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182)
제62장 N그룹의 견제
“귀찮은 일이라, 확실히 그동안 탄탄대로를 걸어오기는 했지.”
정기정과 대화를 나누면서 준성은 그동안 자신이 편안한 길을 걸어왔음을 자각했다.
기존의 기득권층이 세력을 구축한 상황에서 작게 시작한 찻집 엘리미스는 승승장구를 거듭해 왔다. 그리고 체인점을 내기 시작하면서 급격하게 매출을 부풀려 왔고, 마침내 연 매출 수조 원대의 회사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이 있기까지 걸린 시간은 채 이 년도 되지 않았으니 얼마나 높은 성장을 거듭해 왔는지 알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방해 따위는 없었고, 오히려 T그룹의 도움을 받아 성장을 해왔으니 그들의 눈에 곱게 보이지 않을 게 분명했다.
“상관없겠지. 그나저나 이건 아직도 모르겠군.”
눈살을 찌푸린 준성은 자신 앞에 놓인 거대한 에너지석으로 시선을 옮겼다.
알래스카 매킨리 산 비밀 기지에서 획득한 이것은 차원의 문을 열어 신족을 강림하게 만들 뻔한 물건이었다. 거대한 크기만큼 안에 담긴 포스의 양은 기존에 본 어떠한 것보다 많았다.
안에 깃든 힘을 활용할 방안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럼에도 준성이 긴 시간 동안 이것을 조사하는 데 힘을 쓰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에너지석의 크기였다.
몬스터에게서 추출되는 에너지석의 크기는 아무리 커도 야구공 크기를 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자신 앞에 놓인 것은 거대한 바위 크기와 비슷했다. 그리고 안에 깃든 포스의 양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조차 힘들었다.
문제는 이 에너지석이 어떻게 생성된 것이냐였다.
“인위적이라면 에너지석을 합치는 기술이 있다는 건데, 이 거대한 힘으로 무얼 하려는 거지?”
방법을 마련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이 거대한 힘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도 많아서 걱정이었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생성한 것은 추측일 뿐, 자연적으로 생성된 것이라는 생각도 할 수 있다.
만약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거라면?
이 힘을 품고 있는 존재가 무엇일지 감히 상상하기 힘들었다.
마지막으로 준성의 의문이 미친 것은 에너지석 표면에 그려진 문양이었다.
마치 마법진처럼 기하학적인 문양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 원리를 밝혀 내지 못했지만 마법진과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차원의 문을 여는 수식이었다.
“차원의 문을 열 수 있다면 또 다른 혼란이 시작되겠지. 그 전까지 최대한 원리를 밝혀 낼 수밖에.”
해낼 수 있을지 여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엘리엔과 세희가 협력하고 있는 이상, 준성은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N그룹 다음 대 회장직을 물려받을 이현종 이사의 심기가 불편했다.
근래 들어 N그룹에서 야심차게 런칭한 커피 전문점과 식품 계열사의 매출이 나날이 떨어지고 있는 실적표를 본 것이다.
맛이 떨어지고, 서비스가 나쁘다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이 하향 곡선은 단순히 그 이유만 있어서가 아니다.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함으로써 손님을 빼앗기고, 야금야금 자신들의 영역까지 파고들고 있었다.
“그놈을 어떻게 할 수 없나?”
“현재로써는 쉽지 않습니다.”
이현종 이사의 심복인 장민구 부장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말을 원하는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잖아? 내 말은 방안을 마련해 보라는 이야기야!”
“하지만 엘리미스는 T그룹의 비호를 받고 있습니다. 잘못 건드리다가는 큰 사단이 날 것입니다.”
“제기랄, 숨겨 놓은 자식도 아니고 왜 그 녀석을 도와주는 거야, 그 빌어먹을 늙은이는!”
와락 인상을 구긴 이현종 이사가 불만을 터뜨렸다.
모델 강이나를 앞세워 작은 가게로 시작한 엘리미스가 연일 최고 매출을 경신하면서 많은 그룹이 그들의 상품에 눈독을 들였다.
대격변 이전부터 효능을 입증받은 차는 마법의 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찾는 사람이 나날이 늘어나면서 매출은 눈덩이처럼 부풀어 갔다.
그리고 기업화되려는 순간, 집어삼키고자 나선 대기업들을 가로막은 것이 바로 T그룹이었다.
일선에서 물러난 것으로 알려진 정기정 회장이 직접 나서면서 강력하게 경고를 하자, 다른 대기업들은 눈치껏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국내 1위 그룹인 그들과 척을 져서는 좋지 않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것은 최악의 한 수가 되고 말았다.
짧은 시간 사이, 엘리미스의 매출은 폭등에 폭등을 거듭하면서 국내 시장을 거머쥐는 성과를 거두었다.
더 이상 두고 보다가는 새로운 재벌의 탄생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것은 둘째 치더라도 찻집 하나만으로 그만한 매출을 기록한 엘리미스 회사가 탐날 수밖에 없었다.
“방법이 없나?”
