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213)
제93장 격돌
한참 동안 타나에게서 아무런 대답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준성의 두 눈에는 은연중 기대감이 피어나고 있었다.
망설임이 있다는 것은 마음속 갈등이 존재한다는 의미였고, 이는 곧 자신의 말이 먹혀들 여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건 믿음의 문제가 아니야.”
고민의 끝은 여전히 부인이었다.
“왜 그런지 알려줄 수도 없는 거야?”
“내 선에서는 그래.”
“그건 좀 그러네. 적어도 내게 무엇 때문에 말해 줄 수 없는지 알려줄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
“미안해, 나도 말해 주고 싶지만…….”
섭섭한 표정의 준성을 본 타나도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어머니의 얼굴을 한 그녀를 보면서 여러 가지 감정이 맴돌았지만 지금은 사소한 감정에 사로잡혀서는 곤란했다.
“그럼 한 가지만 대답해 줘.”
“대답해 줄 수 없는 질문은 곤란해.”
“곤란하게 만들지는 않을 거야. 내가 알고 싶은 건 하나야. 타나 너와 관련 있는 신은 내가 알고 있는 신과 같은 존재인 거야?”
그것은 준성이 줄곧 타나를 찾던 이유이기도 했다.
타나는 자신이 차원 이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 신이 존재한다고 했지만 준성이 만난 신은 타나에 대해서 모르는 듯했다.
혹시 그녀의 이름을 몰라서였을까?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종합적인 정보를 모아 유추해 봤을 때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건…….”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입술을 꼭 다물고 고민에 빠져 있던 타나의 입술이 달싹이는 순간이었다. 짙은 어둠이 드리우며 주변을 완전히 새까맣게 물들였다. 그 속으로 검은 인영이 모습을 드러내며 웃음 섞인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때를 잘못 찾아온 건가? 킥킥!”
“……미안, 대답해 줄 수 없어. 오늘의 은혜는 잊지 않을게. 우선 돌아가서 쉬고 싶어.”
악마가 등장할 때 잠시 그에게 시선을 빼앗긴 것이 화근이었다. 거부의 말을 남긴 타나는 품속에서 푸른색 돌을 꺼내 들더니, 이내 빛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잠깐!”
손을 뻗어 타나를 제지해 보려고 했지만 빛에 휩싸인 그녀의 몸은 사라져 있었다.
허탈한 표정을 지은 준성은 고개를 저었다. 타나에게 심리적인 부담을 주어 원하는 대답을 얻어내기 직전이었는데 실패로 돌아갔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속을 모르는지 악마는 연신 웃음을 흘렸다.
“하던 이야기가 잘 안 되기라도 한 것인지? 아주 아쉽군, 아쉬워, 킥킥!”
“네놈.”
타나가 사라짐으로써 그 분노는 고스란히 악마에게 전가되었다.
“이런, 오늘 원하는 대답을 해주러 찾아왔는데 이런 대우라면 섭섭한데.”
“타나와 아는 사이였군. 그럼 대신 대답해 줘야겠다.”
“이런, 나는 그녀가 아니기에 대답해 줄 의무가 없는데? 당사자를 찾아가서 직접 질문해 보길 권하지, 대신 나에 대해 물어보라고.”
“…….”
빈정거리는 악마를 보며 당장 손을 쓰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가볍게 숨을 고르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금 악마에게 화를 낸다면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지 못한 채 판을 뒤엎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좋아, 그럼 저번에 약속했던 말을 듣고 싶다. 우선 확인할 게 있는데, 넌 신의 내면에서 피어난 분노로 탄생한 존재가 맞는가?”
“킥! 킥킥!”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을까.
고개를 숙인 악마는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내 분노로 번졌다.
“……킥킥킥! 끝까지 그 사실을 밝히지 않을 것처럼 굴더니 밝혀 버린 건가? 빌어먹을 년이!”
“대답해라.”
“그년이 말한 그대로다. 나는 신에게서 파생된 어둠. 엄밀히 말해 악마가 아니지.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고는 있지만.”
“그랬군. 그럼 왜 신을 배신하려는 거지?”
