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214)
제94장 나이트 골렘, 영웅이
신과의 대화는 충격적인 발언 이후 이렇다 할 내용 없이 끝나고 말았다. 그는 드래곤과 대화하길 원하는 눈치였지만 이미 합의가 이루어진 상황에서 신에게 힘을 실어 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악마를 어쩔 수 없이 안고 갈 수밖에 없었던 건가.”
사실 신이 악마를 칭함에 있어 지나치게 감싸고도는 면이 없지 않아 있다고 느꼈던 준성이었다.
순전히 자신에게 반하는 존재임에도 끝까지 끌고 가려는 기색을 보였으니 말이다.
그 이유가 목숨을 공유하기 때문이란 걸 알게 되자 적잖은 충격을 느꼈다.
“그렇다면 악마는 소멸되지 않았다는 걸 의미하는데, 제거하는 것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겠어.”
신이 존재함으로써 악마도 소멸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수확이었지만 추후 악마와 조우하게 되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머리가 아파왔다.
힘을 잃었지만 신은 준성에게 여러모로 유용한 존재였다.
가장 큰 이유는 신족들의 목표가 신의 소멸에 있다는 데 있었다.
그가 존재함으로써 자신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상황을 관망할 수 있고, 신족에 대한 정보를 얻어 대비하는 것이 가능하다.
아무리 자신이 론 쉐인을 소멸시켰다고 해도 신족의 가장 난적이 될 신이 목표일 것이다. 그다음은 전쟁을 치렀던 드래곤 정도고 말이다.
“한동안 설치지 못하게 만든 걸로 만족하는 수밖에.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고.”
마음 깊숙한 곳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욕심을 뿌리친 준성은 걸음을 옮겼다.
추후 악마를 찾지 못하더라도 신을 제거하면 악마도 소멸된다는 사실이 그를 안도하게 만들었다.
“어찌 그러한 사실을 말씀하셨습니까!”
“진정해요.”
“지금 진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김준성 그 인간은 믿을 자가 되지 못합니다. 당장 제거를 고려해도 모자랄 판에 존재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약점을 알려 주시다니요.”
크랙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불경한 태도임을 그도 알고 있지만 스스로 목숨을 내놓고 질타할 만큼 지금 사안은 예민한 것이었다.
당사자인 신은 괜찮다고 말을 하고 있었지만 크랙은 쉽게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제 분에 못 이겨 씩씩거리는 그를 보며 신이 입을 열었다.
“크랙.”
“……죄송합니다.”
“그렇게 분노하는 이유를 알고 있어요. 나의 존재를 위협할 수 있는 약점을 알려 준 것도 이해가 되지 않겠죠. 하지만 이 모든 게 노림수라면 어떤가요?”
“노림수, 노림수입니까?”
“물론이에요. 제가 아직 믿지 못하는 그를 위해 털어놓았다고 생각하면 크랙은 저를 잘못 본 것 같네요.”
미소 짓는 신의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낀 크랙은 가볍게 몸을 떨었다.
대체 그는 무슨 노림수로 그런 말을 한 것이란 말인가.
“제 비밀을 알게 됨으로써 그는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악마가 자신에게 큰 위협이 되면 저를 제거함으로써 언제든지 악마를 소멸시킬 수 있다고.”
“그건 위험한 발상 아닙니까.”
“하지만 악마는 큰 타격을 입어 당분간 전면에 나설 수 없는 상태예요.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시간이 주어진 셈이죠. 그럼 그동안 저는 가만히 있을까요?”
“……아닙니다.”
“큰 타격을 입었지만 신격을 회복하고 난 뒤 빠르게 힘을 찾아가고 있어요. 즉, 제 약점을 알고 있다고 자만하는 사이, 저는 힘을 찾을 시간을 벌게 된 거죠.”
모든 것이 계산속에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전신에 소름이 돋은 크랙은 가볍게 몸을 떨었다.
“악마를 제거하기 위해 나를 다시 찾아온다면 김준성과의 인연도 더 이상 이어질 수 없겠죠. 그때는 가만히 있지 않을 생각이에요. 크랙은 힘을 되찾은 제가 인간에게 질 것 같나요?”
“그래도 방심은 금물입니다.”
“물론이에요. 방심의 대가는 신족과 전쟁의 패배로 충분해요. 누구도 믿지 않고 오로지 내 힘만 믿을 수 있죠. 저는 그때를 대비하고 있어요.”
“…….”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날카로운 눈빛에 크랙은 몸을 떨었다.
“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 크랙.”
