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191)
제71장 김기정의 부탁
“그에게 너무 많은 정보를 주신 것 같습니다.”
고개를 조아린 크랙은 평소답지 않게 흥분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들을 만한 자격이 있어요. 그러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하지만 그 정보를 듣고 신족에게 흘리기라도 한다면! 죄송합니다. 제가 흥분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던 크랙은 깜짝 놀라며 사과를 했다.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어떤 점을 염려하고 있는지 잘 알아요. 그리고 그 부분을 인지하고 있고요. 하지만 제 생각에는 여행자인 그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을 것 같네요.”
“하지만…….”
여행자라는 가능성 하나만으로 그에 대해 확신을 갖는 건 너무 위험한 짓이었다.
인간을 믿으면 안 된다고 말을 하려던 크랙은 멈칫하면서 침묵했다. 지금은 아니지만 ‘신’이었던 그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한다는 것 자체가 무례임을 잘 알고 있던 것이다.
“크랙이 많은 걸 걱정하고 있고, 해방을 위해 힘을 쓰고 있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그에 관한 문제에서는 흥분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네요. 제 말이 틀린가요?”
“죄송합니다.”
“제가 비밀을 언급한 것은 그가 함부로 신족에게 기울지 않도록 만들기 위함이에요. 신족은 그를 경계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불편한 방해물로 전락하지 않길 원하고 있어요. 아마 그들은 제가 살아남았다는 걸 알고 있을 확률이 높겠죠.”
“그런 말도 안 되는!”
신은 스스로 신족이라 일컫는 그들로 인해서 그 격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 자리를 온전히 대신하지 못했지만 산산조각난 신의 ‘권능’을 틀어쥔 신족들은 사실상 반신이라고 봐도 무방한 힘을 지니고 있다.
이들에게 있어 지구는 집어삼키기 쉽지만 한편으로는 조심스러울 이유가 있었는데, 그들이 악마라 일컫는 존재가 있었고, 노예로 전락한 종족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이들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염려하는 것은 세계의 멸망이었다.
핵미사일과 같은 무기들은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위력을 품고 있기에 함부로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온전한 형태의 세계였지, 폐허가 되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불모지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미 그들은 작지만 권능을 지닌 존재가 되었어요. 제 소멸 과정을 지켜보지 않았으니 의심을 가지고 있을 테죠.”
“……그래서 그가 필요한 것입니까?”
“마음은 그렇지만 과연 가능할지는 모르겠네요. 분명한 건 평온을 원하는 그의 성향과 그들은 충돌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에요. 굳이 나서서 적대관계를 조성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에요.”
거기까지 말을 한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뭔가를 말하려다가 멈칫하는 모습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끼곤 호기심이 치미는 걸 느꼈지만 조용히 충동을 억눌렀다.
잠시 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크랙을 충격으로 밀어 넣었다.
“어쩌면 그들은 처음부터 제가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요. 이렇게 숨어 있는 상태에서는 찾아낼 수 없으니까, 꼬리를 드러내면 저를 소멸시키고자 달려들 테죠.”
“말도 안 됩니다! 어떻게 우리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만큼 우리의 정보는 알려질 수밖에 없어요. 이건 어쩔 수 없는 흐름이죠.”
담담한 그의 말에 크랙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일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했다.
“당분간 세력 확장보다 내실을 다지는 데 초점을 두도록 하세요. 지금 우리의 움직임은 충분히 능력자들의 경계를 살 만하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적합자는 아직 찾지 못했나요?”
“……죄송합니다, 샅샅이 둘러보고 있지만 아직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적합자가 세상에 많았다면 제가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될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고생스럽지만 부탁드릴게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힘차게 외치는 크랙을 보며 그는 고개를 나직이 끄덕였다. ‘격’이 떨어진 자신의 존재를 다시 한 번 일깨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적합자를 찾아야 했다.
“다시 한 번 기회가 온다면…….”
하나밖에 남지 않은 그의 눈이 예리한 빛을 발했다.
이론 시험을 본 뒤, 다음 시험은 직접 능력을 시연하는 것이었다.
