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129)
제9장 쉽지 않은 지구 적응기
준성은 세계의 간섭에서 벗어나 새로운 육체를 구성하는 데 성공했지만 마냥 좋은 표정을 지을 수 없었다.
앙상하게 마른 자신의 팔을 보면서 준성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후우, 간신히 벗어난 건가. 내가 어리석은 판단을 했었어.”
육체를 구성할 당시에만 해도 자신을 배척하는 세계를 완벽하게 속였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이 세계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은 후에도 세계는 그에게 집요할 정도로 끈질기게 달라붙어 괴롭혔다.
단지 세계의 인식을 바꾸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야기가 달랐던 것. 한 번 배출한 모든 것을 기억하고, 그것을 계속해서 배척하고 있었다.
그 결과 세계는 자신의 존재를 배출하기 위해 압박을 가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가위에 눌린 것이라 생각할 정도였지만 준성에게는 자칫 잘못하면 소멸의 길을 걸을 수도 있는 공격이었다.
이것이 마지막 시험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준성은 한 가닥 남은 마나를 이용하여 스스로를 보호해야만 했다.
세계의 시험은 가볍지 않았다. 그에게 가해진 압력은 무려 반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그동안 준성은 실력을 쌓기 위해 수련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모든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를 속이고 육체를 재구성할 수 있었지만 드러난 결과는 참담함 그 자체였다.
운용할 수 있는 모든 마나를 잃어버린 준성은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제야 그는 자신의 실수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마나를 운용하는 것이 세계의 의심을 샀던 것이었어.”
실로 어리석은 판단을 내린 셈이었다. 흐르는 강물을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방치하면 될 것을 온몸을 다 바쳐 가로막으려 했으니 힘이 빠져 포기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세계의 압박이 반년 동안 지속된 것이 아니라 반년 동안 저항하다가 그제야 흐르도록 놔두었으니 충격은 있을지언정 이상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책하며 준성은 양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조금씩 날씨가 따뜻해지는 초봄 시기에 육체를 구성했건만 세상의 날씨는 어느덧 추워지는 겨울에 진입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걷고 있는 거리를 걸으며 준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등장하기는 싫었지만 씁쓸하네.”
몸에는 힘이 하나도 없어서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다.
무엇보다 문제인 것은 현재 머물 곳조차 변변찮다는 점이다.
몸이 정상적이라면 마법을 활용하여 어떻게든 버틸 수 있겠지만 현재 몸 상태는 붕괴되기 직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배 속에서 연신 음식을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고, 온몸에는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이대로 죽어버리면 다른 수가 없는데.”
영혼은 이미 육체에 고정되어 있고, 이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그대로 세계의 의지에 휩쓸려 배출 과정을 겪게 될 것임이 분명했다.
“후욱! 후우!”
얼마 걷지 않았음에도 벌써부터 체력의 고갈이 찾아오고 있었다. 준성은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기면서 산을 내려왔다.
현재 자신이 있는 곳은 경주.
육체를 재구성한 장소에 그대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조금 남은 마나를 활용하여 정상으로 되돌리려고 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선택이 최악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지금 자신의 몸 상태는 영혼에서 육신의 상태로 바뀌었는데, 가장 중요한 단계는 지났지만 마나의 운용뿐만이 아니라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해야 했다.
산속에서 나물을 뜯어먹으며 며칠을 버텼지만 공복감만 더 커질 뿐이었다.
“하아! 하아!”
힘겹게 걸음을 옮긴 끝에 산에서 벗어났지만 준성의 얼굴에 암담함이 서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인적이 드문 시골길이 펼쳐져 있던 것이다.
“도움을 청하기도 전에 죽으려나.”
쓴웃음을 지으면서 비틀비틀 한 걸음씩 움직였다.
이렇게 굶주림에 시달렸던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김준성이었던 시절, 오기로 부모님의 빚을 갚아 나가면서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적은 있지만 지금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하던 때는 없었다.
가슴속에서 분노가 들끓었다. 그것은 세상을 향한 것이 아니라 미비한 준비로 지금의 상황을 불러일으킨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좀 더 철저했다면, 좀 더 치밀했다면 지금 같은 처지에 놓이지 않았을 것이다.
