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210)
10권
제90장 악마의 정체
갑작스레 멈춘 세희의 행동을 보며 준성은 직감적으로 불길한 느낌을 받고 질문을 던졌다.
“왜 그래?”
“……교감이 끊겼어요. 그분께서 위험해요.”
“신이?”
“네, 아주 좋지 않아요.”
적합자의 재능을 타고나서 성녀로 각성한 그녀는 언제 어느 순간에도 신과 교감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교감이 끊겼다는 것은 신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완전하게 끊어진 거야? 신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했고?”
“희미한 선은 남아 있어요. 그분께서 직접 조치를 취한 것 같은데, 좋지 못한 일이 벌어진 게 아닐까 싶어서 마음이 불편해요.”
“일단은 움직이도록 하자.”
“네.”
준성이 세희를 데리고 신이 머무는 지저 세계로 공간 이동을 시전했다.
하지만 마법이 펼쳐지는 순간부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전에 이 공간에 들어설 때는 신의 허락이 있어야 했지만 지금은 아무런 제지도 없이 들어가는 게 가능했던 것이다.
마침내 지저 세계에 모습을 드러낸 둘은 눈살을 찌푸렸다. 특히 처참하게 무너진 주변 환경에 세희는 입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이건 대체…….”
“습격을 받았군. 상대는 신족일 확률이 높고.”
“…….”
말을 잇지 못하는 세희를 보며 준성은 고개를 저었다. 철저하게 파괴된 도시와 죽어 있는 칼버족의 모습은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그분은 어떻게 찾죠?”
“희미하게 끈은 남아 있다고 했잖아. 그럼 어딘가에 몸을 피해 있을 확률이 높겠지. 우리가 찾는 것보다 상대가 찾아오길 기다리는 게 좋겠어. 무엇보다 지금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여.”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던 세희는 이내 포기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저도 제 자신이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조만간 연락이 닿을 거야.”
혼란스러워하는 세희를 보며 준성이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신과 다시 연락이 닿은 것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나고 나서였다. 꿈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는 전보다 확연하게 지쳐 보였다.
“괜찮으신 거죠?”
“안전한 곳으로 피했답니다. 잠시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초대해 주실 수 있나요?”
“네.”
고개를 끄덕여 수긍한 세희의 부름을 받은 준성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습을 드러냈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그의 기색을 본 준성이 질문을 던졌다.
“신족입니까?”
“맞아요.”
“그들이 어떻게 그곳을 공격할 수 있습니까? 분명 지저 세계는 탐색으로 찾아내기 어려운 곳입니다.”
“그 말도 맞아요. 제 권능으로 보호받는 지저 도시는 설사 대신족이라고 해도 찾아낼 수 없는 장소였어요. 그게 화근이 될 줄은 몰랐지만.”
“배신자가 있던 것입니까?”
눈을 가늘게 뜬 준성이 물었다. 그에 멈칫한 신은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신자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그와 저는 같은 뜻을 공유하고 있었으니까.”
“누구입니까?”
“그는…… 악마랍니다.”
“…….”
충격적인 사실에 이야기를 듣는 준성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오늘 그가 세희를 찾아온 것은 자신의 건재를 알리기 위함도 있지만 이면에는 준성에게 새로운 정보를 털어놓고 본격적으로 손을 잡기 위함도 있었다.
그만의 아지트였던 지저 세계를 잃고, 상당수의 칼버족이 목숨을 잃은 이상 앞으로 전개해야 할 전쟁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악재는 신족들이 자신의 무사를 알아차렸다는 점이다.
신마저 끌어내린 그들의 단합은 무서운 수준에 도달해 있었고, 권능을 얻으며 그 힘이 한층 강화된 신족들은 그가 단독으로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랬기에 준성의 힘을 빌리고자 했고, 줄 수 있는 대가는 숨겨 왔던 정보였다.
“신족에게 패배하고 격을 상실한 저는 큰 상심에 빠져 있었어요. 일개 종족에 불과했던 그들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고, 당면한 최악의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죠.”
가까스로 도망치고 존재를 유지하게 된 신은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절망에 빠졌다.