능력자가 되기 위해 어느 정도 이론을 갖춘 뒤, 직접 능력을 보임으로써 A.O. 본부에 소속될 만한 실력을 지녔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엘리엔은 만점을 받았다. 이론적인 것은 약하지만 그녀의 무위로 시연에서 만점을 받지 못하는 것이 이상했던 것이다.
“오늘 어땠어요?”
“딱히 나쁘지는 않았다. 시선 집중을 받는 건 당연하지만 마음을 먹으니 그리 의식되지 않더군.”
“다행이긴 하지만,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됩니다.”
“무리하지 않고 있고, 무리할 생각도 없다. 내가 변하기 위해 노력하는 거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너무 기합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아서 염려가 되는 준성이었다.
엘리엔이 시험을 볼 당시, 너무 강력한 위력의 힘을 보여 주면서 측정기가 파괴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처음에는 기계의 오류로 판단했지만 그 과정이 세 번 반복되자, 그녀가 지닌 힘이 너무나도 강력해서 이런 상황이 발생한 거란 결론이 나왔다.
당당하게 세상에 적응하겠다는 포부는 마음에 들었지만 너무 무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시험이 끝나는 대로 미국에 갈 생각인가?”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로 마음을 먹었으니까요. 다만 A.O. 본부에서 대화를 나눠 보고 싶다고 말을 전해 왔으니 먼저 그쪽과 대화를 해보려고요. 아마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기는 한데.”
“재미있는 일?”
“가보면 알겠죠.”
준성은 별것 아니라는 듯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집무실 밖으로 나온 김기정이 미소를 지으며 준성을 환대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보르도 몬스터 웨이브를 저지하기 위해 직접 움직여 상황을 종료시킴으로써 대한민국 A.O. 본부는 엄청난 이익을 볼 수 있었다.
우선 프랑스 A.O. 본부와 보다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보다 나아가 혈맹에 가까운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다. N그룹의 공작에서 도움을 줘서 준성이 안겨준 대가는 그야말로 엄청났다.
뿐만 아니라 엘리엔이라는 절대적인 강자는 그를 홀대할 수 없게 만들었다. 준성부터 시작하여 강이나와 엘리엔까지.
한세희의 실력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두 여인에 준하는 수준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나오는 만큼 그는 이미 미국 A.O. 본부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가 이렇게 세계에 위명을 알릴수록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대한민국 A.O. 본부는 이익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자연히 극진한 대접으로 바뀌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나오실 필요는 없는데.”
“이 정도는 어렵지 않습니다. 들어오십시오.”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그윽한 차향이 준성의 코를 자극했다. 긴장이 풀어지는 느낌에 미소 지은 그가 자리에 앉자, 김기정이 꾸러미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프랑스 A.O. 본부에서 주는 선물입니다.”
“어떤 선물입니까?”
“하하! 보르도에서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나더니, 보르도에서 유명한 와인을 선물로 주었더군요.”
김기정이 가리킨 것은 샤또 5대 와인이었다. 그중에서도 좋은 빈티지만 골라서 보내주었는데, 애호가들이 보면 환장할 만한 양이 쌓여 있었다.
“감사하다고 전해 주시길.”
“그들은 이 정도밖에 해주지 못하는 게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감사하다는 말을 들으면 천만에 말씀이라고 할 겁니다.”
“잘 받겠습니다.”
가볍게 손을 젓자, 쌓여 있던 와인 병들이 떠올라 아공간 속으로 들어갔다.
“언제 봐도 신기한 능력이군요.”
“와인을 보관하기에도 좋은 곳이죠.”
시간이 멈춘 공간이기에 와인의 맛을 그대로 보관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탐이 나지만 그 능력을 개발할 수 없을 것 같으니 포기해야겠습니다.”
“아무나 지닐 수 있는 능력은 아닙니다.”
준성도 너스레를 떨면서 분위기를 환기시킨 뒤, 목을 가다듬은 김기정이 본격적으로 용건을 꺼내 들었다.
“오늘 준성 군을 초대한 것은 감사의 인사를 전달하기 위함도 있지만 몇 가지 사실도 전할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우선 우리 측에서는 준성 군이 엘리엔 씨의 실력을 의도적으로 공개한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가요?”
