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159)
제39장 카운트다운(Countdown)
“나 왔어.”
집으로 돌아오는 준성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한차례 파란이 세희와 이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말을 들은 엘리엔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골치가 아팠다.
특히 진실의 눈을 앞세워 무언의 압박을 가할 때면 머릿속이 뒤죽박죽으로 헝클어지곤 했다.
하지만 집으로 들어온 준성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장면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가 처음 본 것은 미소 짓고 있는 세희와 이나의 얼굴이었다.
“오셨어요?”
“어서 와요, 준.”
“……다녀왔어. 리엔은?”
“방에 있어요.”
“그래, 리엔 좀 불러줄래? 다 같이 할 이야기가 있어.”
“그럴게요.”
흔쾌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나를 지켜보던 준성의 시선이 세희에게 향했다.
“무슨 일 있나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말을 하지 않았지만 세희와 이나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모습을 보이는지 이해한 준성도 미소를 지었다.
그녀들이 자신에게 여자관계에 대해서 타박하는 것은 단순한 장난일 뿐, 진심은 아니었다. 서로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오랜 세월 함께한 경험이 존재하기에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준성의 웃음도 잔뜩 굳어 있는 엘리엔의 얼굴을 보고 지워질 수밖에 없었다. 얼핏 보아도 그녀의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리엔, 정말 몸이 괜찮은 겁니까?”
“……괜찮다.”
“하지만 보이는 건 전혀 괜찮지 않아 보입니다.”
“생각보다 적응에 애를 먹고 있어서 그래. 시간이 좀 더 필요할 뿐.”
“…….”
단호하게 도움을 거절하는 엘리엔을 보며 준성은 입을 다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강제로라도 그녀의 상태를 살피고 싶었지만 자신의 상태를 확신하는 모습에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그러지. 그런데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들었는데.”
“예, 이번에 미국 A.O. 본부에서 구체적인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구체적인 제안이라뇨?”
궁금함이 섞인 이나의 물음에 준성이 제시카가 했던 이야기를 짧게 설명하며 결론을 말해주었다.
“우리를 미국으로 스카우트하고 싶어 하더군.”
“미국으로요? 거긴 또 왜요?”
“잘 모르겠지만 아마 미국 정도 되는 강국이라면 몬스터 강림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건 눈치챘겠지. 그때를 대비해서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능력자를 확보하려는 게 아닐까 싶어.”
소수인 자신들도 알아차린 문제를 강대국이자 세계에서 가장 많은 능력자를 보유한 미국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 우리가 들어야 할 결정이란 게?”
“미국으로 갈지 여부를 정하는 거지. 일단 거절은 했지만, 협상을 다시 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까.”
미국이 자신들에 대해 구체적인 정보를 모를 확률이 높았다. 그럼에도 후한 조건을 제시했다는 것은 협상하기에 따라 더 좋은 조건을 얼마든지 받아낼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준성은 미국행을 그리 원치 않지만 세 여인의 결정이 미국행으로 추가 기운다면 얼마든지 결정을 바꿀 용의가 있었다.
“저는 반대예요!”
“왜?”
“미국이 어떤 곳인지는 잘 알아요. 하지만 그들에게 받는 것이 있으면 우리가 제공해야 하는 게 있어야 해요. 그럼 우리가 가진 것을 밝혀야 하는데 그러기는 싫네요.”
“이나의 말이 정확해요. 저도 미국행은 반대예요.”
세희가 이나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었다. 협상에 있어 냉정하게 판단하는 그녀가 의외로 반대를 하자, 준성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렸다.
“우선 학교생활을 좀 더 만끽하고 싶은 게 첫 번째 이유고, 찻집이나 은신처 같은 장소가 이 나라에 있으니 기반을 옮길 필요가 없는 게 두 번째 이유고, 준성이 태어나고 자란 이곳에서 살아가고 싶은 게 세 번째 이유예요. 저는 아직 애국심이란 게 없지만 정을 붙인 사람들이 있는 이곳에 머물고 싶어요.”
“으음.”
“이렇게 의견이 기울었는데 내가 반대하는 건 어렵겠군. 나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도와준 사람들이 있는 나라를 떠나기는 싫다.”
교통이 발달하고 하루면 오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엘리엔도 반대 반응을 보였다.
내심 그녀들의 반응이 마음에 걸렸던 준성은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 부분은 그렇게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부담 갖지 마요. 전 언제나 준의 편이니까요.”
“저도예요, 준성.”
“고마워, 모두.”
앞을 다투어 위로하는 세희와 이나의 모습에 준성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
그 모습을 엘리엔은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 ☆
“역시, 예상했던 대로인가.”
김기정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드리웠다. 그와 함께 향후 몬스터 대응 방안을 논의하고 있던 박근태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어떤 정보입니까?”
“김준성 씨에게 온 소식입니다. 미국에서 접촉을 해오면서 구체적인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구체적인 제안이라 함은?”
근태의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 미국의 구체적인 지원 앞에 무수히 많은 능력자들이 마음을 바꾸고 조국을 버리고 떠났다. 가뜩이나 몬스터의 강림이 빈번해지는 상황에서 그들의 행동이 마음에 들 리 없었다.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겠다고 했답니다.”
“모든 것을? 이놈들이 정말…….”
당장 자리에 일어나 뛰쳐나갈 것처럼 격분하는 근태였다. 이렇게 하나둘씩 능력자가 빠져나가면 몬스터 침공에 대비하는 경계망이 무너질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김준성 씨는 미국으로 가지 않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그건 다행이지만, 순순히 수락할 리가 없는데.”
겉모습은 고등학교 2학년이지만 김준성은 속에 구렁이 백 마리쯤 숨기고 있는 노련한 협상가였다. 그에게 말려 몇 차례 허탕을 친 적 있는 근태로서는 준성의 호의를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물론 요구 조건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미국 지부에 우리가 직접 의견을 전달해 주길 원하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그들과 긴밀한 사이라는 걸 알릴 수 있겠군요.”
