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146)
제26장 게이트(Gate)
졸지에 팔자에도 없는 공부를 한 뒤 학교를 나서는 그들에게선 어떠한 이상한 점도 발견되지 않았다.
학교를 나서면서 분식점에서 떡볶이와 튀김을 사먹고, 돌아가는 내내 학교 공부나 시험에 관한 이야기만 하는 등, 평범함 일색 그 자체였다.
그러한 연기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고, 문이 닫힐 무렵 준성이 입을 열었다.
“말해도 괜찮아.”
“후우! 갑자기 이게 뭔지…….”
갑작스러운 상황에 이나는 숨을 몰아쉬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굳은 표정을 풀지 않은 준성은 조금 전 상황을 하나하나 되짚어보았다.
“내가 보기에는 저번에 샀던 오르골 문제인 게 맞는 것 같아.”
“그럼 이곳의 능력자가 우리를 감시했다는 이야기네요.”
“그렇게 되겠지. 오르골을 연구하려고 할 때 추적 마법 같은 것이 발동하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눈치를 챈 걸까요?”
“아직은 아니야, 내 모습은 이곳의 고등학생과 다를 바가 없으니 크게 의심할 점이 없겠지. 하지만 오르골을 연구하려고 한 행동과 좌표를 흐려서 공간 왜곡을 한 건 의아하게 여길 거야.”
누가 봐도 준성은 저들의 관점에서 능력을 사용하는 자가 아니었다. 말로 설명이 되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며 의아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용의자가 그밖에 없는 시점에서 조심할 이유는 분명히 존재했다.
“그럼…….”
“당분간 의심을 하고 지켜보겠지. 귀찮겠지만 행동에 신경을 써줘.”
“알겠어요.”
진지한 사안이기에 이나도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듣고 있던 세희는 의문점을 제기했다.
“왜 집은 감시를 하지 않는 걸까요?”
“무언가 제약이 있을 확률이 높아. 내가 느끼기로는 소리를 왜곡해서 흡수하는 형태였어. 이곳 아파트는 보안이 좋으니 그것을 뚫기 힘들 수도 있겠지.”
“그럼 안전한 공간은 집밖에 없다는 뜻이네요.”
“그렇게 되나? 조심해야겠지. 리엔은 밖에 나간 건가? 안 그래도 제일 걱정되는데…….”
“그랜드 마스터에 대마법사잖아요. 좀 더 그분을 믿어도 된다고 생각해요.”
“내가 그렇게 못 믿는 모습을 보였나? 리엔에게 미안한걸.”
멋쩍게 미소를 지었지만 사고를 저지를 확률이 가장 높은 것이 그녀였다. 준성의 염려는 당연했다.
모처럼 긴장한 까닭에 준성은 집에서 편히 쉬며 앞으로의 일을 정리해 나갔다.
저들이 지닌 힘의 근원을 파악하려고 한 것은 확실히 섣부른 행동이었다. 그 대가를 치른다고 하니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밤이 늦을 무렵, 밖에 나가 있던 엘리엔이 돌아왔다. 청소를 하고 있던 이나가 가장 먼저 그녀를 맞이했다.
“아! 오셨어요?”
“감시의 눈길이 느껴지던데, 아는 게 있나?”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준이 엘리엔 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어요.”
“준성이?”
“오르골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리엔.”
“……오르골.”
그날의 일을 떠올린 그녀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르골의 존재는 그녀 또한 일말의 실책이 있었다. 조금 더 조심하자던 준성의 제안을 무시하고 행동으로 옮긴 것이 그녀이니 말이다.
“능력을 사용한 자의 위치를 파악하려고 했지만 어렵더군.”
“기존의 힘과 궤를 달리해서 그렇습니다. 억지로 파악하려고 하면 역으로 정체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겠지.”
“우선은 조심하자는 것이 방침입니다. 특별한 점을 보이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시선이 거둬질 테니. 그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상대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으니 당연한 조치라고 생각된다.”
“그럼 최예성의 뒤를 쫓는 것도 잠정 중단을 해야겠군요.”
반 친구인 최예성의 뒤를 쫓음으로써 능력자의 본부를 찾아내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요 며칠 동안 특별한 기미가 보이지 않기에 수확은 없었다.
“안 그래도 그걸 전하려고 했다. 능력자들이 모이는 지부를 알아낸 것 같다.”
“예?”
