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201)
제81장 준성의 결정
5호가 신체의 자유를 찾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의 몸 내부를 잠식해 나가던 힘을 제거했기에 영양 보충이 이어지기 무섭게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이곳을 정해 두고 찾아온 것 같던데, 내 생각이 틀린가?”
“정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 이곳을 향해 달려왔는지 5호 그 스스로도 잘 모르고 있었다. 다만 분명한 건 어디에도 의지할 곳 없는 자신이 순순히 정보를 털어놓을 수 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는 것뿐이었다.
“저는 미국 능력자들에게 쫓겨 이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왜지?”
“미국 A.O. 본부 소속 세라 앨런은 저와 뜻을 같이한 동료입니다.”
“…….”
세라 앨런은 준성도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세계 10강이자, 자신의 존재감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던 여인이었다. 범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지만 그녀가 5호와 동료라는 것은 확실히 의외였다.
이미 더글라스의 부탁을 받아 세라 앨런을 제거하려고 한 적도 있었지만 그녀가 신족의 하수인인 5호와 같은 동료일 줄이야.
“얼마 전 세라는 미국 A.O. 본부장 더글라스에게 살해되었습니다.”
“배신을 획책했으니 당연한 결말이겠지.”
“분명 그렇지만 그 이면에는 다른 사실이 숨어 있습니다. 더글라스가 세라 앨런을 그렇게 쉽게 제압할 무위를 지니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 말의 의미는?”
“더글라스는 우리가 알지 못하던 새로운 형태의 힘을 손에 넣었습니다. 제 몸 내부를 갉아먹던 힘도 그에게 허용한 일격의 잔해입니다.”
“잔해라…….”
말끝을 흐린 준성은 5호에게 남아 있던 힘의 여운을 느끼곤 표정을 굳혔다. 그것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5호는 자신의 정보를 순순히 털어놓았다.
“제가 느끼기에는 더글라스도 다른 세력과 손을 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다만 그것만으로 날 찾아온 이유가 설명되지는 않는군.”
“……실은 신족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고 있으나 저는 그들의 노예가 된 인간을 해방하기 위한 조직에 속해 있습니다.”
“수장이 누구지?”
“신입니다.”
“신?”
예상치 못한 말에 준성이 멈칫했다. 이곳에서 5호가 신의 존재를 언급한 것은 그도 예상치 못했다.
“예, 한때 우리 세계를 다스리던 위대한 존재를 모시며 신족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동족들을 해방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충성을 바치던 우리도 신에게 있어 한 번 쓰고 버리는 패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쓴웃음을 지은 5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해방을 위해 움직였지만 결말은 처참한 실패로 돌아왔고, 자신은 한낱 소모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세라 앨런이 미국 A.O. 본부에 잠입한 이유는 뭐지?”
“저는 신족의 손발이 되어 그들의 계획을 파악하는 임무를 맡았고, 세라 앨런은 미국 A.O. 본부의 고위직으로 올라가 신족과 적대적인 노선을 구축하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흐음.”
준성이 본 세라 앨런은 존재감이 거의 없는 여인이었지만 미국 A.O. 본부 내에서 존중받는 모습을 보았다. 5호는 지금 이 꼴이지만 각국 능력자들이 경계할 만큼 뛰어난 관리자였다.
“그래서 날 찾아온 이유가 뭐지?”
“소모품이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동족의 해방만큼은 반드시 이뤄 내고 싶습니다.”
“내게 그럴 역량이 있는 것처럼 보였고?”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말도 안 되는 결론이었다. 준성이 가늘게 눈을 뜨며 바라보자, 5호는 숨이 턱 막혀 오면서 머릿속이 텅 비어 가는 걸 느꼈다.
단순한 존재감 하나로 압살할 것처럼 사납게 밀어붙이는 모습은 점잖게 보이던 것과 판이하게 달랐다.
“그, 그렇습니다.”
“시크릿 코드가 넘겨 달라는 것도 있고, 드래곤들과도 풀어야 할 문제가 있다. 당분간 몸 회복에 힘을 쓰도록. 다음 이야기는 나도 논의를 해봐야 할 듯싶으니까.”
“예.”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전신을 압박하는 힘이 사라지기 무섭게 5호의 몸은 축 늘어졌다.
5호가 방문한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 이나와의 충돌에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었다.
12호와 힘을 합쳐 함정을 파고 대결을 벌일 당시 그녀는 압도적인 무위로 둘을 찍어 눌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모든 부분이 해명되지 않았기에 준성은 섣부른 결정을 삼갔다. 그에게서 얻은 정보가 중요하지는 않았지만 전체 그림을 엿볼 수 있는 퍼즐 한 조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몸을 추스를 수 있도록 배려한 뒤, 준성은 곧장 다음 행보를 보였다.
정보가 모일수록 상대해야 할 자들의 윤곽이 차츰 드러났다. 하지만 아직 베일에 감춰진 신족과 악마, 신의 존재는 준성에게 큰 경각심을 심어 주었다.
이는 조금씩 견고한 울타리를 만들고자 하던 의도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준성이 구상한 계획 중 하나는 대한민국 정부와 A.O. 본부를 자신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 뒤,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오늘 대한민국 A.O. 본부를 찾아 그가 요구한 내용도 그중 하나에 속했다.
“제주도 몬스터 필드를 말입니까?”
“예, 두 번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났고, 언제 또 일어날지 알 수 없으니 이 기회에 확실하게 해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보입니다.”
