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190)
8권
제70장 완충지대
“…….”
스스로를 신이라고 일컫던 존재와의 대화를 끝낸 뒤, 지저세계 도시를 벗어난 준성은 지브롤터 해협으로 이동하고 곧장 프랑스로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그리고 좌표를 읽어 들인 뒤 밀라노로 향했다.
이미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밀라노에 도착한 이나는 고급 호텔인 타운 하우스 갤러리아에 머물며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첫 해외 방문이고, 그동안 워낙 많은 디자이너들인 눈독을 들였던 만큼 여유롭게 관광을 하겠다는 당초 계획은 이루지 못한 채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호텔에 도착한 준성이 미리 준비해 둔 좌표로 텔레포트를 시전하니, 스케줄을 나간 이나를 제외하고 엘리엔 혼자 호텔에서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이나는 자정 무렵이 되어서야 방안으로 들어왔다.
“준!”
그를 본 이나가 눈을 반짝이며 다이빙하듯 그에게 안겼다. 미소를 지으며 토닥여 주었다.
“잘 지냈어?”
“물론이죠. 너무 잘 지내서 물론이에요. 이런 말을 하면 안 되지만 인기가 더 많아지는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이러면 앞으로 자유시간이 줄어들 텐데…….”
다른 모델들이 들었다면 경을 칠 만한 이야기였지만 인기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그녀로서는 걱정되는 사안이었다.
밀라노에 도착해서 소화하는 스케줄은 무난했지만 문제는 그 여파였다.
너무 잘 풀려도 문제였던 것이다. 수많은 디자이너와 브랜드가 그녀를 만나길 희망했고, 밀려드는 일거리 때문에 제대로 휴식조차 취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는 준성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줄어드는 결과를 낳으니, 깊은 수렁에 빠져든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하는 거야. 그러니 즐기도록 해.”
“당연히 즐기고는 있지만 준과 함께 있는 시간이 줄어들어서 그렇죠.”
한숨을 푹 내쉰 이나는 그저 고개를 저어 보일 뿐이었다.
양어깨를 축 늘어뜨린 그녀를 보며 준성이 응원을 보냈다.
“패션쇼, 기대할게.”
“물론이죠, 불만을 드러냈지만 그래도 건성으로 할 생각은 없어요.”
“그래.”
다음 날도 이나는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고, 준성은 밀라노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관광을 즐겼다. 사흘이 지나고 이나가 런웨이에 서게 되었다. 준성과 엘리엔도 초대받아 지켜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옷을 입은 모델들이 저마다 차례대로 워킹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감 넘치는 그녀들의 모습에서 세계 최고에 다다르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이 느껴졌다.
한 명, 한 명 워킹을 하면서 각자의 매력을 뽐내고, 마지막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나였다.
이제 갓 밀라노에 데뷔한 모델인 그녀가 마지막에 배치된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이며 파격 그 자체였다. 옷을 입고 걸음을 옮기는 그녀는 사람의 마음을 홀리는 팜므파탈 그 자체였다.
누구도 그녀의 매력에 홀려 버릴 만큼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짝짝짝!
지켜보던 사람들은 박수를 치면서 이나를 격려하고, 응원해 주었다. 패션쇼를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이 기립 박수를 치고 있으니 그녀의 밀라노 데뷔가 성공임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
그 광경을 지켜보는 준성과 엘리엔은 입을 다물었다. 런웨이에서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이나의 모습은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이나는 자신의 적성을 찾았군.”
“사람들의 관심 사는 걸 좋아했으니까요.”
금탑주였던 시절에도 이나는 사교계의 꽃이자, 중심이었다. 그녀의 미모에 수많은 남자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고, 그랜드 마스터의 뛰어난 육체를 바탕으로 펼치는 춤은 환상적이었다.
그리고 차원 이동을 하여 이곳에서 패션의 중심이라는 밀라노에서 그녀의 존재가 세계에 각인되고 있었다.
“열심히 하는 모습은 아름답게 마련이지.”
“네, 그러네요.”
“이나를 보니 부끄러워. 그동안 나는 왜 열심히 하지 못했던 건지.”
“예?”
“인간들은 늘 치열하지. 엘프의 수백 년 성취를 단 몇십 년 만에 뛰어넘고, 우리를 압박했으니까. 인간을 좋아하지 않지만 목표를 향한 그들의 집념은 존경할 만하다고 본다. 이나를 보니 나도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 말은?”
