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19)
베르디스를 향하여
넓은 침상에 빛을 반사하는 은발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침상에 누워 있는 미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건강을 상징하던 짙은 분홍빛 입술은 푸른색으로 변해 있었고, 새하얗고 윤이 나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세레나가 체내에 존재하던 마나가 유실되면서 자리에 쓰러진 지 2달이 다 되었다. 자리에 누워 미동조차 하지 않는 세레나를 바라보며 엘은 손을 뻗었다.
스윽.
분가루가 흘러내릴 것 같은 핏기 한 점 없는 그녀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러자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 그리고 고른 숨소리. 어딜 보아도 세레나에게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세레나가 일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단 1가지뿐이었다. 마나가 소실되면서 서서히 신성력이 그 자리를 채워 나가고 있었기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외부에 잡음 없이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기에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그 충격이 만만치 않아 세레나가 여태껏 일어나 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거의 모든 마나가 소멸되었구나…..”
마나 스캔을 펼치며 엘은 눈을 감았다. 4클래스 마스터에 이른 세레나의 마나 보유량은 일반 기사보다 월등하다고 할 수 있다. 엘이 전수해 준 단전호흡의 위력이 여지없이 발휘되어 극도로 높은 그녀의 마나 호응은 동급 마법사를 훨씬 뛰어넘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돌연 마나가 사라지면서 월등한 양의 신성력이 그녀의 전신을 서서히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단전호흡으로 인해 높아진 마나 호응이 반응하여 농밀한 마나가 신성력을 저지해 보았지만 그 정도로 신의 힘을 막기란 불가능했다.
이미 대부분의 마나가 신성력에 밀려난 상태였다. 조만간 전신에 신성력이 가득 차게 될 것이 분명했다.
“마나 흘이라…… 이곳이라면 꽤 시간이 걸릴 터.”
엘은 세레나에게 일어나는 일이 무슨 연유인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성녀의 선택.
신이 대륙에 성녀의 등장을 알리면서 성녀로 선택된 여인은 체내에 있는 모든 마나가 사라지고 신의 힘인 신성력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이미 만만치 않은 마나가 체내에 존재하지만 신의 힘은 막을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하지만 단전호흡으로 모인 마나는 그 농도가 남들과 다르다. 아마 신성력이 이곳을 차지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세레나의 얼굴을 매만지던 엘의 손이 그녀의 머리로 향했다. 성스러운 그녀의 은빛 머리칼은 어느덧 은은한 신성력을 동반하고 있었다. 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세레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곧 교단이 올 거야. 하지만 너를 그들에게 넘겨 줄 수는 없어. 성녀가 된다는 건 곧 어렸을 때 부모님에 의해 어두운 생활을 하던 그것과 같을 것이기에…… 그리고 이건 내 이기적인 생각이기도 해. 너 없는 삶은 이제 생각할 수 없으니까, 나는 널 넘겨 줄 수 없어. 넌 내 것이니까, 나만의 것이니까………”
그렇게 말한 엘은 방을 벗어났다. 착각일까?
그 순간 빛에 반사된 세레나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듯한 모습을 보인 것은.
“후…… 나가서 기분이나 전환할까………”
세레나의 모습을 보아서 그런지 엘은 기분이 우울했다. 실피르도 자신의 연이은 깨달음 전수에 무언가 가닥을 잡은 듯하더니 9달째 마법 연공에 빠져 있었고, 카이나 또한 무언가 실마리를 잡은 듯 검술 연습에 여념이 없었다.
“8클래스의 실마리는 구경도 못했지. 뭐, 깨달음이란 게 잡으려 하면 할수록 멀어지는 거니까…….”
엘은 깨달음이 불시에 찾아오는 것임을 알았다. 그렇다고 수련을 게을리 하는 건 아니지만 남들처럼 조급해하지는 않았다. 조급해하면 할수록 깨달음은 더욱 멀어진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엘은 매일 충분하게 휴식을 취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엘은 7클래스를 완벽하게 마스터하고 있었다. 충분한 휴식과 수련 시간이 겸비된 탓이다. 전생에서 이러한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한 시간 동안 끝없이 공부하는 것보다 50분 공부하고 10분 휴 식을 취하는 게 능률적으로 더 좋다는 사실을. 적당한 휴식! 수련에서도 이것이 접목되어 엘은 남들이 예상치 못한 무시무시한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마탑에서 벗어난 엘은 어느덧 멋있게 변한 주변 마을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멋지군. 금탑에 어울리는 멋진 도시가 되었어.”
