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203)
제83장 MP Trade
대한민국이 마나로 뒤덮인 뒤, 김기정은 A.O. 본부를 움직이면서 무척 바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난데없는 환경의 변화는 몬스터 필드의 소멸과 맞물려 정부를 혼란에 빠뜨렸고, 국민들도 어리둥절했으며, A.O. 본부에서도 난리가 났다.
이러한 변화는 그들에게 있어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A.O. 본부가 난리가 났던 이유 중 하나는 한층 농도가 짙어진 힘 때문이었는데, 이는 준성이 전수한 포스 수련법과 맞물려 더 강한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
당연히 김기정 입장에서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고 준성이 자세한 설명을 해줄 날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우선 그가 부탁한 부분을 해결하며 조용히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준성이 방문했다.
“많이 바쁘셨을 텐데, 감사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제주도 몬스터 필드가 언제 혼란이 일어날지 몰랐으니 오히려 우리가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죠.”
“약속한 바를 이행했을 뿐입니다.”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하는 그를 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 눈 속에는 수많은 의문이 뒤섞여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쉽게 묻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은 준성이 말했다.
“제 요구 조건을 들어주셨으니 궁금한 점이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대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정말입니까?”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확신 어린 준성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김기정은 생각을 정리한 뒤 차례대로 의문을 꺼내 들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갑작스러운 힘의 변동입니다. 이 힘은 우리가 능력을 발현하는 데 가장 중요한 포스인 겁니까?”
준성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포스는 가공된 형태의 힘입니다. 대한민국을 뒤덮고 있는 힘은 가장 순수한 기운, 세상의 근원을 구성하고 있는 마나라는 힘입니다.”
“마나라…… 기와 비슷한 겁니까?”
“그렇게 보셔도 무방합니다.”
“포스는 가공된 힘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다릅니까?”
질문의 형태를 보면서 김기정이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턱을 매만지며 마나와 포스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던 준성은 간단하게 비유했다.
“마나와 포스의 차이는 원재료와 통조림의 차이라고 보면 됩니다. 포스는 마나보다 더 쉽게 접할 수 있고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합니다. 그러니 힘을 쌓는 것도 훨씬 쉽습니다.”
“통조림이라면 부작용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마나를 쌓을 때 무협에서 중시하는 것처럼 정신과 신체, 기운의 일치를 중요시 여깁니다. 하지만 포스는 정신적인 면에 치우친 면이 크지요. 능력자들 대다수가 육체적인 측면을 중요시 여기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럼 마나를 쌓을 수 있는 자는…….”
“보다 더 순수한 기운을 다스릴 수 있다고 보면 됩니다.”
“으음!”
준성의 대답에 김기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 대답에서 보인 반응만으로 그가 마나를 쌓는 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사실 그 부분의 개념을 쌓아 줄 수 있는 이가 없어 적잖이 고민하던 차였습니다. 궁금한 점은 어느 정도 풀렸고 다른 용건이 있습니다만.”
“포스를 수월하게 쌓을 수 있는 방법입니까?”
“그렇습니다.”
마나는 포스와 같은 듯하면서 달랐다. 포스 수련법을 적용하면 체내로 흘러들어 왔다가 신체 내부를 돌아다니다가 그대로 빠져나가는데, 이 과정에서 체내에 남는 양은 극히 미미해서 성과가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제가 전수한 포스 수련법은 말 그대로 포스를 쌓는 것입니다. 마나를 수월하게 쌓기 위해서는 제가 언급했던 정신과 신체가 고르게 발달하고, 마나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야 합니다.”
“방법이 없는 겁니까?”
갑자기 바뀐 환경은 수련을 하기에 최고의 환경이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부분은 준성이 의도한 부분이기도 했다.
“물론 방법은 있습니다.”
“뭡니까?”
“포스 변환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준성의 입가에 상인의 미소가 걸렸다.