“하명하십시오.”
“유럽에서 제 이름을 팔면서 몬스터를 토벌하는 이가 있어요.”
“알고 있습니다.”
신의 이름을 팔고 다니는 그녀에게 격분하여 크랙은 정보망을 총동원하여 찾아낼 것을 명령하였다.
“그녀와 충돌을 빚지 마세요. 접촉할 수 있다면 조용히, 가급적이면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데려오세요.”
“예?”
“만나서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요. 그러니 충돌은 하지 마세요. 그녀의 힘은 김준성과 비견될 정도로 강하니.”
“……알겠습니다.”
“꼭 데려오길 기대하고 있겠어요. 그녀의 존재는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 낼 수 있을 테니.”
말을 하는 신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준성이 원하는 물건을 얻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본부장에 오르고 인수인계로 정신없이 바빴지만 준성이 지닌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박근태는 자신의 역량을 십분 발휘하여 원하는 아티팩트를 제작했다.
“감사합니다. 제가 정말 원하던 것입니다.”
“도움이 된다니 다행이군. 그런데 무슨 용도로 사용하려는 건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아티팩트의 능력이 한정되어 있는 만큼 사용할 수 있는 범위는 제한되어 있지만 김준성이라는 인간이 어떻게 움직일지 알 수 없었기에 은근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아직 완성된 단계가 아니기에 확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대한민국과 A.O. 본부에 손해가 나지는 않는다는 건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내가 제작했지만 워낙 성능이 잘 나오다 보니 이래저래 걱정이 되어서 말이야.”
“악용하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놓이는군.”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원하던 아티팩트를 얻는 데 성공한 준성은 세희, 이나와 함께 연일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의 영웅 사념도 나쁘지 않으나 A.O. 본부와 몬스터 대책본부의 협력을 얻어 낼 수 있기에 더 수월한 방향을 선택했다.
준성이 주로 찾아다닌 것은 전쟁 영웅의 자취였고, 그들의 유물이 있는 곳에서 사념의 파편을 챙겼다.
생애 뛰어난 업적을 이루거나 업을 짊어진 그들의 사념은 꽤 많았고, 아티팩트는 그것을 포착하고 마법과 호응을 일으켜 에고 제작에 큰 도움을 주었다.
기존의 사념들은 작은 파동만 일으키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영웅들의 사념은 거세게 마나석을 뒤흔들 정도로 강렬했다.
“아쉬운데.”
그들의 사념은 에고 제작에 큰 도움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움도 있었다.
에고의 기본 베이스를 깔아 줄 수 있는 사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중 정말 우연으로 발견한 옛 무인의 유물은 준성을 흥분으로 몰아넣었다.
“이건…….”
“정말 강렬한 사념이에요.”
옆에 있던 세희도 고개를 끄덕이며 놀라움에 동감을 표했다.
그들의 눈앞에 존재하는 것은 제 형태도 알아볼 수 없는 부서진 방패 파편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느껴지는 사념은 기존의 것들과 차원을 달리할 만큼 강렬한 힘을 발산하고 있었다.
이것을 발견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에 가까웠다. 대한민국 내에서 여러 사념을 모았지만 성에 차지 않았던 준성은 시선을 북한 지역으로 돌리게 되었다.
그리고 아티팩트는 그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고 평양에서 멀지 않은 곡산군에서 강렬한 반응을 감지했다.
“이건 척준경의 방패일 거야.”
“척준경이요?”
“고려시대 무장이야.”
준성은 척준경의 일화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전투에 나섰다 하면 승리를 거두었으며, 단신으로 적진을 헤집고 적장의 수급을 베어 오는 무쌍의 모습까지.
고려시대 무인이자, 폄하된 사실만 기록되었을 것임에도 최강이라 칭해지는 인물의 사념이었다.
그가 영웅인지, 간웅인지는 준성에게 고민할 사안이 아니었다.
당장 원하는 모든 부분을 채워 줄 수 있는 사념의 파편이 존재한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게 대단한 인물인가요?”
“마나도 없는 세상에서 혼자만의 무위로 전쟁의 판도를 바꾼 맹장이지.”
다른 것으로 포장할 단어들도 많지만 준성은 그렇게 칭했다.
“그 정도면 대단하네요.”
“우리가 딱 원하는 것이기도 하고.”
과연 그의 사념이 깃든 나이트 골렘은 얼마나 강력한 무위를 발휘할까.
적장의 수급을 밥 먹듯이 베었다고 하던 그의 전투 경험이 녹은 에고라면 그동안의 고생은 기꺼이 보상된다.