트를 벨리(Troll Valley)라 불리던 죽음의 계곡에서 이제는 금탑이 들어선 골든 벨리(Golden Valley)라 불리는 이곳은, 하나의 마을이라기보다는 도시에 가까운 면모를 하고 있었다. 도시라고 하기에는 그리 많은 인구는 아니지만 엘이 자체적으로 투자한 돈과 주민들 스스로가 트롤 피를 채취하고 도시를 건설하는 데 투자했기에 골든 벨리에 존재하는 마을은 이미 웬만한 대도시의 크기를 능가하고 있었다. 외부 인구는 유입되지 않았다. 하지만 트롤의 피로 벌어들이는 돈이 워낙 많다 보니 주민들 모두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것을 누리며 인간답게 살고 있다. 항상 트롤의 습격으로 마음을 놓지 못하여 늘 긴장하고 여유가 없던 사람들. 그러나 이제는 넉넉한 생활로 얼굴에 늘 웃음을 머금고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 벌어들이는 돈이 워낙 넉넉하니 남의 것을 욕심 낼 필요도 없다.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밤에 문을 활짝 열고 자도 걱정 하나 생기질 않는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엘에 의해 시작된 것이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이렇게까지 변하니 흐뭇한 마음은 감출 수 없군. 하하!”
밝고 즐겁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며 엘은 울적했던 기분이 한결 가시는 걸 느꼈다. 그리고 마탑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몇 분 뒤, 엘은 마탑 입구에 도착했다.
“응? 뭐지?”
마탑에 들어서려던 엘은 입구에 서 있는 10여 명의 사람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각 12개의 마을을 이끌던 경비대장들이었다.
개개인이 모두 익스퍼트에 든 실력자들. 그 실력을 탐냈지만 진심으로 충성을 바칠지 의문이 되어 거두기를 망설인 그들이 지금 마탑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엘은 조용히 그들에게 접근하였다. 기사가 아니지만 이미 체내에 축적된 마나는 소드 마스터를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양이었기에 엘의 접근은 신속하면서도 은밀했다.
“무슨 일로 날 찾은 것이지요?”
“……..!”
갑작스런 엘의 물음에 그들은 일제히 움찔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더니 엘의 얼굴을 보고는 풀어진 표정을 지었다.
“랍주님이셨군요. 깜짝 놀랐습니다.”
잔뜩 경계의 표정을 짓던 마이더가 엘의 얼굴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마이더의 얼굴을 보며 엘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절 찾아오셨나요?”
엘은 그들이 무슨 뜻으로 찾아온 것인지 내심 짐작하고 있었다. 전생에 심리전의 달인이라 불렸던 그가 어찌 순박한 그들의 내심을 모를 리 있겠는가! 하지만 모름지기 심리적 우위에 서려면 상대방의 애를 더욱 닳게 만들어야 한다. 울적한 기분이 가신 엘은 그가 지닌 장점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리고 그것은 제대로 먹혀 들어갔다.
털썩!
무릎을 꿇는 12명의 남자. 그 모습에 엘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물었다.
“이걸 무슨 의도라 봐야 하죠?”
그러자 제이머 남작가 출신 기사의 수장인 모스가 외쳤다.
“저희를 거두어 주십시오!”
그의 말에 엘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이것이다. 이것이 야말로 그가 예상하던 전개였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직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무슨 뜻이죠? 거두어 달라니?”
상대방이 자신의 의도를 알아주지 않는다면 더욱 애가 닳는 법이다. 특히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러한 현상이 더욱 크다. 모스가 고개를 들며 엘에게 외치듯 말했다.
“저희는 솔직히 탑주님의 의도를 의심했습니다. 이곳을 차지한 뒤 우리들을 어떻게 해 보려는 게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저희들의 어리석은 생각이었습니다. 탑주님은 아무런 대가없이 저희들을 사람답게 살게 해 주셨으며, 평생 갚기 힘든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덕분에 늘 트롤들에게 위협받던 가족들이 이제는 웃음을 짓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결심했습니다. 이 부족한 한 몸, 평생 탑주님을 위해 바치겠다고 말 입니다. 이것은 비단 저뿐만의 뜻이 아닌 모두의 뜻입니다.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
그 뜻이 진심으로 묻어 나오는 말이다. 하지만 엘은 약간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음!”
그러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비장감이 가득했다. 반드시 엘의 승낙을 얻겠다는 의지. 무언가를 바라는 이해타산적인 얼굴이 아닌, 진심이 담긴 얼굴이었다.
‘좋군.’
그런 그들의 얼굴에 엘은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엘은 이런 이들을 원했다. 비단 자신의 부하가 되는 것이 아니라도 굳은 의지가 있으며, 누군가를 믿을 수 있는 믿음이 가는 사람. 엘은 그런 사람을 원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을 향해 불신을 내뿜던 이들이 자신에 대한 믿음을 뿜어내며 자신의 부하가 되길 청하고 있었다. 흡족했다. 그리고 마음에 들었다. 충분히 그들의 애를 닳게 만든 엘은 잠시 생각하는 모션을 취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승낙의 표시였다.
“좋습니다. 사실 저 또한 여러분들의 힘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던 터, 여러분의 맹세는 고맙게 받아들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엘의 승낙에 12명의 사내가 동시에 외쳤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앞으로 여러분들은 매직 나이트라 불리게 될 것입니다. 동급의 기사 여럿을 상대할 수 있는 최강의 기사! 그것이 앞으로 여러분이 될 것입니다.”
엘은 언젠가 이들이 자신에게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어떤 형식으로 구성할지 이미 구상을 끝낸 뒤였다.
