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209)
제89장 완 제이드
대한민국 A.O. 본부와 중국 A.O. 본부의 정식 협력이 체결되었다.
외부로 언급되지 않은 이 내용은 국제 능력자 연맹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는데, 단순히 북한의 영토 문제만을 놓고 논의된 것이 아니었기에 그 여파가 클 수밖에 없었다.
처음 대한민국 A.O. 본부의 제안을 받은 중국 A.O. 본부는 격렬하게 반발했다.
자신들이 원하는 건 포스 운용법이 맞지만 그 방법이 다른 이들에게 주어지는 건 원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김기정은 강경하게 주장을 하면서 단지 중국만이 아닌 모든 인류를 위한 거라는 대의명분을 내걸었다.
이는 중국 측으로 하여금 함부로 다른 말을 꺼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북한 문제를 걸고 넘어가는 것은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현재 상황에서 장기적으로 좋지 못했다.
원하는 걸 얻어내는 게 최선이었고, 그것이 포스 운용법이었는데 전 세계에 공개할 거라 하니 계산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다른 제안이 흘러나왔고 바로 중국 A.O. 본부가 국제 능력자 연맹에 공개하는 시기보다 한 달 먼저 포스 운용법을 얻어가는 것이다.
이에 중국은 처음 반년을 요구했지만 김기정은 한 달을 고수했고, 치열한 협상 공방 끝에 두 달 뒤 공개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이러한 사실이 국제 능력자 연맹을 통해 전해지면서 각국 A.O. 본부는 앞을 다투어 대한민국 A.O. 본부에 감사의 인사를 전달했다.
처음에는 포스 운용법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몰랐지만 대한민국 A.O. 본부에서 제출한 서류에 의하길, 포스는 능력자들에게 힘의 원천인 능력을 발동하는 힘이며, 운용법으로 몸 내부에 포스를 갈무리할 경우 그 위력이 몇 배 더 강해진다고 적혀 있었다.
가뜩이나 몬스터 웨이브가 잦아지고 흉포함이 더해가면서 어려움을 겪던 그들에게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두 달을 견뎌야 하는 조항이 있었지만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이런 중요한 비기를 전수받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각국의 반응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군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쓴웃음을 짓는 더글라스를 보며 톰슨이 근심 섞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대로 두고 보실 생각입니까?”
“별수 없지 않습니까? 우리의 비기를 내놓을 수 없는 한 인지도가 깎여 나가는 것은 감수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추세라면…….”
“잠깐의 인기일 뿐입니다. 인접국인 중국이나 일본도 저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멀리 떨어진 국가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도 그뿐입니다. 패권은 여전히 우리가 쥐고 있다는 걸 잊지 마시길.”
냉정한 그의 말에 멈칫한 톰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예, 최대한 냉정하게 사태를 바라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들이 공개한 포스 운용법을 연구하도록 하십시오. 우리 것과 비교해서 장점을 취합할 수 있다면 좋을 것입니다. 당분간 대한민국이 모든 관심을 독차지하도록 두지요.”
“예!”
고개를 숙인 톰슨이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더글라스는 돌발적인 김기정의 행동으로 복잡하게 꼬인 판을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지 생각에 잠겼다.
“그런 의인이 싫은 건 아니지만 두 개의 태양이 떠오를 수 없는 법. 부디 본인이 그 사실을 알고 자중해 줬으면 좋겠는데…….”
의미심장한 중얼거림과 함께 조용히 눈을 감으며 생각에 잠기는 그였다.
성녀가 된 세희는 날이 갈수록 발산하는 후광이 강해지면서 면역이 없는 일반인들은 감히 얼굴을 바라보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이에 준성은 우려를 나타냈으나, 아직 힘의 운용이 익숙하지 않다는 세희의 말에 걱정을 집어넣어야 했다.
신과 소통을 나누며 점점 나아지는 모습을 보면서 준성도 안도했다. 신에게서 확답을 얻은 이상, 순조롭게 회복을 한다면 이보다 더 든든한 아군은 없을 것이다.
세희에 대한 문제를 접어둔 준성은 모처럼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이나에게 잠시 넣어 두었던 화제를 다시 꺼내 들었다.