미소 지은 준성은 방패 파편을 향해 아티팩트를 내밀었다.
우우우!
흑마법에 이끌린 사념은 마치 야유를 퍼붓는 것처럼 거센 울림을 일으키더니 이내 마나석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우우웅!
준성의 손에 쥐어진 마나석이 거세게 떨려 왔지만 준성에게 있어 그것은 만족의 표시에 지나지 않았다.
“목표치는 채웠군.”
손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에 그는 미소 지었다.
나이트 골렘의 동체는 이미 오래전에 완성되어 있었다.
생명체가 아닌 기계가 만들어 내는 기술은 이미 지구가 한참 앞섰다. 다만 그 안의 혼이나 장인의 손길에서 차이가 발생했는데, 준성은 그 차이를 그동안 발전한 마법으로 채울 생각이었다.
“이렇게 보니 멋있는데.”
“저도요. 막 두근거려요.”
준성의 말을 이나가 받았다.
완성된 나이트 골렘의 몸은 190센티미터 정도 되는 날렵한 체구에 투구를 쓰고 전신에 빈틈없이 갑옷을 두른 형태였다.
“타나의 크기가 클 수밖에 없었던 건 내 실력이 부족해서였어. 지금은 그때와 확연하게 다르니 형태도 달라지는 게 옳겠지.”
“이게 더 멋져요.”
나이트 골렘의 크기가 줄어든 것은 준성의 실력 발전도 있지만 크기가 큰 것은 현재 상황에서 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타나와 비슷한 크기의 골렘이 세상에 드러난다면 로봇이 나타났다며 난리가 날 것이고, 출처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들쑤시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에 반해 인간과 비슷한 190센티미터 정도로 만들어 놓으면 사람들이 갑옷을 입은 능력자이겠거니 생각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이미 능력자가 일상생활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기에 그 부분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장 완성되어도 실전에 투입하는 건 무리야. 그때까지 잘 훈련시키는 건 이나의 몫이야.”
“저도 있고, 5호도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휘하에 들어와 매직 나이트가 되었으나 여전히 5호로 불리고 있었다.
“그 부분은 맡겨도 되겠네.”
“후후! 이래 보여도 매직 나이트를 훈련시킨 게 저라고요? 이 정도는 기본이에요.”
이나의 호언장담을 들으며 준성은 에고를 나이트 골렘의 동체에 장착했다.
우웅! 우우웅!
마지막 남은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것처럼 나이트 골렘의 동체에서 강렬한 공명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무시무시한 기세가 주변에 휘몰아치면서 공간을 잠식해 나갔다.
콰콰콰콰!
“기세가 엄청나요…….”
“벌써부터 자신의 존재감을 퍼뜨릴 수 있다는 건가.”
이나의 중얼거림을 들은 준성도 적잖이 감탄하였다. 학습을 거치면서 자아가 만들어지고 점점 강해지는 에고의 특성상 벌써부터 기세를 발산한다는 것은 에고 자체의 잠재력이 만만치 않다는 걸 의미했다.
한동안 밖으로 기세를 발산하던 나이트 골렘의 동체는 어느 순간 완전히 기운을 갈무리한 채 은은한 푸른빛만 맴돌고 있었다.
번쩍!
안광을 뿌린 나이트 골렘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변이 떠나가라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드디어 이 몸이 나타나셨도다! 모두 목을 내놓고 기다려라! 내 이름이 바로! 어? 내 이름은 뭐지? 뭐야? 왜 생각이 안 나는 거야?]뒤죽박죽 섞인 사념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감을 찾지 못한 나이트 골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침묵에 빠졌다.
하지만 그 광경을 지켜보던 준성과 이나에게는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고생 끝에 완성된 나이트 골렘이었다.
마법진의 집적도나, 성능 면으로나 타나보다 월등함을 자랑하여 에고 제작에도 각별한 공을 들였다.
그런데 지금 보인 모습은…….
“……불량은 아니겠죠?”
“아닐 거야, 아마도.”
방금 전 외침이 잘못 들은 것이길 바라며 준성은 현실을 부정했다.
둘의 현실 부정에도 불구하고 나이트 골렘은 몸을 이리저리 불편하게 움직이더니, 이내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파악하고는 준성과 이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야? 엉? 내 모습이 왜 이런 거야? 거기 너희들! 내가 왜 이렇게 변한 건지 알고 있는 거냐.]“준성이 주인 아니에요? 그런데 왜 저런 거예요?”