예상 밖의 소식에 준성은 물론, 다른 여인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최예성이라는 인간은 특이하더군. 힘을 지니고 있음에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모습이 어리석게 느껴졌으니. 며칠 동안 뒤를 쫓았지만 이동 경로에도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오늘, 이동하는 길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
오늘이라면 옥상에서 최예성이 불량 학생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고 있던 모습을 볼 때였다. 그는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도는 것을 느꼈는지 평소와 다른 움직임을 보인 듯했다.
“지부가 정확하게 어떤 구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최예성을 맞이하기 위해 두 명의 능력자가 밖으로 나왔다가 안으로 들어갔다는 점이다.”
“그렇군요.”
“위치는 이곳에서 멀지 않더군.”
엘리엔이 말한 지부의 위치는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준성 등이 살고 있는 곳에서 걸어서 십 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던 것이다.
“……황당하네요, 이렇게 가까울 줄은 몰랐는데.”
“저들도 상당히 만전을 기하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의지력을 발휘하기에 어렴풋이 느꼈을 뿐, 실제로 전체적인 기세는 평범했으니까. 오르골의 경우도 있어서 더 추적을 하지 않고 위치를 파악한 것으로 만족했다.”
“잘하셨어요, 현재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우리입니다. 굳이 무리를 해서 저들에게 정체를 노출하는 우를 범할 이유는 없습니다.”
정체를 의심받고 있는 단계였지만 확신과 의심의 차이는 명백했다. 준성은 조금 더 조심하여 용의 선상에 벗어날 수 있다면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 그리고 리엔.”
“왜 그러지?”
“한 가지 조사할 게 있는데, 만약 차원의 문이 열리면 저랑 같이 가도록 하지요.”
“차원의 문을?”
“예, 한 가지 조사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아직 확신 단계는 아니지만 우리의 수련에 좀 더 탄력이 붙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알겠다, 협력하지.”
“준! 나도 도울 수 있어요.”
듣고 있던 이나가 나섰지만 준성인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나는 당분간 세희와 함께 찻집을 차리는 데 집중해 줘. 사장을 맡을 사람은 물색해 봤어?”
“기준에 맞는 사람이 없어서 아직이에요. 대부분 검은 속내를 가지고 있어서요.”
팬들에게 이야기한 것처럼 이나는 찻집을 차리기 위해 준비 과정에 있었다. 학교를 다니는 만큼 대신 관리해 줄 사람을 구하는 중이었는데, 아직 어린 이나의 돈을 노리고 접근하는 사람이 전부였다.
“입맛에 맞는 사람을 구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 당분간 고생해 줘.”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칫! 그렇게 말하면 제가 뭐가 돼요.”
졸지에 준성을 질투하는 여자가 된 이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불만을 드러냈다.
“하하! 괜찮아, 이나가 그렇게 옹졸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이곳에 오면서 활발하고 질투심이 많아진 이나를 보며 준성의 입가에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살펴보니 어떤가?”
“이상한 점은 없습니다.”
“호오, 오르골을 분해해 놓고 이상한 점이 없다고?”
진퉁 골동품점의 주인, 최성규는 눈을 빛내며 박근태를 바라보았다.
“예, 학교부터 감시를 해봤지만 여타 다른 학생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좀 더 자유롭게 공부를 하는 것 정도? 능력자의 힘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힘을 감출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제 눈을 피할 정도면 제 수준을 훌쩍 넘었다는 건데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럴 테지, 나이의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테니.”
최성규는 턱을 매만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의미심장한 그의 말에 박근태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다른 걸 알고 계십니까?”
“아니, 이상한 점은 없지만 감각은 이상하다고 말을 하고 있으니. 그럼 그 외국인 아가씨는 어떤가?”
“마찬가지입니다.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이전 기록이 불분명한 게 수상하지만 특별할 것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의심할 이유는 없겠군.”
최성규는 확실하게 선을 그으며 말했지만 박근태의 생각은 달랐다.
“예, 하지만 제 능력을 벗어나는 사건이었으니 좀 더 지켜볼 생각입니다.”
“이런 경우는 생각해 보지 않았나? 오르골을 샀다가 외부 세력에게 빼앗긴 경우는.”
“빼앗긴다라? 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럴 경우는 적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좀 더 지켜볼 생각입니다.”
처음과 다를 바 없는 태도에 최성규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고지식하긴, 내 말은 소 잡는 칼로 닭을 잡을 필요가 없다는 뜻일세.”