‘다 내 탓이지, 내 탓.’
눈앞에 자신을 따라 이 세상으로 온 두 여인이 아른거렸다. 세레나, 카이나. 사랑스러운 두 여인을 두고 자신은 이대로 세상을 떠나야 하는 걸까?
몽롱한 정신으로 얼마나 걸음을 옮겼는지 모른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조금씩 사람 사는 집이 보이기 시작했고, 자신 앞에 몇몇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준성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구부정한 허리에 나이가 많은 할머니였지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눈에는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정신이 흐릿해지는 것을 느낀 준성은 손을 뻗다가 그대로 자리에서 무너졌다.
우웅.
그와 함께 한 줌 남아 있던 마나가 전신을 휘감으며 회전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멀어졌던 의식이 돌아오면서 캄캄한 터널을 건너 차츰 세상이 밝아졌다.
기절하듯 잠들어 있던 준성은 몸을 뒤척이면서 살며시 눈을 떴다.
“으음.”
따뜻한 기운이 등을 데우고 있었고, 푹신한 이불이 몸 위를 덮고 있었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준성은 낯선 방 안임을 확인하고 중얼거렸다.
“여긴?”
“일어났어?”
구수한 목소리와 함께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방 안으로 한 사람이 들어왔다.
흰 머리와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주름이 가득 뒤덮인 얼굴이었다.
밥상을 들고 안으로 들어온 할머니는 준성을 향해 인상을 팍 썼다.
“얼마나 힘이 없으면 바닥에 쓰러지고 그래. 옮기는 데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알아?”
“죄송합니다.”
“뭐, 그건 됐고. 밥이나 먹어.”
“아…….”
그제야 자신이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준성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염치 불구하고 맛있게 먹겠습니다.”
“먹어, 먹어야 힘이 나고 그러겠지.”
“예.”
할머니가 차려 온 상은 나물 반찬 두 개와 김치가 전부였다. 보잘것없는 상이었지만 밥이 가득 담긴 밥공기를 보니 퉁명스러운 말투와 다른 따뜻함이 전해졌다.
숟가락을 들어 한입 먹은 준성은 정신없이 밥을 먹어 나가기 시작했다.
걸신들린 것마냥 밥을 해치우는 모습을 할머니는 미소 지으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전투적으로 이어진 식사를 끝낸 준성은 그릇을 깨끗하게 비운 뒤, 수저를 내려놓았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그렇게 먹는 겨.”
“하하.”
어색한 미소를 지은 준성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대답하지 않는 그를 빤히 바라보던 할머니는 몸을 일으켜 상을 들려고 했다.
“끙차.”
“제가 치우겠습니다.”
“그러도록 해.”
몸을 일으킨 준성은 밖으로 나가 부엌에 상을 놓아두었다. 그리고 자신이 머문 곳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허름했다.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집은 백 년 이상 되어 보였다. 방 두 개에 부엌과 화장실을 가려면 밖으로 나와야 했다.
“…….”
잠깐이지만 주변을 둘러본 것만으로 할머니의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입을 다물고 있던 준성이 안으로 들어가니 곧바로 타박이 날아든다.
“뭐하느라 이제 와? 여긴 훔쳐 갈 것도 없어.”
“죄송합니다. 잠시 멍하니 있다 보니 늦었네요.”
“그런데 왜 거기 쓰러져 있던 겨?”
“그게…….”
어색한 표정을 짓던 준성은 현재 자신의 상황을 적당히 각색해서 설명했다. 수학여행으로 경주까지 왔다가 쉬는 시간에 산을 타고, 그곳에서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털렸다. 그리고 발을 헛디뎌 다친 상태로 간신히 이곳에 돌아왔다는 내용이었다.
“괜찮은 겨?”
“솔직히 몸이 좋지 않아서요, 하하.”
당장 이곳을 나가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상황이었다. 수중에 한 푼도 없고, 몸 상태도 일반인보다 약했으니 말이다.
“그럼 며칠 머물러.”
“예?”
“왜? 누추해서 머물기 싫어?”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너무 신세를 지는 것 같아서…….”