“이미 성장한 상황에서 돈을 쓴다고 한들 큰 성과를 거두기 힘듭니다.”
“그럼 어떻게 하라고!”
“이런 건 어떻습니까?”
“뭐지?”
무언가 방법이 있는 듯하자, 이현종 이사의 표정이 대번에 풀어졌다. 장민구 부장은 주변을 살피다가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능력자들을 동원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강이나가 어떤 능력자인지 몰라서 그래? 몬스터 웨이브를 혼자 감당한 녀석이라고!”
세력으로는 T그룹이 존재하고, 무력으로는 강이나가 존재한다. 연예인이면서 동시에 개인이 지닌 막강한 무위는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게 만들어 주었다.
“게다가 녀석은 대한민국 A.O. 본부장과 친하다는 말이 있더군.”
어떻게든 엘리미스를 집어삼키려는 이현종 이사에게 있어 넘어야 할 산이 한두 곳이 아닌 셈이었다.
“굳이 이곳에 얽매일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이곳에 얽매이지 않아?”
“일본 A.O. 본부의 도움을 받으면 될 것 같습니다.”
“일본의? 일본이라…….”
이현종 이사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N그룹은 일본에서도 상장을 하고, 그 규모도 컸다. 일본 정재계에 끈을 대고 있는 만큼 일본 A.O. 본부와 연계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한 번 시도해 볼 만하군.”
“일본 A.O. 본부는 대한민국보다 더 강력하다고 들었습니다. 도움을 얻을 수 있다면 충분한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야, 아버지에게 보고를 해야겠군.”
일본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N그룹의 회장 재가가 떨어져야 했다. 하지만 그는 마음의 결심을 굳힌 듯,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세희는 최근 들어 꿈을 꾸는 일이 잦아졌다.
대마법사의 경지에 오르면서 의식까지 온전히 다스릴 수 있게 된 그녀는 더 이상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그녀는 마치 의식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듯한 착각을 느끼곤 했다.
처음에는 형체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그저 기다란 그림자만 드리운 상태에서 주변을 헤매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꿈에서 깨어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모호하던 형체는 점점 뚜렷해지기 시작했고, 점점 선명해진 것은 사람의 형태를 띤 인영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슨 말을 하는 듯했지만 내용은 알아듣지 못했다.
세희는 그가 자신에게 어떠한 말을 전하고자 하는 걸 깨달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말이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바로 앞까지 가까워진 인영이 세희에게 외쳤다.
[나에게 오라.]무슨 의미인가.
인영이 말을 하는 이유를 깨닫지 못한 꿈속의 세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조용히 인영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다시 한 번 머릿속에 외침이 들려 왔다.
[나에게 오라! 나를 따라 세계를 쥐어라!]‘……싫어!’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감정을 겉으로 발산하고 싶었지만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물먹은 솜처럼 몸은 무거웠고, 입을 열려고 해도 접착제로 붙인 것처럼 열리지 않았다.
마치 인영이 말을 한 그대로 따라야 할 것처럼 강제성이 부여된 듯했다. 자기 뜻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세희가 절규했다.
‘싫어! 싫다고!’
무기력한 모습은 두 번 다시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 간절한 바람이 통한 것일까.
굳게 다물어져 있던 세희의 입이 열리면서 속마음이 일시에 터져 나왔다.
“싫다고!”
[…….]절절한 그녀의 외침을 들었음에도 인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숨 막히는 긴장이 지배할 때, 인영에게서 다시 한 번 음성이 흘러나왔다.
[……언젠가 나의 뜻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기다리겠다.]파아앗!
그것이 꿈의 끝이었다.
몸이 붕 뜨는 것을 느낀 세희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직 캄캄한 방 안이었다.
“학! 하악! 하아!”
거칠게 숨을 몰아쉰 세희는 전신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것을 느꼈다.
대체 이 꿈은 무엇일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지만 뚜렷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쳐 낸 세희는 두려움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체 이건…….”
졸업식이 끝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준성 등은 대학교 OT에 참여하기로 했다.
준성, 엘리엔, 세희, 이나 모두 대학교에 합격했지만 OT에 참여하는 인원은 준성과 세희뿐이었는데, 이나는 스케줄 문제로 인해 시간이 나질 않았고 아직 사람 많은 곳을 불편하게 여기는 엘리엔은 장고 끝에 OT에 참석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나도 스케줄만 아니었으면 OT에 가서 준하고 같이 술 마시면서 재미있게 놀 수 있었을 텐데…….”
“술 마시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고?”
“제가 얼마나 괴로웠는데요! 하지만 이제 술을 마셔도 걸리지 않는 나이가 되었단 말씀!”
당당한 모습에 준성은 어색하게 웃으며 위로했다.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마.”
“역시 절 걱정해 주는군요.”
양손을 모은 이나의 눈에 하트가 뿅뿅 맺혔지만 준성의 말은 냉정했다.
“그게 아니라 그랜드 마스터가 작정하고 마시면 술값 때문에 돈이 거덜 날 것 같아서.”
“…….”