“그럴 수 있겠지만 표면적인 이유고, 아마 우리 뒤에 숨어서 귀찮은 일을 떠넘기겠다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
좋은 말로 포장하고 그 뒷면에 이런 노림수가 있었을지 몰랐던 근태였다. 그것을 포착한 김기정이나 숨겨놓은 김준성이나 모두 대단하게 여겨졌다.
김기정은 대수롭지 않은 듯 편안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편의를 봐달라는 정도인데 별달리 어려운 것도 없으니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본부장님의 의견을 반박하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그들에게 끌려 다니는 느낌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괜찮습니다. 분명 그렇게 보일 수 있어도 이쪽에서도 이용할 건 다 이용하고 있으니까요. 이렇게 유대감을 쌓아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그들을 자연스럽게 우리 품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자존심이 강한 능력자들을 끌어모아 대한민국 A.O. 본부를 건설하고, 그들을 통제하는 사람이 바로 김기정이다. 발군의 능력을 지닌 그라면 능구렁이 같은 김준성을 끌어들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일 터.
걱정이 앞서 있던 근태는 김기정의 능력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부장님만 믿겠습니다.”
“노력해야죠. 우리나라는 우리 손으로 지켜야 합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김기정의 한마디에 근태가 힘을 실어 대답했다.
허공에 마주친 두 사람은 가볍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대한민국 A.O. 본부에서 미국 지부로 공문이 날아간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더 이상 김준성에게 접근하지 말아달라는 정중한 말투에 대런은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이거 완전히 손을 뗄 수밖에 없게 되었군.”
그의 시선이 앞에 서 있는 제시카에게 향했다. 전과 달리 부동자세로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공간 이동을 구사하는 능력자라고 했지?”
“네,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었어요.”
“탐나는데.”
대런이 제시카의 보고를 받고 주목한 점은 김준성이 공간 이동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는 점이다.
그것도 본인만이 아닌 타인까지 이동시킬 수 있는 매스 텔레포트(Mass Teleport)의 능력자.
미국은 영토가 넓다.
그곳을 몬스터의 공격에서 커버하기 위해서는 기동력이 중요하게 여겨졌는데, 김준성은 미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부분의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네, 필요한 모든 편의를 봐주고 들어주겠다는 것도 거절을 당했어요.”
“어렵군, 어려워. 김준성의 가치를 대한민국 A.O.에서도 알아차린 것 같고, 이대로 접근하기에는 여러모로 걸리는데.”
이 정도 수준에 왔으면 손을 떼고 포기해야 함이 옳았지만, 공간 이동 능력자라는 것은 공문을 무시하고서라도 접근하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어려울 거예요.”
“직접 본 네가 그렇게 말을 하니 그렇겠지. 흐음, 어떻게 한다, 본국에 도움을 요청해야 하나.”
하지만 미국이 강대국이라고 해도 대한민국에서 발휘할 수 있는 영향력은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대한민국 A.O. 본부에서 공문을 보낸 만큼 개별적인 접촉을 할 경우 연맹에 제소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지부장님, 제가 할게요. 이곳에 남아서 그를 설득하겠어요.”
“네가?”
“네, 이미 두 번 얼굴을 마주했고, 끝맺음도 나쁘지 않았어요. 우선 몇 차례 더 보면서 친분을 다지고 어떤 사람인지 확실하게 파악하겠어요.”
“흠, 그렇게 하기에는 네가 너무 고급 인력인데.”
제시카는 미국 A.O. 본부에서도 애지중지하는 재원이다. 진실의 눈은 모든 첩보에서 정보를 파악해 낼 수 있는 만능 키와도 같았기에 오랫동안 대한민국에 머무는 것을 상부에서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심문은 영상으로도 충분해요.”
미리 생각해 둔 것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대답이었다. 그녀의 말에 허점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대런은 굳이 남으려는 모습에서 강한 위화감을 느꼈다.
“왜 그에게 공을 들이는 건가?”
“그건…….”
“이유를 말하지 않으면 남도록 조치를 취해줄 수 없다.”
말끝을 흐리는 제시카를 보며 대런이 단호하게 말했다. 한숨을 푹 내쉰 그녀는 자신이 생각한 바를 털어놓았다.
“공간 이동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하지만, 어쩌면 그는…… 멀티 어빌리티(Multi-Ability)의 소유자일지도 몰라요.”
“머, 멀티 어빌리티라고?”
찢어질 듯 크게 뜨인 대런의 눈. 지금 그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려주는 부분이었다.
멀티 어빌리티는 세계에서도 몇 명밖에 없는 희귀한 능력자들이다. 한 사람이 여러 개의 능력을 보유한 그들은 다양한 방면에서 작전을 수행할 수 있고, 활용 폭이 넓어서 몇 명의 능력자보다 더 유용했다.
아직 고등학교 2학년인 김준성이 멀티 어빌리티의 소유자일 수 있다니.
“즈, 증거는?”
“아직 추측일 뿐이에요. 차근차근 다가가며 알아볼 생각이에요.”
“……확실히 멀티 어빌리티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포섭을 해야겠지. 알겠다, 내가 상부에 보고를 올릴 테니 이곳에 남아서 그와 친분을 쌓도록. 대한민국보다 본국이 해줄 수 있는 게 더 많을 테니까.”
“알겠어요.”
전폭적인 협력을 약속받자 제시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대런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
‘설마? 아니겠지.’
제시카는 미국 A.O.에서도 도도하기로 이름 높은 여인. 자존감이 대단해서 웬만한 남자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철벽이었다.
그런 그녀가 사적인 감정으로 남겠다는 말을 했을 리 없다.
‘더군다나 고등학생을 상대로 말이지.’
객관적인 사실을 열거한 대런은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끼며 한시름 놓았다.
정작 준성이 멀티 어빌리티 소유자일 경우는 생각지 못한 채.
☆ ☆ ☆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지만, 변함없이 흘러가는 학교생활은 평탄함 그 자체였다.