“아무래도 N그룹 사태도 있었고, 정부도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주지 않으니 심경의 변화가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향한 무력시위가 맞는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 전까지 저는 가급적 조용히 살고 싶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력을 겉으로 드러내려고 하지도 않았지요. 하지만 지닌 실력을 감추고 아량을 베풀어 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이번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부분은 정부를 대신해서 사과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정부에 강력한 입김을 행사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김기정의 사과에서 준성은 그가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 깃든 뜻은 나쁜 게 아니었기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A.O. 본부를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말 그대로 그들은 권력의 속성을 따를 뿐이고, 저도 같게 대응하는 것뿐이니 말이죠.”
“저희도 그들의 태도를 보고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력 확장을 하여 정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요.”
“나쁘지 않습니다. 세상이 변화하고, 몬스터가 등장하고 있는 만큼 A.O. 본부의 힘은 앞으로 커지면 커졌지, 더 작아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의 말에 휘둘리는 것보다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이는 게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나이는 어리지만 그가 말하는 것은 앞으로 A.O. 본부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이제 갓 성인이 된 그가 어찌 이런 완벽한 혜안을 보일 수 있는가.
감탄이 절로 나오는 걸 느끼면서 마음속에 든 생각은 하나였다.
‘반드시 붙잡아 놓는다.’
그를 대한민국 A.O. 본부 소속으로 만들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그를 대한민국에 머물게 하는 것만으로도 얻는 이익은 굉장하다.
오늘 준성을 청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곧 미국으로 가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 사실 보르도로 가기 전부터 초대를 받았지만 미루고 있었습니다.”
“제가 오늘 청한 것도 그것 때문입니다. 준성 군은 미국이 무슨 이유로 거듭 미국에 와줄 것을 청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대략 짐작만 하고 있습니다.”
더글라스가 복잡하게 꼬인 상황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도움을 요청할 것으로 보았다.
이는 신족을 추적하는 데 도움이 될지는 아직 확신을 못하고 있었다.
“미국이 하려는 제안은 준성 군이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무엇이기에 그렇습니까?”
“미국은 준성 군을 비롯한 다른 여인들에게 귀화를 권유할 것입니다.”
“귀화라고요?”
“예, 그리고 저는 그 제안을 거절했으면 합니다.”
“…….”
단도직입적인 그의 말에 준성은 입을 다물었다.
☆ ☆ ☆
“후우! 일단 한 건 해결되었군.”
준성이 돌아가고, 힘없이 소파에 주저앉은 김기정이 넥타이를 풀어 헤치며 중얼거렸다.
“장담하기에는 이르지 않나요?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걸로 아는데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소영의 말이었다. 방금 전 말을 들은 것만으로 판단해 보면 준성은 어떠한 확답도 내놓지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로군. 그래도 오랫동안 대화를 해보면 어느 정도 답이 나오게 마련이지.”
“거기에서 그의 의중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 셈이지.”
“무엇 하나 허투루 말을 하지 않으니 신뢰가 가지만 까다롭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어요. 차라리 말이 많은 인물이면 파악하기 쉬울 텐데.”
말 한마디의 무게를 아는 남자.
그가 바로 김준성이었다. 미국에서 김준성의 귀화 시도를 하고 있다는 걸 들은 뒤, 어떻게 해야 막을 수 있을지 논의가 이루어졌지만 답은 구할 수 없었다.
결론은 그의 의지에 따라서 모든 게 결정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대화를 나누던 김기정은 시종일관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말 한마디를 받아놓으면 믿음직하다는 뜻이지. 아무런 결론은 내지 않았어도 미국의 뜻을 받아들이겠다는 말을 한 적은 없으니까.”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되는 건가요?”
“내 생각에는.”
“……하아! 근거는 없지만 믿고 싶은 말이기는 하네요.”
김준성의 존재로 상당한 이득을 얻고 있는 자신들이니만큼 그가 남아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반대로 그가 떠난다고 할 때 제대로 말려 볼 수 없는 처지에 헛웃음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된 건지.
“이래저래 그의 결정만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처지네요.”
“그런 셈이군.”
“후우!”
담담한 김기정의 대답에 한소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익숙지 않아.”
주변에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며 엘리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하며 보내는 시선은 마치 바늘로 피부를 콕콕 찌르는 것처럼 따끔한 느낌을 들게 만들었다.
