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217)
제97장 세상에 드러나는 금탑
“우으으!”
잠에서 깨어난 이나는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켰다.
스케줄이 끝난 뒤 집으로 왔다가 다정한 준성과 세희의 모습에 밤새 검을 휘둘러 열기를 가라앉혔다. 아닌 척해도 둘의 모습을 보고 열이 받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응?”
코를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에 그녀는 주방으로 갔다가 깜짝 놀랐다. 대부분 각자 알아서 식사를 처리하곤 했지만 식탁에 풍성하게 차려진 것은 저 앞에 준성이 한 것임을 알아챘던 것이다.
“준이 갑자기 왜……?”
“일어났어? 자리에 앉아. 오랜만에 음식을 해보고 싶어서.”
“그, 그래요?”
아직 적응이 되지 않았기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는 이나였다. 잠시 후, 세희도 밖으로 나오고 상을 가득 채운 음식을 들면서 식사를 시작했다.
“요즘 너무 심각하게 굳어 있는 것 같아서 기분 전환으로 음식을 해봤어. 어차피 내가 고민을 한다고 해도 당장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좋은 판단이에요. 준성이 앞장서서 고민을 할 이유는 없어요. 천천히 지켜보고 있다가 움직여도 우리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아요.”
고개를 끄덕인 세희가 그의 말을 받았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그래서 아직도 연예인 활동을 하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 금탑의 이름을 알려도 좋지 않을까요?”
“금탑의 이름을?”
“국내에서 받을 수 있는 인원이 한계에 다다랐으니까요. 세희 언니도 더 이상 그 부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했으니 국외로 시선을 돌려야 하는데, 우선 마법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릴 수 있다면 해볼 만한 일 아닐까요?”
“금탑의 확충이라…….”
“준을 둘러싼 세력 구도가 복잡하면 다른 일에 집중하는 것도 좋다고 봐요.”
“어떤 형태가 좋을 것 같아?”
“토크쇼 같은 곳에서 세희 언니가 직접 마법을 시전하는 거죠. 생방송이면 조작하기도 힘들다는 걸 알 테니 파급효과가 크지 않을까요?”
“꽤 오래 전부터 생각해 온 것 같은데?”
“제가 연예인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니까요.”
“알았어, 그 부분은 차근차근 다듬어 보자. 아무래도 자국의 인재들이 유출된다는 건 예민한 문제로 부각될 수도 있거든.”
당장 준성이 공을 들여놓은 김기정만 해도 국제 능력자 연맹에 들어가 있는 상황에서 일이 터지면 오히려 하지 않은 것보다 역효과를 낳을 수도 있었다.
“네, 준비는 되어 있으니 언제든지 말만 해주시면 돼요.”
“고마워.”
“그리고…… 리엔 언니 문제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
조심스럽게 말문을 여는 이나였지만 준성은 그 부분에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세희는 책망의 의미를 담아 이나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 기색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저는 리엔 언니를 비난할 생각도 없고, 그렇다고 옹호하고 싶지도 않아요. 우리를 믿는다면 적어도 어딘가를 갈 때 연유 정도는 설명해 줄 수 있으니까요. 단지 준의 생각이 어떤지 듣고 싶을 뿐이에요.”
“……난 리엔을 믿어.”
“그게 끝인가요?”
“응, 당분간은 지켜보는 게 맞다고 생각해. 차마 우리에게 설명해 줄 수 없는 사안도 있을 거라 보니까.”
“알겠어요. 그럼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을게요. 준도 그것만 알아주세요. 제가 리엔 언니를 싫어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걸요.”
“알고 있어. 이나가 많은 생각을 하고 대답해 준 걸. 고마워.”
“고맙긴요. 오히려 제가 고집을 부려서 준을 괴롭게 만든 게 아닐까 싶어서 미안할 뿐이에요.”
“그렇지는 않아.”
준성도 심각하게 만들지 않고, 이나도 전보다 유연하게 대처하니 분위기는 화기애애한 상태로 이어졌다.
“이나가 말하는 걸 보면 더 이상 예전의 이나라고 할 수 없겠어. 연예인 활동을 하면서 생각도 깊어지고 말도 예쁘게 하니까.”