할 말을 잃은 이나였다.
이렇게 부산스러운 분위기와 달리 세희는 조용히 짐을 챙기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모습이었기에 준성은 이상 기류를 파악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네? 아,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잠을 설쳐서 좀 피곤했나 봐요.”
“많이 피곤한 거야? 그럼 OT에 가지 않아도 되는데.”
“괜찮아요. 잠깐 휴식을 취하면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괜히 걱정을 끼쳤네요.”
웃음을 지으며 말을 했지만 함께해 온 세월이 얼마던가. 그 말을 순순히 믿을 준성이 아니었다.
“그런 말은 하지 말고. 힘들면 말해. OT는 한번 가보고 싶어서 가는 거지, 꼭 가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그럴게요.”
자신의 괴로움을 남에게 전가하지 않는 그녀였기에 세심하게 살펴야겠다는 생각이 준성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와 별개로 생전 처음 참여하는 대학교 OT에 대한 기대감이 생기는 걸 느꼈다.
“그럼 출발할까.”
“네.”
한결 나아진 세희의 얼굴에 준성은 안도하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OT가 열리는 장소로 출발했다.
☆ ☆ ☆
OT가 열리는 대학교는 새롭게 진학한 학생들이 들어오면서 파릇파릇한 기운이 물씬 풍겼다. 추위를 물리치기 위해 옷을 꽁꽁 두른 그들은 어느 한 곳에 시선이 고정되더니, 이내 감탄을 흘렸다.
“저것 봐.”
“완전 예쁘다…….”
그곳에는 겨울의 추위를 무색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천사가 강림한 듯, 주위를 환하게 비추며 자애롭게 돌보는 듯한 선한 인상은 절로 경애하는 기분을 들게 만들었다.
어디 그뿐인가, 찬바람에 영향을 받지 않는 듯 옷차림도 무겁지 않아 늘씬한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여인의 정체는 바로 세희였다. 그리고 바로 옆에 서 있었지만 존재감마저 사라진 남자는 준성이었다.
세희는 주변에서 터져 나오는 탄성에 미소를 지으며 준성을 바라보았다.
“봤죠? 제가 이 정도예요.”
“반박의 여지가 없네.”
“그러니 평소에 좀 더 신경 써줘요. 모처럼 OT에 온 것도 저밖에 없는데.”
“알았어.”
“OT에 대해 대략적으로 듣긴 했는데 뭘 하는 자리일까요?”
“간단하게 말해서 술 마시는 자리라고 생각하면 돼.”
“에? 제가 알기로는 오리엔테이션으로, 학교생활에 대한 전반적인 걸 교육하는 걸로 아는데요?”
“말은 그렇지만 교육보다는 선후배 간에 친분을 다지고, 신입생들을 소개하는 자리라고 보면 돼. 거기에서 빠질 수 없는 게 술이고.”
이미 지구에서 19년이라는 세월을 살아온 준성은 OT에서 종종 술을 마시다가 죽은 신입생이 있다는 뉴스를 보아 왔기에 대략 감을 잡고 있었다.
“그렇군요, 술 마시는 자리라…….”
세희의 눈이 빛나는 것처럼 보인 건 착각이 아니었다. 그녀가 술을 좋아하는 애주가임을 알고 있었기에 준성은 바로 단속에 들어갔다.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지금 걱정해 주는 건가요?”
“아니, 대작하게 될 상대를 걱정하는 거야.”
“부끄러워하긴.”
웃음을 지으며 말을 받아넘기는 세희였다. 준성도 더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AO학부는 모여 주시길 바랍니다.”
교내 운동장에 도착하니, 학부마다 팻말을 들고 신입생들을 인도하기 시작했다.
준성과 세희가 입학한 곳은 작년에 신설된 AO학부였다.
이곳은 현역 능력자가 되기 전, 본격적으로 능력을 개발하는 곳으로, 개설된 지 일 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A.O. 본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교내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곳이다.
이로 인해 교내에서 능력을 지닌 학생들이 전과를 했고, 숫자는 많지 않지만 입김만큼은 대단했다.
두 사람이 팻말 있는 곳에 도착하자, 신입생들을 통제하던 선배들의 눈이 번뜩였다. 남자들은 세희의 미모 때문에 감탄으로 빛났고, 여자들은 경계의 의미로 눈을 빛냈다.
인원 확인을 끝낸 뒤, 과마다 무리를 이뤄 이동을 시작했다. 그때까지 통제에 힘을 쓰던 선배들 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이십대 중반 정도의 나이에 투블럭 컷으로 멋을 낸 청년이었다.
“나는 AO학부 회장 최영섭이라고 한다. 앞으로 학교에서 자주 보게 될 텐데 잘 지냈으면 좋겠다.”
짝짝짝!