바라던 바이기는 했지만 할머니의 상황도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 준성은 머뭇거렸다. 현실과 양심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몸이 안 좋으면 쉬어. 그 정도는 괜찮으니까.”
“예.”
할머니의 이름은 강옥순이었다. 슬하에 아들 둘을 둔 할머니는 현재 경주 중앙 시장에서 나물과 채소 몇 가지를 팔면서 근근이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아들이 있지만 생계에 전혀 보탬을 주지 않고 있기에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들에 대한 원망은 전혀 하지 않았다.
잘 팔리지 않는 나물을 팔면서 이어나가는 생계가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그 사실을 알기에 망설였지만 이곳을 벗어나면 달리 방도가 없다는 사실이 준성으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했다.
“그럼 쉬어.”
퉁명스러운 어조로 몸을 일으키는 옥순 할머니를 보며 준성이 고개를 숙였다.
‘반드시 은혜를 갚겠습니다.’
세희의 하루는 새벽 네 시에 시작이 된다.
아직 어둠이 드리운 방 안에서 조용히 몸을 일으킨 그녀는 리모콘을 들고 TV를 켰다.
삑.
“안 늦었네.”
케이블 TV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주방으로 가 차 한 잔을 타서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무서운 집중력으로 드라마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드라마 재방송이 끝나면 다른 채널을 돌려 다른 드라마를 본 뒤, 오전 여섯 시가 되면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그리고 여섯 시 삼십분에 일어난 이나와 함께 밥을 먹고 등교를 했다.
“언니, 다른 반응은 없나요?”
“응, 아직.”
“다른 일은 없는 거겠죠?”
‘그날’ 이후 이나는 매일 재촉하며 물어보고는 했다. 하지만 세희의 대답은 언제나 그러하듯 동일했다.
“아직 시간이 필요해. 그분이 서울이 아니라 시골 같은 곳에 떨어지셨으면 그곳을 벗어나야 하니깐.”
“여긴 교통이 발전했잖아요.”
“그게 아니라 도시로 올 이유가 많지 않다는 뜻이야. 이나의 이름이 시골 곳곳까지 파고든 건 아니잖아? 그럼 그분이 이나의 모습을 접하게 될 여지도 많지 않다는 뜻이야.”
“아!”
“그러니 더 열심히 해야겠지?”
“안 그래도 열심히는 하고 있어요. 언니 때문에 발야구로 제가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데요.”
분노를 실은 이나의 맹활약은 그녀의 학급이 전 학년 토너먼트에서 우승을 이루는 기염을 토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전 타석 홈런을 친 이나의 존재감은 기사로 다루어질 정도로 큰 화제가 되었다.
“열심히 하는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은데.”
“하아!”
“지금은 뚜렷한 방안이 없으니 하던 대로 하자. 나도 그분을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할 테니.”
“네.”
그렇게 둘은 학교로 가서 수업을 들었다. 중간에 스케줄이 있는 이나는 조퇴를 했고, 세희는 방과 후 조용히 학교를 벗어났다.
가게를 열기 위해 바삐 움직이던 세희는 귓가에 스치는 균열음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키이잉.
“이건…….”
표정을 굳힌 그녀의 신형이 빠른 속도로 공간의 균열이 일어난 곳으로 향했다.
“게이트?”
인적이 드문 곳에 생성된 것은 공간 이동의 문이었다. 어디로 통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응집된 마나의 양은 적지 않았다.
잠시 그것을 빤히 바라보던 세희는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는 황급히 마법을 시전했다.
“인비저빌리티(Invisibility).”
파앗!
투명화 마법을 시전한 그녀는 골목 구석으로 향했다. 잠시 후, 일남 일녀가 골목길에 모습을 드러냈다. 정장 차림을 한 삼십 대 후반의 남자는 게이트를 발견하고 표정을 찌푸렸다.
“또 이건가.”
“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옆에 서 있던 삼십 대 초반의 여인이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 최근 세계 곳곳에서 이런 일이 빈번하게 벌어진다고 하더군. 공간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곳과 다르다는 건 분명하다.”
“이곳과 다르다니, 그럼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의미일까요?”
“아직 확정된 건 없다. 일단 규모는 크지 않으니 조금 있으면 소멸하겠군.”
