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189)
제69장 몬스터 필드를 제거하는 자
프랑스 보르도 지방의 꽝꽁스(Quinconces)는 유럽에서 가장 넓은 규모의 공원이다. 현재 이곳에는 일단의 무리가 모여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초조한 기색이 서려 있었는데, 어느 순간 강렬한 힘의 파동이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순백의 빛이 사방으로 폭발하자 눈을 감았다가 살며시 떴다.
“당신이……!”
감탄사와 함께 앞으로 나선 이는 흰머리가 머리를 가득 뒤덮고 있는 육십대 초반의 남자였다. 당당한 체구에서 몸을 잘 관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그는 모습을 드러낸 준성을 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저는 프랑스 A.O. 본부를 책임지고 있는 피에르 드 리옹이라고 합니다. 편하게 피에르라고 불러 주면 됩니다, 마스터 김.”
영어로 건네는 그의 인사에 준성이 손을 들자, 푸른빛이 아른거리더니 피에르의 머리로 스며든다. 기습 공격일 수도 있기에 몇몇 프랑스 능력자들이 손을 쓰려고 했지만 그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피에르.”
“아아, 이런 능력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통역이 필요 없다고 하더니 대단한 능력이군요.”
준성이 시전한 마법은 통역 마법의 일종으로, 언어의 구분이 필요 없이 각자의 의지를 서로에게 전달하는 마법이었다.
감탄 섞인 그의 표정에 살며시 미소를 지은 준성은 옆에 서 있는 엘리엔을 소개했다.
“이분은 저를 도와 몬스터 필드 제거에 도움을 주실 분입니다. 저 못지않은 실력자이니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 환영하는 바입니다.”
엘리엔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준성이 허투루 말할 리는 없었기에 피에르는 환한 미소로 그녀를 맞이했다.
현재 프랑스 보르도 지방은 몬스터 군단의 공세로 힘겨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대격변 이후 생성된 몬스터 필드에서 처음 발생한 몬스터 웨이브였는데, 그 숫자가 워낙 많아서 막아내는 데 고전하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타국의 A.O. 본부로 도움을 요청해 보았지만 그들도 각지에 산재한 몬스터 필드에서 언제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할지 몰랐기에 프랑스를 돕는 데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던 중 대한민국 A.O. 본부에서 김준성에게 연락을 넣었고, 이렇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우선 쉬시지요. 제가 자세한 상황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피에르가 안내한 곳은 보르도 시내에 위치한 고급 호텔이었다.
둘은 자연스럽게 방 하나에 배정되었는데, 마치 예전 금탑 시절 귀족의 방을 연상케 하는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에 준성과 엘리엔은 적잖이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방 하나를 더 달라고 할까요?”
준성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엘리엔이 이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괜히 상대를 귀찮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으니 추천하고 싶지 않군.”
“그렇겠죠?”
“성의를 저버리는 것도 좋지 않은 일이니까.”
“……하하! 그래야겠네요.”
얼굴을 굳힌 채 진지하게 말을 하니, 준성은 어색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엘리엔과 단둘이서 방에 머문 적이 없었기에 어색함은 매우 컸지만 말이다.
“몬스터 필드를 제거할 생각인가?”
“요청을 받아 왔으니 그렇게 해야겠죠. 하지만 제 목적은 다른 곳에 있어요.”
준성은 반 능력자 연맹에 대한 것과 그들의 정점인 ‘그분’에게서 온 전언에 대해 언급했다.
“유럽의 인근에서 보자고 했으니 겸사겸사 이곳으로 온 거죠. 미국의 제안도 매력적이지만 당장 이쪽의 정체가 무엇인지 밝혀내야 운신할 수 있는 폭을 확실하게 정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상대는 칼버족을 수하로 부리는 존재였다. 어렴풋이나마 짐작이 되었지만 확신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할 때였다.
“그럼 내가 할 일은…….”
“리엔은 몬스터 필드 잠입하는 것보다 침공에 대비해 주세요.”
“내가?”
“예, 리엔의 무위를 널리 알리는 편이 좋을 것 같거든요.”
준성이 엘리엔과 함께 온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의 실력을 본격적으로 세계에 알릴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조용히 살겠다는 목표 아래 움직여 왔는데 역시 세상은 그걸 알아주는 것 같지 않아서요.”