“분명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느낌은 지울 수 없습니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요구 조건을 내미는 준성을 보며 김기정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대한민국의 유일한 몬스터 필드라고 할 수 있는 제주도의 것을 없애면 여러 가지 후폭풍을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장 해로가 막혀서 부족해진 에너지석 공급에 차질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포스 수련으로 힘의 운용을 고민해야 할 새로운 능력자들이 힘을 연마할 장소가 사라지게 된다.
몬스터 필드는 마땅히 제거되어야 하는 곳이지만 반대로 A.O. 본부의 고정적인 수입과 무력 증진을 위한 장소가 되었다.
일전에 대화를 나누면서 그 심정을 충분히 느꼈기에 미소 지어 보인 준성이 말했다.
“무엇을 염려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본부장님은 몬스터 필드의 존속과 제거 중 무엇이 대한민국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제거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제주도 몬스터 필드의 제거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섬에 존재한다는 것이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언제까지 그곳을 하나의 수련장으로 사용할 수 없으니까요.”
“동감은 합니다만.”
“더 큰 곳을 두고 제주도에 집착할 이유는 없습니다.”
“예?”
어리둥절한 김기정의 표정에 준성은 손으로 위를 가리켰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차린 그의 눈이 크게 뜨이자, 준성이 말했다.
“북한이 있지 않습니까? 그곳은 제주도보다 더 훌륭한 수련장이 될 겁니다.”
“분명 북한의 몬스터가 모든 요소에 부합하지만 상황이 쉽지 않은 걸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대격변 이후, 몬스터 군단에 의해 붕괴된 북한은 현재 몬스터 동산이라 불릴 만큼 무수히 많은 몬스터가 득실거리고 있었다.
정부에서도 혹 몬스터가 남하할까 우려하여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폭발할 요소가 많은 곳을 필드로 삼겠다는 준성의 발언은 무모함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제게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방법이 있는 겁니까?”
“있습니다.”
“허어!”
준성의 대답에 김기정은 헛바람을 흘렸다. 정부나 A.O. 본부가 북한에 함부로 진군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설프게 몬스터를 자극했다가 수십만에 달하는 몬스터가 일거에 남하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지니고 있어서였다.
일정한 구역으로 나뉘어 있는 몬스터 필드와 달리 북한의 몬스터는 그 영역의 경계가 모호했기에 방어막을 두른 수만의 오크 군대를 맞이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 조성될 가능성이 높았다.
“저는 북한 전체를 몬스터 필드로 만들 생각입니다. 기존의 몬스터 필드와 동일한 형태를 구축할 수 있다면 제주도보다 더 스릴 있는 훈련 장소가 완성될 거라 생각합니다. 어떻습니까?”
준성의 말은 마치 악마의 유혹처럼 달콤했다. 대한민국 A.O. 본부장으로서 남북이 통일된 국가를 꿈꾸는 것은 김기정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제 개인적인 생각은…….”
A.O. 본부장의 생각이 아닌 개인의 생각으로 국한되었지만 그의 결정이 곧 본부의 결정임을 모르지 않았다. 이어지는 말을 들으며 준성은 진한 미소를 지었다.
“청소는 끝이 났군.”
세라 앨런을 제거한 걸 시작으로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채 미국 A.O. 본부는 대대적인 내부 단속을 했다.
그동안 국가에 대한 충성을 보이지 않고 애매모호나 태도를 보였던 이들은 철저한 정신 재무장이 시작되었고, 인종 차별에 불만을 가진 이들은 철저한 실력 성과제 아래 단합이 되었다.
작은 계기였지만 방만한 느낌이 들던 미국 A.O. 본부는 빠른 속도로 안정되었다. 힘으로 찍어 누른 결과였지만 더글라스는 자신이 만들어 낸 결과에 만족했다. 매번 대화와 이해를 구하는 것보다 힘으로 의견을 관철시키는 것이 더 쉬울 때가 있었다.
“일본의 동태는 어떻습니까?”
더글라스의 물음에 톰슨이 보고를 올렸다.
“실패 이후 좀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내부적으로 전력을 추스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포스 운용법의 큰 단점을 발견한 듯싶습니다.”
“우리가 가장 고려하던 부분입니까?”
“예, 뒤늦게 알아차리고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무차별하게 생체 실험을 하고 있으니 조만간 극복 방안을 얻어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중 몬스터 필드 토벌 실패 이후, 일본 A.O. 본부의 체면은 처참하게 구겨졌다.
함께 일을 도모한 중국, 러시아 등의 국가들과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했으니 그들로서는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포스 운용은 미국의 패권 유지에 큰 도움이 될 테니 신경을 써주시길 바랍니다.”
“예.”
“그리고 수중 몬스터 필드는 본국이 직접 나설 것입니다.”
“예? 하, 하지만 아직 내부적으로 혼란스러운 요소가 많습니다.”
좀처럼 제동을 걸지 않는 톰슨이었지만 더글라스의 말은 결코 쉽게 넘어갈 수 없었다.
수중 몬스터 필드 안에 어떤 몬스터가 도사리고 있는지 아직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일본을 비롯한 연합군이 알아낸 정보는 자이언트 옥토퍼스 외에 2킬로미터가 넘어가는 거대한 크라켄이 있다는 것 정도? 중심부에는 얼마나 더 강한 몬스터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괜찮습니다. 수중 몬스터 필드에 대한 정보는 이미 입수했습니다. 내부적인 불만 요소가 존재하니 그곳을 수중 몬스터 필드로 돌릴 계획입니다. 그러니 그 부분을 염두에 두고 움직여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더글라스가 다른 곳 어디에서 정보를 얻는지 알고 싶었지만 톰슨은 입을 열지 않았다.
