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142)
제22장 순탄치 않은 학교생활
준성의 학교생활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순탄치 못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이나의 존재 때문이다.
“오늘은 뭐하실 거예요?”
생글거리며 미소 짓는 모습은 아름다웠지만 준성으로서는 여간 골치가 아픈 것이 아니었다.
첫날 그녀의 대대적인 선언으로 인해 ‘이나의 남친’이라는 타이틀이 붙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일거수일투족 감시받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후우! 이나야.”
“네, 준!”
“주변에 과시하듯 너무 달라붙지 말아줬으면 해.”
팔짱을 뺀 이나의 눈에 물기가 아른거린다. 큰 충격을 받은 듯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던 그녀가 촉촉이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싫어진 거예요?”
“싫어지긴.”
준성의 입가에 걸리는 쓴웃음.
그런 것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확인하듯이 물어온다.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 알고 있음에도.
그녀만 이러는 것인지 아니면 여자라는 생물 자체가 사랑한다는 표현을 수시로 원하는 건지 가끔 헷갈릴 때가 있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란 걸 이나도 잘 알 거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과시하듯 스킨십을 하는 게 아니라 좀 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줬으면 해.”
“저는 준하고 부부잖아요. 다른 사람의 시선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아요.”
“물론 이해해. 하지만 지금 인기 절정 연예인이잖아. 그로 인해 내가 곤란해지면 기분이 좋겠어?”
“안 좋죠.”
“그래서 부탁하는 거야. 곧 있으면 계약이 끝나고 우리의 삶으로 돌아올 수 있을 테니 그때까지만 부탁해, 알았지?”
“칫!”
토라진 듯 입술을 삐죽이지만 준성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힘이 없는 모습을 보며 부드러운 어조로 그녀를 다독였다.
“표현하지 않아도 사랑하는 걸 알잖아. 내 마음 알지? 이나를 사랑하는 거. 설마 날 의심하는 건 아니지?”
“물론 아니에요!”
환한 표정을 지은 그녀가 준성을 껴안으려고 했지만 먼저 선수를 친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세희였다.
“저도 그렇죠?”
“으응, 뭐 그렇지.”
“언니! 뭐하는 거예요!”
“무슨 일이라도?”
“이익! 학교에서 누구 마음대로 포옹하래요.”
방금 전까지 팔짱을 끼고 안기려던 이나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생각이 저 밑에 깔려 있었다.
“이나도 했잖아. 그럼 내가 못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정말 이 언니가!”
왈왈! 갸르릉!
마치 강아지와 고양이처럼 두 여인의 대립은 첨예하게 이루어졌다. 그 광경을 반 학우들은 물론이고, 이나를 보기 위해 몰려온 학생들도 흥미진진하게 관람했다.
새 학기에 준성이 등장함으로써 반 안에서의 로맨스는 그야말로 막장 구도가 되었다.
이나는 준성과 사귀고 있다.
그리고 세희와 준성은 사촌이다.
준성은 두 여인과 모두 친한 사이고, 이나와 세희도 사촌이다.
그럼 이나와 준성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그림은 은근한 막장 구도를 만들어내기에 충분했다. 졸지에 중간에 낀 준성이 대체 어떻게 두 여인의 마음을 홀렸는지 알 수 없는 인간이 된 것은 덤이었다.
띵동.
“그만, 자리에 앉아라!”
종소리가 울리면서 민주희 선생님이 안으로 들어서자, 그제야 학생들이 분분이 흩어지면서 제자리로 돌아갔다. 준성을 포옹하고 있던 손을 푼 세희는 이나를 향해 승자의 미소를 지어 보이고 돌아갔다.
“으으, 분해! 세희 언니도 그렇고, 엘리엔 님도 그렇고!”
한 남자를 두고 만만치 않은 두 여자와 경쟁해야 하는 이나는 오늘도 분을 참지 못하고 길길이 날뛰었다.
