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202)
제82장 금탑의 등장
“이제 됐나.”
서울에 있는 세희와 이나가 작업을 성공으로 끝낸 것을 확인한 준성은 미소를 지었다.
거대한 힘을 다루는 고된 작업이었지만 노련한 두 여인은 어렵지 않게 자신이 맡은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해 냈다. 저 멀리 서울로부터 시작되는 마나의 기운을 느끼며 준성은 눈을 빛냈다.
“그나저나 내 생각이 맞았군.”
제주도 몬스터 필드를 소멸시켜 대한민국 전역을 마나로 뒤덮는 것은 몇 가지 정황을 유추한 끝에 완성된 이론이었다.
이러한 가설은 론 쉐인을 상대할 때 세워졌는데, 이미 드러난 몇몇 정황을 조합하여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었다.
“몬스터가 아니라 필드 자체가 첨병 역할을 하고 있을 줄은.”
비밀은 몬스터가 아닌 필드 안에 숨어 있었다.
포스가 가득한 이곳에서 살아가는 몬스터는 자연히 그 힘을 내부에 쌓게 되는데, 이는 끊임없이 축적되어 현재 인간들이 무공해 자원으로 사용하는 에너지석이 된다.
화석 자원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는 이것은 환경학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석유 카르텔의 세력 구도에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 더 이상 오염이 발생하는 에너지가 아닌 자연 상태 그대로의 무한한 에너지 세계가 열린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도 신족의 음모라면 사람들은 에너지석 사용을 당장 그만둘 수 있을까?
“세계에 포스가 퍼지길 기다리는 거였을 줄은.”
에너지석이 세계에 자리 잡을수록 점점 세계는 포스로 이루어진 세상이 될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한 능력자들도 더 강해지고 더 많은 숫자가 모습을 드러내겠지만, 신족이 살아가는 세계와 동일한 환경이 조성되면 그들이 모습을 드러냄에 있어 거리낌이 사라지게 된다.
신족 중에서 약한 론 쉐인은 대신족의 명을 어기고 포스를 착복하여 자신의 힘을 길렀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는 포스에 노출되어 조금씩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을 완벽하게 뒤집은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
“자세한 사실을 눈치챘을 때쯤 대한민국은 내 영역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어 찾아오면 얼마든지 웃으면서 제거해 주지.”
슬쩍 미소 지은 준성의 몸이 흐릿해지며 자취를 감추었다.
갑작스러운 대한민국의 환경 변화는 혼란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사소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지만, 거대한 섬광과 함께 잠깐이나마 대한민국을 뒤덮었던 빛은 관심을 사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정부에서도 이러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기에 혼란은 더욱 커질 수 있었지만 발 빠르게 나선 것은 다름 아닌 A.O. 본부였다.
그들은 제주도 몬스터 필드가 소멸하였으며, 대한민국은 보다 더 강력한 능력자를 양성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음을 공표했다.
그에 대한 가장 큰 예로 기운에 민감한 사람들이 능력 개발에 대한 잠재력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이 숫자가 결코 적지 않아 단기간에 A.O. 본부의 전력을 강화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정부였다.
그들은 김준성이 자신들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움직인 것에 불편함을 드러냈다. 유용한 수단이라고 생각하여 시간을 끌고 있었는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움직일 줄 몰랐던 것이다.
“압박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장관님.”
“그러겠지, 그럴 양반들이었으니까.”
이현수의 보고에 백찬길은 코웃음을 쳤다.
흘러가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조차 못하는 그들의 행태에 비웃음만 절로 흘러나왔다.
“이대로 두고 보는 게 좋겠지?”
“A.O. 본부의 전력이 상향되면 북한의 몬스터 동산을 공략할 거라고 합니다.”
“그게 우리 입장에서도 더 낫지.”
본래 백찬길도 김준성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눈앞에서 마주한 그는 훨씬 거물이었고, 적보다 아군으로 삼는 것이 더 많은 이익을 취할 거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위에서 전해지는 압박은 어떻게 할까요?”
“떡값을 쥐어주지 않았으니 당분간 시끄럽게 굴겠지만 어차피 A.O. 본부가 움직일 테니 우리는 지켜보고만 있도록 한다.”
