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160)
5권
제40장 분열
소멸.
그것이 가져다주는 여파는 결코 작지 않았다.
머리끝부터 조금씩 소멸되는 엘리엔의 모습을 보며 모두 놀랐지만 준성이 느낀 감정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는 소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던 것이다.
“왜 리엔이…….”
“준! 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엘리엔이 소멸되는 모습은 충격적이지만 부동심에 가까운 준성의 기운이 거세게 흔들리는 것을 보며 세희와 이나의 불안감이 덩달아 커졌다.
대체 무슨 현상이기에 이런 반응을 보인단 말인가.
“지금은 말해줄 수 없어. 리엔이 정신을 차려야 해. 확실하게 정신을 차리고 모든 사실을 알게 되어 내 생각이 사실이란 게 드러날 때…… 그때 다시 말할게.”
말을 하는 준성의 얼굴은 너무나 슬퍼 보였다.
엘리엔의 소멸은 아주 조금씩 이루어졌다.
허리 부근까지 내려오던 녹빛 머리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부서졌는데, 그 양이 적다고 해도 하나씩 더해 나갈 때마다 만만치 않은 양이 소멸되었다.
그리고 어깨에 닿을 만큼 소멸이 진행되었을 때, 엘리엔이 정신을 차렸다.
깨어나기 무섭게 모든 사람이 모였다.
“어떻게 된 겁니까?”
“…….”
무거운 준성의 물음에 엘리엔은 침묵을 지켰다. 그 모습에 모두 답답함을 느꼈지만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고 하나 가장 답답함을 느꼈을 것은 그녀란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대답해 주세요.”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것뿐.”
“그로 인해 우리 모두가 걱정하고 있는데 말이죠?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우린 더 이상 남이 아니잖아요!”
“미안.”
“이나야, 그만.”
화를 내는 것을 제지하니, 멈칫한 이나는 가볍게 숨을 몰아쉬더니 엘리엔에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주세요. 우리는 언제든지 엘리엔 님의 고통을 함께 짊어질 각오가 되어 있단걸요. 전 너무 섭섭해요. 하지만 부담을 줄 수 없으니 이대로 참을게요.”
“고마워.”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일단락 지은 모습을 보던 준성이 엘리엔의 두 눈을 응시하며 질문을 던졌다.
잠시 머뭇거리던 엘리엔은 한숨을 푹 내쉬며 그동안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차원 이동을 하고 조금씩 마나가 소실되던 일, 그리고 준성의 몸을 회복시키면서 정체 상태에 접어들다가 다시 마나 소실이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렸다.
그랜드 마스터인 엘리엔의 강력한 의지로 억누르고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괴인의 습격으로 힘을 운용하면서 몸의 균형이 완전히 어긋난 것까지.
어느 것 하나 충격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
그녀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장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특히 세희와 이나의 표정이 어두웠다.
엘리엔의 이상 상태를 알아차렸지만 심각하지 않다고 여기며 투닥거리던 자신의 모습이 생각난 것이다.
“리엔, 지금 소멸 상태에 접어들었다는 걸 알고 있습니까?”
“소멸이라면?”
“생각하는 그 소멸이 맞습니다. 리엔은 지금 이 세계에 ‘불순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몸이 조금씩 소멸되고 있습니다.”
준성의 말을 들은 엘리엔은 자신의 긴 머리칼이 어깨에 닿을 만큼 짧아진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몸의 균형 또한 처참할 정도로 망가져 있는 것도 느꼈다.
“차원 이동이란 것은 굉장히 조건이 까다롭습니다. 저나 세희, 이나가 육체를 버리고 이동한 것도 온전한 육체를 가지고 이동하는 것보다 영혼 상태에서 이동하는 것이 세계를 속이는 데 더 쉬워서입니다. 리엔은 신검의 힘으로 차원 이동을 했기에 세계의 입장에서 명백한 불순물에 속합니다. 그리고 불순물을 배출하기 위해 조금씩 리엔의 힘을 갉아먹었던 것입니다.”
