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168)
제48장 드래곤
준성을 바라보는 정기정의 두 눈에는 흥미로움이 가득했다. 내심 역시 찾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그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생각보다 놀라지 않는군? 이곳의 능력자들 중에서 내가 드래곤인 걸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는데 말이지.”
너스레를 떨면서 말을 하지만 은근히 준성을 떠보는 말이었다.
이런 협상은 누가 더 전문인지 모른 채.
입꼬리를 말아 올린 준성은 오히려 먼저 치고 들어갔다.
“마찬가지입니다. 드래곤을 이곳에서 마주하게 될 줄이야. 어디에서 온 겁니까?”
시선을 피하지 않고 대놓고 물어보니, 정기정의 웃음이 싹 가셨다.
생명체의 정점인 드래곤은 눈빛 하나에도 상위 포식자의 기운이 고스란히 서려 있다.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생명체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준성은 마주하고도 오히려 여유를 보이고 있었다.
“그걸 묻기 위해 내가 이곳까지 온 건데, 너무한 것 아닌가? 이렇게 허리가 쑤시는 노인이 찾아왔으면 먼저 원하는 걸 주지.”
“서로 원하는 걸 얻도록 하지요.”
“음, 맞네. 차원을 넘었지. 본래 뿌리는 하나였으나, 줄기로 갈라져 나온 차원을.”
“그랬군요.”
고개를 끄덕인 준성은 마음속에 생긴 의문을 풀 수 있었다. 눈앞의 정기정은 드래곤임에도 자신이 알고 있는 드래곤보다 기세가 훨씬 약했다. 하는 행동에서 묻어 나오는 기운은 최소 에인션트(Ancient)급이었지만 힘의 크기는 금탑주 시절 웜급 드래곤만도 못했다.
준성이 질문했으니 이번에는 정기정의 차례였다.
이전까지 온화하던 그의 눈에 날카로운 빛이 서리며 준성을 압박했다.
“자네는 누구인가?”
“여행자(Traveler)입니다.”
“여행자라고?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 증거가 눈앞에 있지 않습니까? 가능 여부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제 질문에 답하십시오. 드래곤은 이곳에 몇이나 있습니까?”
“…….”
정기정은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 하지 못했다고 함이 옳았다.
아직 눈앞의 인간이 아군인지 적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상대에게 온전한 정보를 모두 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적이 되지 않은 인물에게 모든 것을 숨기는 건 또 다른 의혹을 낳는 법이다.
“아무래도 내가 해줄 말은 많지 않은 것 같군. 오늘은 확인만 하려고 온 자리이니 다음에 정식으로 자리를 만들도록 하지.”
“기대하지요.”
자리에서 일어선 정기정이 준성을 빤히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힘이 일개 인간에게 뒤처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여행자라는 단어에 담긴 뜻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목적한 바를 이루었지만 걸음을 옮기는 그의 입맛은 썼다.
“정말 그가 드래곤이었나요?”
“맞아, 그린 드래곤이었어. 이 세계에 드래곤이 있을 줄은.”
처음 드래곤의 존재 가능성을 제기한 것은 이나였다. 그리고 아카식 레코드에서 드래곤에 대한 존재가 확인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대면하게 될 줄은 준성도 미처 몰랐다.
서로 주고받은 정보는 하나였지만 그것만으로 많은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드래곤의 숫자는 몇 마리 되지 않는다.’
대답을 듣지 않았지만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정기정의 태도였다.
만약 드래곤의 숫자가 많고, 충분한 무력을 보유했다면 자신의 무례를 용서할 리 없었다.
‘무엇보다 과학.’
지구의 인간은 빠른 속도로 발전을 거듭하여 드래곤조차 장담할 수 없는 강력한 화기를 지니게 되었다.
만약 최상위 포식자라면 먹잇감들이 자신을 위협할 물건을 만들도록 둘까?
아니었다.