어둠의 존재라고 해도 그 뿌리가 신이라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자신을 낳아준 이를 배신하고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인 이유를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아직 정보가 부족했다.
“그년은 날 이용하려고만 했다. 내 필요성이 끝나면 어떻게 될까? 더 이상 놔둬 봤자 골치만 썩을 테니 제거하려고 들 테지.”
“그래서 먼저 배신을 하려고 한다?”
“내가 살기 위해 한 행동이 그렇게 보인다면 얼마든지 배신할 수 있다!”
처절하게 소리 지르는 악마의 모습은 동정심을 들게 만들기는 했지만 준성은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정확하게 사실만 꿰뚫어 보았다.
“하지만 설득력이 부족하군.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도 있다. 힘도 없는 신을 제거해도 될 테고.”
“그건 나와 신 사이에 얽힌 부분이 존재한다.”
“그리고?”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단지 그것뿐.”
“그렇군, 자신의 방어 차원에서 그렇게 부지런히 움직였다는 이야기인가.”
“맞다.”
수긍하는 듯한 준성의 말에 악마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이어 조금 전 말했던 사실들을 읊조렸다.
“만약 필요성이 끝나면 제거를 당할 수 있을 테니 신이 함부로 그러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한 거고.”
“그렇다.”
“과연, 그렇군. 존재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할 수도 있겠어.”
“이제 이해했나 보군.”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는 준성을 보고 어둠이 일렁이며 드러난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확실하게 정할 수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널 제거하는 것을.”
“뭐라?”
쐐액!
악마의 대답은 끝에 가서 흐릿해졌다. 자신의 마음을 선언한 준성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금빛 화살을 날렸던 것이다.
허공을 가르는 금빛 화살을 피해 뒤로 물러난 악마는 마치 의지가 있는 것처럼 자유롭게 허공을 누비다가 정면에 도달한 것을 보고 힘껏 후려쳤다.
쩌엉!
날카로운 충돌음과 함께 금빛 화살은 산산조각 나면서 흩어졌다. 그것을 받아낸 악마도 만만치 않은 충격을 받은 듯 뒤로 밀려났다.
“이게 무슨 짓이냐!”
“감정에 호소해서 당장 상황을 모면하려는 행태가 지긋지긋해서. 어차피 내게 말해 줄 수 없다면 확실하게 제거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을 뿐이다.”
“멈춰라!”
소리를 지르며 준성의 행동을 제지하려는 악마였지만 그의 공격은 이어졌다.
악마 주변에 드리운 어둠 전체를 감싸는 퓨리 오브 헤븐(Fury of Heaven)이 시전되었고, 뒤로 물러나는 그를 향해 헬 썬더(Hell Thunder)가 연이어 강타했다.
짙은 어둠이 옅어질 정도의 큰 충격을 줄 만큼 그의 마법이 지닌 위력은 강력했다.
“크으으!”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밀려나는 악마의 뒤를 쫓으면서 준성의 날카로운 마법이 연이어 시전되었다.
수많은 적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는 화염 계열 마법이 좋았으나 이렇게 한 명을 상대할 때는 빠르고 직선적인 뇌전 계열이 좋았다.
그 예로 처음 기습공격을 허용한 악마는 준성에게 맥을 못 추고 밀려나고 있었다.
꽝!
거센 충돌과 함께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난 악마의 주변에 어둠은 완전히 가셔 있었다. 그 사이로 드러난 그는 동양과 서양의 얼굴이 조화된 잘생긴 청년이었다.
“죽여 버리겠다!”
하지만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얼굴 사이로 피어나는 분노는 그가 악마임을 알게 했다.
동시에 손을 뻗자, 은밀하게 어둠이 퍼지며 준성의 전신을 감싸려고 했다.
그가 어떤 수법을 구사하는지 모르는 것은 준성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신중한 표정으로 어떤 공격을 시전할지 지켜보았다.
보글보글 들끓는 어둠이 폭발하면서 그 잔해가 덮쳐 왔다. 사방에 난사되는 공격은 하나하나가 방어막을 부술 만큼 매서운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꽈앙!
“음!”