“………”
엘의 말에 그들은 기대에 찬 눈을 했고, 엘은 그들을 보며 웃었다. 이것이 추후 무적이라 불리며 모든 기사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기사, 혹은 환상의 기사 라 일컬어지는 매직 나이트의 탄생이었다.
“왕국 중앙 회의에 참석해 달라……?”
모스 등을 거둔 지 3일째 되는 날, 엘은 왕궁에서 온 마법 편지를 받았다. 이미 마탑을 세워 왕궁과 통신 채널을 설정해 놓았기에 이러한 마법 편지를 받는데 하등 불편함이 없었다. 엘은 데실론이 보낸 마법 편지를 받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현재 톨리안 왕국의 상황은 그야말로 이전투구의 모습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왕가의 숨겨진 힘을 활용한 제3왕자파는 어느덧 제일 강해져 두 왕자파를 압도하는 형국이었지만 귀족 세력 면에서는 부족하여 정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정통성으로 정계에서 어느 정도 버티고 있지만 이미 정 계의 중앙 귀족들은 대부분 제1왕자파와 제2왕자파에 속하여 때로는 힘을 합하고, 때로는 힘겨루기를 하여 그야 말로 왕국을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간 것이다. 특히 이번 몬스터 침공을 완벽에 가깝게 막은 테란델 후작은 제1왕자파 귀족들의 주장으로 레도프 국왕에게 상을 받은 상태였다. 트롤 벨리를 완벽하게 소탕한 엘이나 오크들을 전멸시킨 또 다른 귀족 로웰린을 배제하고 말이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다른 놈이 챙기는 격이었다.
“국왕이 무슨 생각일까. 나의 등장을 알림으로써 제3왕자파에게 유익한 영향을 끼치려는 걸까? 아니면 단순히 마탑의 등장을 알리려는 걸까…….”
어느 쪽도 상관없다. 하지만 마탑은 대륙의 관례상 항 상 중립을 지켰기에 귀족들은 엘을 승리를 결정적으로 지을 수 있는 조커로 보게 될 것이란 이야기다. 그리고 레도프 국왕이 엘을 소개함으로써 귀족들은 엘을 제3왕자파의 히든카드나 혹은 중립적 성향으로 보게 될 확률이 높았다. 결국 이러한 행동은 엘을 정계에 끌어들여 어느 쪽으로나 제3왕자파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겠다는 레도프 국왕의 의도였다. 엘은 그 의도를 단번에 간파할 수 있었다. 처음 레도프 국왕이 자신에게 제의를 했을 때부터 이럴 거란 걸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엘은 그러한 레도프 국왕의 의도에 순순히 따라 줄 생각이었다. 엘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참에 루비어스 백작가를 중앙 정계로 진출 시켜야 겠군. 이십 대 초반의 나이에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에 든 재능이라면 뒤에 내가 설 시 충분히 중앙 귀족으로 올라 설 수 있다.” 엘은 이번 기회를 발판 삼아 로웰린을 중앙 귀족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이미 막대한 양의 해산물 수출로 루비어스 백작령은 부활의 기틀을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가문의 부활은 단순히 재력만 있다고 하여 이루 어지는 것이 아니다. 로웰린이 중앙 귀족이 된다면 어린 나이에 천재적인 재능으로 소드 익스퍼트에 오른 그녀를 추앙하는 기사들이 있을 것이고, 적지 않은 기사들이 루비어스 백작가의 깃발 아래 모일 것이다. 이번 회의에서 귀족들은 루비어스 백작가 뒤에 엘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 어떤 귀족들도 함부로 루비어스 백작 가에 손을 대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국왕도 루비어스 백작가를 은연중 밀어 주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보이 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엘 또한 나름대로 레도프 국왕을 이용하는 것 이다. 비록 나쁜 의미는 아니지만 이용한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나를 이용했으니 별로 기분 나빠하지 못하겠지.”
그렇게 생각한 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이 마법사인 걸 감안한 듯 왕국 중앙 회의는 불과 5일 밖에 남지 않았다.
엘은 한창 마법 수련 중인 실피르와 매직 나이트로 선발된 12명의 기사들과 매일 대련을 벌이는 카이나와 오랜 만에 식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혼자 가 보려고요.”
식사를 나누면서 엘은 실피르와 카이나에게 왕궁에서 보낸 편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실피르는 루비어스 백작가에 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엘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까지 해 주니 정말 고마워. 솔직히 가문의 수작으로 루비어스 백작가가 그 정도가 될 줄은 몰랐거든.”
처음 엘이 톨리안 왕국으로 간다고 했을 때 직감적으로 루비어스 백작가가 존재하여 그곳을 선택했다는 걸 느낀 실피르다. 루비어스 백작가는 그녀 남편의 출신 가문이다. 그런데 가문의 수작으로 멸문의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른다. 그런데 엘이 지금 최대한 돕겠다고 한다. 그녀의 입장으로서 당연히 고마울 수밖에 없었고, 한편 으로는 아버지의 가문을 돕는 엘의 모습이 흐뭇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루비어스 백작가는 예전의 힘을 되찾을 거예요. 그리고 머지않아 예전의 영광을 되찾겠죠.”