세라 앨런을 단호하게 제거한 시점부터 미묘하게 바뀌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이전까지는 신중하고 결정을 미뤄 두었다면 지금 더글라스는 모든 것을 단번에 처리하려는 단호함을 보였다.
이 변화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몰랐지만 적어도 자신의 선에서 판단할 건 아니었다.
대격변 이전부터 착실히 준비하여 미국의 패권을 유지해 온 것이 바로 그였으니까.
단지…….
톰슨의 가슴속에 피어나는 불안감은 마냥 긍정적인 게 아님을 암시하고 있었다.
☆ ☆ ☆
수중 몬스터 필드의 토벌에 미국이 나서겠다는 선언은 세계인의 적극적인 지지를 이끌어 냈다.
해로가 차단되면서 세계 경제가 연일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던 차였기에 더더욱 반향은 클 수밖에 없었다. 이미 토벌을 위해 나섰던 강대국의 실패 사례가 있던 만큼 사람들의 인식에는 미국이 나서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을 거란 생각이 깔려 있었다.
“경우에 맞지 않는 행동입니다.”
뉴욕으로 날아온 마츠모토는 강경한 어조로 더글라스에게 말했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미국이 나서 주는 것을 고맙게 여겼지만 일본 A.O. 본부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발판 역할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미국이 필드 제거에 성공하게 되면 일본은 미국의 품에서 벗어나려던 배은망덕한 국가로 낙인찍힐 것이며, 함께 움직였던 강대국들도 은근슬쩍 편승해서 일본 죽이기에 나설 확률이 높았다.
가뜩이나 실패 이후 포스 운용법의 문제점이 발견되어 정신이 없던 차였다. 뒤통수를 맞은 하나다 유지로는 불같이 분노하며 마츠모토를 파견했다.
“이미 정해진 사안입니다. 이것이 바뀌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 왜 우방국인 일본에게 아무런 언급도 없었던 것입니까?”
수중 몬스터 필드 제거 선언이 터져 나오기 무섭게 미국의 우방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영국이었고, 뒤이어 유럽의 각국이 능력자를 차출하여 힘을 보태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일본에는 협조 요청 자체가 없었는데, 이는 대놓고 무시하는 처사였다.
“그것은 일본 측이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대놓고 배척하려고 하다가 실패한 이후, 우방국을 운운하니 화가 치밀 법도 했지만 더글라스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이에 마츠모토는 미간을 찌푸리며 미리 준비했던 패를 하나 꺼내 놓았다.
“우리가 먼저 나섰던 것은 미국이 움직일 처지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철저하게 단속을 했어도 세라 앨런의 제거와 능력자들의 대대적인 개편은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의미심장한 뉘앙스가 곁들어지자, 더글라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일본은 본국의 우방을 자처하면서 그 저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모를 리가…….”
말을 하려던 마츠모토는 멈칫했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더글라스를 중심으로 퍼져 나가면서 전신을 속박해 왔던 것이다.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입을 벙긋거리는 마츠모토를 보며 더글라스가 말했다.
“그동안 우방국의 역할을 해줬기에 이 정도로 그쳤다는 걸 알아 둬야 합니다.”
“으, 으음!”
“본국은 일본의 독단적인 움직임에 굉장히 큰 유감을 갖고 있습니다. 혹 그 부분에 항의할 것이 있다면 본부장인 하나다 유지로가 직접 이곳으로 오도록 해주시길.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한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미국을 설득할 생각이 없고, 강하게 항의를 하면서 무형의 이득을 취하려고 했었다.
더글라스의 성향으로 보아 어느 정도 양보를 얻어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짧은 대화 속에서 그가 예전과 판이하게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경고는 한 번뿐입니다.”
“…….”
입술을 지그시 깨문 마츠모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정기정은 갑자기 들이닥친 아리스턴과 멜리사를 보며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신족의 눈길을 피해 움직여도 모자랄 상황에서 연일 협조를 부탁하는 그들의 존재는 더 이상 쓸 만한 패라기보다 골치 아픈 짐이 되고 있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그가 내 말을 들어줄 거라 생각하나?”
그의 반문에 아리스턴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 분위기를 깨고 나선 것은 멜리사였다.
“무리한 부탁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5호의 존재는 우리가 모르고 있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해줄 확률이 높아요. 이는 드래곤에게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해요.”
그녀의 말을 들은 정기정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순간 공기가 차가워지면서 아리스턴과 멜리사가 멈칫했다. 무엇이 심기를 거스른 건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착각하고 있는 게 있군.”
“네?”
“더 이상 너희들은 내게 쓸모가 없다. 신족이라는 적을 두고 있으니 내가 마냥 너희들에게 협력할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
모욕적인 말에 아리스턴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고, 멜리사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아무리 뛰어난 머리를 지녔다고 하나 불리한 상황에서 고안할 수 있는 수는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지 않은 채 드래곤의 핑계를 댄 것이 정기정을 건드렸다.
“나는 그를 대등한 존재로 여기고 우대한다. 그깟 관리자 따위는 내게 중요하지 않아. 너희가 필요한 걸 가지고 다른 핑계를 대며 우리를 끌어들이지 마라, 엘프.”
“……죄송합니다.”
자신의 실수가 무엇인지 깨달은 멜리사가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신족의 감시는 날이 지날수록 강해지고 있다. 지금 너희의 움직임도 실로 어리석기 그지없다. 당분간 날 찾지 말고 조용히 지내도록. 너희가 원하는 건 그다음에 들어 볼 수 있을 테니.”