아마 정기정을 비롯한 다른 드래곤들은 차원을 넘어왔을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그 숫자도 몇이 안 되기에 정보가 전무한 자신에게 이렇다 할 행동을 보이지 못한 것이었다.
“……준?”
“응? 아, 미안. 일단 가서 리엔과 세희에게 이야기를 하도록 하자. 드래곤의 존재는 커다란 변수가 될 수 있으니까.”
“네!”
드래곤에 관한 소식을 전달하자 아니나 다를까, 엘리엔과 세희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특히 엘리엔은 적대감마저 드러냈는데, 그만큼 드래곤의 횡포는 타종족의 반감을 많이 샀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드래곤의 힘이 그리 강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리엔이라면 충분히 대적이 가능할 겁니다.”
“……에인션트급인데 가능하다고?”
“아무래도 뭔가 이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일단 대화를 나눠보니 그들처럼 고압적이지도, 괴팍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적대 관계를 설정하는 것보다 아군으로 삼으면 될 듯싶더군요.”
“주의하도록 하지.”
드래곤을 적으로 삼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었다. 표정을 굳힌 엘리엔은 엄습한 불쾌감을 털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히 해야 할 일은 있을까요?”
“없어. 여태까지 조용히 있다가 날 찾아온 것을 보면 그들에게도 무언가 제약이 있다는 걸 의미하니까. 아마 다음에 다시 한 번 찾아올 거야.”
“그럼 원한을 맺을 만한 일도 하지 않아야겠네요.”
“뭐…… 그렇지?”
그렇게 말을 하던 준성이 이나를 힐끗 보니, 인상을 구긴 그녀가 외쳤다.
“왜, 왜요?”
“이미 원한을 살 일을 한 게 아닐까 싶어서.”
“흥! 그 녀석이 잘못한 건데 누구한테 하소연해요? 그 드래곤도 불만이면 오라고 해요. 내 검술로 바로 토막을 내줄 테니까!”
“하긴, 이성이 있다면 자신이 한 실수 정도는 분간할 수 있겠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우려하지 않으니까 이나도 신경 쓰지 마.”
“정말이죠?”
“당연하지.”
준성의 확답에 이나는 적잖이 마음을 놓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며 세희는 의아한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일 있었니?”
“윽! 그, 그건…….”
이나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 ☆ ☆
국제 능력자 연맹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각지의 재능을 지닌 사람들을 발굴하는 것과 자신의 힘을 키워 나가는 것이다.
때문에 국제 능력자 연맹이라는 세계적인 기구를 만들었지만 그들의 연합 형태는 매우 느슨했는데, 해당 국가의 일은 자체적으로 해결하고 힘이 부족할 때 도움을 요청하는 구조였다.
이렇다 보니 때때로 각국의 이익과 연결되어 충돌이 벌어지곤 했다. 그것을 중재하며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바로 세계 10강이다.
그들의 존재감은 세계를 수호하는 능력자들에게 절대적이며, 절대 무너져서는 안 되는 견고한 철옹성이 되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한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는 사실은 추후 혼란을 발생시킬 여지가 존재했다. 때문에 국제 능력자 연맹에서는 빈자리를 채우고자 세계 10강에 새로운 인원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그리고 치열한 외교전 끝에 새롭게 자리에 오른 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A.O. 본부장 김기정이었다.
본부를 찾은 준성이 그를 보며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세계 10강에 오른 것을 축하드립니다.”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마냥 좋다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정치적인 논리가 존재하지만 패를 쥐여줄 때 받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요. 이용당한다는 생각보다 이것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걸 생각해 보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고등학생에 불과한 그의 조언이었지만 김기정은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나아가야 할 일 길을 알려준 것마냥 고마웠다.
김기정이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뛰어난 능력자인 것은 맞지만 다른 경쟁자들을 누르고 세계 10강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능력자들이 의문을 제기했다.
특히 중국과 일본의 A.O. 본부에서 거센 반대가 있었는데, 그들의 반대를 누르고 김기정이 세계 10강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미국 A.O. 본부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어서였다.
