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152)
제32장 트롤 사냥
유쾌하지 않은 만남을 한 뒤, 자리를 벗어난 준성과 엘리엔은 곧장 집으로 향했다.
“준! 무슨 일이에요?”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이나가 준성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세희가 옆에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그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방금 전 능력자와 만나고 왔어.”
“괜찮은 거죠?”
“다치지 않고 왔잖아. 그 능력자가 제법 뛰어난 실력을 지녔지만 날 어쩔 정도는 아니야.”
가벼운 미소로 이나를 달랜 준성은 근태와의 만남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당시 느꼈던 감정에 대해서 또한 간략하게 언급했다.
“저들이 순순히 호의를 베풀지 않을 걸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
“다른 의도가 있다는 건가요?”
세희의 반문에 준성은 표정을 굳힌 뒤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마 그렇겠지. 저들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 않아서 제대로 추측하기 힘들지만 한 가지만큼은 분명해. 이것을 건네준 것 자체가 우리에게 족쇄가 될 수 있다는 뜻이야.”
준성이 내민 것은 몬스터의 등장을 알려주는 물건이었다. 나침반처럼 생긴 그것을 보고 세희와 이나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만약 여기에 우리의 위치를 추적하는 능력이 깃들었다면?”
“……전쟁을 하자는 걸로 간주해야겠죠.”
“그렇게 날을 세울 필요는 없지만 내가 이런 말을 한 이유는 아직 우리가 저 능력자들에 대해 아는 바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야. 당장 능력이 어떤 방법으로 발현되는지 추측할 뿐, 쌓인 데이터는 형편없을 정도지.”
설령 이 예측기에 추적 능력이 깃들어 있다고 해도 준성은 개의치 않았다. 지금 이곳은 상대에게 위장으로 알려진 장소였고, 대화를 나누면서 그의 표정과 행동을 보고 거짓이 아니란 걸 간파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상대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어. 그렇죠?”
“맞다, 다른 생각이 있을지 모르지만 거짓말은 하지 않았지.”
준성이 굳게 믿는 엘프의 눈을 벗어날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모든 것이 진실이라는 전제하에 여러 가지를 가정할 수 있는데, 내가 가장 의심이 닿는 부분은 이 세계에 몬스터의 출몰 빈도가 늘어난다는 점이야.”
“자신들만으로 감당할 수 없으니 우리를 이용하려는 거다?”
“비슷한 이야기지. 여기에는 중대한 사실이 있는데, 우리가 한 번 추측해 봤었지.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능력자의 숫자가 몇 명 정도일지. 그리고 약 이백여 명이라고 예상을 했는데 여기에 잠재적인 숫자를 감안하면 최소 삼백, 많으면 사백 정도라고 생각해.”
“제법 많네요.”
“전력이 되지 못하는 능력자들은 활동 선상에서 빠질 테니까. 그 말은 앞으로 나타날 몬스터의 숫자가 이들만으로 커버가 안 된다는 말이 돼.”
“…….”
그의 말뜻을 알아차린 여인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말은 몬스터의 출몰 빈도가 더 가속화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저번에 말했지만 몬스터의 전력은 굉장히 강해. 오크 하나를 잡아도 다섯 명 정도가 달려들어야 하니까. 그런데 앞으로 더 강하고 많은 숫자가 나타나면 대한민국은 커다란 혼란에 휩싸이게 될 거야.”
“주의해야겠네요. 예측기는 어쩌려고요?”
“선물해 줬으니 써먹어야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제법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으니까.”
“하긴, 그러네요.”
그 외에도 준성이 추측한 부분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굳이 꺼내 들지 않았다. 가설일 뿐인 내용을 언급했다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생각을 못 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엘리엔에게 시선을 옮긴 준성이 충고를 던졌다.
“그리고 한 가지, 차원의 문에서 넘어온 마나는 절대 흡수하면 안 됩니다.”
“무슨 뜻이지?”
트롤에게 추출한 마나 홀은 극도로 정제된 마나였다. 그것은 상당 부분 마나가 유실된 엘리엔에게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비록 체내에 흡수될 때 유실되는 양이 많다고 하지만 당장의 상황에서 더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마나 홀이었다.
“제 생각에 의하면 마나 홀의 마나를 흡수하면 모든 마나가 소멸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가능성은?”
“……거의 확실합니다.”
“…….”