“예?”
“들어와라.”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소년은 박근태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아아, 오랜만이구나, 예성아. 그동안 많이 컸구나.”
“…….”
“요 녀석이 능력 각성을 앞두고 이런 모습을 보이더군. 무례하지만 이해하게.”
“괴짜들도 많은 곳이니 이상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성이는 갑자기 왜?”
능력자라고 해도 최예성은 아직 한 사람 몫을 하기에 터무니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근태로서는 그의 등장이 의아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최성규가 혀를 찼다.
“쯧! 그야 자네를 돕기 위함 아닌가? 예성이는 자네가 의심하고 있는 아이들과 같은 학교일 뿐만 아니라 같은 학년 같은 반이더군.”
“그렇습니까?”
“이번 사안은 가볍지 않네. 외부 세력의 개입이 드러날 수 있으니 사안이 가볍지 않지. 나는 그 학생들의 조사를 예성이에게 맡기고 자네가 외부 세력의 존재를 조사했으면 하네.”
조력을 주겠다는 그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근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신 확실하게 조사해 주셔야 합니다.”
“그러지.”
“잘 부탁한다, 예성아.”
“예, 아저씨. 제가 감시해야 할 학생이 누구입니까?”
“바로 김준성이라는 학생이다.”
“김준성? 김준성…….”
예상치 못한 이름을 듣게 된 최예성이 멈칫했다.
“알고 있나?”
“예, 알고 있습니다. 같은 반 친구가 맞습니다. 김준성…….”
자신에게 다가와서 의아함을 드러냈던 친구. 인기 절정의 연예인 강이나의 남자 친구로 알려지고, 반에서 딱히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지만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그가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히는 박근태의 눈에 들 줄이야. 의아함과 함께 왠지 모를 상대적 박탈감이 가슴속을 지배해 나갔다.
“철저하게 감시하도록 하겠습니다.”
“믿도록 하지.”
결연한 그의 모습에 박근태도 믿고 일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 ☆ ☆
중간고사를 앞에 둠에 따라 준성 등은 최대한 조심하면서 공부를 시작했다. 감시의 눈길은 집요하게 이어지고 있었고, 상대의 능력을 파악하지 못한 시점에서 최대한 조용히 지금의 상황을 넘기자는 것이 준성의 생각이었다.
시험을 앞에 둠에 따라 갖가지 수행 평가가 뒤따랐다.
각 과목의 수행 평가와 과제는 물론, 예체능 과목에서는 실기 시험이 그 뒤를 따랐다.
어제는 미술 작품을 완성하여 제출했고, 오늘은 체육 시험이 있는 날이다.
종목은 백 미터 달리기.
“그럼 시험을 시작하겠다.”
“너무 어려워요, 선생님!”
“내가 알 바 아니다.”
1학년 때부터 수능 준비니 하면서 공부에 시달렸던 학생들은 혹독한 기준에 몸부림치면서 체육 선생님을 원망했다.
저질 체력인 그들로서는 도저히 만점 기준을 채울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여자부터 시작된 달리기는 그야말로 거북이 경주 그 자체였다. 공부에 찌든 그녀들은 뛰는 것인지 걷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느렸고, 시험이 이어질 때마다 체육 선생님의 얼굴은 구겨지고 있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준성은 세희와 나란히 서서 몸을 풀고 있는 이나에게 향했다.
“이나야.”
“네!”
“적당히 뛰어.”
“왜요? 시험이니까 최선을 다해야죠!”
전생에 검사 아니랄까 봐 승부욕이 넘쳐 나는 그녀였다. 두 눈에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것을 보면서 자칫 잘못하면 큰 사달이 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일을 벌이면 안 되는데.’
연예계를 떠났다고 해도 여전히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준성은 이나가 괜한 승부욕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당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지만 그것이 쉽지 않을 듯했다.
“너무 눈에 띌 수도 있으니까. 세희는 내 말 알지?”
“물론이죠, 걱정하지 마세요. 전 언제나 차분하잖아요.”
“그럼 믿을게.”
손을 흔들면서 자리를 벗어나는 준성이었다. 좀 더 시간을 들여 이나를 설득하고 싶었지만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이 장난이 아니었다.
준성이 자리를 벗어나기 무섭게 이나의 매서운 눈길이 세희에게 향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천연덕스럽기 그지없었다.