무책임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지만 이번 소란을 수습하는 역할은 몬스터 대책 본부가 아닌 A.O. 본부와 김준성이 주가 되어야 한다.
자신들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멈칫했지만 이현수도 순순히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재주는 곰이 부리지만 돈은 왕서방이 챙기는 법이지.”
곰이 재주를 부릴 수 있도록 시간을 준 뒤 돈은 자신이 챙길 생각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포스를 마나로 변환시키는 중심지인 이곳은 극도로 농축된 마나가 주변을 뒤덮고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충만함에 미소를 지은 그는 세희와 이나를 보며 물었다.
“적응하는 건 어렵지 않지?”
“오히려 힘이 펄펄 나요. 왜 이제야 조성한 건지 후회가 될 정도라니까요?”
“이나의 말에 과장이 있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이에요. 이곳에서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 같네요.”
“내가 언제 과장을 했어요! 언니도 참.”
티격태격하는 그녀들을 지켜보던 준성이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수고했어. 둘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 작업도 쉽지 않았을 거야.”
“당연히 도와야 하는 일이죠. 그나저나 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하고 싶은 말?”
“네! 하고 싶은 말이요. 단둘이서만 해야 돼요. 물론 세희 언니처럼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니 안심하셔도 좋아요.”
“이나 너, 뭐라고…….”
“잠시 따라와요.”
준성의 팔을 낚아챈 이나가 방으로 잡아끌었다. 못 이기는 척 뒤따른 뒤, 단둘이 있게 되자 의아함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준, 대한민국을 금탑화 시킨다고 했고, 이제 계획도 실행으로 옮겼으니 좀 더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게 어떨까 싶어요.”
“체계적으로?”
“네, 금탑을 만든다고 해도 결국 구성원이 우리라는 건 변함이 없잖아요? 정부를 길들이고 A.O. 본부를 예속화시킨다고 해도 우리의 직접적인 전력이 아닌 이상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해요.”
“……확실히 그렇긴 하지. 그래서 이나가 생각하는 건 뭔데?”
“금탑의 일원을 모집했으면 해요.”
“인원 확충을 하자고?”
“네! 몇 명을 선발해서 집중적으로 육성하면 쓸모가 있지 않겠어요?”
“음, 무슨 생각인지 알겠지만 시간도 오래 걸리고 우리가 상대하려는 자들에게 별 타격을 주지 못할 거야.”
일리 있는 말이었지만 준성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부정적인 태도에 이나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한 생각이에요. 그래도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건 옳지 않아요. 준, 저를 믿고 한번 진행해 볼 수 없겠어요?”
“이나를 믿고?”
“네! 금탑의 내부를 관리했던 것도 저였어요. 맡겨 주면 멋지게 키워 볼 수 있어요. 제가 또 한 인기하는 모델 아니겠어요?”
자신감 넘치는 이나의 태도에 준성도 마냥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대한민국을 금탑화 시킨 이상, 아군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협력하는 자들도 늘어난다면 움직이는 게 한결 편해질 테니 말이다.
너무 편협하게 생각했던 것일 수도 있다는 판단에 이번은 이나의 판단을 믿어 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알았어, 그럼 믿고 맡겨 볼게.”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이나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상처가 완벽하게 낫자 본격적으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던 5호는 가볍게 상대해 달라는 엘리엔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 또한 신족의 개가 되기 전 뛰어난 검사였고, 실력만큼은 절대 뒤처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이나에게 처참한 패배를 당했지만 본신의 능력이 제한된 상황에서 발생한 참사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엘리엔과 검을 섞으면서 그 자신감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챙!
“윽!”
손아귀가 저릿해지는 통증과 함께 5호는 검을 놓쳤다. 그럼에도 불굴의 투지를 발휘하여 떨어지던 검을 다시 움켜쥐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엘리엔의 검은 모든 충격을 흘려버리고, 그의 전신을 옭아 벼락같은 검격을 연이어 퍼부었다.
결국 몇 차례 공격을 허용한 그는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주저앉고 말았다.
“가볍게 몸을 풀 거리도 되지 못하는군.”