“나도 더 이상 두려워해서는 안 되겠지. 학교에 나가겠다. 내가 하기로 한 만큼 책임을 져야겠지.”
엘리엔의 미소는 환하게 미소 짓고 있는 이나에게 고정되어 떨어질 줄 몰랐다.
프랑스 보르도의 몬스터 웨이브가 진압되고 몬스터 필드가 축소되면서 평화가 찾아왔지만 그 여파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특히 준성과 엘리엔을 보르도로 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대한민국 A.O. 본부는 그들이 보여준 압도적인 실력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잘 해결될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저도 마찬가지예요. 몬스터 필드를 제거한 경력은 있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해낼 줄은…….”
“그게 실력이란 거겠지. 강이나도 세계 10강급 실력자로 판명되었고, 다른 여인들도 비슷한 실력일 거란 추측을 했으니까.”
“그래도요.”
엘리엔이 거둔 성과에 한소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소형 몬스터 124마리, 중형 몬스터 74마리, 비행 몬스터 26마리.
합쳐서 224마리.
몬스터 군단의 구성이 아니라, 단 한 명이 처리한 몬스터의 숫자였다.
그것을 해낸 인물은 다름 아닌 엘리엔.
몬스터 중에서 가장 상대하기 까다롭다고 알려진 와이번을 어렵지 않게 베어 버리며, 중형으로 평가되는 오우거를 단칼에 두 동강 냈다. 그리고 일격에 소형 몬스터 서넛을 쓸어버리는 신위에 프랑스 능력자들은 그녀를 ‘여제’라 칭하면서 경배했다.
그만큼 그녀가 보인 신위는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보고서에 적힌 내용만 보면 엘리엔을 세계 10강이 아닌 새로운 등급의 강자라고 평가해야 할 판이었다.
“이러니 미국의 제안도 거절할 수 있었지.”
“미국보다 우리를 더 생각해 준 것 같아서 좋지만 앞으로가 걱정이네요. 여태까지 숨기고 있다가 드러냈다는 건 다른 의도가 있다는 뜻이잖아요.”
“한 차례 혼란이 있었으니 더 이상 정부의 개입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미겠지. 이미 자체적인 전력만으로 세계 어느 곳보다 강력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으니.”
말을 하는 김기정의 표정은 묘했다. 마냥 좋아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들의 세력을 없는 것으로 하자니 강대국에게 둘러싸인 현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좋은 관계로 지내는 수밖에요. 다행히 먼저 적대하지 않으면 나쁘게 나오지는 않으니 그 부분이 기대를 걸 수밖에 없죠.”
“그래야겠지. 참 쉬우면서 어려운 일이로군.”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해야겠죠?”
“그래야겠지.”
“저번처럼 대해도 될까요? 실력을 드러냈다는 건 어느 정도 다른 사람들에게 대우를 받을 생각을 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텐데요.”
“그 부분에 좌지우지되는 사람은 아니다. 네가 말한 정부의 개입과 N그룹의 움직임 같은 경우를 만들기 않기 위함이지. 예전처럼 대하면 될 거다.”
“그러네요.”
한숨을 푹 내쉬는 한소영을 보면서 김기정은 술 한 잔을 마시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이나에게는 바쁘지만 준성과 엘리엔에게는 한가롭던 밀라노의 일정이 끝난 뒤,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잘 다녀오셨어요?”
“다녀왔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반겨 주는 세희를 보며 꽤 오랜 시간 동안 집을 비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보르도에 갔다가 지브롤터 해협으로, 반 능력자 연맹의 본부와 밀라노에 이르는 여정은 밀도 높은 여정이었다.
“일이 많았나 봐요.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그렇게 되었어. 안 그래도 그 문제 때문에 물어볼 것도 있고.”
“제게요?”
“응, 꽤 큰 고민거리를 안게 되었는데 세희의 의견도 필요해서.”
“제가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요. 말씀하세요.”
“이 세계에 신이 존재한다고 했었잖아, 아직도 그의 말이 귀에 들려?”
“신이요? 으음! 전에는 꽤나 자주 들려왔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아요. 점점 파장도 약해지고 있고요. 사실 제가 잘못 느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요즘은 존재감도 없어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 이 세상에 신이 존재하는가 싶어서. 얼마 전까지 없을 거라 확신했는데 세희가 있다고 하니까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거든.”
즉답은 피했지만 세희의 말을 들은 준성은 그가 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스스로도 이미 자신의 힘이 약해지고 있다고 털어놓지 않았던가. 꽤나 거창한 비밀처럼 밝혔지만 준성은 그 부분을 완전하게 신뢰할 수 없었다.