“언니! 차분하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글쎄, 무슨 말일까나?”
“……익!
태연한 그녀의 태도에 이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하는 행동이 분통이 터졌지만 내색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저는 질 생각 없어요. 최선을 다해요!”
“그게 준성이 원하는 게 아닐 텐데.”
“칫! 그래도 질 수는 없어요.”
최선과 적당히의 경계선에서 갈등하는 사이, 어느덧 그녀의 순서는 다가왔고, 반 학우와 나란히 서서 뛸 준비를 시작했다.
“준비…….”
반장의 말을 들으며 전신의 근육이 긴장하기 시작했고, 빵!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무섭게 이나의 신형이 눈부신 속도로 쇄도했다.
와아아!
반 학우들은 번개처럼 달려 나가는 이나를 보며 감탄을 터뜨렸다. 그녀의 속도는 그야말로 총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빨랐다.
“강이나 뭐야? 육상 선수였어?”
“저거 웬만한 남자 선수보다 더 빠른데?”
“말도 안 돼! 대체 못 하는 게 뭐야?”
반 학우들은 이나의 눈부신 속도를 두고 토론을 시작했고, 그것을 지켜보는 준성의 표정은 처참하게 구겨졌다.
“아이고 두야.”
그래도 이나는 양심이 있었다.
준성의 적당히란 말을 듣고 나서 정말 최선을 다해서 뛰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 달리고 있는 그녀의 속도는 순수한 육체에 기반한 속도였다. 물론, 그랜드 마스터의 상태 그대로 재구성된 육체는 일반인과 비교도 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한 호흡으로 단숨에 친구를 따돌리고 독주하던 이나는 적당히 하라던 준성의 말을 떠올리고는 힐끗 뒤를 바라보았다. 옆에서 뛰던 친구는 저 멀리서 뛰어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 열심히 했나?’
순간 자신이 승부욕에 앞뒤를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음을 자각한 이나는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을 느꼈다. 여기에서 말도 안 되는 기록으로 만점을 받아버리면 능력자들의 의심이 다시 집중될 여지가 존재했다.
하지만 결승점은 이미 코앞에 있었다. 눈에 들어온 체육 선생님의 얼굴에는 경악 그 자체였다. 그것을 본 이나는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아!’
결승점 바로 앞에 돌이 하나 있는 것을 본 이나는 눈을 빛냈다.
그리고 서서히 속도를 줄이더니, 돌에 걸리는 척 넘어졌다.
“아악!”
결승점을 앞에 두고 넘어지는 모습은 마치 만화에서 나올 법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 이어지고 말았다.
넘어진 이나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고, 절뚝거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이미 결승점은 바로 앞이기에 세 걸음을 걷고 난 뒤 통과할 수 있었다.
스톱워치를 찍은 체육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인 뒤 선언했다.
“강이나 만점!”
“…….”
하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나는 자신이 펼친 연기였지만 그야말로 극에 다다랐다고 스스로 자화자찬했다.
결승점을 앞에 두고 넘어진 가련한 여인! 그리고 불굴의 의지로 고통을 견뎌내며 마침내 골인을 하는 것은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언제 넘어졌냐는 듯, 희희낙락한 얼굴로 준성에게 다가간 이나가 자랑하기 바빴다.
“준! 나 어땠어요?”
“이나야…….”
“네, 준!”
자신을 바라보는 준성의 눈빛이 강렬하다는 것을 느끼고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연기는 절대 하지 마.”
“네? 왜요?”
의아한 표정을 짓는 모습에 준성은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설마 방금 전 발연기를 자기 스스로 눈치채지 못했단 말인가?
그것은 지나가던 개도 속지 않을 처참한 단계의 연기였다. 이나가 어떻게 모델 활동을 하면서 능숙하게 연기를 펼친 것인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저 무난하게 넘어간 지금 상황에 대해 칭찬을 할 뿐.
“아무것도 아니야, 잘했어.”
“뭔데요, 알려주세요.”
“잘했다니깐.”
“그쵸? 제가 좀 한다니까요.”
희희낙락하며 콧대를 하늘 높이 세우는 이나를 보며 준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후우!’
앓느니 죽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
강이나의 달리기는 끝이 났지만 체육 선생님, 김상덕은 한동안 침묵했다.
방금 전 운동장을 질주하던 그녀의 모습은 한 마리의 야생마 같았다.