긴장하고 있던 신입생들은 저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미소를 지으며 신입생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하던 최영섭은 세희와 눈을 마주쳤을 때 환한 미소를 짓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부터 이동을 시작하겠다. 2박 3일 동안 이어지는 OT에서는 학교생활에 대한 설명도 있을 것이고,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능력을 개발할지, 이곳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A.O. 본부는 어떤 곳인지 알아볼 예정이다. 본부 소속이 될 A.O. 희망자나 관련 계열 종사자를 꿈꾸는 신입생들은 많은 것을 배워 갔으면 좋겠다.”
“네!”
“그럼 이동하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신입생 무리는 버스에 탑승했다. 몇몇 선배들이 세희의 옆에 앉으려고 했지만 준성이 곁에 앉아 있었기에 눈을 흘기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로 돌아갔다.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서울 근교의 호텔로, 오리엔테이션이 열리는 장소였다.
널찍한 강당에서 학장의 연설을 들은 뒤, 학부마다 모여서 개별적인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했다.
“우리 학부는 관련 종사자를 교육하는 것도 있지만 가장 초점에 맞춰져 있는 것은 바로 능력자 양성에 있다. A.O. 본부의 목적은 충분한 숫자의 능력자를 보유하여 대한민국 영토를 수호하는 것이다. 물론 그와 관련된 종사자들도 대한민국 수호에 일조하는 거니…….”
“질문이 있습니다!”
그의 설명을 듣던 신입생 한 명이 용감하게 손을 들었다. 주위에 서 있던 선배들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최영섭은 개의치 않는 듯 가볍게 손을 저어 보이며 말했다.
“말하도록.”
“회장님도 능력자이십니까?”
“정확하게 봤어. 난 현재 전문가(Expert) 등급의 능력자로 A.O. 본부에 소속되어 있다.”
오오오오!
현직 능력자를 본 학생들의 입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그들의 힘도 힘이거니와 A.O. 본부에서 주어지는 혜택 또한 대단했기에 최영섭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그것을 느낀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인 뒤, 말을 이어 나갔다.
“다시 말을 하자면 2박 3일 동안 이어지는 오리엔테이션에서 가르쳐 주는 것은 너희들이 앞으로 사회에 나가 살아갈 전반적인 것을 알려 준다고 보면 된다. 한눈팔지 말고 집중해서 배우고, 선배들과 친분을 맺도록. 알겠나?”
“네!”
“이번 신입생들은 힘이 넘쳐서 좋군.”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인 최영섭은 그대로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고, 선배들이 나서면서 신입생들을 이끌었다.
교육 내용은 별다를 것이 없었다. 기존에 고등학교에서 가르쳐 준 기본 내용에서 조금 살을 덧붙였을 뿐, 깊이 면에서 어떠한 것도 없었다.
그 사실을 일러 주는 선배들도 적극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저녁 식사 이후, 분위기는 달라졌다.
“자, 그러면 본격적으로 친해지는 시간을 갖도록 하지.”
메인이벤트는 따로 있었다.
OT에서 저녁은 곧 술을 마시는 시간을 의미했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거나 싫어하는 경우 마시지 않을 수 있지만 은연중 조장되어 있는 강압적인 분위기를 용기 있게 벗어날 신입생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을 받는 것은 세희였다.
아름다운 미모와 깍듯한 태도는 남자 선배의 환심을 사놓은 상황.
반면 모든 남자들의 시선을 빼앗아 가는 그녀의 존재 때문에 여자 선배들이 그녀를 보는 눈길은 곱지 못했다.
술자리가 시작되기 무섭게 여자 선배들이 세희에게 득달처럼 달려들었다.
“한세희라고 했지.”
“네, 선배님! 14학번 한세희예요.”
“난 11학번 최미연이야. 이렇게 우리 학부에 오게 돼서 반갑고, 한 잔 받아.”
“네.”
세희가 종이컵을 내밀자, 최미연은 소주를 가득 부었다. 그리고 사뭇 도발적인 시선으로 세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정도도 못 마시는 건 아니겠지?”
“괜찮아요. 선배님도 한 잔 받으세요.”
“따라 봐.”
소주병을 든 세희도 정확하게 같은 양을 부었다.
“마음에 드는데? 앞으로 잘해 보자는 의미에서 원 샷 하자.”
두 잔이 허공에 부딪히고, 종이컵에 가득 담긴 소주를 단숨에 들이켜기 시작했다.
그것을 지켜보는 선배들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왜 하필이면 쟤야? 쟨 남자도 못 이겨.”
“신입생 잡기로 유명하더니, 오늘도인가. 하필이면 왜 한세희를…….”
이미 학부 내에서 악명이 자자한 최미연이었기에 앞으로 펼쳐질 참사에 기대 반, 걱정 반 담아 바라보았다.
“크으!”
소주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면서 화끈한 느낌에 최미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반면, 소주를 마신 세희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한 잔 더 받으세요.”
“조, 좋아!”
다시 한 번 소주가 오가고, 한 번에 들이켰다.
많은 양을 단숨에 들이켰기에 최미연은 얼굴에 열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맞은편에 있는 세희의 얼굴에는 전혀 술을 마신 티가 나질 않았다.
‘거짓일 거야. 거짓이야.’