아리스턴이 뭐라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달싹였지만 멜리사가 손으로 제지했다. 신족에게 패하면서 많이 부드러워졌지만 드래곤은 매우 이기적인 존재였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돌아가도록.”
축객령에 둘은 조용히 자리를 벗어났다. 거처로 돌아올 때까지 둘 사이에 어떠한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이목을 피할 장소에 도착했을 때, 아리스턴이 따지듯 멜리사에게 물었다.
“왜 말렸지?”
“더 이야기를 하면 판이 깨졌을 거예요. 그만큼 심기가 불편한 상황이었어요.”
“…….”
“차라리 그를 찾아가서 좀 더 간곡하게 부탁을 하는 게 옳았을지 몰라요. 동료들을 잃은 우리는 더 이상 드래곤에게도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으니까요.”
“아직 기회는 있다.”
아리스턴은 투지를 잃지 않고 외쳤지만 멜리사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솔직하게 인정해야 해요. 지금 우리는 신족의 눈을 피하기도 급급하다는 걸요.”
“그럼 어쩌자는 거지?”
“지금은 조용히 있을 때에요. 다행히 그는 말이 지닌 무게를 아는 인물이니 기다리면 우리에게 연락을 줄 거예요. 그때까지 기다리도록 해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 5호를 찾아가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능사가 아님을 아리스턴도 잘 알았다. 드래곤에게도 버림받으면 자신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니까.
“……그러지.”
“잘 생각했어요.”
순순히 납득하는 그를 보며 멜리사는 작게 안도했다.
준성이 대한민국을 금탑화 시키겠다는 계획을 털어놓았지만 세부적인 부분은 부족했다.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떠맡지 않고 세희와 이나에게 앞으로 어떻게 할지 조언을 구했다. 금탑주 시절에도 그녀들이 내부적인 관리를 맡았기에 이야기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너무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저도 언니 말에 동감이에요. 준은 워낙 조용한 걸 좋아하지만 세상은 뛰어난 인물을 가만두지 않잖아요. 차라리 적극적으로 나서서 원하는 걸 얻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이나의 말을 들은 세희가 멈칫했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많이 바뀌었네? 예전에는 귀찮은 일이 늘어난다고 했었는데.”
“연예인으로 활동하다 보니 많이 달라졌어요.”
“그래?”
“뒤에 숨는 것만 능사가 아닌 걸 알게 되었으니까요. 검을 수련하고 경지가 높아지면서 보이는 것도 달라졌고.”
본래 이나도 준성 못지않게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물론 수위를 조절해야겠지만 우리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뒤에 물러나 있어야 할 이유는 없죠.”
“나도 같은 생각이야.”
둘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면서 세세한 부분을 채워 나갔다. 예전과 달리 국가 자체가 금탑이 되는 것이기에 여러 부분이 달랐지만 오히려 모자란 부분을 채워 나가는 재미가 존재했다.
그리고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가끔 기발한 생각이 떠오르곤 했다.
“아!”
“좋은 게 생각났어?”
“네! 아주 좋은 생각이 났어요.”
대답을 하는 이나의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인지 궁금해지는 걸 느끼며 세희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뭔데?”
“음! 아직 완벽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아주 재미있는 구상이 될 것 같아요. 준이나 제게도, 그리고 금탑의 이름을 알리는 데도요.”
“이상한 건 아니지?”
“언니는 저를 어떻게 보는 거예요? 전 예전처럼 사고만 치고 다니지 않는다고요.”
“그렇기는 한데…….”
말끝을 흐리는 세희의 태도는 애매모호함 그 자체였다. 대답은 했지만 전혀 신뢰감이 느껴지지 않는 태도에 이나는 발끈했지만 후에 펼쳐질 일을 생각하며 성격을 꾹꾹 눌렀다.
“어쨌든 믿어줘요. 아마 이 방법이면 금탑의 이름을 세상에 확 알릴 수 있을 테니까.”
“뭔지 알고 싶지만, 대답하기 어려운 것 같아 보이니 참도록 할게.”
“좀 더 자세하게 가다듬으면 언니한테 가장 먼저 말할게요.”
간신히 세희의 의심을 푼 이나는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앙큼한 속내가 자리하고 있었지만.
‘금탑을 알리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이긴 해. 그리고 준성하고 ‘나한테’는 좋은 방법이니까.’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장밋빛 전망을 떠올리며 이나는 히죽 웃었다.
몬스터 필드를 제거하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A.O. 본부의 결정은 상당히 늦어졌다.
진통 없이 해결될 문제가 아니란 걸 알고 있었기에 준성은 느긋한 마음으로 결정이 나길 기다렸다.
그가 몬스터 필드를 제거할 마음을 먹게 된 것은 론 쉐인과의 대화에서 느낀 부분이 있고, 그것을 토대로 대한민국을 금탑화 시키려는 계획이 탄력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 바로 정기정의 도움이었다. 예고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그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잘 지냈나?”
“그들에게 부탁을 받으셨습니까?”
“……그것도 있고, 말해 두어야 할 것도 있어서 찾아왔네.”
정기정이 꺼낸 말은 아리스턴 등 시크릿 코드와 드래곤이 운명을 공유하며 움직이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명확하게 선을 그어 놓으려는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있기에 준성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의도로 말씀하시는지 알겠습니다. 저도 드래곤, 아니, 회장님과의 관계는 존중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쌓아온 신뢰가 흔들릴 만한 일이 아니면 돌아서는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시길.”
“그렇게 말을 하니 마음이 놓이는군. 그자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당장 결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가?”
“악마는 우리의 동료가 될 수 있습니까?”
“…….”
