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183)
제63장 갑(甲)의 음모
그래도 찾아온 손님이기에 매정하게 쫓아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현수를 데리고 찻집 자리로 올라간 준성은 자리를 권하며 마주 앉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이거, 환영받지 못할 건 알았지만 너무 날이 서 계시는군요.”
“그다지 이야기할 거리가 없다고 생각한 만큼 최대한 빠르게 대화를 마치고 싶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후우!”
용건을 가지고 찾아왔지만 만나는 김에 친분을 다질까 싶었던 이현수는 철통같은 방어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첫 만남에서 잘못 엉킨 실타래는 다시 풀어질 줄 몰랐다.
“제가 찾아온 이유는 마스터 김준성께서 생각한 것처럼 거래를 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이번 거래는 저번과 같은 일방적인 조건이나, 특정 상대를 깎아내리기 위한 것이 아닌 만큼 선입견 없이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진지한 그의 태도는 사람을 매료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준성도 적대적인 태도를 지우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말씀해 보십시오.”
“우선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마스터 김준성께서 엘리미스라는 회사를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
“얼마 전 N그룹에서 정부에 청탁이 들어왔습니다. 그룹 차원에서 엘리미스를 적대적 합병을 추진할 테니 A.O. 본부의 간섭을 배제해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상장되어 있지 않은 회사를 어떤 방식으로 합병하겠다는 뜻입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는 바가 없습니다.”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그 회피 속에 담겨 있는 수단이 얼마나 비열할지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었다. 입을 다문 준성이 침묵을 지키고 있자, 이현수는 강렬한 압박이 전신을 압박해 오는 것을 느꼈다.
단지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능력자들 누구도 이 정도로 압박감을 주는 이들은 없다. 마스터 김준성의 실력은 세계 10강, 그중에서도 최상위에 드는 것임이 틀림없다.’
정말 대단한 성취가 아닐 수 없었다. A.O. 본부장 김기정에 이어 김준성까지 대한민국은 두 명의 세계 10강급 강자를 보유했다.
비록 한 곳에 소속되어 있지 않고, 힘을 합치지도 않지만 그것만으로도 타국에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오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그가 탐이 났다.
물론 이 사실을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 되겠지만.
우선은 오늘 가져온 정보를 토대로 그와의 관계를 최대한 개선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무엇을 원합니까?”
“정부에서는 N그룹의 요청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습니다.”
“방금 전에 청탁을 해왔다고 들었는데요.”
“물론 정경 유착 부분을 부인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N그룹은 우리나라와 일본에 동시에 줄을 대고 있습니다. 우리와 관계가 틀어지면 언제든지 일본으로 갈아탈 이들이지요. 평소라면 N그룹의 로비에 마음을 돌리겠지만 정부 측에서는 마스터 김준성께서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적대 관계를 맺기 싫어서 N그룹을 버리겠다는 뜻입니까.”
“필요하다면 가능합니다. 물론 오늘 찾아온 목적은 N그룹의 청탁에 대해서만 언급하고자 찾아온 것입니다.”
최대한 준성의 비위를 맞추며 말을 했지만 그 사탕발림에 넘어갈 그가 아니었다.
“이야기가 잘 풀리면 다른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고. 맞지요?”
“예, 그렇습니다.”
“그럼 제가 결정하길 원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정부는 엘리미스를 보호하기 위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대기업의 지저분한 수법에 말려들면 준성이 세운 엘리미스란 회사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정부가 개입하여 신세를 지게 만든 뒤, 접점을 늘려 가려는 것이 이현수의 솔직한 의도였다.
하지만 다음에 나온 준성의 말은 그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아직 우리는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
“N그룹이 대단하다고 해도 자금으로 제가 밀릴 거라고 생각한 거라면 오산입니다. 우선 그 부분에 대한 확실한 정보를 얻고 찾아온다면 이야기의 방향이 달라질 거라 생각되는군요.”
“그게 무슨…….”
이미 조사를 다 거쳤기에 더 이상 할 것도 없었다. 뭐라 말을 하려는 이현수를 가로막은 준성이 진심을 다한 그를 배려하여 힌트를 주었다.
“미국에 있는 제 재산을 한번 조사해 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조사를 한 뒤 찾도록 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이현수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 뒤 자리를 벗어났다.