완벽한 존재로서 세계를 관조해 온 그에게 있어 평범한 존재로의 추락은 절망 그 자체였다.
“패배감과 절망, 분노는 제 안에 어둠을 만들어 냈어요. 제 안의 그 힘은 점점 크기를 키워 나갔고, 제정신을 차렸을 때는 존재를 집어삼켜지기 전이었죠.”
초월적인 존재인 신의 정신마저 잡아먹을 만큼 그의 안에 생겨난 어둠은 거대했다.
“저는 선택을 해야만 했어요. 이대로 어둠과 하나가 되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야 할지, 아니면 이 어둠을 배출하고 존재 자체를 유지해야 할지.”
“후자를 선택하셨군요.”
신 안에 생겨난 어둠이 만들어 낸 존재, 그가 바로 악마였다.
준성의 대답에 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제 안의 어둠은 스스로 자아를 생성하고 자의로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을 갖췄죠.”
악마는 또 다른 신의 일면이자, 가장 순수한 형태의 피조물이었다.
세상에 나오고, 피부로 현실을 느끼게 된 악마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신을 향한 경배였다.
“그는 제게 잃어버린 격을 되찾아 주겠다고 약속했어요. 제 안에서 만들어진 존재이기에 기꺼이 그를 믿고 힘을 갖출 수 있도록 도움을 줬죠.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여 순조롭게 힘을 키워 나갔어요.”
“하지만 힘을 얻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네.”
무겁게 가라앉은 신의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믿을 만한 동료였어요. 지저 세계에 은신처를 만들 수 있도록 협력을 했고, 칼버족을 소개시켜 준 것도 그였죠. 다른 누구에게도 말을 할 수 없는 비밀이었지만 악마라는 또 다른 제 자신을 누구보다 믿고 신뢰했어요. 하지만 그는…….”
전신에 치미는 배신감에 가늘게 몸을 떨고 있는 사이, 준성은 모든 정황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래서 아카식 레코드에 나오지 않았던 거로군.’
엄밀히 말해서 악마는 악마가 아니었다. 신의 존재가 낳은 어둠의 산물일 뿐.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악마가 되고자 한다면 아카식 레코드에 그 정보가 없을 리 없었다.
‘설마?’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 있었지만 준성은 서둘러 부인했다.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었지만 깊게 생각해 보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악마가 왜 배신을 한 겁니까?”
“저도 모르겠어요. 한 가지 분명한 건 저를 배신하려고 해도 쉬울 리 없다는 거예요.”
“무슨 뜻입니까?”
“그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을 생각하지 못할 만큼 저도 어리석지 않아요.”
순수한 어둠으로 이루어진 존재인 만큼 믿을 수 없는 면이 있었을 것이다.
자신감 넘치는 신의 모습에 준성은 본론을 꺼내 들었다.
“제게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드래곤을 만나고 싶어요.”
“으음!”
신의 제안에 준성은 저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왜 거절하신 거예요?”
대화가 모두 끝난 뒤, 세희는 의문 섞인 눈으로 준성을 바라보았다.
지저 도시와 칼버족을 잃은 신은 뒤를 받쳐 줄 세력이 시급했고, 자신을 보좌해 줄 수 있는 이들로 드래곤을 지목했다.
신에게 있어 당연한 선택이었지만 준성에게 있어 그 부분은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드래곤을 원하는 선택은 나쁘지 않아. 하지만 그 입장은 어디까지나 신에게만 통용될 뿐, 우리에게 떨어지는 이익은 없어.”
“이익이요? 하지만 그분께서 신족을 상대하실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익 아닐까요.”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이면의 상황이 복잡해. 정확하게 말하자면 드래곤들이 신의 존재를 깨닫고 진심으로 반겨 줄지 확신할 수 없거든.”
“네?”
“신은 드래곤이 신족과 전쟁을 벌이고 패했을 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어. 세계의 관조자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이 멸족당하는 걸 지켜보기만 한 신에게 호감을 가질까? 오히려 별다른 힘도 지니지 못하기에 짐으로만 여길 수 있지.”
“아…….”