“권능이요?”
“맞아, 이번에 감사의 의미로 권능을 받았어.”
“이게 신의 힘이라는 거죠? 손에 넣기만 하면 신의 능력 하나를 얻을 수 있다는 게…….”
찬란하게 빛나는 구체를 바라보며 이나는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보는 것만으로 사람을 홀려 버리는 지독한 매력은 그랜드 마스터인 그녀조차도 쉬이 떨쳐 버리기 힘든 것이었다.
“이걸 얻어 힘에 접목시킬 수 있다면 신족은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을 거야.”
“지금으로는 부족한 거예요?”
“개인의 무위라면 충분히 가능해. 하지만 권능을 발현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져.”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를 했지만 이나는 쉬이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준성은 확신이 담긴 어조로 그녀에게 말했다.
“열심히 수련해도 부족한 게 있나 보네요. 이제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신족이 지닌 권능이 무언지 알지 못하니까. 상성이 맞지 않으면 정말 위험할 수 있어.”
“그래도 썩 내키지 않아요. 권능을 얻게 되면 힘에 취할 것 같기도 하고…….”
가장 우려하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다. 힘이란 건 마약보다 더 취하기 쉬운 것이어서 강한 힘을 쉽게 손에 넣으면 그다음엔 다른 사람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강자의 오만은 힘의 권리를 무분별하게 휘두를 때 나오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것도 좋아.”
“그럴게요. 그래도 생각이 바뀔 것 같지는 않아요.”
세희와 달리 이나는 자존심이 세고, 자신이 이룩한 경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랬기에 준성이 신족에 대해 설명을 해도 이해를 할지언정 마음 깊숙한 곳에서 쉬에 납득을 하지 않았다.
이는 직접 겪어보기 전까지 해결되지 않을 문제였다.
난감한 표정을 짓던 준성은 멈칫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이나에게 말했다.
“그럼 한번 시험을 해볼래?”
“시험이요?”
“얼마 전에 이곳을 염탐하기 위해 신족이 접근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잖아.”
“네, 지금도 염탐을 하고 있나요?”
“굉장히 신중한 성격이야. 그만큼 철저하게 우리를 분석하고 있다는 이야기고. 한번 상대해 보면 내 말이 어떤지 확실하게 알 것 같은데.”
“준이 그렇게 말한다면 저는 좋아요.”
그 전까지 가만히 둔 것은 확실한 정체가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가 될 때마다 강적 하나를 줄여 놓는 것이 준성에게 이득이었고, 이나와 힘을 합친다면 상대하는 것은 훨씬 수월해진다.
“이동한다.”
“네!”
스파앗!
둘의 몸을 휘감은 빛이 사방을 뒤덮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완 제이드에게 명령을 받은 뒤, 대한민국을 감시망에 놓은 론 샤레인은 철통과도 같은 저들의 영역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외부와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었기에 포스가 아닌 새로운 형태의 힘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직접 잠입하는 수밖에 없군.”
방법이 나왔음에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는 안쪽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이곳은 신족인 자신조차도 함부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존재가 살고 있다.
인간으로서 그 무위가 신족에 버금가는 사실이 믿기 힘들지만 그 뒤로 잔존하는 반란군이나 드래곤이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완 제이드가 원하는 것은 완벽한 정보였다. 확실한 정보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만큼 그 책임은 고스란히 자신이 뒤집어쓸 것이다.
“……!”
슈아악!
순간 뒷덜미가 싸해지는 느낌을 받은 론 샤레인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그대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이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검을 들고 있는 여인과 멀리 떨어져 있는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인간 너희는…….”
론 샤레인이 입을 열려고 했지만 여인의 음성이 먼저 흘러나왔다.
“생각보다 강한 것 같지 않은데요?”
“그 말은 상대가 진심으로 임한 다음 해야 할 말이야.”
“그래요? 잘 모르겠는데.”
그러면서 자신에게 고정된 여인의 시선에 론 샤레인이 표정을 굳혔다. 오래전에 패배하여 가축과도 같은 인간이 자신의 힘을 놓고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모욕이었다.
“이곳을 영지로 만들어 놓은 인간이군.”