N그룹의 사태에서 준성은 이미 알고 있던 불쾌한 진실을 다시 한 번 마주하게 되었다.
세상은 힘이 있는 자들 중심으로 돌아가고, 자신은 그 상황에서 명백한 약자 입장이 된 것을 말이다.
만약 대한민국 A.O. 본부와 T그룹의 도움이 없었다면 무력적인 해결 말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자신을 노리는 상대들이 감히 움직이지 못하도록 강력한 무력을 보여주어 이름을 얻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엘리엔이 나서는 것도 그 방편 중 하나였다.
“사람들이 많은 곳은 불편한데…….”
“미리 연습을 해둬야 나중에 대학교도 같이 다닐 수 있죠. 저는 리엔을 믿어요, 믿어도 되죠?”
“……그렇게 말을 하면.”
신뢰가 담긴 눈으로 바라보면 엘리엔이 할 수 있는 것은 사라진다.
그저 그의 말을 믿고 행동으로 옮기는 수밖에.
잔뜩 찡그린 그녀의 얼굴은 그리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준성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하루 동안 휴식 시간을 갖고 준성을 찾아온 피에르는 본격적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현재 능력자의 숫자는 오백 내외입니다만, 최소한의 방위 능력만 남겨 놓고 있는 실정입니다. 타국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다른 곳도 전력에 여유가 많지 않아 거절을 했습니다. 그래서 독일에 미하엘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역시 거절당했습니다.”
공교롭게도 독일의 몬스터 필드에서도 몬스터 웨이브 조짐을 보이고 있었기에 세계 10강의 능력자인 미하엘이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바울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는 상황이기에 마스터 김의 합류를 부탁드린 것입니다.”
바울을 언급할 때 피에르는 저도 모르게 이를 뿌득 갈았다.
그 이면에는 숨길 수 없는 갈등이 존재했다.
세계 10강이자, 스페인 A.O. 본부의 능력자인 바울은 본래 프랑스 소속의 능력자였다. 하지만 그는 능력자들에 대한 지나친 규제가 넘치는 프랑스의 상황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그의 능력에 눈독을 들인 스페인 A.O. 본부에서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그리고 바울은 미련 없이 프랑스를 떠나 스페인으로 향했다.
스페인의 전폭적인 지원에 바울은 성장을 거듭하여 세계 10강의 자리를 차지했다. 두 눈 뜨고 자국의 자원을 빼앗긴 프랑스 A.O. 본부로서는 땅을 치고 통곡할 노릇이었다.
그 후, 양국의 관계가 보이지 않는 칼을 겨누는 것처럼 첨예한 대립을 이어 오고 있었다.
“저는 몬스터 필드로 직접 잠입할 생각입니다.”
“몬스터 필드로? 하지만 몬스터 웨이브도 만만치 않습니다.”
원인을 직접 제거하는 것이기에 좋아해야 하지만 피에르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당장 보르도에 집결한 전력으로는 몬스터 군단의 진군을 가로막는 것으로도 벅찬 실정이었다.
“그건 여기 엘리엔이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분께서?”
“홀로 몬스터 백 이상을 감당할 수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마스터 강이나입니까?”
“그녀보다 떨어지지 않는 수준이라고 말을 하죠.”
아직 엘리엔이 우위에 있지만 그렇게 말을 한다고 한들 순순히 믿을 리 없었기에 가볍게 기름칠만 하는 준성이었다.
그 말을 듣고 피에르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엘리엔을 바라보았다.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표정 하나 없어 마치 인형과도 같은 그녀가 그렇게 강한 무위를 보유하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저는 몬스터 필드 두 개를 제거한 경험이 있습니다. 절 믿으시면 좋은 결과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믿겠습니다, 마스터 김준성.”
이미 만들어 낸 결과물이 있는 이상 그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었다.
피에르는 지푸라기에라도 매달리는 심정으로 준성의 손을 꽉 잡으며 부탁했다.
본부장인 피에르는 새로 합류한 준성과 엘리엔을 크게 신뢰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휘하의 모든 능력자들이 그런 모습을 보인 것은 아니었다.
몇몇 능력자들은 지나치게 공손한 자세를 취하는 그를 보며 불만을 터뜨렸다.
“본부장님, 정말 저 여자가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까?”