생동감이 넘치는 에너지부터 시작하여, 어떠한 주변 여건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눈빛, 그러면서 주변의 모든 것을 살피던 통찰력은 김상덕으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대단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이나의 소문은 이미 학교에 파다했다. 소프트볼에서 장외 홈런을 때린 것도 유명했고, 발야구를 하면 운동장의 크기가 그녀의 킥력을 커버하지 못한다는 말도 나왔다.
그야말로 운동의 천재!
그런 말을 들었지만 과장된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수업 시간에서 그리 성실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오늘 백 미터 달리기에서 보여준 모습은 전해지는 소문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알게 해주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막판에 씨도 먹히지 않을 발연기를 선보이며 넘어졌지만, 그녀가 보인 질주는 김상덕의 뇌리 깊숙한 곳에 박혀 들었다.
13.03.
이나의 백 미터 달리기 기록이었다.
중간에 넘어지고, 괴이한 절뚝거림으로 시간을 한참이나 날려 먹었지만 이 정도 숫자가 나왔다.
기록 자체만 봐도 웬만한 남학생보다 더 빠른 속도였다. 발연기 구간을 빼면 기록은 더 단축된다.
“달리기 선수로 대성할 수 있겠군.”
최고의 모델에서 최고의 육상 선수가 된다.
김상덕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체육 시험이 모두 끝나고, 세 사람은 동아리실로 향했다.
오늘은 뒷산에서 수련하는 날이지만 감시의 눈길이 있는 만큼 동아리실에서 공부하기로 합의를 본 상황이었다. 그때까지 이나는 자신이 보여준 발연기에 대해 전혀 자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세희 언니?”
“정말 모르는 거야?”
“그렇다니까요.”
“후! 그럼 됐어, 말해봤자 뭐하겠니.”
“이익! 준! 뭔데 언니가 이러는 거예요?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나의 잘못은 없었다. 적어도 준성과 세희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보여준 발연기는 그 정도가 심했다.
“이나가 잘못한 건 아니야. 단지 이나를 대할 때 조금 신중을 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지.”
“그러니까 그게 대체 뭐냐고요!”
“그건 스스로 알아야 할 부분이야.”
“쳇! 됐어요, 이 나쁜 사람들 같으니라고.”
끝까지 알려줄 기세가 아닌 듯하자 팩 토라진 이나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남자라면 가슴이 거세게 두근거릴 장면이었지만 준성은 그저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나저나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지.”
준성이 입을 열자 두 여인이 그의 말에 시선을 집중하고 귀를 기울였다.
“그냥 시험공부만 하는 건 그리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그러니 시험 성적을 내고 이긴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건 어때?”
“소원 들어주기요?”
냉큼 끼어든 이나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시험 성적이라면 이미 전교권에서 놀고 있는 만큼 자신에게 승산이 있다고 여겼다.
“그래, 소원. 그냥 하면 재미가 없으니 소소한 소원 들어주기라도 하면 재미있지 않을까 싶어서.”
“저는 좋아요! 세희 언니는요?”
“나도 재미있겠는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반응이 예상외로 호평을 얻자, 준성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그럼 하도록 하자. 너무 거창한 거 말고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들어주는 걸로.”
“좋아요! 난 아예 이 자리에서 말할게요. 내 소원은 세희 언니와 엘리엔 님이 보는 앞에서 십 분 동안 준이 내게 적극적으로 키스해 주기!”
“…….”
준성과 세희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반면 이나는 자신이 한 제안이 마음에 드는지 히죽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나야, 아무래도 그건 좀…….”
“왜요! 소원이라면서요! 그 정도도 못 들어주는 거예요?”
“좀 부담스러운데?”
결국 준성이 내놓은 것은 무리성을 드는 것이다. 세희와 엘리엔이 보는 앞에서 십 분 동안 키스를 하라는 것은 마음에 굉장한 부담이 되었다.
무엇보다 그녀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그럴 자신이 없었다.
“그래요? 어쩔 수 없죠.”
의외로 순순히 포기하는 이나의 태도에 준성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그러면서도 두 눈에는 의아함이 감돌고 있었다.
평소 그녀의 성격이라면 이렇게 순순히 물러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진 그녀의 말은 준성의 얼을 빼놓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럼 내가 준에게 할게요. 내게 모든 걸 맡기니 부담되지 않겠죠? 안심해요, 잡아먹지는 않을 테니까.”