“그런 건 모르겠고, 한번 붙어보자! 얼마나 강하면 준이 상대하기 어렵다는 말을 하는지 겪어 봐야겠어.”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신족에 대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이나는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검을 휘두르며 쇄도했다.
파바밧!
허공에 부채꼴로 휘둘러진 검격이 수십 개로 나뉘며 론 샤레인을 압박했다.
푸른 오러가 화려하게 허공을 장식했다. 그에 론 샤레인이 양손을 내밀자, 찬란한 빛이 서리며 강렬한 회전을 일으킨 뒤 검격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꽈광! 꽝! 꽝!
이나가 펼친 공격이 모조리 무산된 틈으로 한 줄기 빛이 파고들었다.
호흡을 정확하게 빼앗는 일격이었지만 이나는 가볍게 상체를 뒤트는 것으로 피해 냈다. 그리고 검을 던지듯 오러 파이어를 시전하여 거리의 제약을 단숨에 지워 버렸다.
까앙!
“큿!”
양손을 교차하며 빛의 장막을 펼쳤지만 오러 파이어에서 전해지는 충격이 만만치 않았다. 신음을 흘리며 뒤로 밀려나는 론 샤레인을 향해 이나의 검이 연이어 검격을 퍼부었다.
순백의 빛과 푸른 오러가 얽히며 요란한 폭음이 사방 가득 뒤덮었다.
론 샤레인이 구사하는 빛의 힘은 이나의 오러와 비등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몇 차례 공격에서 기선을 제압했지만 쉽사리 주도권을 쥐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눈앞의 신족은 충분히 자신이 상대할 만했다.
“흥! 별거 아니네.”
“인간!”
이나의 말에 분노한 론 샤레인이 양손을 펼쳐 손가락을 뻗었다. 열 줄기 빛은 이나의 전후좌우 위아래 모든 대각 방향을 봉쇄했다.
“흡!”
콰콰콰콰!
기합을 터뜨리는 순간 강렬한 기세가 주변 공간을 장악해 나갔다. 그랜드 마스터의 비기가 펼쳐지면서 주변 일대 힘의 흐름을 바꿔 나갔다.
그에 따라 빛의 줄기가 약해지면서 이나의 검에 허망하게 막혀 버렸다.
“본신의 힘은 별거 아닌데.”
“잘못된 생각이란 걸 깨닫게 해주지.”
론 샤레인도 눈앞의 인간이 그동안 자신들에게 무기력하게 지배당하던 인간이 아니란 걸 알아차렸다. 강적을 향해 자신의 힘을 아낀다면 어리석은 신처럼 허망하게 무너질 수 있었다.
마음가짐이 바뀌는 순간 공기의 흐름도 달라졌다.
그것을 눈치챈 이나가 신중한 표정으로 검을 운용하려고 했지만, 첫 충돌이 일어날 때 얼굴 가득 경악이 번져 나갔다.
퍼엉!
“꺄아악!”
빛줄기와 충돌하는 순간 무시무시한 폭발이 일어나면서 그 충격이 고스란히 손아귀에 전해진 것이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난 그녀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방금 전 폭발이 어떤 원리로 일어난 것인지 머리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사정을 봐줄 론 샤레인이 아니었다. 이나를 확실하게 제거하기로 마음먹은 뒤 신에게서 취한 권능, 흐름의 조절을 펼쳤다.
그 강력함은 미약하기 그지없으나 응용력과 결합된 권능은 충돌할 때 모든 힘의 여파를 상대에게 몰아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온전히 통제하는 것은 론 샤레인, 그밖에 없다.
퍼엉!
“흐윽!”
한 번의 충격을 받은 이후 오러 파이어로 최소화하려고 했지만 손을 떠난 충돌에서도 느끼는 것은 비슷했다.
의지로 이어진 끈을 타고 전해지는 충격은 오히려 육체가 감당하는 것보다 더 큰 타격을 주었다.
단 두 번의 권능 발현이었지만 그것만으로 론 샤레인은 확실한 우위를 잡았다.
“이제 끝이다.”
입꼬리를 말아 올린 그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이나를 향해 접근하려던 순간, 뒤에서 들려온 음성에 멈칫했다.
