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165)
제45장 고의적인 실수
에너지석 삼십 개의 양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루어졌다.
문제는 그것을 가지고 온 사람이 제시카라는 점이었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야윈 얼굴이었지만 준성은 그녀를 보지 못한 척했다.
노골적인 냉대에 멈칫한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며 입을 열었다.
“본부장님이 전해주신 물건을 가지고 왔어요.”
“…….”
“여기 물건을 놓아둘게요. 이전 일은 정말, 정말 죄송해요.”
고개를 깊게 숙인 제시카는 준성에게 용서를 구했다. 협박을 받았다고 하나 이나를 위험에 빠뜨린 행동은 쉽게 용서받을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죄송해요. 저도, 저도 정말 원하지 않았어요…….”
처연한 그녀의 표정은 남자라면 무너질 수밖에 없을 만큼 치명적인 것이었으나 준성의 얼굴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준성.”
세희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때까지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던 준성이 입을 열었다.
“용서는 이나에게 구하도록.”
“그럼 용서해 주실 건가요?”
“이나의 용서와 내 용서는 별개의 문제다. 사과의 대가로 받을 것을 받았으니 남은 것은 마음의 문제뿐, 하지만 무너진 신뢰를 복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겠지.”
여전히 날 선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 숨은 의미를 파악한 제시카의 표정이 밝아졌다. 경우에 따라 용서해 줄 수도 있다고 느낀 것이다.
이나에게 다가간 그녀는 곧바로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이나 씨. 절 용서하기 힘들겠지만 용서해 주실 수 있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
이나도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손짓을 했다.
“잠깐 따라와.”
제시카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온 이나에게서 차가운 기세가 피어났다.
하미레스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 제시카의 몸이 자연히 위축되었다.
“당시의 일은 서로 입장이 다른 만큼 충분히 벌어질 만한 일이었다고 생각해. 그 정도 일을 가지고 오랫동안 꽁할 만큼 마음이 좁지도 않고.”
“그럼…….”
“대신 조건이 있어.”
한 줄기 희망이 피어나는 제시카의 얼굴을 보며 이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조건이요?”
“그래, 앞으로 내 말을 잘 따르면 돼. 네게도 손해가 아닐걸? 준은 신뢰가 무너진 사람과 절대 상종하지 않거든. 근데 내가 그걸 중간에 중재해 줄 수 있다면?”
“어, 어떤 건가요?”
“급할 것 없어. 천천히 이야기하면 되니까. 대신 이상한 건 아닐 테니 안심해도 좋아.”
제시카를 바라보는 이나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걸렸다. 왠지 모를 오한에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 ☆ ☆
세 사람은 제시카가 가지고 온 에너지석을 하나하나 살폈다. 모두 B등급 이상의 에너지석이었고, 모두 합치면 삼조 원을 넘기는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삼십 개라니, 정말 어마어마한 양이에요.”
그 가치에 세희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사라질 물건이지.”
“맞아요, 준이 몸을 회복하고 엘리엔 님을 회복시킬 방법을 찾는 대가치고 값이 저렴한 편이죠.”
“내가 언제 그걸 지적했니. 따지고 보면 형편이 좋지 못한 것도 이나 네가 많이 먹어서 그렇잖니.”
“내, 내가 뭘 많이 먹어요! 난 검사니까 활동량이 많아서 그런 거예요!”
“그런 것치고 너무 많이 먹잖니. 오죽하면 고기 뷔페에도 씨름부 금지, 유도부 금지, 강이나 금지라는 팻말이…….”
“악! 말하지 마! 이 언니가 정말 해보자는 거야!”
방방 뛰는 이나를 보며 피식 웃은 준성은 삼십 개의 에너지석을 바라보며 마나의 양을 가늠해 보았다.
B등급 에너지석의 마나 양이 100이라면 체내에 흡수되는 것은 20 내외다. 그것도 최대한 양을 끌어 올렸음에도 그 정도에 불과했다.
물론 그것은 준성이 20을 흡수할 뿐이고, 삼십 개라는 숫자를 최대한 활용하면 다른 사람도 이득을 볼 수 있다.
“세희랑 이나도 옆에서 최대한 마나를 흡수해. 하나당 많은 양이 아니더라도 다 합치면 제법 많은 양을 축적할 수 있을 거야.”
“호위는 서지 않아도 되나요?”
“맞아요, 아직 버틸 만해요. 준이라도 확실하게 마나를 쌓는 게 나아요.”