성공적으로 거래를 성사시킨 뒤, 집으로 돌아온 준성의 말을 들으며 세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준성은 정말 사악한 것 같아요.”
“사악하다니, 이문에 밝다고 말을 바꿔 주면 안 되겠어?”
“그래도요. 안 그래도 변환시킨 힘을 다시 바꾸는 데 큰 대가를 받다니요.”
준성이 A.O. 본부에 판매한 것은 ‘포스 변환기’라는 것으로, 일정한 양의 마나를 포스로 바꿔 주는 아티팩트였다.
이것을 이용하면 주변 일대를 포스로 가득 채워 인위적인 환경을 조성할 수 있게 되는데, 포스 수련법을 익힌 이들에게 있어 최적의 수련 환경을 제공한다.
하지만 세희가 사악하다고 말을 한 것은 대한민국을 뒤덮은 마나가 이미 포스에서 변환한 형태이기에 그렇다.
포스를 마나로 바꾼 뒤, 다시 포스로 바꾸는 방법을 제공해서 팔아먹는다? 김기정이 알게 된다면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었다.
“서로 만족스러운 거래였을 뿐이야.”
“조금 사악하긴 하지만 이로 인해 A.O. 본부는 완전히 준성을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까요. 충전이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정기적인 충전까지 받게 하다니, 참 대단한 것 같아요.”
“가볍게 응용을 해봤을 뿐이야.”
포스 변환기는 세 달마다 준성의 충전이 이루어져야 정상적인 가동이 가능했다. A.O. 본부가 혹여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대책이었다.
“그나저나 대가는 만족스러웠나요?”
“물론. A.O. 본부에서도 큰 출혈이 아니니까.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자화자찬할지도 모르지.”
포스 변환기 제공의 대가로 준성은 A.O. 본부의 목줄을 걸어놓고 동시에 금탑을 세우기 위한 사전 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전역에서는 우수한 능력자를 선발하기 위한 정기적인 검사가 이루어진다. 그 과정에서 준성이 원하는 몇 가지 재능을 보인 이들의 명단을 확보할 생각이었다.
능력자가 되기에는 부족하고, 기운의 반응에는 민감한 자들.
마법사의 자질을 가진 이들이다.
“이나의 말을 받아들여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준성이 미소 짓자, 세희도 마주 미소를 지었다.
미국 A.O. 본부의 수중 몬스터 필드 토벌은 각국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들의 활약으로 봉인되어 있던 해로를 다시 이용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반응은 오랫동안 이어지지 못했는데, 수중 몬스터 필드가 사라졌으나 탑의 붕괴로 인해 바다 가득 번져 나간 포스가 바다 생명체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이다.
우선 수중 몬스터의 통제를 벗어난 바다 몬스터가 1차적인 문제로 대두되었다.
자이언트 옥토퍼스나 크라켄처럼 재앙에 가까운 형태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곳곳에 출몰하여 괴롭혔다.
국제 능력자 연맹에서는 수중 몬스터 필드가 파괴되면서 남은 힘의 여파가 이어지는 거라 설명했다.
몬스터의 출몰은 필연적으로 능력자의 동행을 요구했고, 이는 각국 A.O. 본부의 영향력 강화로 이어졌다.
“대한민국에 변화가 있었습니까?”
수중 몬스터의 습격을 방지하기 위해 한동안 바삐 움직이던 더글라스에게 보고서 한 통이 올라왔다.
의아함이 담긴 그의 목소리에 톰슨이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예, 처음에는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본부장님께서 수중 몬스터 필드를 정벌할 당시 탑이 붕괴하면서 발산된 힘과 거의 유사했습니다.”
“필드가 소멸하고 거대한 힘의 폭발이 이어졌다. 그리고 여태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힘이 대한민국을 뒤덮고 있다는 것인데.”
“저는 그가 뒤에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김준성입니까?”
“예, 이런 일을 벌일 존재는 그밖에 없습니다.”
