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151)
제31장 고상준의 인생역전
비밀을 약속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정된 범위 안에서였다. 준성과 만난 즉시 움직인 그는 능력자 본부로 향했다.
“오랜만입니다.”
“음, 이렇게 뵐 줄 몰랐습니다. 긴급을 요하는 일이 발생했다고요?”
“예, 본부장님.”
대한민국 능력자 본부를 책임지는 본부장을 보며 박근태는 바짝 긴장했다. 자신이 국내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눈앞의 본부장과 견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한민국 능력자 본부 책임자, 김기정.
국내 현역, 은퇴한 능력자 중에서 세 손가락에 드는 실력자며, 세계적으로도 스무 번째 안에 드는 최강의 능력자 중 한 사람이다.
아직 세상 전면에 드러나지 않은 능력자 협회는 예산과 비밀을 요하는 곳이고, 그곳의 책임을 맡은 자는 실력뿐만 아니라 외교력과 책임감이 겸비되어야 한다.
거칠 것이 없는 그였지만 기정 앞에서만큼은 성질을 죽이는 모습을 보였다.
“저번에 보고 올린 걸 기억하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타국의 능력자가 국내에 침입한 걸로 의심된다고 하셨죠? 듣기로는 잘못된 정보였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결론을 내렸지만 사실이 아닌 걸로 드러났습니다.”
“다른 나라 능력자가 국내에 들어왔다고요?”
기정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가 사라졌다.
타국의 능력자 입국은 철저한 보안 속에서 이루어진다. 자국의 허락도 없이 입국할 경우 외교적인 문제로 번질 수도 있을 만큼 민감한 문제였다.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능력자의 실력과 숫자는 곧 국력의 척도가 되고 있다. 무단으로 타국에 입국할 경우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당할 수 있기에 대부분의 국가는 조심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현실이었다.
“정확히는 다른 나라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능력자 집단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집단인지 개인인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점에 있습니다.”
근태는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기정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갔고, 이야기가 끝날 무렵에는 상념에 빠져들었다.
“그럼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까?”
결정권은 근태에게 넘어왔다. 처음 의구심을 드러낸 것도 그였고, 직접 접촉한 것도 그인 만큼 모든 결정을 그에게 맡겼다.
“저는 일단 지켜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입니까? 그들이 개인이라면 조사 기간을 거친 뒤 회유하면 될 텐데요?”
“저도 그 말씀에 동감합니다. 하지만 조사도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만난 둘은 섣불리 승산을 장담할 수 없는 실력이기 때문입니다.”
“……근태 씨가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고요? 흠! 대단히 신중해야 할 문제로군요.”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모여서 엉켜들다가 풀어지길 반복했다. 박근태는 희귀한 정신계 속성 능력자였고, 실력도 뛰어났다. 그런 그가 장담할 수 없는 두 명이라면 국익에 굉장한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다가 금방 사라졌다.
회유하고 싶지만 모습을 드러낸 그들은 아군보다 적일 가능성이 더 높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들에 대한 전권은 근태 씨에게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본부의 인원을 차출할 수 있도록 조치할 테니 필요하면 얼마든지 데려다 쓰십시오.”
“감사합니다, 본부장님.”
“별말씀을, 대신 회유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주십시오.”
“예.”
기정의 전폭적인 협력 약속을 받은 근태는 한결 마음을 놓은 표정이었다.
☆ ☆ ☆
“운이 좋았네요.”
“그렇군, 운이 따르는군.”
방 안에 있는 준성과 엘리엔은 서로 마주 보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
“혹시나 해서 패밀리어를 붙여봤는데 이렇게 도움이 될 줄 몰랐습니다.”
“저들이 마법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이 드러난 셈이니, 유용한 수를 얻었군.”
“그렇죠.”
준성과 엘리엔이 서로 마주 보며 미소 짓는 이유는 은밀한 노림수가 정확하게 먹혀들어서였다.
근태와 대화를 나누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지며 그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물벼룩을 패밀리어로 붙여놓았다. 워낙 작아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근태 몸에 찰싹 붙어 있어서 능력자 본부의 위치와 본부장의 이름, 앞으로의 정책 등을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태도가 바로 바뀔 수 있는 게 인간이지.”