정기정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준성이 외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계획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할 무렵, 감각을 파고드는 음습한 기운에 눈살을 찌푸렸다.
“……왔군.”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우웅! 스팟!
준성은 공간 이동을 통해 자신을 부르는 기운의 근원지에 도착했다.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산은 짙은 어둠에 뒤덮여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었지만 한 차례 마주했던 기세는 여전히 존재했다.
“왔군, 기다릴 필요가 없어서 좋다. 저번 제안의 대답을 듣고 싶은데.”
어둠이 일렁이며 잔뜩 고양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든다. 살며시 미간을 찌푸린 준성은 어둠 속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말했다.
“아주 골치 아프게 엮인 것처럼 보이더군.”
“흐흐, 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것이 악마의 수법이지. 자,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다.”
연신 준성을 재촉하며 결정을 종용했다. 외통수에 걸려들었기에 그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하지만 아군으로 삼을 수 있는 악마를 적으로 돌리는 것도 부담이 되었다.
문득 며칠 전 정기정과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오랜 세월 살아온 드래곤의 연륜은 준성이 결정을 내리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제안 받아들이지.”
“현명한 판단이다. 앞으로 잘 부탁하지.”
공통의 적을 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한결 호의적으로 바뀐 공기의 흐름을 느낀 준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미약하게 불어온 한줄기 바람이 어둠을 몰아냈다.
“다음에 다시 찾아오도록 하겠다. 그때는 나눌 수 있는 대화가 많을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악마는 자취를 감추었다.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준성은 고개를 저었다.
“주사위를 던졌다.”
이것이 어떤 여파를 끼칠지 준성 또한 알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자신이나 신족의 운명을 가를 수 있는 중대한 분수령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죄송합니다.”
“…….”
김기정의 사과를 받은 준성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찾아온 그는 몬스터 필드의 제거가 어렵게 되었다면서 난색을 표한 것이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정치적 이유입니다. 정치인들은 제주도 몬스터 필드의 소멸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 이면에는 수많은 이유가 존재했다. 일일이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대충이나마 어떤 뜻을 품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해로가 차단되면서 대한민국의 에너지석 공급량은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이는 경제의 혼란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했다. 그곳에서 공급되는 안정적인 에너지석을 포기하기에는 북한의 몬스터 동산이 너무 위험한 곳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공포심 유발과 준성에게 힘을 실어 주지 않기 위한 이유 등 핑계를 대자면 한도 끝도 없이 이어졌다.
“끝까지 안 되는 겁니까?”
“대가가 주어진다면 그들이 순순히 협력을 하겠지만 정상적인 경로로 설득하는 것은 힘들 겁니다.”
이미 준성이 정부에게 보여 주는 태도가 우호적이지 않다는 게 알려졌기에 그들은 기를 쓰고 반대하는 것이다.
자신들과 손을 잡든가, 아니면 하려는 일에 고생을 겪어 보라는 식이었다.
“만약 제가 강행한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제주도 몬스터 필드에 일을 강행하려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그곳을 제거함으로써 북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만들고자 합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필드 마스터의 개입을 없애고자 하는 게 가장 큰 이유지요.”
“필드 마스터라고 함은?”
“그들은 관리자라고 불리는 자들을 부리는 초월적인 존재입니다. 몬스터는 단지 애완동물에 지나지 않는다면 믿으시겠습니까?”
“…….”
전혀 예상치 못한 준성의 말에 김기정이 눈을 부릅떴다.
몬스터 필드를 지배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인간을 초월한 존재라는 것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신입니까?”
“아닙니다. 하지만 신이 되고자 합니다. 그만한 힘도 지녔습니다.”
“허어! 분명 대단한 존재일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신이 되려는 자들이라니…….”
“필드를 제거하면 그들의 개입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이 관점이라면 사안이 가볍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럼 한 가지, 몬스터 동산은 그들의 개입이 없는 것입니까?”
준성을 신뢰하고 있지만 믿기 힘든 말을 연속으로 듣다 보니 확인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곳은 인간이 전멸했기에 무법지대로 놓여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인위적으로 필드 비슷한 걸 만들어 놓으면 지금보다 훨씬 안전한 사냥이 가능해질 겁니다.”
“알겠습니다.”
준성의 능력이 어디까지가 한계인지 궁금함이 치밀어 올랐지만 김기정은 호기심을 억눌렀다.
그의 나이 이제 스물, 과거의 행적은 복잡하게 꼬여 있었지만 틀림없는 대한민국의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가 보여 주는 능력은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이런 초월적인 능력자가 대한민국의 사람이라는 게 다행으로 여겨졌지만 그를 제대로 품을 수 없는 현실이 부끄럽고 화가 나기도 했다.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보인 김기정이 자리를 벗어났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준성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괜한 사람의 가슴에 불을 지른 건가…….”
결연한 표정을 보면서 한차례 소란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순간이었다.
콰직!
분노를 참지 못한 하나다가 손을 휘두르기 무섭게 탁자가 반으로 갈라졌다. 사나운 기세가 사방으로 휘몰아쳤지만 보고하는 마츠모토의 표정은 지워진 채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더글라스가 정말 그렇게 지껄였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우리의 행동을 모두 엿보고 있었다는 의미로군.”
“예.”
더글라스와 만남을 갖고 난 뒤 마츠모토는 당시에 있었던 일을 고스란히 하나다에게 전달했다.
이에 그는 격렬한 분노를 드러냈는데, 자신들이 뒤에서 은밀하게 꾸몄던 모든 일들이 실제로는 미국 A.O. 본부의 손아귀에 놀아난 꼴이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부끄럽고 한심한 행동인지 하나다는 좀처럼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럼 포스 운용법도 마찬가지인가?”