준성의 말에 깃든 의미를 알아차린 세희는 나직이 탄성을 흘렸다.
신은 드래곤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기에 그들과 접촉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이는 굉장한 오산이었다.
세계의 수호자 노릇을 자처하던 드래곤은 오랜 세월 동안 신을 대신하여 많은 일을 처리했다.
하지만 신족과의 전쟁에서 패할 때 신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이는 신에게 호감을 느끼기는커녕 분노를 사도 모자라지 않은 행동이었다.
“한 번 이야기는 해볼 거야. 그런데 과연 좋은 이야기가 나올까?”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네요.”
“때로는 서로 모르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우선 그쪽의 의중을 떠보고 확답을 주는 것이 좋을 거야.”
“네, 확실히 그게 낫겠네요.”
확실하게 상황을 인지했지만 세희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지저 도시를 잃은 뒤, 신과 칼버족은 비밀리에 준비해 놓은 은신처에 머물면서 전열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신족의 공격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없었던 탓에, 절반 이상의 칼버족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들을 이끌고 있는 크랙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그에게 모든 진실을 말해도 괜찮은 겁니까?”
“가장 중요한 건 밝히지 않았어요. 이 정도는 충분히 공개해도 괜찮아요.”
“그래도…….”
상황은 최악으로 기울고 있었다. 신의 존재를 알게 된 신족들은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나올 것이기에 크랙으로서는 안정적인 기반을 만드는 걸 보고 싶었다.
하지만 매정하게도 신은 그의 생각을 모르는지 위험천만한 줄타기만 할 뿐이었다.
“그는 거절했지만 조만간 드래곤과 만남을 가질 생각이에요.”
“드래곤? 그들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까?”
“지구로 몇몇이 도망친 걸로 알고 있어요. 그의 태도를 봐서 연결점이 있는 것도 확인했죠.”
“그들과 손을 잡을 수 있다면…….”
신족과 대등하게 전쟁을 치렀던 드래곤이라면 큰 힘이 될 것이다.
밝아지는 크랙의 표정에 신은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드래곤과 제가 좋은 관계를 맺기 힘들 거라 보고 있더군요. 분명 드래곤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던 제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도 모르는 게 있어요. 세계의 맹약이라는 건 차원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드래곤의 힘을 얻는다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건 김준성 그의 존재예요. 그는 거대한 힘을 품고 있지만 앞으로 나서려고 하지 않아요. 하지만 앞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닥친다면 어떨까요?”
“……가능한 겁니까?”
크랙이 본 김준성은 인간이면서 인간 같지 않은 무위를 지녔으며, 지독할 정도로 자신의 주변과 이익을 추구하는 인물이었다.
그와 엮이면서 절대 이익을 거두지 못한 만큼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고개가 저어질 지경이었다.
“어렵겠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에요. 그가 끝까지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한다면 저도 제 이익만을 추구하는 게 최선이겠죠.”
“…….”
신의 입가에 걸린 서늘한 미소를 본 크랙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드래곤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만드는 것은 준성에게도 반드시 필요했다.
그 이유는 굉장히 많았지만 가장 큰 것은 그들 개체마다 지닌 힘이 만만치 않으며, 신족과 전쟁을 치러 오며 상당한 정보가 쌓여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악마와 충돌을 일으킬 당시 거침없이 쓴 말을 던졌지만 그들의 존재는 선뜻 버릴 수 없는 패였다.
“그동안 많이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리가 결정을 재촉하려고 온 건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용건으로 들어가는 행동에 정기정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준성은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대답했다.
“종족의 운명을 결정짓는 일인 만큼 쉽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빠른 결정이 잡음을 줄일 수 있는 길이란 걸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우린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만큼 결정도 신중히 하는 법이지. 아무튼 그 부분에 대해서는 너무 늦지 않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제 힘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말씀해 주시길.”
준성과 정기정은 여러 가지 사담을 주고받으며 앞으로 협력 관계를 강화해 나갔다.