“…….”
그의 설명에 장내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설마하니 엘리엔에게 일어난 현상이 이 정도로 심각할 줄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세희의 표정이 이내 밝아졌다. 이런 부분을 지적할 수 있다면 다른 방책도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준성, 그럼 방법이 있는 건가요?”
“없어.”
“그, 그럼 어떻게 이 사실들을…….”
“너희를 데리고 가기 위해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한 적이 있어. 내 수준으로도 짧은 시간 들어갈 수밖에 없었지만 차원 이동에 필요한 자격 요건 정도는 알 수 있었지. 물론 그걸 얕봤기에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해 고생을 했지만.”
10클래스였던 준성조차 소멸의 위기를 겪을 만큼 차원 이동은 가벼운 사안이 아니었다.
“그럼 방법이 없는 거예요?”
“찾아봐야 돼. 다행이라면 리엔이 그랜드 마스터의 육체와 한계를 초월한 정신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야. 소멸이 일어나더라도 세계의 의지가 개입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존재해. 그 시간 동안 해결책을 찾아야지.”
“꼭 찾았으면 좋겠어요!”
“최선을 다할게.”
간절한 바람이 담긴 외침에 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흔들리는 엘리엔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날 믿고 임해주십시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꼭 세계의 의지를 지워 버릴 테니.”
흔들리던 엘리엔의 눈동자에 초점이 맺히고 굳은 의지가 서렸다. 입을 꾹 다문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믿겠다.”
☆ ☆ ☆
쾅!
얼굴 가득 분노가 서린 제시카는 손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으로 정면에 모습을 드러낸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게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다. 더 이상 우리가 개입할 권한이 없다.”
“다른 것도 아닌 A등급 충돌이었어요! 그것에 대한 정보를 달라고 하는데 개입할 권한이 없다? 지금 날 무시하는 건가요?”
대한민국에 남아 지부의 일과 능력자 김준성의 포섭 임무를 맡은 제시카는 얼마 전 일어난 심상치 않은 충돌을 감추려는 대런에게 분노를 토했다.
미국 A.O. 본부의 중책을 맡은 그라면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여겼지만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진실의 눈에는 모든 사실이 가감 없이 전해졌다.
대런은 어느 정도 사건의 윤곽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제시카에게 전달하지 않고 있었다.
“본부의 방침이다, 제시카 윤. 경거망동 말고 냉정하게 생각하도록.”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하란 말로 가만히 있겠느냐고요! 대체 그날 있었던 충돌은 어떤 거죠? 몬스터 외 다른 존재가 있는 건가요?”
“유도 질문은 삼가도록. 본부의 방침은 동일하다. 이번 충돌은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것으로, 더 이상 알아낼 필요는 없다. 그러니 임무에 충실하도록.”
“…….”
그 말을 끝으로 대화를 종료하고 대런의 모습이 사라지자 제시카의 표정이 한껏 찌푸려졌다. 아무런 정보도 공개하지 않고 임무에 충실하라는 것 자체가 기분 나빴다.
“좋아, 우선은 따라주겠어. 하지만 이대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
입술을 꼭 깨문 제시카는 분노를 삭이고자 눈을 감았다.
☆ ☆ ☆
“가장 확률이 높은 것은 육체 재구성입니다.”
준성이 찾아낸 방법은 엘리엔의 몸을 지구 소속의 것으로 다시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미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그녀의 육체는 이상적인 형태였지만 지구가 아닌 타 차원의 것이기에 세계의 의지에 의해 ‘불순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 준성의 생각이었다.
“육체 재구성으로 모든 게 해결되나요?”
의아함이 담긴 이나의 물음에 준성이 고개를 저었다.
“부족하다. 육체 재구성을 한 뒤, 리엔의 영혼을 타 차원의 것이 아닌 이곳의 것으로 소속을 바꿔야 해. 그렇지 않으면 기껏 재구성한 육체도 불순물로 인식되고 소멸의 길을 걷게 될 거다.”