기말고사가 끝난 뒤 본격적으로 1학기가 끝나가면서 운동회가 예약되었는데, 준성의 반에서도 교탁 앞에 나선 반장이 각 종목에 참여할 사람들을 선발하기 바빴다.
“그럼 발야구에는 이나랑 세희가 들어가고…….”
1학년 때부터 발군의 운동 능력을 보인 이나는 반 여자들의 에이스였다.
소프트볼에서 일으킨 사건부터 시작하여, 여자의 몸으로 축구까지 무리 없이 소화해 내는 능력은 남자와 견주어도 뒤처지지 않았다.
세희 또한 두각을 드러내지 않지만 우아하면서 날랜 몸놀림을 보였다.
정예 멤버가 참여해야 하는 발야구에서 반드시 필요한 인원이었다.
둘 모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기에 인원 구성을 하는 것은 쉬웠다.
문제는 여자들이 모두 합의를 본 뒤 남자들 종목을 선정할 때 벌어졌다.
“축구는…….”
“김준성!”
“농구는…….”
“김준성!”
“이, 이어달리기는…….”
“김준성!”
남자 학우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준성의 이름을 외쳤던 것이다.
양손의 꽃을 쥐고도 만족하지 못하는 천하의 빌어먹을 바람둥이 놈!
그것이 현재 학급 내 남자 학우들이 평가하는 준성이었고, 그 여파는 열등감이 폭발하는 학교 내 남학생 전체로 빠르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남자 학우들이 그를 추천한 것은 뛰어난 운동 능력 때문이 아니라 모든 종목에 참여시켜서 한 번 망신을 당해보라는 순수한 악의의 산물이었다.
“이거 참.”
어린아이의 장난과도 같은 그들의 행동에 준성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것이 도발하는 것처럼 보여서였을까.
결과적으로 남자 학우들의 전투력을 타오르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한 번 죽어보라지!’
축구, 농구를 비롯하여 이어달리기, 줄다리기 등 수많은 종목에 참여하게 되어 당일 녹초가 되고, 빌빌거릴 모습을 생각하며 모두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음,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네.”
운동 종목 선정 후, 하굣길에 준성은 다소 곤란함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곁에 서서 걷고 있던 이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이상한 점이라도 있어요?”
“그냥, 이렇게 평화롭게 운동회에 참여해도 되는가 싶어서.”
어린 시절 부모를 잃었던 준성에게 운동회는 유쾌하지 않은 날이었다. 부모들이 삼삼오오 김밥과 도시락을 싸올 때면 그는 언제나 구석으로 숨어들어서 빵과 우유로 식사를 대신했다.
이제 더 이상 그럴 필요는 없지만, 그렇게 싫었던 운동회를 아무렇지 않게 즐길 수 있게 되었으니 어색한 기분이 드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준은 그럴 자격이 있어요.”
“잘 모르겠다, 이 세계는 점점 몬스터의 위협에 노출되고 있는데 나 몰라라 하고 이렇게 즐길 걸 다 즐기는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준.”
자책 섞인 준성의 목소리에 이나의 부드러운 손이 그의 손을 감쌌다.
“준은 그럴 자격이 있어요. 누구보다 이전 세계에서 열심히 싸웠잖아요? 대륙을 위기에서 구해내고 평화를 유지한 준은 좀 더 편하게 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건 머리가 나쁘고 눈치도 없는 내가 장담할 수 있어요.”
“그럴까.”
“물론이죠!”
확신이 담긴 목소리에 준성은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이나 덕분에 많은 위로가 되었어.”
“히히, 저밖에 없죠? 준이 아무리 힘들고 외로워도 그 곁에 있는 건 저밖에 없다니까요.”
“하하!”
“좀 더 보듬어줘요, 준.”
그러면서 은근슬쩍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대려고 했지만 그 행동을 가로막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세희의 음성이었다.
“머리가 나쁘고 눈치가 없는 게 맞는 것 같네. 우리 이나는 사람들이 많이 보는 곳에서 준성이 난감하게 무슨 행동을 하는 걸까나?”
“……칫!”
절묘하게 틈을 파고드니, 표정을 와락 일그러뜨린 이나가 짧게 혀를 차며 물러났다.
이미 행동을 완수했다면 모르겠지만 하던 도중에 뻔뻔하게 지속할 만큼은 되지 못했다.
엉거주춤 물러나는 이나를 자연스럽게 제친 세희가 준성에게 말했다.
“그렇다고 이나 말이 틀린 건 아니에요. 준성은 우리 세계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이곳으로 다시 돌아온 지 이제 일 년도 되지 않았어요.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준성이 다시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는 없다고 봐요. 우리가 움직이지 않아도 이미 세계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는 것 보세요. 그저 지금 현실을 즐기세요.”
“현실을 즐기는 것, 나쁘지 않네.”
“우리가 있고, 엘리엔 님이 있잖아요?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짐이 있으면 우리에게 나눠주세요.”
“알았어, 고마워, 세희야.”
“뭘요, 부인으로서 당연한 내조인데.”
자연스럽게 준성에게 팔짱을 낀 세희가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이나는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어 반대쪽 팔을 선점하며 입술을 삐죽였다.
“쳇!”
판은 자신이 벌였는데 돈을 따가는 것은 다른 사람이다.
결국 세희 좋은 일만 해줬다는 생각에 이나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남자 학우들의 열렬한 질투 속에 운동회가 개최되었다.
그 기간 동안 질투라는 에너지원으로 엄청난 융단 폭격으로 농구 예선전을 훌륭하게 통과했다.
그리고 남자 학우들은 모종의 합의를 맺었는데, 바로 결승전이 열리는 운동회 당일, 준성을 선발 선수로 내보내겠다는 말이었다.
‘망신이나 당하라지.’
‘어디 한번 굴러봐라.’
‘솔로 만세! 커플 저주!’
“하하.”
졸지에 죽일 놈이 되어 온갖 흉흉한 눈길을 받은 준성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열렬한 함성을 받으며 본격적인 운동회의 시작을 알렸다.