둘의 신뢰 관계가 쌓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사업적인 분야 덕분이었다. 금탑의 영향력 강화와 엘리미스의 설립으로 대한민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준성과 T그룹의 공고한 성을 쌓은 정기정은 비슷한 면이 확실히 존재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준성은 오늘 방문한 이유에 대해 언급했다.
“드래곤과 신족의 전쟁에서 신의 도움은 없었습니까?”
“없었지. 우리들 힘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 하지만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 알 수 있더군.”
“신을 원망하는 마음은 없습니까?”
“원망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거짓이겠지. 만약 그분께서 우리에게 도움의 손을 내밀었다면 신족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을 테니. 하지만 세계를 관조하는 그분의 성향을 감안하면 억울하지는 않아.”
“그것은 개인적인 생각입니까? 아니면 모든 드래곤들의 생각입니까.”
“아마…… 내 개인적인 생각이겠지.”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쓴웃음을 짓고 마는 정기정이었다. 그분의 입장을 이해하기에 모든 것을 받아들였지만 멸족의 위기에 처하게 된 드래곤 입장에서는 그동안 열심히 일을 하다가 버려진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걸 묻는 이유는 무언가?”
“신족은 신마저 끌어 내릴 만큼 세력을 키워 왔습니다. 차원 너머 세상은 온전히 신족의 세계라고 할 수 있지요. 저나 드래곤이나 단독으로 상대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닙니다.”
순간 정기정의 눈이 날카롭게 바뀌었다.
드래곤의 뛰어난 두뇌는 어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준성의 질문과 돌아가는 상황, 그리고 자신에게 얻어내려는 정보를 살펴보면 무슨 의도인지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설마?”
“예, 신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
확신 어린 대답에 정기정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정기정은 곧장 모든 드래곤들을 소집했다.
워낙 개체마다 개성이 강하여 남의 말을 듣는 법이 없는 드래곤들이지만 그나마 살아남은 이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기에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기정의 소집에 모인 드래곤은 총 일곱.
살아남은 드래곤의 개체가 여덟인 걸 감안하면 거의 다 모인 셈이었다.
예전 드래곤 총회의가 열릴 당시 참여율이 적어도 오십이 넘는 숫자가 모였던 걸 감안하면 지금의 현실은 씁쓸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왜 우리들을 모은 거지?”
그런 감상과 별개로 다른 드래곤들은 어서 용건을 말하라고 재촉해 왔다.
정기정 또한 길게 시간을 끌 생각이 없었기에 준성에게 들었던 말을 꺼내 놓았다.
“그분께서 존재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이 자리를 만들었다.”
“그분? 그분이 뭐지? 혹시 신족 녀석들하고 붙어먹기라도 한 건가?”
금발 금안의 아름다운 여인이 날 선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고개를 저어 보인 정기정은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단어를 꺼내 들었다.
“내가 말하는 그분은 바로 신이시다.”
“…….”
그가 준성에게 보였던 반응처럼 드래곤들도 침묵했다. 그만큼 신이라는 이름이 가져다 주는 무게는 그들에게 가볍지 않았다.
“내가 알기로 그분은 신족에게 패하고 소멸했다고 들었는데?”
“우리가 가늠할 수 없는 세월부터 세계를 관조해 온 분이다. 신족의 기세가 무섭다고 하더라도 그분께서 지닌 저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이 자리를 만든 이유가 뭔데? 우리가 멸족 위기에 처해서 허겁지겁 도망칠 때까지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은 신이라는 작자가 이제 와서 손이라도 잡자고 해?”
금발의 여인은 신족과 전쟁 당시 패배한 드래곤을 도와주지 않은 것에 적잖은 원한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드래곤들도 마찬가지였다.
“맞다.”
“하, 그분도 참 웃기네.”
“웃기고 안 웃기고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유념해야 할 건 그분께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앞으로 신족과 대결해야 할 우리에게 있어 방패막이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우군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정기정은 준성에게 들은 점을 최대한 자세하게 풀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드래곤의 이익을 위해서는 신과 손을 잡아 공동 전선을 형성해야 한다. 이 부분은 공감대를 이뤘지만 내내 날 선 모습을 보이던 금발 여인은 달랐다.