“분명 각인은 됐어. 아마 제 스스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확률이 높아. 이상함을 눈치챘으니 조만간 반응을 보이겠지.”
말을 하는 준성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지나치게 자아가 강해서 복종의 각인마저 무시하는 것은 그만큼 제멋대로 행동할 가능성이 높다는 걸 의미했다.
[뭐야? 내 머릿속에 왜 이런 생각이 맴도는 거야? 으으으! 네 녀석들! 내게 무슨 사술을 부린 것이냐!]“준 어떻게 하죠?”
“일단 대화를 해봐야겠지.”
쿵쾅거리면서 움직이는 나이트 골렘을 향해 다가간 준성이 입을 열었다.
“이런 결과가 나올 줄 몰랐는데 나는 널 만든 사람이다. 네 주인이라고 할 수 있지.”
준성의 말에 정면으로 부인하려던 나이트 골렘은 멈칫하면서 괴로운 신음을 내뱉었다.
“그렇게 말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 순순히 포기하는 건 어때?”
[인정할 수 없다! 새로운 삶을 얻은 이상 내 것이다! 절대 복종할 수 없어! 으으으! 으으으으!]몸부림을 치면서 외치는 나이트 골렘을 보고 한숨을 푹 내쉰 준성이 말했다.
“그럼 실력으로 누르면 인정해 주겠어?”
[물론이다! 어, 어어어?]호기롭게 대답하던 나이트 골렘의 움직임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주인에게 무기를 내밀 수 없는 특성을 이용하여 그 자리에 묶어 버린 것이다.
“조금 아플 수도 있어.”
쐐액!
준성의 손을 떠난 푸른 화살이 빠른 속도로 날아가 골렘의 복부를 꿰뚫었다.
[끄아악! 끄아아아!]벌렁 넘어진 골렘은 비명을 지르면서 바닥을 뒹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이나가 준성에게 물었다.
“골렘도 고통을 느껴요?”
“평소라면 느끼지 못했겠지. 그런데 고통을 느낀다는 건 벌써 동체를 통제할 수 있다는 거야. 놀라운 장악력이지.”
“재능은 대단한데, 별로 신뢰가 가지는 않네요.”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아프네.”
준성의 진심이었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선 골렘은 준성을 향해 외쳤다.
[이건 너무 비겁해. 재대결을 요청한다.]“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뜻?”
[그렇다! 저 여자라면 제법 재미있는 대결이 될 것 같군.]본능적으로 준성에게 대적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차린 골렘은 옆에 서 있는 이나를 골랐다.
여자라고 만만해 보였던 것이다.
“제가 교육 좀 시킬까요?”
“부수지는 마.”
“물론이죠.”
입꼬리를 말아 올린 이나가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섰다.
“거기, 깡통. 내가 상대해 줄 테니 마음껏 덤벼 봐.”
[뭐? 깡통? 감히 이 위대한…… 누구더라? 어쨌든 내게 덤비다니! 후회하게 해주마.]“얼마든지.”
촤아악!
골렘의 손에 금광이 번뜩이더니 검 한 자루가 생겼다.
“확실히 자아가 지닌 재능은 대단해. 검을 형상화시킬 수 있다니.”
타나가 온전히 자아를 성립하고 경험을 쌓였을 때 시전하던 형상화를 곧장 시전하니 준성의 놀라움은 클 수밖에 없었다.
준성이 측정한 나이트 골렘의 성능은 제 기능을 모두 발휘할 때 그랜드 마스터 중에서 엘리엔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타나가 활용하던 신검급의 아티팩트가 곁들어진다면 그 수준은 더욱 상승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온전히 무위를 발휘할 수 있을 때였다.
이제 갓 정신을 차리고 움직이는 나이트 골렘이 감당할 만큼 이나는 만만치 않았다.
퍽!
[어? 어어! 으아아악!]이나의 검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다리가 뎅겅 잘려 나간 나이트 골렘에게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건 말건 이나의 검은 연신 허공을 가르며 골렘의 동체 곳곳을 두드렸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이게 현실이야. 현실을 받아들여.”
절규를 터뜨리며 달려드는 골렘이었지만 태연한 어조로 대답한 이나는 연신 검을 날리며 두드려 댔다.
쾅! 쾅! 콰과광!
탁월한 복원력으로 제 형태를 갖추었지만 그마저도 오래 이어지지 못할 만큼 그녀의 공격은 날렵했다.
“준이 영웅의 자아를 지녔다고 하던데 별거 아니네. 쓸데없이 자존심만 높아가지고.”