처음은 준성과 함께했기에 의지할 수 있었지만 오늘은 혼자 등교하는 날이었다. 변화를 위해 스스로 시도한 것이기에 누군가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차라리 검을 들고 몬스터 무리에 뛰어드는 게 더 속편할 듯싶었다.
그렇게 눈초리를 이겨 내고 강의실 안으로 들어선 엘리엔은 비어 있는 자리에 앉으면서 그대로 몸에 힘을 풀었다. 안에서도 쏟아지는 시선은 여전했지만 바깥보다는 한결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 사람들은 쭈뼛거리면서 다가오지 못한 채 일정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엘리엔에게서 발산되는 기세는 그녀의 주변을 ‘접근 금지’ 구역으로 만들어 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교재를 꺼내며 준비를 하고 있는 엘리엔의 귓가로 한줄기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안녕하세요. 옆에 앉아도 될까요?”
“타나……?”
“네.”
엘리엔에게 다가온 타나는 대답을 듣지 않은 채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묵묵히 교재를 꺼내 놓으며 강의를 들을 준비를 했다.
“난 앉으라고 한 적이 없는데?”
“침묵이 곧 긍정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럼 일어날까요?”
“……그건 아니지만.”
묘하게 자신을 모진 사람으로 만드는 것 같아 엘리엔의 눈썹이 찌푸려졌지만 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
가방을 놓고, 교재를 꺼내면서 차근차근 준비를 해나가는 모습은 자연스러움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엘리엔의 눈에는 그 행동이 마치 잘 정리된 매뉴얼처럼 보였다.
평범한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할 절도가 그녀의 행동에서 묻어나왔다.
“미국의 능력자인가?”
엘리엔의 물음에 타나가 멈칫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말을 꺼내면서 주변의 음파를 차단하는 막이 생겼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미국의 뛰어난 재원이라고 불리는 이가 이곳에 올 리가 없을 테지. 모종의 이유가 있지 않고서는.”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어쩌죠? 저는 미국 A.O. 본부 소속이 아니라서.”
“그렇다면 말이 더 편해지겠군. 네 정체는 뭐지?”
타나를 바라보는 엘리엔의 눈빛이 한층 더 강렬해졌다.
마치 그녀의 정체를 낱낱이 밝혀내겠다는 듯 집요하게 훑고 있었다.
“정체?”
“겉모습은 잘 위장했지만 생기 하나 느껴지지 않는데 모두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아!”
무언가 깨달은 점이라도 있는 것처럼 멈칫한 타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순순히 수긍하는 그녀의 행동에 엘리엔이 오히려 황당함을 느끼고는 경계심을 끌어 올렸다.
“확실히 그 부분까지는 해결하지 못했군. 단점을 가르쳐 줘서 고맙습니다.”
“내 말의 요지가 그게 아니란 걸 잘 알 텐데?”
“그렇게 노골적으로 집요한 모습을 보이면 그의 사랑을 쟁취하기가 힘들 겁니다.”
“……뭐라고?”
예상치 못한 한 방에 엘리엔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지금 그녀가 무슨 말을 자신 앞에서 하는 것이란 말인가.
그러거나 말거나 타나는 자신의 말을 이어 나갔다.
“경쟁자들이 강력한데 이대로 있으면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그렇다면 당신은 영원히 겉돌 수밖에 없다고 보이네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정체를 캐는 건 잠시 뒤로하고, 타나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듣고 싶었다.
“간단해요, 당신 스스로가 적극적이지 않기 때문이에요.”
“적극적이지 않다고?”
반문하듯 중얼거리는 그녀의 눈에는 불응의 빛이 담겨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큰마음을 먹고 변화하고 있으며, 이렇게 행동으로 옮기고 있지 않던가.
“누구나 자기 스스로에게는 관대해지게 마련이에요.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자신을 위해서지, 상대를 위한 건 아니잖아요? 그런 수동적인 모습은 결국 그를 지치게 만들 뿐이죠.”
“…….”
자신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정확하게 지적해 오자, 엘리엔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타나의 말마따나 지금 노력하고 있는 모든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지, 준성을 위한 건 단 한 개도 없었던 것이다.
“한 가지 더 분명한 것도 있어요.”
“뭐지?”
