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188)
제68장 빛과 어둠
이만정 회장 일가를 처리한 뒤, 준성은 편안한 일상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길지 않은 휴식임을 그는 잘 알았다. 자신이 뿌린 씨앗이 얼마 지나지 않아 수확이 될 것이며, 그것은 세계에 큰 파장을 일으킬 것임이 분명했다.
“보르도에서 일어난 몬스터 웨이브가 심각하다네요.”
세계는 여전히 몬스터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틀 전 보르도에서 벌어진 몬스터 웨이브로 인해 프랑스는 현재 모든 능력자를 총동원하여 진군을 가로막고자 했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급히 주변국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타국도 적극적이지 못했다.
평지가 많은 각국의 사정상 언제 필드에서 몬스터가 뛰쳐나올지 몰랐으니 말이다.
그 가운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반 능력자 연맹과 연이은 몬스터의 공격 등, 세상은 소란이 가라앉을 날이 없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한 가지 느낀 게 있어.”
“뭔데요?”
“더 이상 뒤로 물러서서 방관만 하고 있을 수 없다는 것. 좋든 싫든 힘이 드러난 이상 앞으로 충돌은 필연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배신과 승리의 열매를 맛보았으니까.
그럼에도 여태까지 애써 모른 척을 했던 것은 평온이 그리워서 그랬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바람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준성은 잘 알았다.
“……동감이에요. 준성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길 원하고 있었어요.”
그 말을 들은 세희도 동감을 표했다. 조용히 산다고 뒤로 물러나기에는 이미 너무 먼 길을 온 상황이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움직일 생각이야. 가장 먼저 만날 대상은 반 능력자 연맹이 될 거고.”
“그들과 손을 잡으려고요?”
“우선 어떤 의도가 있는지 알아내는 게 우선이겠지. 반 능력자 연맹이 신족에게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인지, 아니면 세계를 노리는 또 다른 조직인지 판단하는 게 우선이니까.”
무수히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상황에서 적 아니면 아군이라는 이분법적 논리가 위험하다는 걸 준성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구분하는 게 가장 쉬운 방법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네?”
“몸조심하도록 해. 나를 노리기 쉽지 않다고 여기면 다음 대상이 세희 네가 될 수 있으니까.”
“알겠어요. 그러지 않도록 꼭 붙어 다녀야겠네요.”
“이나가 또 질투하겠네.”
질투의 화신이 된 이나를 떠올리며 투덜거리자, 세희가 작게 웃었다.
능력자들이 인류 위에 군림해야 한다는 취지의 반 능력자 연맹은 전 세계를 거세게 뒤흔들었다.
몬스터의 등장과 능력자들의 가세, 여기에 새로운 이념은 기존의 기득권층을 골치 아프게 만들기 충분했다.
미국 A.O. 본부를 이끄는 더글라스는 이 여파를 최소화하기 위해 그동안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걸 요즘 몸소 느끼고 있었다.
“이상론에 불과했나…….”
힘을 가진 능력자들이 힘이 없는 일반인을 보면서 우월감을 느끼는 건 인간이라면 당연한 감정이었다. 그것을 어떻게 잘 다스리고, 내 주변 사람들을 위해 쓸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이상적이지만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꾸준히 교육을 시킨다면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어느새 옥상은 더글라스가 두통을 느낄 때마다 찾는 장소가 되었다.
반 능력자 연맹의 비정상적인 확장 속도에 의심을 가졌지만, 현재 미국 A.O. 본부 내에서 벌어지는 갈등만으로도 벅찬 것을 느꼈다.
옥상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더글라스의 눈에 한 인영이 들어왔다.
“세라 앨런.”
조용히 건물을 나서는 모습을 보며 더글라스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무어라 생각을 하기 무섭게 그의 몸이 움직이며 세라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녀가 향한 곳은 뉴욕에서도 인적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외진 골목이었다.
최대한 기척을 죽여 뒤를 쫓은 더글라스가 본 것은 세라와 한 남자가 만남을 갖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관리자!’
한때 떠들썩하던 관리자와 세라가 만남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순수한 미국 출신 능력자가 아니라 저들과 결탁한 인물이란 말인가?
의심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사실로 드러나자, 더글라스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둘은 대화를 나누는 듯했지만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어떠한 능력을 발휘하여 소리를 차단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더글라스는 그들이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걸 파악했고, ‘독순술’로 그 내용을 파악해 나갔다.