“거기, 강이나, 애정 싸움은 좀 그만하지?”
“후! 네.”
이 광경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닌 민주희 선생님은 신속하게 이나를 진압함으로써 조용한 분위기로 만들었다.
“그리고 김준성.”
“예, 선생님.”
“양손에 꽃을 쥐었으면 다른 소리가 나오지 않게 잘 관리하도록 해. 설마 노처녀 선생님 약 올리려고 학교에 다니는 건 아니겠지?”
“하하! 죄송합니다. 선생님의 아름다움을 남자들이 가만히 두다니, 주변 남자들의 눈이 없는지 한번 살펴봐야 할 것 같네요.”
입 발린 그의 말에 민주희는 물론이고, 주변 학생들도 경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선생님에게까지 저런 말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그런 소리는 네 여자 친구에게나 하고. 그럼 조회를 시작하겠다.”
고등학교 2학년의 교실은 1학년 때와 확연하게 달랐다.
1학년에게 아직 중학생 티를 벗지 못하고 곳곳에 들뜬 기색이 남아 있다면 2학년은 본격적으로 대학 입학을 위해 준비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세희는 물론이고, 이나 또한 전교에서 손에 꼽히는 높은 성적을 자랑했다. 준성은 전생에는 좋은 성적을 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딱히 성적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다만 마법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수학과 물리 과목에 관심이 많았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종례를 한 뒤 준성은 세희, 이나와 함께 교실을 나섰다.
대부분의 학우들은 야간 자율 학습을 하지만 그들은 처음부터 예외였다.
아침에는 치열하게 대립했지만 돌아갈 때는 풀어져서 친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성이 한마디 했다.
“학교에 좀 오래 있으려고 하는데 여러모로 사정이 여의치 않네.”
“갑자기 학교는 왜요?”
“학교 뒤쪽에 야산이 있는 거 알지?”
“네, 알죠.”
“그곳에 마나가 풍족한 것 같아. 본격적인 수련을 위해서는 학교에서 마나 집적진을 그려야 하는데 몰래 잠입하면 여러 가지가 걸리잖아.”
최근 준성의 고민은 바로 본래 무위를 되찾는 것이었다.
엘리엔의 희생으로 몸을 회복했지만 10클래스의 위용을 되찾기에는 이 세상의 마나가 희박했다.
“동아리 같은 걸 만드는 건 어때요?”
“동아리?”
“네, 동아리요. 등산부나 그런 걸 만들어서 야산을 합법적으로 올라갈 수 있다면 수련을 해도 아무런 제지가 없지 않을까요?”
“음, 동아리라.”
세희의 제안은 뜻밖이지만 그럴듯했다. 동아리를 만들어서 야산에 갈 수 있는 권한을 얻으면 그다음에는 야산에서 지지고 볶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동아리를 만들기 쉽나?”
“쉽지 않겠죠. 하지만 상관없잖아요, 여기 이나가 있는데.”
“전 왜요?”
이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세희가 미소를 지었다.
“학교의 이름을 드높인 이나가 신청을 하면 학교에서도 선뜻 거절하기 어려울 거예요. 어때요?”
“확실히…….”
“흐응! 괜찮은 제안이긴 하지만 공짜로는 힘들 것 같은데.”
고양이 눈으로 바뀌어 은근한 눈으로 준성을 바라보니, 그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수련을 위한 건데 어려워?”
“아, 아니요! 그럴 리가요. 내일 당장 신청하도록 해요! 제가 힘껏 도울 테니까.”
“그럼 부탁해도 될까? 보답으로 맛있는 거 사줄게.”
“맛있는 거요? 히히! 좋은 게 생각났어요. 제가 말하면 주세요, 알았죠?”
“뭔데?”
“그건 비밀이에요!”
어디 만화에 나올 법한 포즈를 취한 이나가 신이 나서 집을 향해 뛰어갔다.