웃는 얼굴로 실피르의 말에 대답한 엘이 이번에는 카이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카이나는 이제 몸을 움직이는 수련이 도움이 되지 않을 거야. 단전호흡에 중점을 두고 수련을 하면서 명상을 해 봐.”
그러자 카이나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네…… 사실 저도 주인님이 없는 사이 다른 남자들과 검을 나누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세상에서 엘을 제외한 모든 남자에게 거부감을 느끼는 카이나. 그녀가 흔쾌히 말을 받아들이자 실피르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호호! 이렇게 보니 엘이 질투하는 것처럼 보이는걸?”
“네? 질투라뇨! 천만의 말씀을…….”
엘이 놀라며 손을 저었다. 하지만 실피르는 계속해서 엘을 놀렸다.
“그렇게 행동하니 정말 질투처럼 보이는데?”
그러자 카이나가 볼을 발그레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면서 엘은 돌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힐끔 위를 쳐다보았다. 그곳은 세레나의 방이 있는 곳이다.
“제가 떠나 있는 동안 세레나를 잘 부탁드릴게요, 엄마. 그리고 카이나한테도 부탁 좀 할게?”
세레나의 이야기가 나오자 실피르와 카이나가 정색을 한다. 그리고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 세레나는 우리에게 맡겨 두렴.”
“맡겨주세요.”
그녀들의 말에 엘은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들이 있기에 엘이 마음 놓고 떠날 수 있는 것이다.
“네? 지금 뭐라고요?”
로웰린은 당황스러웠다. 가문을 일으키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마탑의 탑주. 그가 갑자기 방문하여 왕국 중앙 회의에 참석할 의향이 없냐고 물은 것이다. 가난한 영지를 꾸리느라 중앙 정계에 진출할 생각을 꿈도 꿔보지 못한 그녀다. 이제 막 가문이 살아나고 있는 시점에 엘의 제의는 그녀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엘이 로웰린에게 말했다
“루비어스 백작가가 성장하기는 했지만 아직 테란델 후작가와 맞설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중앙 정계에 나서서 최소한 테란델 후작가가 경거망동 못하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몬스터들의 습격을 막아낸 공로로 상을 받은 테란델 후 작가의 횡포가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다 망해 가는 루비어스 백작가가 몬스터들을 막아 낸 건 다 자신들이 막아 준 덕이라면서 계속해서 혼인을 요구하고 있었다.
“…….”
엘의 말에 로웰린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오만방자 하던 테란델 후작가 사자의 모습이 떠올라서이다. 그리고 느물느물한 라크의 모습을 떠올리니 당장 주먹을 꽃아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권력이 죄다. 힘이 없어 그렇게 행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엘의 말은 로웰린에게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가문의 힘이 서서히 살아나는 지금 이 시점에 수도에 올라가 더욱 영향력을 증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지방에 있다고 하지만 그녀가 왕국의 사정을 모를 리 없다. 세 왕자파로 나뉘어 현재 정국은 어수선하기 그지없으 며, 이 눈앞의 마탑주가 등장하기만 한다면 단숨에 폭풍의 핵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엘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가 자신의 배경이 되어 주겠다는 것을 뜻했다. 엘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아차린 것이다.
순간 로웰린은 퍼뜩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에게 너무도 잘해 주려는 엘의 의도가 궁금했던 것이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시선을 느낀 엘이 시선을 마주했다. 로웰린이 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도와주는 대가가…… 설마……?”
“그게 무슨?”
엘이 고개를 갸웃하며 로웰린을 바라보자 그녀가 순간 몸을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손으로 몸을 감싸며 움츠렸다. 그녀는 그 대가로 엘이 자신의 몸을 요구하리라 착각한 것이다. ‘하?’
그 모습을 본 엘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로웰린의 반응이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로웰린의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이러한 반응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 홀연히 나타나 오크들의 침공에서 구해 주었고, 쓸모없었던 가문의 상품을 모조리 사 주었다. 그리고 친히 배경이 되어 주어 가문의 부활을 돕겠다고 한다. 로웰린은 엘의 정체를 모른다. 그가 과거 루비어스 백작이 되어야 할 레이언 루비어스의 아들이란 걸 모르고 있다. 그러니 어찌 엘의 이러한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순수한 호의로 받아들이기에는 그녀가 여태껏 겪었던 일들이 너무나 험난했다.
“하아!”
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절로 한숨이 나온 것이다. 그동안 로웰린이 어떠한 일을 겪었을지 상상하니 미안하기 그 지 없었다. 엘은 흔들리고 있는 로웰린의 눈을 마주했다. 엘의 눈은 한 점 흔들림도 없이 곧았다.
“갑작스러운 제 호의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언젠가 알게 되겠죠. 안심하세요, 저는 백작님에게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습니다. 단지 필요에 의해 해산물을 모두 사 간 것이고, 제게도 생각이 있어 백작님을 돕는 것 입니다. 순수한 호의…… 정말 받아들이기 힘들겠죠. 그 동안 백작님이 겪은 고생을 생각하면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받아들이세요. 훗날 모든 걸 알게 될 테니 까요. 아시겠습니까?”