그의 말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게이트의 규모는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고, 이내 흔적도 없이 소멸하고 말았다.
“이렇게 지켜보는 것도 지겹네요.”
“어떤 게 넘어올지 모르니 경계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긴, 이것 때문에 각국이 잔뜩 긴장하고 있으니까요.”
“그렇지. 음!”
대답하던 남자는 돌연 품속에 손을 넣더니 번개처럼 빠른 손놀림으로 골목 구석을 향해 무언가를 던졌다. 파공음과 함께 벽에 틀어박힌 것은 단검이었다.
“왜 그러세요?”
“아니, 뭔가 있는 것 같아서.”
“고양이나 쥐 같은 거겠죠. 아무것도 없는데요.”
“그런가? 하긴 내가 과민 반응을 한 것일 수도 있겠지. 요즘 자주 출몰하는 게이트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으니까.”
“빨리 인원 확충을 해줬으면 좋겠어요. 상황은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윗분들은 여전히 있는 인력으로 굴려 먹으려고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임무를 마쳤으니 돌아간다.”
“네.”
잠시 골목 구석을 주시하던 남자는 단검을 회수한 뒤 여자와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아무도 남지 않는 골목은 적막이 자리했다. 한참 동안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던 골목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세희였다.
“후우, 위험했어.”
깊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방금 전 상황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투명화 마법을 시전하고 있었지만 남자는 미묘한 마나의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정체를 들킬 뻔한 세희는 한 가지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세상에도 마나가 존재하고 그것을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 있었어.”
매직 아이템을 발견했을 때 예상했던 사실이지만 그것을 다루는 사람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이것은 부수적인 수확이었다. 세희는 게이트에서 느껴지는 익숙함에 미간을 모았다.
“게이트에서 느껴지는 그분의 기운은…….”
그들은 게이트가 근래 들어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엘의 기운이 느껴졌던 것을 종합하면 게이트의 생성은 엘과 관련이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제법 큰 성과였지만 세희로 하여금 고민에 빠져들게 만드는 것은 어디에도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나에게는 비밀로 해야겠지?”
그녀의 힘이라면 조사에 큰 도움이 되겠지만 문제는 성격이다.
앞뒤를 가리지 않는 불같은 성격은 엘의 흔적을 찾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될 확률이 높았다. 무엇보다 이 세상에 마나를 다루는 것이 자신들만 있는 게 아니란 것을 본 이상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여야만 했다.
우웅! 파앗!
그녀의 손끝을 타고 움직인 마나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면서 게이트 소멸의 여운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미세하게 느껴지는 기운에 세희는 간절함이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면 제가 도우러 갈게요. 기다려요.”
공간의 균열을 발견한 세희는 집으로 돌아가서도 표정이 밝지 못했다.
처음에는 기분 좋지 않은 날이거니 생각했던 이나는 세희의 표정을 찬찬히 살피더니 이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언니!”
“응? 왜 그러니?”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좀 처지는 날이어서.”
낮에 있었던 일을 말할지 말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세희는 애써 둘러서 대답했지만, 충격과 공포로 물든 이나의 표정을 지워내지는 못했다.
“심각한 일이에요? 말하지 못할 비밀이라도 제게 말해줘요. 설마 애인이라도 생긴 거예요? 괜찮아요! 언니가 배신을 해도 엘 님에게는 제가 있으니까요!”
“대체 왜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는 건데?”
“아니에요? 저는 언니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새로운 사랑과 엘 님 사이에서 고민하는 줄 알았죠. 드라마를 앞에 두고 그런 표정을 짓는 언니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요.”
“…….”
날카로운 이나의 관찰력에 세희는 할 말을 잃었다. 평소에 물렁하다고 생각했던 그녀가 의외로 날카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하긴, 그랜드 마스터의 육감이 어디로 가는 게 아니니까.’
“낮에 그분을 찾으려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거든. 그래서 좀 피곤한가 봐.”
“미안해요, 나도 시간이 남으면 엘 님을 찾는 데 도움을 줄 텐데.”
“이나의 얼굴이 알려지는 게 그분을 찾는 데 더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 오늘 페이스 조절을 못한 거니까 너무 걱정 마.”