“난 정보의 출처도 의심스러워. 요즘 친하게 지낸다는 그 인간에게 들은 정보잖아?”
“그도 그렇군.”
“인간이 속였을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주변의 몇몇 드래곤이 이에 동조했다. 그 행동을 본 정기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지켜보던 바스리엘의 입매도 비틀렸다.
가장 성질 급한 레드 드래곤이고 인간을 깔보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준성과 몇 차례 대면한 적 있는 그는 김준성이라는 인간이 그 범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진실을 알고 있기에 드래곤의 오만한 행태를 적나라하게 지켜볼 수 있었고, 자신들이 무엇 때문에 신족에게 패배했는지 깨달았다.
“웃기고들 있군.”
“…….”
날 선 목소리가 뒤흔들자, 장내는 침묵에 빠져들었다. 금발 여인은 자신의 의견을 정면으로 반박한 바스리엘을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지?”
“네가 말하는 인간은 마음만 먹으면 네년 정도는 쉽게 소멸시킬 수 있다. 제 주제를 알고 나대라.”
“뭐? 지금 해보자는 거야?”
골드 드래곤 아델카나는 바스리엘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드래곤 피어가 섞여 있는 매서운 눈빛이었지만 그는 오히려 코웃음을 쳤다.
“네년이 우리의 수장이 되고 싶어 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제 주제도 안 되는 걸 모르고 나대는 꼴이라니. 나는 신이 존재한다는 걸 믿고,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협력할 수 있다. 너희들도 아직까지 우리가 세계의 수호자인 위대한 종족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으음!”
아델카나에게 동조하던 드래곤들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하자, 그들은 바스리엘의 존재감을 무시하지 못하고 침음을 삼켰다.
“말 좀 해봐, 카를로니안! 지금 저 행태를 보고 그냥 넘어갈 생각이야?”
자신이 만들어 놓은 판이 뒤집어지게 되자, 아델카나는 정기정을 향해 화를 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바스리엘의 말이 과한 면도 있지. 오늘은 그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만든 자리니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일주일 내로 결정하지 못한다면 어르신의 지혜를 빌릴 생각이다.”
“우리의 운명을 그 늙은이에게 맡기라고? 말도 안 돼.”
“어르신의 현명한 혜안을 헤아리지 못하고 날뛴 네가 잘못한 것이다, 아델카나.”
“뭐, 뭐?”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각자 심사숙고해서 결정을 내리도록.”
정기정의 선언을 끝으로 회의는 모두 끝났다. 아델카나는 자신을 향해 면박을 날렸던 바스리엘을 사나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다음에도 날 방해하면 가만두지 않겠어.”
“그 전에 힘이나 더 기르고 오도록.”
“흥!”
코웃음을 친 그녀가 사라지기 무섭게 다른 드래곤들도 차례대로 자리를 떠났다.
“왜 그녀를 자극한 건가?”
“제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여전히 오만으로 가득 차 있는 꼴이 보기 싫었을 뿐이다.”
“음, 예전하고 많이 달라졌군.”
“빈정 상하지만 눈앞의 현실을 외면할 정도는 아니다. 어쨌든 신이 존재한다는 건 우리에게 나쁜 일만은 아니로군.”
“하지만 서로 좁힐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하니 이 부분을 극복하는 게 관건이지. 나는 어르신께 문제 해결을 위해 조언을 구할 생각이다.”
“그 방법밖에 없다면 별수 없겠지. 잘해 보도록.”
자리를 떠난 바스리엘의 자취를 좇던 정기정은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많이 바뀌었군, 이게 드래곤을 위해 좋은 변화였으면 좋겠건만.”
준성의 곁을 떠난 엘리엔은 정처 없이 걸음을 옮기며 세계 곳곳을 누볐다.
몬스터 동산이라 불리는 북한을 지나, 중국을 지나 몽골로, 몽골에서 중앙아시아로 향한 뒤 흑해를 지나 루마니아와 몰도바 국경으로 향했다.
어디로 가고자 하는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곳이 좋아서도 아니었다.