둘의 대답에 준성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 사건을 벌인 덕분에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어. 그러니 최대한 많은 양을 축적해 놓는 게 좋아. 호위라면 경계 마법진을 설치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준이 그렇게 말한다면 뭐…….”
최근 힘에 대한 갈망이 커진 이나는 못 이기는 척 받아들였지만 심각한 표정을 지은 세희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전 경계를 설게요. 혹시 모를 변수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준성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가장 확실한 방법을 선택하고 싶어요.”
“그럼 호의를 받아들일게. 변수는 어디서든 존재할 테니까. 그럼 잘 부탁해.”
“네.”
“칫! 언니 때문에 나만 욕심 많은 여자가 되었네.”
툴툴거리면서 못내 세희가 참여하지 않는 것을 아쉬워하는 이나였다. 부드럽게 미소를 지은 세희가 그녀를 달랬다.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수련해야지? 그런 것 걱정하지 말고 최대한 마나를 받아들이도록 해.”
“그럴게요.”
“내가 흡수를 시작하면 흘러나오는 마나가 있을 거야. 그걸 받아들이도록 해.”
준성의 말에 두 여인은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에너지석 삼십 개를 앞에 놓은 준성은 편하게 앉아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를 에너지석과 하나씩 연결해 나갔다.
우웅! 웅! 웅웅!
의지와 에너지석이 연결될 때마다 공명음이 울리며 저장된 마나가 강렬하게 반응했다. 그렇게 모든 에너지석을 연결한 준성은 조심스럽게 마나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쏴아아!
하나에 저장된 마나 양은 물 한 바가지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숫자가 서른 개에 달하니 마치 폭포수가 쏟아지는 것처럼 많은 양이 준성의 마나 홀에 흘러 들어갔다. 준성은 그것을 최대한 받아들이며 차곡차곡 쌓았다. 그리고 흩어지는 마나를 이나에게 인도했다.
자리에 앉은 이나도 마나 연공법을 운용하며 마나를 받아들였다. 그녀가 무난히 행하는 것을 본 준성은 다른 곳에 신경을 끄고 호흡을 통해 마나를 쌓았다.
방대한 양의 마나가 체내에 연신 흘러내리면서 부하가 걸릴 법도 했지만 10클래스 반신의 영역에 올라선 준성의 육신은 굳건했다. 끝없이 마나를 받아들이며 한계를 가늠하기 힘든 마나 홀을 채워 나갔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고 낮이 되어 다시 밤이 될 무렵, 꼬박 하루 동안 이어진 준성의 마나 축적 작업이 끝났다.
“준! 괜찮아요?”
“몸에 이상은 없나요?”
준성에게서 흘러나오던 마나를 흡수한 뒤, 호위를 서 있던 이나와 세희가 물어왔다. 전신에 마나가 충만한 것을 느낀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전혀, 오히려 완벽해. 이제 온전히 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에요! 세희 언니가 너무 걱정해서 준을 믿고 있던 나까지 걱정이 되더라니까요.”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러니. 그보다 배고프지 않나요? 늦었지만 저녁 식사부터 해요.”
“그래, 배가 고프네.”
하루 꼬박 굶은 준성은 배 속에서 연신 꼬르륵 소리가 울려 퍼지는 걸 느끼며 어색하게 웃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을 하려고.”
식사를 마친 뒤 준성은 곧장 아카식 레코드로 접속할 것을 알렸다.
“너무 빠르지 않을까요?”
“저도 동의해요. 좀 더 휴식을 취해도 될 것 같은데…….”
“준비가 갖춰졌는데 더 미루고 싶지 않아. 리엔에게 이야기를 한 뒤, 바로 행동으로 옮기려고.”
강하게 주장을 하니 세희와 이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걱정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다. 싱긋 웃은 준성은 긴장을 풀어주고자 가볍게 말했다.
“이미 한 번 해본 일이니까 이상은 없어.”
“그게 아니라 엘리엔 님은 인간이 될 생각이 없다고 하니까요. 누가 수호검주 아니랄까 봐 고지식해서는.”
“확실히 엘리엔 님의 생각이 굳건하셔서 설득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입술을 삐죽이는 이나와 우려를 드러내는 세희의 말에 준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에게 증오를 가지고 있는 엘리엔의 고집을 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음! 일단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지. 설득은 내 몫인 듯하니.”
“계속 거절하면 제압하고 꽁꽁 묶어서라도 해버리세요! 말 안 듣는 엘프에게는 강하게 나가서 주장을 관철시켜야 한다고요!”