술기운이 올라오고 있으면서 참는 거라 생각하며 세희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술을 마셨다.
“자자, 우리도 술을 마셔야지.”
둘을 주시하던 선배들도 신입생들을 독려하며 술자리에 동참했다. 먼저 자기소개를 하면서 학교생활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그다음은 신입생의 차례였다.
“김준성입니다. 선배님들과 동기들 모두 친하게 지내고 싶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짝짝짝!
예의 바른 준성의 소개에 의례적인 박수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가 세희와 붙어 다니는 것을 보았기에 선배들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14학번 김준성, 너 한세희랑 무슨 사이야?”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그래?”
그것을 끝으로 다른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어느새 만취가 된 최미연이 세희의 어깨에 팔을 떡하니 걸치고 늘어진 말투로 친한 척을 하고 있던 것이다.
“너어어 처음에는 완전 재수 없었는데…… 볼수록 괜찮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끝까지 예의도 바르고오오! 앞으로 나랑 친하게 지내기야?”
“네.”
“헤헤! 후배 하나 건졌다아!”
털썩!
웃음을 짓던 최미연은 그대로 허물어졌다.
그 광경을 본 선배들은 입을 벌린 채 다물 줄 몰랐다.
“말도 안 돼, 11학번 최강미연이…….”
“저 신입생 뭐야?”
“일단 옮겨!”
만취된 최미연이 이송되고, 남은 이들은 그렇게 소주를 들이부어 놓고 멀쩡한 세희를 괴물 보듯 바라보았다. 그들의 반응에 준성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상대가 될 리 없지.’
차원 이동을 하면서 재구성된 세희의 육체는 술을 아무리 마셔도 끄떡없을 만큼 강력하다. 그녀를 취하게 만들고자 하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학생들이 덤벼들어야 할 것이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최미연이란 방해꾼이 사라지자,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세희에게 다가가 술을 권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준성은 조용히 술을 홀짝였다. 주변에 선배와 동기가 많았지만 누구도 쉽게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먼저 다가가자니, 선뜻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쉽지 않나.’
대학교에 간다고 해서 친구를 사귄다거나 많은 이들과 어울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실의 자신의 모습을 보는 순간 얼마나 헛된 생각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배부른 소리였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자신은 10클래스에 오른 ‘반신’의 마법사였고 이들은 평범한 인간들이다. 능력자가 된다고 해도 그 간극은 줄어들지 않는다.
‘나와는 달리…….’
세희는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있었다. 술을 마시면서 즐겁게 통성명을 하고 있었고, 간단한 근황을 주고받으니 가까워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부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잔을 입에 가져갈 무렵, 뒤에서 한 줄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옆.에. 앉.아.도. 돼?”
“…….”
끊기는 것이 기계처럼 딱딱했지만 목소리 자체는 청아했다. 고개를 돌린 준성은 눈에 비친 모습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그곳에는 다시는 볼 수 없었던 얼굴이 있었다.
엘리엔, 세레나, 카이나.
모두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그에게 있어 가장 아름답다고 여긴 단 한 명의 여인.
실피르.
바로 엘리미스였던 시절, 어머니였던 그녀의 외모와 똑 닮은 금발의 여인이 서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는 시선에 금발의 푸른 눈을 지닌 여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앉.아.도. 돼?”
“……앉아.”
허락이 떨어지자 여인이 자리에 앉았다. 어느새 주변의 시선은 온통 금발의 여인에게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다. 여자 신입생들과 술을 마시던 최영섭이 말을 걸었다.
“이번에 교환학생으로 온 타나 미엘리스인가?”
“네.”
“타나?”
“왜 그러지?”
“아, 아닙니다.”
익숙한 이름에 저도 모르게 말을 흘렸던 준성은 최영섭의 반문에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타나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최영섭에게 말했다.
“비.행.기. 시.간.이. 늦.어.서. 늦.었.습.니.다.”
“하하! 그래? 아직 한국말이 서툰 것 같군.”
심하게 끊어서 말을 하는 모습에 최영섭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를 대신해서 소개를 했다.
“타나 미엘리스는 미국에서 온 교환학생이다. 아직 한국말이 서툰 것 같으니 극복할 수 있도록 많이 말을 걸어 주도록.”
“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선배, 신입생을 가리지 않고 타나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연속으로 질문을 퍼부으며 일방적인 질문 공세가 시작되었다.
“…….”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던 준성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마치 인형처럼 아름다운 그녀의 외모는 객관적으로도 세희, 이나에게 전혀 부족한 것이 아니어서 남학생들은 말이라도 한마디 붙여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다음에도 시간이 있으니까.’
마음속에서 치미는 조급함을 애써 억누르며 준성은 더 이상 술을 못 마시겠다고 한 뒤 배정된 숙소로 돌아갔다.
그의 뒷모습을 쫓고 있는 타나의 시선을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폭풍과도 같던 첫날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지만 무사히 일어난 것은 술자리에서 빠져나간 몇몇뿐이었다.
대부분의 선배, 신입생은 침대에 누워 끙끙 앓는 소리만 내고 있었다.