“그럼 내 결정이 틀렸다는 겐가?”
“그건 아니지만 고작 두 명으로 어떻게 판세를 뒤집을 수 있습니까? 본부장님이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유럽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프랑스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독일에 주도권을 빼앗겼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패권은 프랑스로 향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상황에서 자국에 일어난 몬스터 웨이브를 스스로 막아내지 못하고 외세의 도움을 받는다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럼? 자네들이 완벽하게 막아낼 수 있나?”
“시간만 있으면 충분히…….”
“헛소리! 그럴 자존심이 있으면 어떻게 하면 피해를 입지 않고 막아낼 수 있을지 고민이나 하게!”
“…….”
피에르의 호통에 그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평소 온화한 그는 한 번 화가 나면 누구도 말릴 수 없는 다혈질이 된다.
그때였다. 그들이 머물고 있는 공간 위로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끼아아악!
“와이번이다!”
A+ 등급으로 판명받은 몬스터로, 비행 몬스터이기에 상대하기가 굉장히 까다로웠다. 그 이유는 빠른 속도와 자유로운 방향 전환에 있었는데, 아무리 강력한 능력이더라도 적중을 시키기 힘들어서였다.
또한 날카로운 발톱에 채이면 대부분의 능력자들은 즉사할 만큼 강력한 공격력마저 지니고 있었다.
한동안 상공 위를 돌던 와이번은 이윽고 목표를 정했는지 한 사람을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다.
“어?”
“안 돼!”
와이번이 달려드는 대상은 다름 아닌 엘리엔이었다. 몇몇 능력자들은 비명을 질렀고, 피에르도 갑작스러운 와이번의 난입에 경고를 주기 위해 움직이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끝을 맺지 못했다. 와이번이 엘리엔을 낚아채려는 순간, 푸른빛이 번뜩이더니 그대로 초록색 피가 사방으로 뿜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쿠궁! 쿠우웅!
비틀거리던 와이번은 허망하게 날갯짓을 하다가 목이 몸과 분리되어 그대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어느새 검을 뽑아 든 엘리엔은 검 면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
그 광경을 지켜보던 능력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특히 엘리엔의 능력에 대해 의구심을 드러내거나 성토하던 이들은 붉어진 얼굴로 피에르와 멀어졌다.
“의심할 여지가 없군.”
가슴을 졸이던 피에르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엘리엔을 남겨 놓고 준성은 본격적으로 보르도 남동부에 위치한 몬스터 필드로 움직였다.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은 이미 몬스터의 침공에 짓밟혀 있었는데, 무너진 이름을 다시 복구하기 위해서는 적잖은 노력을 필요로 할 듯싶었다.
“저곳이군.”
몬스터 필드는 꽝꽁스 광장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거침없이 안으로 진입한 뒤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몬스터 웨이브가 벌어지면 필드 안이 텅 비어 버리는 건 아니군.”
세상에 알려지길, 몬스터 웨이브가 벌어지면 필드 안이 비어 있어 제거하기가 한층 용이하다고 했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게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전에 보았던 알 수 없는 마법 체계는 몬스터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곳을 가로지른 준성은 빠른 속도로 필드 중앙으로 향했다.
혼자 움직이다 보니 속도는 예전보다 훨씬 빨랐고, 필드 중앙에 도달하는 데 걸린 시간은 채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탑을 발견한 준성의 이동 속도는 자연히 빨라졌다. 그리고 탑의 형체를 분간할 만큼 가까워졌을 무렵, 그의 발걸음이 자연히 멈춰졌다.
두 번 보았던 것과 달리 탑의 앞은 순백의 빛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한 인영이 먼저 자리하고 있었다.
“……!”
“이곳에서 다시 보게 되는군.”
스스로를 신족이라 일컫는 ‘그’는 드리운 광휘 속에서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서 있었다.
☆ ☆ ☆
필드에 진입하면서 신족의 눈길을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다만 그가 이렇게 직접 나설 줄은 준성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예상을 뛰어넘은 움직임인 만큼 자연히 그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 갔다.
“그렇게 경계할 필요는 없잖아? 내가 그렇게 많은 호의를 베풀어 주었는데.”
“세계를 침략하는 자들에게서 그런 말을 듣는다고 경계가 풀릴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란 건가? 그렇게 여겨질 수도 있겠군.”