“N그룹이라고? 귀찮게 구는군.”
자신의 사업을 노리고, 사색까지 방해당한 준성의 얼굴에는 진한 짜증이 떠올라 있었다.
“주식 매수라…….”
때아닌 준성의 요청을 받은 더글라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에 대한 감시를 풀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 기업의 주식을 팔아 달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감시하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이렇게 태연히 부탁을 한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알래스카를 습격해 놓고 얼굴에 철판을 깔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아니기에 당당한 것인지 더글라스조차도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세라 앨런이 재촉하면서 연일 제거할 것을 종용했지만 그때마다 더글라스는 신중한 모습을 보이며 시일을 미루고 있었다.
아직 그 힘의 한계를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무의미하게 전력을 낭비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일단 원하는 걸 줘야겠군.”
준성의 혐의가 확실해지지 않는 이상 그는 미국의 몬스터 필드를 제거해 준 영웅이었다.
그와 끝을 볼 생각이 전혀 없는 더글라스로서는 원칙에 따른 대우를 이어 나갈 것을 굳혔다.
그런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연일 김준성을 성토하는 세라 앨런에 대한 의심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 N그룹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하지. 언제나 우리의 자리를 노리던 자들이니.”
갑자기 찾아온 준성이 털어놓은 사실을 듣고 정기정은 빙긋 웃었다.
“웃지만 말고 좀 도움을 주시죠?”
“허어,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이미 움직이고 있으면서 그런 말을 하나.”
“확실한 안전장치를 걸어 두는 것만큼 나쁜 일은 없다고 봅니다. 제가 움직이는 것이 T그룹에도 큰 기회로 작용하게 될 텐데요?”
“틀린 말은 아니군. 그럼 내가 움직이는 대가로 무얼 줄 수 있는가.”
“이걸 드리죠.”
키이이잉!
공간의 틈이 열리면서 준성의 손 위로 한 자루 검이 소환되었다. 일반적인 검이라면 정기정에게 어떠한 소용도 없을 것이지만 그 검이 금탑주였던 시절, 그 세계의 드래곤본으로 이루어졌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 이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지만 검은 그대로 아공간의 틈으로 사라졌다.
주도권을 쥔 준성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회장님의 안목이라면 충분히 이것의 가치를 알아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끄응! 별수 없군.”
여행자(Traveler)인 그이기에 지닐 수 있는 물건이었다.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드래곤을 본 적 없는 그였기에 준성이 내민 물건은 반드시 필요했다.
‘걸려들었군.’
안달이 난 정기정을 보며 준성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다른 차원의 드래곤본은 정기정의 본체의 것과 다소 다른 형태를 지니고 있기에 그렇다.
가공 마나인 포스는 인위적인 변형으로 인해 온전한 형태로 드래곤본에 스며들기 힘들다.
드래곤본이 단단한 이유는 마나를 온전히 받아들였기 때문이고, 포스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이곳 차원의 드래곤은 보다 강력한 강도를 지니지 못한다.
준성이 내민 검은 그 해답을 알려 줄 수 있는 진귀한 물건이다.
물론 그가 쉽게 풀 수 있도록 배려 따위는 하지 않지만.
‘포스를 마나로 풀어내는 것은 본인의 몫이지.’
“원하는 게 뭔가? 말만 하게.”
“제가 그렇게 많은 것을 원하는 건 아닙니다.”
입을 떼는 준성의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걸리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정기정은 준성이 내민 조건을 모두 수용했다. 크게 무리가 가는 것이 없었고, 오히려 T그룹이 대한민국에 독보적인 그룹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정기정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그래도 너무 많은 것 아닌가.”
“싫으면 거절하셔도 좋습니다.”
“끄응, 별수 없군. 받아들이겠네.”
“옳은 결정입니다.”
앓는 소리를 흘린 정기정의 모습에 준성은 미소를 지었다. 당했다는 생각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그는 아공간에서 건네진 검을 보고 금세 화색을 띠었다.
“아참, 그리고.”
“말씀하십시오.”
“시크릿 코드 일행이 자네와 만남을 가지고 싶어 하는데 다른 생각은 없는가?”