엘리엔은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증오가 전부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뒤, 그것을 어떻게 하면 없애거나 다스릴 수 있는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리고 몇 달간 이어진 긴 여행 속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유일한 방법이라면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받아들이는 것뿐.”
이것이 해결 방법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실행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걸 그녀는 깨달았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찾은 것은 더 이상 해결 방안이 되지 못했다.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것처럼 숲으로 향한 엘리엔은 하루 머물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다른 이들에게는 불편하기만 했지만 울창한 숲 속은 그녀에게 있어 활력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정령술을 응용하여 나무에 거주할 집을 만든 뒤, 간단하게 저녁을 해결하고 근처에 위치한 강가로 향했다. 마법으로 청결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오랜만에 들어선 숲에서 목욕을 하며 기분을 내고 싶었다.
첨벙.
“…….”
물속으로 들어간 엘리엔은 몸을 담근 뒤 생각에 잠겼다.
엘프 숲에 있을 당시에도 매일 치열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어떻게든 인간에게 복수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고, 친구들은 그 모습에 우려를 표했지만 앞만 보고 달려가던 엘리엔이 돌아볼 수 있는 여지는 주지 않았다.
깊은 상념이 끝없이 이어질 무렵,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새하얀 나신이 드러났다.
보는 이가 없어도 움츠러들 법했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날 제거하러 왔나?”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숲 속을 울렸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린 엘리엔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기척도 숨기지 않고 지켜보는 건 불쾌하다. 모습을 드러내라.”
그 말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잠시 후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실피르와 똑 닮은 여인은 다름 아닌 타나였다.
“할 말이 있어 찾아왔어.”
“제거하러 온 게 아니라?”
비웃음 섞인 반문에 타나의 안색이 찌푸려졌다.
“내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지만…… 그분께서는 그걸 원하지 않으시니까.”
그녀의 표정은 지금 상황이 얼마나 내키지 않는지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엘리엔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녀가 다음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내가 찾아온 이유는 간단해. 사실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한 번 물어보라는 말 때문에 찾아온 거니까.”
“뭐지?”
“너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면 그분을 위해 몇 년간 움직여 줄 수 있겠어?”
“……자세히 말해 보도록.”
전혀 예상치 못한 타나의 제안에 엘리엔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간단하다. 너는 그분을 위해 힘을 빌려주면 된다. 순순히 따르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네 마음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분노도 지울 수 있겠지.”
“…….”
타나의 말에 엘리엔은 미간을 좁혔다. 그녀의 말을 듣고 있으니 자신이 지닌 문제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결정해, 엘리엔.”
“네가 말하는 그분은 누구지?”
“말할 수 없는 정보, 네게는 선택의 권리만 있어.”
“웃기지 마, 내가 지닌 문제점은 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
자신이 지닌 문제점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군지도 모르는 이를 위해 움직일 만큼 간절하지는 않았다.
“진심이야?”
“물론이다.”
“네가 지닌 문제점은 결코 스스로 극복할 수 없다. 스스로 느끼고 있는 부분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아니어도 상관은 없고.”
쐐액!
혼자 중얼거리던 타나의 몸이 귀신처럼 뒤로 밀려났고, 그 공간 사이로 엘리엔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따라붙으면서 검격을 날렸으나 타나는 어렵지 않게 모조리 피했다.
쩌엉!
더 이상 회피하지 못한 타나는 골든 소드를 들어 튕겨 냈다. 뒤로 밀려난 엘리엔은 강렬한 화염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며 물었다.
“방금 그 말, 무슨 뜻이지?”
“네 마음속의 증오는 힘의 원천과도 같은 거야. 그걸 극복하겠다는 건 힘의 기반이 되는 걸 포기하겠다는 뜻과 같지. 과연 네가 힘을 포기하면서 문제점을 극복하려고 할까?”
“…….”
진실의 눈을 지녔기에 타나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방금 전 그녀의 말은…… 진실이었다.
‘힘을 포기해? 불가능한 일이야.’
자신이 지닌 증오를 극복하고 준성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대가가 힘의 포기라면?
이는 심각하게 고민해 볼 문제였다.
“믿을 수 없다.”