국제 능력자 연맹에 절대적인 입김을 행사하는 미국 A.O. 본부 입장에서는 하미레스를 대신하여 자국의 능력자를 그 반열로 올라서게 만들고 싶었지만, 실력에 대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지 못한다면 오히려 반발을 사고 적을 만들기 쉽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미국에 우호적이면서 대화가 통하는 상대를 찾게 되었는데, 그걸로 낙점된 것이 바로 김기정이다.
김기정은 오랫동안 이름을 떨쳐왔으며, 대한민국 A.O. 본부를 이끌면서 서로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조정하는 것이 뛰어났다.
그 이면에는 하루가 다르게 세력이 성장하는 중국과 일본을 견제하기 위함도 있었다.
일본 A.O. 본부의 경우 미국의 든든한 지원국이었지만 힘을 쥐여주면 언제 배신을 할지 모르는 이들이었다. 중국 A.O. 본부는 암암리에 미국 A.O. 본부를 뛰어넘어 국제 능력자 연맹의 주도권을 쥐려고 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두 국가를 견제하면서 입맛대로 요리할 수 있는 대상이 대한민국 A.O. 본부였고, 그중에서도 능력이 출중한 김기정을 수면 위로 끄집어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웃으면서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냥 보낼 수는 없어서 직접 데리고 왔습니다. 인사해라, 여기는 대한민국 A.O. 본부를 이끄는 김기정 본부장님이시다.”
“안녕하세요, 고미현이에요.”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던 고미현은 긴장감 어린 표정으로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하하, 반갑습니다. 많이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어 좋군요. 앞으로 많은 도움 부탁하겠습니다.”
“네? 네.”
인상 좋은 웃음과 함께 존댓말로 조곤조곤 말을 하니, 언제 불만이 많았냐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고미현이었다. 그것이 김기정의 아랫사람 다루기라는 걸 알아차린 준성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참고로 본부장님은 세계 10강의 능력자야. 세계에서 가장 강한 열 명의 능력자 중 한 사람이란 거지.”
“정말요? 와아! 대단해요.”
“선배 능력자로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우리 함께 잘해봅시다.”
“네!”
늘 준성에게 구박만 당했던 미현은 자신의 기를 살려주면서 정중함을 잃지 않는 김기정의 태도에 홀딱 빠져들고 말았다.
희희낙락하며 김기정이 하는 말을 경청하는 미현을 보며 준성은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군.’
한눈에 미현의 재능을 꿰뚫어본 듯하니 걱정할 부분은 없는 듯했다.
짐 덩이 하나를 내려놓은 준성의 표정은 편안하게 바뀌었다.
☆ ☆ ☆
“이곳도 오랜만이군.”
더글라스가 찾은 곳은 미국의 오지 중 오지로,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산속이었다. 험한 산을 타며 안으로 진입한 그는 비틀린 공간 너머로 건너가 조잡하게 지어진 집 앞에 도착했다.
가볍게 숨을 몰아쉬고 문을 열려던 그의 귓가로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곳까지 무슨 일이지?”
“오랜만입니다.”
“……날 찾아올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더글라스.”
그의 뒤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건장한 체구의 중년인이었다. 황인종에 가까운 생김새의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더글라스를 노려보았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날을 세우니, 이야기가 힘들군요.”
“이미 나에게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텐데 찾아올 이유가 있나.”
“아마 당신에게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거라 생각합니다. 먼 길을 왔는데 아무 말도 듣지 않고 돌려보낼 생각입니까?”
의문을 자아내는 그의 말에 중년인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미국 A.O. 본부장인 그가 아무 목적 없이 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집 안으로 안내했다.
“……들어오도록.”
“감사합니다.”
조잡하게 지어진 집은 안의 풍경도 마찬가지였다. 곳곳에 퀴퀴한 냄새가 가득한 곳이기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질 법도 했지만 더글라스의 입가에는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할 이야기만 하고 바로 돌아가도록.”
