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187)
제67장 N그룹의 몰락
더글라스와의 대화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옥상의 특성상, A.O. 본부장이라는 특성상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처지였다.
“…….”
준성과 만남을 가진 더글라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짧은 순간 이루어진 대화였지만 오고 간 대화의 밀도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세라…….”
“기다렸나 봐?”
집무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세라가 안으로 들어섰다. 평소와 확연하게 다른 모습이었지만 더글라스의 얼굴에 어떠한 표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보군.”
“그렇지 않으면 내가 왜 왔겠어.”
전보다 훨씬 부드러운 어조였다. 하지만 그 속에 깃든 의도가 보였기에 더글라스는 입을 닫고 말해 보라는 듯 눈짓을 했다.
“한세희 건은 어떻게 할 거야?”
“아아, 안 그래도 그 부분 때문에 말을 하려고 했다. 아무래도 접어야 할 것 같군.”
“……왜?”
순간 표정을 굳혔던 세라가 예의 신색을 회복하며 물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더글라스는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뒤 말했다.
“지금 당장 무리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으니까. 현재 우리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건 반 능력자 연합이다. 부족한 준비로 김준성을 상대하는 건 우리의 손해를 자처하는 일이 될 뿐이지.”
“김준성, 그는 우리에게 최악의 상대로 커 나갈 인물이야. 그래도 괜찮겠어?”
“강적일수록 시간을 갖고 상대하는 것이 옳겠지. 나는 내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더글라스의 마음을 굳히려고 왔던 세라는 그의 마음이 굳건하다는 것을 깨닫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오히려 원치 않는 방향으로 일이 흘러갈 수 있다고 보았으니까.
내키지 않지만 납득하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뜻이 맞지 않아 유감이군.”
“강적을 신중하게 상대하는 건 틀린 게 아니니까. 마음이 맞지 않아서 유감이지만 그 결정에 지지해.”
“고맙군.”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난 세라는 다른 말 없이 방을 벗어났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더글라스의 눈에는 좀 전까지 볼 수 없었던 강렬한 열기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준성이 돌아왔지만 강의를 듣기 위해 집을 나선 것은 세희 혼자였다.
여느 때처럼 다를 바 없는 이동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늘 화려한 외제차를 이끌고 학교로 들어오던 최영섭이 오늘은 강의실 앞에 서서 세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강의가 끝나면 학부 사무실에서 볼 수 있을까?”
“네, 그럴게요.”
특별한 추파도 아니었기에 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리고 강의가 끝난 뒤, 집이 아닌 학부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사무실에는 조교를 비롯한 여러 학생이 있었는데, 세희가 안으로 들어가자 일제히 시선이 집중되었다. 모두 의아함을 담아 바라보았지만 세희는 개의치 않고 최영섭에게 다가가 말했다.
“왜 부르셨어요?”
“부탁할 게 있어서.”
“뭐죠?”
“그게 그러니까…….”
최영섭이 부탁한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학부에서 곧 있을 축제를 비롯하여 신입생들의 편의를 위한 자료를 준비해 뒀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세희가 직접 찾아가서 주문을 해달라는 게 내용이었다.
“여간 까다로운 분이 아니거든. 예쁜 여자한테는 약하니까 매년마다 이래 왔어. 부탁해도 될까?”
“어렵지 않으니까 해볼게요.”
“고맙다.”
최영섭은 자세한 주소를 가르쳐 주었고, 곧장 학부 사무실을 나선 세희는 부탁받은 장소로 향했다.
학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지만 도착 장소로 가는 길 곳곳에 골목길이 존재했다.
처음에는 집과 원룸이 빼곡하게 세워진 길을 지났지만, 점점 걸음을 옮길수록 인적이 드문 곳으로 바뀌었다.
“…….”
어느 순간 세희의 얼굴에 표정이 지워져 있었다. 그리고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골목에 도착했을 무렵, 그녀의 입이 열렸다.