“희미하지만 그에게서 포스를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확실히 놀아났군.”
단 몇 마디 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하나다는 모든 정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미국 A.O. 본부의 보안이 허술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이 의도적으로 정보를 흘렸기에 자신들이 포스 운용법을 얻고, 개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름 치밀하게 준비했던 모든 과정도 미국의 손아귀에 놀아났다는 의미였다.
“더글라스는 미국의 패권을 중시하지만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을 망설이는 자입니다. 그들은 포스 운용법을 얻기 위해 우리를 이용한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안 그러면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 없을 테니까.”
대화를 할수록 미국의 의도가 드러났지만 분노가 너무 크기 때문일까? 반대로 하나다의 표정은 가라앉고 있었다.
마츠모토 또한 다르지 않았다. 더글라스를 마주하면서 느꼈던 아득함은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자극했다.
“우리를 이용한다고 해도 더 나아가면 된다. 마츠모토, 실험을 강행한다.”
미국과 자신들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라면 대를 위한 소의 희생쯤은 웃으면서 감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소할 수 있는 차이지만 이는 운명을 가를 결말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확고한 그의 명령을 듣는 순간 마츠모토는 멈칫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이런 시선은 익숙해지지 않는군.”
강의를 듣기 위해 학교에 나온 엘리엔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본격적으로 인간 세계에 뛰어들겠다는 결심 아래 꾸준하게 강의를 들으러 학교로 나갔지만 준성과 세희가 없을 때면 힘에 부치는 느낌을 받고는 했다.
인간들은 외모를 중시한다. 엘프 사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가치를 두고 있기에 세상에 나온 엘리엔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 인간들에 대한 증오를 품고 있는 그녀로서는 이러한 관심이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남자로 준성을 선택했기에 이는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방학 중에도 계절 학기를 듣기 위해 학교에 나오는 수고를 감수하고 있었다.
강의실 안으로 들어와 가방을 내려놓고 교재를 펼친 뒤 눈으로 내용을 훑었다. 이미 알고 있는 걸 다른 관점에서 풀어 놓았기에 빠른 속도로 읽어 나갔다.
그러던 중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고, 옆으로 고개를 돌린 엘리엔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일그러졌다.
그곳에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자신에게 폭언을 퍼붓던 타나가 있었다.
“잘 지냈어?”
“내가 너라면 잘 지냈을 거라고 생각하나?”
“부족한 점을 짚어 줬으니 적대감보다 고마움을 느꼈을 거라 생각하는데.”
“…….”
순간 타나의 머리를 열어 보고 싶은 충동이 드는 말이었다. 자신의 외모를 사정없이 깔아뭉개며 준성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해놓고 감사를 표해야 한다고 말할 줄이야.
더 열이 받는 건 타나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눈이었다는 점이다.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지?”
“김준성에게 관심이 있으니까. 어울리지 않는 여자가 있다면 떼어 놓는 게 옳겠지.”
“고작 그런 이유로? 다른 이유가 있을 텐데?”
“내가 한 말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마라. 너는 김준성과 안 어울린다.”
엘리엔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만약 손에 검이 들려 있었다면 당장 그녀를 향해 휘둘렀을 것이다. 하지만 교수가 강의실 안으로 들어왔기에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다.
“강의가 끝나고 이야기하지.”
“내게 듣고 싶은 말이 있다면 받아들이겠다.”
타나도 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강의가 끝나면 두고 보자는 생각과 함께 엘리엔은 애써 그녀를 무시하며 강의 내용에 집중했다.
그렇게 길다고 할 수 있는 두 시간이 흐른 뒤, 엘리엔과 타나는 강의실을 벗어나 인적이 드문 벤치로 자리를 옮겼다.
“왜 나를 자극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처음 말한 걸로 기억한다. 나는 김준성에게 관심이 있고 너와 그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서로 불행해질 뿐이다.”
“말을 해도……!”
거듭되는 타나의 말에 분노를 참지 못한 엘리엔의 손에는 마나 소드가 들려 있었다. 그것은 단숨에 공간을 가르고 타나의 어깨를 향해 휘둘러졌다.
쩌엉!
검을 휘두르고 아차 했던 엘리엔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기습에 가까운 자신의 공격을 타나가 막아 낸 것이다. 중간에 힘을 회수했다고 하나 온전히 발휘한 힘을 견뎌 낸 것만으로도 대단했다.
“너는…… 누구지?”
말을 하는 엘리엔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타나의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내 말, 명심하도록 해.”
스팟!
그 말을 끝으로 타나의 몸이 흐릿해지면서 사라졌다. 엘리엔이 미처 움직이기도 전에 도망을 친 것이다. 황급히 감각을 확장하여 주변을 탐색했지만 그녀의 기척은 감지되지 않았다.
한숨을 푹 내쉰 엘리엔은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도망쳤다고 생각한 타나는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시선은 학교를 벗어나는 엘리엔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더 이상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을 만큼 멀어졌음에도 타나는 움직이지 않고 한 곳만 묵묵히 응시했다.
웅웅! 웅웅웅!
거센 힘의 파동이 일어나면서 그녀의 손이 푸른빛으로 휩싸였다.
그랜드 마스터인 엘리엔의 일격을 맨손으로 막아 낸 만큼 온전한 형태를 유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처참하게 망가져 있던 손은 빛이 사라지면서 온전한 형태를 회복했다.