로웰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진심이 담긴 엘의 말이 그녀의 가슴에 그대로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침묵이 잠시 돌고, 마침내 제정신으로 돌아온 로웰린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흔들리던 그녀의 눈은 어느덧 엘처럼 흔들림 없는 또렷한 초점을 맺고 있었다.
“믿겠어요.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탑주님의 눈 에 진실이 담겨 있으니까요. 하지만 훗날 저에게 모든 연 유를 털어놓아 주세요. 궁금한 점을 참는 게 힘든 성격이 라…….”
그러자 엘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머지않아 모든 것을 말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머지않아서 말입니다………” 그런 엘의 태도에 로웰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도로 떠나는 준비를 하는 데 하루 정도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엘이 느긋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틀이든 사흘이든 괜찮습니다. 텔레포트 마법이 있으니까요. 그럼 편히 준비하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
로웰린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방을 벗어났고, 엘은 그런 그녀를 빙긋 웃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쾅!
거칠게 팔을 내리쳐 탁자를 친다. 손에 마나가 담긴 탓 인지 탁자는 부르르 떨며 거센 진동을 일으켰다.
“이번 회의가 기회다! 이번 회의에서 유드미온 왕자를 완전히 떼어 버려야 해! 모두들 알고 있나?”
거대한 회의실에는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이를 제외한 4명이 자리에 착석하고 있었다.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이는 트겐발리 공작으로, 현 국왕의 숙부이며, 크란 왕자를 지지하는 제2왕자파의 수장이기도 했다. 트겐발리 공작은 전 국왕의 동생이지만 실제 나이는 레도프 국왕보다 몇 살 많은 정도였다. 국왕의 동생이라 하여 공작의 작위를 받았지만 실제로 별다른 권력도 없는 작위였다. 하지만 트겐발리 공작은 탁월한 정치력을 지니고 있었고, 수십 년 동안 정치 활동을 벌여 오늘날 톨리안 왕국을 이끄는 양대 파벌의 수장 중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시기를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사람 보는 눈이 좋은 트겐발리 공작은 요즘 들어 가슴이 터져 나가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제1왕자파에게 큰 타격을 입히기 위해 시간을 들여 준비했던 회심의 한 수가 갑작스럽게 왕가의 힘을 등에 업고 나타난 제3왕자파로 인해 무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제1왕자파에게 한 방 먹이는 것도 실패하고, 제 3왕자파의 힘이 막대해짐으로 인해 제1왕자파와 연합전선을 벌이면서 주도권을 내주기도 하였다. 그로 인해 현재 트겐발리 공작은 매우 저기압이었다. 그는 주변 귀족을 둘러보며 다시 한 번 탁자를 쳤다.
쾅!
왕국을 지탱하는 소드 마스터답게 그의 주변에서 피어오르는 기세는 무시무시했다.
“어서 말을 해 보란 말이다, 말을! 브릴켄드 후작!”
트겐발리 공작에게 호명된 40대 후반의 중년인, 브릴켄드 후작이 대답을 하였다.
“예, 공작님 .”
“무언가 방도가 없나?”
트겐발리 공작의 재촉에 브릴켄드 후작이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저어, 생각해 둔 게 있긴 있습니다만………”
그러자 트겐발리 공작이 반색했다. 지금 상황이 상당히 비관적이라 여겼는데 제2왕자파의 꾀주머니인 브릴켄드 후작이 한 수를 준비하고 있던 것이다.
“오오, 과연 후작이다! 어서 말해 보라.”
그러자 브릴켄드 후작이 주변 귀족을 슬쩍 훑더니 헛기침을 하였다.
“허험! 우선 공작님의 말씀대로 이번 왕국 중앙 회의가 기회라 할 수 있습니다. 이번 회의에서 군부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
“좀 더 자세히 말해 보실 수 있겠습니까?”
인근 왕국에 영지를 접하여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는 트룬 백작의 물음에 브릴켄드 후작이 답변을 해 주었다
“현재 제1왕자파는 몬스터 랜드에서 쏟아진 몬스터를 잘 막았다는 걸 구실로 그 기세가 최고조로 달해 있소. 때문에 상당한 군사를 지니고 있는 우리 파벌이 제1왕자파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듣고 있지.”
그의 말에 모든 귀족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파벌을 구성하고 있는 귀족들 중 제1왕자파는 중앙 정계에서 상당한 힘을 지니고 있는 귀족들이다. 그리고 제2왕자파는 국경 부근에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는 귀족들이었다. 때문에 권력 면에서는 제1왕자파가 앞서지만 결정적인 군사력에서는 제2왕자파가 앞서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이번 몬스터 랜드의 습격으로 인해 제1왕자파의 위상이 급격하게 올라가서 제2왕자파는 상당히 곤란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 자칫 그들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 제1왕자파로 건너가 버릴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브릴켄드 후작이 지적하는 것도 바로 그 부분이다. 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몬스터 랜드의 습격도 가볍게 막아 내어 제1왕자파의 위상이 올라갔으니 이번에는 우리가 힘을 보여 줘야 할 차례. 그러니 인근 왕국인 헤센 왕국을 침공하는 것이오.”