마치 산책을 나온 것처럼 그의 태도는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괜히 경계하던 준성이 헷갈릴 만큼 자연스럽게 행동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탑을 제거하기 위함이겠지?”
“이곳 몬스터는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
“이상론자였던가? 이 세계 인간들이 대격변이라 일컫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는 이미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나도 목적은 있으니까.”
“그게 솔직해서 이해하기가 더 쉽군. 그 말을 듣지 않았으면 섭섭할 뻔했어.”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그의 태도에 여유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속내를 알 수 없었기에 준성은 미간을 지그시 모으며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내가 순순히 이곳을 양보하면 다음에도 다른 탑을 침공할 생각인가?”
“세상의 일은 모르는 법이니 아무런 약속도 할 수 없을 것 같군.”
“하긴, 그게 정답이로군. 괜히 마음에도 없는 약속을 했으면 실망할 뻔했어.”
그를 휘감은 광휘가 점점 더 강렬해지고 있었다. 마치 공격을 하려는 것 같아 준성은 자연히 경계 태세를 취하며 언제든지 마법을 시전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뒤이어 벌어진 것은 그의 예상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르릉! 그그긍!
포스를 전송하는 탑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말은 그가 이곳을 포기하겠다는 뜻이었다.
“무슨 의도지?”
“마지막 호의다. 어차피 여기에서 겨뤄 봤자 내게 딱히 남는 것도 없을 것 같고. 불필요한 충돌은 지양하는 주의라서 말이지. 난 남에게 좋은 일을 해줄 생각이 없거든.”
“…….”
차원을 이동했을 때 들은 정보를 종합해 보면 그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호의는 호의. 고개를 끄덕인 준성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름을 알고 싶군.”
“이름? 굳이 알려줄 필요가 있나. 다음에 보게 되면 자연히 알게 될 텐데. 그때의 재미를 위해 미뤄 보도록 하지. 단, 다음에 볼 때까지 무사할 수 있다면 말이야.”
유쾌한 웃음을 터뜨린 그의 몸은 빛으로 화하며 사라졌다. 그때까지 자리에 서 있던 준성은 마지막에 남긴 말을 듣고 표정을 굳혔다.
[이미 수많은 동족이 주시하고 있으니 그때까지 잘 살아남아보라고.]꽈광! 꽈과광!
그가 사라지고 나서 탑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던 준성이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남긴 말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관심을 사버린 건가.”
자신의 존재가 드러난다는 것은 상대에게 대비할 시간을 준다는 걸 의미했다.
이는 그리 좋지 않은 걸 의미했고, 앞으로 행동함에 있어 한층 주의를 요구했다.
“세상 사는 게 쉽지 않아. 후!”
쿠르릉!
푸념하는 사이에도 탑은 무너지고 있었다.
필드를 벗어난 준성은 빠른 속도로 엘리엔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탑이 무너진 이상 몬스터 필드는 빠른 속도로 축소될 것이고, 몬스터 군단을 막아내는 일만 남아 있었다. 엘리엔의 무위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준성은 다른 부분을 염려하고 있었다.
“적당히 해야 할 텐데.”
엘프 수호검주로 지난날을 살아온 엘리엔에게 없는 것은 융통성이었다. 적당히 할 줄 모르는 그녀는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볼 때까지 행동으로 옮기는데, 이로 인해 곤란한 일이 벌어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그녀의 미모를 탐했던 영지 병력 전체가 죽음을 당했을까.
‘적당히’라는 걸 모르는 엘리엔의 성향을 뒤늦게 떠올렸기에 행여나 몬스터 군단의 침공 현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불안함을 느껴야만 했다.
그리고 능력자들이 머물고 있는 장소 근처에 도착했을 무렵 상황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미 몬스터 시체가 바닥을 가득 채우고 있던 것이다.
능력자들이 모인 곳에 도착했을 때는 잔뜩 질린 그들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그들의 시선은 모두 한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 누가 있는지는 뻔했다.
준성이 걸음을 옮기니 몬스터의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검을 들고 있는 엘리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몸에 피 하나 묻지 않았지만 잘 벼려진 그녀의 살기만으로 얼마나 많은 몬스터를 제거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능력자들의 얼굴에는 경외와 두려움이 담겼다. 주변 일대에 쓰러진 몬스터들만 봐도 얼마나 종횡무진 휩쓸었을지 유추할 수 있었다.