천천히 손을 들어 앞뒤로 돌리며 상태를 살핀 타나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는 널 용서할 수 없다, 엘리엔.”
무감정한 그녀의 목소리와 달리 두 눈에 강렬한 푸른 안광이 쏟아지고 있었다.
☆ ☆ ☆
김기정의 호언장담을 들었지만 제주도 몬스터 필드 제거의 승인 여부는 지지부진하게 흘러갔다.
A.O. 본부장이라는 직함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한몫 잡으려는 정치인들은 자신이 쥔 패를 순순히 내놓으려고 들지 않았다.
비단 대한민국에 국한된 것이 아닌, 모든 정치인들의 계산이겠지만 준성으로서는 그들의 결정이 떨어지길 목 빼놓고 기다릴 수 없었다.
결국 마음을 굳힌 준성이 김기정에게 일방적인 통보를 보냈다.
“몬스터 필드를 제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김기정이 화들짝 놀라 준성을 찾아왔다. 일방적인 통보는 준성이 여태까지 보이지 않았던 강경한 태도였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면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기다리는 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준성의 말을 듣고 김기정의 표정이 굳어 갔다.
“조금이라도 기다려 주실 수 없겠습니까?”
“지금도 충분히 인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부장님께서는 제가 그들의 장난에 휘말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
그럴 리 없었다. 김기정도 제주도 몬스터 필드 제거를 놓고 정치인들이 부리는 야료를 모르지 않았으니 말이다. 순수한 호의에 가까운 행동을 어떻게든 이용해 보려는 행태에 치가 떨릴 정도였다.
A.O. 본부의 입장에서 모든 몬스터 필드의 제거는 반대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필드가 사라지면 그곳에서 나오는 에너지석과 부산물, 그리고 실전 장소를 모두 잃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외 모든 이들은 환영할 수밖에 없었는데, 몬스터 웨이브로 인해 지금도 몇몇 도시들이 지도 상에서 사라지고 있는 만큼 공포의 근원을 제거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것으로 장난을 친다는 것에 김기정도 어처구니가 없고, 준성도 더 이상 기다려 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지금 추세라면 어떻게 하더라도 자신들의 이익을 얻어 가려고 할 테니 말이다.
“저는 A.O. 본부에서 해준 양보에 대해 큰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오히려 감사해야 할 건 우리입니다.”
“몬스터 필드를 제거하는 것은 개인적인 이유도 있지만 나아가 내게도, 그리고 A.O. 본부에도 큰 이익이 될 겁니다. 만약 제 생각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대한민국은 세계의 모든 능력자들이 조금이라도 오래 머물고 싶은 장소가 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그가 말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김기정은 쉬이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싱긋 웃어 보인 준성이 대답했다.
“대한민국을 포스 과밀 구역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
김기정의 얼굴에 경악이 번져 갔다.
더 이상 정치인들의 협력을 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준성은 제주도 몬스터 필드를 향해 움직였다.
그가 대한민국의 마지막 필드를 제거하기 위해 마음을 먹은 것은 론 쉐인과 나눴던 대화가 결정적이었다.
당시 그녀는 모든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지만, 마치 퍼즐 조각처럼 하나로 합쳐지면 유용한 정보들을 준성에게 털어놓았다.
이는 점점 표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신족과 신, 그리고 악마의 존재를 견제하고, 보다 나은 환경을 조성하여 자신을 비롯한 여인들이 마음껏 신위를 발휘할 수 있게 만들려는 의도가 있었다.
준성이 말한 ‘금탑화’라는 것은 상대가 힘을 발현함에 있어 제약을 주고, 자신들은 온전한 무위를 넘어 더 강력한 힘을 구사하는 것이 가능한 환경을 말한다.
“나이트 골렘을 만들어야 하나?”
차원 이동을 하면서 자유롭게 풀어 놓은 골든 나이트의 존재가 언뜻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평생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는 골든 나이트는 적을 상대함에 있어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하는 존재였다.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강력한 무위를 발휘하기에 가장 필요한 것이 되었다.
제주도에 도착한 준성은 거침없이 몬스터 필드 안으로 진입했다.
광활하게 펼쳐진 필드 곳곳에 몬스터의 기척이 감지되었지만 준성은 개의치 않고 탑을 향해 움직였다.
필드의 코어는 바로 탑이다. 이곳을 무너뜨리면 본격적인 축소가 시작되는데, 차근차근 줄어들다가 곳곳에 숨겨져 있는 디바인 마크까지 제거하면 완전히 소멸된다.
탑에 도착한 준성은 끝없이 펼쳐진 높이를 따라가다가 싱긋 웃었다.
“론 쉐인이 이야기한 건 다른 의미가 숨어 있었지.”
우웅! 우우웅!
손을 뻗고 마나를 운용하기 무섭게 거센 반동이 전해졌다. 손아귀가 저릿할 만큼 큰 충격이었지만 개의치 않고 마나를 주입했다.
그러자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여파가 갈무리되기 시작하더니 이내 탑의 진동으로 바뀌어 갔다.
그긍! 그그긍!
탑 전체가 흔들리는 느낌이 들면서 흐물흐물해지는가 싶더니 서서히 녹아 갔다.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지면서 딱딱하던 탑은 마치 젤리처럼 물렁한 형태로 바뀌어 갔다.
대충 비밀만 숨겨져 있을 거라 생각했던 준성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탑 전체가 포스 덩어리일 줄이야.”