학생들이 즐기는 운동회에서 마법을 사용할 만큼 준성은 막돼먹지 않았다. 그렇다고 신체적인 능력의 이점을 포기할 만큼 바보도 아니었다.
점프 볼 이후, 곧장 반 학우에게 패스를 건네받은 준성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살벌한 눈길에 침음을 흘렸다.
“으음.”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몸통 박치기를 해도 이상치 않아 보였다. 그만큼 그들이 보여주는 기세는 살벌함 그 자체였다. 곳곳에서 풍겨오는 땀 냄새 또한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몸싸움은 사양이지.’
학교생활을 즐기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죽자 살자 뛰는 코트 안에서 땀 냄새를 풍기는 반 학우들과 부대끼는 것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이쯤이면.’
중앙선 부근에서 공을 들고 거리를 가늠하던 준성은 그대로 슛을 날렸다.
철썩!
“…….”
순간 주변은 정적에 휩싸였다. 코트 중앙 부근에서 한 슛이 깨끗하게 골망을 가른 것이다.
이후에도 준성은 수비에 집중하면서 공을 빼앗으면 중앙선 부근에서 가리지 않고 슛을 날렸다.
그럴 때마다 족족 골인이 되니, 상대하는 입장에서도, 한번 당해보라는 심정으로 임했던 반 학우들조차도 어안이 벙벙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꺄아! 준이 최고야!”
“준성 파이팅!”
적극적으로 달리지도 않고, 친구들과 부대끼지 않아도 준성의 활약은 당연 최고였다.
이에 반응한 것은 세희와 이나였고, 그중에서도 이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방 뛰면서 연신 응원을 했다.
그것은 가뜩이나 준성의 활약에 일그러져 있던 남학생들의 분노에 불을 지피는 결과를 낳았다.
“……죽인다!”
“죽여 버리겠어!”
“하하!”
눈에 불을 켜고 바라보는 모습에서 준성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농구에서 대승을 거둔 뒤, 축구 멤버로 합류한 준성은 최전방 스트라이커의 자리를 배정받았다.
열심히 고립되어 망신을 당해보라는 뜻.
하지만 경기가 시작되기 무섭게 중앙에 합류한 준성은 혼자만의 능력으로 공을 따내고 골을 만들어냈다.
무서운 기세로 전반에만 해트 트릭을 기록하고, 후반에 두 골을 더 넣어 도합 다섯 골을 혼자 넣는 기염을 토해내며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저 녀석은 못하는 게 뭐야?”
“전교 1등에 바람둥이에, 제길!”
“세상은 불공평하다, 크흑!”
분노에 불타올라 있던 남자 학우들은 기어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것은 남자가 되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준성의 기량에 대한 인정.
어떻게든 훼방을 놓으려고 했지만 기어이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니 별수 없었다.
분노와 절망에 휩싸인 남자 학우들은 그 후에 줄다리기와 이어달리기에서 우승을 거두며 학교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종목을 석권하는 데 성공했지만, 남자 학우들의 가슴속에서는 피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 ☆
“…….”
거리를 홀로 걷고 있는 엘리엔의 머릿속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이 세상으로 오기 위해 차원 이동을 감행한 뒤, 자신에게 일어나는 변화는 지독할 정도로 오염된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전부라고 여겼다.
하지만 준성과 세희, 이나를 만나고 평화로운 나날을 영위하면서 어느 순간 비틀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자신의 신체 내부였다.
웅혼한 대자연의 마나가 서서히 어그러지기 시작하더니, 빠른 속도로 소실된 것이다. 그것을 허비하지 않고자 준성에게 마나 이전을 통해 몸을 회복시켰지만, 소실된 마나는 회복되지 않고 그대로 소멸했다.
그 후, 한동안 정체기를 거칠 때만 해도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몬스터와 격전을 벌인 뒤, 다시 한 번 변화가 일어났다.
어떻게든 혼자서 해결하기 위해 힘을 썼지만 변화는 점점 빨라지고 막을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있었다.
숨기고자 해도 준성을 비롯해 세희와 이나도 이미 눈치를 챘다. 해결할 방법이 생각나지도 않고, 도움을 청하자니, 그들에게 걱정만 안겨주는 것 같아 엘리엔은 밖으로 나와 걸음을 옮겼다.
왜냐하면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반응이 이 세계에서 벌어질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태양이 지면서 붉은 노을이 드리우고, 자연의 향기를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던 엘리엔이 걸음을 멈춘 것은 서울 외곽 인적이 드문 공터였다.
사람의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 없는 곳에 십여 명의 인원이 나타나 그녀의 주위를 감쌌다.
“엘리엔, 맞나?”
“누구지?”
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그들을 바라보는 엘리엔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좋은 의도를 가졌다고 보기 힘든 이들이었다.
“그 이야기는 사로잡은 다음에 하도록 하지.”
이죽거리며 검을 뽑아 든 그들에게서 범상치 않은 기세가 발산되었다.
“감히…….”
콰콰콰콰!
심란하던 엘리엔의 두 눈에 분노가 가득 차며 기세가 주변 공간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 ☆ ☆
대한민국 A.O. 본부는 최첨단 시설과 능력자 몇몇이 제작한 아티팩트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에 거미줄처럼 촘촘한 감시망을 형성했다.
이 감시망은 일정한 힘이 발동되면 즉각 대한민국 A.O. 서울 본부 혹은 각 지방 지부로 알람을 울리는데, 그 힘의 파동에 따라 단계별로 나뉜다.
몬스터의 등급을 구분하는 것도 힘의 파동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달라지며, 얼마나 강한 힘이 동반되는지 파악하고 주변 일대의 지형을 파악한 뒤 피난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울리는 알람은…… 일반적인 것과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강력한 힘의 충돌입니다! 파괴력은 A-에서 A급입니다.”
“전쟁이라도 벌어지는 거야? 어서 보고로 올려!”
연달아 폭사하는 충돌에 서울 본부는 비상사태로 돌입했다. 그리고 즉각 본부장인 김기정에게 보고되었다.