“여전히 까칠하군요. 하긴, 당신이 우리에게 실망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알아주길. 제가 아니었어도 누군가는 벌였을 일입니다.”
“네놈에게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다. 용건만 말하고 꺼져라, 내 손에 죽기 싫다면.”
사나운 중년인의 목소리에 어깨를 으쓱한 더글라스는 용건을 꺼내 들었다.
“좋습니다. 여전히 제 제안은 유효하다는 걸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간단합니다. 혹시 세계를 돌아다니던 도중 후인을 키운 적이 있습니까?”
“없다. 허튼소리를 할 거면 꺼져라. 더 이상 네놈의 역겨운 얼굴을 보기 싫다.”
말과 함께 자리에 일어서려던 그는 이어진 더글라스의 말에 멈칫했다.
“당신과 비슷한 힘을 사용하는 인간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찾아온 것입니다. 혹 진전을 이어받은 후인이 존재하는가 싶어서 말이지요.”
중년인이 손을 뻗어 더글라스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리고 한껏 일그러진 얼굴로 재촉했다. 그의 두 눈에는 강렬한 기대감이 번져가고 있었다.
“당장 말해라! 나와 비슷한 힘을 사용하는 녀석은 누구지? 감추면 널 죽여서 영혼을 끄집어내더라도 알아낼 것이다!”
“진정하시지요. 먼 곳에서 찾아온 손님에게 차 한잔 주지 않으면서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것입니까.”
“좋다, 내가 성급했음을 인정하지.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네가 언급한 내용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오늘 이곳이 네 무덤이 될 것이다.”
“얼마든지 기대하십시오.”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준비하러 가는 중년인을 보며 더글라스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 ☆ ☆
미현을 A.O. 본부로 떠넘긴 준성은 오랜만에 함께 모여 회의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엘리엔에게 시선을 고정한 준성이 말문을 열었다.
“요즘 몸은 어때요?”
“확실히 괜찮아졌다. 더 이상 어색함도 느껴지지 않고 완벽하게 내 몸처럼 여겨지니.”
“다행이네요. 혹시 다를까 봐 많이 걱정했는데 영혼이 제대로 안착된 것 같습니다.”
“오히려 더 강해졌을 걸요? 강력한 무기를 두 개나 더 장착했으니깐! 칫!”
입술을 삐죽인 이나가 토라진 표정을 지으니 엘리엔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강이나.”
“왜요?”
“부럽나?”
“……그걸 말이라고 해요?”
자신은 왜 육체 재구성에 급급해서 원하는 것을 취하지 못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억울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다시 육체 재구성을 해달라고도 할 수 없는 노릇, 분루만 집어삼킬 뿐이었다.
“부러우면 너도 육체 재구성을 다시 하든가.”
“으으, 으으으!”
강이나 침몰.
무표정한 얼굴로 태연하게 자랑을 해대는 모습에 피식 웃은 준성은 박수를 치면서 분위기를 환기시킨 뒤 말을 이어나갔다.
“일단 리엔은 좀 더 몸을 자주 움직이도록 해요. 문제가 언제 발생할지 알 수 없으니까. 조금만 이상한 것 같다고 숨기지 말고요. 전처럼 또 그러면 이번에는 정말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아, 알았다. 주의하도록 하지.”
박력 넘치는 준성의 모습에 엘리엔은 말을 더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걱정해 주는 그가 고맙기도 했고, 힘들 때 그에게 기댈 수 있다는 든든함도 느껴졌다.
“세희나 이나도 마찬가지야. 여기 있는 모두 기존의 육체를 벗어나 새로운 육체를 가졌어. 당연히 자기 옷처럼 꼭 들어맞을 거란 생각은 버려야 해. 언제 어떤 문제가 생길지 알 수 없고. 그러니 이상함이 들면 바로 내게 말해줘. 그 정도 어려움은 함께 해결해야지.”
그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침몰해 있던 이나였다.