“이제 모습을 드러내죠.”
그녀의 목소리가 조용히 골목길에 울려 퍼졌다. 그럼에도 아무런 기척이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감각에는 불순한 의도를 지닌 자들이 접근해 있었다.
“이름을 언급해야 하나요? 최영섭 회장.”
“……능력자인 만큼 알아차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
세희가 지나온 골목길 사이로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선두에 서 있는 것이 바로 세희에게 부탁을 했던 최영섭이었다.
그는 입가에 짙은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능력자라는 사실을 잊고 이런 수작을 부렸군요.”
“능력자인 걸 내가 모를 리 없지.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들더군. 네가 내 앞에서 공간 이동 능력을 보인 건 놀랍지만 다중 능력(Multi-Ability)을 보유했다고 생각이 되지는 않거든.”
“그러다 큰 코 다칠 수 있는데요.”
“그건 다친 뒤에 생각해 보고, 지금 딱 봐도 숫자가 안 되는 게 보이지? 순순히 항복하면 다치지 않게 배려를 해줄 수 있는데 말이지.”
“그 눈부터 어떻게 하고 말해 줬으면 믿었을 수도 있을 텐데. 아쉽네요.”
이미 세희를 다 잡은 물고기라고 생각하고 있는 최영섭은 음흉한 눈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오늘의 목적은 당신이 아니니.”
“여유를 부려도 소용없다.”
세희가 처음 능력을 보였을 때 최영섭이 느낀 놀라움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컸다. 그래서 A.O. 본부에 소속된 능력자인가 싶어 검색을 해보고, 국제 능력자 연맹에도 검색을 해보았다.
하지만 세희는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능력자였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는데, 아직 정식 능력자로 등록될 만큼 실력이 되지 않거나 독자 노선을 걷고 있다는 뜻이 된다.
어느 것도 뒷배가 없다는 걸 의미했기에 최영섭은 자신 있게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다.
“제가 여유가 없어서, 빨리 처리할게요.”
미소를 지어 보인 세희가 손을 뻗자, 최영섭은 반사적으로 능력을 끌어 올렸다.
화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는 전신이 붉은 불꽃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이현수의 명령을 받고 뒤처리를 담당하기 위해 따라온 N그룹 인원들은 놀란 표정으로 멀찍이 물러났다. 그사이 최영섭이 성큼성큼 다가가며 세희를 한껏 압박했다.
“하여간 남자들이란.”
곧잘 발생하는 상황에 한숨을 푹 내쉰 세희가 마법을 시전했다.
삽시간에 수십 개의 파이어 볼이 허공을 뒤덮기 시작했다.
어렵지 않게 만들어 낸 화염구를 본 최영섭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크게 뜨였다.
“이게 무슨…….”
“그러니 상대를 잘 봐가며 달려들어야죠.”
세희의 의지로 움직이는 파이어 볼이 빠른 속도로 최영섭을 향해 쇄도했다.
퍼버버벙!
그의 몸을 강타한 파이어 볼이 연이어 폭발하면서 붉은 불꽃이 일어났다. 화염에 휩싸여 있던 최영섭의 몸이 검게 그을리더니 이내 섬뜩한 비명 소리가 골목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끄아악!”
제아무리 그가 화염 인간이라고 해도 대마법사가 만들어 내는 불꽃은 그 격 자체가 달랐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최영섭은 섬뜩한 고통 속에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푸시시!
캔슬하기 무섭게 그를 괴롭히던 화염이 사라졌다. 전신이 검게 그을린 그를 무감정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세희가 N그룹에서 파견한 인원들에게 시선을 옮기자, 그대로 줄행랑을 놓았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최영섭이 제압한 세희를 운반하는 것이지, 능력자들 대결에 끼어들어서 곤죽이 되는 게 아니었다.
“이제 진짜인가.”