“A급 충돌이라니.”
대한민국에 펼쳐진 감시망은 몬스터의 등장을 감시하기 위함도 있지만 능력자 간의 충돌을 최대한 억제하기 위함도 있다.
인적이 드문 산골에서 충돌하면 손을 쓸 수 없지만 웬만한 사람이 모인 도시에서 충돌을 일으킬 경우 감시망에 걸려든다.
그리고 지금의 경우가 그러했다.
하지만 A급 충돌이 벌어진 경우는 결코 없었다.
쓰슷! 쓰스슷!
표정을 굳힌 김기정은 즉시 능력을 발현하였다. 그의 능력 중 하나를 발휘하여 충돌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를 보기 위함이다.
모든 것을 꿰뚫는 천리안.
의지가 닿는 모든 곳을 앞마당처럼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은 그가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능력자로 올라서도록 만들어준 원동력이다.
충돌의 여파 속으로 김기정의 의지가 개입하고, 의지가 발현되어 막 상황의 정보가 눈에 들어오려는 순간 머릿속을 강타하는 강렬한 두통이 엄습했다.
키잉!
“큭! 이, 이건…….”
순간 아찔해지는 경험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이를 꽉 문 김기정은 찰나의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을 보고 즉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장소는 광명시 부근. 즉시 정예 1대로 인원을 꾸립니다. 내가 직접 이끌 겁니다.”
“예!”
비상사태로 소집되기 무섭게 곳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능력자들이 본부로 모여들었다.
김기정이 소집한 정예 1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뛰어난 능력자로 구성된 부대다.
총 서른 명으로 이루어진 이들은 상위 10퍼센트의 실력자이자 현 대한민국 A.O. 본부를 평가하는 힘의 척도가 된다.
갑작스러운 상황이었기에 모든 인원이 모이지 않았지만 발 빠른 김기정의 대처로 스무 명이 모였고, 열 명의 인원이 뒤이어 합류하기 위해 이동을 시작했다.
“최대한 빨리 가야 한다.”
짧은 순간 목격한 광경을 떠올리며 김기정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 ☆ ☆
운동회를 끝내고 상쾌한 기분으로 하교하던 준성 일행이 이상한 흐름을 감지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삐삐삑! 삐삑!
감시망을 이용한 몬스터 예측기가 요란한 소리로 울려 퍼지며 힘을 측정했다.
그리고 나온 것이 A등급.
“이건, 리엔의 기운이야.”
기계를 빤히 바라보던 준성의 기운이 차갑게 굳었다. 예측기는 감시망을 통해 몬스터의 힘을 전하며 힘의 크기를 측정한다. 그리고 기계 너머로 느껴지는 것은 다름 아닌 엘리엔의 것이다.
“세희, 이나! 날 따라와.”
“주, 준성아! 나는?”
조용히 옆을 따르던 미현이 외쳤지만 준성은 차갑게 고개를 저었다.
“넌 집에 가서 기다려라. 이건 장난이 아니라 실전이다.”
“나, 나도 잘할 수 있어!”
“이건 우리 일이니 해결하고 오도록 하겠다. 매스 텔레포트!”
세희와 이나가 좌우로 서기 무섭게 좌표 계산을 마친 준성은 마법을 시전했다.
먼 거리를 여러 명이 이동하는 것이기에 막대한 양의 마나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텔레포트를 마치고 눈앞의 시야가 확 트였을 때, 준성은 가슴속으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의 예상대로 충돌의 근원에는 엘리엔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주변으로 십여 명의 괴인이 맹렬한 기세로 몰아치는 중이었다.
‘이상하다.’
짧지만 대결을 지켜본 준성은 곧장 이상한 점을 파악했다.
그랜드 마스터에 대마법사의 경지에 오른 그녀였지만 흘러가는 상황은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검을 들고 괴인들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특유의 부드러움이나 반응 속도가 반 박자씩 늦었다. 그리고 그 틈을 파고드는 괴인들의 공격을 허용하니, 조금씩 상처가 늘어나고 있었다.
절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그랜드 마스터인 그녀가 온전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무언가 변고가 발생한 것임이 분명했다.
“이나!”
“네!”
준성의 외침과 동시에 검을 뽑아 든 이나의 신형이 섬전처럼 쇄도했다. 그리고 단숨에 괴인들의 진영을 반으로 갈라 버리며 엘리엔의 옆에 섰다.
그사이 준성과 세희는 블링크로 엘리엔의 옆으로 이동했다.
“리엔, 어떻게 된 겁니까.”
“으음.”
다급한 목소리로 물어보았지만 엘리엔은 침음을 흘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준성은 한눈에 그녀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것을 눈치챘다. 아마 내부에서 들끓는 마나를 안정시키는 것이 고작일 정도로 현재 상황이 좋지 못하리라. 준성의 시선이 세희에게 향했다.
“리엔을 보호하도록 해.”
“네, 조심하세요.”
온전한 힘을 발휘하지 못해도 그랜드 마스터인 엘리엔을 몰아붙인 괴인들이다. 아직 완전한 힘을 되찾지 못한 이나에게 벅찰 수 있었다.
준성이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니, 폭풍처럼 검을 휘몰아치며 괴인들을 밀어붙이는 이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뚜렷한 우위를 점하지 못했는데, 괴인 서너 명이 이나의 공세를 감당하는 사이, 다른 괴인들이 절묘하게 빈틈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정교한 그들의 협공에 이나는 단 한 명의 괴인도 쓰러뜨리지 못하고 헛되이 시간을 낭비해야만 했다.
주머니에서 작은 금 부스러기를 쥔 준성은 처음부터 제련제강의 마법을 펼쳤다.
“올 플리체.”
쐐액!
순식간에 공간을 격하고 날아간 금빛 화살이 괴인에게 날아들었다. 반사적으로 검을 든 괴인의 검에 푸른 기운이 피어났다.
까아앙! 쩌억!