집으로 돌아온 준성은 엘리엔과 마법의 체계에 대해 토론을 나누었다. 몸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온 준성은 이곳과 저번 세계의 차이점을 파악해 뒀다.
“마법의 운용?”
“예, 리엔도 이곳에 와서 마나를 시전할 때 달라진 걸 느꼈죠?”
“좀 더 힘이 들었지.”
“그 부분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해 뒀습니다. 이 세계는 마나가 희박하다 보니 대기의 마나를 활용하는 기존의 마법은 아무래도 위력을 발휘하기 힘든 구조입니다.”
“마법 캐스팅이 생각보다 오래 걸리니.”
“예, 정신적인 피로도 빨리 찾아오고 마나 소모도 심하죠. 아마 그 부분 때문에 이 세계는 마법이 발전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마나 양이 적어서 마법을 캐스팅하는 데 더 많은 심력을 소모했다. 비효율적인 체계는 지구가 마법을 발전시키는 데 방해를 했을 것임이 분명했다.
“대신 정신적인 부분이 발전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소득이 없는 건 아니지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아무래도 마법을 개량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개량?”
놀란 엘리엔의 표정에 준성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존의 마법은 정신력 소모가 너무 큽니다. 저는 괜찮지만 세희의 경우에는 자칫 마법의 시전이 정신력 고갈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익숙하지 않기에 그 피해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이미 10클래스의 경지에 올라 반신의 경지에 도달한 준성은 상관이 없지만 앞으로 마법을 수련하고 보다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개량이 필수였다.
“그래서 리엔에게 부탁하는 것이고요.”
“왜 나지?”
“마나 흐름에 가장 민감한 게 리엔이니까요. 마나가 흐르는 걸 느끼고 마나의 배열을 확인하고 수정해 줄 수 있는 것은 리엔밖에 없어요.”
“…….”
진지한 그의 말에 마치 사랑 고백을 받은 것처럼 얼굴을 붉히는 엘리엔이었다.
“무슨 잘못이라도?”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어쨌든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마법을 익히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리엔의 도움이 꼭 필요해요.”
빤히 바라보는 그의 눈길에 엘리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힘을 보태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다만…….”
“예?”
“마법을 개량하고 시전하기에는 이곳이 적합하지 않은 것 같은데, 안 그런가?”
“예에, 뭐 그렇죠.”
“그럼 밖으로 나가서 마법을 개량해야겠군.”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엘리엔의 입꼬리가 보일 듯 말 듯 말려 올라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이나가 밖으로 뛰쳐나왔다.
“지금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예요!”
“준성의 부탁을 들어주고 있을 뿐이다만?”
“그걸 말이라고!”
“이나야, 마법을 개량하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야. 특별히 잘못된 부분이 없으면 리엔을 방해하지 말아줬으면 해.”
“주, 준! 이건 모두 엘리엔 님의…….”
단둘이 있기 위한 계략이라고 외치려 했지만 진지한 준성의 눈빛에 양어깨를 축 늘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부탁할게.”
“알았어요.”
패장처럼 터벅터벅 방으로 향한 이나는 조용히 서 있는 세희를 보며 분통을 터뜨렸다.
“언니는 분하지도 않아요? 이러다가 엘리엔 님이 준을 독점하게 된다고요!”
“지금은 나설 때가 아니야. 좀 더 확실하게 준비해야 돼.”
“준비요? 무슨 준비?”
“내게 수가 있어, 오히려 엘리엔 님이 우리에게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비장의 수단이.”
그러면서 이나에게 다가간 세희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듣던 이나의 얼굴에 환희가 번지기 시작했다.
“정말 기발한 방법이에요!”
“이 역할은 이나 네가 중요해. 잘해줄 수 있지?”
“물론이에요!”
“힘내자.”
“네, 언니! 역시 언니밖에 없어.”