‘몬스터 웨이브, 그리고 강림?’
빠른 속도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고, 비스듬한 각도에서 보였기에 내용을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럼에도 몇 가지 단어만으로 대화의 윤곽을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의 몬스터 웨이브…….’
프랑스에서 몬스터 웨이브로 난리가 났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미국 내에서도 지원군을 파견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었지만 아직 다수의 몬스터 필드가 존재했기에 쉽게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생각에 잠긴 사이, 몇 마디 나누고 관리자의 모습이 그대로 사라졌다. 더글라스는 우두커니 서 있는 세라를 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당장 달려가서 물어보고 싶었다. 왜 자신들을 배신했는지, 왜 이런 선택을 해야만 했는지.
그럼에도 뛰쳐나갈 수 없던 것은 그녀의 행적이 밝혀진 이상, 이용 가치가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더 철저하게 이용해 줘야겠지. 더 철저하게.’
미련이 담긴 눈으로 세라를 바라보던 더글라스는 그대로 자리를 벗어나 사라졌다.
“…….”
그때까지 세라는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반 능력자 연맹을 대표하여 방문한 크랙에게 다시 찾아올 수밖에 없는 떡밥을 던진 준성의 예상이 맞아 떨어지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N그룹과의 일이 어느 정도 일단락되고 휴식을 즐길 무렵, 강의를 다 듣고 돌아가는 준성의 앞에 크랙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그쪽도 잘 지냈나 보군.”
“……드릴 말이 있습니다. 자리를 옮길 수 있습니까.”
“전 괜찮아요.”
정중한 그의 태도에 준성이 옆의 세희를 바라보자, 흔쾌히 동의했다.
“그럼 이동하지.”
준성이 안내한 곳은 집이라고 할 수 있는 찻집이었다. 아직 손님이 드나드는 곳이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안으로 들어서면서 말했다.
“이 층에서 기다리지.”
그러면서 안으로 들어서자, 세희가 준성에게 말했다.
“준이 이야기 나누세요, 아무래도 제가 끼면 안 될 것 같네요.”
“딱히 상관없어.”
“하지만 상대가 불편함을 느낄 거예요. 저도 듣고 싶지만 어차피 모두 말해 줄 거잖아요? 그럼 불필요한 요소 하나를 줄이는 게 좋죠.”
“알았어.”
세희의 배려를 모르지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인 준성은 혼자 이 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이미 의자에 앉아 있는 크랙이 준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서 했던 이야기는 잘됐나 보군.”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제가 칼버족 출신인 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흠, 뭔가를 듣고 싶다면 내게도 대가가 주어져야 하는데.”
마법사인 준성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인과 관계였고, 등가교환이었다.
내게 정보를 듣고 싶다면 먼저 가지고 있는 정보를 내놓아라!
준성의 말은 그러한 의미가 깃들어 있는 셈이었다.
“……상부에 보고를 했고, 긍정적인 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대략적인 윤곽을 파악해야 이야기가 진행될 것입니다.”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모르나 보군. 그렇게 협박 섞인 말을 하면 내가 안달이 나서 정보를 줄 거라고 생각한 건가?”
“우리가 힘이 없어서 약하게 나온다면 오산이라는 걸 깨달으십시오.”
“힘이 있으면서 신사적으로 나서는 게 누구인지 모르나 보군.”
스스슷!
준성은 경고 섞인 말을 했지만 공간이 일그러지면서 여덟 명의 흑의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부터 확실한 무력시위를 위해 나선 것이다.
그들을 바라보는 준성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자신이 무시하지 못할 떡밥을 날렸고, 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에 대해서 몇 가지를 염두에 두었다. 그리고 이렇게 나오는 것도 계산 중 하나에 있었다.
구체적인 말을 들어 보지도 않은 채 행동에 옮기는 것은 둘 중 하나였다.
하나는 정말 힘에 자신이 있는 것. 다른 하나는 그만큼 ‘다급한’ 사정이 있다는 것.
“내게 빌미를 준 걸 후회할 수밖에 없겠지. 그런데 아주 큰 실수를 저질렀어. 이곳은 애초에 나의 영지라는 것을 몰랐다는 점.”
우웅! 우우웅! 파아앗!
준성이 자리에서 일어서기 무섭게 마나가 거세게 요동쳤다. 그랜드 마스터가 펼치는 마나 간섭과 비슷했고, 높은 클래스의 마법사가 가하는 클래스 프레셔와도 비슷했다.