괴인의 검은 견고했으나 제련제강의 마법을 견뎌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내 검이 부러지고 목을 향해 날아드는 순간, 다른 괴인의 검이 금빛 화살을 막아냈다.
쩌엉!
요란한 금속음과 함께 다른 검도 부러졌다. 하지만 힘을 잃은 금빛 화살도 금광과 함께 그대로 흩어졌다. 그 틈을 파고든 이나의 검이 괴인의 목을 베었다.
서걱!
날카로운 절삭음과 함께 이나가 검을 잃은 다른 괴인에게 달려들었지만 다른 괴인들의 개입으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뒤로 물러나 호흡을 고른 이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뭐, 뭐야, 저게…….”
목을 잃은 괴인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푸른 기류에 휩싸인 몸이 그대로 부서지며 허공에 흩어졌다.
파사사.
“이게 뭐죠?”
“침착해. 저들에게서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니까. 단지 정체를 알 수 없을 뿐이야. 지금처럼 상대하면 돼.”
“알았어요.”
고개를 끄덕인 이나가 괴인들을 몰아붙이고, 준성이 뒤에서 지원 마법으로 괴인들을 상대했다. 몇몇 이들이 후방을 담당하는 준성에게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
“준!”
깜짝 놀란 이나가 외쳤다. 10클래스의 경지를 이룩한 대마법사였지만, 이 세계에서는 아직 온전히 힘을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장 괴인의 검이 몸을 스치면 부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이한 현상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준성 바로 앞에 도달한 괴인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멎었던 것이다. 막 블링크를 시전하여 뒤로 물러난 준성의 시선이 괴인의 움직임을 멈춰 버린 곳으로 향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그곳에는 정예 1대를 대동한 김기정을 비롯한 능력자들이 서 있었다.
천리안으로 짧게나마 상황을 목격한 김기정은 자신보다 먼저 도착한 준성 일행을 보고 나직이 감탄했다.
분명 본부에서 상황 파악을 먼저 했을 텐데 자신들보다 한발 앞서 도착하여 전투를 벌이고 있는 그들의 행동력이 생각 이상이었다.
‘지금은 감탄할 때가 아니라 저자들이 누구인지 알아내야 한다.’
짧지만 이나를 상대하는 괴인들의 움직임은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체계적으로 역할을 배분하고 달려드는 모습에서 수십 년 동안 합을 맞춰온 느낌이 물씬 풍겼던 것이다.
‘신세를 지우고 마음의 빚을 얹는다.’
괴인들을 압도하고 있지만 우선 인간인지 몬스터인지 판단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적인 것이 확실하다면 대한민국의 수호를 위해서라도 제거해야 했다.
압도하고 있어도 협공에 고전하고 있었기에 합리적인 준성의 성격상 받아들일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뒤에 나온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거절하겠습니다.”
“무슨…….”
김기정이 뭐라 말을 하려던 순간, 변화는 일어났다.
“헬 파이어.”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를 느끼지 못한 준성이 근접전으로 전환하여 워 메이지 전투 스타일로 바꾸었던 것이다. 양손에 헬 파이어를 시전하자, 강렬한 열기가 주변 공기를 잠식해 나갔다.
‘광대처럼 재롱을 피울 생각은 없지만.’
엘리엔에게 손을 대려던 자들인 만큼 자신의 손으로 처단해야 했다. 그리고 아직 ‘이것’에 대한 정보가 알려져서는 곤란했다.
작은 태양처럼 붉은 화염의 구가 장착되는 순간, 번개처럼 달려들어 주먹을 휘둘렀다.
화르륵!
모든 것을 태워 버리는 헬 파이어를 단단히 응축한 힘은 재앙 덩어리 그 자체였다. 검을 들어 푸른 기운을 발산하려던 괴인은 헬 파이어의 열기에 검신이 녹는 것을 확인하고 뒤로 물러나려다가 그대로 녹아버렸다.
준성의 움직임이 괴인의 예상보다 훨씬 빨랐던 것이다.
“후방 엄호!”
“네!”
단숨에 헬 파이어로 괴인을 녹여 버린 준성은 이나에게 후방 엄호를 부탁한 뒤 질풍처럼 움직이며 괴인 사이를 누볐다. 헤이스트 중첩과 블링크 마법을 구사하는 준성의 움직임에 속수무책이었다.
그제야 상황이 불리하다는 것을 눈치챈 괴인들은 도망치려고 했지만 순식간에 여덟이 넘는 괴인을 처리한 준성은 다른 괴인들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헬 파이어 사이로 금빛 화살이 반짝이며 괴인의 등을 파고들었고, 준성이 달려들면서 그 괴인의 몸을 집어 든 뒤 그대로 공간이 갈라진 아공간으로 던져 넣었다.
그리고 능력자들이 형성한 포위망을 뚫기 위해 괴인들이 달려들자 준성이 외쳤다.
[도망쳐!]강력한 의지가 실린 외침을 듣는 순간, 능력자들이 분분이 비켜섰다. 그들이 범위 밖으로 벗어난 것을 본 준성은 손에 장착된 헬 파이어를 그대로 투척했다.
콰아아아앙!
번개처럼 날아간 헬 파이어는 남은 포위망을 뚫고자 뭉쳐 있던 괴인들을 향해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자욱한 연기와 함께 뒤집힌 땅에서 비산한 흙먼지가 주변을 뒤덮었다.
폭발 여파가 가셨을 때는 50미터가 넘는 크레이터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괴인의 흔적 몇 가지만 남아 있었다.
한 편의 재앙.
방금 전 헬 파이어는 한 인간의 무위가 얼마나 큰 재앙을 일으킬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괴인들을 모두 처리한 준성은 엘리엔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덧 검을 갈무리한 이나도 그의 곁에 서 있었다.
“리엔은?”
“마나는 안정시켰지만 상황은 좋지 않아요.”
부정적인 세희의 말에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준성이 둘을 차례대로 보며 말했다.
“돌아간다.”
세희와 이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준성은 그대로 매스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스팟!
새하얀 빛에 휩싸인 넷이 사라졌다.