“그것도 유념해야죠, 최대한 조용히 지내면서 관심이 멀어지길 바라는 수밖에.”
“그게 가능할까?”
“……어렵겠죠?”
인간이 아니지만 오히려 인간에게 당해왔던 엘프이기에 인간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는 엘리엔이었다. 그녀의 반문에 준성이 할 수 있는 것은 멋쩍은 미소를 짓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 가지만큼은 분명하죠. 우리의 의지를 알고 있음에도 다른 수작을 부린다면…….”
“저들에게 악몽을 보여줘야겠지.”
나지막하게 말을 하는 엘리엔의 눈은 날카로운 빛을 뿌리고 있었다.
☆ ☆ ☆
최예성은 갑작스러운 근태의 부름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능력자 중에서 선배 중 선배였기에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인사를 건넸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갑자기 불러서 미안하다.”
“아, 아닙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최예성을 조용히 바라보는 근태였다. 하지만 그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나오지 않자 질문을 던졌다.
“음, 내가 부른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나?”
“예? 죄송합니다.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라…….”
“제가 무슨 잘못을 한 게 있습니까?”
반응을 보니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것이 느껴졌다. 표정을 굳힌 그는 바짝 얼어 있는 최예성을 보며 말했다.
“아직도 모르나 보군. 이리 와라.”
“예.”
영문을 모르는 표정을 지으면서 다가간 최예성은 전신이 뻣뻣하게 굳는 것을 느끼곤 불신이 역력한 눈으로 근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손을 뻗어 머리를 감싸 쥐었다.
“네게 손해가 아니니 안심해도 된다.”
의지력을 일으켜 머릿속을 샅샅이 조사하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의지력이 움직이며 이상한 점을 찾아나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근태의 표정이 굳어갔다.
“이건?”
이상했다. 기이하게 뒤틀려 있는 구조는 감히 자신이 손을 댈 수 있는 범주의 것이 아니다. 의지력으로 머릿속에 꼬여 있는 것을 고치고 싶었지만 어떤 방식으로 꼬여 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섣불리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다.
굳은 표정으로 기운을 거두기 무섭게 최예성이 항의를 해왔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최근 차원의 문이 열리면서 나타난 몬스터가 사라진 일을 알고 있지?”
“예.”
“그 몬스터를 의문의 실력자가 제거했고, 본부에서는 의문의 실력자가 잠입했다고 하네. 본부장은 내게 조사를 부탁했고, 혹시 다른 정신계 능력이 발동됐는지 찾아보는 중이었지.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은 건 사과하지.”
“아닙니다.”
자세한 설명에 이해한 듯했지만 최예성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정신계 능력자가 의지력을 뇌리에 주입한 것은 생명줄을 고스란히 내놓은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만 돌아가도 좋다.”
“알겠습니다.”
간신히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운 그가 고개를 숙인 뒤, 자리를 벗어났다. 홀로 남은 근태는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새로운 형태의 능력, 내가 감히 손댈 수 없는 것이로군.”
최예성의 머릿속에 자리한 묘한 뒤틀림을 발견한 그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 ☆ ☆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사업을 궤도에 올린 진우는 그룹 내에서 인정받게 되었다. 아직 그 성과가 크지 않지만 향후 오랫동안 큰 이익을 낼 수 있는 구조이기에 가족들은 추후 그룹 중추의 역할을 맡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그 사실이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걸린 저주가 확실하게 풀렸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가족 모임에 나간 그는 곧장 그룹 회장이자, 할아버지인 정기정을 찾아갔다.
독대를 요청한 진우가 안으로 들어서자, 기정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요즘 잘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제법이군. 하지만 그 정도로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제가 독대를 청한 건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묻고 싶은 것?”
“예, 혹시 제게 걸린 저주가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대충 알고 있다.”
확답을 주지 않는 태도에 잠시 머뭇거리던 진우는 어렵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그 저주가 확실하게 풀린 것이 맞습니까?”
“그 말을 묻는 의도는?”
“구,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궁금하다라, 확실히 저주의 여파가 남아 있을 수도 있겠지.”