두 주먹을 불끈 쥔 이나를 보며 세희의 두 눈이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 ☆ ☆
T기획사의 기획 실장, 경철은 간절함을 담아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나이 많은 남자의 간절한 표정을 보면 무언가 반응이 있어야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정말 계약을 갱신할 생각이 없으신 겁니까?”
“네.”
“으음.”
단호한 이나의 대답에 경철은 신음을 흘렸다. 그녀가 이대로 연예인을 그만둔다는 사실이 안타까워서였고, 자신이 본 어떤 여자 연예인보다 찬란하게 빛날 그녀가 세상 속으로 간다는 사실이 현실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3월 31일을 끝으로 이나와 T기획사의 계약은 만료가 된다. 이후에 발생하는 광고 스케줄은 T기획사가 관리하기로 결정을 했고, 나머지 정산금은 분기별로 차례차례 정산해 주기로 했다.
차근차근 이별의 수순을 밟고 있지만 경철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누구보다 확고한 인기를 얻을 그녀가 이대로 그만두고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이만한 끼를 지닌 여자가 이러한 결정을 한다는 게 이해할 수 없었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법이에요. 저는 연예인에 적성이 맞지 않았을 뿐이에요. 실장님이 잘못한 건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건 다행이지만…….”
“제가 연예인으로 실장님을 뵙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알겠습니다, 다만 우리 기획사의 문은 언제든지 열려 있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네, 물론이에요. 그럼 나머지 처리를 부탁드릴게요.”
생긋 미소를 지은 이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인 뒤 방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경철의 얼굴은 잔뜩 먹구름이 껴 있었다.
“아무런 말도 먹혀들지 않으니 별수가 없군.”
소속사에 확실히 말을 전한 이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무실을 나서다가 멈칫했다. 그의 시선 끝에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정진우가 걸어오고 있었다.
“아!”
“오랜만입니다, 이나 양.”
“……네.”
엘리엔에게 부탁하여 그의 성적 취향을 바꿔 버린 이나는 진우를 대하는 것이 껄끄러웠다.
“결국 재계약은 안 하신 겁니까?”
“제가 원하는 길이 아니었으니까요.”
“정말 아쉬운 일입니다. 이나 양과 함께한다면 세계를 노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면서 강렬한 열망이 담긴 눈으로 이나를 바라보았다. 그 속에 담긴 감정의 조각은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었지만 좋게 끝내고자 했다.
“전 만인의 사랑을 받는 연예인보다 한 남자의 여자이고 싶을 뿐이에요.”
“아쉽지만 이나 양의 결정을 존중합니다.”
“그럼 전 이만.”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만날 일이 있을까요? 각자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걸 끝으로 이나는 진우를 지나쳐서 걸음을 옮겼다. 뒤통수로 따갑게 쏘아지는 시선을 느끼며 그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자신에게 음심을 품고 최음제를 사용한 그를 향해 지독한 마법을 걸어놓았다. 그것은 엘리엔에 준하거나 더 높은 경지의 마법사가 움직였다는 것이 된다.
현재 이곳에서 엘리엔보다 뛰어난 마법사는 준성밖에 없다.
그마저도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어서 큰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마법이 풀리다니…….”
커다란 충격이 그녀를 휘감고 있었다.
민주희 선생님은 난데없는 세희의 면담 요청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와 마주앉았다.
“갑자기 동아리라니?”
“이나가 이번 달을 끝으로 계약 만료가 되는 건 아시죠?”
“알고 있는데.”
이나의 계약 만료는 학교 내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그래서 학생들 사이에서 이나를 하루 종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팽배했다.
“아시겠지만 이나의 성적이 좋은 편이잖아요. 계약이 끝나면 학업에 매진하고 싶은 생각을 하고 있고요.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선생님의 생각은 어떠세요?”
“네 말이 대체적으로 맞는 것 같지만 그게 동아리랑 무슨 상관이야?”