[죽인다, 계집!]“뭐, 계집?”
푸른 안광을 뿜어내며 일갈을 터뜨린 골렘이었지만 그것은 도리어 이나의 안색을 싸늘하게 굳도록 만들었다.
이어진 것은 검의 폭격이었다.
[끄아악!]놀라운 동화율을 보이는 골렘은 연신 괴로워하면서 바닥을 뒹굴었다.
“정했어. 이제부터 네 이름은 영웅이야. 영웅 출신이니 영웅이라는 이름이 좋겠어. 좋지?”
[다, 닥쳐! 누가 그런 하찮은 작명을…….]꽝!
“영웅이야. 알았어?”
[…….]폭력을 일삼는 이나의 행동에 골렘은 침묵했다.
이나의 철저한 교육과 시간의 흐름은 골렘의 자아가 안정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반대로 자아가 지닌 성향을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게 해주었다.
[크하하하! 다 죽어라!]광소를 터뜨리며 몬스터에게 달려드는 골렘을 보며 이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말을 했어도 단세포 생물처럼 까먹고는 했다.
“준, 저거 정말 성능 좋은 골렘 맞나요?”
“맞아, 성능 자체는 타나보다 좋으니까. 그런데 저렇게 단순한 성향을 지닐 줄은 몰랐네.”
골렘의 주 자아가 된 척준경의 사념은 에고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준성이 놀랄 정도로 단순했다.
“지금이라도 다시 만드는 건 어렵겠죠?”
[다시 만들다니! 내가 있는데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이냐!]어느새 몬스터를 제압하는 데 성공한 영웅이가 다가와 외쳤다.
“피 좀 닦아!”
인상을 찡그리며 이나가 외치니 반박하지 않고 조용히 동체의 피를 털어냈다.
“몸을 움직이는 데 문제는 없고?”
[없다. 이 몸의 위명에 걸맞은 성능을 지녔더군!]이나가 이름을 지어주기 전까지 제 이름조차 언급하지 못했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다행이긴 한데 조금 더 빨리 성장해 줬으면 해.”
[이 정도도 충분히 훌륭하다, 주인!]“네가 상대해야 할 자들은 저 몬스터들이 군단으로 몰려와도 한 수에 몰살시킬 수 있는데?”
[뭐, 뭐라고?]“그리고 이나도 상대하기 힘들 정도로 강한 자들이 많아.”
[대체 어떻게 이루어진 거냐, 이 세상은!]자신이 살던 시대를 기억하는 영웅이로서는 괴물 중 괴물인 이나보다 강한 자들이 많다는 것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장 의욕을 불태우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 이것도 나쁘지 않겠군. 강자들과의 대결이라! 좋다, 주인! 더 강해질 수 있도록 나도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기대하지.”
영웅이는 다시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해 쿵쿵거리며 뛰어갔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이나는 준성을 바라보며 근심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단순해요. 정말 괜찮겠죠?”
“때로는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아.”
푸른 안광 속에 섞인 전의를 읽었던 준성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족과 한차례 충돌 이후, 타나는 전보다 훨씬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그들 하나하나를 상대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었지만 여럿을 감당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고, 그중에서 리더였던 자는 타나에게도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최대한 적의 이목을 신경 쓰면서 유럽 각지에 산재한 몬스터 필드를 소멸시켜 나갔다.
그런 그녀 앞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크랙의 존재에 멈칫하고 말았다.
“드디어 찾았군, 후욱! 후우!”
“누구?”
“너를 보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시다.”
“불가, 나는 만날 생각이 전혀 없어.”
타나의 활약이 알려짐에 따라 각지에서 그녀를 포섭하기 위한 움직임이 분주했다.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활동하기에 찾아내지 못했지만 자신의 힘을 빌려 권력을 강화하고자 하는 인간의 성향은 이미 꿰뚫고 있었다.
“널 뵙고 싶어 하는 분이 신이어도 그럴 건가?”
“……만날 수 없어.”
날 선 크랙의 외침에 멈칫하는 타나였지만 대답은 동일했다.
그러던 중 그녀의 얼굴이 찌푸려지면서 균열을 일으켰다. 영문을 모르는 크랙이 의아한 표정을 지을 무렵, 강렬한 빛줄기와 함께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찾았군.”
사나운 목소리로 타나를 노려보는 이는 다름 아닌 신족이었다.
그녀를 찾아내고 대결을 벌였던 론 샤키는 여유를 부리다가 단단히 망신을 당한 전적이 있었다.