준성이 보이자, 검을 휘둘러 묻은 피를 털어 낸 엘리엔이 입을 열었다.
“준성.”
“도와 드리려고 했는데 너무 늦었네요.”
“갔던 일은 잘됐고?”
“예, 저는 잘 해냈습니다. 그나저나 리엔이 너무 과하게 몬스터를 쓸어버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제 예상이 틀리지 않았네요. 하하!”
자신의 부탁을 열심히 이행한 그녀를 탓할 수도 없어서 준성이 할 수 있는 것은 웃음을 흘리는 것뿐이었다.
“모처럼 한 부탁이니 열심히 임했다. 몬스터는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부류이기도 하고.”
“네, 잘했습니다.”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유도한 게 자신이었는데 뭐라고 그녀를 탓하랴.
그저 보다 충실히, 열심히 몬스터를 베어 준 것에 고마운 마음을 표하는 것밖에 달리 할 일은 없었다.
엘리엔의 활약으로 몬스터 군단에게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힌 뒤, 준성은 그녀의 공적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에너지석을 수거했다.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피에르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서렸지만 처음 도움을 받는 조건 중 하나가 처리한 몬스터의 에너지석에 면세 혜택을 주는 것이었기에 이제 와서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엘리엔이 보여 준 무위가 대단했던 것도 한몫했다.
막상 에너지석을 챙긴 준성도 그 숫자가 삼백여 개를 훌쩍 넘기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습니다. 오십 개는 프랑스 A.O. 본부를 위해 기부할 테니 피해를 복구하는 데 사용하도록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뜻밖의 소득을 거둔 피에르는 반색하며 거듭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진심이 느껴지는 모습에 준성도 기분 좋게 만남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로 가라고?”
“예, 피에르 본부장에게 부탁을 했으니 이탈리아 밀라노로 향하는 교통편을 알아봐 줄 겁니다. 그곳에 가서 이나랑 합류하세요.”
이나는 준성이 보르도로 간다고 할 때 극구 같이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이유는 보르도에 그녀의 스케줄이 겹치는 것이 없어서였는데, 대신이라고 말하기에는 뭐하지만 유럽에 다른 스케줄이 있으면 용건을 마친 뒤 합류해서 함께 관광을 즐기기로 했다.
당연히 이나는 승낙을 했고, 여태까지 세계 수많은 디자이너들에게 관심을 받았지만 해외 진출을 하지 않던 이나는 졸지에 이탈리아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것이 가져다준 여파는 결코 작지 않아 언론에서는 강이나의 해외 진출을 심도 있게 다루면서 그녀의 선전을 기원했다.
“같이 가고 싶은데…….”
“아직 저들이 아군인지 확실하지 않으니까요. 리엔의 실력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변수를 최대한 줄이고 싶습니다. 이해해 줄 수 있죠?”
“그렇게 말하니 따라야겠지.”
아쉬워했지만 준성의 걸림돌이 될 생각이 없었기에 엘리엔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랜드 마스터이자 대마법사인 자신도 준성에게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더 강해지겠어.”
“믿을게요.”
준성이 포옹하자, 엘리엔은 양손을 뻗어 그의 몸을 안았다.
그것도 으스러져라 말이다. 세희가 보여준 로맨스 소설에서 나오길, 가끔 여자가 이렇게 적극적인 것도 좋다고 했다.
‘컥!’
숨이 막힌 그가 기침을 간신히 참은 걸 모른 채 말이다.
소설이 사람 잡을 뻔한 순간이었다.
“이제 가봐야 하나…….”
엘리엔을 보낸 뒤, 준성의 시선은 남쪽으로 향했다.
그가 더글라스의 제안을 거절하고 굳이 보르도에 온 것은 자신이 목표한 곳과 가까웠기 때문이다.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한 보르도는 지리적으로 스페인과 가까웠고, 스페인을 지나면 영국령인 ‘그곳’에 도착할 수 있게 된다.
사전에 수집해 둔 좌표를 바탕으로 텔레포트를 시전했고,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면서 그의 옆에 펼쳐진 것은 거대한 암벽이었다.
이베리아 반도 남단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 영국의 속령인 곳이다.