“후욱! 후우!”
무감정한 엘리엔의 중얼거림에 발끈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당장 드러난 정황은 명명백백했다. 자신이 자부하던 검술은 눈앞의 여인에게 견주는 것조차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어떻게 이런 무위를 발휘할 수 있습니까?”
무너진 자존심을 채운 것은 경외심이었다.
아직 젊어 보임에도 일대종사의 분위기를 발산하는 엘리엔은 절대 넘지 못할 산처럼 보였다.
“가벼운 응용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정도는 이나도 쉽게 할 수 있지.”
“그 이나와 비교하면 누가 더 강합니까?”
“종합적인 무위는 내가 더 강하다. 하지만 검술만 겨룬다면 글쎄, 서로 진심이 되지 않는 이상 승부를 내는 건 어렵겠지.”
엘리엔과 달리 살기 짙은 이나의 검술은 제 위력을 발휘하려면 피를 봐야 했다.
그 말에 충격을 받은 5호는 회한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검술에 대해서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세상이 넓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한번 대련을 청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이나도 대련을 마다하는 성격은 아니니까.”
“받아주겠습니까?”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한번 시도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더 강한 검사에게 검술을 지도받고 싶은 열망은 5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신족의 개 노릇을 하면서 원치 않는 움직임을 보여야 했지만 잠시나마 모든 것에서 해방된 지금, 억눌러온 욕망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개인 수련을 위해 5호가 돌아가고, 연무장에 우두커니 서 있던 엘리엔이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되나?”
“네, 충분해요.”
나무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나였다. 기척을 죽이고 상황을 지켜보던 그녀의 존재를 5호는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어떻게 보셨어요, 언니?”
“당장 써먹기에는 어렵다. 그래도 검술에 대한 애정이 크니 잘 다듬으면 괜찮을 것 같군.”
“그래요? 다행이네요.”
“그가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나?”
“우리에게 부족한 건 숫자니까요. 위장 침입한 곳에도, 원래 속한 곳도 돌아가지 못한다면 우리가 잘 써먹을 수 있을 거예요.”
눈을 빛내는 모습에 엘리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평상시에는 단순한 면모를 보이다가 가끔씩 이렇게 기지를 발휘할 때면 이나도 방심할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곤 했다.
“곧 널 찾아갈 테니 알아서 요리해라.”
“물론이에요. 지구의 매직 나이트 1호로 찍은 만큼 조만간 스스로 원하게 될 거예요.”
금탑화가 이루어진 상황에서 인원 확충을 노리는 이나는 5호를 매직 나이트 1호 후보감으로 찍어 놓고 마음껏 조종하고 있었다.
곧 자신에게 된통 깨지고 앞도적인 힘과 검술이라는 미끼에 낚여 자발적으로 충성을 맹세하게 될 모습을 떠올리며 이나는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이나가 말하던 게…… 이거였어?”
말끝을 흐리는 준성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다분히 질책의 의미가 담겨 있었지만 그녀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준, 웃어야 더 잘 나와요. 모든 건 금탑과 우리의 미래를 위한 일이에요!”
“…….”
당당하게 팔짱을 낀 뒤 요구해 오니 준성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하지만 화를 낼 수 없는 것은 지금의 환경 때문이다.
광고 촬영.
이나가 거창하게 금탑의 미래를 거론한 뒤 보인 첫 행보는 바로 함께 광고를 촬영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녀의 주도로 이루어진 외출이었다. 무엇을 한 건지 정확하게 설명해 주지 않았기에 의문이 생기긴 했어도 당찬 그녀의 표정에서 확실한 결의가 느껴져 순순히 따라갔다.
하지만 커다란 스튜디오에 들어서고, 이나와 함께 분장실로 들어가는 순간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빈틈없는 포위 공격을 구사하는 것처럼 스태프들이 준성을 둘러싸더니, 그에게 맞는 옷을 준비하고 메이크업을 시작한 것이다.
“피부가 굉장히 좋네요? 자세히 볼 때는 몰랐는데 어쩜 이렇게 투명할까.”
“머릿결도요. 자세히 보니 하나하나가 윤이 나네. 이나에게 밀리지 않겠어.”