밤새 술을 마시면서 온 폐해였다.
세희와 타나라는 아름다운 미녀가 함께 자리를 했기에 남자 선배들은 저마다 술이 센 척 거침없이 들이켰고, 이 모습을 본 여자 선배들은 눈에 불을 켜며 달려들어 술을 마셨다.
그 중간에 낀 신입생들인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술을 마셔야 했고.
덕분에 AO학부는 다른 곳보다 훨씬 늦은 점심 무렵이 되어서야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모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끙끙거렸다.
그때, 어디선가 감미로운 차향이 콧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익숙한 향기에 방을 나온 준성은 복도에서 갓 우려낸 차를 컵에 담는 세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숙취 때문에 힘드시죠? 한 잔 마시세요.”
“가, 감사합니다.”
같은 신입생이었지만 감히 범접하지 못할 무언가를 느낀 그는 존댓말을 하면서 공손히 컵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코끝을 자극하는 향에 한 모금 입으로 가져가는 순간,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크게 뜨였다.
“마, 맛있어!”
거짓말처럼 속이 확 풀리는 기분이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 숙취로 인해 몸을 움직이기 힘들 정도였지만 차 한 잔으로 몸 상태가 정상에 가까워졌다.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비단 이러한 효과는 그 혼자만 겪는 것이 아니었다.
숙취로 힘든 몸을 끌고 복도로 나온 이들은 세희에게 받은 차를 마시는 순간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건…… 엘리미스 찻집이군. 맞지?”
“네, 맞아요.”
“과연, 시장에서 성공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건가?”
의미심장한 최영섭의 중얼거림이 있었지만 세희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뒤이어 컵을 집어 든 한 청년이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거였나? 그 골치 아픈 녀석의 것이?”
“네?”
“너, 엘리미스 차를 내민 이유가 뭐지?”
“숙취로 괴로워하는 학생이 많은 것 같아서 준비했는데요.”
“효과는 확실하군, 하지만 마음에 안 들어.”
청년의 중얼거림에 최영섭이 옆으로 다가오더니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물었다.
“왜? 아직도 말을 듣지 않나?”
“뭐 그렇지. 그것 때문에 이래저래 골치가 아프니까. 강이나 믿고 반짝 성공했다고 으스대는 꼴을 보자 하니 아주 그냥 우습지.”
“강이나만 믿고 있다고?”
“그게 아니면 이런 태도를 보일 이유가 있나? 아주 그냥 능력자 하나 믿고 설치기는. 조만간 본때를 보여 줄 일이 생길 거다. 그렇게만 알아라. 너도 알고 있으라고. 엘리미스가 우리 그룹의 수중에 떨어지면서 재미있는 일이 발생할 테니까.”
“…….”
적의 섞인 청년의 중얼거림에 세희는 미소를 지운 채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 ☆ ☆
2박 3일간 짧지만 OT가 모두 끝났다. 그동안 생각나는 점이라면 오로지 밤에 술술술(!)이었다.
이쯤 되니 왜 OT를 가면 술만 마신다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뭔가 배우기는 하는데 모든 것이 술로 끝을 맺었다.
“왜 그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세희의 밝지 못한 표정을 본 준성이 의아함을 드러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일반 사람들과 섞이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한 준성과 달리 세희는 훌륭하게 그 자리에 적응을 했다.
상냥한 성격을 지닌 그녀를 모두가 좋아했고, 숙취 해소를 위해 차를 타주기도 했으니 그 호감도의 크기는 상상보다 컸다.
“준성을 안 좋게 보는 시선들이 있는 것 같아서요.”
“날?”
“네, 선배 몇몇은 혼자 있는 준성이 눈에 밟혔나 봐요.”
아웃사이더를 자처한 이들을 빼고 대부분의 신입생들은 선배와 친해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것이 학교생활을 편하게 하기 위한 지름길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선배들도 하지 말라면서 은근히 즐기는 면을 보였는데, 그런 상황에서 가만히 있는 준성을 보며 뻗대고 있는 것으로 오해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별수 없지. 내가 그런 부분에 익숙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그래도요. 좀 더 그들과 친하게 지낼 수는 없는 건가요?”
“쉽지가 않네.”
대학이라는 작은 사회 안에서도 기득권층을 만들려는 행태에 준성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첫 단추부터 잘못 꿴 것 같으니 말이다.
“그리고 엘리미스를 안 좋게 보는 시선이 있어요.”
“엘리미스를?”
“네,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대기업 쪽에 있는 사람들인 것 같았어요.”
“아아.”
순간 정기정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면서 준성은 고개를 나직이 끄덕였다. 갑작스러운 기업의 성장은 많은 이들의 질투심에 불을 지르는 결과를 낳았다.
“뭐라는데?”
“인식 자체가 좋아 보이지 않았어요. 조만간 자신들이 인수하겠다는 확신 비슷한 게 있어서 뭔가 싶고요.”
“인수라,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로군.”