“선생님께서 고문 선생님이 되어주시면 동아리를 설립해서 학교 내에서 스터디를 하고, 봉사 활동을 겸하고 싶어요. 원래는 저나 이나가 개인적으로 했지만 이번에는 좀 더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어서요.”
“흐음, 스터디라. 학교 내에서는 동아리 스터디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걸 알지?”
스터디를 토대로 동아리를 허가 낼 거라면 야간 자율 학습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지침이 확고했다.
“그래서 봉사 활동을 넣었죠.”
“나 참, 처음부터 생각하고?”
“네, 선생님이 힘을 써주시면 가능할 것 같은데…….”
“좋아, 나도 이나 같은 유명인이 야간 자율 학습에 참여해서 소란이 벌어지는 건 원하지 않으니까. 아마 교장 선생님에게 건의하면 통과될 거야.”
“그럼 부탁드릴게요.”
고개를 숙이는 세희를 바라보던 민주희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를 나선 이나는 학교로 향하여 남은 수업을 듣고 준성, 세희와 함께 하교를 했다.
동아리에 대한 언급을 한 세희는 며칠의 시간이 걸릴 거라고 했다.
“계약이 끝나면 뭐하려고?”
“저도 본격적으로 수련에 임하려고 해요.”
“그럼 동아리 설립이 필수적이겠군.”
“네! 마나가 풍족한 곳에서 수련을 해야 체내에 많이 쌓일 테니까요.”
“하긴, 생각해 보면 가장 시급한 건 이나겠어.”
“뭐, 전 괜찮아요. 지금 수준이면 웬만한 것들은 다 감당할 수 있으니까.”
그러면서 팔을 드는 이나를 보며 준성은 피식 웃음을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나는 예전부터 씩씩했으니까.”
“활기찬 모습하면 저죠!”
“그렇지.”
이나와 대화를 주고받던 준성은 세희가 소외되는 느낌을 받고는 화제를 옮겼다.
“동아리 설립 취지는 좋은데 너무 솔직하게 털어놓은 게 악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이상한가요?”
“이나의 공부를 위해 동아리를 설립하겠다고 하면 너무 특권을 바라는 것처럼 보이잖아. 그러니 다른 걸 내세우면 좋을 텐데.”
“다른 생각이 있나요?”
“세희가 찻집을 운영했으니까 그걸 내세워 보는 건 어떨까?”
“차요?”
그 말이 나올 줄 몰랐던 세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찻집 운영 당시 많은 사람들의 호평을 받았다.
“전통차 연구부 이런 테마로.”
“전통차 연구부라, 좋은 것 같아요.”
필이 꽂힌 이나는 손뼉을 치면서 맞장구를 쳤다. 그의 말을 들은 세희도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것 같아요.”
“그럼 내일 선생님을 찾아가서 차를 드리면서 말씀드려 봐. 너무 특권을 바라면 자칫 다른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으니까.”
“그럴게요.”
“그럼 그 건은 세희한테 맡겨볼까.”
“맡겨주세요.”
가슴을 쭉 펴는 세희를 보며 불퉁한 표정을 지은 이나가 잽싸게 양손을 뻗었다. 그리고 대놓고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어디서 유혹이에요!”
“……이나야, 이거 성희롱이거든?”
“흥이다!”
도끼눈을 뜨는 세희를 보며 찔끔한 이나는 슬금슬금 걸음을 옮기더니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하하! 용서해 줘. 이나의 질투가 심해서 그러니까.”
“아팠다고요.”
“그, 그래?”
“낫게 호 해줄래요?”
준성을 바라보는 세희의 눈이 기이한 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순간 위기감을 느낀 준성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뒷걸음을 쳤다.
“나, 나도 급한 일이 생겨서 이만.”
“칫!”
기회를 놓친 세희는 인상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집에 도착한 셋은 본격적인 저녁 준비에 들어갔다.