“분명 당신의 미모는 대단해요. 모든 남자들이 반해 버릴 만큼. 하지만 그에게 좀 더 다가갈 수 있는 외모는 과연 누구일까요?”
“뭐, 뭐?”
자신감 넘치는 타나의 말에 엘리엔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타나의 얼굴과 똑 닮은 한 사람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를 낳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키워온 여인.
끝까지 이곳으로 오지 않겠다며 아들의 부담감이 되지 않고자 했던 여인의 얼굴과 타나의 얼굴이 거의 비슷하다는 것 정도는 알기 어렵지 않았다.
“몸이 안 좋아서 가봐야겠네요. 잘 생각해 보세요.”
그 말을 끝으로 타나는 미련도 남기지 않은 채 강의실을 벗어났다.
홀로 남은 엘리엔은 망연한 표정으로 한동안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어야 했다.
준성이 미국 A.O. 본부로 향하는 과정은 비밀스럽게 이루어졌다.
더글라스가 직접 선정한 장소로 이동한 뒤 주변의 이목을 피해 A.O. 본부 건물이 아닌, 사람의 눈이 미치지 않는 안가에서 만남을 가졌다.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못 본 사이 초췌해진 더글라스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조용히 그를 바라보던 준성도 마주 인사를 하면서 입을 열었다.
“저번 제안에 응하지 못해 유감입니다. 보르도의 몬스터 웨이브가 워낙 심각한 수준이라는 말을 들어 그들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이해합니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프랑스가 더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를 부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건 마스터 김이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 미국 A.O. 본부에 그런 폭탄을 투하하고 나서 조용하리라 생각하셨던 겁니까?”
날 선 더글라스의 목소리는 당장 달려들 것처럼 사나웠다. 피부를 콕콕 찌르는 예리한 기운이 넘실거렸지만 준성은 태연했다.
“이런 반응을 보면 틀린 건 아니로군요.”
“……후우! 맞습니다. 그동안 제대로 통제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미국 A.O. 본부는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강의 능력자 연합이었고, 국제 능력자 연맹을 주도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것은 대격변 이전보다 더 막강해졌으니 타국이 질시의 눈빛을 보내는 것은 당연했다.
오죽하면 미국의 몰락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일어나야만 가능하다는 말이 나오겠는가.
더글라스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관리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실력 미달인 하미레스를 세계 10강으로 밀어 넣은 이유도 히스패닉계 능력자들을 우대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본부 내 능력자들의 갈등이 서서히 불거지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세라가 있음을 더글라스는 모르지 않았다. 준성에게 언질을 받은 뒤, 줄곧 그녀를 주시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곧장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다. 자신처럼 그녀 또한 자신을 주시하고 있던 것이다.
결국 더글라스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외부의 조력자가 주는 도움뿐이었다.
그 대상이 바로 준성이었고 말이다.
“세라가 관리자와 함께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일련의 과정을 보면 그들은 미국 A.O. 본부를 시작으로 세계 곳곳의 능력자들을 분열시킬 계획입니다. 그 뒤에 반 능력자 연맹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
말을 듣던 준성은 조용히 눈을 빛냈다. 반 능력자 연맹을 이끄는 옛 신은 신족과 대적하는 존재인 만큼 세라의 뒤에 반 능력자 연맹이 있을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다른 세력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건가?’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은 세상을 지배하려는 신족들이 지나칠 정도로 소극적인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실을 더글라스에게 말할 생각은 없었다. 아직 그는 완벽하게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요청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감사합…….”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조건 없는 호의는 없다. 각오하고 있는 부분이었기에 더글라스는 준성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을 들은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저는 미국 A.O. 본부가 진행하는 사안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몇 가지 실험을 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알래스카 매킨리 산의 일도 그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시크릿 코드와 연락이 닿고 있습니다.”
직접 벌인 일이라고 할 수 없었기에 우회적인 표현을 하는 준성이었다. 그와 아리스턴이 만남을 가졌던 걸 알고 있었기에 더글라스는 의심의 표정을 지우지 못했지만, 도움을 받는 측이 자신이기에 순순히 납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좋습니다, 내부에 암약하는 자들을 정리해 주시면 모든 진실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좋은 결정입니다.”
미소를 지은 준성이 손을 내밀자, 더글라스도 그 손을 맞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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