그날 이후 복수를 다짐하며 이 날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네 버릇을 고쳐 주도록 하마.”
“나한테 진 녀석에게는 관심 없어.”
론 샤키가 어떻게 말하든 타나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돌연 멈칫하더니 미동도 하지 못했다. 론 샤키가 처음부터 권능인 그림자 속박을 펼친 것이다.
“반드시 죽여 주마.”
시야에 미치는 모든 그림자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그녀의 힘은 낮에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피빙! 핑! 핑!
날카로운 빛줄기가 타나를 덮쳐 왔다. 그림자 속박을 깨고 피하려고 했지만 여파가 남아 몸을 자유롭게 운신하지 못했다.
몇 개의 공격이 몸을 스치자 붉은 피가 아닌 푸른 기운이 일렁이다가 제 형태를 회복했다.
“역시 인간이 아니었군.”
“…….”
론 샤키의 중얼거림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은 채 마나 폭발을 일으켜 그림자 속박을 깨버린 타나는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다시 멈출 수밖에 없었는데, 권능이 허공에 뜬 그녀의 그림자를 잡아채면서 움직임을 제한한 것이다.
피슛!
움직임을 봉쇄한 채 빛의 공격으로 전신을 두드리는 론 샤키의 패턴은 단조롭지만 치명적인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짧은 순간 세 차례 공격이 적중된 타나는 크게 비틀거렸고, 론 샤키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걸렸다.
“밑천이 드러났나.”
첫 대결 당시에 그토록 강해 보였던 그녀도 지금은 맥을 추지 못하는 모습에 크게 만족스러워서 패배의 아픔도 씻겨 나갔다.
“…….”
타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 속에 어떠한 고통도 섞여 있지 않아 심기를 자극했다.
“고통스럽게, 잔인하게 죽여 주지.”
“이제 왔네.”
“뭐라고 하는…….”
서걱!
그녀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갑자기 나타난 검격이 타나의 속박을 끊어 버린 것이다.
“뭐냐?”
눈살을 찌푸린 론 샤키가 힘의 근원지를 향해 속박을 걸었다. 하지만 권능이 발현되고 미치기 직전에 날카로운 예기가 그것을 베어 버렸다.
“이게 무슨…….”
권능이 발현조차 되지 못하자 론 샤키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그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던 타나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늦었어, 엘리엔.”
“늦고 싶어서 늦은 게 아니다.”
타나의 부름에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대답한 엘리엔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권능마저 반으로 갈라 버리는 그녀의 검격에 론 샤키는 잔뜩 긴장했다.
“내 힘이 신족에게 통하는지 시험해 볼 기회로군.”
비틀거리다가 간신히 균형을 잡은 론 샤키의 눈은 충격으로 부릅뜨여 있었다.
그녀로서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머리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 차례 마주한 적 있는 타나에게는 망신을 당한 적이 있다. 다시 생각하기 싫지만 너무 무시한 것이 화근이 된 것이다.
그래서 다시 마주한 지금, 그런 기색 없이 처음부터 권능을 전력으로 발휘하여 몰아붙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나타난 여인은 론 샤키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어떻게든 거리를 둔 뒤 권능을 발현하려고 했지만 어느새 거리를 좁히고 바로 앞에 나타난 그녀를 보고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미, 믿을 수 없…….”
슈악!
한 줄기 빛이 스쳐 가더니 론 샤키의 머리와 몸이 분리되었다. 붉은 피가 아니라 강렬한 빛을 뿜어내던 육신은 허망하게 바닥에 쓰러졌다.
“검격이 제법이야.”
둘의 대결을 지켜보던 타나가 다가와서 엘리엔을 칭찬했다. 하지만 차갑게 가라앉은 그녀의 눈동자는 그마저도 거부했다.
“너와 난 동료가 아니다.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 협력하는 사이란 걸 잊지 말도록.”
“모를 리가 없잖아.”
“끝까지 알아뒀으면 좋겠는데.”
그 말을 끝으로 검을 갈무리한 엘리엔이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
잠시 그 뒷모습을 쫓던 타나는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크랙을 향해 고개를 돌려 말했다.
“유감스럽지만 신과 볼 일은 없어. 지금 만남을 갖는 걸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면 신도 납득할 거야.”
말을 마친 타나도 자리에서 벗어났다.
사라진 그들을 쫓을 엄두도 내지 못하던 크랙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방금 전 신족을 상대하는 모습만 봐도 자신이 독단적으로 무언가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일단 그렇게 보고하는 수밖에. 그런데 저 여인은…….”