하지만 그 근본은 전혀 달랐다. 칼버족을 비롯한 차원 너머의 존재들은 가공된 마나인 포스를 운용한다. 그 파장과 비슷하게 맞출 수 있다면 포스를 근간으로 하는 능력을 원천봉쇄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압도적인 그의 간섭에 노출된 그들의 몸이 거세게 흔들렸다. 복면 사이로 드러난 두 눈에는 경악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좋게 말할 때 듣지 않았으니 이런 일이 벌어질 수밖에.”
좋게 진행되길 원했지만 먼저 저들이 걷어찬 이상 호구처럼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포스를 간섭당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크랙에게 다가갔다.
준성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는 어느새 짙은 두려움이 드리우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다. 내가 원하는 바대로 따른다면 작은 실수 정도로 용납해 주지. 하지만 그게 싫다면, 내가 원하는 걸 강제로 알아내는 수밖에.”
“우리는 죽더라도 절대 굽히지 않을 것이다!”
“죽이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얻을 정보가 얼마나 많은데.”
지금은 사라졌지만 준성의 내면에는 ‘편협함’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그것은 자신 주변을 제외하고 다른 것은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이 없다는 생각을 깔고 있었다.
손을 뻗어 크랙의 머리에 얹은 준성의 눈에서 감정이 지워지기 시작했다. 정신 마법을 통해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뽑아낼 생각이었다.
츠츠츠!
그의 손에서 발산된 마나가 크랙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미 꽁꽁 묶인 포스로 인해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었고, 강력한 정신력을 바탕으로 필사적인 저항을 하고자 했지만 정신 마법에 대해 알지 못하는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자, 잠깐…….”
“알고 있는 모든 걸 털어놓으면 그다음은 편해질 것이다.”
준성의 선고가 떨어지기 무섭게 크랙은 그대로 정신을 놓아 버리고 말았다.
☆ ☆ ☆
정신을 잃기 전, 간절한 뜻을 담아 흔들리고 있는 눈빛이 시야로 들어왔지만 준성의 손속은 거침이 없었다.
머리 위에 얹은 손이 푸른빛에 휩싸일 때, 귓가를 파고드는 한줄기 음성이 있었다.
“준성, 정신계 마법을 시전하는 건 너무 심하지 않을까요?”
“나를 말리지 마. 내 호의를 먼저 저버린 건 이들이었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담담하게 대답하는 그를 보며 세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문 뒤 어렵게 말했다.
“저는…… 준성이 예전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게 싫어요.”
“예전의 모습? 예전과 지금의 나는 큰 차이가 없어.”
고개를 돌린 준성의 눈은 지극히 평온했다. 하지만 세희는 단호하게 부인했다.
“달라요, 예전의 준성은 우리를 제외한 모두에게 높은 벽을 쌓았어요. 이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괜찮아, 나의 변화는 사소한 축에 속할 테니까.”
단호하게 일별을 했지만 크랙을 향한 정신계 마법의 시전 의지는 사라지고 있었다. 방금 전 세희가 했던 말이 어느새 머릿속 깊숙한 곳에 자리해 버린 것이다.
“하, 이것 참.”
자신에게 펼쳐진 상황에 황당한 웃음을 지은 그는 스스로도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많이 달라 보였어?”
“이들이 준성을 많이 화나게 했나 봐요.”
“화나게 만들었지. 정말 앞뒤 가리지 않게 만들 정도였으니까.”
호의를 베풀면 권리인 줄 알고 달려드는 이들이 많은 세상이었다. 준성은 자신의 행동이 호의였는가에 대해 스스로 물어본다면 자신 있게 그렇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대에게는?
그들에 대해 알고 있는 부분이 적은 만큼 어떻게 여겼을지는 알 수 없다.
“입장의 차이겠지만.”
입매를 비튼 준성은 쓰러진 복면인들을 바라보다가 의자에 앉았다.
강제적인 수단의 사용을 잠시 미뤘을 뿐, 알고 있는 사실을 모두 밝혀야 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큰 충격만 받았고 부상은 입지 않았기에 복면인들이 정신을 차리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으으으.”
짧은 신음을 흘리며 정신을 차린 크랙은 자신 앞에 태연하게 앉아 있는 준성을 보고 화들짝 놀라면서 경계 태세를 취했다.