“헤센 왕국을?”
주변 귀족들은 물론 심지어 트겐발리 공작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그들의 반응이 마음에 든 듯 브릴켄드 후작이 계속해서 말했다.
“사실 본 왕국이 강대한 힘을 지녔음에도 주변 왕국에 힘을 행사하지 못한 이유가 다름 아닌 몬스터 랜드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번 몬스터들의 침공을 손쉽게 막아 냈으니 주변 왕국에 힘을 뻗칠 때입니다. 다른 왕국과 접하고 있는 왕국의 귀족들은 대부분 우리 쪽 사람들이니 몇몇이 힘을 합친다면 최소한 한 개의 왕국은 흡수 할 수 있을 거란 게 제 생각입니다.”
브릴켄드 후작의 말을 들은 트겐발리 공작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흐음…… 주변 왕국 하나를 우리가 완전히 점령함으로써 우리의 힘을 외부에 널리 알리고 백성들의 시선을 돌릴 수 있겠군. 게다가 점령 영토엔 우리 측 사람들을 넣을 수 있고. 후일 그들은 우리의 힘이 될 테지. 참으로 멋 진 계획이야.”
그에 브릴켄드 후작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부분입니다. 그리고 제가 헤센 왕국을 지목한 것은 인근 왕국 중 가장 약한 곳이 헤센 왕국이고, 현재 그들은 3년 동안 흥년에 들어 민심이 무척 뒤숭숭하다고 합니다. 아마 두 명의 백작이 힘을 합한다면 헤센 왕국을 충분히 합병할 수 있을 것입니다. ”
“흐음…….”
트룬 백작이 잠시 고민을 하는 듯하더니 이내 결정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군사를 동원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말씀하신 대로 저 혼자의 힘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러자 브릴켄드 후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뒤에서 지원은 걱정하지 마시오. 넉넉하게 지원해 줄 테니. 트룬 백작은 헤센 왕국에서 마음껏 용맹을 떨치면 되오.”
트룬 백작 또한 왕국의 국경을 지키고 있는 소드 마스터 중 하나다. 실전을 무척 좋아하는 그였기에 그는 브릴켄드 후작의 말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알겠습니다.”
“결정이 되었군요. 어떻습니까, 공작님?”
트겐발리 공작이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 훌릉한 계획이다. 이번에 크게 한건 했어, 후작.”
“저는 영원히 공작님을 모실 뿐입니다.”
“하하, 그래야지 암!”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리는 트겐발리 공작을 보면서 브릴켄드 후작의 눈이 한순간 기묘한 빛을 띠다가 본래대로 돌아왔다. 그가 보인 눈빛은 무언가를 성취한 듯 득의양양했다. 그렇게 톨리안 왕국의 수도 베르디스에서 전운을 몰고 올 음흥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왕권 다툼이 외부로까지 뻗어 나가는 형국이었다. 이것은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전개라고 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와 보는데 여전히 바글 바글하단 말이야.”
엘은 준비를 마친 로웰린을 데리고 곧장 베르디스로 텔레포트를 하였다. 항상 매직 스톤을 가지고 다니기에 아무리 먼 거리도 손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 베르디스로 접어든 엘은 고개를 돌려 저쪽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로웰린을 향해 말했다.
“뭐 하시는 겁니까? 수행원 없이 와서 그런 건가요?”
“…….”
로웰린이 무언가를 말하려다 멈칫했다. 그리고 다시 우물쭈물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엘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가가 영문을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러시는 거예요?”
그러자 로웰린이 고개를 푹 숙이며 모기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이번에 베르디스에 처음 오는 거여서…….”
“하아?”
로웰린의 말에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엘. 그럴 수밖에 없다. 로웰린은 톨리안 왕국의 백작이다. 왕국의 백작이라면 몇 되지 않는 고위 귀족에 속한다. 그런데 그런 귀족이 수도에 한 번 온 적이 없다니? 이게 말이 된단 말인가? 그런 엘의 심정을 알아차린 듯, 로웰린이 변명같이 대답을 하였다.
“그게…. 영지 일이 워낙 바빠서 올 시간이 없었어요”
“……그렇군요.”
엘은 로웰린의 말에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이윽고 엘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졌다. 생각해 보니…. 얼마나 가문이 어려웠다면 수도에 한번 올라을 시간도 없었단 말인가? 더 이상 생각하기 복잡하여 엘은 로웰린을 힐끗 보고는 내심 밝게 말하였다.
“뭐, 처음일 수도 있는 거죠. 자, 그럼 절 따라오세요. 예전에 와 본 적이 있어서 꽤 좋은 여관을 알고 있거든요”
그러면서 엘은 로웰린을 이끌고 전에 베르디스에 왔을 때 머물던 여관으로 향했다. 시설이 무척 좋아 귀족들이 주로 묵는 고급 여관이었다. 그곳에 각각 1인실 방을 잡은 엘과 로웰린은 내일 벌어 질 왕국 중앙 회의를 위해 각자 편안한 휴식을 취했다.