“알았어.”
말은 험악하게 하지만 그 속에 서린 걱정에 준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엔.”
“……완전히 나았군.”
네이처 소드의 동화 현상으로 소멸이 정체되었지만 모든 마나가 묶여 버린 엘리엔의 기력은 예전 같지 않았다.
“이번에 제법 거하게 판을 벌였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하하! 사실 언제까지 사냥에 매달려서 원하는 양을 얻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거든요. 건수를 잡은 김에 뜯어낼 만큼 뜯어냈죠.”
“…….”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하기 전에 리엔의 답을 듣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나, 나는…….”
“인간을 증오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리엔을 회복시킬 방법 중 가장 확률이 높은 건 리엔의 영혼을 새로 구성된 인간의 육체에 안착시키는 겁니다.”
“확률이 높지 않은 방법이라고 들었는데.”
“그래서 아카식 레코드에 들어가려고 하는 겁니다. 다른 존재의 영혼을 어떻게 바꿔야 인간의 육체에 안착시킬 수 있을지.”
“……난 모르겠어. 인간은 내가 증오해야 할 대상. 인간을 사랑하게 된 모순이 만들어졌지만 난 여전히 인간을 증오하고 있어. 그런 내가 인간이 된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표정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엘리엔의 얼굴에는 혼란스러움이 드리워 있었다.
준성은 그녀의 혼란을 진정시키고자 강하게 몰아붙였다.
“살아오면서 증오한 인간이 된다는 것에 충격을 느끼는 건 당연합니다. 리엔, 한 가지만 명심하면 됩니다. 당신은 나를 따라서 이곳에 왔고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함께 있고 앞으로도 함께일 것이고 미래에도 함께일 것입니다. 우리 중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그것만 생각하면 됩니다.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마요.”
“…….”
“리엔이 싫다고 해도 난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할 것이고, 소멸을 피할 방법을 강구할 겁니다. 이건 설득이 아니라 통보입니다. 그러니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해요. 내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이해’가 아니라 ‘안심’이었다. 인간이 되어도 바뀌는 것은 없을 거란 ‘확신’을 보여줌으로써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했다.
말을 마친 준성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엘리엔의 눈가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말, 정말 고마워.”
준성이 아카식 레코드라 칭한 것은 오컬트 용어에 빗대어 설명한 것이지만 이는 달리 보면 육체의 한계를 초월하여 그 차원의 모든 것을 관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10클래스의 영역에 올라서면서 신의 영역을 개척한 준성은 더 이상 육체의 한계에 국한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이뤄놓은 금탑과 가족의 존재는 모든 것을 초탈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는 인간과 신의 영역을 가르는 것으로, 준성은 신이 아닌 인간의 길을 선택하게 됨으로써 신의 권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때때로 무리를 하면 그 권능을 행사할 수 있는데, 차원의 모든 정보가 집합된 도서관으로 들어서는 것도 그중 하나다.
‘이곳은 오랜만이군.’
육체의 한계에 벗어나 차원의 도서관에 들어선 준성은 쓰게 웃었다. 다시 오게 될 줄 몰랐건만 이렇게 방문하게 된 것이 스스로도 우스웠다.
사색도 잠시, 정신을 차리고 엘리엔의 소멸을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차원의 도서관에서 필요한 지식을 찾는 것은 일종의 검색과도 같다.
필요한 것을 생각하면 그에 관련된 무수히 많은 정보의 집합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중 중요한 것을 찾아 활용하는 것이 본인의 역량 여부다.
가장 먼저 찾아본 것은 영혼의 가공이다. 엘프인 엘리엔의 영혼과 인간의 육체는 서로 파장이 맞지 않는다. 준성은 엘리엔의 영혼을 인간에 맞춰 안착시키고자 했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구상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역시…….’
영혼의 가공은 이른바 신의 영역이었다. 준성이 반신의 영역에 올라섰다고 하나 허울뿐이며 육체에 얽매여 있고, 완전한 신이 아니니 영혼의 가공은 어림도 없었다.
준성은 포기하지 않고 여러 가지 정보를 찾아보았으나, 영혼의 가공은 불가능했다.
아무런 지성도 존재하지 않는 미물은 가능할지 모르나 엘리엔처럼 ‘격’이 높은 영혼의 가공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이를 악문 준성은 검색에 검색을 거듭했지만 하나같이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이미 세계는 엘리엔을 ‘불순물’로 지정해 놓았고,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육체와 영혼을 분리시켜 영혼은 세계의 소속으로 바꾸고, 육체를 재구성하여 안착시켜야 했다.