“여기까지 하지.”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지 마라.”
권능을 발현하는 순간, 누구도 다가올 수 없었다. 가볍게 휘두른 빛의 폭풍과 충돌하면 그 여파는 고스란히 상대가 뒤집어쓴다.
“충격의 흐름을 조종하는 권능이라니, 신기한 것도 많군.”
작게 중얼거린 준성은 블링크를 시전하여 공격을 피한 뒤 바로 앞에 도달하여 손을 뻗었다. 이글거리는 청염의 헬 파이어가 론 샤레인을 강타했다.
“꺄아아아아!”
지옥 끝에서 올라온 불꽃이 전신을 잠식해 나가자 공간이 찢어질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충돌 자체를 일으키지 않으면 되겠지.”
가장 간단한 방법이지만 그것을 실행으로 옮길 수 있는 이는 몇 되지 않았다.
준성도 약점을 꿰뚫어 볼 수 있었던 것은 이나가 두 차례 공격을 받아내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청염의 헬 파이어에 괴로워하는 론 샤레인을 보며 준성은 허공에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붉은빛 다이아몬드가 빛을 뿌리며 화살 형태로 바뀌었다.
제련제강의 마법으로 펼쳐진 다이아몬드 화살은 단숨에 공간을 격하고 론 샤레인의 심장을 꿰뚫었다.
파사사!
최강의 화살에 적중당한 몸은 그대로 유리처럼 깨져 버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준성은 힘이 풀린 듯 몸을 축 늘어뜨린 이나를 부축했다.
“늦게 도와줘서 미안. 난 이나가 이길 줄 알았어.”
“아니에요, 제가 무모했어요. 미안해요.”
론 샤레인이 권능을 발현하고 두 차례 충돌을 일으키기까지 한 호흡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그때까지 압도적으로 밀어붙이고 있어서 준성은 이나가 승리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돌아가서 이야기하자. 할 이야기가 많으니까.”
“네…….”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 그녀를 안아 든 준성이 공간 이동 마법을 시전했다.
빛에 휩싸인 그들이 사라진 자리는 조금 전 충돌을 유추할 수 있는 처참한 광경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 ☆ ☆
준성과 이나가 사라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주변 일대에 광휘가 드리우더니 인영 몇이 차례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숫자는 총 네 명이었는데, 거대한 체구의 소유자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면서 주변을 둘러보더니 안타까운 듯 입맛을 다셨다.
“당해 버렸군, 어리석게도.”
권능의 발현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던 신족에게 감지가 될 만큼 큰 파장을 일으켰다. 대신족인 완 제이드를 비롯하여 몬스터 필드를 운영하는 모든 신족이 모여들었을 때는 대결의 결과가 나온 상황이었다.
“론 샤레인도 제법 쓸 만한 녀석인데 당해 버렸다는 건 상대의 실력이 그만큼 만만치 않다는 건가.”
신족의 안위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는 신과 드래곤뿐이라고 생각했던 상식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짧은 순간이지만 주변을 살펴본 결과 일어난 폭발의 여파는 신, 드래곤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직접 들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한 걸음 앞으로 나선 신족이 넌지시 권유했다.
“기회를 주자는 건가, 엘 카즈?”
“예.”
“좋다, 네 권능을 발현하도록.”
허락이 떨어지자 한 걸음 앞으로 나선 엘 카즈는 왼손을 뻗어 허공에 시계 반대 방향으로 원을 그렸다.
그러자 그가 가리킨 일대 공간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처참하게 망가져 있던 풍경이 조금씩 녹음이 우거진 환경으로 바뀌더니, 부서진 바위 파편이 모여들어 제 형태를 갖췄다. 유리처럼 부서졌던 론 샤레인의 몸이 하나둘씩 모여들더니 이내 제 모습을 회복했다.
쿠웅!
완 제이드가 손을 뻗자, 소멸되지 않았던 론 샤레인의 권능으로 기운이 스며들었다. 곤히 자고 있던 그녀가 살며시 눈을 떴다.
머릿속으로 기억의 조각이 모여드는 순간, 론 샤레인이 완 제이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면목 없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돌아가서 듣는다. 네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저도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아주 많습니다.”