“저는 특별히 생각이 없습니다.”
아리스턴은 지속적으로 준성과 만남을 갖길 요청했지만 번번이 거절하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요청할지 뻔했고, 준성은 그들과 얽힘으로써 차차 의심을 풀고 있는 미국과의 관계가 틀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만나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이유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자네가 그토록 평온을 찾길 원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평온을 찾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지. 이대로 방치하게 되면 신족의 강림은 필연적일 것이네. 시크릿 코드, 그들의 힘으로 막는 것은 불가능하고, 이곳 능력자들도 힘을 규합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지. 하지만 자네라면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네.”
“방지라, 저는 신족에게 그다지 악감정이 없습니다.”
“악감정이 없어도 그들이 자네를 용납할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지.”
확신 어린 그의 말에 찜찜함이 든 준성은 입맛을 다셨다. 자신이 움직이길 종용하는 것이지만 자세한 사실의 언급조차 없이 하는 위협이기에 가슴 깊숙한 곳에서 호기심이 피어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한 번 만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단, 만남만으로 제가 결정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 충분하네. 이제 난 그들의 부탁도 들어주었으니 마음 편히 방구석에 틀어박혀 연구만 하면 되겠군.”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는 그의 표정에서 처음부터 모든 것을 의도했다는 걸 알아차린 준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준성의 연락을 받은 아리스턴은 곧장 찻집으로 향했다. 처음부터 기다리고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렇게 다시 뵙게 될 줄 몰랐습니다.”
“다시 만나자고 해서 미안하네. 관여하지 않고자 하는 걸 알고 있지만 우리의 사정도 다급하다 보니 별수 없더군.”
“솔직히 내키지 않습니다. 알래스카 비밀 기지에서 도움을 준 것만으로 제 본분은 다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으음.”
미온적인 태도에 아리스턴은 침음을 흘렸다. 생각보다 준성의 태도가 완고하다는 것이 느껴졌던 것이다.
“자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제가 움직여야 할 만한 이유를 말씀해 보십시오. 저는 지금의 평온을 깨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그것을 깨버릴 만한 사실을 알려 주신다면 고려해 보겠습니다.”
“…….”
온화한 어조였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알고 있는 것을 다 말해 보라는 뜻이었다.
유리한 입장에서 불리한 자신의 처지를 찍어 누르는 행동이었지만 여태까지 일방적인 도움만 받았던 아리스턴으로서는 화를 낼 수 없었다.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그는 이내 마음을 굳힌 듯 준성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알겠네, 알고 있는 걸 말해 주도록 하지.”
☆ ☆ ☆
“…….”
준성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것을 본 아리스턴은 미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그에게 사과를 건넸다.
“미안하네.”
“이야기를 하는 데 있어 다른 분을 대동하겠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에 대해 할 말이 없네. 다시 한 번 사과하지. 하지만 자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멜리사가 최고라고 생각했네.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없겠는가.”
간곡한 아리스턴의 어조에 준성의 시선이 그의 곁에 앉은 멜리사에게 향했다.
은빛 머릿결을 지닌 그녀는 환상 속에서 나온 듯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엘프였다. 특히 온화하게 짓고 있는 웃음은 보고 있으면 헤어 나오지 못할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제가 마음에 드시지 않나 보네요.”
“하고 싶은 말만 해주시면 됩니다.”
준성 자신도 왜 멜리사에게 이렇듯 적대감이 드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감각은 계속해서 속삭이고 있었다.
그녀와 엘리엔을 만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는 순간, 상상도 하지 못할 여파가 들이닥치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우선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 참여하게 되어 죄송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제가 좀 더 자세하게 말을 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이렇게 끼어들게 되었어요. 불편하시겠지만 잠시 이야기를 들어 주시면 안 될까요?”
“말씀하십시오.”
여러 가지 감정이 머릿속을 교차했지만 자신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자세를 바로 하고 눈을 바라보자, 그녀의 눈이 살며시 반달 모양을 그렸다. 남자라면 호감을 넘어 사랑에 빠지게 만들 치명적인 매력이었지만 준성은 담담하기만 했다.
“우선 드리고 싶은 말은 현재 세계는 이곳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에 처해 있어요.”
“훨씬 위험하다?”