“제가 원래 좀 예쁘긴 했죠. 히히!”
금세 헤벌쭉하는 모습에 준성과 세희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타나와 엘리엔이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유럽의 몬스터 웨이브는 그 기세가 상당히 약화되었다.
혼자서 해야 할 일을 둘이서 나눠 하니 그 효과가 상당했던 것이다. 타나와 달리 철두철미한 엘리엔은 정체가 들키지 않았지만 신의 기사로 칭해지는 두 여인은 유럽에서 가히 성웅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효과는 있어?”
“있다, 있는데…….”
대답을 하는 엘리엔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타나는 그녀가 어떤 느낌을 받고 있는지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그동안 느껴온 감정을 정리하기 쉽지 않겠지.”
“…….”
“감정의 근원에 뿌리 깊은 분노가 있었기에 판단을 내릴 때도 그것이 기반이 되었어. 얼마 전부터 조금씩 희석되면서 여태까지 느껴왔던 모든 게 혼란스러워지겠지.”
“그동안 내가 결정해 온 모든 게 내 순수한 의지였는지 의심이 되니까.”
“그리고 사랑마저도 의심되고 있지?”
“……맞다.”
무겁게 가라앉은 엘리엔의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처음 약속했던 대로 ‘그분’의 기사가 되어 몬스터를 처리하고, 가슴 깊숙한 곳을 지배하고 있던 분노가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었다.
때때로 터지는 분노를 제어할 수 없었던 엘리엔은 이 현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으나,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져 나왔다.
바로 자신이 결정해 온 모든 사안에 대해 의구심이 피어났던 것이다.
그것에는 준성을 사랑하는 감정에 대한 것도 있었다.
“내가 느꼈던 감정이 사랑일까? 아니면 단지 미안한 감정에 기반을 둔 은혜 갚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겠지.”
“내가 해온 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뜻이냐?”
“그건 내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오로지 혼자서 감당해야 할 무게지.”
“알고 있다.”
“만약 감정이 거짓된 거라 확신을 하게 되면, 원래 세상으로 돌려보내줄 수도 있어.”
“그게 가능하다고?”
“다른 이들은 불가능하지만 네게는 네이처 소드가 있으니까. 신물의 힘을 빌린다면 한 번쯤 더 시도할 수도 있어.”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시간은 많아. 천천히 결정을 내리도록 해.”
혼란스러워하는 엘리엔을 보며 타나는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금탑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자는 이나의 제안은 준성에게 새로운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거리가 되었으나, 그것도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미국에서 날아온 더글라스가 새로운 본부장인 박근태가 아니라 준성을 먼저 찾은 것이다.
“갑자기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건지?”
“부탁드릴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정중한 그의 태도에 박정하게 굴 수 없었기에 준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준성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신의 기사를 만나고 싶다고요?”
“예, 그녀의 존재는 몬스터와의 전쟁에 큰 도움이 될 거라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결 안정된 유럽보다 북미 대륙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두 명의 신의 기사가 활동하면서 유럽 각지를 들썩이게 만든 몬스터 웨이브는 대부분 진정이 되었다.
하지만 북미의 사정은 달랐는데, 세계 최강인 미국은 A.O. 본부의 적극적인 대처로 큰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문제는 캐나다였다.
광활한 영토에 비해 인구가 적은 이곳은 몬스터가 창궐하기 시작하면서 눈에 띄게 숫자가 불어났고, 능력자 숫자에 비해 지킬 곳이 늘어나면서 서서히 한계에 이르고 있었다.
미국 A.O. 본부와 적극적인 연계로 난국을 타개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그마저도 역부족이었다.
“저는 신의 기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자 합니다. 마스터 김은 신의 기사 둘을 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한 분은 얼마 전 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확실히 대단한 정보력이야.’
이미 엘리엔이 신의 기사라 칭해지는 걸 파악한 듯싶었다.
확신을 가지고 온 상대에게 더 말을 해봤자 거짓말이 될 뿐이란 걸 알아차린 준성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녀들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지만, 연락이 닿기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본부장님이 부탁을 하니 한번 시도를 해보겠습니다.”
“그래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괜찮지만 캐나다는 점점 궁지에 몰리고 있는 중입니다.”