“내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면서 그런 말을 해봤자 쓸데없는 고집으로밖에 안 느껴져.”
“나, 난…….”
“간단하게 결정을 내려. 이대로 의미 없는 여행을 다닐 건지, 아니면 잠시 그분에게 힘을 빌려주면서 네가 지닌 문제를 극복할지.”
딱 잘라 말을 하는 타나의 모습 어디에서도 틈을 찾을 수 없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뒤죽박죽으로 헝클어진 엘리엔의 머릿속에는 온전한 판단을 내릴 만한 이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
“올바른 판단, 후회하지 않을 거야.”
검을 잡은 그녀의 손이 축 늘어지는 것을 본 타나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신족과의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멸족의 위기를 맞이한 드래곤들은 절망에 빠져 있었다.
세계의 모든 영역에 신족의 감시망이 펼쳐져 있었고, 개체수가 줄어든 드래곤들은 그것을 뚫고 후일을 도모할 여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그들을 구해낸 것은 전전대 드래곤 로드였던 카슈트론이었다.
일만 년을 넘게 살아온 카슈트론은 살아남은 드래곤들에게 다른 차원의 존재를 언급했고, 그들을 이끌고 지구로 차원 이동을 감행했다.
그 결과 카슈트론을 포함한 여섯 드래곤은 무사히 지구로 차원 이동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차원 이동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모든 힘을 소진한 카슈트론은 더 이상 제 구실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한 채 모처에 머물면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그럼에도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그가 드래곤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가장 지혜로운 존재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정기정이 그를 찾은 것도 조언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이곳에는 무슨 일인가?”
마른기침을 흘린 카슈트론이 반문했다. 지구에 정착한 뒤, 처음에는 자주 방문하던 드래곤들은 어느 시점부터 더 이상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어르신께 조언을 구하고 싶은 것이 있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조언이라, 이 늙은이가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야겠지. 자네들이 직접 올 정도라면 사안이 가볍지 않은 것처럼 보이네만.”
“예, 아마 어르신도 놀랄 만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정기정은 그동안 있어 왔던 일을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행자인 김준성의 존재와 신족의 침공, 악마의 등장과 신족에게 패배하여 소멸되었던 것으로 알려진 신의 존재까지. 한 편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카슈트론은 신이 소멸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는 사실에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자네들이 나를 찾아온 것도 신과 손을 잡는 것에 대해 고민이 많기 때문이었군.”
“그렇습니다.”
“우선 이 늙은이의 의견을 말하자면 당장 신과 관계를 개선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네.”
“어째서입니까?”
“힘을 잃은 신에게 있어 우리의 존재는 잠시 시간을 끌기 위한 방패막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지. 다시 이용당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싶다면 손을 잡아도 좋지만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군.”
“…….”
그럴 듯한 말에 정기정은 물론, 함께 찾아온 바스리엘도 고개를 끄덕였다.
힘을 잃은 시점에서 드래곤에게 손을 내민 것만 봐도 다른 의도가 숨어 있음을 간파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 늙은이 생각으로는 여행자인 인간과 관계를 맺는 것이 좋아 보이는군. 차원을 여행할 수 있는 역량이라면 그의 힘은 드래곤들에게 큰 도움이 될 걸세.”
“이미 큰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동족들이 아직 인간을 보는 눈이 좋지 않습니다.”
“그럴 테지. 그걸 간과하고 오만에 빠진 우리가 신족에게 패한 것이기도 하지만.”
허허롭게 웃은 카슈트론은 기침을 해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기정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모든 힘을 소진하고 자연의 품으로 떠날 날만 기다리는 그를 무리시켜서는 안 됐다.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해주신 말을 심사숙고하여 결정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현명한 판단을 내려서 부디 드래곤의 미래를 이끌어 주게나.”
“예.”
고개를 숙여 인사한 정기정과 바스리엘이 사라졌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카슈트론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뒤를 향해 중얼거렸다.
“이제 되었는가.”
쏴아아아!
강렬한 어둠이 주변에 드리우며 인영의 형태를 갖추었다. 그 속에서 음산함이 물씬 풍기는 목소리가 카슈트론의 귀를 파고들었다.