“전 동의해요! 그래서 다른 분들과 다르게 모두 털어놓지요!”
당연히 몸이 좋지 않던 걸 숨겼던 엘리엔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세희는 이나의 저격에 미간을 지그시 모으며 점잖게 타박했다.
“이나, 넌 왜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니.”
“흐응, 그럼 언니는 어제 봤던 책이나 동영상들을 설명할 수 있나요? 밝힐 수 있다면 제가 했던 말에 대해 정중하게 사과를 할게요.”
“……윽!”
자신이 보았던 현란한 작품들이 언급되자 세희가 주춤거렸다.
소중한 취미 생활을 떳떳하게 밝힐 수 없는 현실이 그녀로 하여금 슬프게 만들었다.
“그만하고. 각자의 취미는 존중해 줘야 해.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몸 상태를 자세히 살펴보라는 뜻이었고, 오늘 회의는 이제 우리도 적극적으로 움직여 보자는 의미에서 열었어.”
“사람들의 감시 때문에 힘들지 않을까요?”
준성이 하미레스를 무너뜨린 소문이 암암리에 퍼지면서 세계 곳곳에서 파견된 감시자들이 그의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 대상에는 세희, 이나는 물론 엘리엔까지 포함되어 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의미는 완전히 달라. 바로 몬스터가 있는 차원의 개방이지.”
“차원 이동이요?”
놀란 이나와 달리 엘리엔과 세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게 몬스터가 있는 차원으로의 이동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맞아, 그곳에 마나가 풍부하다는 걸 알고 있는 만큼 가장 먼저 선점해야 해. 몬스터를 사냥하고 마나를 취하는 것에 한계가 발생하고, 에너지석이라는 물건이 생겨난 이상 이권 다툼도 발생할 테니까. 몬스터의 등장이 한정되었으니 차원을 이동해서 자리를 선점하는 게 좋지 않겠어?”
“준성의 말이 옳아요.”
세희가 동의를 표했고, 엘리엔과 이나도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찬성에 무게를 두었다.
“난 이걸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실행으로 옮겼으면 해. 이 세계의 능력자들은 우리가 가진 힘에 대해 분석을 하고 있고, 약점이 밝혀질 수도 있으니까. 그 전에 최대한 빨리 약점을 극복해야지.”
“방법은 있나요?”
“방법은 무슨, 마법사가 가설을 증명하려면 어떻게 해?”
“설마?”
“실험이지!”
놀라는 세희를 바라보며 준성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준성이 차원을 개척하기 위해 가장 먼저 준비한 것은 대한민국 A.O. 본부의 협력이다.
이미 김기정에게 사전에 양해를 구한 뒤, 사람이 살지 않는 거대한 대지 위에 결계를 쳤다. 그리고 남겨둔 몬스터의 마나 홀을 꺼내 들었다.
“몬스터가 등장하는 차원의 벽은 우리가 이동했던 곳과 달리 얇아. 그러니 몬스터 홀로 차원 이동 마법을 시전하면 문을 열 수 있어.”
몬스터가 등장할 때마다 좌표를 읽어들였던 준성은 차원의 문을 열 수 있는 키를 쥐고 있었다.
“그럼 차원의 문을 열 테니 세희는 날 보조해 줘.”
“네.”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뒤로하고 준성은 차원 이동 마법진을 설치했다. 지면에 거대한 마법진이 드리우는가 싶더니 이내 오색찬란한 빛을 발산하며 캐스팅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 속에 입력한 좌표를 바탕으로 차원의 벽이 허물어지면서 문이 열렸다.
찌이이잉!
귀가 찢어질 것처럼 날카로운 굉음이 울려 퍼졌다. 청각이 예민한 엘리엔은 미간을 찌푸리며 마법이 시전되는 곳을 바라보았다.
“지금이야.”
우웅!
세희가 미리 그려놓은 마법진을 지면에 새기며 캐스팅을 시작했다. 지름 1미터에 불과한 작은 마법진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신성력을 발산했다.