준성의 손을 떠난 금빛 화살은 날아드는 어둠의 알갱이에 그대로 부서졌다. 충격을 해소하지 못한 그는 신음을 흘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상황을 뒤집는 데 성공한 악마는 더욱 의기양양하여 어둠의 힘을 발현했다.
맞대응하여 마법을 시전하려던 준성은 어느 순간 자신의 몸이 굉장히 무거워진 것을 느꼈다. 그리고 체내의 마나가 움직이는 속도도 느려지고 캐스팅 속도도 현저하게 저하되었다.
‘디버프!’
그제야 악마의 공격이 왜 그렇게 위력적으로 느껴졌는지 알 수 있었다. 눈을 번뜩인 그가 악마를 바라보니 그는 입꼬리를 말아 올린 채 웃고 있었다.
“킥킥! 이제 알아차린 건가?”
“남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순간에 디버프를 시전한다, 아주 지저분한 방법이지만 효과적이기도 하지.”
그런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디버프로 움직임의 제약을 받는다면 일반 마법이 아닌 언령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된다.
파직! 파지직!
준성의 주변으로 금빛 뇌전이 넘실거렸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사방에 뻗어 나가는 힘은 두려움을 자아내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그 후로는 준성의 일방적인 공격의 연속이었다. 빠르고 직선적인 뇌전은 어둠을 밀어내고 번번이 악마의 정면에 도달했으며, 매번 위협적인 상황을 만들어 냈다.
“네놈, 무슨 수를 쓴 것이냐!”
디버프 현상이 전혀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악마가 일갈을 터뜨렸지만 준성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언령을 활용하여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다.
‘이 정도로는 무리인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악마는 전력을 펼치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방어에 임하면서 자신의 힘을 소진시키려는 느낌이 강했다.
상대가 전력을 발휘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반대로 지금이 순간이 아니라면 강적을 제거할 기회는 없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쐐애애애액!
준성의 손을 떠난 공격이 조금 전과 차원이 다른 수법임을 악마는 감지할 수 있었다.
그 즉시 그는 몸을 비틀면서 은은한 보랏빛에 휩싸인 화살을 피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은 악마의 예상마저 뒤엎을 만큼 더 빠르고 더 강렬했다.
더 이상 피할 수 없음을 느낀 악마는 양손을 교차하며 어둠을 끌어 모아 방어막을 형성했다.
하지만 충돌하는 순간 그는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꽈아아앙!
“크아악!”
단숨에 어둠의 방어막을 부숴 버리고 파고든 보랏빛 화살은 그의 본체에 큰 타격을 주었다. 강렬한 고통이 전신에 전해지자, 몸을 떨었다.
간신히 충격을 해소하는 듯싶었지만 고개를 든 악마의 바로 앞에는 준성이 서 있었다.
“이제 끝이다.”
선고를 내린 준성은 악마를 바라보며 10클래스의 절대마법, 신언(神言)을 시전했다.
신언은 준성이 10클래스의 경지에 오르면서 체득한 깨달음의 정화였다.
10클래스는 구분의 경계를 짓길,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신으로서 일 보 내딛은 완전한 경지였다.
정신, 육체, 기운 세 가지가 하나로 조화되며 더 이상 나아질 곳 없이 완벽해지며 한계를 뛰어넘어 신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다.
준성은 루이아스가 남겨 놓은 9클래스의 심득과 그동안 깨달은 것을 바탕으로 금탑주 시절 경지를 밟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신이 되지 못했다.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이 신이라는 존재인데 그에게는 세상에 너무나 많은 미련이 남아 있던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들과 홀로 남게 될 어머니, 자신이 일궈 놓은 세력과 자신의 존재로 인해 평화가 지속되고 있는 대륙까지.
어느 것 하나 간과하고 넘어갈 수 없었기에 스스로 신의 반열에 올라서는 것을 포기했다.
그 이면에는 모든 것을 초월하지 못한 그의 성격도 한몫을 하였다.
결국 불완전한 10클래스의 경지에 오르게 되었지만 그가 신의 힘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신언(神言)이라고 이름 붙인 이 마법은 말 그대로 신의 권능을 행사하는 것이며, 그 위력은 세상의 규칙을 뒤흔들 수 있을 정도였다.