자신을 두고 폭풍 수다를 이어가는 여인들을 보며 준성은 멍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담아 이나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보지 못한 척, 준성을 메이크업하는 여인들에게 외쳤다.
“살살 다뤄요! 제 거니까요.”
“어머어머!”
“알았어, 살살 다룰게.”
하하호호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메이크업이 끝나고 촬영이 시작되었다. 콘셉트는 다정다감한 커플이었고, 이나는 촬영을 빙자하여 준성에게 마음껏 안기고, 팔짱을 끼는 등 참아 왔던 욕망을 마음껏 이뤄 나갔다.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지만 이나가 벌인 일에 장단을 맞춘 준성은 쉬는 시간에 둘만 있게 되자, 말을 꺼냈다.
“……어떤 생각인 거야?”
“준은 즐겁지 않아요?”
“그 전에 내게 제대로 양해도 구하지 않고 촬영을 강행한 이유를 설명해 줬으면 해.”
순순히 물러서지 않는 그의 표정을 본 이나는 짧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쉽게 넘어가고 싶었지만 준성의 표정은 단호하기만 했다.
“간단해요, 대중에게 준의 존재를 알리고자 해요.”
“내가 싫다고 해도?”
“이미 준의 평온한 삶은 깨졌어요. 저로 인해서 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도 없고요. 대한민국을 금탑화한 만큼 든든한 우군을 얻기 위해서라도 준의 존재가 전면에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부인하는 건 아니야.”
준성이 모습 드러내길 꺼려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평온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였다. 굳이 마법을 드러내지 않고 평범하게 살아가려고 했지만 몬스터가 등장하고, 세계를 침략하려는 신족으로 인해 그의 바람은 산산조각이 났다고 봐야 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주제도 모르고 건들려고 하는 녀석들에게 경고를 날리기 위해서라도 모습을 드러내고 실력 행사를 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사실 이 광고는 아무래도 좋아요. 준이 원하면 외부로 드러낼 생각도 없어요.”
“그럼?”
“사실 준의 생각을 보고 싶었어요. 시험을 해서 죄송해요, 하지만 저도 세희 언니도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어요. 준은 생각을 쉽게 바꾸지 않으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야.”
10클래스의 경지에 올라서도 아직까지 편협하던 성격의 잔재가 남아 있음을 준성도 인정했다. 하지만 이렇듯 시험을 당한 것은 그리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적의 손에서 버텨내기 위해서는 대한민국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전 세계 모든 국가가 준을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고 봐요.”
“전 세계가 뭉칠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도 아니에요. 준이 제대로 나설 마음만 있다면요.”
“…….”
단호한 이나의 목소리에 준성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국제 능력자 A.O. 본부는 물론 정부를 구워삶는 것이 가능했다.
다만 그럴 경우 온갖 귀찮은 일을 떠맡고,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야 한다는 단점이 존재했다.
그럴 일을 피하고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고.
하지만 귀찮음을 피하기 위해 확실한 방법을 저버리는 것이 옳은 걸까?
그건 아니라는 걸 준성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자신의 마음속에 결론이 나와 있음을 깨달은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나 말이 맞아.”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아니, 내가 우유부단했지. 이나가 말했던 것들이 맞아. 대한민국을 금탑화하겠다고 선언한 것부터 본격적으로 나서겠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리고 세계를 내 편으로 만드는 게 최종적인 형태겠지.”
이나의 말을 듣고 준성은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10클래스에 오르고, 반신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신이 아닌 인간이었다. 자신의 판단이 언제나 옳지는 않으며, 보는 것만으로 판단하는 것도 한계가 존재했다.
“고마워, 이나야.”
“아니에요, 제가 잘못했어요.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거였는데.”
처연한 이나의 표정에 준성은 미안한 마음이 커져 가는 걸 느꼈다. 모든 것이 자신을 일깨워 주기 위한 고육지책임을 그는 모르지 않았다.
“괜찮다니까.”
“제가 괜찮지 않아요. 그러니 저를 준 마음대로 해도 좋아요.”
“뭐?”