“그러니까 영혼의 소속을 바꾸기 위한 과정이란 뜻이네요.”
“세희 말이 맞아.”
“가능성이 있겠어요!”
준성의 긍정에 세희는 밝은 표정을 지었다. 이미 이상적인 엘리엔의 육체를 재구성하는 것은 달리 보면 ‘하는 시늉’에 지나지 않았다.
단지 차원의 소속을 바꾸는 것일 뿐,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만으로 효과를 볼 수 있다면 엘리엔에게 닥친 위기를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엘리엔도 준성의 발상에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이어진 세희의 질문은 의표를 찔렀다.
“하지만 육체 재구성에 필요한 마나는 어떻게 동원하죠?”
조금씩 소실된 엘리엔의 마나는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수준이었고, 준성이나 세희, 이나도 육체 재구성을 주도할 만큼 마나가 풍족하지 않았다.
그에 미소 지은 준성이 아공간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몬스터 사냥 뒤 얻은 마나 홀이었다.
“이거면 가능하지 않을까?”
“아! 그러네요.”
순수한 마나 응집체를 동원하면 육체 재구성에 필요한 마나를 충당할 수 있다.
엘리엔을 바라본 준성이 몬스터 마나 홀 세 개를 꺼내며 준비를 마쳤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그녀의 고개가 끄덕여지자, 준성은 세 개의 마나 홀에 담긴 마나를 인도하기 시작했다.
우웅! 우우웅!
거센 떨림과 함께 마나가 요동쳤다. 가는 실처럼 뽑아낸 마나를 준성은 허공에서 한 덩어리로 뭉쳤다.
순수한 마나라고 하나 각각의 성질이 미묘하게 다르기에 먼저 정화 과정을 거쳐 이질감 없는 하나의 마나로 만드는 것이다.
“와아…….”
점점 크기를 키워 나가는 마나 덩어리를 보며 이나가 탄식을 터뜨렸다. 세 개의 마나 홀에서 모은 마나 양은 웬만한 그랜드 마스터의 마나 보유량만큼 되었다.
준성은 정화 작업을 마친 마나를 조심스럽게 엘리엔의 몸으로 흘려보냈다. 자신이 주입한 마나만으로 육체를 재구성할 생각이었다.
그 순간, 거센 진동과 함께 스파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파직! 파지직!
“이, 이건!”
“꺄아아악!”
“리엔!”
비명을 지르는 엘리엔을 보며 이를 꽉 문 준성이 필사적으로 마나를 통제하려고 했다. 하지만 제멋대로 날뛰는 마나는 쉽게 그의 인도에 끌려오지 않았다. 결국 엘리엔의 내부에서 날뛰는 마나를 소멸시킨 준성은 허공에서 꿈틀거리는 마나를 보며 이를 지그시 깨물었다. 그리고 의지를 풀어 마나를 허공에 흩어버렸다.
파사사.
유리처럼 깨지며 흩어지는 마나의 물결은 아름다웠지만 드러난 결과를 보고 절대 웃을 수 없었다. 내부에 충격을 입은 엘리엔의 입가에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얼핏 봐도 심각해 보이는 모습에 세희가 치료에 나섰고, 이나가 준성에게 다가가 다급히 물었다.
“준!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잔뜩 굳은 그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씹어 내뱉듯 말했다.
“차원의 간섭이야. 리엔의 육체가 이 세계의 마나를 받아들이는 걸 거부하고 있어.”
“그럼 어떡해요?”
“방법이 없어. 이 세계의 마나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육체 재구성 자체를 시도할 수 없으니까.”
“그 말은…….”
“당장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뜻이 돼.”
“마, 말도 안 돼요!”
“…….”
비명을 지르듯 높아진 이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준성은 눈을 질끈 감았다.
☆ ☆ ☆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미현은 비어 있는 교실 책상을 바라보며 상념에 빠져들었다.
오늘로 벌써 사흘.