위력이 너무 강해 시전할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마음을 바꾸게 된 이유는 눈앞의 악마라는 존재 때문이었다.
언령 마법과 제련제강의 마법에 의해 속절없이 밀렸지만 그가 신에게서 파생된 어둠의 존재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마음을 바꾸게 되면 언제든지 위협적인 적으로 변모할 수 있기에 기회를 확실하게 잡은 지금, 제거할 수 있다면 전력을 다할 생각이었다.
쿠구구구!
신언을 시전하겠다는 마음을 먹는 순간부터 주변 공기가 확연하게 달라졌다.
낮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알 수 없는 위화감이 사방을 가득 채워 나갔다.
“이, 이건?”
처음으로 악마의 입에서 짙은 두려움이 묻어 나왔다.
그 또한 준성의 기질 자체가 조금 전과 확연하게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방금 전 마법도 충분히 위력적이었지만 지금 펼치려는 공격은 적중당하면 존재 자체가 사라질 가능성이 높았다.
“잠깐!”
“어둠은 사라진다.”
다급한 외침을 무시하고 준성은 곧바로 신언을 발현했다.
그가 시전한 신언의 내용은 어둠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
창조주처럼 세계의 모든 현상을 비틀 수는 없지만 준성의 의지가 미치는 모든 곳에 그와 동일한 현상을 적용시킬 수 있었다.
쏴아아아!
지금 이 순간, 그의 의지가 미친 모든 곳은 신언의 발현으로 정해진 규칙대로 돌아갔다.
“아, 안…… 끼아아악!”
어둠이 사라진다는 그 말은 악마의 근간을 이루는 어둠 전체를 부인하는 것과 동일했다.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하는 악마의 전신을 뒤덮은 어둠이 조금씩 사라졌다. 그리고 점점 그 속도를 빨리하더니 이내 모든 어둠을 지워 버렸다.
“…….”
흔적도 없이 사라진 어둠을 좇으며 준성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이 없다면 악마도 없다.
즉, 신언의 발현은 악마를 소멸시켰다는 걸 의미했다.
“끝났군.”
악마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둠이 소멸되면서 악마의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걸 의미했다.
신이 말하길, 악마의 존재는 내면의 어둠에서 파생되었다고 했다. 준성의 신언은 신이 만들어 낸 어둠 자체를 완전히 제거한 것이다.
“이제는 상관없겠지.”
악마가 사라진 곳을 힐끗거린 준성은 미련을 두지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신족의 습격에 몸을 피해야 했던 신은 은신처에 몸을 피하고 흩어진 세력을 규합하는 데 힘을 썼다.
잃었던 격을 되찾았기에 그가 발현하는 권능에 이끌려 반 능력자 연합의 조직력은 더욱 견고해졌다.
이들이 큰 힘이 되지 않으리란 걸 잘 알고 있었지만 현재 상황에서 작은 힘도 반드시 자신들에게 끌어들여야만 했다.
신이 주로 하는 일은 신성력을 바탕으로 새로 합류한 이들에게 ‘기적’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인간의 이해 범주로 생각할 수 없는 힘은 경이로우며, 곧 기적이었다. 보여 주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지금은 충분한 효과를 거두는 중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 기적을 행하지 못했다.
그녀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하더니, 전신으로 발산하던 기운이 점점 옅어졌던 것이다.
“왜 그러십니까?”
“모두 물려라!”
늘 신을 호위하는 크랙과 섀도우가 다가오며 안부를 물었다. 하지만 손을 들고 제지하니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한 채 안절부절못했다.
하얗게 질린 신의 얼굴에는 핏기 한 점 없어 보였고, 간헐적으로 일어나던 떨림은 점점 더 거세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에 확연할 정도로 떨림이 강렬해질 때, 그녀의 입에서 한 줄기 어둠이 쏟아져 나왔다.
“우웩!”
구토는 끊임없이 이어졌고, 그럴 때마다 어둠 한 움큼씩 나와 바닥에 뒹굴었다.
그렇게 뱉어낸 어둠 덩어리는 도합 다섯 개.