“디바인 마크(Divine Mark)!”
파아앗!
순백의 빛이 사방을 뒤덮다가 빠른 속도로 소멸되었다. 그사이 차원의 문을 완전히 열어놓은 준성이 앞을 바라보며 태연히 중얼거렸다.
“이제 기다리면 되나.”
디바인 마크는 몬스터를 끌어들이는 것으로, 암흑 속성을 띤 몬스터에게 불쾌감을 심어준다. 차원의 문 너머로 디바인 마크의 신성한 기운을 전달함으로써 몬스터를 자극하고 이 세상으로 끌어들일 참이었다.
차원의 문을 열고 오 분여의 시간이 흘렀다.
그때까지 몬스터가 등장할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마냥 기다리기 지루했던 이나가 준성에게 질문을 던졌다.
“몬스터가 왜 안 오죠?”
“무작위 좌표로 차원을 개방했으니 몬스터가 서식하는 곳이 아닐 수도 있어. 이것도 나쁘지 않아. 적어도 몬스터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다는 걸 의미하니까.”
말을 하던 준성이 멈칫했다. 그리고 감각이 가장 활성화된 엘리엔도 차원 너머의 존재를 감지하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안전하지 않은 것 같군.”
“그러네요.”
“네?”
“몬스터가 오고 있어.”
그어어어!
거대한 울음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그와 함께 쿵쿵거리는 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곧이어 거대한 동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상위 몬스터 오우거였다. 숲의 포식자라고 알려질 만큼 난폭한 오우거는 트롤보다 훨씬 더 질긴 가죽과 완력을 가지고 있다.
“오랜만에 보는데…… 이건 지독할 정도로 강하잖아?”
덩치가 크기 때문일까?
오우거를 둘러싼 방어막은 트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일단 사냥하자.”
“네! 오랜만에 손맛을 볼까.”
준성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검을 뽑아 든 이나가 쇄도했다.
카앙!
오러가 방어막을 타격하자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균열이 조금 났지만 그랜드 마스터의 오러를 견뎌낸 것이다.
AA-.
예측기에 드러난 오우거의 등급이었다.
트롤보다 두 단계 더 높은데 그랜드 마스터의 오러가 방어막을 뚫지 못하고 있었다.
오우거가 상위 몬스터라고 하나 그보다 더 강한 몬스터가 즐비하다.
만약 그것들이 이 세상에 더 강한 방어막을 갖고 강림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장난 아니군.”
고개를 저은 준성은 제련제강의 마법을 시전했다. 금빛 화살이 공간을 가르고 방어막과 충돌하는 순간, 균열이 일어나면서 그대로 깨져 버렸다.
그 틈을 타 이나의 오러가 오우거의 가죽을 강타했다.
그아아악!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오우거는 거대한 무기를 연신 휘둘렀지만 이나는 어렵지 않게 피해내며 차근차근 방어막을 파괴하고 육신을 공략했다.
쿠웅!
이나에 이어 엘리엔의 검격에 생명을 잃은 오우거가 그대로 쓰러졌다.
“장난 아닌데?”
가볍게 숨을 몰아쉰 그녀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란 것을 깨닫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어어!
아직 닫히지 않은 차원의 문으로 오우거가 차례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숫자는 셋.
아무래도 한가족인 듯했다.
방어막 농도는 저마다 차이가 있었지만 하나같이 만만치 않았다. 오우거 세 마리가 차원을 넘어오기 무섭게 문이 닫혔다.
농도 짙은 오우거 세 마리를 보며 준성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거 재미있겠는데.”
쿠웅!
뒤이어 등장한 오우거까지 모두 처리한 준성은 마나 홀을 추출한 뒤, 사체를 아공간에 넣어버렸다. 주변 정리를 마친 그는 곧장 결계를 해제했다.
바깥 환경이 바뀌기 무섭게 본 것은 주변에 도열한 능력자들이었다.