“정신을 차렸군, 그럼 대화를 재개하지.”
“도, 동료들은?”
“무사하니 하니 안심해라. 이제 네가 가지고 온 정보를 전달하도록.”
“…….”
태연하게 차를 마시는 준성을 보며 크랙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곳에 오면서 상대와 절대 충돌을 일으키지 말라던 ‘그분’의 명령이 떠올랐다. 하지만 자신의 개인적인 판단으로 동료들을 동원했고 결과는 실패였다.
짧은 순간 몸 상태를 점검했지만 특별하게 이상 있는 부분은 없었다.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저희에게 베풀어 주신 호의는 잊지 않겠습니다.”
“사과를 받아들이지.”
명쾌한 그의 대답에 크랙의 마음도 한결 편해졌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할 말을 정리한 뒤 ‘그분’이 했던 말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제가 모시는 분께서는…….”
크랙과 복면인들이 찻집을 벗어나고, 세희는 생각에 잠겨 있는 준성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괜찮나요?”
“생각해 보니 상대도 제법 머리를 굴렸다 싶어서. 결국 제대로 알려면 한 번 만나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네.”
크랙이 털어놓은 용건은 준성이 원하는 방향이었지만, 정작 알맹이는 없는 맹탕이었다.
상대도 머리를 굴렸다는 뜻이지만 준성의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자신도 그런 것처럼 상대도 신중을 기했을 뿐이었다.
“아까는 말려 줘서 고마워.”
“준성이 하는 일을 그르치는 게 아닐까 싶어서 조심스러웠어요.”
“아니야, 나도 내 성격을 알고 있으니까. 도와줄 사람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
내면에 자리한 편협함은 언제나 존재했다. 금탑주 시절, 오랜 고난 끝에 자신의 위치를 확실하게 굳혀 놓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자칫 폭발할 수 있는 자신을 제어해 줄 수 있는 그녀의 존재가 준성의 마음을 든든하게 만들어 주었다.
집무실에는 김기정과 한소영이 얼굴을 굳힌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하게 이어지던 침묵은 노크 소리와 함께 깨졌고, 한 사람이 들고 온 문서로 본격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정부에서는 받아들였어요.”
“이제 시작이군.”
모든 것이 계획대로였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김기정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이제부터 시작이며, 사실상 자신들은 진흙탕에 발을 들여놓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어쩔 수 없는 변화예요. 우리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혼란에 빠진 능력자들이 소속을 옮길 것이 뻔하니까요.”
대격변 이전까지 A.O. 본부는 김기정의 강력한 카리스마로 유지되었지만 표면 위로 드러나면서 갈등은 점차 불거지기 시작했다.
자신들 스스로 평범한 인간과 다르다는 그들의 주장은 반박하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그만한 혜택이 주어져야 하는데, 대부분의 A.O. 본부는 각국의 정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어 권력에 도전하는 행동을 좋아할 리 없었다.
그렇게 꾹꾹 억누르다 보니 결국 터질 것이 터져 버린 것이다.
김기정의 주도 아래 본격적인 A.O. 본부의 움직임은 자신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N그룹을 지원한 걸 명분 삼았지만 반 능력자 연맹이라는 세력이 빠르게 커지는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저들은 우리 목에 개줄을 채우려고 노력할 거다.”
“그건 피할 수 없어요. 이미 충분히 규제도 하고 있고요.”
권력을 쥔 기득권이 자신들을 위협할 수 있는 능력자들을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그러다 보니 대격변 이후, 그들을 제한하는 법안이 국회에 상정되었고 속전속결로 처리되었다.
이는 능력자들의 불만을 빠른 속도로 키워 나갔다.
“가장 큰 돈줄을 쥐고 있으니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수밖에. 저들의 의도에 놀아나지 않으면 된다. 그보다 T그룹과 김준성의 동태는?”
“특별히 다를 게 없어요. N그룹을 M&A하고 있다 보니 일선에서 물러났던 정기정 회장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 정도? 다만 미국에서 대량의 돈이 흘러와서 T그룹에 들어갔다는 것 정도예요. 아마 이게…….”
“김준성의 돈이겠지.”
증거는 없었지만 그 말은 확신에 가까웠다.
결국 N그룹은 김준성의 손에 사라진 것이고, T그룹은 뛰어난 활약을 펼친 조연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무서운 남자예요.”
“더 이상 거칠 게 없겠지. 그 범주에 우리도 속할 테고.”