정녕 방법이 없는 건가?
아카식 레코드 접속 시간 종료가 다가옴에 따라 준성의 마음은 차츰 초조해졌다.
이번에 방법을 찾지 못하면 다음 접속은 언제일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이 며칠 후일 수도 있고, 아니면 몇 년, 수십 년일 수도 있다.
그리고 접속 종료에 임박했을 때, 한 가지 정보가 떠올랐다. 그 내용을 본 준성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이, 이건…….’
파앗!
잠시 후, 접속이 종료된 준성의 영혼은 차원의 관조 영역을 이탈하여 다시 육체로 안착되었다.
“큭!”
아찔한 현기증이 엄습하는 걸 느낀 그는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준! 괜찮아요?”
“준성, 어떻게 된 건가요?”
곁을 지키고 있던 두 여인이 황급히 안부를 물어왔다. 하지만 준성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아카식 레코드에서 보았던 정보가 맴돌고 있었다.
깊은 상념에 빠져든 것을 알아차린 두 여인이 입을 다물었다.
생각의 정리를 마친 준성은 간신히 현기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두통이 가시고 자신이 본 정보를 확실히 각인시킨 그는 경악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지구에 엘프에 대한 정보가 있는 거지?”
그가 본 차원의 도서관에는 ‘엘프’에 대한 정보가 수록되어 있었다.
그것도 아주 상세하게.
“준, 괜찮아요?”
“무슨 일이 있던 건가요?”
“…….”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한 뒤, 줄곧 심각한 준성의 표정을 보며 이나와 세희는 걱정을 드러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보았던 정보가 머릿속을 헤집으면서 도통 정리가 되질 않았던 것이다.
자신이 아카식 레코드라 명명한 것은 신의 영역에 들어선 존재가 차원 전체를 관조하면서 필요한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대한 도서관을 말한다.
준성은 이곳에서 엘리엔의 몸을 치료하고자 했고,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던 상황에서 찾아낸 것이 바로 엘프에 대한 정보였다.
―엘프는 지구에 없다.
그것은 준성이 가지고 있는 상식이었다.
지구는 유사 종족이 존재하지 않는 인간의 세상이었으며, 최근 몬스터가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유사 인종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아카식 레코드에 본 정보를 토대로 그는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지구에도 유사 종족이 존재했다.’
그렇지 않으면 엘프에 대한 정보가 설명이 되지 않았다.
뛸 듯이 기뻐해야 하는 일이지만 준성이 마냥 들뜨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엘프로서의 엘리엔과 아카식 레코드에 저장된 엘프에 대한 정보가 동일한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세계의 의지에 소멸을 당하고 있는 엘리엔인 만큼 세희나 이나, 자신의 육체를 재구성할 때보다 더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한다.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이 하나 늘어났지만 그리 달갑지 않은 것도 그런 맥락이다. 차마 그녀에게 시험을 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사이, 그가 심각한 고민에 휩싸였다는 걸 알아차린 세희와 이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사이 준성은 생각을 이어나가며 고개를 끄덕이고 젓기를 반복했다.
정보를 얻었지만 엘리엔의 것과 면밀하게 대조해서 일을 진행해야 했다. 영혼의 가공만 생각하던 준성이었기에 지구의 엘프와 타 차원 엘프의 정보가 얼마나 상이한지 파악해야 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다음 기회를 노리는 수밖에 없겠어.”
생각을 정리한 준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접속이 언제일지 확신할 수 없으니 최대한 빠르게 타 차원 엘프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함이다.
당장 내일 괜찮아진다면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할 생각이었다.
“리엔, 할 말이…… 어?”
엘리엔의 방을 들어가던 준성은 세희와 이나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
“생각은 다 정리되셨어요?”
“아아, 미안. 충격도 있고, 여러 가지 고려할 것도 많더라고.”
“이해해요. 준성이 얼마나 열심히 움직이는지 알고 있는걸요.”
“맞아요. 그래서 준이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엘리엔 님에게 준성에 대한 칭찬을 잔뜩 하고 있었다고요!”
“……하하!”
이나의 외침에 준성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자신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베풀어주고 있는 그녀를 위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건만 이래저래 부풀리고 살을 덧붙이는 것이 아무래도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찾아온 거예요?”
“아! 그러고 보니 그걸 깜빡했군.”
화제를 다시 현시점으로 되돌리니, 준성은 엘리엔을 바라보며 말했다.
