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141)
3권
제21장 비틀림
엘리엔에게 전이받은 마나는 빠른 속도로 준성의 신체에 적응해 나갔다.
이 과정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어서 며칠 동안 학교를 쉬며 마나 운용에 힘을 써야만 했다.
그리고 찾아온 첫 주말에 엘리엔과 약속을 위해 움직였다.
“준비됐습니까?”
“됐다.”
짤막한 대답과 함께 엘리엔이 모습을 드러냈다.
“와…….”
데이트 복장을 갖춘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에 준성은 감탄을 감추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이전 세계에서 미모 하나만으로 왕국 일대를 혼란 지역으로 만든 자태였다.
아름다움은 물론이고, 사람의 마음을 거세게 뒤흔들어 놓는 매혹적인 자태는 준성의 마음까지 흔들어 놓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간단한 검은색 원피스였지만 몸매의 굴곡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모습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어, 어울리나?”
준성의 시선을 느낀 엘리엔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엘프의 복장은 대부분 전신을 감싸는 형태의 옷이어서 상대적으로 노출도가 낮았다. 몸매의 굴곡이 드러나는 것은 부끄럽지 않았지만, 이렇게 다리가 훤히 노출된 것은 굉장히 부끄러웠다.
“네, 무척이요.”
“어때요, 엘리엔 님 아름답죠?”
“응, 이나가 꾸민 거야?”
“제 의사가 어떻든 현재 종사하는 쪽이 연예계니까요.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 패션 쪽은 훤하게 꿰고 있답니다?”
의기양양한 이나의 모습에 준성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당장 연예인을 그만두겠다고 말을 해도 이면에는 자부심 비슷한 것이 서려 있음이 느껴졌다.
“이나도 연예인을 그만두지 않고 계속해 보는 건 어때?”
“계속요?”
“이대로 그만두면 팬들이 아쉬워할 것 같아.”
“상관없어요. 애초에 연예인을 한 것도 팬을 원해서가 아니라 준과 함께하고 싶어서였는데요.”
단호한 모습에 준성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여지는 남아 있는 것 같아 한마디 덧붙였다.
“말 그대로 이나의 선택이니까.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말해.”
“네.”
이나와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오늘의 주인공은 평소 볼 수 없었던 수줍음으로 무장한 엘리엔이었다.
그녀에게 시선을 옮긴 준성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그럼 가실까요?”
“음…….”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잡고 따르는 엘리엔이었다.
준성과 엘리엔의 데이트는 일반적인 연인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아직 현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고 하나 시골에 머물면서 세상의 문명을 익힌 엘리엔은 현대 생활에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준성이 살던 곳이 어떠한지 둘러보고 싶은 마음에 데이트를 제안했을 뿐.
이 점에 착안한 준성은 가장 먼저 동네 주변을 안내하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사람이 많은 곳을 구경시켜 준 뒤, 저녁을 먹기로 하였다.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향이 좋기로 유명한 커피 전문점이었다.
“이건 무척 좋군. 근데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그래도 저건 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엘리엔이 먹고 있는 것은 에스프레소였다.
개인적인 취향이라면 상관이 없지만 현재 마시고 있는 횟수는 무려 다섯 번.
그것도 맛있다면서 연신 감탄을 금치 않고 있었다.
엘프의 미각 구조를 인간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그것보다 더 따끔거리는 것은 카운터에서 자꾸 이쪽을 바라보는 가게 주인의 시선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에스프레소를 다섯 잔이나 마치 시원한 물처럼 단숨에 들이켜고 있으니 말이다.
“에휴.”
“이상한 게 있으면 말해라.”
“아닙니다. 근데 정말 에스프레소가 맛있습니까?”
“농축액을 아주 잘 우려냈군. 깊고 그윽한 맛이 일품이어서 굉장히 좋아. 이 좋은 걸 마셔보지 않을 건가?”
“저는 이게 더 좋아서요.”
“시럽 가득인 것을.”
준성의 손에 들린 딸기 스무디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는 엘리엔이었다. 건강을 위해서라도 녹차나 그런 걸 마시게 하고 싶었지만 그에게 과도하게 간섭하는 것은 아무래도 꺼려졌다.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죠. 엘리엔 님도 맛 들면 참을 수 없을 겁니다?”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군.”
“그게 차이니까요. 서로가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엘리엔 님의 추구하는 방향이 더 옳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요.”
“리엔.”
“예?”
“아직까지 엘리엔 님이라고 부르는 건 나와 거리를 두겠다는 것 같아서 마음에 안 드는군. 아직도 나를 받아들일 결심이 서지 않았나?”