한숨을 푹 내쉰 그녀는 그 자리에 그대로 꼿꼿하게 서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짝짝짝! 하는 박수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복면을 써서 눈만 드러난 호리호리한 체형의 남자였다.
“대단한 무위 잘 보았습니다, 마스터 김준성의 일행은 개개인이 모두 세계 10강에 준하는 강자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게 사실인 듯하군요.”
“정체부터 밝혀 주세요.”
“저는 반 능력자 연합에서 능력자 스카우트를 담당하고 있는 크랙(Crack)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크랙이라 불릴 정도면 상당히 강한가 보네요.”
“하하, 조무래기들에게 힘을 쓰는 정도입니다. 아무래도 세희 씨보다는 약할 확률이 높지요.”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의 전신에 갈무리된 힘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전에 섀도우가 신세를 끼쳤습니다. 접근하는 방식이 옳지 못한 걸 알고 있으니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그 일은 신경 쓰지 않아요. 다만 제가 묻고 싶은 건 N그룹과 연관이 있는 건가요?”
“그들에게 의뢰를 받았지만, 실상은 한세희 씨와 마스터 김준성을 포섭하기 위해 움직였다고 봐야 함이 옳을 것 같습니다.”
“……결국 N그룹도 이용을 당한 거네요.”
“어차피 서로 이용당하고 이용하는 처지가 아닙니까? 그 부분에 문제라도 있는지?”
“아니요, 문제는 없어요. 다만 그 이야기를 하려면 주인공이있으니 그와 이야기를 해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주인공이라 함은?”
“몰래 와서 미안하군.”
“…….”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크랙이 몸을 움찔 떨었다. 하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언제 도착했는지 모를 준성이 서 있었다.
“하하, 오늘 제가 단단히 허를 찔리는 기분입니다.”
“스스로를 크랙이라고 하더니 자신감은 넘치는군.”
“마스터 김준성에게 섀도우의 은밀함이 신경에 거슬릴 수 있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제 당당함이라면 어느 정도 어필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자신감이 넘치는 걸 보니 역시 무언가를 도모하고 있는 게 맞고. 처음에는 ‘그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고. 갈수록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군.”
자신의 예상이 틀린 걸 알아차린 준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법 많은 정보를 모았다고 생각했지만 도통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준성의 중얼거림을 들은 크랙은 흥미로운 표정이었다. 자신들에게도 있어 ‘김준성’을 비롯한 그의 일행들은 베일에 싸인 존재였다.
서로가 서로를 궁금해한다면 호기심을 충족시킬 만한 요건이 있음이 분명했다.
“마스터 김준성께서 말씀하신 ‘그들’이 누구인지?”
“신족.”
“…….”
순간 말을 멈춘 크랙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 갔다. 그리고 ‘신족’이라는 단어에 반응을 한 그를 보며 준성의 의혹은 확신이 되었다.
“못 들을 단어를 들은 것처럼 여기나 보군. 하긴, 그들에 대한 원한이 깊을 테니.”
“당신이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습니까.”
“크랙, 네가 칼버족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어, 어떻게 그걸…….”
“칼버족의 기운을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지. 인간과 비슷하지만 다른 점이 있어서 그렇게 다니는 것도 잘 알고.”
“…….”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된 크랙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단지 이 세계에서 계획한 바를 수월하게 수행하고자 했다가 자신들의 정보가 낱낱이 밝혀질 줄은 몰랐다.
“네게 할 말은 없다. 내 자세한 이야기가 듣고 싶다면 네가 속한 조직의 최상위, 반 능력자 연합 말고 그 위의 인물에게 내 말을 전하도록.”
파아앙!
날카로운 기운이 준성을 덮치기 무섭게, 그의 주변에 푸른 방어막이 생성되었다.
“기습 공격을 해도 소용없다는 건 알았을 테고.”