“리엔, 잠시 옷 좀 벗어줄 수 있겠습니까?”
“…….”
순간 싸늘하게 가라앉는 분위기.
엘프란 종족을 조사할 생각에 여념이 없던 준성은 그제야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깨닫고 아차 한 표정을 지었지만 세희와 이나의 눈빛은 점점 더 매서워지고 있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고 해도 첫날을 다 보는 자리에서 치르는 건…… 부끄러운데.”
엘리엔은 한술 더 떴다.
황당한 표정을 지은 준성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 아니! 그런 게 아닙니다.”
그녀의 회복을 위해 엘프란 종족의 정보가 필요하다고 말을 하는 준성이었지만 엘리엔이 약해진 틈(?)을 타 행동을 개시한다고 생각한 세희와 이나의 신뢰는 이미 바닥을 뚫고 있었다.
“으음!”
뜻대로 되는 것이 없는 상황에 준성은 침음을 흘렸다.
☆ ☆ ☆
“가, 갑자기 왜?”
여름 방학이 시작될 무렵, 고미현은 준성의 충격적인 선언을 듣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더 이상 지체하는 건 네게도, A.O. 본부에도 예의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 아무리 그래도! 내 의견은 묻지도 않고 일을 진행하는 건 너무하잖아.”
“말해봤자 어차피 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릴 거 아니었나?”
“…….”
정곡을 꿰뚫는 말에 미현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준성이 한 말은 간단했다.
이제 더 이상 함께 다니기 힘드니 대한민국 A.O. 본부에 소속이 되라는 말이었다.
이전까지 떨어지기 싫어 아등바등 빌붙었던 미현에게 있어 준성의 행동은 일방적인 폭력에 지나지 않았다. 싫다며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쳤지만 준성의 생각은 굳건했다.
“우리가 여러 차례 검증해 본 결과 A.O. 본부는 믿을 만한 곳으로 판단했다. 그러니 더 이상 다른 말은 하지 말자.”
“세, 세희야.”
“미안, 미현아. 준성의 말이 옳다고 생각해.”
도움을 청하려고 했지만 말을 꺼내기 무섭게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니 밑에서부터 치미는 설움을 참기가 힘들었다.
“그럼 그렇게 결정된 걸로 알도록.”
“……몰라! 이 나쁜 놈아! 내 의견은 하나도 묻지 않고 멋대로 결정해? 진짜 나빴어! 나중에 복수할 거야! 당분간 볼 생각도 하지 마!”
파고들 여지를 주지 않는 준성을 저주하며 교실을 벗어나는 미현이었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내일 방학식이라 볼 텐데 참 앞뒤 가리지 않는군.”
“그래도 너무 심하게 대한 건 아닐까요?”
“아니, 이렇게 강하게 말하지 않으면 계속 우리와 함께 있으려고 할 거야. 그게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겠지?”
“알고 있죠. 그래서 배려심이라고는 눈에 찾아보기 힘든 준성의 말에 동조한 거잖아요.”
“이렇게 하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을 테니까.”
준성과 세희가 미현을 A.O. 본부에 보내려고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번에 사건을 크게 터뜨리면서 미국은 물론 타국 A.O. 본부의 이목을 집중시킨 준성의 곁에 있으면 더 이상 미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어서였다.
미현은 아직 자신의 능력을 자유자재로 다루지 못했고, 버프 계열을 다루기에 스스로 몸을 보호하기도 벅찼다. 그래서 대한민국 A.O. 본부에 소속시킴으로써 안전장치를 마련하고자 했다.
“물론 필요한 걸 얻어내야 하고.”
“전 준성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중요한 내용은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고 동조하라고만 하니 세희는 입술을 삐죽이며 섭섭한 기색을 드러냈다.
“확실하지 않으니 말해주기 힘들어. 세희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자칫 잘못하면 리엔에게 헛된 희망을 심어줄 텐데 그건 피하고 싶으니까.”
“부디 좋게 해결되었으면 좋겠어요.”
“나도 마찬가지야.”
당장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게 어디 쉽던가.
엘리엔의 육체를 재구성하기 위해 준성 또한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중이었다.
“대신 확실해지면 가장 먼저 말하도록 할게.”
“알았어요.”
미현의 문제를 일단락 지은 준성은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이제 아카식 레코드 접속 전, 짐작을 확신으로 만드는 것만 하면 된다.