더 이상 협상은 용납하지 않는 강경한 그녀의 눈길에 준성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시험공부에 재미를 두려고 괜한 제안을 했다는 생각과 함께.
“그래…….”
“두고 봐! 여태까지 해보지 못한 여러 가지(?)를 다 할 거니까.”
“…….”
굳은 각오를 다지는 그녀를 보며 준성은 침묵했다.
최선을 다해 시험을 보아야 할 이유가 생겨나는 순간이었다.
☆ ☆ ☆
서로 전쟁을 방불케 할 것 같았던 시험은 그리 치열하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준성은 물론, 세희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나날을 보냈다. 가장 불타오르는 것은 이나였다.
‘흥! 마법사라서 여유가 넘친다 이거지?’
그 모습이 이나의 눈에 고깝게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준성과 세희는 다름 아닌 마법사! 천재적인 두뇌로 마법을 펼치는 그들에게 있어 고등학교 시험 문제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닐 터였다.
하지만 이나는 달랐다. 그녀는 검사였고,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가 오른다고 하여 머리가 특별하게 좋아지는 것이 아니다. 원활한 마나 활동으로 기억력이 좋아질 뿐, 나머지는 타고난 그대로다.
그렇기에 내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다. 이나는 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열심히 시험공부를 하면서 하루를 보냈고, 자연히 준성의 하루는 편안해졌다.
그렇게 평온한 하루하루가 흘러 마침내 시험 당일이 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준성은 곤혹스러운 상황을 맞이해야만 했다. 평소라면 아침 일찍 일어나 명상에 잠겨 있을 엘리엔이 다짜고짜 방으로 찾아와 교복 입는 것을 돕겠다고 한 것이다. 와이셔츠와 교복 바지를 입은 그에게 넥타이를 들고 다가갔다.
“준성.”
“예, 리엔.”
“시험 잘 보고. 내기를 했다고 들었는데, 이나가 이기면 십 분 동안 키스를 하겠다고 하더군.”
“아!”
아차 한 준성은 엘리엔을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 입장에서는 아무런 언질이 없었던 것이 섭섭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표정이 없는 그녀의 표정을 보면 특별히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꼭 이기도록.”
“알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넥타이는 왜……?”
준성이 하는 교복 넥타이는 일반 넥타이와 달리 매우 간단한 구조로 되어 있어서 목에 걸고 조이기만 하면 된다. 그걸 굳이 엘리엔이 해주겠다고 나선 지금 상황이 의아하게 여겨지는 것은 당연했다.
“한 번 해보고 싶었다. 드라마에서 보니 부인이 남편에게 해주더군.”
그놈의 드라마. 이 세계에 백지 상태에 가깝던 엘리엔은 세희의 영향을 받아 아침 드라마의 애청자가 되어 있었다.
어색한 표정을 짓는 준성의 위에 손을 포갰다. 그녀의 손에서 볼록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내용물을 확인하니 사탕 비슷한 것이었다.
엘리엔이 말했다.
“시험 잘 보고, 여기 엿 먹도록.”
“……하하!”
어색한 웃음을 짓는 준성이었다.
시험 첫날 과목은 수학과 경제였다. 그리 어렵지 않은 과목이기에 수월하게 푼 뒤, 채점을 마쳤다. 일찌감치 돌아갈 준비를 마친 뒤 싱글벙글 웃고 있는 세희를 보며 짝꿍인 고미현이 입을 열었다.
“시험 잘 봤어?”
“괜찮은 것 같아, 미현이 너는?”
세희의 짝꿍인 고미현은 자그마한 키에 귀여운 외모를 지닌 학생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중학생이라 착각할 만큼 앙증맞은 매력이 있었다.
“쉽지 않네. 1학년 때보다 훨씬 어려운 것 같아.”
“확실히 어려워진 것 같긴 해. 쉽지는 않지.”
“난 세희 네가 부러워, 어떤 상황이 닥쳐도 수월하게 넘기고.”
“그것도 나름 쉽지 않은 일인걸.”
“그렇지?”
쓴웃음을 지은 고미현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우물쭈물했다. 세희는 의아함을 느꼈지만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결심을 굳힌 듯, 주먹을 움켜쥔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세희, 너 이나랑 얼마나 친해?”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세희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대답했다.