“……알겠습니다. 제 선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니 확실하게 전달하도록 하지요. 대신, 그때가 되어서는 문제를 숨길 생각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날 선 경고를 남긴 뒤 매섭게 준성을 노려본 크랙은 그대로 모습을 감추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갈피를 잡지 못한 세희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물었다.
“가서 말해 줄게. 일단 이 녀석부터 처리하도록 할까.”
쓰러져 있는 최영섭을 가리키자, 세희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지만 우선 바로 앞에 당면한 문제부터 처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 ☆ ☆
아득해진 정신이 천천히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꿈뻑꿈뻑.
눈을 떠보려고 했지만 여느 때와 달리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간신히 눈을 뜨니 주변이 뿌옇게 보이면서 제대로 형상이 잡히지 않았다.
여러 차례 노력을 기울인 끝에 간신히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여, 여긴…….”
주변에는 수십 명의 인원이 좌우로 착석해 있었다. 그리고 매서운 눈으로 최영섭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면에는 대한민국 A.O. 본부장이자 세계 10강인 김기정이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평소라면 A.O. 본부 말단에 불과한 최영섭이 감히 볼 수 없는 존재였다.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몰랐지만 이 자리 배치 구도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중죄를 저지른 능력자가 재판을 받는 곳이었다.
“죄인, 최영섭이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럼 즉시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김기정의 말을 시작으로 재판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잠기운에서 완전히 벗어난 최영섭은 자신이 죄인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름 최영섭, 나이 23세. 현재 대학 AO 학부 회장으로 있으며, 뛰어난 수완으로 젊은 나이대 능력자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 차례 몬스터 사냥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으며, 미래가 주목되는 능력자 10인, 능력 운용 서열 5위 등 준수한 성적을 거둔 인재입니다. 하지만 이틀 전인 4월 23일에 N그룹과 연계하여 한세희 양을 납치하려고 했으며, 뒤로 거액의 뇌물을 받은 것이 포착되었습니다.”
“그 외에는 없습니까?”
“평소 능력자인 것을 거들먹거리며 수많은 여자들을 취했지만 그것은 본인의 재능을 기반으로 한 것이기에 죄로 추정하기에는 어렵습니다.”
“…….”
그 말이 무섭게 따가운 시선이 최영섭에게 쏟아졌다.
마지막 말을 들은 여자 능력자들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자신이 죄인의 입장에 처해 있고, 그동안 행적이 낱낱이 까발려졌다는 걸 알아차린 최영섭은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최영섭, 당신이 왜 이 자리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그, 그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이상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저지른 죄를 떳떳하게 밝힐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몇 되지 않았다.
차마 자신의 입으로 말을 하지 못한 채 말끝을 흐려야만 했다.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일별한 김기정은 최영섭의 행적을 조사한 정보부장을 바라보았다.
“계속 보고하시죠.”
“예, 상황을 추정해 보면 현재 N그룹이 마스터 김준성의 회사인 ‘엘리미스’를 노리고 있으며 그곳의 상품인 차를 만드는 비법을 한세희 씨가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리고 N그룹에서는 한세희 씨를 납치하기 위해 피고 최영섭은 N그룹 회장 이만정의 손자인 이현기의 부탁을 받았고, 거액의 뇌물과 한세희 씨의 몸을 대가로 수락을 했습니다. 그리고 D-Day인 4월 23일 한세희 씨를 습격했다가 당하고 말았습니다.”
“잘 들었습니다. 피고 최영섭, 이에 대해 할 말이 있습니까.”
“저, 저는 몰랐습니다. 그저 친한 친구였던 이현기의 부탁을 듣고 철없게 움직였을 뿐입니다.”
A.O. 본부는 변호인 없이 오로지 스스로 자신을 변호해야 했기에 최영섭은 필사적으로 범행을 부인했다. 명확한 증거가 없다면 증거 불충분을 노릴 만하다는 생각도 한몫을 하였다.