모호한 말을 지은 그가 살짝 미소 짓자 진우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차마 언급하기 힘든 말이기에 꺼내 들지 않았지만 그로서는 굉장히 다급한 사안이었다.
“자세히 좀 말씀해 주십시오.”
“말 그대로다. 저주가 무서운 건 여파가 완전히 가시기 힘들다는 뜻이지. 네게 걸린 저주가 무엇인지 어렴풋 파악하는 정도지만 시간이 길어지면 저주를 해제하더라도 여파가 남을 수밖에 없다. 물론 대부분의 저주는 의지로 이겨낼 수 있으니 여파가 남는 것은 그에 순응하거나 개인적인 성향과 부합한다는 말이 되겠지.”
“예?”
“스스로 취향을 의심해 보면 된다.”
“…….”
‘내가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다른 남자의 손길이 스칠 때마다 느꼈던 짜릿한 감정.
그것이 저주에 의한 것이 아닌 자신의 숨겨진 본능일 수도 있다는 말은 절망 그 자체였다.
언제,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상상만 해도 끔찍한 말에 진우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 ☆ ☆
능력자들과 한 차례 접촉이 있었지만 다른 사건은 벌어지지 않은 채 평온한 나날이 이어졌다.
학교생활은 여느 때처럼 시끌시끌하다가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고 현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엘리엔이 소동을 일으키는 것을 제외하면 만족할 만한 나날이었다.
축제가 끝나고 찻집 오픈 준비를 마쳤을 무렵, 이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준!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준성이었지만 말을 꺼내는 이나의 목소리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왜 미리 말해주지 않은 거예요,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나도 착각했어, 하하! 생활이라는 게 무섭네.”
준성에게는 두 개의 생일이 존재했는데, 하나는 김준성일 때 생일이고 다른 하나는 엘리미스의 생일이다.
지구로 차원 이동을 하면서 김준성의 신분을 회복한 그는 엘리미스와 다른 생일을 사용했는데, 그 점을 놓치고 있다가 준성의 학생증에 적혀 있던 생일을 떠올리고 다그친 것이다.
“딱히 상관하지 않고 있어서 그래.”
“그래도요! 명색이 부인인데 이것도 챙겨주지 못하면 뭐가 돼요. 히잉, 어떡해. 준비하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한데.”
“뭘 준비하려고 시간이 필요한 거야?”
궁금증이 생긴 준성의 물음에 멈칫한 이나가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알고 싶어요?”
“으, 으음! 딱히 알고 싶지는 않은데.”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준성이 고개를 저었지만 이나는 사뿐사뿐한 발걸음으로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입맞춤할 것처럼 가까이 접근하더니 그의 귓가에 달짝지근한 숨결을 흘리며 속삭였다.
“많은 준비가 필요해요. 준성에게 줄 선물은 꾸미면 꾸밀수록 화려하고 신비한 매력이 가득하답니다.”
“아직은 이르지 않을까?”
“이르다니요, 이래 보여도 애도 낳아본 유부녀인데요.”
“……그랬지.”
남자를 한 방에 녹여 버릴 매력의 소유자였지만 실상은 애를 여럿 낳은 무서운 아줌마(?)가 강이나였다. 그럼에도 두근거릴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치명적인 매력을 지녔다는 뜻이리라.
“어쨌든 기대해요! 준이 아직 이르다고 하지만 언제 일을 벌여도 놓치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할 테니까!”
순식간에 거리를 벌린 이나는 어느새 방 안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대체 만반의 준비가 뭔 거야.”
궁금하기도 하면서 마치 먹잇감으로 전락한 느낌에 준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세희의 방으로 들어온 이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드라마 두 개를 듀얼 모니터에 각각 재생한 세희는 자신을 향한 눈길에 이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 얼굴에 뭐 묻었니?”
순간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거실에서 나눈 대화를 듣지 못했다면 세희가 아직 준성의 생일을 모르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그럴듯한 희망은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세희 언니가 모를 리 없어.’
저렇게 순수하고 착해 보이는 외모를 하고 있어도 꼬리를 아홉 개 숨긴 구미호였다. 외모에 현혹되어 넋 놓고 있다가 준성을 낚아채서 혼자 홀로 하하 호호 할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평소에는 친언니보다 더 따르지만 지금은 한 남자를 두고 경쟁하는 연적! 이나는 판을 깨버리기로 마음을 먹고 본론을 꺼내 들었다.