엘리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심각하게 경직될 뻔한 분위기였지만 준성이 적절한 선에서 언급을 끝냄으로써 다른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다.
평상시 분위기로 돌아온 뒤, 들이닥친 것은 코앞으로 다가온 준성의 생일이었다.
“괜찮다니깐.”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보는 우리는 전혀 괜찮지 않거든요.”
거듭되는 이나의 강권에 준성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휴! 내가 괜찮다고 해도 전혀 들을 마음이 없었구만.”
“그러지 말고 생일을 즐겨요. 이렇게 옆에서 축하해 주는 아리따운 부인이 있는 것만으로도 준은 복 받은 거라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네.”
“그럼 들어주는 거죠?”
“차라리 소원을 이걸로 하지 그랬어.”
“그럼 너무 아쉽잖아요.”
“하하!”
이나의 고집에 두 손을 든 준성은 항복의 의사를 드러냈다.
그녀가 권한 것은 이번에 오픈한 찻집에서 생일 파티를 여는 것이었다.
현재 찻집이 성업을 하고 있지만 매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준성의 생일이라고 이나는 강하게 주장했고, 논리에서 밀린 세희와 엘리엔은 어떠한 반박도 하지 못했다.
‘접근을 막을 수단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준성에게 여우들을 조심하라고 말을 했지만 이나가 계획하는 바는 여러 가지였다. 가장 먼저 둘이 접근할 여건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준성의 생일 파티를 공개된 찻집에서 열어버림으로써 세희와 엘리엔의 검은 마수를 완전히 걷어낸다. 그다음은 찻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끌어들여 분위기를 복잡하게 이끄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찻집의 인기와 두 여우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한 이나의 피나는 계책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준성의 허락을 받아낸 그녀는 거칠 것이 없었다.
생일 하루 전, 세희와 엘리엔에게 일방적으로 찻집에서 생일 파티 열 것을 선언한 것이다.
당연히 그날을 위해 몸을 만들던(?) 세희와 엘리엔은 허점을 찔려 낭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나도 못 먹을 거, 다 같이 못 먹으면 그나마 덜 억울하지 않겠어?’
아주 간단하게 생각하는 이나였다.
그리고 열린 생일 파티에서 찻집에 종사하는 직원들과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오고 가는 인사 속에서 생일을 축하하고, 맛있는 음식과 차가 있는 생일 파티는 야심한 밤만 노리던 두 여인을 빼고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이 정도로 포기할 거면 대마법사와 그랜드 마스터란 칭호가 아까웠다. 아쉬운 대로 새벽을 노리는 둘의 가슴에 비수를 박는 이나의 선공이 이어졌다.
“준! 오늘 옆에서 자도 되죠?”
“되긴 뭐가 돼.”
“왜요! 오늘이 얼마나 의미 있는 날인데. 어때요? 응? 응?”
“내가 요즘 수련을 하느라 얼마나 바쁜데. 이 정도도 배려 못 해주는 거야?”
준성의 음성에 실망감이 서리자 이나가 멈칫했다. 자연히 이나의 선공에 불을 켜고 기회를 노리던 세희와 엘리엔은 멈칫하면서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원하는 바를 모두 얻은 이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 뒤로 물러났다.
“미안해요. 그래도 준을 너무 사랑해서 그랬다는 것만 알아줘요.”
“알아, 후우! 요즘 힘을 되찾는 게 조금 힘에 부치는 느낌이어서 예민했나 봐. 미안해, 이나.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화를 내서.”
“아니에요! 제가 너무 욕심이 과했던 것 같아요. 준을 생각해서라도 물러났어야 했는데. 앞으로 준에게 재촉하지 않을게요. 준이 목표한 바를 이룰 때까지 도와주지 못할망정 방해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비장하기까지 한 그녀의 태도에 세희와 엘리엔의 표정은 가히 좋지 못했다. 그렇게 선을 그어놓음으로써 오랫동안 준비한 육탄 공격은 아예 무용지물로 전락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고마워. 평소에는 천방지축이어도 이럴 때 날 제일 이해해 주는 것 같아.”
“물론이죠, 헤헤!”
내 님에게 점수도 따고, 라이벌들의 접근도 지연시키고.
원하는 것을 모두 얻지 못했어도 이나의 기분은 날아갈 듯했다.
“분해는 하면 안 되겠죠?”