그녀의 두 눈은 진지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입으로는 연신 에스프레소를 홀짝이는 모습에 준성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풉! 그건 아닙니다.”
“그럼 왜 웃는 거지?”
“귀여워서요.”
“…….”
“그럼 앞으로 리엔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차츰 말을 놓으면서 편하게 지내도록 하고요. 괜찮겠지요?”
“그 정도라면.”
수긍할 만한 제안이기에 엘리엔의 표정이 펴졌다. 드러내지 않았지만 세희와 이나에게 편하게 말을 하면서 알콩달콩한 분위기를 자아낼 때면 늘 부러움을 느끼고는 하였다.
“자, 그럼 일어나시죠.”
“왜? 나는 한 잔 더 마시려고…….”
그새 에스프레소를 다 마시고 한 잔 더 추가하려는 엘리엔을 보며 준성의 표정이 급변했다.
“잠깐!”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엘리엔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데이트를 할 것이 많습니다. 설마 이 자리에서 에스프레소만 마시다가 갈 생각은 아니죠?”
“그럴 리가.”
“그럼 가죠.”
미소 지은 준성이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엘리엔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이 세상에는 테이크아웃이라는 획기적인 것이 있더군. 잠시만 기다려라, 더블 에스프레소를 테이크아웃 해서 나갈 테니.”
“…….”
두 발 두 손 다 든 준성이었다.
커피 전문점을 나선 둘은 거리를 거닐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사람이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모습은 엘리엔에게 있어 흥미로 다가왔고, 지켜보는 재미도 있었다.
“저는 리엔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뭘 말하는 거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거든요. 이 세상이 리엔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걸.”
“세상의 모든 환경이 내게 맞춰질 수 없는 법이지. 이 세계로 넘어오면서 그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다.”
“그래서 감사하다는 말입니다. 다른 이라면 그마저도 각오하기 쉽지 않았을 테니까요.”
준성은 엘리엔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따뜻한 그의 눈길은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왠지 모를 쑥스러움이 피어나고 있었다. 어색하게 미소를 지은 그녀가 붉게 달아오르는 볼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군.”
“하하!”
검을 휘두를 때는 감정 한 점 느껴지지 않는 철혈의 여인이지만 이럴 때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는 귀여운 매력을 발산했다.
점심을 먹기 위해 향한 곳은 쌈밥집이었다. 곳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야채들을 보며 엘리엔의 눈은 어느 때보다 반짝이고 있었다.
“어떠세요?”
“밥을 야채들로 싸 먹을 수 있다니, 획기적이군.”
“리엔은 고기를 안 좋아하니까요. 이곳에 오려고 여기저기 많이 찾아봤습니다.”
“아아.”
입에 가득 쌈밥을 넣은 채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은 살인적인 귀여움 그 자체였다.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모습에 에메랄드처럼 투명하고 아름다운 빛을 뿌리는 머리칼, 동양과 서양의 아름다움이 절묘하게 매치된 미모는 경국지색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아까 전부터 수군거리는 소리와 함께 엘리엔에게 집중된 시선은 도통 진정될 줄 몰랐다.
채소가 마음에 들 만큼 싱싱하지는 않았지만 풀 냄새가 가득한 식사는 오랜만에 그녀로 하여금 과식을 하게 만들었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우고 나니, 엘리엔의 입가에 만족의 미소가 서렸다.
“이런 곳이 있을 줄 몰랐군.”
“요즘은 웰빙이니 뭐니 하면서 건강에 신경을 쓰니까요.”
“웰빙이라, 평소에는 챙기지 않다가 유행이 되는 건가.”
“아무래도 세상의 트렌드라는 것이 존재하니까요. 이 세상은 저쪽보다 훨씬 흐름이 빠르고, 즉흥적이며, 복잡해요. 리엔이 이해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해요.”
“그럴 테지. 그런데 이건 뭐지?”
“아, 그건…….”
어른스럽지만 세상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이것저것 묻는 그녀의 모습은 굉장히 귀여웠다.
‘무례한 생각인가?’
엘리엔이 알았다면 토라진 표정을 지었을 거라 생각하며 준성은 쿡쿡 웃었다.
식사를 마친 둘은 거리를 걸으며 소화를 시킨 뒤, 길거리 공연을 구경하기도 하고, 밴드 연주를 듣기도 하면서 데이트를 즐겼다.