급한 일이 있어 사라졌던 준성 등은 아직도 모습을 드러낼 줄 몰랐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급한 사정이 생겼는지 미현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서두르는 모습만으로 얼마나 급했는지 어렴풋이 짐작만 할 수 있었다.
‘한 번 찾아갈까? 안 되겠지?’
마음속으로 수많은 생각을 거듭하면서 고민에 빠져들었다. 자신을 능력자의 길로 이끌어주며 단련시켜 주었기에 남처럼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어떻게든 나서서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과연 그들에게 자신의 존재가 도움이 될까?
지금도 떠나보내려는 것을 억지 부려서 간신히 붙어 있는 것인데.
괜히 자신이 나서서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럴 생각은 싹 가셨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묵묵히 능력을 단련하면서 이나 등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마음을 굳힌 미현의 고개가 작게 끄덕여졌다.
☆ ☆ ☆
능력자들의 연합인 국제 능력자 연맹은 그 역사가 짧지만 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구다.
세계 백여 개의 국가에서 능력자가 가입한 국제 능력자 연맹은 몬스터의 침공 원인부터 시작하여 그들에게서 나오는 에너지석을 공급하며 세계의 장악력을 조금씩 늘려가고 있다.
처음에는 소수에 불과했지만 능력자의 숫자가 늘어나고, 몬스터의 침공이 빈번하게 이루어짐에 따라 연맹의 규모가 커지고 그 파급력은 국제연합인 UN을 뛰어넘을 만큼 강해져 있었다.
국제 능력자 연맹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국가를 언급하면 바로 미국이다.
최초 국제 능력자 연맹은 미국 능력자들의 주도로 창설되었으며, 우후죽순 생겨난 각국의 능력자 본부가 가입을 하면서 일약 세계 최대의 능력자 기구로 도약하게 되었다.
그중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능력자를 보유하고 있으며, 실력이나 몬스터 연구에 앞서 있다.
세계 능력자들의 맹주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는 10강이라 불리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힘을 지닌 능력자 열 명 중 세 명이 미국 소속의 능력자이기에 그렇다.
그들은 개인의 능력으로 자연재해를 일으킬 수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능력자들 사이에서의 명성과 영향력으로 세계 능력자들을 주도했다.
국제 능력자 연맹의 상임이사 열 명 중 세 명이 미국 A.O. 본부의 능력자이며, 그들의 논리에 따라 몬스터 대응 방안이 달라지고는 한다.
오늘 미국 A.O. 본부 회의가 소집된 것은 먼 나라의 충돌 소식과 관련 있었다. 회의장 원탁에는 열두 명의 사람이 둥글게 둘러앉아 있었고, 한 사람이 자리에 서서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남한에서 흥미로운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보고를 하는 남자는 삼십대 후반의 탄탄한 몸을 지닌 흑인이었다. 천리안을 지닌 그는 미국 A.O. 본부에서 정보 수집을 담당하고 있다.
그 보고를 듣고 상석 중 오른쪽에 앉은 거구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A등급 충돌을 말하는 건가? 톰슨?”
“그렇습니다.”
“재미있더군. 몬스터의 침공도 아닌 충돌만으로 A등급이 나올 수 있다? 그 녀석들이 모습을 드러내기라도 한 것인가?”
“아마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흐흐, 침략자 주제에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다니. 그런데 남한에서 그 녀석들을 감당할 자들이 있던가? 그 정예 1대라는 애송이들로 상대하는 게 버거웠을 텐데?”
세계 10강, 그중에서 미국 세 명의 절대자이자, 크레이지 윈드라고 불리는 하미레스의 물음에 톰슨이 고개를 저었다.
“그 부분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남한의 정예 1대가 상대한 것이 아니며, 다른 자들 두세 명이 그들을 격퇴했다는 점입니다.”
“격퇴? 몇이 공격을 했지?”
“열여섯입니다.”
“……그 말은 그들 중 우리를 위협할 자들이 있다? 남한에 그런 실력자들이 있다고?”