“대신 저도 미국의 도움을 받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얼마든지 말씀하시면 됩니다.”
금탑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려면 동조해 주는 아군이 많을수록 좋았다.
미국을 그 울타리 안에 넣음으로써 좀 더 안전하게 안착하고자 하는 준성이었다.
카슈트론은 정기정과 함께 신을 뵙고자 공간 이동을 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최대한 공경하는 마음을 담아 인사했다.
“위대한 존재를 뵙습니다. 대자연으로 돌아갈 늙은이를 이렇게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서 와요.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자리에 앉고, 대화를 나누는 그들의 분위기는 차분했다. 그리고 드래곤이 무엇에 불만을 갖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신은 먼저 선수를 쳤다.
“내게 많이 섭섭했을 거예요.”
“섭섭하지 않다면 거짓일 겁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신이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관조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단지 경쟁에서 도태된 드래곤을 위해 규칙을 깨는 것이 힘든 일일 것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슴속의 원망은 사라지지 않는군요.”
드래곤이 신족에게 패배할 지경까지 몰릴 무렵, 카슈트론은 직접 신과 만남을 통해 중재를 부탁했었다. 하지만 신은 거기에 응답하지 않았고, 결국 지구로 탈출하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그 원망을 지워 달라고 할 수 없음을 알고 있어요. 오늘 이렇게 초대한 건 당시의 내 실수를 사과하기 위함이에요. 그걸 받아들이는 건 개의치 않겠어요.”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신에게서 사과를 받는다는 건 드래곤의 존재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약간이지만 밝아진 카슈트론의 얼굴을 본 신이 넌지시 말했다.
“제가 당신을 초대한 건 사과를 하려던 것도 있지만 김준성이란 인간에 관한 것도 있어요.”
“……!”
전혀 의외의 인물이 거론되자, 정기정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신은 그걸 보았지만 신경 쓰지 않고 카슈트론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어 나갔다.
“그는 얼마 전 우리 세계와 이곳에 얽힌 비밀을 알아차렸어요.”
“그건 굉장히 심각한 사안입니다.”
카슈트론의 주름진 얼굴에 골이 더 깊어졌다.
“자세한 내막을 모르고 있지만 알아차리는 건 시간문제겠죠. 얼마 전, 그가 저를 찾아와서 전쟁이 끝난 뒤 문제를 논의했어요. 우리 모두를 이방인으로 생각하고 있죠.”
“하지만 그는 신의가 있는 인간입니다.”
정기정이 준성을 옹호하고 나서자, 카슈트론은 인상을 찌푸렸다. 신은 그에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였다.
“틀린 말은 아니에요. 하지만 자신과 주변의 안위만 챙기는 이기적인 인간이기도 해요.”
“그건…… 맞습니다.”
틀린 말이 아니기에 정기정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신은 생각에 잠겨 있는 카슈트론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제게 말한 내용은 신족의 소멸을 위해 연대를 하겠다는 의미지만 반대로 신족과 전쟁이 끝나면 그다음은 이 세계에서 떠나주길 원하고 있어요.”
“목적을 이뤘다면 떠나는 게 옳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지만, 거의 멸망한 저쪽 세상보다 이쪽 세상에 정착하는 것이 모두에게 유리하지 않을까요.”
“지금 그 말씀은!”
“세상의 일이라는 건 언제나 변수를 동원하고 있어요. 그리고 멸망할 거라 보았던 새로운 세상이 번영한 모습을 보면서 마음을 달리 먹을 수도 있겠죠.”
그렇게 말을 한 신과 정기정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당장이라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에 헛바람을 집어삼켰지만 신의 눈동자는 모든 것을 삼켜 버릴 대해처럼 고요했다.
“우리는 새롭게 만들 세상에서 그가 어떤 변수가 될지 고려를 해봐야 해요. 그리고 크게 모난 모습을 보인다면…… 제거하는 것도 염두에 둬야겠죠.”
“…….”
신에게 압도된 정기정은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소파에 앉은 더글라스는 넥타이를 풀었다. 목이 편해지는 것을 느끼며 안도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느 정도 일단락이 되었나.”