“알았어요. 대신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말하세요.”
“응.”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낮에 발생한 게이트와 마나를 운용하는 이들의 존재는 세희로 하여금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나에게 말하면 도움이 안 돼.’
마법사의 차가운 이성은 현재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의 순서를 정확하게 세우도록 만들었다.
현재 가장 우선순위는 엘을 찾는 것이고, 그다음이 마나를 운용하는 자들의 정체와 갑작스러운 게이트의 발생이었다.
우선은 엘을 찾는 것이 가장 먼저이니 쓸데없이 이나에게 정보를 제공해서는 안 됐다.
“후우! 쉽지 않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몸 상태를 냉정하게 살핀 준성은 자신의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깨닫고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가까스로 세계의 규칙에 개입하여 육체를 재구성할 수 있었지만 단지 위기를 극복한 것에 그쳤다.
체내를 휘감고 있는 마나는 극소량에 불과했고, 1클래스의 경지에 오르기에는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했다.
거기다가 몸 곳곳에 균열이 가 있는 상태. 유리에 생기는 실금이 얼마 지나지 않아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을 감안하면 이 균열들은 절대 낙관적이지 않았다.
“염치 불구하지만 신세를 끼쳐야겠어.”
형편이 어려운 김옥순 할머니에게 신세를 끼친다는 사실이 불편했지만 지금 자신의 처지가 그만큼 좋지 못했다.
준성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아침상을 차렸다.
허리가 아픈 옥순 할머니는 정해진 시간마다 식사를 차리는 준성의 모습에 친근함을 느꼈는지 전보다 더 많은 배려를 하곤 했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설거지를 한 뒤 옷을 입고 뒷산으로 향한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조심하고.”
“물론입니다.”
“열쇠는 챙겼지?”
“예.”
첫 만남에서 못 미더운 모습을 보여서인지 옥순 할머니는 밖으로 나가는 준성을 마치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걱정했다.
어린아이 취급이었지만 그러한 행동이 결코 싫지 않았다.
“늦게 올지 모르니 밥 알아서 챙겨 먹고. 미안할 필요 없으니. 알았지?”
“알겠습니다. 몸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래.”
밖으로 나온 준성의 발걸음은 뒷산으로 향했다. 쇠약해진 몸으로 오르기 힘든 곳이었지만 땀을 뻘뻘 흘리면서 산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나무가 우거진 곳에 드러난 경주의 풍경을 바라보며 준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야산을 오르는 데 이 정도라니. 아직 갈 길이 멀었어.”
자리에 앉은 준성은 단전 호흡으로 마나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우웅! 우웅!
절대 경지에 오른 그의 마나 인도 아래 주변의 마나가 몸속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매일 산에 오르는 것은 붕괴되는 육체를 단련하고, 시가지보다 풍부한 산속의 마나를 흡수하여 1클래스 경지에 오르기 위함이었다.
인적이 드문 산속 마나의 청량함이 내부를 휘감자, 준성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단전 호흡을 통해 마나를 모으는 것은 약 세 시간가량 이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더 오랜 시간 동안 마나를 모으고 싶었지만 현재 준성의 체력 상태는 그 이상을 감당하지 못할 만큼 좋지 못했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준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면 언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마나가 휩쓸고 간 육체는 청량함이 감돌아 상쾌함을 느꼈지만 그것뿐이었다.
균열이 난 육체는 온전한 마나 홀을 형성하지 못했다. 이는 매일 쌓을 수 있는 마나 양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았다.
산을 내려오고 집으로 향하면서 시간을 확인하니 아직 저녁 시간이 먼 낮이었다. 집에 가면 할 일도 없기에 준성은 시간을 때울 겸 시내로 발걸음을 옮겼다.
낮은 건물들 사이로 형성된 거리에는 많은 사람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오랜만에 접하는 현대 사회의 거리에 왠지 모를 반가움을 느끼던 준성은 어느 한 곳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고정된 그의 시선은 경악으로 크게 뜨여 있었다.
“카이나?”