“죄송합니다, 알 수 없습니다.”
“김기정이 나선 것은 아니고?”
톰슨을 바라보는 하미레스의 눈은 날카로웠다. 세계 10강의 아성에 도전하는 능력자 중 한 사람인 김기정은 뛰어난 지휘력과 통찰력을 인정받을 뿐만 아니라 이면에 숨겨진 실력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마스터 김은 아닙니다.”
“그럼 누구냐? 난 말장난을 좋아하지 않는다.”
순간 회의장 안에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날카로운 살의는 당사자를 만끽할 수 있게 해주지 않았다.
“제 천리안 능력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습니다. 방금 전 정보가 제가 파악한 전부입니다.”
“예측기로 감지할 수 있는 충돌 여부와 정체불명 능력자의 등장이 전부라고? 하, 세계를 아우르는 미국의 A.O. 본부 정보부장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군.”
“…….”
하미레스의 이죽거림에 톰슨은 아무런 반론도 할 수 없었다.
실제로 알고 있는 부분은 그것이 전부였으니까.
“죄송합니다.”
“그 부분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지?”
평소 톰슨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하미레스는 건수를 잡았는지 그를 집요하게 몰아붙였다.
“남한의 거센 반발로 조사를 하지 못하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남한에서 벌어진 일을 강제할 수 없습니다. 마스터 김은 그리 녹록한 인물이 아닙니다.”
“닥쳐! 자국의 이익을 위해 그 정도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하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
톰슨의 말을 가로막은 하미레스가 일갈을 터뜨렸다. 회의장에 모인 이들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가 내세운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란 말은 그들로 하여금 나서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현재 남한에 파견된 인원은?”
“제시카 윤입니다.”
“마침 잘됐군. 대런에게 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원하는 정보를 얻으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모든 것을 꾹 누르며 톰슨이 고개를 숙였다.
미국의 이익을 위하여.
그것은 미국 A.O.을 세우고, 국제 능력자 연맹을 주도하는 그들의 가장 근본적인 목표였으니까.
☆ ☆ ☆
차원의 간섭으로 엘리엔의 육체 구성을 실패한 준성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임하고 싶었지만 타 차원의 존재인 엘리엔에게 함부로 손을 쓸 수 없었다. 육체 재구성 시도를 할 때 준성이 마나를 소멸시키지 않았으면 그녀의 내상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을 것이다.
“준, 방법이 없을까요?”
“지금으로선 없어. 우선 악화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으면 망설이지 않고 불러주세요.”
“이나의 마음 잘 받을게. 우선 우리가 제 몫을 하는 게 중요할 것 같아.”
육체 재구성의 실패는 준성에게도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외장 마나 홀의 존재만 있으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차원의 간섭이 상상 이상으로 강력함에 따라 자신은 물론, 엘리엔에게도 치명적인 충격이 전해졌던 것이다.
이대로는 엘리엔이 소멸하고 만다.
이 명제가 준성으로 하여금 위기감을 느끼게 하였고, 모든 문제를 극복하려던 생각을 바꿔 우선 그녀의 소멸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도록 집중했다.
‘어떻게 한다.’
이런 경우는 준성 또한 처음이었기에 고민이 많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방향이 옳은 걸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그의 손을 잡는 손길이 있었다. 따뜻하면서 보드라운, 그러나 숨길 수 없는 떨림이 함께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는 세희가 서 있었다.
“준성, 괜찮은 거죠?”
그녀에게는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과거 성녀로 선택받던 시절, 온몸에 신성력이 가득 차면서 성녀로 변해가던 적이 있다.
당시 준성은 억지로 그녀의 신성력을 봉인하고 성녀가 되는 걸 막았다. 그리고 성녀를 모시고자 했던 성국과 일전을 벌였다.
“괜찮을 거야.”
“믿어요. 하지만 불안해요. 준성을 위해 이곳에 왔는데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가늘게 떨리는 몸. 그녀가 진심으로 엘리엔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전해졌다. 물끄러미 세희를 바라보던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잘될 거야. 방법을 찾고 말 테니까. 나만 믿어.”