“네, 몬스터가 등장하고, ‘그들’이 나타났어요. 그런데 몬스터 필드에 들어서는 순간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끼지 않았나요?”
“…….”
자신을 떠보는 느낌이었기에 준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멜리사도 기대하지 않은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세계는 ‘그들’에게 패했어요. 하지만 세계 전체가 온전히 그들의 손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면 곤란해요.”
“무슨 뜻입니까?”
“세계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칠 수 있지만 ‘그들’이 세계 자체를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럼에도 이곳 지구를 넘보는 것은 우리 세계보다 쉽게 점령할 수 있다고 여겨서였죠. 그래서 차원의 벽을 허물고 필드를 만든 거랍니다.”
멜리사의 설명을 들었지만 준성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쉰 그녀가 간략하게 설명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우리 세계에 ‘그들’의 지배가 닿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뜻이에요. 그것은 몬스터이기도 하고, 세상을 악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려는 악마와도 같은 존재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준성의 얼굴이 짜증이 서렸다. 스스로를 신족이라 일컫는 이들이 나타나질 않나, 이제는 악마까지 있단다. 고려해야 할 변수가 늘어나는 것은 달갑지 않았다.
“인간들이 말하는 ‘대격변’으로 인해 차원의 벽에 구멍이 뚫렸어요. 이것은 그들도 이 세상에 강림할 수 있는 요건을 충족시켰다는 의미가 돼요. 그리고 신족도 통제가 되지 않는 그들을 이 세계로 보내길 원하고 있고요.”
“서로 상잔시키겠다는 의미입니까?”
“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입니까?”
“하아, 몬스터와 악마의 강림은 ‘그들’에게 우리 세계의 온전한 지배를 가져다주고, 이 세계의 악화를 가져와요. 이는 두 세계를 그들의 손에 떨어지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가능성이 높아요. 그것을 막아야 해요.”
그 말을 들으면서 준성은 비로소 신족이라 칭하는 이들이 본격적으로 이 세계에 강림하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드래곤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하여 모든 것이 끝난 게 아니었다. 아직 신족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들로 인해 지구로 강림할 만한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내 힘이 필요하다?”
“맞아요. 당신의 힘이라면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
멜리사의 간곡한 부탁을 들었지만 준성은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 눈을 똑바로 직시했는데, 흔들림 없는 맑은 눈빛은 그녀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당장 결론을 내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지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당신의 도움이라면 충분할 거예요. 여행자(Traveler)인 당신이라면.”
의미심장한 그녀의 마지막 말이 들려왔지만 준성은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멜리사와의 만남은 준성에게 많은 고민을 안겨 주었다. 가장 먼저 그를 괴롭힌 것은 신족 이외에 그들만큼 강한 악마와 몬스터의 존재였다.
그것이 정확하게 어떤 존재인지 몰랐지만 조만간 지구로 강림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무슨 생각 하세요?”
깊은 상념에 빠져 있던 준성은 정신을 차리고 옆을 보았다. 세희가 자신에게 의문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제야 자신이 대학교 안에 진입했음을 깨달은 준성은 어색하게 웃었다.
“아아, 그냥. 이렇게 학교를 다니는 것도 오랜만인 것 같아서. 대학교는 처음이기도 하고.”
“같이 다니는 것 자체가 좋은 거죠. 이야기로만 듣던 대학 생활을 시작해서 좋고요.”
“특별한 로망 같은 건 없어. 그러니 너무 기대를 하면 곤란할 거야.”
“곤란하긴요. 준성과 같이 다니고 새로운 것을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걸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빵빵!
걸음을 옮기던 둘은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경적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고급스러운 외제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준성과 세희가 있는 곳에 멈춰 서더니, 창문이 열리면서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학부 회장인 최영섭이다.
“너희는 이제 들어가는 거냐?”
“안녕하세요, 선배님.”
세희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고, 준성도 덩달아 인사를 했다. 그는 준성을 보지도 않은 채 세희에게 시선을 고정하더니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학교 정문에서 강의실까지 오래 걸리니 웬만하면 차를 사도록 해. 아니면 차가 있는 친구를 사귀는 게 나으려나? 그러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예쁜 몸매가 근육질로 되어 버릴지 모르니까.”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그냥 그런 거라고. 그럼 강의 시간에 보자고.”