먼 옛날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언급한 곳이며 헤라클레스의 기둥, 칼페산, 자발타리크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 곳이다.
대양으로 나아가는 이곳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서 언급되는데, 아틀란티스와 얽혀 현재까지 전해지는 신비한 장소다.
허공 위에 서서 지브롤터 암벽을 바라보던 준성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마치 한 번 방문해 본 적 있는 듯한 느낌, 그리고 언제 한 번 느껴본 듯 익숙한 기운이 감각을 파고들었다.
“……!”
묵묵히 내려다보던 그는 피부를 파고드는 기운에 멈칫했다.
이질적이었지만 위협적이지 않은 그것은 준성을 조용히 다른 곳으로 인도하고자 했다.
“저곳인가.”
힘에 이끌리듯 천천히 이동한 곳은 지브롤터 해협을 벗어나 드넓게 펼쳐진 대양 한복판이었다.
육지가 점점 희미해져 보이지 않을 만큼 먼 곳에 도달했을 때, 그를 잡아끌던 힘의 파장이 미묘한 변화를 일으켰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천천히, 마치 어린아이에게 선생님이 자상하게 가르쳐 주는 것처럼 하나하나 되짚어 주자,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고자 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좌표를 읽을 줄 알아?”
이곳의 능력자가 시전하는 공간 이동과 자신의 텔레포트는 엄연히 다른 체계로 이루어진다. 그중 가장 큰 차이는 좌표를 통해 장소 설정을 한다는 것인데 그것을 정확하게 짚어 낸 것이다.
“대체 누구인지 궁금하군, 오랫동안 지켜보지 않았으면 알지 못할 텐데.”
신족도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고 하고, 정체 모를 반 능력자 연맹의 수장도 자신의 마법 원리를 파악하고 있다.
대체 누구일까.
거센 기대감이 가슴속을 가득 채워 나가는 걸 느끼며 준성은 마법을 시전했다.
“텔레포트(Teleport)!”
스팟!
순백의 빛에 휩싸인 그의 몸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대로 사라졌다.
☆ ☆ ☆
텔레포트로 공간 이동을 한 준성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사방이 어두운 공간이었다.
사뿐하게 내려앉아 주변을 둘러본 그는 아무런 위험이 없는 걸 확인하다가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깨닫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처음에는 어두워서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지만 곧 어둠이 내려앉은 공간 속에서 꿈틀거리는 존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다에 살고 있는 물고기들이었다.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바로 바다 깊은 곳이고 말이다.
“어서 오십시오.”
“아아.”
어느새 준성의 앞에는 정중하게 예를 취하고 있는 크랙이 서 있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러지.”
조용히 크랙의 뒤를 따라 이동하면서 점점 바다가 끝이 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동굴 속으로 들어섰다.
안에 환한 불이 밝혀지면서 한참 동안 이동하던 중, 크랙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그분께서 왜 이곳으로 초대한 것인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나도 궁금하군.”
“가급적 무례를 범하지 말아 주시길. 우리가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르는 분인 만큼 예의를 지키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상대가 존중해 준다면 얼마든지.”
잠시 후, 어두운 통로를 지나 거대한 공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차원 너머 칼버족의 지저세계 터전을 보았던 것과 비슷했기에 준성의 얼굴에 놀라움이 서렸다.
“이런 곳에 있으니 절대 찾지 못하겠지.”
“보안 능력만큼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수준입니다.”
준성의 칭찬에 크랙은 어깨를 으쓱한 뒤, 뒤를 따랐다.
작은 도시였지만 깊은 땅속에 지어진 것은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들인지 확인할 수 있게 만들었다.
도시 안으로 진입하여 그들이 도착한 곳은 중앙에 위치한 피라미드 모양의 건축물이었다. 바로 앞까지 준성을 안내한 크랙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좋은 대화 나누시길…….”
“고맙다.”
준성도 감사를 표하며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울 거라 생각했던 건물은 야명주와 비슷한 것들이 박혀 있어 밝기를 유지했다. 걸음을 옮기던 그는 어느 순간 기이한 기운이 자신의 감각을 자극하는 걸 느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곳은 거대한 문 앞이었다. 문고리를 잡아 열자, 환한 빛이 드러나며 준성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행자여.”
“…….”
상처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 듯 상냥한 목소리는 마음을 뒤흔들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준성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찬란했던 빛이 서서히 걷히자 상대의 얼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으음!”