정부의 거센 반발을 무시하고 대담하게 일을 벌일 인물은 김준성밖에 없었다. 김기정도 뛰어난 인물이지만 이렇게 무모한 성격은 아니었고.
한동안 침묵을 지키며 보고서를 바라보던 더글라스가 대답했다.
“조만간 대한민국을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힘이 있는 곳입니다.”
“그 정도는 상관없습니다. 대한민국 A.O. 본부나 김준성은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협력해 온 우군입니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 그들의 도움이 필요한 만큼 확실하게 도움을 받아 낼 생각입니다.”
“최선을 다해 보좌하겠습니다.”
“이번 수중 몬스터 일과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일들은 몇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에 대해 연구하도록 하고 자세한 원인을 규명하도록 하십시오.”
“예!”
힘이 실린 톰슨의 대답에 더글라스는 만족한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포스 변환기로 A.O. 본부를 옭아매는 데 성공한 준성은 뜻밖의 상황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5호였다.
“충성을 바치겠다니, 무슨 뜻으로 봐야 합니까?”
“저는 더 이상 어디에도 갈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큰 야망을 품고 있었지만 제 역량의 한계를 절감한 이상, 제 꿈을 위해 살고자 합니다.”
“그 꿈이 뭡니까?”
“제 검술을 완성하고 싶습니다.”
요 며칠 사이 엘리엔과 이나, 둘과 대련을 했다는 말은 충분히 듣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뜻이었는데, 그게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기에 준성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겨 들었다.
“단지 그것뿐입니까?”
“제가 이기적인 요구를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제 검술을 완성하기 위해 이곳에 모든 걸 바치고자 합니다. 절 받아주십시오.”
고민에 빠진 준성의 눈에 저 멀리 윙크를 하고 있는 이나의 모습이 들어왔다.
어서 받아들이라는 듯, 재촉하는 걸 보며 다른 생각이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밝은 표정을 지은 그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무슨 생각이야?”
희희낙락하며 돌아간 5호를 뒤로하고, 준성이 이나를 보며 의문을 드러냈다.
잠시 쉬다가 돌아가는 것 정도로 생각하던 그의 합류는 여러모로 의아한 구석이 많았다.
“준을 위해서죠. 저 사람이 앞으로 금탑의 매직 나이트 수장 역할을 충분히 해줄 수 있을 거라 봤거든요.”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겠지. 그런데 내가 물어본 부분은 그게 아니란 걸 알 텐데?”
“그야 뭐, 사실 금탑이 잘되길 바라며 여러 가지로 노력을 하고 있었어요!”
머뭇거리다가 이내 당당하게 외치는 모습을 보며 준성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잘못을 한 게 아닌데 뭘 그렇게 목소리 높여.”
“혼내려는 게…… 아니었어요?”
“혼내긴. 그동안 내가 못 미더운 모습을 보였나 싶어서 생각을 좀 해본 거야. 딱히 그런 건 아니니 금탑을 위한 이나의 행동이었지?”
“물론이죠.”
“그거면 됐어. 일단 여러 방면으로 살펴봐야겠지만 이나나 리엔의 안목을 무시하지 않으니까. 그 정도 되는 인물이 매직 나이트 수장이 되어 준다면 계획도 더 수월해질 거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모처럼 생각이 일치한 둘은 서로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 ☆ ☆
대한민국이 제주도 몬스터 필드 소멸이라는 몸살을 앓고 있을 무렵, 보이지 않는 경제의 이면에서는 또 다른 몸살을 앓는 중이었다.
엘리미스라는 브랜드를 내세워 사업의 확장을 꾀했지만 N그룹의 예처럼 대기업이나 정부가 눈독을 들이는 경우가 많았기에 더 이상 전면에 나서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준성이었다.