“언니! 준의 선물 준비하고 있어요?”
“으응? 알고 있었어?”
“당연하죠! 제가 그것도 모를까 봐요!”
뜨끔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세희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 눈 가득한 여유를 보면서 자신이 현저하게 뒤처진 걸 직감한 이나는 불안감이 엄습하는 게 느껴졌다.
“언니는 뭘 준비했어요?”
“준비할 게 있을까나, 나 자체가 선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그런!”
“준성의 생일을 위해 신성력으로 정성껏 가꿨어. 아주 좋은 선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이익! 음란한 언니 같으니라고!”
철저한 준비를 마친 세희의 앞선 행동력에 이나는 힘찬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압도적인 신성력을 빌린 그녀를 막기 위해서는 엘리엔과 연합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상상에 불과하다는 걸 바로 깨닫게 되었다.
“안 그래도 준비 중이지. 엘븐 포레스트에서 구전으로 내려오는 ‘달콤한 연인의 숨결’과 네이처 소드로 힘을 살린 ‘탱탱한 세계수의 잎’을 준비했다.”
“준에게 선물하려고요?”
“아니, 나한테 사용하려고 준비 중이다만?”
“왜 엘리엔 님이 그걸 사용해요!”
“그야 이 세계에서는 여자가 스스로 선물 포장을 하는 경우가 많던데? 준성이 제법 좋아할 거라 생각한다만, 잘못된 부분이라도 있나?”
있어도 아주 많아서 아예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믿었던 전우에게 배신당한 기분이기에 이나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에, 엘프는 정신적인 사랑을 중시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확실히 엘프는 정신적 사랑을 추구한다. 그런데 이 세계에 이런 속담이 있더군.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정신적인 사랑은 이미 하고 있으니 육체적인 사랑까지 곁들어지면 완전한 사랑이 된다는 말을 들었다.”
‘대체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구야!’
당장 찾아가서 오러 블레이드 한 방 먹여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꾹꾹 억눌렀다. 세희를 막기 위해 찾아왔던 것이 사상 최강의 적을 마주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망했어!’
당장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싶은 이나였다.
두 강적의 철두철미한 준비에 준비를 갖추려고 했지만 부족한 시간은 이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미처 다른 방책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찻집의 오픈 날짜가 코앞에 다가온 것이다. 그리고 당일이 되는 순간, 리모델링을 마친 찻집은 수많은 인파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찻집 ‘엘리미스’는 이미 학교 축제에서 이름을 널리 알렸으며, 뛰어난 맛으로 입소문이 퍼져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리고 오픈 당일, 다양한 경품 추첨과 이나의 팬 미팅을 곁들임으로써 백미를 더했다.
제일 먼저 시작된 것은 이나의 사인회였다. 무수히 많은 남자들이 줄을 선 가운데, 손에는 각각 같은 디자인에 색상만 다른 텀블러가 들려 있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세희가 준성에게 감탄을 흘렸다.
“텀블러를 판매하고 사인을 받을 수 있도록 한 건 굉장한 것 같아요.”
텀블러의 가격은 만 원이었는데, 졸지에 유료 사인회가 되었지만 디자인도 고급스럽고 제품도 튼튼했기에 망설임 없이 구입했다.
“이 정도야 기본 아니겠어? 넉넉하게 준비해 뒀으니 텀블러로 얻는 수익도 제법 많을 거야.”
오늘을 위해 준비한 텀블러의 숫자는 삼천 개였다. 오늘 당장 다 판매할 목적이 아니라 가게에 비치해 두고 판매함으로써 정기적으로, 기습적으로 사인회를 열어 손님들이 방문하도록 유도할 생각이었다.
“차 맛도 희석시키는 방안이 주효한 것 같아요.”
“너무 효과가 좋으면 의심을 받고 과도한 주목을 받을 수도 있어. 적절한 마케팅 선에서 효과가 나야지, 즉시 나타나면 우리에게도 좋지 않아.”