“……..뭐야?”
자신의 방에 누워 조용히 명상에 잠겨 있던 엘은 밑에서 누군가 말싸움을 벌이고 있음을 알아채고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다시 한 번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 보니 상당히 친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렇다. 말싸움을 벌이고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로웰린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로웰린과 말싸움을 벌이고 있는 이는 로웰린보다 한참 미치지 못하지만 그의 곁에 있는 이들이 만만치 않게 느껴졌다. 엘은 다시 조용히 눈을 떴다. 로웰린이 말싸움을 벌이고 있으니 무슨 일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데려왔으니 그녀의 힘이 되어 주어야겠다는 생각도 자리 잡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알아 봐야겠군.”
자리에서 일어난 엘이 방을 벗어나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당으로 내려간 엘의 눈에 로웰린이 들어왔다. 그녀와 마주하고 있는 이는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귀족 자제였으며, 그의 주변에는 소드 익스퍼트 중급과 상급으로 보이는 기사 5명이 호위하듯 서 있었다. 엘이 로웰린을 불렀다.
“아니 , 백작님! 무슨 일이십니까?”
그러자 로웰린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엘을 바라보았다.
“탑…… 엘 님………”
아직 공개된 탑주가 아니었기에 함부로 탑주라 부르지 못한 로웰린이 엘의 이름으로 불렀다. 그러자 20대 중반의 귀족 청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엘에게 향했다. 그는 귀족 특유의 오만함고 거들먹거림이 배인 행동으로 로웰린에게 입을 열었다.
“엘 님? 뭐지, 보아하니 검을 수련한 것도 아닌데…… 마법을 익힌 건가? 하! 보아하니 3클래스 정도인 것 같은 데…… 백작! 설마 저 마법사를 좋아하는 것이오? 나 라크가 그렇게 끈질기게 청혼을 했는데 거부했던 이유가 바로 저 마법사 때문이란 말이오?”
청년이 스스로 정체를 밝혔다. 그는 테란델 후작가의 둘째 아들 라크였던 것이다. 끈질기게 로웰린에게 청혼한, 루비어스 백작가를 집어삼키기 위해 매일같이 로웰린에게 청혼하는 이가 바로 라크였다.
“……..그게 아니에요.”
로웰린은 라크가 엘을 가리키며 함부로 말하자 어쩔 바를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엘은 마탑의 탑주다. 그것은 최소 7클래스 마법사만이 가능한 특권으로, 어느 왕국에서나 최소 후작 대우를 해 주며, 제국에서는 백작의 대우를 해 준다. 라크의 아버지인 테란델 후작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이가 바로 엘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후작도 아니고 후작 자제에 불과한 라크가 엘을 저렇게 대하다니……. 라크는 그런 로웰린의 행동을 오해했다. 그는 자신의 말이 정곡을 찔러 로웰린이 당황한 것으로 판단했다. 라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엘에게 향했다. 그리고 엘의 잘생긴 얼굴을 보자 그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이놈이!’
라크는 옛날부터 뛰어난 외모를 지닌 로웰린을 좋아했다. 거기에 가문의 야망이 더해져 가문의 적극 지원이 있자 당장이라도 로웰린을 차지할 수 있을 것 같아 기뻐했다. 그때부터 여기저기 망나니처럼 사고 치던 것도 그만두고 여자도 끊었다. 그리고 로웰린에게 끊임없이 청혼에 청혼을 거듭했다. 하지만 로웰린은 끝까지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떠한 회유에도 넘어오지 않았고, 어떠한 협박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로웰린이 남자에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며 막 포기하려던 찰나에 이런 놈이 등장하다니……. 라크가 금방이라도 불똥이 떨어질 듯한 눈으로 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누구냐? 몇 클래스 마법사지?”
엘은 고민했다. 순간 자신의 클래스를 말하고 마탑주라 말해 볼까 고민을 해 보았다. 하지만 그것을 말해 봤자 말짱 도루묵이라 는 걸 느꼈다. 자신의 나이가 몇 살이던가? 올해 열여덟이다. 그런데 눈앞의 귀족 청년에게 “난 7클래스 마법사요, 그리고 마탑의 탑주요.” 이렇게 말하면 과연 순순히 믿겠는가? 아니다. 오히려 허풍쟁이로 몰리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리고 정황상 이 귀족 청년은 결코 자신에게 호의를 품고 있지 않은 듯했다. 지금 저렇게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눈이 그걸 증명하지 않는가. 호의는커녕 원한을 품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상대는 자신의 마탑이 위치한 곳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귀족의 자제다. 여기서 건드려 봤자 엘로서도 어렵게 계획한 것들을 성공할 수 없었기에 엘은 함부로 나서지 않았다. 엘은 슬쩍 로웰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라크의 행동에 당황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자 순간 장난기가 돌았다. 어차피 이 녀석이 자신을 대하는 게 화나지도 않는다. 오크가 깔짝거려 봤자 드래곤이 눈 하나 깜빡 안 하는 것처럼 상대할 가치도 없는 놈에게 반응할 필요를 못 느낀 것이다. 엘이 대답했다.
