음 짓는 그녀의 모습에 이나가 도끼눈을 하였다.
“뭐예요! 저도 미의 여신 같은 것 해보고 싶단 말이에요. 치사하게 언니만 그런 이미지 하려고 하고.”
“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불같은 성격은 좀 다스려야 하지 않겠니?”
“칫! 타고나길 그런 걸 어떻게 해요. 이럴 때 엘 님은 센스가 없으셔. 몸을 만드는 과정에서 성격까지 원하는 대로 바꾸면 얼마나 좋아.”
자신의 성격이 그대로임에도 괜히 엘을 탓하는 이나.
세희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걸렸다.
“그 말은 엘 님이 오실 때 바로 전해 드릴게.”
“앗! 안 돼요!”
당황하며 매달리는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자 이나가 양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
“언니, 원하는 거 있죠?”
“응, 조금 이따가 가게 일을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
“제가요?”
“응, 음식이나 차는 끓이지 못하더라도 하다못해 서빙 같은 건 할 수 있잖아.”
“언니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닌 것 같은데요.”
진실을 말하라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바라보자 세희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응, 사실 손님들 중에 널 보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으셔.”
“칫! 역시 그게 목적이었어.”
“소중한 고객 분들인데 마냥 외면할 수는 없잖니.”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일단 불만 사항을 모두 기억해 둔 다음 그분에게 전해 드리고 용돈도 깎을 거고…….”
“아, 알았어요! 하면 될 거 아니에요. 언니 나빴어. 전생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전생에서는 금전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기에 편안하게 돈을 쓸 수 있었지만, 21세기 대한민국은 노는 만큼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사회였다.
“후후후.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말이 있단다. 숙제 끝나고 바로 내려오렴.”
“알았어요.”
세희의 페이스에 여지없이 휘둘려 버린 이나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많이 오가지 않는 달동네는 인적이 드물고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많아 무척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분위기와 어우러진 어수선한 치안 상태 때문에 사람이 찾지 않는 곳이지만 이른 아침과 저녁 시간이 되면 많은 사람이 몰려오고는 한다.
다른 곳은 휑하게 느껴질 정도로 사람이 적었지만 전통찻집 ‘엘리미스’는 시장터를 방불케 할 만큼 많은 사람이 몰려든다.
찻집 문을 여는 순간 맑고 영롱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어서 오세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손님을 맞이하는 세희의 자태를 본 올해 이십칠 세 대기업 신입 사원 이정모는 얼떨떨함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이곳 엘리미스 찻집을 처음 찾은 그는 소문으로만 떠돌던 여신 여주인이 그녀를 지칭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버스로 여섯 정거장 떨어진 곳에 근무하는 그는 회사 내에서 은밀하게 떠도는 소문을 입수할 수 있었다.
그 내용은 달동네 입구 부근에 가히 여신이라 칭해도 부족하지 않을 아름다운 미녀가 찻집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 그 사실을 믿지 않던 그였지만, 한 번이라도 다녀온 사람들은 모두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였기에 예쁘면 얼마나 예쁠까 싶어 찾아왔다.
친척 중 연예계에 종사하는 삼촌이 있어서 어렸을 적부터 연예인을 보아왔던 그는 길게 늘어선 줄을 한 시간이나 기다려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는 찻집 여주인을 보는 순간 머리에서 천둥이 연달아 내리치는 듯한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이 정도면 S급이잖아. 아니야, 특S? SSS급이야. 이런 여자가 왜 알려지지 않았던 거지?’
현실의 축과 어긋난 비현실적인 외모에 그의 사고 회로는 현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다른 방향으로 빠르게 회전을 하였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세희는 이상함을 깨닫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손님?”
“네? 아, 네! 실례했습니다.”
심금을 뒤흔드는 목소리에 반응한 정모는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행태를 깨닫고 가볍게 얼굴을 붉혔다.
무안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마주 미소를 지어 보인 세희가 물었다.
“주문하시겠어요?”
“예! 주문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리가 없어서 어떻게 하죠?”
미인의 얼굴에 떠오른 곤혹스러움이 일에 지친 정신을 이렇게 깨워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신을 차린 그는 그제야 가게를 둘러볼 수 있었다.
약 서른 평 정도 되어 보이는 가게에는 이미 그녀를 노리는 늑대들로 꽉 차 있는 상황이다. 아직 앳된 십대부터 시작하여 나이가 지긋한 오십대까지 다양한 남성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정모는 왠지 모를 불쾌감과 다급함에 휩싸였다.
‘이런 늑대들이…….’