“친자매 그 이상?”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왔고, 동병상련의 사정이 있었기에 서로에게 누구보다 친밀감을 느꼈다. 지금은 티격태격하지만 모든 것은 전적인 신뢰가 밑바탕에 깔려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이나와 자신은 한 남자를 부군으로 맞이했다. 친자매 그 이상, 영혼의 동반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구나. 그럼……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하기 힘든 말이어서일까.
고미현의 입이 몇 번 달싹였지만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뭔가 말하기 힘든 사정임을 느낀 세희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말하기 어렵다면 조금 고민을 하도록 해. 무리할 필요는 없으니.”
“응, 미안.”
그 사과를 끝으로 고미현은 더 말을 하지 않았다.
학교가 일찍 끝나자 준성 일행은 뒷산으로 향했다. 이나는 양손을 위로 쭉 뻗으면서 미소 지었다.
“후우! 시험 보는 날은 일찍 끝나서 좋은 것 같아요.”
“나도 그랬었지, 나쁘지 않아.”
“시험은 잘 봤고요?”
“난 괜찮아, 이나는 어때?”
“목표가 있는 여자가 무섭다는 것만 알아주세요. 이번 시험은 준성의 뜻대로 순순히 흘러가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 기대되는걸.”
세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던전으로 향했다. 무사히 안으로 들어선 뒤, 세희가 걱정이 담긴 시선으로 준성을 바라보았다.
“괜찮은 건가요?”
“괜찮아, 이상하게 오늘은 감시의 눈길이 느껴지지 않더라고. 아마 포기했든지 쉬든지 둘 중 하나인 것 같아.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런데 왜 이곳으로 온 거예요?”
감시의 눈길이 사라졌어도 집으로 가는 것이 옳지 않은가. 의아한 이나의 음성에 준성은 태연히 말했다.
“음! 난 수련을 하고 싶어서.”
“수련이요? 내일도 시험인데?”
고등학교 시험은 약 일주일간 이어진다. 오늘 시작이니 앞으로 볼 날은 한참 남아 있었다.
“이상하게 예전부터 시험 당일에 다른 짓을 잘하게 되더라고.”
“준성도요? 저도 그런데.”
“그래서 오늘은 그동안 하지 못한 수련이나 하려고. 이나는 돌아가서 공부를 하고 싶으면 집에 가도 돼.”
“그러렴.”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미운 것처럼 옆에서 준성의 말을 거드는 세희였다.
“흥!”
이나는 가늘어진 눈으로 세희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홱 돌렸다. 순순히 공부하러 집에 가면 단둘이 있게 되는데 그런 상황은 절대 만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며칠 동안 수련을 하지 않아선지 뒷산에 상당량의 마나가 축적되어 있었다. 농밀한 마나의 흐름을 느끼며 세희가 말했다.
“그나저나 찻집이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니요, 오히려 수월해요. 찻집을 차릴 만한 장소도 준비를 했고요. 조만간 공사에 착수할 텐데, 아직 믿을 만한 사람을 찾지 못해서요.”
“믿을 만한 사람을 찾는 건 힘들지. 아이넨스 님이나 루이넨스 님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쿡! 아이넨스 님은 중후한 분위기가 있으니 괜찮지만 루이넨스 님은 다르잖아요.”
아이넨스는 신검가의 가주로, 디멘션 소드를 지닌 그랜드 마스터였다. 신의를 중히 여기고, 사명감을 지닌 그가 찻집 관리자라니,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무엇보다 그의 누나이자, 루이아스의 충실한 수하였던 루이넨스는 서릿발 같은 기세를 발산하는 여인이었다. 그녀가 찻집에서 일을 한다면 아마 얼마 버티지 못하고 망해 버릴 것이리라.
“하긴, 아이넨스 님은 그렇다 쳐도 루이넨스 님은 무리수였군.”
“쿡쿡! 그러네요.”
“금탑을 운영하면서도 믿을 만한 사람은 찾기 쉽지 않았어. 어쩔 수 없지.”
“네, 이곳이나 저곳이나 욕심 많은 사람들밖에 없어서 쉽지 않아요.”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아무 능력이 없을 때는 대충 능력 있는 사람을 쓰면 되겠지만 이쪽에는 엘프의 눈이 존재했다.
사람의 기질을 꿰뚫어 보고 진실을 파악하는 엘리엔의 눈은 어설픈 각오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검은 속내를 숨긴 자들을 제일 증오했다.