“제 몸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무겁게 가라앉던 분위기가 갑자기 한없이 가벼워졌다. 허탈한 표정을 짓던 이나는 입가를 비집고 나오려는 실소를 참아내고 표정을 굳혔다.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짓던 그녀는 딱딱하게 굳은 준성을 보고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갑자기 원하는 게 생각났는데 들어볼래?”
“자, 잠깐만요.”
“일주일 동안 내 반경 10 미터 안에 들어오지 말 것. 이 정도면 날 속인 대가로 충분할 것 같아.”
“아, 안 돼요!”
“안 되긴, 마음대로 했으면 좋겠다며? 난 이나가 당분간 내게 다가오지 않았으면 해.”
“아까는 고맙다면서요!”
“하지만 속였잖아? 그럼 부탁할게.”
손을 흔들어 보인 준성의 몸이 흐릿해지며 사라졌다. 마법사가 아닌 이나는 공간 이동을 시전할 수 없었기에 내뻗은 손은 허망하게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준! 주운! 이, 이게 아닌데? 아악!”
홀로 남은 이나는 머리를 움켜쥐며 처절한 비명을 연신 내질렀다.
더글라스를 필두로 한 수중 몬스터 필드의 진입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접근한 자이언트 옥토퍼스를 어렵지 않게 무찌른 것에 이어, 처음 방문한 연합군에게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혔던 크라켄도 그의 진두지휘 아래 무찌르는 데 성공했다.
선두에 서서 압도적인 무위를 발현하는 더글라스는 능력자들의 신뢰를 얻기 충분했다.
몇 차례 이어진 몬스터의 습격을 무찌른 뒤, 그들은 바다 깊숙한 곳에 자리한 건축물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높게 솟은 탑은 지상의 몬스터 필드와 달리, 뒤집혀 있는 형태로 존재했다.
가장 위층이 아래라는 뜻이었는데, 탑 안으로 들어서자 지상과 별반 다르지 않은 환경으로 바뀌어 능력자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서렸다.
“이건…….”
“이곳이 수중 몬스터 필드 중심부입니다.”
담담한 더글라스의 목소리가 그들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그의 지휘가 있었기에 누구도 부상을 입지 않을 수 있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필드 마스터를 만나러 갈 것입니다. 그는 인간이 아닌 다른 차원의 상위 존재이니 마음을 단단히 먹으시길.”
“……!”
이미 몬스터 필드에는 주인이 있고, 그들이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임을 알기에 능력자들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선두에 선 더글라스는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끝없이 이어진 지하는 200층을 넘길 무렵 끝이 보였고, 광활하게 펼쳐진 순백의 대지가 능력자들을 맞이했다.
파아앗!
강렬한 광휘가 연신 휘몰아쳤다. 그 가운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엘 하이너였다. 필드 마스터로서 그들의 잠입을 지켜보던 그는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이곳까지 올 줄 몰랐는데, 정말 대단해.”
마치 신처럼 거룩한 그의 등장에 능력자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종교를 가진 이들은 성호를 긋거나 나직이 믿는 신의 이름을 읊조렸다.
그만큼 바로 앞에 등장한 엘 하이너의 모습은 그들이 상상으로 떠올리던 신 그 자체였다.
“당신이 필드 마스터입니까?”
“그렇다, 인간 능력자.”
“과연, 듣던 정보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는군요.”
“…….”
의미심장한 더글라스의 중얼거림을 들은 엘 하이너는 그가 다른 능력자들과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힘의 크기도 크기였거니와, 마치 출력 자체가 다른 듯한 능력의 발현 구조, 그리고 당장 자신을 향해 발톱을 드러낼 것 같은 이 익숙한 위화감.
얼마 전 소멸된 동족의 존재를 떠올리는 순간, 엘 하이너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이건……. 그래서 그때 찾아낼 수가 없었던 것인가.”
“우리는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그럴 테지.”
“순순히 대답해 줄 수 있습니까?”
“유감이지만 불가능할 것 같군.”
김준성을 처음 봤을 때처럼 자신의 재미를 즐기려고 했지만 눈앞의 더글라스가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지 알고 있는 이상, 쓸데없는 위기를 자초할 생각이 없는 엘 하이너였다.