세희를 안심시키고자 한 말이지만 그것은 스스로에게 한 다짐과도 같았다.
차원의 간섭과 세계의 의지를 배제하기 위해서는 엘리엔의 정신력이 가장 중요했다. 하지만 그녀가 초인의 경지에 올랐어도 세계 그 자체의 의지를 버텨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설사 준성이라고 해도 그것은 견뎌낼 수 없는 사안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세계의 이목을 다른 곳으로 비켜가게 만드는 것이다. 구상은 이루어졌지만 그것을 현실로 구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필요한 건 사람들이 에너지석이라 부르는 몬스터의 마나 홀이야.”
“그게 왜요?”
“이 세계와 위화감 없이 어울릴 수 있어서 그래. 그걸 바탕으로 리엔을 보호하면 세계의 이목을 잠시 속일 수 있어.”
“얼마나 필요한데요?”
“B+등급 트롤의 마나 홀로 열다섯 개.”
“그, 그렇게 많이요?”
“가장 최소로 잡은 수치야. 적어도 리엔이 지닌 마나 양에서 이목을 가리는 아티팩트를 만들어야 하는데 중간에 소실되는 걸 고려해야 하니까. 내가 흡수했을 때 소실률은 80퍼센트에 달했어.”
B+등급 트롤의 마나 홀 세 개면 그랜드 마스터에 비견되는 마나 양이 되고, 아홉 개면 세 배가 된다. 하지만 소실률을 고려하면 열다섯 개는 최소고, 그 이상 필요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
너무 많은 숫자에 세희와 이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동안 제법 많은 몬스터를 상대했지만 B+등급 이상의 몬스터는 세 마리를 상대한 게 고작이다.
“일단 이곳 본부장과 대화를 해봐야지. 그건 그렇고, 상대했던 괴인 기억해?”
“네, 물론이죠.”
“이상한 점은 없었고?”
“없긴요, 아주 이상한 점투성이였어요.”
표정을 찌푸린 이나가 불만을 토로했다. 짧은 대결이었지만 괴인들과의 대결은 그녀에게 불쾌감을 안겨다 주었다.
“어떤 부분이 그랬어?”
“상대하면서 이상했어요. 마치 영혼이 없는 느낌이랄까? 그러면서 제 검로를 차근차근 파악하며 점점 치밀하게 상대하는 게 느껴졌어요. 제가 전력을 발휘하면 죽일 수 있었겠지만 조금씩 절 능숙하게 상대해 나가는, 아주 불쾌한 느낌이었죠.”
“나랑 비슷하게 느꼈어. 그래서 괴인들을 처리하면서 시체 하나를 아공간에 챙겨뒀어.”
“아공간에요?”
“그래, 그러니 세희와 이나는 경계를 해줘.”
두 여인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렸다. 준성 또한 아직 생각에 그쳤을 뿐이기에 확답은 주지 못했다.
“경계요? 시체라면서 왜…….”
“그건 보면 알 거야.”
“알겠어요.”
자리에서 일어난 두 여인이 언제라도 공방을 나눌 수 있도록 경계 태세를 취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준성이 아공간을 개방했다.
키이잉!
공간이 갈라지며 틈새로 시체 한 구가 튀어나왔다. 검은 옷으로 둘러싼 괴인은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틀림없는 인간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예상대로 시체처럼 늘어진 괴인에게서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다음 놀라운 현상이 벌어졌다.
별안간 검은 기류가 휘몰아치더니, 괴인에게 흡수되면서 조금씩 생기가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시체처럼 누워 있던 괴인의 몸이 꿈틀거렸다.
“이, 이건…….”
“맞아.”
경악 어린 세희의 중얼거림에 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괴인을 보며 그가 말했다.
“이건 언데드(Undead)야, 살아 있는 언데드.”
준성의 말이 그녀들의 귓가로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