“…….”
언제든지 개입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대한민국 A.O. 능력자들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보, 본부장, 대체 저자는 누구입니까?”
김기정을 보좌하는 인물이자, 대한민국 A.O. 본부의 2인자 역할을 하는 한소영이 경악한 표정으로 물었다.
짧은 순간이지만 준성이 보여줬던 압도적인 무위.
주변 공간을 압도하며 괴인들을 태워 버리는 모습은 기가 질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것은 다른 능력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대한민국에서 상위 10퍼센트에 속하는 그들은 그동안 지니고 있던 자존심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느낄 만큼 준성이 보여준 무위는 대단했다.
“…….”
하지만 김기정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준성의 무위에 놀라서?
맞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짧지만 압도적인 전투, 그 순간 드러난 사실들에 경악한 것이다.
“공간 이동과 속성계 능력, 그리고 신체 강화까지.”
괴인들을 처리할 때 준성이 보여준 것들이다.
이것 하나하나가 다른 성질의 능력에 속하며, 한 가지만 각성해도 능력자로 대접을 받으며 부족함 없는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멀티 어빌리티라니…….”
추측으로만 생각되던 다중 능력[Multi-Ability]에 김기정은 침음을 흘렸다.
☆ ☆ ☆
적어도 A등급 이상의 충돌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접한 제시카는 본부의 명령을 받아 곧장 해당 장소로 출동했다.
광명시 인근의 충돌 장소에 막 도착할 무렵, 그녀를 비롯한 미국의 능력자 세 명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대한민국 A.O. 본부장이자,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능력자인 김기정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그 뒤에 서 있는 것은 정예 1대로 제시카가 이끄는 능력자로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더 이상 갈 수 없습니다, 제시카 윤.”
목소리는 정중했지만 그 이면에는 잔뜩 경계하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
진실의 눈으로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제시카가 물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말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런…….”
“이곳은 대한민국입니다. 미국이 대한민국과 혈맹이라고 하나 연맹에서 그 입장은 동일하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요?”
“…….”
더 파고들고자 했지만 사전에 말을 차단하는 기정의 행동에 제시카는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입술을 오물거리던 그녀는 조용히 압박하는 김기정을 힐끗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알겠어요. 물러나도록 할게요.”
“현명한 판단, 감사합니다.”
“무운이 깃들길 빌겠어요.”
기분이 좋지 않았던 그녀는 고개를 홱 돌리며 그대로 자리를 벗어났다.
그사이 머릿속으로는 저 멀리 보이던 전투의 흔적을 재현하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어.’
텔레포트로 이동을 마친 준성은 즉시 엘리엔을 은신처로 옮겼다.
“준!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엘리엔 님이 대체 왜…….”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은 핏기 하나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고 전신의 마나가 거세게 흔들리면서 이곳저곳 날뛰고 있었다.
명백한 마나 폭주. 그랜드 마스터이자 자연의 종족인 엘프가 마나 폭주를 겪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믿을 수 없었던 이나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굳은 표정으로 엘리엔의 몸 상태를 살핀 준성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 폭주야. 그것도 아주 지독한 마나 폭주. 언제부터였습니까.”
“…….”
하지만 엘리엔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준성이 재차 재촉했다.
“대답해 주세요, 리엔.”
“마나 폭주가 맞다.”
“저런!”
엘리엔의 시인에 이나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고, 세희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물들었다. 마나 폭주는 초인적인 자제력을 가지고 있어도 막아내기 힘든 재앙이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건 나도…….”
말조차 잇는 것이 힘들었던 엘리엔이 숨을 힘겹게 몰아쉬었다. 그녀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준성이 재빨리 귀를 입에 대며 말을 듣고자 했지만,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어떻게 하죠?”
“우선 상태를 살피는 수밖에 없어.”
잔뜩 굳은 준성이 정신을 잃은 엘리엔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미국 지부의 인원을 돌려보낸 김기정은 장소를 조사하고 있는 한소영에게 다가갔다.
“알아낸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현장에서 무언가를 알아내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괴인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무위를 펼치던 준성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는 괴인을 제압할 힘이 있었음에도 시종일관 밀리는 모습을 보였고, 자신들이 나타나기 무섭게 강렬한 불꽃으로 괴인들을 모조리 소멸시켰다.
‘혹시?’
자신들이 괴인에 대해 알아차리는 것을 경계해서가 아닐까?
‘억측이겠지.’
막상 상대하던 그들조차도 제대로 모르는 눈치였는데 사전에 차단하는 짓을 할 리 없었다. 하지만 준성의 과잉 대응은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고 있었다.
“본부장님.”
상념에 빠져 있던 그를 현실로 끄집어낸 것은 한소영이었다. 의아함이 담긴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고 있었다.
“말씀하세요.”
“대체 그 남자는 누구였나요?”
“그건…….”
“본부장님이 이렇게 말끝을 흐리는 걸 보면 그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말씀해 주세요, 저도 대한민국 A.O. 부본부장이니 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
김기정은 당차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한소영을 바라보았다. 부본부장을 맡아 자신을 헌신적으로 보좌해 주는 그녀는 믿을 만한 인물이었다.
“그를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간략하게 준성을 만나게 된 경위에 대해 설명했다.
사소한 오해부터 시작하여 서로 밀고 당기는 신경전까지. 미국에서 그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영입을 시도했고, 몬스터 처리에 도움을 주기로 한 것까지 설명하자 한소영이 나직이 탄성을 흘렸다.
“아아, 몬스터 토벌에 도움을 주기로 한 것이 그 사람이었군요.”
“맞습니다.”
“본부장님의 행동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의 정체에 대해서 너무 의구심을 갖는 것도 좋지 않다고 봐요.”
“좋지 않다?”
“네, 어차피 그가 대한민국에 있고, 우리와 협력 체제를 유지한다면 차근차근 자신의 밑천이 드러날 수밖에 없어요. 우리의 시야에 들어와 있으니 언젠가 모든 게 드러날 거예요. 지금 조급함을 느끼고 섣부른 움직임을 보이는 건 빌미를 제공할 뿐이라고 봐요.”