사람이 북적거리는 거리는 불편했지만 처음 보는 세상 구경은 엘리엔의 입가에 미소를 짓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러던 중 사달이 발생했다. 걸음을 옮기던 엘리엔이 돌연 표정을 굳히며 날카로운 기세를 발산한 것이다.
“저건 뭐지?”
“예?”
“저, 저거 말이다.”
“아, 저건…….”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엘리엔이 가리킨 것을 설명한다.
그들이 걷고 있는 거리에서는 프리 허그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프리 허그라는 거예요.”
“프리 허그?”
“예, 일종의 행사 같은 건데, 불특정 다수의 사람에게 포옹을 해주는 행동이에요.”
“불특정 다수라니, 불결하기 짝이 없군.”
이맛살을 찌푸린 그녀는 프리 허그가 이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안아주는 여자나, 안기는 남자나 모두 미소를 짓고 있어서 그녀의 머릿속으로 전혀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녀가 살아온 세월이나, 종족의 특성을 보면 그러한 생각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그곳과 판이하게 달랐다.
“딱히 그렇지도 않아요.”
“그럼?”
“리엔에게는 불결하게 보일 수 있지만 프리 허그의 취지는 굉장히 좋아요. 일종의 캠페인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대신 정신적으로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아요. 이러한 정신적인 상처를 치유하고 보다 안정된 가정과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하는 거예요. 취지 자체는 굉장히 좋죠.”
“…….”
불퉁한 표정을 지었지만 엘리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한 문화는 틀린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를 뿐이다. 자신은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살아왔고, 이곳은 좀 더 개방적일 뿐이니.
“리엔도 한번 해보실래요?”
“내가?”
“저도 해보고 싶어서요.”
“음.”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준성의 부탁인 만큼 단호하게 뿌리치기 어려웠다.
“첫 걸음이에요, 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한.”
“알았다.”
고개를 끄덕인 엘리엔이 프리 허그 현장으로 향했다. 웅성거리던 사람들 무리가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엘리엔이 움직일 길이 만들어졌다.
프리 허그를 하던 사람조차 멍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프리 허그를 하려고 하는데.”
“네? 아, 네!”
얼떨떨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포옹을 한다.
짧은 순간이지만 이 세상을 향한 적응의 첫발을 내딛은 그녀의 행동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프리 허그를 마치고 돌아오니 준성이 미소를 지으며 반겨주었다.
“수고하셨어요.”
“너는?”
“전 할 생각 없는데요.”
“에?”
황당한 표정.
준성이 웃음을 지었다.
“했다가 어떻게 감당하라고요.”
하나도 아니고 세 명 모두 개성이 통통 튀는 여인이다.
그녀들에게 트집 잡힐 행동을 할 생각이 없는 준성이었다.
“…….”
한 방 먹은 엘리엔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 ☆
데이트가 끝날 무렵에는 시간이 밤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즐거우셨나요?”
“이곳의 연인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군.”
“하하! 오늘 데이트한 게 이 세계의 일반적인 데이트입니다.”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데이트를 한다, 굉장히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다행이네요.”
흡족한 엘리엔의 표정을 보면서 준성의 표정도 한결 가벼워졌다.
그녀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은 사랑이라기보다 미안함에 가까웠다.
자신을 찾고자 정든 터전을 버리고 차원의 벽마저 넘었다.
이 세상은 그녀를 위한 곳이 아님에도 기꺼이 모든 것을 감수하겠다는 태도는 준성으로 하여금 책임감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녀를 누군가에게 내어주겠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름답고 헌신적이며, 용기 있는 여인을 다른 남자에게 내어줄 얼간이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엘리엔은 이제 자신의 여자였다.
내심 결의를 다지고 있던 그는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가 어느 순간 눈을 꼭 감고 있는 걸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하시는 겁니까?”
“연인이면 이럴 때는 보통 키스를 하지 않나?”
“예? 하, 하하! 누구에게 들은 겁니까?”
“세희가 그러던데.”
“…….”
쓸데없는 지식을 주입한 세희의 행태에 준성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로맨스 소설을 탐독하는 그녀의 마수는 어느새 엘리엔을 지배하고 있었다.
‘머리야.’
요즘에는 금단의 영역인 BL까지 손을 뻗고 있다는 걸 들었다.
‘주의를 줘야 하나?’
그러기에는 이 세계에서 새로운 재미를 찾은 세희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골치가 아파 미간을 찌푸리던 그의 감각으로 강렬한 파장이 파고들었다.
키이잉!
“이건?”
“공간의 비틀림이다.”