하지만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T그룹을 내세우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대한민국 재계 꼭대기 위에 군림하는 그들의 존재만으로 강력한 압박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언론의 영역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움직인 그들은 몇 개의 기업을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
그 덩치가 워낙 크기에 사실이 알려졌지만, 그걸 가지고 크게 문제 삼는 이는 없었다.
배후에는 T그룹 회장인 정기정이 아닌 준성이 있었다.
“타이탄을 만들 거야.”
“……타이탄이요?”
“그래, 믿을 만한 사람도 필요하지만 내 명령을 충실히 따라 줄 타이탄의 필요성을 느꼈거든.”
눈을 동그랗게 뜨는 여인들에게 준성은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의 든든한 호위이자, 최강의 나이트 골렘으로 이름을 높였던 골든 나이트(Golden Knight)는 무수히 많은 위기의 상황을 함께 겪어온 존재였다.
차원을 넘어오면서 골든 나이트와 종속 계약을 끊었지만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이곳에서 다시 한 번 골든 나이트의 존재를 찾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내가 원하는 형태의 골렘을 만들기 쉽지 않겠지만 대량의 금속을 취급하는 곳이라면 어렵지 않을 것 같아.”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에요. 하지만 쉬운 작업은 아닐 텐데…….”
세희가 우려 섞인 눈으로 준성을 바라보았다.
그가 골든 나이트의 필요성을 느끼는 건 당장 필요한 전력을 갖추기 위함인데, 처음 만들 당시 제작에 소모된 시간이 만만치 않았었다.
그 과정에 시행착오가 섞여 있다고 하나, 그랜드 마스터에 준하는 무위를 발현할 수 있는 골든 나이트의 제작은 어려운 일이었다.
“일단 제작해 본 경험이 있으니 부딪쳐 봐야지.”
“시간은 어느 정도로 잡고 있나요?”
“빠르면 반년, 길게는 2년 정도?”
“……가능할까요?”
“해봐야지. 그때는 6클래스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10클래스잖아? 어쩌면 더 강한 골든 나이트가 탄생할지도 몰라.”
염려 섞인 세희의 표정에 준성은 짐짓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 이면에 여러 가지 불안 요소가 있다는 걸 그도 모르지 않았다.
이번에 인수한 회사에서 골든 나이트의 동체를 완성한다고 해도, 그곳에 마법진을 그려 넣고, 연결 고리를 만들어 중첩시키는 작업은 클래스 수준에 상관없이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일 수 있는 에고(Ego)를 만들어야 하며, 이는 주변 환경에 큰 영향을 받게 된다.
어디 그뿐인가. 골든 나이트의 무기였던 골든 소드와 골든 피닉스, 룬 블레이드 등, 그랜드 마스터와 대마법사를 상대로 대등하게 맞설 수 있었던 무구들도 제작해야 한다.
빠르면 반년이라고 했지만 이는 희망사항이라는 걸 준성도 알고 있었다.
“골든 나이트 문제는 그 정도로 하자고. 그나저나 리엔은 표정이 왜 그렇게 어두워요?”
“응? 아, 아무것도 아니다.”
지목 당하자, 화들짝 놀라는 그녀를 보며 모든 이들의 눈이 가늘어졌다.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상, 지금 반응은 충분히 수상했다.
“재촉하지 않을 테니 말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말해 주세요.”
“고맙다.”
“천만에 말씀을.”
“…….”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기는 모습을 보며 타나에 대한 언급을 하고 싶은 엘리엔이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타나는 자신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받아넘기고, 그 여파마저도 흘려내는 경지는 상식의 수준을 확실하게 뛰어넘고 있었다.
‘내 생각이 맞다면?’
그것도 또 다른 문제가 될 수 있다. 아직 머릿속으로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기에 일이 바쁜 준성에게 함부로 꺼내 놓을 수 없었다.
“일단 골든 나이트 제작은 나 혼자서 손이 부족하니 세희가 도와줬으면 해.”
“그럴게요.”
“그나저나 이걸로 또 신세를 졌네.”