“그럼 한 가지 더, 성녀는 신에게 힘을 부여받는 거야?”
“그렇지 않아요. 세간의 인식은 성녀가 신에게 선택된다는 것까지는 맞아요. 다만 신의 힘을 일방통행으로 받는다는 편견이 있는데, 정확하게는 신이 성녀에게는 신성력을 부여하고, 성녀는 신에게 믿음을 보다 확고하게 전달하는 역할을 해요. 성녀를 선택할 수 있는 신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알릴 수 있다는 뜻이죠.”
“…….”
앞부분은 알고 있지만 뒷부분은 그도 알지 못하는 부분이었다. 표정을 굳히고 생각에 잠겨 있던 준성의 머릿속에는 ‘믿음’과 ‘전달’이라는 단어가 끊임없이 맴돌았다.
“……준성? 준성?”
“아, 미안. 미처 알지 못하던 부분을 알게 돼서. 나도 성녀가 마냥 힘을 부여받은 존재라고만 생각했거든.”
“그 부분은 준성도 잘 알지 못했군요, 후훗!”
“그러게.”
틈을 보인 준성을 보며 세희는 웃음을 지었지만 준성은 그럴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자신을 ‘신’이라고 칭하던 존재의 말이 떠올랐다.
신족에게 패한 그는 더 이상 회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꺼져 가는 생명의 불씨를 붙잡고 버텨 내려는 것은 끊임없이 위로 향하고자 하는 저들의 욕망이 지구를 넘고 다른 차원까지 여파가 끼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선에서 해결하고자, 끊임없이 방법을 모색했고, 그 가운데 찾아낸 방법이 바로 ‘존재 이유’를 다시 각인시켜 줄 수 있는 선지자의 존재였다.
“제 뜻을 알아줄 수 있는 이의 등장은 다시 회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겠죠. 저는 이 세계에 그 존재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어요.”
결연하던 그의 말은 확고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누구도 쉬이 믿지 못할 허황된 말이었지만 준성은 웃을 수 없었다.
그가 말하던 ‘그 존재’는 바로 자신의 곁에 있는 세희였던 것이다.
‘절대 알려줄 수 없어.’
그 미래가 어떻게 되건, 준성은 용납할 수 없었다.
설사 상대가 신일지라도.
☆ ☆ ☆
“이렇게 다시 찾아오실 줄 몰랐습니다.”
“예, 저희 본부장님께서는 여전히 마스터 김의 도움을 바라고 있습니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온 준성을 찾아온 것은 대런이었다. 그의 제안과 대한민국 A.O. 본부의 제안 사이에서 보르도행을 선택했던 그는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자신에게 제안을 하는 대런을 보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정리가 안 된 겁니까?”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본부장님께서는 행동할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되어 있기에 마스터 김의 도움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
더글라스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그리 관심은 없었다. 다만 그가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개입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미국 A.O. 본부에 신족의 개입이 있었다는 걸 보았으니 말이다.
그들의 목적을 깨버리기 위해서는 더글라스를 돕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
마음은 돕겠다는 생각으로 굳어졌지만 당장 대런의 말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돕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당장 도움을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어째서…….”
대런이 아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준성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입장이 있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미국행은 더글라스의 부탁일 뿐, 자신에게 강제되는 일은 아니었다.
상대가 주는 것도 없이 바라는 것만 있기에 준성은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다음 주가 시험입니다. 시험 일정이 다 끝난 뒤 미국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대런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새벽같이 집을 나섰던 이나는 자정이 되어서야 스케줄을 마치고 돌아올 수 있었다.
“왔어?”
준성이 반겨 주면 화색을 띠면서 달려들었을 그녀였지만 별다른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거실에 엎어졌다. TV를 보던 세희도, 책을 읽던 엘리엔의 시선도 그녀에게 향했지만 죽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왜 그래?”
준성이 다가가 물어보니, 움찔 몸을 떨다가 이내 죽어 가는 목소리로 칭얼거렸다.
“힘들어요, 준.”
“그렇게 힘들어?”
“네, 싫은 건 아닌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니까 죽을 것 같아요.”
죽어가는 그녀의 목소리에 준성이 해줄 수 있는 것은 리커버리 같은 상태 회복 마법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랜드 마스터인 그녀가 육체적으로 괴로울 리 없었다. 지금 그녀는 늘어난 스케줄로 인해 정신적으로 지쳐 있었다.