몬스터 예측기를 보며 준성이 말했다. 마법으로 만든 아티팩트처럼 마법진이 새겨져 있지 않았기에 어떠한 원리로 작동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한 차례 경험이 있으니 신중한 게 좋겠지.”
“어느 정도 저들의 아티팩트 제작 방법을 알아내야 하는데 아무것도 모르니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답답하네요. 원리만 알아내면 쓸모가 있을 텐데.”
준성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이 예측기의 능력을 경험해 보아서 그렇다.
생일 다음 날, 하교하던 도중 예측기에서 경보가 발생했고, 액정에 좌표가 드러남으로써 몬스터의 등장을 예고했다. 그리고 장소에 도착한 준성은 예측기의 능력에 감탄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예측기 화면에 뜬 것은 B급 몬스터 블랙 오크였다. 트롤보다 한 단계 아래인 블랙 오크는 강한 힘과 질긴 가죽을 지닌 몬스터였다. 준성은 먼저 도착한 능력자들이 펼치는 사냥 방법을 보며 적잖이 감탄했다.
체계적이면서 의지력을 극도로 발휘하는 모습은 완벽한 사냥의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어차피 우리가 그런 협력을 유지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긴, 그렇죠?”
그랜드 마스터이자 대마법사인 엘리엔과 10클래스의 경지에 도달한 자신의 힘이 합쳐지면 체계적인 협력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다.
아무리 강하더라도 단 일격으로 몬스터를 곤죽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으니 말이다.
시시한 잡담을 주고받으면서 시시덕거리던 준성은 예측기가 떨리더니 요란한 경보음과 함께 푸른빛이 뿜어지는 것을 보았다.
위이잉!
화면 위로 떠오르는 좌표!
엘리엔에게 시선을 돌리니 그녀의 눈에 이채가 서려 있었다.
“가보죠!”
“그러지.”
마음이 일치한 둘은 곧장 아파트를 벗어나 좌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향했다.
☆ ☆ ☆
좌표를 해석하고, 빠른 속도로 이동하여 장소에 도착하니 차원의 균열이 일어나며 문이 열리고 있었다. 이내 공간이 쩍 벌어지면서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엘리엔이 중얼거렸다.
“이럴 때 보면 참 몬스터도 배려가 깊군.”
“하하, 그러네요.”
왜 몬스터는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유독 인적이 드문 곳에서 모습을 드러낼까?
한 번쯤 의문을 가질 사안이었지만, 준성은 몬스터의 강림이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 근접해 가는 것을 알았다.
‘조금씩 정보가 쌓이고 있다는 뜻.’
차츰 강한 힘을 지닌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예측기에서 예고한 몬스터의 정체는 B+급 트롤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체구의 트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도 늦었네요.”
자신들보다 먼저 도착한 파티를 보며 준성이 중얼거렸다. 그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엘리엔이 중얼거렸다.
“예측기가 구형이거나 움직임이 더 빠른 것이군.”
“전자겠죠.”
예측기가 울리기 무섭게 움직였지만 능력자들이 더 일찍 도착했다는 것은 예측기의 능력이 뒤처진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B+급 트롤은 한 도시를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는 거대한 재앙 덩어리였다. 강렬한 기파를 연신 발산하는 트롤 주변으로 열 명의 능력자가 포위망을 구축했다.
“일단은 지켜보죠.”
“……저 트롤, 저번과 다르군.”
준성이 본 것을 엘리엔도 놓치지 않았다. 같은 것을 봤다는 생각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눈치챘나요? 아마 쉽지 않을 겁니다.”
둘의 시선이 트롤과 전투를 벌이는 능력자들에게 고정되었다.
꽈과광!
강렬한 완력을 바탕으로 능력자들을 몰아치는 트롤의 힘은 발군의 것이었다. 가히 그랜드 마스터조차 곤죽으로 만들어 버릴 듯한 매서운 공격. 그 속에서 능력자들은 저마다 포지션을 맡아 차분하게 트롤을 상대해 나갔다.
강렬한 기파는 그들의 의지력에 흩어지고, 매서운 공격을 방패와 건틀릿으로 막아냈다. 그리고 검과 총, 화살이 날아들며 트롤의 전신을 강타했다.
크르르!
포효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자 능력자들의 몸이 한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코앞에 도달한 몽둥이를 피하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져야만 했다.
능력자들의 움직임은 일사불란하고 현란했다. 강력한 공격이 적중되면 어김없이 폭음과 함께 주변 공간이 비틀리고 뒤집혔다.