여유롭게 손을 저어 보인 그가 그대로 차를 몰아 자리를 벗어났다. 그 모습을 보던 준성이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날 무시한 게 맞지?”
“전 모르겠는걸요.”
“살다 보니 이런 취급도 다 당해 보는군.”
“준성도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혹시 흔들리기라도 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요.”
장난기 어린 준성의 말에 세희도 장난을 섞어 대답했다.
“차를 사야 하나?”
“제가 운전해 드릴 용의는 있어요.”
“하하! 불만이 있으면 정말 차라도 사야 할 판이네.”
둘은 유쾌하게 웃으면서 강의실로 걸어갔다.
준성이 대학에서 배우는 것은 대격변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 몬스터에게서 추출된 에너지석이 세계에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 대해서다.
순수한 에너지를 품은 이 돌은 공해를 일으키지 않는 무공해 자원으로, 고갈되기 시작한 석유를 비롯한 지하자원을 대체하면서 세계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아직 사용처가 많기에 석유의 위상이 흔들려도 어느 정도 위치를 선점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석유를 수출하는 중동 지역에서는 에너지석의 등장을 경계했고, 이것을 찍어 누른 것이 국제 능력자 연맹의 강력한 힘이었다.
몬스터의 위협에 안일하게 대처하며 능력자 양성을 게을리한 중동 국가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대비할 수 없었고, 전적으로 국제 능력자 연맹에 기대야 하는 처지였다.
이는 세계 에너지 시장을 빠르게 안정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준성이 설립한 엘리미스는 가공 마나인 ‘포스’의 등장에 힘입어 선풍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세계 최초 ‘포스’가 담긴 차였고, 그 효과는 이미 입증이 되었기에 매출이 폭등하기 시작한 것이다.
에너지석은 몇몇 대기업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지 않은가. 그러다 보니 에너지석에 담긴 ‘포스’를 맛보고자 하는 생각이 대중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이런 매출의 성장은 대기업의 관심을 샀고,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 바로 N그룹이었다.
이러한 관심에 속에서 준성은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세희가 직접 만든 차를 체인점에 공급하고, 찻집에서 쓸 물품을 전달하는 것 외에는 여태까지 해야 할 업무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해외 수출을 준비하면서 본격적으로 몸집 부풀리기에 나섰는데, 전반적인 일의 총괄은 고상준이 맡고, 회사의 경영은 전문 경영인을 둬서 틀을 갖추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갑작스럽게 온 고상준의 전화는 의아함을 느끼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큰일 났습니다. 현재 사내에서 인원이 무차별로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체인점 몇몇이 문을 닫겠다고 강짜를 부리는 중입니다.”
“……이유가 뭡니까?”
잠시 말끝을 흐린 준성이 묻자, 머뭇거리던 고상준이 어렵게 대답했다.
“N그룹의 농간 같습니다. 정확한 정황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최근 몇몇 간부들이 N그룹의 사람들과 만남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로군요.”
“예, 하지만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기에 그들에게 따져 물어볼 수 없는 상황입니다.”
“증거라,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A.O. 본부에 의뢰를 할 수도 있지만 독자적인 정보 수집을 하는 곳은 아니었다. 준성은 대기업의 치졸한 수법에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자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심기를 긁고자 했다면 확실히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현재 회사에서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습니까?”
“사장님이 법적으로 대응을 하겠다고 말씀하셨지만 대기업이 마수를 드러냈다는 것만으로도 직원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빠르게 여론을 가라앉혀야 한다는 말이군요.”
“예.”
“알겠습니다. 조치를 취해 보겠습니다. 이사님은 그때까지 직원들과 체인점 단속에 힘써 주십시오.”
준성의 말을 들은 고상준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지만 상황은 빠른 속도로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체인점 몇 곳이 빠져나가고, 직원들이 흔들릴 무렵, 몇몇 뉴스에서 헤드라인으로 엘리미스를 다룬 것이다.
[속보! 엘리미스 회사의 차에서 이물질이 발견됐다!> [선풍적인 차의 인기! 이대로 끝나나?> [뛰어난 효과 속에 가려진 부작용! 차에 대해 알아보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