이는 그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였다. 포스 전개를 위해 세워진 탑은 그 자체도 농도 짙은 포스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어떤 원리인지 모르나, 준성이 알고 있는 연금술의 형태보다 훨씬 더 발달된 비기임이 분명했다. 포스로 바꿀 수 있었던 것도 준성의 힘에 반응한 것이었고. 아마 엘 하이너가 탑의 존재 유무를 쉽게 정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이러한 이유가 숨어 있던 것이리라.
천천히 바뀌던 힘은 점점 가속도를 더해 가더니 이내 탑 전체가 포스로 바뀌어 단단하게 응축되었다.
그 크기는 축구공만 했지만 담긴 힘은 도시 하나를 날려 버릴 만큼 컸다.
“…….”
경이로운 힘의 크기에 준성은 입을 다물었다. 예상 이상으로 큰 이 힘은 자신이 계획한 금탑화를 충실히 이행하고도 남을 만한 것이었다.
“시작해 볼까.”
나직한 중얼거림과 함께 손을 뻗은 준성은 포스를 대한민국 전역으로 퍼뜨리기 시작했다.
수중 몬스터 필드 제거를 선언한 더글라스는 미국 능력자들을 중심으로 우방국의 지원을 받아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일본 A.O. 본부와 유사한 아티팩트를 준비하여 바닷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고, 속성계 능력자들을 대거 포함시켜 물 속성의 바다 몬스터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자 했다.
그렇게 엄선된 능력자의 숫자는 백여 명.
일본에서 준비했던 인원보다 훨씬 적은 숫자였지만 치밀한 계산하에 조직된 능력자들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수중 몬스터 필드를 제거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게 해결될 겁니다.”
본격적인 출정식에 앞서 더글라스가 담담하지만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세계 최강의 능력자인 그의 말은 그들에게 신뢰를 주기에 충분했다. 일본 A.O. 본부와 달리 미국 A.O. 본부는 수중 몬스터 필드에 서식하는 몬스터 목록을 작성하고, 그들의 공략 방법까지 마련해 놓은 것이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프랑스 능력자 한 명이 손을 들어 질문했다.
“크라켄은 어떻게 처치할 생각이십니까?”
“분명 상대하기 어려운 몬스터지만 그것도 고려하여 여러분들을 선발했습니다.”
크기만 2킬로미터가 넘어가는 크라켄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곳에 모인 능력자들도 각국에서 뛰어난 무위를 보이지만 은연중 크라켄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크라켄은 체내에 존재하는 코어를 공략하면 쉽게 쓰러뜨릴 수 있습니다. 이미 자료를 보여 드렸다시피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크라켄이 아닌 블루 드레이크입니다.”
능력자들은 더글라스가 배부한 몬스터 도감을 살폈다. 그리고 그곳에 적힌 블루 드레이크의 상세 내용을 보고 저마다 혀를 내둘렀다.
“블루 드레이크는 얼핏 보면 드래곤이라고 생각할 만큼 거대한 덩치와 강력한 능력의 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렬한 수압으로 만들어 내는 브레스는 여파에 휘말리기만 해도 전신이 갈가리 찢겨 나갈 만큼 강력합니다. 이 몬스터의 공략 여부가 수중 몬스터 필드를 제거할 수 있을지를 정할 것입니다.”
“…….”
어느새 모두들 더글라스의 설명에 푹 빠져 있었다.
“해로를 되찾은 뒤, 국제 능력자 연맹에 안건을 상정하여 본격적인 몬스터 필드 제거에 나설 생각입니다. 위대한 첫 걸음에 힘을 보태 주시길.”
“예.”
대답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그들의 눈은 예리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준성이 제주도에서 포스를 운용할 무렵, 세희와 이나는 서울에서 마법진을 활성화시키는 데 힘을 보태고 있었다.
대한민국을 금탑화하는 일의 관건은 유리한 환경 조성에 있는데, 과거에는 준성 혼자 오랜 시간을 들여 해냈지만 세희와 이나가 제 몫을 할 수 있게 되면서 그 과정이 한결 쉬워지게 되었다.
“언니, 준비됐어요?”
“응, 이제 마법진을 활성화시키면 돼.”
웅웅! 우우웅!
마나가 주입되기 무섭게 마법진이 빛을 뿌리며 움직였다. 준성이 발산한 포스가 이에 호응하며 빠른 속도로 마법이 캐스팅되었다.
대기의 마나가 옅던 것이 점점 짙어지더니, 점차 전생의 환경과 비슷한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마나 밀도가 높아지고 있어요.”
“느껴져.”
마법진 운용에 힘쓰는 세희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농도 높은 마나인지 몰랐다. 단지 환경만 바뀌었을 뿐인데 힘이 솟아나는 걸 느낄 정도였다.
“이나야.”
“네, 언니!”
힘차게 대답한 이나는 더 많은 마나를 쏟아부었다. 그랜드 마스터인 그녀의 잘 벼려진 감각은 마법사의 것을 충분히 대체할 수 있는 수준이었기에 마법진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파아앗!
사방으로 퍼진 마나는 조금씩 농도가 옅어졌다. 이제 이곳을 중심으로 서울이, 나아가 준성의 허락 아래 대한민국은 다른 곳보다 훨씬 많은 양의 마나가 맴도는 환경이 될 것이다.
“수고했어.”
“수고는 언니가 하셨죠. 저야 마나만 주입했는데요.”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에 세희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끝이 아닌 거 알지?”
“물론이죠.”
“뭔지는 묻지 않겠지만 철저하게 해줘. 누군가의 앞에 나선다는 게 싫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물러나 있는 게 마냥 좋지는 않아.”
격하게 공감한 이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제 준성을 스타로 만들면 돼요.”
말을 하는 그녀의 눈은 무섭게 빛나고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