정기정이 말했던 것처럼 찻집 하나만으로 조 단위의 매출을 올린 엘리미스에 대부분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래저래 고민할 게 늘어나네.”
“저도 옆에서 도울게요.”
“알았어, 앞으로 재미있는 대학 생활 보내자.”
“물론이에요.”
“아. 그리고 혹시 타나 미엘리스에 대해서 아는 게 있어?”
“타나요? 아니요, 몇 마디 대화는 나눠 봤지만 개인적인 정보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는데요. 그런데 어머님과 놀라울 정도로 닮았는걸요?”
“나도 그것 때문에 궁금해서 물어봤던 거야.”
“세상에 닮은 사람이 있게 마련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사소한 부분으로 준성이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알았어, 고마워.”
실피르를 닮은 것만으로도 신경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세희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걱정을 덜어 주려는 태도가 고마워서 준성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지금 뭐라고 했지?”
뜬금없는 보고를 받은 김기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보고를 하는 한소영도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여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말 그대로예요. 일본 A.O. 본부에서 김준성에게 본때를 보여 주라는 의뢰가 들어왔다네요.”
“누가 그런 의뢰를 했지?”
“N그룹이라고 하네요.”
“가지가지 하는군.”
황당함에 뭐라 말을 할 기운조차 없었다. 그를 지켜보던 한소영은 보고서를 위해 올려놓으면서 한마디 했다.
“그래도 달라졌네요.”
“뭘 말하는 거지?”
“일본 A.O. 본부의 태도요. 예전이라면 이런 사실을 전해 줄 리 없었잖아요. 참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된통 당했으니 눈치를 볼 수밖에.”
이 모든 것이 누구 덕분인지 알고 있었기에 김기정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김준성, 그가 아니었다면 일본 A.O. 본부가 이렇듯 고분고분하게 나올 가능성은 없었다.
중국 A.O. 본부와 연계하여 치졸한 계략을 펼치려던 것까지 무산된 이후, 일본 A.O. 본부는 가능한 대한민국 A.O. 본부와 충돌하지 않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자신들과 김준성이 한배를 타고 있지는 않지만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기에 자칫 잘못하면 자신에게 향할 수 있는 화살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김기정은 중간에서 이 관계를 절묘하게 이용하여 일본 A.O. 본부와의 외교전에서 소소한 이득을 거두는 중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N그룹의 동태는 어떻지?”
“일본 A.O. 본부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요. 그의 사업이 탐이 나는가 보죠.”
“멍청한 자들, 실제 재산에 비하면 한 줌도 되지 않는데.”
연 매출이 조 단위를 넘어도 김준성이 마음만 먹고 몬스터 필드를 공략하면 그보다 몇 배에 달하는 수익을 거둔다. 그 사실을 모른 채 강이나에 가려진 진면목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으니 한심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N그룹에 전달하도록 하지. 괜히 그를 건드려서 주변 전체가 뒤집어지는 결과를 만들어 내면 안 되니까.”
“알겠습니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한소영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엘리미스를 집어삼키려고 술수를 부리던 N그룹은 난데없는 A.O. 본부의 강력 경고에 발칵 뒤집혔다.
계책을 세웠던 이현종 이사는 물론, 직접 움직인 장민구 부장까지 N그룹의 이만정 회장에게 불려가 불호령을 들어야만 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야?”
“그, 그게 그러니까…….”
“말을 더듬지 말고 설명을 하라고! 대체 왜 일본 A.O. 본부가 아니라 이곳 A.O. 본부에서 경고를 보내는 거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고개를 저은 이현종 이사가 장민구 부장을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몰리는 이목에 잔뜩 긴장한 그는 말을 더듬으며 해명했다.
“저, 저는 평소 친분을 이용해서 일본 A.O. 본부에 말을 전했을 뿐입니다. 알았다고 대답이 왔지만 다른 반응은 없는 상황입니다.”
“일 처리가 제대로 안 되는 것이 아니고?”
“…….”
날 선 이만정 회장의 목소리에 장민구 부장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일 처리가 잘됐다면 대한민국 A.O. 본부에서 강력 경고를 보낼 리가 없었다.
“이현종!”
“네, 넷! 회장님!”
“당장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와. 지금 일본에서 난리가 났다고!”
“알겠습니다.”
장민구 부장의 라인보다 더 높은 곳의 일본 A.O. 본부와 끈이 닿아 있는 이만정 회장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연히 장민구 부장을 바라보는 눈길이 고울 리 없었다.
“그리고 장민구 부장은 당장 정부와 접촉해서 움직이도록 해! A.O. 본부가 움직였다고 해도 우리를 막을 수는 없다.”
A.O. 본부가 몬스터로부터 대한민국을 수호한다고 해도 경제를 움직이는 것은 자신들이다.
에너지석을 가지고 갑질을 하려고 해도 일본과 곁다리로 있는 이상, 허무하게 밀려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사태가 그룹과 A.O. 본부의 힘겨루기 양상으로 흐르자, 이현종 이사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A.O. 본부와 적대해도 괜찮겠습니까?”