꿈틀거리며 모여든 어둠은 천천히 한 덩어리로 뭉치기 시작했고, 이내 사람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팔다리가 만들어지고 이목구비마저 완성되었을 때, 그는 검은 머리의 잘생긴 청년으로 변모해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몸을 푼 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라보는 신을 향해 예를 취했다.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신이시여!”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혹시 몰라 조치를 취해 놓았습니다. 이걸 이렇게 사용하게 되었을 줄 몰랐지만.”
“지금 이 행동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
“씻을 수 없는 무례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제가 소멸되면 곤란해지는 것은 위대한 신이지 않습니까?”
“…….”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태도에 신은 물론, 크랙과 섀도우도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김준성이라는 인간을 조심하시길.”
“설마 널 이렇게 만든 게?”
신의 눈이 커졌다. 청년, 악마도 이 상황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입니다. 끝까지 아군으로 삼고 싶었지만 기어이 날 이렇게 만들 줄은 몰랐습니다. 아아, 정말 소멸될 뻔했지요. 신의 은총이 아니었다면.”
“네놈!”
분노에 찬 일갈을 터뜨리며 신은 자책했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여 만든 한 수를 악마가 이런 식으로 이용할 줄이야.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일 보시길. 아아, 당분간 쉬시는 게 나을지도.”
그 말을 끝으로 흐릿해진 악마의 몸은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악마와 일전을 벌인 뒤, 준성은 곧장 거처로 돌아와 다음 계획을 추진했다.
바로 나이트 골렘을 제작하는 일이었다.
타나에게 일말의 희망을 걸고 있었지만 시종일관 대답을 거부하고 결국 떠나 버린 그녀를 보면서 희망을 접어둔 준성이었다.
나이트 골렘 제작을 보조하고 있던 세희는 그 모습을 보고 의문을 드러냈다.
“타나 문제는 포기한 건가요?”
“아무래도 그래야겠어. 타나는 우리와 대화할 생각이 없어 보였으니까. 의지가 없는데 억지로 매달려 봤자 좋을 건 없겠지.”
“정말 그럴까요?”
“그럼 아닐까?”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래요. 만약 준성과 대화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면 앞에 나타날 필요도 없었겠죠. 저는 준성이 생각하는 것처럼 타나가 돌아섰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무래도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아.”
“네.”
타나는 준성이 만든 최강의 나이트 골렘이었다. 그녀가 지닌 골든 소드와 룬 블레이드는 근접전에서 최강의 무위를 발현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골든 피닉스는 먼 거리에서도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한 차례 제작 경험이 있다고 해도 그녀만 한 나이트 골렘을 제조하는 일은 어려웠다. 하드웨어는 가능하지만 핵심을 이루는 에고는 시간이 지나면서 경험이 쌓여야 제 기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쉽지는 않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에고 문제는 해결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글쎄.”
말끝을 흐리는 준성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 또한 에고 형성 문제로 적잖이 고민을 하고 있었다.
나이트 골렘의 에고가 중요한 이유는 전투를 수행하는 뇌 역할을 하는 것도 있지만, 사념을 모아 구성할 때 특정 자아가 강하게 되면 그 자아의 성향에 따라 제멋대로 움직이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이는 나이트 골렘의 통제에 중대한 문제로 작용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 시대는 전투가 벌어지는 시대가 아니기에 전투에 능한 사념을 모으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일단 필드를 돌아다니면서 모으고는 있지만 턱도 없는 일이지.”
다른 국가에게는 유감이지만 준성은 부족한 에고를 보완하기 위해 몬스터와 능력자들의 전투가 벌어진 장소로 찾아가서 사념을 모으고 있었다.
그 양이 부족하기에 언제 만족할 만한 양이 모일지 알 수 없어서 답답함은 더욱 커져만 갔다.
“어렵네요.”
“어렵지. 그래서 더욱 타나가 생각나는 것이기도 하고.”
“대화 자체가 안 되나요?”
“무슨 사정이 있는 것처럼 보였어. 하지만 그 사정을 내게 말해 줄 수 없다면 결국 나와 갈라설 수밖에 없다는 의미가 되겠지.”
“다시 만날 자리가 있으면 저도 함께할게요. 준성에게 말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 있을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어.”
타나에 대한 미련이 남지 않는다면 거짓이었기에 준성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골렘 제작에 골몰하던 그는 또 다른 손님을 맞이해야 했다.