익숙한 얼굴을 떠올린 크랙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갔다.
한 차례 격전이 벌어지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일단의 무리가 같은 장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본 완 제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당해 버렸군.”
“부활도 안 되는 겁니까?”
엘 카즈가 말했지만 흘러나온 대답은 부정적인 것이었다.
“존재 자체를 소멸시켰다. 이것은 신의 권능으로도 되돌릴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론 샤키를 부활시키는 건 불가능하겠군.”
“그럼 그녀가 지닌 권능은 어떻게 합니까?”
“권능도…… 사라졌군.”
놓치고 있던 부분을 떠올린 완 제이드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신족이 소멸되더라도 자연의 섭리인 권능은 남게 마련이다. 하지만 론 샤키가 지녔던 권능은 어디에도 남지 않은 채 소멸되어 있었다.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엘 카즈.”
“예.”
“론 샤키를 소멸시킨 녀석들을 철저하게 조사하도록. 전투는 불허한다. 어떤 녀석들이 벌인 행각인지 알아오기만 해라.”
“명심하겠습니다.”
“권능은 사라진 것인가, 누가 가져간 것인가? 귀찮게 구는 것이 많군.”
앞을 향해 고개를 돌린 완 제이드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골렘을 완성한 뒤, 본격적으로 운용을 시작하면서 준성은 약속했던 대로 이나에게 일임했다.
매일 처참하게 당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영웅이 훈련 상태는 어때?”
“준이 왜 대단하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아요. 바뀐 몸에 적응을 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고 있어요. 전투 센스도 상당히 뛰어나서 제 공격을 막아내는 것도 익숙해졌고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어 보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타나만큼 강해질 것 같아요.”
“성능 자체는 타나보다 뛰어나니까 엇나가지 않도록 잘 관리만 해줘.”
“그게 쉽지 않아요. 자존심은 얼마나 강하고, 또 말도 엄청 많아서 상대했다 하면 피곤해 죽겠어요.”
“당분간은 고생해 줘. 나나 세희가 해주기는 힘든 분야라서.”
“그래야죠. 영웅이를 잘 단련시켜 놔야 만약의 상황에 대비할 수 있잖아요? 잠시 우는소리를 한 거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고마워.”
당분간 모든 사안을 이나에게 맡기기로 결심한 준성은 세희에게 시선을 옮겼다.
“진척은 어때?”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요.”
“접촉은 해봤고?”
“넌지시 운을 떠봤지만 그들은 학생과 많이 달랐어요.”
부정적인 세희의 대답에 한숨을 푹 내쉰 준성은 고개를 저었다.
“……별수 없나.”
“회유를 곁들이면 가능하겠지만 너무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해요.”
“그럴 테지. 대충 예상하고 있던 문제이기도 해.”
금탑을 세우기 위해 수련 마법사를 포섭한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그 숫자는 다섯 명에서 더 이상 늘어나지 않고 있었는데, A.O. 본부에서 제공한 정보를 토대로 자질을 보인 이가 그것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더 많은 숫자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 준성은 대상을 성인으로 돌렸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 문제 때문에 대한민국에서는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너무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면 차라리 접촉하지 않는 게 우리를 위해서 더 좋을 것 같고요.”
“음, 세희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어.”
“그만큼 그들을 포섭하기가 힘들다는 말로 들어 주세요.”
“그래야겠지.”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는 준성이었지만 여전히 아쉬운 기미를 보였다.
그의 눈치를 살핀 세희가 넌지시 물었다.
“인원을 늘리고 싶다면 외국으로 시선을 돌리는 건 어떨까요?”
“생각은 해봤지만 당장 적용시키기는 어려워. 무슨 이유인지는 알잖아?”
“각국의 기득권과 충돌을 우려하고 계시는 거죠?”
“그들 입장에서 마법사가 무엇인지 몰라도 어떤 재능을 지닌 이들이 빠져나가는 격이니까. 괜한 충돌은 피하고 싶어.”
“하지만 대한민국만으로는 준성의 기대치를 충족시키기 힘들어요.”
“당분간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아.”
세희가 포기하자고 한 사람의 숫자는 도합 열두 명.
그들을 모두 끌어들인다면 충분히 소규모 마탑 형태를 갖출 수 있게 된다.
현실의 벽과 이상 사이에 갇혀 버린 준성은 어떠한 것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당분간 보류. 어차피 그들이 큰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네, 저도 다른 방법을 모색해 볼게요.”
“부탁할게.”
대화를 마친 준성은 가볍게 숨을 골랐다.