“저는 루비어스 백작가 주변에 머물고 있는 마법사입니다. 이번에 루비어스 백작가에 신세를 끼치게 되었지요”
그러면서 엘은 로웰린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러자 로웰린은 한동안 엘의 윙크가 무슨 뜻인지 짐작을 못하다가 이내 본래 표정을 되찾았다. 그렇다! 엘은 지금 눈앞의 라크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이다. 솔직히 그렇다. 테란델 후작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하나 그가 대단한 것이지 라크가 대단한 것이 아니다. 본신의 실력이 소드 익스퍼트라고 하나 로웰린 자신보다 약하지 않은가. 게다가 자신은 톨리안 국왕에게 작위를 수여받은 귀족이다. 귀족가 자제인 라크와는 엄연히 다른 귀족 중의 귀족인 셈이다. 로웰린의 어깨가 쭉 펴졌다. 엘이 그녀의 뒤에 있는 이상 왕국의 제일 귀족인 트겐발리 공작이나 라이어스 공작이 두렵지 않았다. 7클래스 마법사는 그 이상의 무게감을 지니고 있다. 로웰린이 라크를 보며 말했다.
“본 가문의 마법사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그러자 라크가 순간 움찔했다. 그러더니 로웰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렇다면 내가 저자의 정체를 물어 보지도 못한단 말이오? 아무리 마법사라고 하나 귀족인 나보다 그 신분이 높다고 할 수 없소.”
라크의 말은 귀족적 관점에서 지극히 타당성을 띠고 있다. 마법사가 아무리 고급 인재라고 하나 귀족인 자신보다 높은 신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마법사는 기사와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귀족가를 보호하고 귀찮은 일들을 대신 수행해 주는 그런 존재 말이다. 자신이 한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라크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말을 너무 잘한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당장 사과하겠지?’
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로웰린의 모습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의기소침하여 쩔쩔매는 모습이 아니라, 도리어 두 눈에 안광을 뿜어내며 라크를 노려보고 있던 것이다.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에 이른 로웰린의 기세다. 제법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는 라크라지만 그녀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낼 정도는 아니다.
움찔!
로웰린의 눈빛에 압도된 라크가 뒤로 물러나자 그의 호위로 서 있던 기사가 재빨리 앞을 가로막는다. 그리고 경계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로웰린을 바라본다. 기사들이 앞을 가로막았음에도 불구하고 로웰린은 여전히 안광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도리어 그녀는 더욱 강렬한 안광을 뿜어내며 라크를 향해 말했다.
“이분이 그런 신분이건 아니건 중요치 않아요. 단지 후작가 자제에 불과한 당신이 제게 이렇게 대하는 태도가 화가 날 뿐이지요. 저는 왕국의 백작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후작가의 자제입니다. 작위를 받은 귀족과 단순히 작위를 받은 귀족의 가족은 그 신분 차가 큰 법. 대륙의 법을 제대로 모르시나 본데 앞으로는 유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서 로웰린은 엘에게 시선을 돌렸다. 시선을 돌릴 때 그녀의 눈에서 뿜어지던 안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그녀는 엘에게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꺼냈다.
“실례를 범하게 되었네요. 죄송해요.”
그러자 엘이 아직도 로웰린의 기세에 압도되어 있는 라크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실례랄 것도 없었습니다. 애초에 저런 인물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죠. 저런 이가 감히 제 신경을 거스를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 말에 로웰린이 대경하여 양손을 크게 내저었다. 고개도 맹렬히 돌리고 있었다.
“아, 아니에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가요? 다행이군요.”
그러면서 엘은 로웰린에게 말했다.
“이만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귀족 정신이 제게 옮겨 붙을 것 같거든요.”
명백히 일부러 자극하는 말이었지만 로웰린은 그에 대해 저지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저도 목욕이나 해야겠어요. 고루한 귀족 정신이 몸에 밴 것 같네요.”
“하하! 저와 같아 다행이군요. 그럼 방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엘이 발걸음을 옮기자 로웰린도 발걸음을 옮겼다. 라크는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다.
“그러세요.”
그러면서 로웰린도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사라지는 엘과 로웰린을 라크는 두 눈 가득 분노를 담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분통을 터뜨렸다.
“제기랄! 감히 내게 이런 모욕을 심어 주다니! 그리고 저 마법사………”
라크는 어느덧 계단 위로 사라진 엘의 됫모습을 쫓았다. 그의 시선에는 진한 분노가 용암처럼 들끓고 있었다.
“감히 내게 이런 모욕을 주게끔 만들다니. 두고 봐라! 이번 왕국 중앙 회의에 안건을 붙여서라도 무사치 못하게 하리라!”
사소한 원한을 갚고자 왕국 회의마저 이용하려는 그의 심보. 그것은 귀족들이 어떠한 생각을 지니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증거와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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