그 숫자는 얼핏 삼십여 명에 달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본 준성은 선두에 선 김기정을 향해 입을 열었다.
“미리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자 찾아왔습니다.”
“간단합니다. 몬스터가 등장했고 그것을 격퇴했습니다.”
“…….”
간결한 준성의 설명에 김기정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속내를 꿰뚫어 버릴 듯 깊은 눈빛이었지만 어떠한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럼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십시오.”
스파앗!
김기정의 대답이 들려오기 무섭게 준성을 비롯한 여인들의 몸이 순백의 빛에 휩싸이며 자취를 감추었다.
그가 사라지고 격전이 벌어진 장소를 훑어보는 김기정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리고 현장을 조사하는 한소영에게 물었다.
“어떤 것 같나?”
“이건 일반 A등급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에요. 최소 A+등급에서 AA-등급까지 고려해야 할 것 같아요. 하아, 대체 어느 정도인지…….”
“그렇군.”
준성이 사전에 양해를 구했음에도 김기정이 능력자들을 이끌고 온 것은 그 충격의 여파가 결계 밖으로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이미 사전에 말을 하고, 결계를 쳤음에도 충돌의 여파가 예측된다는 것은 일반적인 범주를 벗어났다는 걸 뜻하기에 김기정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알아낸 것이 A+ 혹은 AA-등급의 충돌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거대한 충돌을 일으키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를 벗어나는 김준성이라는 인간에게 의심이 깊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세계 10강에 오를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가 바로 그에 대한 감시였다.
“김준성, 대체 누구냐…….”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에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 ☆ ☆
기존 세계 10강 일원의 패배와 새로운 세계 10강의 일원이 대한민국에서 등장한 것에 가장 커다란 유감을 표명한 것은 중국과 일본이었다.
그들은 자국에서 세계 10강의 일원이 탄생하길 원했고, 외교적 카드로 더 많은 것을 얻길 원했다.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중국과 일본은 이미 세계 10강의 일원을 한 명씩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세계 10강을 보유함으로써 미국과 대등한 위치로 올라가고자 했다.
하지만 미국의 견제로 그 영광의 자리는 대한민국의 김기정에게 돌아갔다. 그가 뛰어난 능력자고 증명할 필요가 없는 업적을 쌓았지만 중국과 일본 입장에서 불만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특히 일본 A.O. 본부장이자, 세계 10강의 일원인 하나다 유지로는 A.O. 본부를 통해 일본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야심가였다.
“우리가 세계 10강의 자리를 빼앗긴 것에 대해서 유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 일에 대해 유감입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는 삼십대 초반의 미남이었다.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를 보며 하나다 유지로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마츠모토! 너의 실력이 절대 김기정에게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일이 벌어진 것은 하미레스가 사라지면서부터다. 세계 10강 중 가장 약한 그 녀석을 처리하고 마츠모토 네가 차지할 자리가 사라졌다. 하지만 미국의 비호를 받고 있는 김기정을 건드리는 건 어려운 일이지.”
지금 상황에서 일본이 김기정을 건드리는 것은 극히 어리석은 행동이다. 하지만 이대로 일을 두고 보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하미레스를 꺾은 김준성은 달랐다.
그에게는 소속된 세력도 없고, 이렇다 할 배경도 존재하지 않는다.
실력을 알리기에는 최적화된 상대였다.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소문이 전해지고 있지만 하나다 유지로나, 대다수 능력자들은 믿지 않았다.
“마츠모토!”
“명령하십시오!”
“한국으로 가라. 그리고 모든 일의 시작인 김준성이란 소년과 접촉하라. 김기정을 건드릴 수 없다면 아무 세력도 없는 그 녀석을 꺾음으로써 네가 세계 10강에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알릴 수 있다. 가서 네가 우리 일본의 명예를 드높이고 오도록.”
“명을 받들겠습니다.”
새롭게 세계 10강의 자리를 노리는 마츠모토 타다요시가 무릎을 꿇고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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