나이트 골렘의 상태, 금탑의 건설, 대한민국 A.O. 본부의 관계와 제 위치를 되찾고자 하는 신, 악마, 신족 등 그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이익을 취하기 위해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당장 엘리미스 사업 또한 세희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하고자 포기할 수 없었다.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아픈 가운데, 정기정이 준성을 찾았다.
“그럼 드래곤은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로 결정한 것입니까?”
“당장 드러난 정황을 보면 누구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우리들도 뭉치지 못하는 판국에 어딘가와 손을 잡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지.”
씁쓸한 미소를 짓는 정기정이었지만 준성은 그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를 격려해 주었다.
“나쁘지 않은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닌 세력이 작지 않으니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어떤 복안이 없는가?”
정기정이 무엇 때문에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전개는 자신에게 나쁜 것이 아니었다. 드래곤을 우군으로 둘 수 있다면 그만큼 쓸 수 있는 패가 많아지는 걸 의미했다.
“제가 하는 말은 어디까지나 조언에 불과합니다.”
“물론이네.”
확실하게 선을 그어두는 것이 서로에게 좋았다.
“드래곤들은 당분간 상황을 지켜보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작 그게 전부인가?”
거창한 대답을 기대했던 정기정의 얼굴에 노골적인 실망이 서렸다.
“당연히 아닙니다. 그동안 드래곤은 세계 곳곳에 눈을 깔아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족과 신 사이에 어떤 전쟁이 오고 가는지 지켜볼 필요가 있지요. 제가 보기에 아직 파악하지 못한 제3의 세력도 있다고 봅니다.”
“제3의 세력?”
“그건 아직 확실하지 않아 뭐라고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만, 신족과의 전쟁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들의 정체를 확실하게 파악할 때까지 드래곤은 자중할 필요가 있고요.”
“정보가 힘이라는 의미로군.”
“예, 모든 세력의 정체를 밝혀 낸 뒤, 확실하게 움직일 방향을 정하면 됩니다. 그 전에 한 가지는 분명히 해야겠지요. 드래곤의 정확한 목표는 무엇입니까?”
당사자들이 부인해도 준성과 정기정은 이미 동맹 관계였다. 하지만 그 사실이 준성과 드래곤의 동맹이라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지금 준성의 질문은 신뢰를 얻기 위해서 구체적인 목표를 보여 달라는 것이었다.
“그 부분을 확실하게 말해 줄 수 없네. 각자 생각이 다 다르니까.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분명한 걸세. 우리는 안정을 바라고 있지.”
“단지 그것뿐입니까? 신족이 멸족되지 않더라도 상관없습니까?”
“전쟁에서 패한 우리가 원한을 갖고 있는 건 맞지만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없지. 나를 비롯한 어르신과 바스리엘은 지구에서의 생활을 만족하고 있네. 나머지의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솔직한 속내를 밝히는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어떠한 확언도 없었다.
턱을 매만지던 준성은 냉정하게 말했다.
“드래곤과 저는 서로 도움을 줄 부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확실하게 동맹을 맺지 않은 상황에서 제가 지닌 패를 섣불리 공개할 수 없습니다.”
“물론이네.”
“드래곤의 대답을 갖고 와주십시오. 그럼 저도 알고 있는 정보와 드래곤들의 미래를 위해 같이 고민하도록 하겠습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 대답을 받고 오겠네.”
“좋은 결과가 나오길 기원합니다.”
드래곤과 교섭을 끝낸 준성은 다급한 신의 부름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들은 말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건…….”
“잘 알고 있는 얼굴이지 않나요?”
“…….”
눈앞에 펼쳐진 화면에 준성은 침묵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헝클어지고 있었다.
신족을 밀어붙이고 있는 엘리엔의 검은 현란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미묘하게 달라진 점이 있었는데, 예전처럼 강렬한 살기를 머금은 검이 아니라 한결 차분해진 검을 구사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작은 변화에 지나지 않았다. 준성이 정말 놀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엘리엔이 함께 있는 타나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녀가 왜 저곳에 있는지 알고 싶어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지만…… 그 이유를 왜 묻는 것인지?”
그의 반문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옆의 여인과 만나려고 했어요. 그러던 중 신족이 나타났고, 그를 베어 버렸죠.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거절이었어요. 만날 수 없었죠.”
“저도 미처 예상치 못한 전개였습니다. 일단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간곡한 어조로 부탁하는 신을 보며 준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수락의 의미가 아닌 마음속에 자리하던 한 가지 의문이 풀렸다는 뜻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