그때까지 평정을 유지하고 있던 준성의 입가에서 신음 비슷한 것이 흘러나왔다.
상대의 얼굴은 그가 예상하던 것과 판이하게 달랐던 것이다.
처음 예상하길, 그는 신족에게 대항하는 악마 혹은 대립하는 신족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보는 것만으로 표정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을 만큼 눈앞의 상대 외모는 처참했다.
마치 밀가루 반죽을 거칠게 하여 발기발기 찢어 놓은 것 같달까?
도저히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얼굴에 눈동자 하나와 입만 온전한 모양을 유지하고 있었다.
“놀라셨나 봐요?”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 예상이 빗나가는 상황이라니. 기분 나빴다면 사과드립니다.”
크랙에게 보인 것과 달리 준성의 태도는 정중했다. 처음 예상했던 존재들과 달랐지만, 그가 보여 주는 격이라는 것은 드래곤보다 훨씬 높고 신족보다도 고상한 기운이 전해졌던 것이다.
“다른 아이들은 당신을 무례한 자라고 생각하는데 아니었나 보군요.”
“제 주변의 것을 건드리려고 하면 얼마든지 악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당신에게 충성을 보이고자 했지만 제 입장에서는 침입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해해요, 서로의 입장이란 게 그런 거니까요. 그 부분을 탓할 생각도 없고요. 단지 지금 본 것으로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게 되었답니다.”
“…….”
아직 상대에 대해 제대로 모르는 상황에서 그런 말을 듣는 건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준성이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죠. 대신 궁금한 점이 있다면 알려 드릴게요.”
그 말에 잠시 고민하던 준성은 지금 벌이고 있는 일련의 상황을 꺼내 들었다.
“왜 반 능력자 연맹을 만든 것입니까?”
정체도 궁금하고, 왜 이곳에 있고, 어떻게 저런 모습이 된 건지 묻고 싶었지만 눈앞의 상대는 자신에게 먼저 호감을 표해 왔다.
서로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만큼 속이 상할 만한 말을 하기는 싫었다.
“그게 본래 인간들의 운명이니까요.”
“운명이다?”
“네, 반 능력자 연맹이 내건 목표는 알고 계시죠?”
“알고 있습니다.”
“본래 이 세상은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했어요. 생명에게 활력을 북돋아 주고, 힘을 낼 수 있게 해주는 힘이었죠. 하지만 지금 지구에는 그런 힘이 존재하지 않죠?”
“……예.”
순간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지만 준성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사이 그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힘은 인간을 비롯한 다른 종족들이 취하고 발휘할 수 있는 힘이었어요. 하지만 모종의 일로 그 힘들이 모두 사라지면서 이 세계는 인간만 남게 되었어요. 그리고 기형적으로 발전을 이뤘죠.”
여기서 그가 말하는 것이 ‘과학’의 발전임을 준성은 알 수 있었다.
“그 흐름은 옳지 못해요. 제가 만든 반 능력자 연맹은 틀어진 흐름을 원래대로 만들고자 하는 거죠.”
“본래 흐름이란 게 반 능력자 연맹이 주장하는 거다?”
“그런 셈이죠.”
“억지가 심하군요.”
준성은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언급했다. 그도 그것을 알고 있는 듯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억지에 가까워요. 하지만 이렇게 흐름을 돌려놓아야 해요.”
“왜입니까?”
눈앞의 그는 합리적인 인물로 보였다. 그래서 궁금증이 치밀었다. 자신의 주장이 억지에 가까운 걸 알고 있음에도 왜 강행하려고 하는 걸까.
“지금 지구의 사회로는 더 이상 강력한 능력자의 양성이 어렵거든요.”
“각지에서 재능 있는 사람들을 선별하고 체계적인 훈련을 거치고 있는데 어렵다? 저는 이해하기 힘들군요.”
“여행자라면 어느 정도 알 텐데요? 강해지더라도 결국 그들은 세계의 수호를 위한 것이 아니라 권력자들의 도구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걸?”
“…….”