표정을 굳힌 엘리엔이 대답했다. 지금 일어나는 현상은 이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준성은 일찍이 이런 현상을 본 적이 있다.
바로 경주에서.
“가보죠.”
“그러지.”
둘의 몸이 빠른 속도로 공간의 비틀림이 일어나는 곳으로 향했다.
공간의 비틀림이 일어나는 곳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외진 공원이었다.
그곳에 두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준성과 엘리엔이었다.
“차원의 문? 이것이 왜 일어나는 거지?”
“저는 이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럼 왜?”
“저도 정확한 원인은 모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공간의 비틀림이 일어났으며, 이 너머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준성과 엘리엔이 좌표를 읽어보려고 했지만 마치 안개처럼 흐릿하게 흐려져 있었다.
그 말은 이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뜻.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빠른 속도로 차원의 문이 어떤 이유로 열린 것인지 파악하는 것이었다. 두 눈으로 차원의 문을 읽어 들이던 준성과 엘리엔의 귓가로 익숙한 울음소리가 스며들었다.
취익! 취익!
“이건……?”
“물러나라.”
엘리엔이 팔을 잡아끌면서 인비저빌리티를 시전했다. 즉시 두 사람의 몸은 허공으로 흔적도 없이 녹아들었다. 잠시 후, 차원의 문 너머로 초록색 피부를 지닌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취이익!
그것은 오크였다.
저쪽 세상이 아닌 현실에 나타난 오크! 그 크기는 기존의 세계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했다. 약 삼 미터에 달하는 키와 덩치는 기존의 오크보다 두 배 이상 크다고 봐도 무방했다.
놀라움은 계속 이어졌다.
무기를 든 오크가 포효를 터뜨릴 무렵,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남자 세 명과 여자 두 명은 기이한 슈트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자연스러운 몸놀림으로 오크 앞에 포진하여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사냥과도 같았다.
진영을 갖춘 그들은 저마다 마법을 발현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일반적인 형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상대하는 오크도 비슷했다. 오우거를 연상케 하는 질긴 가죽을 지니고 있었으며, 인간들을 상대하는 몸놀림은 기존의 것과 판이하게 달랐다.
하지만 몬스터를 상대하는 그들의 방식은 능숙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크의 가죽을 베어 상처를 집중적으로 헤집어서 쓰러뜨리는 데 성공했다.
파스스.
오크의 시체는 마치 연기처럼 흩어지며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거무튀튀한 돌덩이 하나가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챙겨서 자리를 벗어났다. 차원의 문은 언제 열렸냐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공원은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엘리엔은 인비저빌리티를 해제했다. 둘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 세상에도 몬스터가 있었나?”
“아뇨, 없었습니다.”
준성이 잔뜩 경직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몬스터가 등장했다는 사실은 그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개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말이로군.”
“예, 세희도 차원의 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가서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몰랐다.
공간의 비틀림과 몬스터의 등장은 준성에게 큰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
집으로 향하는 둘 사이에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데이트를 끝낸 둘이 집으로 돌아왔지만 세희와 이나는 잔뜩 굳어 있는 표정을 보고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묻지 못했다.
간단하게 씻고 거실로 부르니 세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있었다면 있었지.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할 말이 있었어.”
“할 말이요?”
“차원의 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있어?”
준성의 물음에 잠시 멈칫한 세희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내 고개를 천천히 저어 보였다.
“저도 잘 몰라요. 한 번 발생해서 그 장소로 갔던 것밖에. 당시에 그 낌새를 눈치채고 온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어느 기관 소속인 것 같다는 것밖에 알지 못해요.”
“차원의 문이 심각한 거예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나의 물음에 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살고 있을 때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차원의 문은 물론이고 공간의 비틀림도 일어난 적이 없었어. 오늘 리엔과 함께할 때도 그걸 모르고 있다가 발견하게 되었어. 거기에서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차원의 문에서 오크가 모습을 드러냈어.”
그 말과 함께 엘리엔과 함께 목격했던 것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차원의 문이 등장하고, 그 너머로 등장한 오크와 이능을 지닌 사람들까지. 준성의 이야기는 하나의 거대한 충격이었다.
“오크라니…….”
“몬스터가 왜…….”
“지금 중점을 둬야 하는 것은 차원의 문이 어디로 향하는지야. 내가 보기에는 등장한 오크는 보통이 아니었어. 우리의 상식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수준이었으니까. 그건 마치…….”
“마치?”
말끝을 흐리는 준성을 보며 그녀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말을 듣고 경악했다.
“마나를 다루는 것 같았어.”