발단은 밀라노에서 데뷔를 한 뒤였다.
무대를 압도하다 못해 압살해 버린 그녀의 압도적인 카리스마는 세계 패션계를 뒤흔들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온갖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최고의 모델로 도약했고, 그 전까지 그녀의 실력에 긴가민가하던 이들 모두 하나같이 찬양하기 바빴다.
이러한 외국의 반응에 국내 언론이 반응하는 방향을 뻔했다.
국위선양을 한다면서 외국 기사들을 번역하고 나르면서 칭찬을 하는 기사가 인터넷을 뒤덮고, 제주도 몬스터 웨이브에서 홀로 활약했던 사실이 재조명되면서 몸이 열 개여도 부족할 만큼 스케줄에 치이고 있었다.
본래 계약 당시 어느 정도 여유를 보장해 준다는 말이 있었지만 업계 최고의 대우를 하더라도 그녀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 결과 이렇게 스케줄에 치이는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힘내라는 말밖에 해줄 수 있는 게 없네. 그래도 열심히 해줬으면 좋겠어. 솔직히 밀라노에서 이나의 모습은 멋지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거든.”
“……정말요?”
시체처럼 늘어져 있던 이나가 거짓말같이 기력을 회복하며 준성을 바라보았다.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런웨이에 설 때 정말 빛이 나는 것 같더라.”
“제가 한두 번 경험하는 건 아니니까요. 실력이 있으니 장소가 어디더라도 빛이 날 수밖에 없죠.”
콧대를 세운 그녀는 기력을 회복하고는 준성에게 자랑을 늘어놓았다. 눈 깜빡할 사이에 뒤바뀐 모습에 자연히 미소가 걸렸다.
“리엔도 그렇게 말했어. 그렇죠?”
“보고 많은 걸 느꼈다. 그리고 내 스스로 반성을 하게 되었지. 그래서 학교의 시험도 볼 생각이다. 더 이상 인간들을 피해서는 안 된다는 걸 느꼈으니까.”
“학교를 가겠다고요?”
“기껏 입학했는데 다니지 않는 건 있을 수 없는 것이지.”
“…….”
밝아졌던 이나의 표정이 급격하게 수그러들었다. 자신도 학교에 입학을 했지만 준성과 함께 다닐 수 없는 현실이 떠오른 것이다.
“왜 그래?”
“그냥요. 기껏 대학까지 갔는데 함께 다니지도 못하고. 요즘 돌아가는 분위기도 좋지 않고요.”
한숨을 푹 내쉬는 그녀의 생각이 무엇인지 몰라서 준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답답해진 이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기자들이 자꾸 준과 헤어진 게 아니냐고 기사를 쓴단 말이에요!”
“하하, 그런 말은 그냥 듣고 흘려버려.”
“흘려들으려고 해도 주변에서 자꾸 그러니까 얼마나 짜증나는데요. 진짜 이곳 세상에 적응할 마음이 없었으면 찾아가서 따끔한 맛을 보여 줬을 텐데.”
“그럼 준성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여 주면 되지.”
“……지금 약 올리는 거죠?”
“이나도 노력하라는 뜻이지.”
“후! 앓느니 죽는 수밖에 없겠네요.”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느끼며 이나는 이를 꽉 물었다.
“그런 말에 흔들리지 마. 저들의 말에 흔들릴 만큼 우리 사이가 얕지 않잖아? 그러니 확실하게 믿음을 가져줘.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럴게요.”
시무룩하게 가라앉아 있던 이나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괜찮아요?”
준성은 옆에 서 있는 엘리엔을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 괜찮지 않군. 그래도 전보다는 낫군.”
“그나마 다행이네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쉰 준성은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예전의 그녀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더라도 언짢은 마음을 품었는데, 지금은 그런 모습이 거의 사라졌다는 게 느껴진 것이다.
“시선은 어때요?”
“좋지는 않지만 익숙하니 적응하는 건 어렵지 않다. 다만 좋게 느껴질 이유는 없겠지.”
“예.”
그녀가 가진 인간에 대한 증오를 단기간에 없애라는 것은 불가능한 조건이라는 걸 준성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이렇게 노력해 주는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웠다.
“제 뜻에 따라 줘서 고마워요.”
그의 인사에 엘리엔은 고개를 저었다.
“이나를 보고 많은 것을 느꼈으니까. 그 아이도 그렇게 노력을 하면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데 언제까지 옛 감정을 가지고 세상과 단절되려는 건 멍청한 짓이지.”