“소영 씨의 말이 맞습니다. 이거, 제가 오늘 한 수 배우네요.”
“배우긴요, 부본부장이 되어 본부장님을 보좌하는 건 당연한 건데.”
쑥스러운 듯 웃음을 흘린 한소영이 이내 표정을 고치며 말을 이어나갔다.
“대신 그들에 관한 관리는 철저하게 해야겠네요. 제시카 윤이라니, 미국에서도 애지중지하는 능력자가 이곳에 있다는 건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는 말이 되네요.”
“맞습니다. 그 부분을 고려해야죠.”
“그런데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해서 어쩌죠?”
“아마 그는 알고 있을 겁니다. 우리가 알아낸 것이 없으니 나중에 따로 찾아가 한번 떠보도록 하죠.”
“그 자리에 저도 꼭 데려가 주세요. 고등학생이 멀티 어빌리티를 보유하게 된 이유에 대해 꼭 묻고 싶으니까요.”
“알겠습니다, 노력하지요.”
농담 섞인 한소영의 말에 김기정도 유쾌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대한민국 A.O. 정예 1대는 아무런 수확도 거두지 못하고 자리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아무도 접근할 수 없도록 결계를 친 뒤 물러났다. 오늘은 약식 조사를 마쳤을 뿐이지만 날이 지나면 좀 더 전문적인 사람들이 파견될 것이다.
치열한 격전의 흔적이 어둠에 묻혀 사라지고, 앞을 분간하기 힘든 짙은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 아무도 없는 텅 빈 대지 위로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스슷!
“이런, 아주 꼴사납게 당해 버렸군.”
음산한 분위기와 달리 목소리는 유쾌했다. 인영은 고개를 돌려 좌우를 둘러보다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검은 기류가 움직임을 보이며 조금씩 강렬한 회전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휘류우!
작지만 강렬한 바람이 대지를 휩쓸자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어둠의 꿈틀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하나둘씩 인영을 이루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나, 둘, 셋…… 열다섯.
도합 열다섯의 인영이 형체를 갖추며 질서 정연하게 줄을 섰다.
그들은 준성에게 당했던 괴인들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검은 인영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지더니 의아한 음성을 내뱉었다.
“하나가 부족한데?”
오늘 일에 동원한 숫자는 열여섯.
하지만 부활에 응한 것은 열다섯에 지나지 않았다.
왜 하나가 부족한 걸까.
의아함을 느낀 검은 인영은 연신 검은 기류를 일으켰지만 남은 하나는 반응을 하지 않았다.
“신기해! 하나는 완전히 소멸했다는 건가? 내 부름에 응하지 않다니.”
감탄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검은 인영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리고 괴인들을 향해 손을 뻗어 조금 전 있었던 일들을 모조리 읽어들였다.
“이곳에 엘프가 있을 줄이야. 아주 재미있는 정보야. 호오, 이 녀석들이 당한 건 새로운 힘의 운용인가? 아주 흥미로운걸.”
연신 감탄을 흘리던 검은 인영은 더 이상 필요한 정보가 없음을 깨닫고 아쉬운 탄식을 내뱉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남은 하나를 찾다가 허탕을 치고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괴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엘프도 알아내고, 새로운 힘의 운용도 알았으니 손해는 아니로군. 그럼 돌아가자.”
스스슷!
그와 동시에 검은 인영의 몸이 흐릿해지며 그대로 자취를 감추었고, 열다섯 명의 괴인 또한 연기처럼 흐려지며 종적을 감췄다.
조금 전 북적거리던 대지는 다시 격전이 벌어진 그 형태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 ☆ ☆
정신을 잃은 엘리엔은 쉽게 돌아오지 못했다. 준성이 갖은 방법을 동원했지만 거세게 날뛰는 마나 폭주를 제어하는 것이 고작일 뿐, 어떠한 차도도 보이지 않았다.
“준성이 다스릴 수 있는 문제 아닌가요?”
10클래스 마법사이자,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준성의 의지를 떠올린 세희의 질문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부정적인 것이었다.
“엘프와 인간의 몸 구성 자체가 달라. 내가 마나 폭주를 인도하면 더 큰 폭주가 일어날 수 있어.”
“그런…….”
“방법이 없어요, 준?”
“현상 유지가 최선이야. 우선 리엔에게 자초지종을 들어야 해. 일반적인 마나 폭주가 아니면 해결책은 다른 곳에 있을 테니까.”
그랜드 마스터가 마나 폭주에 걸릴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미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초인인 그들은 마나를 온전히 자신의 의지 아래 둘 수 있기에 스스로 마나 폭주를 일으키지 않는 한 마나가 제멋대로 날뛸 가능성은 전무했던 것이다.
그래서 준성은 엘리엔이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좀 더 자세한 연유를 파악한다면 분명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엘리엔의 마나는 인간들이 지닌 것과 비교해서는 곤란해.”
자연의 종족인 엘프였고, 그들이 받아들이는 마나는 그 무엇보다 순수하고 맑았다. 그것을 차곡차곡 쌓아 극도로 응축시킨 마나는 티 없이 깨끗하며 웅혼했다. 아무리 준성이라고 하나 억지로 운용하는 건 굉장히 위험했다.
“웨이크업으로 깨우면 안 될까요?”
세희가 의견을 내봤지만 준성은 고개를 저었다.
“정신을 잃은 건 자기방어적인 차원이 커. 이걸 억지로 깨우려들면 탈이 날 수밖에 없어. 리엔이 스스로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주, 준! 이거 봐요.”
그때, 이나에게서 다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고개를 돌린 준성은 멈칫했다. 그리고 엘리엔에게서 벌어지는 현상을 보고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이건…….”
에메랄드처럼 아름다운 그녀의 녹빛 머리가…… 부서지고 있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장면은 틀림없는 소멸의 과정이었다.
엘리엔은 소멸하고 있었다.
이 지구에서.
[5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