“몬스터 필드를 없애면 영향력을 더 키워 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럴 수 없는 걸 더 잘 알고 있잖나?”
“하긴, 그러네요.”
처음 광명시 몬스터 필드를 없앨 때, 김준성은 다른 곳을 제거할 수 있다는 의향을 보였다.
하지만 김기정을 비롯한 A.O. 본부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는데, 몬스터 필드가 존재함으로써 정부가 자신들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 이면에는 다른 속사정이 있었는데, 몬스터 필드로 토벌을 떠남으로써 능력자들의 수준을 끌어 올릴 수 있었다.
실전을 겪지 못한 능력자들의 경쟁력은 자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이상, 김기정은 울며 겨자 먹기라도 몬스터 필드를 유지해야 했다.
“전력은 충분해요. 프랑스 정부에서 매일 오는 연락을 더 이상 거절하는 것도 힘들고요.”
“그 부분은 천천히 결정하도록 하지. 아직 우리가 김준성을 마음대로 움직일 만큼 아무런 확신도 할 수 없는 처지니까.”
“알겠어요. 다만 미국으로 갔던 적이 있는 만큼 권유 정도는 해보는 게 나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래야지.”
힘을 갖고 정부조차 함부로 하지 못하는 위치에 올랐지만, 아직까지 한 명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갑자기 방문해서 죄송합니다, 마스터 김.”
“……이곳에는 무슨 일로?”
준성은 갑자기 찾아온 대런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미국 A.O. 본부의 대한민국 지부장이었던 그는 면식이 없지만 몇 차례 말을 들어 본 적은 있었다.
“본부장님의 말을 전하려고 찾아왔습니다.”
“더글라스 본부장의?”
“예.”
“말해 보시죠.”
“본부장님께서 마스터 김의 비밀 방문을 요청합니다.”
“비밀 방문? 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그 말을 들은 대런은 잠시 멈칫하는 모습을 보였다가 이내 자세한 내용을 털어놓았다.
“말씀하셨던 것을 발견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부분에 대해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시는지 알지 못합니다.”
“말했던 부분이라.”
대런은 모르지만 준성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과연, 역시 최강의 능력자라는 뜻이로군.”
솔직히 의심이 가는 구석이 있다고 말을 했지만 이렇게 일찍 알아차릴 줄은 몰랐다.
하지만 반 능력자 연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A.O. 본부의 권유를 선뜻 승낙하는 것도 그리 내키지 않는 상황이었다.
고민에 잠겨 있는 그를 대런은 초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주도권을 내어 주지 않기 위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더글라스는 반드시 김준성을 데려오라고 말을 했었다.
그의 고민이 깊어질수록 대런의 머릿속도 복잡하게 헝클어졌다.
그때 해맑은 목소리가 둘의 귓가를 울렸다.
“준! 손님이 와서 데려왔어요!”
그리고 이나와 함께 위로 올라오는 것은 대한민국 A.O. 본부의 부본부장 한소영이었다.
“……!”
“아! 선약이 있었네?”
대한민국과 미국 A.O. 본부의 요직을 차지한 두 사람이 마주한 가운데, 실수를 저지른 이나가 멋쩍은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다.
“미국 그리고 프랑스라.”
손님들을 모두 돌려보낸 뒤, 준성은 생각에 잠겼다.
한소영이 가지고 온 용건은 프랑스 보르도에서 거세게 이어지고 있는 몬스터 웨이브를 저지하는 데 힘을 보태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 시기는 더글라스의 초청과 공교롭게 겹쳐 있었다. 결국 어느 것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의미였는데, 준성은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두 제안 모두 뿌리치고 싶었지만, 미국으로 가는 것과 프랑스로 가는 것 모두 각자 얻을 만한 이익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향후 자신의 행보에도 적잖은 도움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고민에 빠져 있던 그는 방 안으로 진입하는 기척을 감지했다. 익숙한 그것의 정체를 간파한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분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빨리 왔군. 가까운 지역에라도 있나.”
“……그것을 말할 권한은 없습니다.”
“용건을 말하도록.”
딱딱한 크랙의 태도에 서려 있는 경계심을 느낀 준성은 말장난을 하지 않았다.
그에 크랙은 ‘그분’이라 지칭하는 존재의 말을 전달했다.
그것을 들은 준성도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결정의 폭을 좁혀 주는군.”
크랙의 말을 들은 준성은 확실하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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