“피고의 말은 그럴 듯하지만 여기에 그동안 학부 회장이라는 것을 빌미로 한세희 씨에게 수작을 부린 사진들이 있습니다. 또한 평소 학부 학생들의 증언을 들어 본 바, 최영섭이 한세희 씨를 작업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움직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
직접 사진을 들어 보이고, 학부 학생들의 증언까지 녹음한 걸 들려주자, 최영섭은 고개를 숙였다. 빠져나갈 구멍이 아예 없음을 확인한 것이다.
“피고 최영섭.”
“예, 본부장님.”
“한세희 씨가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까?”
“……잘 모릅니다.”
최영섭은 억울했다. 그저 여자 하나 잘못 건드렸을 뿐인데,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자신은 전도유망한 능력자였고, 미래에 대한민국의 이름을 빛낼 자신이 있었다.
고작 하나의 실수 때문에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럼 김준성이란 이름은 들어 보았습니까?”
“분명 학부의 신입생이었습니다.”
최영섭이 알고 있는 김준성은 선후배, 동기와도 잘 어울리지 못하며, 한세희와 붙어 다니는 찌질한 녀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다음 이어진 말은 그를 아연하게 만들었다.
“그가 바로 마스터 김준성입니다.”
“…….”
마스터 김준성을 왜 모를까.
단신으로 미국 A.O. 본부와 대적하였으며, 중국과 일본 A.O. 본부가 연합한 정예 능력자들을 제압한 최강의 능력자였다.
세계 10강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을 뿐이지, 이미 그 이름은 세계 최강의 능력자인 더글라스와 비슷한 반열로 취급받고 있었다.
그가 이제 갓 대학교에 들어간 그 애송이 녀석이라니?
“그리고 한세희는 마스터 김준성의 사촌입니다.”
이제야 상황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미친 짓을 했는지도 알게 되었다.
아름다운 꽃에 장미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세계 최강의 능력자일 줄은.
뒤늦게 반성하는 표정을 보았지만 김기정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최영섭을 이곳까지 데려온 것이 준성이었고, 세희도 함께였다.
확실한 처벌을 하지 않으면 그와 사이가 벌어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다.
“피고 최영섭은 그동안 벌인 행적을 보아, 자신이 능력자라는 사실을 이용하여 많은 이득을 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능력을 3년 동안 봉인하고, 몬스터 토벌에 백업을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김기정의 선언은 최영섭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최종 판결에 그는 고개를 푹 떨궜다.
반성을 했지만 되돌리기에는 너무 먼 길을 걸어왔다.
집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세희는 이나와 엘리엔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준성을 바라보며 조금 전 있었던 일에 대해 해명을 바랐다.
“리엔과 이나는 잘 모르고 있겠지만 오늘 세희를 노리던 자들을 잡게 되었어.”
“정말요? 어떻게 했어요? 날 불렀으면 완전 박살을 냈을 텐데!”
“잘 해결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 부분은 넘어가고, 오늘 반 능력자 연합에서 나온 자를 만났어. 그리고 그의 정체는 칼버족이었고.”
“…….”
준성에게 칼버족을 어디에서 만났는지 들은 이나와 엘리엔의 눈이 크게 뜨였다. 세희 또한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반 능력자 연맹이라는 곳은 처음부터 의심이 많이 되는 곳이었어. 정체성도 없고, 별다른 구심점도 없었으니까. 근데 세희를 찾아온 ‘크랙’이라는 자를 보면서 확신을 얻을 수 있었어. 반 능력자 연맹은 신족이 아닌 그와 반대되는 자들이 세운 곳이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우선 크랙이라는 자가 대답을 가지고 올 때까지 기다려야겠지. 나도 확신을 갖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어. 그들이 어떤 입장인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지구로 건너왔는지 알아야 하니까.”
“준성은 누가 반 능력자 연맹을 이끄는 거라고 생각하나요?”