축제에서 차를 마신 사람들은 세희와 이나에게 반하고, 맛에 반하고, 효능에 반하면서 문전성시를 이뤘는데, 그 효과가 너무 강하다는 준성의 의견에 농도를 줄여서 판매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서히 좋아지는 느낌이 들어야 자주 마시러 오지 않겠어?”
“그러네요.”
행사는 이나에게 맡겨둔 뒤, 준성과 세희는 한창 건설 중인 집을 둘러보았다. 지하에 조성된 이곳은 더 깊은 곳을 들어가고 싶었지만 걸리는 점이 많았다.
“머물 거처는 아무래도 이 정도가 한계인 것 같네.”
“지하수가 지나다녀서요. 차라리 조금 먼 곳이더라도 제대로 된 공간을 마련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렇겠지.”
기껏 힘을 들인 것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입맛이 썼다. 그래도 주변이 마법으로 처리되어 있어 외부의 시선을 완벽하게 차단하고, 마음껏 수련할 수 있다는 장점이 존재했다.
한참 동안 머물 거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가게로 올라온 준성과 세희는 아직도 사인을 하고 있는 이나를 보며 멈칫했다.
“아직도 하고 있어?”
“그러…… 게요.”
줄이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늘어나 있었다. 얼마나 팔렸는가 싶어서 카운터에 서 있는 고상준에게 다가갔다.
“텀블러는 몇 개 남았습니까?”
“이백 개가 조금 넘습니다. 지금 판매 속도로 보면 완판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저도 놀랐습니다.”
삼천 개의 텀블러는 지금 이 순간에도 팔려 나가고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판매되는 기염을 토했다.
세희가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는 이나를 보며 염려 섞인 표정을 지었다.
“괜찮을까요?”
“괜찮을 거야. 육체는 그랜드 마스터니까.”
그랜드 마스터의 육체는 연예인에 최적화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잠을 적게 자도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 주고,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며 근육통 같은 건 느끼지 못하니 말이다.
하지만 육체는 멀쩡해도 정신까지 멀쩡할 수는 없었다. 점점 더 늘어나는 줄을 보며 이나는 먼 곳에 있는 준성을 원망 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나가 준성을 원망스럽게 보는데요?”
“하하, 이따가 위로해 줘야겠네.”
준성은 어색하게 웃었다.
☆ ☆ ☆
“갑자기 불러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본부장님.”
근태는 갑작스러운 본부장 김기정의 호출에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영문을 파악하지 못한 그를 보며 미소 지은 김기정은 뜬금없는 말을 건넸다.
“근태 씨는 앞으로의 미래를 어떻게 보십니까?”
“예?”
“인간의 미래를 묻는 것입니다.”
“조금씩이지만 숫자가 늘어나고 있고, 몬스터에 대한 자료도 쌓이고 있습니다. 조금 더 준비를 갖추면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그 말에 김기정은 고개를 저었다. 정면으로 부인당한 근태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조용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몬스터를 막기에 혈안이 되어 있지만 언제 왜 어느 장소에 나타나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점점 잦은 등장과 높은 등급으로 인해 능력자들 사이에서 불안감이 고조되고 있고요.”
“음!”
“그래서 국가적으로 능력자를 모집하고 양성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지만, 아직 몬스터에 대한 사실이 공표되지 않은 만큼 힘겨운 상황에 직면합니다.”
“이해합니다.”
사실이기에 근태는 고개를 끄덕여 그의 말에 동조했다.
그에 미소를 지은 김기정은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나침반 모양의 물건을 내밀었다. 의아함이 담긴 눈빛에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저번에 등장한 능력자들도 아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아군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을 기억하고 계시죠?”
“예.”
“이 물건은 몬스터가 어느 장소에서 어느 시간에 나타날지 알려주는 기계입니다.”
“이것이 말입니까?”
새삼스러운 눈으로 나침반에 시선을 옮겼다. 겉모습만 보면 그런 기능이 있는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곧 양산될 물건이지만 단점은 어느 등급의 몬스터가 등장할지 모른다는 점입니다. 이건 굉장히 조심해야 할 사안이죠.”
“그렇군요, 그런데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왜 꺼내신 건지?”