오늘 당번은 세희와 이나였다. 방금 전 저지른 만행에 대해 철저한 응징을 당하는 이나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지만 한 귀로 흘려내며 준성은 세희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책상에 앉아서 열심히 독서를 하고 있는 엘리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단순히 독서하는 모습이라면 상관없겠지만 그녀가 읽고 있는 것은 막장 관계를 녹여낸 로맨스 소설이었다. 줄거리만 읽고 식겁했던 준성은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런 거 읽으면 안 된다니까요.”
“이 세계의 연애 방식을 알기 위해서는 최고의 방법이라던데?”
“이 세계에 그런 관계는 없어요.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요?”
“세희가.”
“으음.”
엘프에게 말도 안 되는 연애 방식을 버젓이 전파하는 세희의 행태에 준성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다소 외골수적인 엘리엔이 저 소설의 방식을 받아들이게 되면 어떤 참사가 일어날지 감히 상상하기 힘들었다. 한숨을 푹 내쉰 그는 책을 빼앗으며 말했다.
“전 이런 거 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괜히 다른 영향을 끼칠 수 있을 테니까.”
“원한다면 그렇게 하지.”
“동아리 이야기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요. 허가가 떨어지면 리엔도 그곳에 와서 같이 수련을 하도록 해요.”
“언제쯤이지?”
자연의 마나가 풍부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엘리엔의 두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에 준성은 기분 좋게 웃었다.
“일주일 정도 걸릴 것 같아요.”
“기대되는군.”
“그러니 그때까지 여러 가지를 준비할 생각이에요.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시고요.”
“알았다.”
“준! 요리 좀 도와주세요!”
“그럼 전 부엌에 가볼게요.”
부엌에서 이나의 외침이 준성에게 들려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준성이 요리를 돕고자 부엌으로 향했다. 방문이 닫히자, 홀로 남은 엘리엔의 시선이 조금 전 덮어놓은 책으로 향했다. 그리고 슬금슬금 손을 뻗어 다시 책을 챙겨 펼쳐 들었다.
“현실적이지는 않지만 아주 재미있어.”
지금 이 순간에도 순진한 엘프의 마음이 막장 로맨스로 차근차근 물들어가고 있었다.
오전에 이나를 만났던 진우는 자신의 감정이 본래대로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여태까지 느꼈던 어떠한 것보다 큰 기쁨을 선사했다.
남자와 신체 접촉을 하는 순간 느꼈던 설렘. 그것은 진우에게 깊은 절망감을 선사했다. 분명 여자를 좋아하는 자신에게 있어 남자에게 사랑을 느낀다는 것은 재앙 그 자체였다.
이나는 여전히 아름답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여인이었다. 그녀를 오늘부로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쉬움을 크게 만들었지만 기회를 만들고자 하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그보다 더 시급한 것은 오늘 겪은 일을 할아버지에게 보고하는 것이다.
“……해서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흐음.”
“잘못된 점이라도?”
“없다. 네 취향이 원래대로 돌아왔으니 기쁜 일이라고 할 수 있겠군.”
“예, 감사합니다.”
할아버지가 어떤 조화를 부려 자신을 원래대로 돌려놓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정상적으로 돌아온 것 하나만으로 그에게 있어 큰 기쁨이었다.
“그런데 아무런 느낌도 받지 않았나?”
“예?”
“오늘 하루 동안 강렬한 떨림이나 고통을 느꼈냐고 묻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물음에 진우는 의아함을 느꼈지만 곰곰이 생각을 되짚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마법사는 아니었던가.”
“마법사라니 무슨…….”
진우의 되물음에 할아버지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어둠 속에서 드러난 하얀 미소는 섬뜩함을 느끼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제 너도 알아야 할 때가 되었군. 세상은 네가 본 것과 다르게 철저하게 비틀려 있다는 것을.”
이어 천천히 흘러나오는 비화.
그것은 진우에게 있어 커다란 충격 그 자체였다.
그와 동시에 그의 두 눈은 차갑게 가라앉고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