그렇게 물어보았지만 이미 대답은 나온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준성의 생각도 그녀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족과 반대되는 입장, 저들이 악마라고 불리는 존재야.”
“…….”
이만정 회장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기 힘들었다.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N그룹은 일가가 보유하고 있는 주식의 양이 그리 많지 않다. 상당수가 우호 주주와 외국 주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들의 권익을 보호함으로써 적극적인 지지를 얻어 지배 구조를 이루었다.
평소 주주들에게 섭섭하지 않은 대우를 하기에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T그룹이 N그룹의 주식 보유량을 발표한 것이 얼마 전이었다.
그 양이 그리 크지 않아 이만정 회장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저 자신과 만남 이후, 멈추지 않는 행보에서 경고의 의미가 섞인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후 벌어지는 일들은 충격의 연속이었다.
다른 명의로 모인 주식의 양이 엄청났으며, 우호 주주들이 마음이 돌아섰다.
그제야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주주총회에서 확실해졌다.
“……따라서 N그룹의 성장을 저해하고, 비자금을 조성한 이만정 회장의 해임을 가결합니다.”
땅땅땅!
그것은 평생 이뤄 놓은 모든 것을 앗아가는 소리였다.
“안 돼! 말도 안 되는 소리 마라!”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주주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비웃음을 띤 채 N그룹에서 쫓겨난 이만정 회장을 바라보았다.
“아쉽게 되었군, 이 회장.”
“정 회장! 이게 어떻게 된 거요!”
당장 정기정에게 달려가서 멱살을 잡을 기세였지만 사나운 T그룹 경호원들의 기세에 더 접근하지 못했다.
“그러니 내가 경고를 하지 않았나. 건드릴 사람을 건드렸어야지.”
“건드릴 사람?”
“나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인물을 건드리다니, 역시 인간들은 욕심 때문에 흥하고 욕심 때문에 망하는군.”
대기업이자 재벌인 N그룹을 T그룹으로 흡수하려면 힘든 과정을 겪겠지만 어차피 시간문제였다. 돈에 큰 미련이 없는 정기정은 준성의 요구에 성실하게 응하면서 하고자 하는 일을 할 뿐이다.
“놔! 놓으라고!”
이만정 회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유유히 사라지는 정기정의 뒤를 쫓지 못했다.
N그룹이 T그룹에게 흡수되었다는 소식은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다.
재계 5위 기업이 1위에게 흡수된다는 소식은 대한민국에 초거대 공룡 재벌이 탄생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언론에서는 수많은 우려를 드러냈지만 그동안 축적한 자금으로 차근차근 인수 절차를 밟았다. 그리고 N그룹 기존 주주들도 순순히 협력하면서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자네는 상당히 무서운 인간이로군.”
“상대적인 것입니다. 회장님에게는 우호적인 아군이니까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자네가 적이 아니라서 참 다행이야.”
미소 짓는 김준성을 보며 정기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N그룹이 T그룹에 넘어간 일련의 과정은 준성의 개입이 있어서 가능했다.
이만정 회장 일가를 든든하게 받쳐 주는 우호 주주들은 단순히 재계 1위 T그룹이라고 해서 설득할 수 있을 만큼 만만치 않았다.
그걸 알고 있었기에 준성은 아주 간단한 방법을 동원했다.
바로 정신 마법이다.
T그룹에게 우호적으로 대하라는 명제 하나만으로 N그룹을 침몰시키고, 이만정 회장 일가를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정기정은 동족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들에게 거리낌 없이 정신 마법을 시전하는 준성이 놀라웠고, 별다른 부작용이 없다는데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들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원래는 쫓아내려고 했지만, 인맥이 두터운 것 같아서 말이죠. 뒤처리는 확실해야 좋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날, 이만정 회장 일가가 세금 탈루로 구속되었다는 사실이 전해졌다.
그와 친분이 두터운 재벌들이 움직이겠지만 어떻게 돌아갈 것인지는 지켜볼 일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