지금 그 순간 그 또한 그들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은 저 멀리 날아간 지 오래였다.
“괜찮습니다. 가지고 가면서 먹도록 하죠.”
“아! 그러시겠어요? 그럼 어떤 차로 드릴까요?”
곤혹스러웠던 얼굴에 미소가 걸리자 꽃봉오리가 만개한 듯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말이라도 더 붙여볼 요량으로 메뉴판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처음 와서 잘 모르겠는데 추천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네! 음, 보니까 일을 하시느라 많이 피곤하신 것 같네요. 흰머리도 있으신 편이죠?”
“네? 그걸 어떻게…….”
“다 아는 법이 있거든요. 그렇다면 복분자 차를 추천할게요. 몸에 기운을 북돋아주고 흰머리 나는 걸 방지해 주거든요.”
“그렇습니까? 그럼 그걸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후후.”
놀란 듯 거듭 묻는 정모였지만 세희는 말을 아끼고 곧바로 차를 끓였다. 잠시 후 복분자 향이 은은하게 나는 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시지 않았음에도 차향으로 피로가 말끔히 가시는 기분이다.
“향이 무척 좋은데요?”
“향이 좋아야 맛도 더 좋게 느껴지는 법이거든요.”
“그렇습니까? 맛도 기대가 되는군요.”
환심을 사기 위한 의도도 있었지만 진심이 담겨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미소 지은 세희는 아래에서 무언가 뒤적거리더니 곱게 포장된 과자를 내놓았다.
“매장에 못 모시는 분에게는 이걸 서비스로 드려요.”
“이게 뭡니까? 한 번도 본 적 없는 건데…….”
“제가 만들었거든요.”
“그렇습니까? 놀랍군요.”
차를 끓이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과자까지 만드는 능력을 갖고 있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무엇보다 보면 볼수록 눈을 떼지 못하게 되는 미모는 사기 수준이었다.
“와…….”
한 모금 마셔본 그는 맛에 감탄을 감추지 못한 표정을 짓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혹시 연예인 해보실 생각이 없으십니까?”
“연예인이요?”
“예, 생각이 있으면 제가 다리를 놓아드릴 수 있습니다.”
그냥 가려고 했지만 뒷일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세희의 미모는 정모에게 있어 충격적이었다. 다소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던 그녀는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생각이 없어요.”
“어째서입니까? 처음이라 실례일 수 있지만 그 정도 미모라면 단번에 스타가 될 수 있습니다. 많은 돈을 벌 수도 있고요.”
“칭찬은 감사하지만 아직 학생이라 학업에 집중하고 싶어요.”
“연예계 활동을 하면서 같이하셔도 되지 않습니까? 정 안 되면 휴학을 하셔도 되고…….”
“휴학이요? 전 아직 고등학생인데요.”
“네?”
세희의 말에 정모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그는 그제야 그녀가 다소 앳된 외모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풍기는 신비로운 분위기와 성숙함으로 인해 그만 착각을 해버린 것이다.
“실례했습니다. 나이가 들어 보인다거나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신경 쓰지 않아요.”
“연예인이 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제 말은 거짓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에…….”
“세희예요.”
“예, 세희 씨가 데뷔하게 되면 단박에 톱스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건 제가 확신합니다.”
“생각은 해보도록 할게요.”
“후! 알겠습니다.”
자신의 일도 아니었건만 그는 그녀의 결정이 안타깝기만 하였다. 하지만 오늘 처음 만난 자신이 이 정도까지 했다면 충분히 주제넘은 행동이라 생각해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제가 한 말을 한 번쯤 생각해 주십시오.”
“생각은 하겠지만 기대는 마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분명 데뷔하면 크게 성공할 수 있을 거야. 설득이 안 되면 삼촌에게 한 번 말씀을 드려보는 수밖에.’
듣는 것만으로 감미로운 세희의 음성을 들으며 정모는 왠지 모를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린 그가 막 밖으로 나가려 할 때 가게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헙!”
안으로 들어온 여인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충격을 받은 그였다.
“응?”
숙제를 마치고 세희를 돕기 위해 가게 안으로 들어온 이나는 굳어버린 정모를 보고 고개를 갸웃하다가 그의 손에 들린 차를 보고는 상황 파악을 한 뒤 입을 열었다.
“손님이시군요. 안녕히 가세요. 다음에 또 들러주시고요.”
“예, 예.”
‘좀 어벙한 사람인가 보네.’
피식 웃음을 지은 이나는 TV를 보고 있는 세희를 보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는 한창 방영 중인 막장 드라마의 대명사 〈처형과 처제의 유혹〉 시청에 여념이 없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