바로 정기정과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었다.
T그룹 회장이자, 인간 나이로 칠순이 넘은 정기정이지만 여전히 정정해 보이는 데 반해 같이 온 노인은 나이를 짐작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주름이 져 있었고, 언제 쓰러질지 모를 정도로 무기력했다.
두 눈의 빛이 생생한 것을 보지 못했다면 죽은 시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저를 찾아오셨다는 건 어느 정도 각오가 섰다는 걸 의미하는군요.”
“아무래도 쉬운 사안이 아니었으니까. 우리들 사이에서도 제법 진통이 컸지. 어쨌든 전쟁에서 패할 당시 그분은 우리를 돕지 않았으니.”
“같이 온 분의 소개를 받고 싶습니다.”
“이분은 우리들을 이끌어 주시는 카슈트론 님이시네. 전전대 드래곤 로드이셨지.”
“김준성입니다.”
“카를로니안이 여행자를 만났다는 말에 제법 놀랐는데 이렇게 보게 되니 영광입니다.”
“천만에 말씀을. 저는 여행자일 뿐, 굵직한 일에 얽매이는 것은 아무래도 망설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늙은 생강이 매운 법이라, 공손한 태도를 보이면서 은근슬쩍 자신을 엮으려는 카슈트론의 언변에 준성은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허허, 별말이라니요. 여행을 떠나더라도 방문한 곳이 언제든지 정착지가 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좋은 인연을 맺었으니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좋은 법이지요.”
“분명 맞는 말씀입니다. 다행이 정기정 회장님은 좋은 분이고, 주변에도 각자 위치에서 열심히 하시는 분들이 많아 다행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질문 하나를 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물어보십시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무슨 질문이든 대답해 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언제 악마와 만남을 가지셨습니까?”
“……!”
정기정은 깜짝 놀라 카슈트론을 바라보았다.
준성과 눈을 마주친 카슈트론의 눈은 조금 전과 다르게 강렬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정면으로 마주한 준성의 눈에서 진위 여부 따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그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정기정도 처음에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멈칫하는 카슈트론을 보며 마음이 동하는 눈치였다.
무언으로 전해지는 압박을 이기지 못한 카슈트론은 순순히 수긍했다.
“맞습니다. 악마라고 칭하는 자와 몇 차례 만남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그가 분명 제안을 했을 것입니다. 가령 자신과 손을 잡자고 하거나 말입니다. 아닙니까?”
“어떻게 알았습니까?”
“제게 한 행동과 같군요.”
“…….”
표정 변화는 없었지만 카슈트론의 기분이 좋지 않음을 준성은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악마가 어떤 방식으로 계획을 추진해 왔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강적이다 싶은 자들에게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내면서 친분을 맺고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나갔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분명합니다. 악마라는 존재는 믿음 자체를 주기 힘듭니다. 무엇보다 그가 신과 무관하지 않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말이죠.”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악마는 신의 어둠 속에서 파생된 존재입니다.”
그 말은 놀라움의 시작이었다. 준성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세세하게 설명했고, 그것을 듣는 드래곤의 표정은 시시각각 바뀌었다.
“그의 말을 모두 믿으십니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뒤, 카슈트론과 정기정은 자리를 옮겨 대화를 이어 나갔다.
“믿을 수밖에 없네. 그의 말 속에서 거짓이 섞이지 않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지.”
“신도, 악마도 믿을 수 없는 존재라니, 한편으로는 후련하기도 합니다.”
“상황이 어려워졌는데 후련하다? 허허! 알다가도 모를 감정이로군.”
“우리 드래곤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종족이 아니지 않습니까? 신이나 악마 모두 믿을 수 없게 된 만큼 우리 스스로 위기를 타개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을 뿐입니다.”
“멋진 생각이로군.”
호응을 했지만 카슈트론의 고민은 더욱 깊어지기만 했다.
현재 드래곤의 전력으론 결코 신족을 압도할 수 없다.
지구로 뻗어올 그들의 마수를 피하기 위해서는 타 종족과의 연계가 반드시 필요했는데 악마와의 관계가 틀어진다면 남은 것은 신밖에 없었다.