허망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순간을 떠올리며 론 샤레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
집으로 돌아온 뒤, 준성과 이나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특히 신족을 상대할 만하다고 여기다가 된통 당한 이나는 입이 열 개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면 그것을 인정하는 용기도 필요한 법이었다. 인정하기 싫고,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지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으로 삼기 위해서는 필요한 과정이었다.
“준의 말이 맞았어요,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요.”
“미안, 이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신족을 압도하는 이나의 무위를 보면서 그녀라면 충분히 승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최악의 패배였다. 짧은 순간 발현된 권능은 그녀를 단숨에 궁지로 몰아넣었다.
“저, 권능 얻고 싶어요.”
“진심이야?”
“제 무위로 감당하기 힘들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요. 이번에 상대한 것도 신족 중에는 약한 축에 속하죠?”
“……아마 그럴 거야.”
“그럼 선택지가 없네요. 저도 제 힘으로 상황을 타개하고 싶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고요. 다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좋을 대로 해. 권능은 내게 있고, 그걸 받아들이는 건 이나의 의지니까.”
“네, 그럼 오늘은 좀 쉴게요. 피곤하네요.”
신족에게 입은 타격은 크지 않았지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입은 피해는 만만치 않았다.
눈을 감고 휴식에 빠져든 그녀를 보며 준성은 조용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과연 이게 어떤 영향을 끼칠는지.”
손안에서 찬란한 빛을 뿌리고 있는 권능을 보며 준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쁘지 않네요.”
강렬한 기운이 사방에 휘몰아치다가 마치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간단한 손가락 움직임 하나만으로 그것을 신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축하드립니다.”
지켜보던 크랙은 마음이 벅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신족에 의해 멸족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칼버족은 신이 소멸되지 않았다는 걸 알고 그를 보좌하며 종족의 명운을 걸었다.
격을 상실한 신은 짐에 가까웠고, 잘못 선택했다는 생각이 때때로 머릿속을 가득 채웠지만 꾹 참아내고 견디며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이제 그 결실이 맺히려고 한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시간뿐이네요.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앞으로 해줄 일은 많아요.”
“당연한 일입니다.”
“모든 게 수월하게 풀리고 있지만 느낌이 좋지 않아요. 단순한 기우이길 원하지만…….”
제 힘을 회복하지 못했다고 하나 한때 신이었던 그가 잘못된 예감을 느낄 리 없었다. 밝은 표정을 짓고 있던 크랙의 표정도 덩달아 딱딱하게 굳으며 반문했다.
“심각한 일입니까?”
“큰 화가 닥칠 것 같은 기분이에요. 최대한 주의하도록 하세요. 힘을 되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착각할 수도 있으니.”
“명심하겠습니다.”
기쁨을 느껴야 하는 상황에서 얻은 새로운 근심거리에 크랙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불안함은 곧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갑작스러운 다섯 명의 침입자는 칼버족이 오랫동안 공들인 지저 세계를 단숨에 뒤집어 놓았다.
찬란한 빛을 사방에 뿌리는 그들의 압도적인 힘에 칼버족들은 허망하게 쓰러졌다.
무의미한 저항으로 피해가 한도 끝도 없이 커지면서 침입자의 정체가 신족이라는 걸 알아차린 그들은 저항을 포기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피하셔야 합니다.”
“이게 무슨…….”
신족의 침공 소식을 전해 들은 신은 망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몇 남지 않는 권능으로 감춘 지저 세계는 신족이라고 해도 발견할 수 없는 은신처였다.
세계에서 이곳을 찾아내는 것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처럼 어려운 것으로, 한 지점을 정해 놓고 집중적으로 탐색을 해야 발견하는 게 가능했다.
그런데 신족이 이곳을 발견하고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침입까지 했다?
이는 동급인 신이라고 해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필시 내부에 조력자가 있다. 흐릿해졌던 눈에 초점이 맺힐 무렵, 피 맺힌 크랙의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정신 차리십시오! 지금은 피해야 합니다!”
“……이동하겠습니다.”
자세한 정황 파악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지저 세계의 핵심 인원과 함께 탈출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하여 비상통로 몇 곳을 준비해 둔 상황이었다.