“근태 씨께 준 것을 그들에게 건네주십시오.”
“이걸 말입니까?”
“예, 저는 그들이 몬스터를 어떻게 상대하는지 한번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를 지킬 수 있는 힘을 지녔다면 꼭 협력 체제를 구축하고 싶습니다.”
한국 본부의 힘은 결코 약하지 않지만 몬스터의 출현이 빈번해짐에 따라 곳곳에서 구멍이 날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몬스터에 대한 완벽한 대비를 원하는 김기정의 입장에서 힘을 지닌 이들이라면 협력 체제를 구축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었다.
“솔직히 저들이 그 제안을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저 말만 전해주면 됩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몬스터를 피해 없이 막는 거니까요.”
어딘지 조급함이 서린 말투에 의아함이 느껴졌지만 깊게 캐묻지 않았다. 세계의 정보를 조합하고 타국의 본부와 관계를 조율하는 것이 김기정의 할 일이었다. 아마 자신이 보지 못한 걸 파악하고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이리라.
“알겠습니다.”
최예성에 대해 할 말이 있던 근태는 고개를 끄덕여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시 한 번 그들을 볼 생각에 피가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 ☆ ☆
멀리서 마주쳤을 때도 오싹했지만 바로 앞에서 원망이 담긴 눈을 마주하니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랐다. 죄를 지은 것마냥 양어깨를 축 늘어뜨린 그를 보며 서운함을 팍팍 담아 말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미안해.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어서 정말 그런 줄 알았어.”
“그야 절 좋아해 주는 팬을 만나니 기분이 좋긴 하지만, 준이 그렇게 매정하게 가버릴 줄은 몰랐다고요!”
성황리에 사인회를 마친 준성에게 기다린 것은 이나의 서러움 폭발이었다. 기어코 준비한 텀블러 3천 개를 모두 판매하는 바람에 이나는 예정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사인을 해야만 했다.
단순이 그 정도라면 아무렇지 않을 터였으나 세희와 다정하게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모습에 그녀는 질투심이 폭발하고 말았다.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것이 준성이었다.
“미안,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그러니 진정해, 응?”
“정말이죠?”
“난 실망할 줄 모르고 자리를 비켜줬던 거야. 대신 내가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라면 들어줄 테니까.”
“……부탁이란 말이죠?”
“물론이지.”
순간 전신을 훑는 시선에 준성은 소름이 돋는 걸 느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빛내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지만 서운함을 팍팍 드러내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럼 그 부탁 지금 사용할게요.”
“바로?”
“네!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좋아, 내 몸을 원하는 것만 아니면 얼마든지 들어줄게.”
“부부 사이에 서로의 몸을 탐하는 건 당연한 거잖아요!”
“그래도 안 돼. 한쪽만 탐하게 되면 불행해지니까.”
아이러니하게도 몸을 탐하는 쪽(?)은 이나였다. 마법으로 높은 경지에 도달한 준성은 철저한 이성으로 무장하여 좀처럼 본능적인 짐승으로 바뀌지 않았다.
자신의 노림수가 모조리 차단된 것을 느낀 이나가 표정을 구겼다.
“쳇!”
“…….”
순간 오한이 엄습한 것을 느낀 준성이 가볍게 몸을 떨었지만 다른 것을 말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이나가 눈을 빛내더니 말했다.
“그럼 당분간 여우들의 접근을 막을 것!”
“여우들?”
이나 입장에서는 준성의 정조를 노리는 앙큼한 두 여인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네! 여우들! 우리도 인기가 많지만 준이 얼마나 인기가 많은데요! 그러니 그 여우들의 움직임을 철저하게 차단할 것! 알았죠?”
눈을 치뜨며 경고하는 모습에 준성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난 너희뿐이라는 거 알잖아.”
“그래도요! 자신의 정조는 스스로 보호하는 거예요. 아셨죠?”
“아, 알았어.”
그랜드 마스터의 박력에 맥없이 밀린 준성이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엘리엔 뒤에서 환상처럼 보이던 아홉 개의 꼬리가 왜 떠오르는 걸까.
이나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해 낸 준성이었지만 불안감을 떨쳐 내지 못한 그녀는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 중얼거릴 뿐이었다.