“고민해 볼 문제로군. 아주 많은 고민을 해볼 문제야.”
“어르신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최대한 노력해 봄세.”
순순히 수긍했지만 카슈트론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악마의 에고요?”
뜻밖의 말을 들은 세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와 전투를 하면서 소멸되어 상당 부분 흩어졌으니 오히려 악마의 에고를 기본 베이스로 삼는 게 어떨까 싶어서.”
“확실히……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흑마법과 상성이 잘 맞을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럼 사념을 모아 보도록 할게. 악마라면 확실히 괜찮겠지.”
물론 그것은 기본 베이스일 뿐, 전체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었다.
악마의 사념은 자칫 에고 자체가 악마의 의지를 띨 수 있기에 굉장히 위험한 시도였다.
“간단한 방법을 두고 이제야 깨닫다니.”
“당시에는 정신이 없었을 테니까요.”
“그렇기는 한데, 다른 곳에 정신 팔고 있고. 나도 멀었어.”
자책하는 준성을 보며 세희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녀오세요.”
“멋진 걸로 만들어 올게.”
작별 인사를 남긴 준성은 공간 이동을 통해 악마와 전투를 벌였던 장소로 이동했다. 나무로 빼곡했던 숲은 눈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피폐하게 바뀌어 있었다.
품속에서 마나석을 꺼내 든 준성은 에고 형성을 위한 사념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우웅! 우우웅!
거센 공명음과 함께 마나석에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주변 일대에 돌아다니는 사념을 끌어들였다.
검은 기류가 생성되면서 마나석으로 하나둘씩 빨려 들어왔지만 이내 중단시킬 수밖에 없었다.
“악마의 사념이 없어?”
가장 중요한 악마의 사념 자체를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번진 준성은 다시 한 번 마법을 시전했지만 여전히 같은 결과만 나왔다. 악마의 사념은 존재하지 않았고, 찾아볼 수도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의미하는 건 하나였다.
“소멸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신언에 의해 어둠이 소멸되었지만 악마는 존재를 유지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악마가 여전히 생존해 있으며, 악마 자체가 순수한 어둠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곧, 신이 자신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악마가 존재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
한 차례 전투로 확실하게 적으로 돌아선 상황이었다. 강력한 힘과 혼자 다닌다는 점을 감안하면 신족보다 더 위험한 존재였다.
자신에게 당한 전적이 있으니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노릴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살아 있어도 상관없다. 어떻게 돌아가더라도 내 뜻을 관철시키면 되니까.”
예전과 확연하게 달랐다. 다시 보는 그날, 확실하게 제거하겠다는 생각과 함께 준성의 몸이 빛에 휩싸이며 자취를 감추었다.
김기정이 국제 능력자 연맹 수석 의장으로 취임한 뒤,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취임식에서 능력자들이 적절한 대우를 받게 하고, 정치적인 일에 휩쓸리지 않게 노력하겠다는 말은 곧장 대한민국을 휩쓸었다.
단순한 취임사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는 세계 능력자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이었다. 더 이상 국내의 권력으로 어찌해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대한민국 A.O. 본부도 대대적인 변화에 들어갔다.
김기정의 빈자리를 대신하여 박근태가 본부장 자리에 오른 것이다.
본래 부본부장인 한소영에게 바통이 전해졌으나, 그녀가 고사함에 따라 그동안 혁혁한 공을 세운 박근태가 본부장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본부장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고맙네. 자네 덕분에 인연이 없을 거라 생각하던 이 자리에 오르게 되는군. 본부를 대표해서 다시 한 번 고맙네.”
준성이 대한민국 A.O. 본부에게 준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박근태는 연신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몇 마디 찬사를 주고받던 둘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늘 용건이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준성이었다.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요.”
“얼마든지 말하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게 있다면 발 벗고 나서지.”
“A.O. 본부가 아니라 본부장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다른 게 아니라 아티팩트 제작에 관련된 능력이지요.”
“내 능력과?”
박근태는 대한민국 내에서 가장 뛰어난 정신계 능력자였다. 처음에는 그것을 주목하지 않았으나, 에고 제작 과정에서 흑마법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방향을 돌리게 되었다.