☆ ☆ ☆
준성이 마나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곁다리로 마나를 축적한 이나는 한동안 학교 뒷산에 늦은 시간까지 머물면서 수련에 힘을 썼다.
그 결과 상당량의 마나를 본신의 힘으로 소화해 냈지만 그녀의 불만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아무리 열심히 하면 뭐해. 마음껏 검을 휘두르면 일주일 내내 마나를 축적해도 반 이상 채울까 말까인데. 이러다가 실력이 떨어지겠어.”
미국의 능력자와 겨룰 때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일대일이라면 절대 지지 않겠지만 제시카가 함께하고 자기도 모르게 마나 소모를 최소한으로 하려고 하다 보니 짧은 순간 틈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가는 실력이 어디까지 떨어질지 몰라.”
불현듯 머릿속을 지배한 불길한 예감에 이나는 심각한 위기감을 느꼈다. 어떻게든 자신의 몸을 장악해 나가는 이 소심함을 개선하고 싶었다.
“아?”
교문을 벗어나 집으로 향하던 이나는 자신 앞을 가로막는 남자를 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입니다, 이나 양.”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것은 바로 진우였다.
절대 당당할 수 없는 인물이 나타난 것이다.
순간 이나의 얼굴이 험악해지려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뛰어난 눈썰미를 지닌 사람이 아니고서는 알아볼 수 없는 찰나의 변화였다.
“그러네요.”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하하!”
“전 그다지 반갑지 않은데요.”
“그렇겠죠. 저번에는 제가 폐를 끼쳤습니다. 기분 나쁘셨다면 용서해 주시길.”
뻔뻔한 태도에 이나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그 이야기는 쉽게 언급하지 말았으면 좋겠네요. 주변에 듣는 귀가 많으니 조용한 곳으로 이동하겠어요?”
“물론입니다.”
그게 바로 진우가 바라는 바였다. 마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는 것처럼 필요한 부분을 짚어내니 그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걸어서 인적이 드문 공원으로 향했다. 자정이 가깝다 보니 공원에는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적막하고 어두웠다.
둘만 남게 되자 진우의 얼굴에는 더더욱 자신감이 서렸다. 입가에 미소를 지은 그는 짐짓 가슴을 쭉 펴며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이야기를 하도록 하죠.”
“야.”
“……!”
“지금 장난쳐?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데 참 뻔뻔하게 나온다, 너?”
다짜고짜 튀어난 험악한 말투에 진우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와 함께 날카로운 기세가 동반되니 저도 모르게 몸이 반응했다.
‘이것이 능력자의 기운.’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것을 떠올린 진우는 황급히 표정을 관리하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하하! 뻔뻔하다니, 잠깐의 실수였을 뿐입니다.”
“말이 안 통하네. 하긴 말이 통하는 인간이었으면 그런 짐승 같은 짓을 하지도 않았겠지. 아무래도 매가 필요하겠어.”
그 말과 함께 이나의 손에 푸른 검이 쥐어졌다. 그것을 본 진우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능력!’
예상대로 이나는 능력자였던 것이다. 예전이라면 집안의 위세와 자신의 하찮은 스펙만 믿고 의기양양했다가 압도적인 힘 앞에 절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자신 또한 혹독한 훈련 끝에 능력을 각성했다. 이나가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아니, 오히려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서 그녀의 마음을 돌릴 생각이었다.
이나가 땅을 박찬 뒤, 섬전처럼 빠르게 쇄도하는 모습이 보였다. 진우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이글이글 타오르는 그녀의 푸른 검을 바라보았다.
‘보여주지, 내 능력을.’
파아앗!
마음먹기 무섭게 반투명한 막이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떠한 것도 꿰뚫을 수 없는 단단한 방어막 능력과 강력한 공격 능력으로 힘의 격차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푸른 검이 다가오고, 이제 자신의 방어막 앞에 이나는 맥없이 튕겨 나가리라.
진우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전혀 잘못된 생각이었지만.
와장창!
그렇게 자신하던 방어막이 푸른 검과 충돌하는 순간 유리처럼 부서졌다. 총알조차 막아내던 방어막이 허무하게 부서지는 모습에 진우는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였다.
콰직!
아랫도리에서 이어지는 충격에 세상이 하얗게 물드는 것을 느끼며 지독한 고통에 정신을 놓아버렸다.
한 남자의 미래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가해자인 이나는 발을 치우며 천연덕스럽게 중얼거렸다.
“어머, 발을 잘못 놀렸네.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것이 고의였는지 실수였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행동을 보인 본인을 제외하고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