“말도 안 돼!”
“단지 정황을 보고 판단하는 것뿐이니까. 하지만 그 부분도 염두에 둬야 할 것 같아. 그것뿐만 아니라 이능을 지닌 사람들도 있어. 그들의 존재는 추후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몰라.”
마법에 가까운 이능을 지닌 집단이라면 커다란 기득권을 쥐고 있을 것이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칫 충돌을 야기할 수도 있다.
현재 준성이 우려하는 것이 바로 그들과의 충돌이었다.
아무런 준비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권력을 쥔 그들과 충돌을 한다면?
그 후의 일은 생각하지 않아도 뻔했다.
“그럼 어떻게 하시려고요?”
“우선 조용히 힘을 길러야겠어. 가급적 힘을 드러내면 안 될 것 같고.”
“조용히 있는 게 관건이네요.”
차원의 문이 열리고, 마법을 시전하다 보면 어느 순간 꼬투리가 잡힐지 모른다. 현재 자신들은 저들에 대한 정보가 전무한 상태였으니까. 전혀 모르는 형태로 어떻게 꼬리가 잡힐지 예측하기 힘들었다.
“그러니 이나도 조용히 지내고.”
“나한테만 그래.”
입술을 내밀면서 불만을 토로하는 그녀를 향해 준성이 웃어 보였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니까. 그렇지?”
“우우,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잖아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면서 타이르니, 이나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럼 어느 정도를 생각하고 계세요?”
“적어도 삼 년. 길게는 십 년까지 보고 있어. 하지만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마나 농도가 희박하고 다시 처음부터 마법 실력을 쌓아나가야 하지만 준성은 자신 있었다. 육체를 재구성하면서 모든 것을 잃었지만 10클래스의 의지와 깨달음은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감 넘치는 그의 태도에 세희가 미소를 지으며 찬성했다.
“저는 좋아요, 조용히 힘을 기르면서 준성과 함께 학창 생활을 즐기면 되니까요. 그 기간이면 우리도 짐이 되지 않을 거예요.”
“저도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자신만 옹졸한 여자처럼 보일까 싶어 이나는 손을 번쩍 들면서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준성이 낮게 웃으면서 엘리엔을 바라보았다.
“리엔은 어때요?”
“나쁘지 않군. 하지만 지나치게 소극적인 것은 좋지 않다. 나는 실력이 온전하니 조금씩 정보를 수집해 나가지.”
“그것도 좋네요.”
그랜드 마스터이자 대마법사인 엘리엔의 힘이라면 정보 수집에 큰 보탬이 되리라.
대략적인 가닥을 잡은 준성은 마음이 놓인 듯 몸에 힘을 풀었다.
“앗!”
돌연 소리를 높이는 이나의 모습에 다른 이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그런데 준이 언제부터 엘리엔 님을 리엔이라고 불렀어요?”
“…….”
짧은 침묵.
그 계기가 되었던 순간을 떠올린 준성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고, 엘리엔 또한 살짝 얼굴을 붉혔다.
의심을 사기 딱 좋은 모습이었다.
세희의 표정도 서서히 굳었다.
“저도 궁금한데요.”
“리엔을 받아들이기로 하면서 좀 더 호칭을 편하게 하기로 했어.”
“연인끼리 편하게 지낸다는데 무슨 문제라도 되는 건가?”
한마디 거든 엘리엔이 준성 옆으로 다가가 팔짱을 꼈다. 그와 동시에 이나의 눈에 불똥이 튀고, 세희는 몸을 움찔 떨었다.
“이, 이익! 이러기예요?”
분통을 터뜨리는 이나를 보며 엘리엔은 준성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플라토닉 러브도 좋지만 에로스도 나쁘지 않겠지. 물론 나는 영원히 이어지는 걸 원하지만.”
“뭐, 뭐라고요?”
경악하는 이나.
하지만 지금의 엘리엔은 더 이상 벙어리, 냉가슴만 앓던 엘프가 아니었다.
“인간은 시간이 흐를수록 늙어가지만 엘프는 다르지. 열심히 분발하도록.”
엘리엔의 선전 포고.
인간과 엘프의 차이점, 그리고 정곡을 찌르는 말은 두 여인을 공황 상태로 몰아넣었다.
“후후, 후후후!”
세희는 음산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고.
“두고 봐요! 후회할 테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이나는 악당의 대사를 내뱉으며 방으로 달려갔다.
“이것 참.”
졸지에 후끈 달아오른 분위기 속에서 준성은 어색하게 볼을 긁적여야만 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