그긍! 그그긍!
거친 균열음이 귓속을 파고들자, 당장 달려들려고 하던 더글라스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이대로 두고 보면 반드시 죽는다고 말해 주지.”
“하필이면.”
당장 권능을 발휘하려고 하던 더글라스는 주변 능력자를 인질로 삼은 엘 하이너의 판단에 표정을 구겼다. 이대로 그를 잡으려고 하면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모두 밖으로 나갑니다. 탑이 무너질 것입니다.”
“……!”
“어서요!”
목소리를 높이자, 사태를 파악한 능력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엘 하이너의 몸도 흐릿해지며 그대로 사라졌다.
꽈광! 꽈과과광!
바다 깊숙한 곳에 자리한 탑은 요란한 폭음과 함께 무너졌다.
그 폭발의 여파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여서, 바다 위로 수백 미터에 달하는 해일을 만들어 낼 정도였다. 태평양 중앙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육지에 피해가 가지 않았지만 위성으로 그 여파가 고스란히 녹화되었다.
쏴아아!
어느 순간 바다 위로 성스러운 느낌이 드는 순백의 빛이 쏟아졌다. 잠시 후, 광휘에 휩싸인 엘 하이너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필드가 존재하던 부분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최대한 시간을 벌고 싶었지만 별수 없지. 그래도 명령을 완수했으니 내 책임은 없겠어.”
필드의 파괴는 다른 동족들이 강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수단이었다.
지구로 넘어와 힘을 손에 넣고 움직이던 엘 하이너는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는 것이 아쉬웠지만 목표한 양은 충분히 채워 넣었다.
“이, 이건?”
어느 순간 공간이 뒤틀리는 걸 느낀 엘 하이너의 주변 광휘가 한층 더 강렬해졌다.
빛은 그가 지닌 최강의 공격 수단이자, 동시에 방어 수단이었다. 몸을 좌우로 비틀면서 강렬한 힘을 연신 흩뿌렸지만 전신을 뒤덮는 위화감은 더 강렬해졌다.
주변을 둘러본 엘 하이너는 온통 어둠에 물든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의 감각을 뛰어넘는 침식은 지닌 장점을 모조리 앗아 갔다.
“오랜만이군, 반역자.”
“……악마.”
어둠 사이로 들린 음산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엘 하이너의 음성이 굳어갔다. 광휘가 따가울 정도로 주변을 두드렸지만 진한 어둠에 힘을 쓰지 못했다.
“이렇게 좋은 순간을 놓칠 수 없지. 안 그런가? 다른 차원에 처박혀 있었으면 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닥쳐라!”
엘 하이너의 외침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하늘이 확 밝아지며 빛의 기둥이 어둠을 향해 내리꽂혔다.
그가 취한 권능인 ‘빛의 심판’이었다.
모든 것을 빛의 심판 아래 감화시킬 수 있는 이 능력은 엘 하이너가 지닌 힘의 원천이었다.
“끝났…… 컥!”
어둠이 완전하게 걷힌 것을 확인한 엘 하이너의 얼굴이 밝아지는 순간, 칠흑 같은 어둠이 주변을 뒤덮었다. 그리고 팔 하나가 엘 하이너의 복부를 꿰뚫고 나왔다.
“키킥! 권능과 힘을 합친 건 제법이지만 이 정도가 고작이지.”
귓가에 울려 퍼지는 음산한 목소리는 악마의 것이었다.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부릅뜬 엘 하이너는 그의 손아귀에 벗어나려고 했지만 빛의 원천은 산산조각 났고, 권능은 통제권을 잃었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네가 지닌 권능은 내가 요긴하게 써주지. 내가 오길 기다리는 어린 양이 있으니.”
파사사사!
엘 하이너의 몸이 빛의 파편으로 바뀌어 부서져 내렸다. 여전히 어둠에 휩싸인 채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악마가 손을 내밀자, 작은 빛의 입자들이 떠오르며 하나로 뭉쳤다. 작은 공 크기가 된 그것은 이내 손 위에 안착했다.
“이제 시작이야.”
킥킥거리는 음산한 웃음소리가 주변에 조용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