하지만 트롤의 질긴 가죽은 뚫지 못했다.
무너지지 않는 나무를 베는 것처럼 능력자들은 체계적인 공격을 통해 트롤을 공략했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처럼 조금씩 충격이 쌓이기 시작하자 트롤의 동작이 둔해지고 공격의 위력도 약해졌다.
제아무리 그랜드 마스터와 근접한 트롤이라고 하나, 본성은 잔혹하기 그지없는 몬스터.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육체에 번번이 분노의 감정을 토해냈지만 그럴수록 능력자들의 움직임은 차분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푹!
마침내 능력자의 검이 트롤의 가죽을 꿰뚫었다. 그와 함께 녹색 피가 흘러내렸다. 진득한 피가 검을 적시며 한 방울씩 떨어지는 순간, 분노에 물들어 있던 트롤의 기세가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끝인가?
그 생각이 능력자들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순간 진정한 공포가 시작되었다.
크아아아아!
강렬한 절규가 담긴 포효가 터지자, 그와 동시에 푸른 기운이 전신을 휘감더니 강렬한 기운이 사방에 퍼져 나갔다.
콰콰콰콰!
엄청난 기세 폭풍! 승리를 직감하던 능력자들은 갑작스러운 마나 폭풍에 휘말려 10여 미터가 밀려 나갔다. 그리고 내부 깊숙한 곳으로 파고든 내상에 저마다 무너져 피를 토했다.
크르르!
능력자들을 바라보는 트롤의 눈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와 동시에 푸른 기운이 점차 붉게 바뀌더니 녹색 피부도 붉은색으로 변했다.
삐삐삐삐!
동시에 능력자들의 손목에 걸린 시계가 경보음을 울렸다. 그 안에 드러난 내용을 확인한 그들은 퍼져 나가는 경악을 참지 못했다.
“이, 이게 무슨!”
“A제로라고? 말도 안 돼!”
트롤이 기세를 폭사하며 붉게 변하는 순간 등급 하나가 올라간 것이다.
B등급은 자칫 도시가 사라질 수 있는 재앙이라면 A등급은 한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 것을 의미한다. A등급 중 가장 낮은 제로였지만 한순간 등급이 더 올라갔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크어어어!
능력자들의 경악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괴성을 지른 트롤은 가장 가까운 능력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조금 전과 비교할 수 없는 빠르고 날랜 몸놀림이었다.
꽝!
“끄악!”
무기가 부서지고, 여파에 휩쓸린 능력자가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갔다.
“재민아!”
이름을 부르며 앞을 가로막았지만 트롤의 몽둥이 위력은 이전과 판이하게 달랐다. 붉은 기운이 자리한 몽둥이는 능력자들의 무기를 가루로 만들어 버리고, 육신을 처참하게 부숴 버렸다.
한 번의 충돌이 일어나면 어김없이 뒤로 튕겨 나가며 전투 불능에 빠졌다. 순식간에 전방을 맡은 네 명의 능력자가 전투 불능이 되고, 후방 지원을 맡은 능력자가 고스란히 트롤에게 노출되었다.
크르르르!
“아, 아아…….”
가까이서 으르렁거리는 트롤의 모습에 여자 능력자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핏빛으로 물든 눈으로 살의를 담아 바라보는 모습에 육신의 자유를 빼앗긴 허수아비처럼 트롤의 접근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다 잡아놓은 먹잇감을 마무리하는 것처럼 한 발자국씩 다가간 트롤은 능력자 앞에 도착한 뒤, 천천히 몽둥이를 위로 들었다. 그리고 허공을 가르는 순간,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부웅!
“아악!”
“안 돼!”
두려움과 무력감, 복합적인 감정이 뒤섞인 비명이 주변에 울려 퍼졌지만, 몽둥이는 야속하게 여성 능력자의 머리를 정확하게 노리고 있었다.
곧 머리가 터져 처참하게 바닥을 뒹굴 거란 생각에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소리는 머리가 터지는 소리가 아니라 날카로운 소음이었다.
터어엉!
“…….”
트롤의 포효에 몸이 굳어버렸던 여성 능력자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자신의 최후를 직감했지만 눈앞에 벌어진 현상은 그녀로 하여금 두 눈을 부릅뜨게 만들었다.
“이, 이건…….”
그녀의 앞에 생성된 반투명한 막이 트롤의 몽둥이를 정면으로 막아내고 있던 것이다.