골든 나이트 제작을 위해 움직여 준 T그룹의 정기정을 떠올리며 준성은 어깨를 으쓱했다.
전쟁에서 패한 뒤 지구로 이주한 드래곤은 오래전부터 세계 곳곳에 흩어져서 조용히 힘을 기르고 있었다.
끊임없이 발전을 거듭하여 신마저 자리에서 끌어내린 신족은 경계 대상이자, 같은 하늘을 두고 살아갈 수 없는 원수였다.
그럼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것은 개체 수가 부족했기 때문이고, 점진적으로 침략을 시도하는 신족을 차례대로 격파하기 위함이었다.
당장에라도 지구를 향해 침략을 개시할 듯하던 신족이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지닌 ‘권능’ 때문이었다.
세계의 질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이것은 그들에게 차원을 마음대로 넘나들 수 없는 제약을 가져다주었다. 이는 통합 차원에 존재하는 지구까지 지배하여 세상 위에 군림하는 종족으로 우뚝 서려는 계획에 큰 차질을 빚게 만들었다.
이렇듯 신족의 움직임이 늦춰졌지만 드래곤에게 주어진 시간도 많지 않았다.
개체 수는 부족했으며, 곳곳에는 그들의 계산을 어지럽히는 이레귤러가 존재했다.
김준성이라는 여행자는 드래곤에게 오히려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존재였다.
아군에 가까운 그는 넘어간다 치더라도, 어느 순간부터인가 세계를 헤집으면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악마’의 존재는 큰 변수로 부각되었다.
변수는 드래곤의 계획에 있어 불필요한 요소였다. 수면 아래에서 오랫동안 악마의 존재를 주시하던 그들이 내린 결론은 악마의 ‘제거’였다.
스파앗!
눈부신 빛이 사방을 뒤덮는 순간, 두 개의 인영이 어둠을 밀어내고 모습을 드러냈다. 찰나의 순간 걷혔던 어둠이 다시 드리웠지만 그 강도는 한없이 약화된 상태였다.
“여기까지다.”
사나운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는 이는 붉은 머리 청년이었다. 현재 미국에서 세계 최고의 모델로 활동 중인 마리오 디트리히, 그의 정체는 레드 드래곤 바스리엘이었다.
“네놈이 악마라 칭하는 녀석이라지?”
“들켜 버렸군.”
어둠이 일렁이며 주변을 뒤집어 삼킬 듯, 넘실거리자 바스리엘의 입매가 비틀렸다. 포위된 상황에서도 여유를 유지하는 태도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모르는 머저리로군.”
“그만 도발해라, 바스리엘. 지금 말다툼 따위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모르나?”
“흥! 이놈을 제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보를 캐내는 것도 필요하다는 걸 모르는 거냐, 카를로니안?”
“우리의 목적을 다 까발리는 상황에서 네 의도가 먹혀들고 있다고 보고 있지 않다.”
냉정하게 가라앉은 정기정의 목소리에 인상을 구긴 바스리엘이 뒤로 물러났다. 자신은 전투에서 힘을 보태기 위함이지, 이런 자리에서 필요한 정보를 캐내기 위한 게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뒤로 물러나며 대화할 분위기가 조성되자, 정기정의 눈이 어둠을 향했다.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나도 굼뜬 드래곤들이 직접 나설 줄 몰랐다. 이렇게 날 찾아온 이유가 뭐지?”
두 드래곤에게 포위되어 있지만 악마의 태도는 여유로움 그 자체였다.
그것이 허세가 아닌 자신감에 의한 것이란 게 느껴졌기에 정기정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지만 오늘 이 자리를 만들기까지는 엄청난 노력이 깃들어 있었다.
판을 엎으려면 끝까지 협상을 한 뒤 실행으로 옮겨도 늦지 않았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묻고 싶은 게 있다.”
“이런, 질문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질문이 아니라 심문에 가까워 보이는데. 무서워서라도 대답을 해줘야 할 분위기로군.”