가장 큰 변화 중 하나가 지금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묵묵히 받아내는 것이다.
차원 이동을 하면서 그녀의 찬란한 미모 때문에 수많은 남자들이 접근을 시도했고, 엘리엔은 그것을 원천 차단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미모는 단호한 거부만으로 뿌리치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게 문제였다.
결국 그녀는 외출을 할 때마다 기척을 감추는 하이드(Hide) 마법을 시전했다.
기척을 완전히 감추는 마법으로 주변의 이목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이다.
당시에는 귀찮음을 회피하려는 수단으로 사용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세상과 단절시키는 용도로 변모해 있었다.
그녀 스스로 잘 알고 있었지만 이나를 보고 결심하면서 더 이상 하이드 마법을 시전하지 않고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멋져요, 멋진데…….”
말을 하던 준성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나도, 엘리엔도, 세희도 모두 세상에 적응을 하면서 바뀌려고 노력을 하는 중이다.
그런데 자신은 과연 얼마나 노력을 하고 있을까?
이리저리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지만 스스로 물어보았을 때 선뜻 원하는 답을 꺼내 들 수 없었다.
자신 또한 변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쟤 누구야? 우리 학과에 저런 애가 있었어?”
“타나도 아름답지만 쟤는, 와!”
그 사이, 주변의 웅성거림은 한층 더 커졌다. 대부분 처음 온 엘리엔의 미모를 찬양하는 것이었다.
저도 모르게 어깨를 으쓱한 준성이 엘리엔에게 말했다.
“모두 리엔의 미모를 찬양하고 있다고요? 이 정도면 기뻐해도 좋지 않을까요?”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내가 어떻게 생겼건 한 명에게만 잘 보이면 되니까.”
“예?”
“바로 너에게만 잘 보이면 된다, 김준성.”
“…….”
부끄러움을 모르는 건지 당당하게 고백 비슷한 말을 하니 멍한 표정을 지은 준성은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였던 엘리엔의 귀가 붉게 물든 게 보였다.
“저도 좋습니다. 그럼 가죠.”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강의실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곳에 세희가 앉아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옆에는 OT에서 인사를 나눴던 타나도 자리한 상태였다.
“준성.”
“미안, 오래 기다렸어? 리엔하고 이야기를 좀 하느라 늦었어.”
“아니에요, 자리는 확보해 놨으니 문제될 건 없어요. 그리고…….”
세희가 타나를 힐끗 바라보니, 자리에서 일어선 그녀가 준성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 다시 보게 되어 반가워.”
“말이 유창해졌네?”
“열심히 공부를 했으니까.”
딱딱 끊기던 말투에서 유창해진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는 모습에 준성은 적잖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옆에 서 있는 엘리엔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오늘 시험 잘 봤으면 좋겠다.”
“나도. 시험 잘 봐.”
“그래야지.”
세희 혼자 있었다면 엘리엔과 함께 앉았겠지만 타나가 함께 있는 만큼 그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 되었다.
서운한 기색을 보였지만 처음 학교에 온 엘리엔을 생각하면 그게 최선이라 생각했는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첫 시간에 보는 것은 이론 시험이었다. 교수와 조교가 안으로 들어오고, 시험지를 배부하면서 본격적인 시험 준비를 하였다.
“세상이란 게 참 그렇군.”
“무슨 뜻이지?”
“학부 회장이 사라져도 문제없이 굴러가는 모습을 보았으니까요.”
어깨를 으쓱한 준성의 대답이었다. 세희에게 흑심을 품고 N그룹과 작당 모의를 하던 최영섭이 징계로 사라졌지만 AO학부는 여전히 성세를 이루고 있고, 학생들도 변함없이 공부를 해나갔다.
이 거대한 세계 속에서 존재가 사라져도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는 인력이 존재한다는 건 당연한 흐름이다. 자신이나 신족 같은 초월적인 경지에 도달한 이들은 그 틀에 벗어나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방금 전에 왜 그런 거죠? 뭔가 안 좋은 거라도 발견했나요?”
“그건…….”
준성의 물음에 엘리엔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더니 보이지 않는 장막이 둘을 휘감았다. 다른 사람이 들어서는 안 된다는 걸 의미했다.
“방금 전 너와 인사를 나눈 타나라는 여자,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나?”
“힘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만 확인했습니다. 다른 문제가 있는 겁니까?”
“타나 저 아이는…… 인간이 아니다.”
“……!”
준성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세희와 이야기 나누고 있는 타나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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