“불안해, 너무 불안해.”
“이 정도일 줄은.”
세희의 친구 고미현의 아버지 고상현은 오늘 올린 매상을 보며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단 하루 동안 올린 매출이라고 해도 믿기지 않을 만큼 모니터에 떠오른 금액은 엄청난 것이었다.
“인기가 대단하다는 것 정도는 알았지만 이렇게 잘될 줄은 몰랐는데.”
처음에는 강이나의 팬이었고, 한사코 만나보라는 딸의 제안에 응했을 뿐이다. 사업 실패와 자신감의 하락으로 어떤 일에도 선뜻 임할 수 없었던 고상현은 의젓하던 고등학생들의 제안을 받아들인 대가가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
매장을 관리하는 것치고 높은 급여를 받고 순이익에 따른 퍼센트를 보너스로 받기로 했지만 상상 이상이었다.
1억 원.
오늘 번 돈이었다.
그중 3천만 원은 텀블러의 가격이었지만, 그것을 제하더라도 차를 판매한 것만으로 하루 매출이 7천만 원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오늘 사인회를 하느라 테이블 회전이 느렸고, 장사 시간도 몇 시간 단축을 했다는 점이다. 이 모든 걸 감안하면 다른 날에도 충분히 오늘에 준하는 매출을 올릴 수 있다는 걸 뜻했다.
“순이익도 엄청난데 월급보다 많겠군.”
매장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을 조금 떼어주기로 하면서 적지 않은 돈이 될 거라 자신만만해하던 이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이것이 월급보다 많아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치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철저하게 관리하는 수밖에 없군. 까딱하다간 밀려날 수도 있겠어.”
꿈이 아닌 현실임을 깨닫게 되자 자신에게 굴러 들어온 행운을 지켜보며 누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자세로 지켜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자신보다 젊고 뛰어난 자들은 세상에 널려 있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더 열심히 철저하게 가게를 관리해야 했다.
“뼈가 녹도록 일하는 수밖에.”
결론은 단 하나였다. 중년의 나이에 일 벼락을 맞게 되었지만 고상현의 표정은 밝았다.
찻집의 성공적인 오픈과 별개로 준성과 이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월요일 아침에 등교한 뒤, 학교가 끝나자 집으로 향했다.
세희와 이나랑 함께 하교하던 준성의 표정이 돌연 딱딱하게 굳어갔다.
“음!”
“왜 그래요?”
“잠시 일이 있어서. 난 다른 곳으로 가볼 테니 먼저 들어갈래?”
“급한 일이죠?”
“그런 건 아니니까 먼저 들어가 봐. 조금 이따 따라갈 테니까.”
“네.”
이나는 따라가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녀의 팔을 붙잡은 세희가 가볍게 고개를 저어 보이자 한숨을 푹 내쉬며 순순히 포기했다. 그녀들과 일별한 준성은 자신에게 향한 의지력을 쫓으며 인적이 드문 놀이터로 향했다.
“왔군.”
그네에 앉아 있던 근태가 미소를 지으며 준성을 바라보았다. 속내를 알 수 없는 그의 표정에 준성은 표정을 지우며 물었다.
“무슨 일로 부른 겁니까?”
“용건이 있어서 찾아왔지.”
“용건이라…….”
근태가 방문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준성으로서는 섣불리 실력 행사에 들어가기 어려웠다. 대답을 종용하며 지그시 바라보니,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 표정을 보니 견뎌내기 힘들군. 내가 찾아온 이유는 자네에게 몇 가지를 묻고 싶어서야.”
“비밀로 할 만한 것이 아니면 얼마든지 대답해 드릴 수 있습니다.”
“솔직해서 좋군! 그럼 묻지, 몬스터가 출몰하는 걸 알아차릴 수 있나?”
“적어도 그쪽보다 훨씬 빠르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차원의 문이 열리고 트롤이 나타났을 때 준성이 먼저 사냥에 성공했으니 저들도 이미 짐작하고 있을 사실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근태는 다른 질문을 했다.
“그럼 어느 정도 수준의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지?”
“어디까지 상대해 봤는지 알 수 없어서 모르겠군요.”