커다란 포스터에 자리한 것은 다름 아닌 카이나였다. 머리색과 눈동자 색은 달랐지만 이목구비는 동일했고, 포스터 너머로 느껴지는 기운 또한 비슷했다. 한참 동안 시선을 떼지 못하던 준성은 카이나의 의도를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찾아오란 뜻인가? 그런 건가?”
몸을 움직이기 좋아하지만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길 꺼리던 카이나의 뜻은 아닐 터였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 세레나가 그녀를 부추겼을 확률이 높았다.
“강이나라, 이름도 비슷하네.”
잠깐 돌아다니면서 조사를 한 것만으로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강이나는 현재 열여덟 살의 모델이며, 완벽한 미모와 몸매로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근래 들어 해외 진출 이야기도 솔솔 흘러나오고 있는 중이라고 하는데, 당분간 국내 활동에 치중하겠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세레나와 카이나의 흔적을 발견한 준성은 마음이 거세게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당장 찾아가고 싶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몸 상태로 그녀들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좀 더 회복을 한 뒤, 당당하게 나타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무엇보다 눈에 밟힌 것은 몸이 불편한 와중에도 나물이나 야채를 팔러 다니는 옥순 할머니의 존재였다.
“복잡하군.”
표정을 일그러뜨린 준성의 발걸음이 집으로 향했다.
아침 일찍 야채를 팔러 나간 옥순 할머니는 저녁 무렵이면 돌아온다. 손에 들고 있는 통을 보면 야채를 거의 팔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픈 허리를 툭툭 두드리며 집으로 들어온 옥순 할머니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뭐야?”
“나물을 캐왔어요. 산에 가니 양이 제법 많더군요.”
“그래? 힘들 텐데.”
“괜찮아요. 체력 회복을 하면서 남는 시간에 나물을 캔 거니까요.”
“그, 그래. 무리하지 말고.”
“네, 그럼 저녁을 차릴게요.”
태연한 모습에 옥순 할머니는 말을 더듬었고, 준성은 솜씨를 발휘해서 저녁을 차렸다.
머지않아 서울로 떠날 것을 결심한 준성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옥순 할머니에게 도움을 줄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산을 타면서 필요할 법한 것들을 캐오기 시작했다.
양은 많지 않지만 기감이 발달한 준성이다 보니 그가 가지고 오는 것들은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것들이었다.
약초꾼 못지않게 매일 많은 양을 캐오니, 옥순 할머니는 그것을 내다 팔기 시작했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약재다 보니 판매도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다.
우웅! 웅! 웅!
주변의 마나가 통제 아래 빠른 속도로 체내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내부에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하는 마나 양에 준성은 미소를 지었다.
“된다. 되고 있어.”
상황은 순조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1클래스에 다다르기까지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지만 조금씩 양이 늘어나고 있었다.
이 사실이 준성으로 하여금 고무되게 만들었다.
“이 추세면 세 달, 세 달이면 돼.”
1클래스에 오르게 되면 육체도 조금씩 제 상태를 갖추게 될 것이다.
들뜬 마음으로 약초와 나물을 채취하던 준성의 귓가로 날카로운 균열음이 파고들었다.
키이잉!
“이건……!”
몸을 일으키고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표정을 굳힌 준성은 빠른 걸음으로 수련하던 장소로 향했다.
그곳은 전과 다를 바 없이 평범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방금 전까지 존재하던 잔향을 완전히 지워 내지 못했다.
“이건 게이트,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이능의 힘이 작용한 것을 확인한 준성은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그로서도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 조사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조금 있으면 해가 질 것임이 분명했기에 빠르게 산 아래로 내려가 집으로 향했다.
겨울의 낮은 극히 짧기에 준성이 도착할 무렵에는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를 반긴 것은 불 한 점 켜지지 않은 어둠이었다.
“아직도 안 오셨어?”
따르릉! 따르릉!
의아한 표정을 지은 준성은 전화벨이 울리는 것을 듣고 달려갔다.
“여보세요? 예, 예. 맞습니다. 네? 할머니가요?”
전화 내용을 전해 들은 준성의 두 눈이 거세게 떨렸다.
거세게 흔들리던 그의 눈은 빠른 속도로 제자리를 찾아갔다.
“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탁.
전화기를 내려놓은 준성은 이를 지그시 깨물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