“아주 훌륭하군. 너희들을 버린 녀석과 손을 잡는 것보다 훨씬 나은 전개가 아닌가?”
“약속한 것을 잊지 마라. 자네가 내민 손을 잡은 것도 우리 드래곤에게 도움이 된다는 판단하에 내린 결정이니.”
“물론이다. 나는 내 스스로를 악마라 칭하지만 존재의 근원은 순수한 어둠 그 자체. 내 목적만 이룰 수 있다면 상대가 이익을 봐도 개의치 않는다.”
“그 말을 믿도록 하지. 만약 우리를 곤경에 빠뜨리기라도 한다면…….”
시종일관 온화하게 가라앉아 있던 카슈트론의 눈에서 강렬한 기세가 발산되기 시작했다.
당장 자연의 품으로 돌아갈지 모른다고 예상되었던 그는 여력을 숨겨 둔 채 정기정을 대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지. 그러니 무섭게 굴지 말라고. 얼마든지 수용할 테니.”
“그 말, 믿도록 하지.”
“믿어도 좋아, 좋고말고.”
흔쾌하게 대답한 악마의 형체가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어둠이 그대로 허공에서 흩어졌다.
“드래곤의 운명을 결정할 주사위는 던졌다. 과연 이것이 어떤 여파를 끼칠는지…….”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미래를 내다보며 카슈트론은 의자에 몸을 묻었다.
포스 운용법의 공개 이후, 세계 각지의 A.O. 본부 소속 능력자들은 연일 수련 삼매경에 빠져 커다란 지각변동을 겪고 있었다.
그동안 그들은 자신이 지닌 능력이 어떤 형태로 발현되는 것인지 구체적인 규명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막연하게 짐작만 하던 것을 포스 운용법을 통해 상당 부분 파악할 수 있었고, 그 성과는 고스란히 수련의 성취로 이어졌다.
그럴수록 대한민국 A.O. 본부의 입지가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이 이 획기적인 방법을 공개함으로써 세계 능력자들의 역량을 향상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럴수록 모여드는 찬사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으음.”
김기정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 있는 상대가 내뱉은 말이 커다란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저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마스터 김.”
그의 앞에서 미소 지은 채 태연하게 말을 건네는 인물은 다름 아닌 더글라스였다.
예정에 없던 방한에 이어, 김준성이 아닌 김기정부터 찾은 그는 놀랄 만한 제안을 했다.
“왜입니까?”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더글라스는 그 의미를 어렵지 않게 간파하고는 자세하게 설명했다.
“가장 큰 이유는 포스 운용법의 공개로 마스터 김의 인지도가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언제나 적이 있어 왔습니다. 그리고 적이 있기에 세계의 패권을 쥘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은 이 점을 이용하여 아국의 이익을 도모했으나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릅니다, 마스터 김.”
“신족 때문입니까?”
“……알고 계셨군요.”
모든 사실을 간파한 김기정을 보며 더글라스는 미소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모든 인간들이 힘을 합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적대하는 이들이 아닌, 다수의 화합을 이끌 수 있는 리더가 필요합니다.”
“제가 가능하리라 생각합니까? 중국과 일본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일본은 본국이 충분히 제어할 수 있습니다. 중국은 이미 포스 운용법이라는 혜택을 받았는데 다른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지요.”
“하하!”
완벽하게 그물망을 펼친 뒤, 제 발로 걸어 들어오라고 하니 김기정은 허탈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많은 분란이 있었던 만큼 이를 수습할 수 있는 인물은 마스터 김밖에 없습니다.”
“그게 전부입니까?”
“물론, 마스터 김의 존재로 또 다른 마스터 김과 좀 더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점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진솔하게 말하는 더글라스를 보며 김기정은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다른 것도 아닌 세계 평화를 위한 길이었고, 포스 운용법으로 타국의 지지를 얻고 있는 지금 상황이 최적기이기도 했다.
“국제 능력자 연맹의 의장이 되어 주십시오, 마스터 김.”
“……받아들이겠습니다.”
더글라스의 거듭되는 권유에 김기정은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