적나라한 그 말에 준성은 그만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이대로 있으면 능력자들은 기존의 기득권층에게 이용만 당하는 패로 전락할 뿐이에요. 세뇌가 왜 무서운지 아나요? 예전부터 그래 왔기에 그럴 엄두를 내지 못한다는 거예요. 능력자들은 힘을 얻었지만 오래전부터 자신을 지배해 온 이들에게 칼을 돌리지 못할 거예요. 그래서 저는 모든 판을 새로 짜고자 계획을 세운 거예요.”
각국의 A.O. 본부는 반 능력자 연맹이 이상론에 가까운 것을 주장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오래전부터 훨씬 더 많은 것을 고안하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눈앞의 ‘그’가 있는 것이라.
“그렇게 세상을 뒤집으려는 이유가 뭡니까?”
“강력한 능력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들’의 마수에 버텨 낼 수 없을 테니까요.”
“여기서 말하는 ‘그들’이 스스로를 신족이라 일컫는 자들입니까?”
“역시 그들과 접촉을 했었군요.”
“몇 마디 이야기를 해본 게 전부입니다. 다만 그들은 단체로 움직이기보다 개인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준성은 솔직한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았지만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건 성향에 지나지 않아요. 스스로를 신의 종족 반열에 올라섰다고 자부하는 그들이 어떻게 승리하고 그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고 생각하나요? 모두 하나로 모은 주제를 각자의 역량으로 헤쳐 나가는 능력이 있어서죠. 지금도 그들은 자신의 공통된 목표를 위해 움직이고 있어요.”
“공통된 목표라고 함은?”
“이 세상의 정복이죠.”
“…….”
허황되지만 진실이라면 이보다 더 무서운 말이 없었다. 신족 개개인이 지닌 무위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만약 그들이 각자의 역량을 동원하여 지구를 정복하고자 한다면 막아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그랬어요. 먼 옛날 한 종족의 구성원이었지만 무섭게 문명을 이뤄 냈고, 다른 종족보다 더한 응집력으로 우위에 섰죠. 그리고 각자의 역량을 키워 개체마다 최강이던 드래곤마저 뛰어넘고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어요.”
“드래곤과 전쟁을 벌인 적이 있다는 걸 들었습니다.”
“오만했던 그들은 단지 운이 나빴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한 대로 진행된 것에 지나지 않았어요. 그것도 모른 채 여전히 그들은 몇 되지 않는 개체로 반전을 노리고 있죠.”
“지금 그들이 꾀하고 있는 모든 것이 헛수고라는 뜻입니까?”
“불행하게도요. 덫을 설치하고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린다면 이해가 되나요?”
간단한 비유였지만 간담이 서늘해지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정기정을 비롯한 다른 드래곤들은 신족의 이목을 피해 오래전부터 반전을 꾀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모두 함정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것은 그들은 아무리 오랜 세월 걸리는 목표라도 참고 견뎌 내는 인내심을 지니고 있어요. 그들이 한 종족의 구성원에서 시작해 드래곤마저 몰아내기까지 걸린 시간이 얼마인지 아시나요?”
“모릅니다.”
“1만 2천 년이 걸렸어요.”
“…….”
엄청난 숫자에 준성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젓고 말았다. 한 종족이 공통된 목표로 1만 2천 년이라는 시간을 합심해서 나아갈 수 있을까? 그것은 인간조차 해낼 수 없는 엄청난 집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의 지배가 세상에 나쁜 영향을 끼쳤습니까?”
“전쟁을 통한 정복이었으니까요. 그들을 견제해 줄 수 있는 드래곤의 숫자는 줄어들었고, 다른 종족은 그마저도 엄두를 낼 수 없었죠. 결국 세상은 그들의 손에 들어간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어요. 물론 그것뿐이라면 상관없었겠지만 더 많은 걸 욕심냈죠.”
“다른 것도 있습니까?”
이미 세계를 손에 넣은 그들이 다른 무엇에 욕심을 낼 수 있단 말인가.
더 정복할 것이 남았다는 뉘앙스의 말에 준성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정복욕은 단순히 세계를 지배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았어요. 진정한 지배를 하고자 했고, 세계를 관조하던 신마저 끌어내리고자 했죠.”
“……!”
준성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씁쓸한 그의 미소를 본 순간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럼 그 자리에서 끌려 나온 것이?”
“네.”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나직이 대답했다.
세계의 질서를 재편하고 신족의 침공을 막고자 하는 그의 정체는 바로…….
신이었다.
[8권에서 계속>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