현재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사념을 모으는 것인데, 준성의 흑마법 조예가 그리 깊지 못하다 보니 그런 세세한 점을 걸러 내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혹시 옛 유품에 서려 있는 사념을 읽는 것도 가능합니까?”
“어렵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네. 물건에 서려 있는 사념을 읽는 것도 가능한 일이니.”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박근태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자, 준성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럼 그 능력을 담은 아티팩트도 만들 수 있습니까?”
“불가능하지는 않겠지.”
“부탁드리겠습니다.”
박근태의 고개가 끄덕여지는 순간, 준성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깊은 고민 끝에 준성이 선택한 것은 역사적으로 뛰어난 영웅들의 사념을 모으는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그들의 사념 조각을 모은다면 준성이 원하는 에고가 만들어질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악마 제거에 실패하고, 그의 사념도 얻지 못하여 낙담한 준성을 위로하던 이나가 옛 영웅들이라면 사념이 있지 않을까 언급했고, 정신계 능력자들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는 말에 찔러본 것이었다.
그 결과가 성공적이니 준성으로서는 대만족이었다.
“제 공이란 걸 잊으면 안 되고요!”
“당연하지. 이나 아니었으면 에고 문제로 끙끙 앓았을 거야.”
어려울 때 나타나 해결책을 제시해 주니 이나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 없었다.
“그러니까 저…….”
얼굴을 붉히며 몸을 배배 꼬는 이나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티를 역력하게 냈다.
“부탁할 게 있으면 말해도 돼.”
“정말요?”
반색한 이나는 거절하지도 않고 바로 원하는 것을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헛된 시도에 지나지 않았다. 둘만 있는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세희가 들어와 말했다.
“미안, 이나야. 준성, 그분께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해요.”
“할 말?”
“네, 제법 급한 것 같았어요. 준성이 응해 주길 바란다고 했어요.”
“알았어. 대충 무엇 때문에 날 부르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니.”
고개를 끄덕인 준성은 몸을 일으켜 방을 벗어났다.
둘만 있는 곳에서 야릇한 분위기를 조성하다가 졸지에 소박맞은 처지가 된 이나는 샐쭉한 눈으로 세희를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못 본 척했다.
“갑자기 청해서 미안해요.”
오랜만에 본 신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무언가 이상 징후가 있음을 느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대답했다.
“아닙니다, 지금쯤이면 제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아마 알고 있었겠죠. 설마 악마를 그렇게 만들 줄은 저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니까.”
“그는 위험한 자입니다.”
“알고 있어요. 그걸 미처 대처하지 못한 제 잘못이죠. 세상에 그런 큰 어둠이 버젓이 활동할 수 있게 한 것에 깊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어요. 언젠가 반드시 제 손으로 거둬야 할 빚이기도 하고요.”
“그 말씀은 지금 거둘 생각이 없다는 뜻입니까?”
신이 말한 말의 허점을 정확하게 파악한 준성이었다.
악마가 살아 있는 걸 확인했으나, 신도 악마의 존재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맞아요. 정확히 말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에요.”
“그럴 수밖에 없다?”
“네, 모든 게 제 업보죠.”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악마는 제 내면에 생성된 어둠으로 탄생한 존재예요. 당시 제 안에는 오로지 복수를 하겠다는 의지로 가득했고, 그 책임의 대부분을 악마에게 맡기고자 했죠. 그러다 보니 악마가 탄생할 때 제 모든 힘을 가지고 갔고요.”
악마가 지닌 힘을 감안해 볼 때 수긍이 갔다. 신언을 시전할 때까지 전력을 아끼려던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다 보니 악마와 저의 연결 고리는 생각보다 더 강해요. 그가 격렬하게 느끼는 감정을 저도 느낄 수 있고, 그것은 그 또한 마찬가지죠. 그리고…….”
말을 하려던 신은 멈칫하며 주저했다. 차마 말하기 힘든 내용이라는 걸 짐작했기에 준성은 강한 어조로 말하며 대답을 재촉했다.
“그리고?”
“악마와 저는 한 목숨으로 얽혀 있어요.”
“…….”
충격적인 선언에 준성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