별다른 제지 없이 비밀통로 안으로 들어섰고, 끝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신의 발걸음이 어느 순간 멈췄다.
호위를 하고 있던 칼버족들도 줄줄이 멈추며 의아한 기색을 띨 무렵, 음산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목소리가 통로를 울렸다.
“킥킥! 어딜 가시는 건지? 위대한 신이시여!”
“역시 네 짓인가?”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분노가 신의 얼굴을 지배했다. 자신 앞에 나타난 이를 보는 순간 흐릿했던 그림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이유는 눈앞의 존재 때문이었다.
“제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런 짓을 하라고 널 분리시킨 건 아니었는데…….”
순수한 어둠 그 자체. 그것이 악을 대변하지 않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신의 빛과 떼어 놓을 수 없는 게 바로 어둠이었다.
신족에게 패배하고 소멸의 위기에 처해 있던 신은 필사의 탈출 이후, 부서지기 일보 직전인 껍데기에서 내면의 분노와 함께 어둠을 배출했다.
그리고 부활하는 그 순간을 위해 ‘악마’라 이름을 붙인 존재에게 단독으로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그 결정이 이런 여파를 몰고 돌아올 줄이야.
“저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신이시여! 제 목숨이 신에게 달려 있는데 어찌 다른 속내를 품겠습니까?”
“…….”
신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화의 내용을 듣고 그가 신족을 불러들인 원인이라는 걸 알아차린 크랙이 분노하며 앞으로 나섰다.
“네놈의 간계 때문에 우리 동족들이…… 헉!”
말을 끝맺지 못한 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뿜어져 그대로 가슴을 향해 달려든 것이다.
반응 속도를 뛰어넘은 공격에 크랙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피슛!
“크으으!”
하지만 어둠은 크랙의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것으로 소멸했다.
중간에 개입한 신이 손을 뻗은 채 악마를 향해 일침을 날렸다.
“그는 나를 위해 일하는 충실한 존재다. 상처 입히는 건 용서치 않겠다.”
“제법 강해진 것 같습니다, 신이시여!”
비웃음 섞인 목소리에 분노가 들끓었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어둠 그 자체인 악마에게 이 공간은 자신만의 영역이었다. 함부로 움직이는 순간 목숨을 잃는 건 순식간이다.
“이곳을 수습하도록.”
“그러기 위해 온 것입니다. 뒤는 제게 맡겨 주시면 됩니다. 제가 살기 위해서라도 신께서 무사히 살아 돌아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
신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악마를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지만 못 들은 척 자리를 벗어났다.
“……최악이야.”
자신이 뿌린 씨앗에서 피어난 절망의 열매를 본 신은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다섯 신족이 침공한 지저 세계는 짧은 시간에 완전히 폐허로 바뀌었다. 곳곳에 끝까지 저항하던 칼버족들이 시체로 늘어져 있었다.
“이대로 잡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엘 카즈는 더 이상 추격을 명령하지 않는 완 제이드를 보며 의문을 드러냈다.
“신의 존재를 확인한 걸로 충분하다.”
“예?”
“정보를 흘린 녀석은 우리 손으로 신을 제거하길 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녀석의 정보가 확실한지 확인하기 위해 이곳을 찾아왔지만 굳이 장단에 맞춰 춤을 출 필요는 없지.”
“그 말씀은…….”
“신이 존재한다는 걸 알리도록 한다. 우리 선에서 해결하기에는 너무 맛있는 먹잇감이 아닌가?”
완 제이드의 말에 휘하 신족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라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 신족에게 있어 도전할 수 있는 목표였고, 힘을 얻을 수 있는 보약과도 같았다.
더 강한 권능을 갈망하는 그들에게 있어 신이 이만큼 세력을 일굴 수 있는 힘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단지 자신들이 독점하지 못하기에 아쉬움을 느낄 뿐.
완 제이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그가 결정을 내린 이상, 이곳의 모든 상황은 그의 뜻대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돌아간다.”
그의 말을 따라 신족들은 더 미련을 두지 않고 자리를 벗어났다.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더 이상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문명의 형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10권에서 계속>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