“그렇군.”
“이번에는 그쪽이 절 찾아온 이유를 물어보면 됩니까?”
“실은 우리 측에서 몬스터의 등장을 예측할 수 있는 것을 만들었지.”
“호오!”
“그걸 자네에게 주려고 왔네.”
근태의 손을 떠난 탐지기가 준성의 손에 안착했다. 만약을 대비하여 손에 실드를 두른 그는 예리한 눈으로 탐지기를 살폈다.
“용건은 그것뿐입니까.”
“본부장님께서는 자네가 원한다면 연합 전선을 구축하고 싶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유감이지만 저는 별생각이 없습니다.”
“그런가? 흠! 아쉽군.”
그렇게 말을 했지만 근태에게서 아쉬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서로 감추는 바가 많은 상황에서 협력 체제를 유지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그도 알고 있는 것이리라.
“할 말이 끝났다면 가보지요.”
이 탐지기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궁금했던 준성은 용건이 없어 보이는 근태를 일별하고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자네는 내가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이 불안하지 않은가?”
“불안할 이유가 있습니까?”
“정신을 제압해서 모든 것을 털어놓게 만들 수도 있는데?”
은근한 도발 속에 강렬한 의지가 실려 있었다. 강하게 느껴지는 압박감에 준성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 전에 목이 떨어지는 게 확실하다는 게 문제겠죠.”
“무슨…….”
말을 하던 근태는 목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예기에 말을 멈췄다. 살짝 시선을 옮기니 어느새 목에는 날카로운 칼 한 자루가 도달해 있었다.
“죽고 싶다면 그 소원을 이뤄주지.”
“…….”
영롱한 여인의 음성이었지만 근태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미처 느끼지도 못한 사이에 간격을 허용하고, 치명적인 급소마저 내어주었으니 당장 죽어도 뭐라 변명의 여지가 없는 셈이었다.
“굳이 무력시위를 하지 않아도 알아서 느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정도의 안전장치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섭섭합니다.”
“그랬군, 내가 목숨 하나를 빚진 셈이 되었어.”
“빚질 필요 없이 이 자리에 취할 수도 있지만 우리와 당신은 좋은 협력 관계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동료보다 서로의 이익에 맺어진 관계라, 지금으로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로군.”
상대가 얼마나 강한 무력을 지니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도발 한마디에 죽이고자 살기를 발산하는 것을 보면 자신의 예상하는 선보다 한참 윗줄의 실력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도 전신이 송곳에 꿰뚫리는 것처럼 예리한 기세가 자신을 난도질하는 중이다.
허탈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그를 향해 준성이 말했다.
“어쨌든 주신 물건은 잘 쓰도록 하겠습니다. 이걸로 먼저 파악하면 우리에게 우선권이 있는 걸로 알겠습니다.”
“물론이네, 본부장님도 그걸 원하셨으니.”
거짓말이다.
정확히 진실이 섞인 거짓이었다. 근태의 눈을 보는 순간 준성은 자신이 예상만 하던 것이 현실로 드러나는 걸 느꼈다. 능력자 본부의 힘이 뛰어나다면 값비싼 몬스터 사체를 이렇게 순순히 양보할 리 없었다.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정보가 하나씩 조합되니 원하는 그림이 만들어졌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준성이 여전히 기세를 흘리는 엘리엔에게 눈짓을 한 뒤 말했다.
“……그럼 가보지요.”
“잠깐!”
근태가 외쳤지만 준성의 몸은 흐릿해지면서 사라졌다. 뒤에서 느껴지던 싸늘한 살기도 마찬가지였다. 한 편의 꿈처럼 방금 전 나누었던 대화 내용을 떠올린 근태는 쓴웃음을 지었다. 뭔가 얻어내려고 했지만 그것들은 이미 알고 있는 요란한 겉봉투에 지나지 않았다.
“신뢰 관계는 쌓을 수 없지만 거래 관계는 유지할 수 있다? 주고받는 것 하나만큼은 아주 정확하겠군.”
가장 큰 수확이라면 수확.
목이 잘릴 뻔한 위기를 겪은 근태는 목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세상 참 쉬운 일이 없군.”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묻어 나오고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