“괜찮다, 얼마 전 정부와 이득을 얻었다고 기고만장하는가 본데, 아직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걸 그놈들에게 알려 주겠다. 계획대로 진행해!”
“예, 예!”
이만정 회장의 자존심을 꺾지 못한 이현종 이사와 장민구 부장은 얼굴 가득 걱정을 담고 조용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OT를 마치고 돌아온 준성은 당초 말했던 것과 다르게 그때 보았던 광경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그만큼 그날 겪은 충격은 상당한 것이었다.
“타나 미엘리스.”
실피르와 놀라울 정도로 닮은 여인의 이름을 중얼거려 본다. 흩날리는 금발과 당장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커다란 눈망울. 그와 별개로 딱딱 끊어지는 한국어 실력은 실피르가 아니라는 걸 확신하게 만들었지만 준성의 머릿속을 어지럽히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렇게 같은 외모가 나타나는 게 말이 되나? 게다가 왜 이름은 타나일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준성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실피르라는 이름은 준성에게 있어 단순한 어머니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첫 번째 삶에서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면서 느끼지 못한 부모의 정을 느끼게 해주었으며, 남편을 잃었음에도 끝까지 챙겨 주는 책임감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주변 남자들의 치근덕거림을 견뎌 내며 끝까지 보호해 주니, 준성에게 있어 실피르는 반드시 지켜 주고 보살펴야 할 어머니였다.
그런 어머니가 차원 이동을 거부하고 남겠다고 했을 때 준성이 느낀 실망감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컸다. 하지만 어머니를 존중했기에 그 결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마음속에 묻어 두었다고 생각했지만 똑 닮은 여인의 등장은 준성으로 하여금 갈피를 잡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방 안에 있을 무렵, 문이 살며시 열리면서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한 여인이 들어왔다.
고개를 드니 이나가 미소를 지은 채 다가와 품에 안기면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준, 이야기 들었어요. 어머님과 닮은 여자를 만났다면서요.”
“세희한테 들었어?”
“네, OT에서 있었던 일들도 전부요. 세희 언니는 준이 걱정스럽다고 하지만 저는 괜찮다고 생각해요. 준이 평범한 대학생들과 어울리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인 걸요.”
“힘들어?”
“네, 매정한 말이겠지만 준성과 그들은 격 자체가 다르니까요. 준이 사람이 그리워서 그들에게 맞춘다고 한들 진실한 만남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나의 말은 준성의 가슴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었다. 자신은 평범한 대학 생활을 동경했지만 그들과 원천적으로 다른 만큼 심리적인 거리가 가까워질 수 없었다. 깨달음을 얻은 준성이 미소를 지으며 이나의 풍성한 머릿결을 쓸어내렸다.
“틀린 말은 아니네. 이나에게 이런 위로를 들을 줄 몰랐는데.”
“좋은 말을 들었으면 더 많이 귀여워해 달라고요.”
“이미 충분히 귀여워하고 있는데.”
“그래요? 저는 좀 더 좋은 걸 원하고 있는데요?”
그윽한 눈으로 준성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은 치명적인 유혹 그 자체였다.
마음의 동요가 심했기에 그 유혹을 뿌리칠 만큼 여유롭지도 않았다. 하물며 얼마 전 둘 사이의 진도가 한껏 나가지 않았던가.
준성이 뻗은 손이 이나의 어깨를 감쌀 무렵, 어김없이 방해꾼이 등장했다.
“이럴 줄 알았어.”
“언니는 왜 매일 내가 잘될 때만 나타나는 거예요? 어차피 성인이니까 방해하지 않아도 되면서.”
입술을 삐죽인 이나가 날카로운 눈으로 세희를 노려보았다. 둘 사이에 맺은 협정을 위반한 그녀를 질타하는 어조였다. 하지만 입가에 미소를 지은 세희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물론 나도 기억하고 있어. 이나 너와의 협정도 존중하고.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경우와 조금 다르네?”
“뭐가 다른데요?”
“손님이 찾아왔거든. 그래서 준성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러 온 건데? 방해할 의도는 정말 하나도 없었어.”
“아아, 그렇구나. 존중해 줘서 정말 너무너무 고맙네요.”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하는 모습을 보며 주먹이 쥐어지는 것을 간신히 참아 내는 이나였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지만 대수롭지 않게 흘려버린 세희는 준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부 측에서 방문한 손님이에요. 준성을 보고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네요.”
“정부?”
준성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에 반가움은 없었다. 이번에는 어떤 일로 자신을 귀찮게 굴지 짜증만 생기는 것을 느꼈다.
“바보거나, 목적이 있거나 둘 중 하나겠지.”
이미 한 차례 경고를 한 적이 있었기에 다시 한 번 헛소리를 한다면 가만히 지켜보고 있지 않을 생각이었다.
밖으로 나온 그가 본 것은 한 차례 만난 적 있는 인물이었다.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삼십대 초반의 훈남이 준성을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입니다, 마스터 김준성.”
그를 찾아온 것은 몬스터 대책본부 차장 이현수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