“넌 누구지?”
어둠 너머로 인영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난 악마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어둠의 결정체.”
“내가 알고 싶어 하는 게 악마의 정의에 대해서가 아니란 걸 알고 있을 텐데.”
“너희들이 내 존재를 알아차리기에는 그 격이 너무 낮지 않은가. 자세히 캐묻고 싶거든 로드를 데려오던가.”
“언제까지 저 녀석이 지껄이는 걸 지켜볼 생각이지, 카를로니안!”
“…….”
분노에 가득 찬 바스리엘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지만 정기정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어둠을 주시했다.
“나는 네가 악마라 생각하지 않는다.”
“악마가 아니라면?”
“다른 초월적인 누군가가 악마를 사칭한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나쁘지 않은 가설이로군. 제법 내 흥미를 자극하는 데 성공했으니 높은 점수를 주지.”
“아무래도 우리가 원하는 대답을 해줄 생각이 없는 듯하군.”
“말하지 않았나? 내 존재에 대해 알고 싶다면 좀 더 ‘격’에 어울리는 이를 데리고 오라고. 아쉽게도 너희들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군.”
“카를로니안!”
분노에 찬 바스리엘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는 순간, 정기정도 다른 방향으로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아무래도 힘을 써서 원하는 대답을 듣는 게 더 빠르겠군.”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아니었나?”
쏴아아아!
두 드래곤과 한 악마의 존재감이 주변 공간을 가득 채워나갔다.
권능의 제약에 걸린 신족이 지구로 넘어오지 못하는 것처럼 대기의 포스가 풍부하지 않은 지구에서 드래곤은 온전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래서 더더욱 신족의 눈을 피해야 했고,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했다.
길게 이어지고 이어진 연구 끝에 드래곤들은 모든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아내게 되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축적한 포스를 일시에 터뜨려 주변 일대를 그들의 모든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으로 조성하는 것이었다.
시간의 제약이 존재하는 극약 처방이었지만 그 공간, 그 시간 내에 드래곤은 무적에 가까운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정기정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바스리엘은 지체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환경을 조성했다.
잔뜩 농축된 포스가 공간에 퍼져 나가면서 얼마 전까지 느낄 수 없던 충만함이 전신을 채워 나갔다. 바스리엘과 정기정의 얼굴에 자신감이 서렸고, 드래곤에게 주어진 권능, 용언(龍言)을 발휘하여 악마를 압박해 나갔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오만이란 걸 깨닫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걸 방법이라고 가져온 건가? 어리석군, 어리석어! 키키킥!”
“이런 말도 안 되는…….”
연신 용언을 구사하며 악마를 압박하던 정기정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뒤로 밀려난 바스리엘의 표정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그만큼 현재 상황은 그들의 머리로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비틀려 있었다.
처음에는 용언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본색을 드러냈다. 그 과정에서 주변에 퍼져 있는 포스가 악마의 기세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이는 드래곤조차 할 수 없는 최강의 ‘권능’ 중 하나였다.
존재의 한계를 초월하여 오롯이 군림할 수 있는 권능은 수호자를 자처하던 그들조차도 해낼 수 없는 것이다.
한순간 모든 포스가 악마의 손 아래 떨어졌고, 용언은 위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하던 게 이 정도였나? 하찮군, 하찮아. 드래곤들이 숨어서 준비한 것이 고작 이거라니.”
그의 웃음소리가 짙어질수록 정기정과 바스리엘이 느끼는 패배감은 커져 갔다. 악마가 막 손을 뻗어 움직이려는 순간, 한줄기 목소리가 그들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만하지.”
견고한 결계가 펼쳐져 있었지만 안으로 진입한 이가 있었다. 고개를 돌린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익숙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더 이상의 충돌은 무의미한 것 같은데.”
결정적인 순간을 제지하고 나선 것은 바로 준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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