대체 이게 어디에서?
방어막을 생성할 수 있는 능력자는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넓은 면적으로, 저 무시무시한 몽둥이를 막아낼 만큼 견고하게 펼쳐 내지도 못한다.
두 눈에 의아함이 번지는 순간,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느껴졌다.
능력자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소리의 진원지로 향했다. 그곳에는 로브로 전신을 두른 검은 머리의 남자와 모자를 깊게 눌러쓴 녹빛 머리의 여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
기이한 적막이 주변을 지배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모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얼굴을 가리고 모습을 드러낸 준성이 그들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와 거래를 하지 않겠습니까?”
“거, 거래라면?”
준성의 방어막으로 목숨을 건진 여성 능력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후드로 얼굴을 가렸지만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몬스터의 선점권에 대해서입니다. 저는 이 몬스터에 관심이 많습니다. 여러분이 처치하기 힘들다면 제가 맡고 싶은데요.”
“그, 그건…….”
감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기에 여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여태까지 이런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크어어어!
그들을 현실로 잡아끈 것은 트롤의 포효였다.
자신의 존재가 완전히 지워지고, 공격이 막힌 것에 분노한 트롤은 미친 듯이 몽둥이를 내려쳤다.
꽝! 꽈앙! 꽈아앙!
무시무시한 힘이 담긴 공격이 연이어 방어막을 두들겼다. 그때마다 섬뜩한 굉음이 주변을 울렸지만 쉽게 깨지지 않았다.
“어서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어려울 텐데요.”
준성의 한마디에 상념에서 벗어난 여인이 외쳤다.
“아, 알겠어요! 도와주세요!”
“미, 미혜야!”
“이대로면 모두 죽는다고요!”
“…….”
그녀를 타박하려던 능력자는 다른 동료를 걱정한 외침에 침묵했다. A제로 등급으로 올라선 트롤의 힘은 서울 본부의 힘이 총동원되어야 막을 수 있는 재앙이었다.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트롤을 제거할 수 있다면 악마에게라도 영혼을 팔아야 했다.
“그럼 허락으로 알고.”
준성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엘리엔의 신형이 바람을 가르고 트롤에게 쇄도했다. 그와 동시에 반투명한 막이 사라지자, 괴성을 지른 트롤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쩌엉!
푸른 기운과 붉은 기운이 교차하면서 강렬한 충격파를 일으켰다. 주변에 서 있던 능력자들은 여파에 휩쓸리면서 몸이 휘청거렸다. 몇몇 사람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역시.”
엘리엔의 일격을 막아낸 트롤을 보며 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순간 등급이 올라간 힘은 대단했지만 처음 기세를 일으킬 때보다 약해진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잠력 폭발이라니.”
트롤의 내부에서 벌어진 현상을 눈치챈 준성이 중얼거렸다.
죽음의 위기에 봉착한 순간, 트롤은 자신의 생명력을 불살라서 한계 이상의 힘을 운용한 것이다. 그리고 앞을 가로막은 이들을 압도하는 힘을 펼친 것이다.
모든 생명력을 불태우기 전 능력자들이 전멸할 수밖에 없고, 이들이 몬스터 침공을 막는 이들임을 감안, 준성이 나선 것이다.
이제 시간을 끌면 생명을 불태운 트롤의 목숨은 끊기게 된다.
팅.
준성의 손에 쥐어진 것은 금화였다. 트롤에게 틈이 드러나는 순간, 제련제강의 마법으로 단숨에 목을 꿰뚫어 목숨을 취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재차 공격을 감행하는 엘리엔의 검과 트롤의 몽둥이가 허공에서 충돌하는 순간, 제련제강의 마법을 시전했다.
아니, 시전하려고 했다.
엘리엔의 검에 트롤의 몽둥이가 두 동강 나면서 멈칫한 것이다. 단숨에 무기를 베고 틈을 포착한 그녀의 검은 섬전처럼 쇄도하며 그대로 트롤의 목젖을 꿰뚫었다.
크륵. 크르륵.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뒤로 주춤주춤 물러난 트롤의 육중한 체구가 그대로 무너졌다.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준성에게 집중되었다. 제련제강의 마법을 시전하려고 폼을 잡은 그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움 그 자체였다.
“이, 이런.”
졸지에 폼만 잡은 그의 입에서 당혹스러움이 담긴 소리가 흘러나왔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