일을 지원하는 사람들 중에서 인성이 올바르고, 책임감이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때문에 찻집을 차릴 준비를 마쳤음에도 선뜻 일을 진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아, 내가 보기에는 그대로 진행해도 괜찮을 거야.”
“정말 괜찮을까요?”
“사람 구하는 건 어렵지만 우리에게는 할 일이 없어서 아침 드라마만 보는 엘프가 있잖아?”
학교를 다니지 않는 관계로 잉여 전력으로 전락한 엘리엔을 말함이라.
그랜드 마스터이자 대마법사인 그녀를 잉여 전력으로 전락시킨 준성의 말에 세희와 이나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아침에 일어나 샐러드를 먹으면서 TV를 바라보는 모습은 다이어트를 하는 백조 그 자체였다.
“쿡! 그것도 그러네요.”
“아하하! 그 말이 참 맞는 것 같아요.”
“물론 리엔의 미모면 소동이 벌어질 수 있으니 최대한 자제를 해야겠지만. 어쨌든 그 부분은 그렇게 해결하도록 하자. 사람을 구하는 건 필요한 일이지만 절실한 건 아니니까.”
그렇게 말을 정리한 준성은 수련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시험 기간에 하는 수련은 굉장히 능률이 높았다.
일주일간 이어진 시험이 모두 끝났다. 학생들은 시험 끝에 느껴지는 허망함과 후련함을 느끼면서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학생들은 PC방에 갈 계획을 세웠고, 여학생은 번화가에 나가 노래방에 가거나 쇼핑을 할 생각에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준성도 세희, 이나와 함께 시험 끝을 자축할 생각이었다. 홀가분한 기분으로 가방을 정리하고 있는 그를 향해 뜻밖의 사람이 다가왔다.
“시험 잘 봤냐?”
“뭐, 적당히 봤지.”
다가와 말을 거는 사람은 다름 아닌 최예성이었다. 그가 이렇게 접근할 줄 몰랐던 준성은 태연한 기색으로 말을 받았다.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모습에 최예성은 움찔했지만 이내 안색을 회복하고 말했다.
“전에 해준 말은 고마웠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네가 그 사람들에게 당할 정도는 아니라고 봤을 뿐이다.”
“특별한 건 없었고?”
“있을 리가 있나? 얼핏 봐도 네 몸은 어디에서 운동을 한 것 같아 그렇게 한 건데.”
최예성은 180센티미터가 넘는 키에 제법 탄탄한 몸을 하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쉽게 보지 못할 만큼 단련된 상태였다.
“……그렇군.”
“그래서 할 말은?”
“그냥 고맙다고 말을 전하고 싶었을 뿐이다.”
“내 말이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군. 다음에 제대로 이야기 나눠보자.”
교실 밖에서 애타게 재촉하는 세희와 이나를 본 준성이 그렇게 말하니 최예성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학교를 나선 준성은 세희와 이나를 데리고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그곳은 과거 자신이 수능을 보고 친한 친구인 미지와 함께 먹었던 곳이다.
‘그리고 어처구니없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다른 세계로 넘어갔지.’
새삼 그 추억이 떠오르는 걸 느끼곤 입가에 미소를 짓다가 세희와 이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감시의 눈길이 사라진 이유를 알 것 같아. 아마 그들은 더 이상 의심스러운 정황을 찾지 못하고 최예성에게 임무를 넘긴 것 같아.”
“최예성에게요?”
“특별한 걸 찾을 수 없으니 최예성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겠지. 그러니 접근해 오면 적당히 말을 돌려서 대하도록 해.”
“그럴게요.”
제아무리 최예성이 능력자라고 해도 준성 등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이들이다. 몇 마디 말로 필요한 정보를 얻어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나는 시험 잘 봤어?”
“물론이에요! 각오하셔야 할걸요? 여태까지 본 것 중에서 가장 열심히 했고 가장 잘 봤으니까!”
그 말과 함께 혀를 요염하게 움직이는 이나였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바로 준성의 입술이었다.
“긴장되네.”
“후후! 기대하라고요.”
마법사인 준성을 앞에 두고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동안 해온 노력이 바탕 되어서였다.
이나는 자신의 승리를 장담했다.
‘세희 언니는 공부에 열정적이지 않으니 나 아니면 준이겠지. 내가 이겨도 좋지만 져도 좋아.’
준성이 자신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하면 그것도 나름 좋지 않겠는가.
행복한 상상에 이나는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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