“축하드립니다. 걱정하던 일이 무사히 해결되어 다행입니다.”
보좌를 위해 함께 이동한 톰슨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고개를 끄덕인 더글라스는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잘되긴 했지만 결국 저들이 원하는 일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지요.”
“별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들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해야만 하는 일이니.”
어느덧 유럽은 안정화가 되었지만 북미 대륙은 상황이 달랐다.
하루가 다르게 증가하는 몬스터로 인해 캐나다는 곤경에 처했고, 미국에 모든 여력을 쏟고 있지만 점점 힘에 부치는 상황이었다.
국제 능력자 연맹도 유럽의 안정화를 위해 힘을 쓰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경에 처한 셈이다.
“몬스터를 물리쳐도 문제가 될 테니.”
“그의 말을 믿는 것입니까?”
“그게 아니면 확연하게 설명되는 일이 없습니다.”
몬스터는 그 자체만으로 커다란 위협이었지만 준성은 정작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설명했었다.
이 부분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돌아가는 정황을 살펴보자 거의 일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몬스터의 등급이 조금씩 낮아지고 있는데, 이는 더 이상 몬스터의 강함으로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 의도가 없다는 걸 의미합니다.”
초창기에 나타난 트롤의 경우 위험도가 B+에서 A-로 분류될 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한 마리가 강림하면 능력자 스무 명이 넘게 나서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조금씩 힘이 약해지기 시작한 트롤은 지금에 이르러 B-에서 C+ 정도로 취급받았다.
예전 오크와 비슷하거나 조금 강한 수준으로 전락한 것이다.
“세계에 포스를 퍼뜨려서 자신들이 원하는 환경을 조성한다니, 참 무서운 일이지요. 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건 당장 몬스터를 처리하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보좌하겠습니다.”
“부탁드리지요.”
앞뒤를 여유롭게 살피면서 전체 상황을 그릴 형편이 아니었다. 더글라스의 중얼거림과 힘차게 외치는 톰슨의 얼굴에는 굳은 결의가 서려 있었다.
유럽 전역을 누비는 타나를 찾는 것은 모래사장 속 바늘 찾기와 같았지만 한 차례 조우 뒤에 그녀의 파장을 감지할 수 있게 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
오늘은 스웨덴에서 일어난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낸 그녀의 뒤로 준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타나.”
“여긴 어떻게?”
놀라지도 않은 표정으로 반문하는 그녀였다. 마치 감정의 고저가 없는 인형과 대화하는 느낌에 내심 쓴웃음을 지은 준성이 용건을 꺼내 들었다.
“엘리엔을 만나고 싶어.”
“그녀는 지금 만날 상황이 아니야.”
“이유를 물어봐도 돼?”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 분명한 건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 정도야.”
“약점의 극복?”
“더 이상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어. 그게 용건이라면 돌아가.”
냉정한 타나의 말에 준성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정보를 캐내려고 했지만 골렘이었던 타나는 사소한 버릇이나 유도 심문 같은 것에 일체 걸려들지 않았다. 오로지 목적을 위해 움직이는 로봇 같은 느낌이었다.
방금 전에도 원하는 것을 얻고자 했지만 티끌만큼의 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다른 게 아니라 타나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난 도와줄 게 없는데.”
“내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타나의 힘을 필요로 하고 있어.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몬스터 웨이브를 막고 있지? 요즘 유럽은 타나의 활약으로 거의 안정이 되었다고 들었어. 하지만 여전히 다른 대륙은 몬스터의 공격으로 힘들어하고 있지.”
“…….”
타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준성의 말을 듣고 있었고, 준성도 거침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유럽이 안정되었으니 다음 목표는 아프리카나 아시아 지역이 아닐까 해.”
아프리카는 치안이 최악으로 내몰린 상황에서 연일 도시 하나가 사라지는 중이었다.
AU에서는 국제 능력자 연맹에 필사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중이었지만 당시에는 유럽의 상황이 더 안 좋았던 만큼 그들을 도울 여력을 보유하지 못했다.
“아시아는 아니다. 그곳은 내가 생각했던 곳보다 훨씬 큰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으니까.”
“그럼 다행이네. 사실 내가 찾아온 건 리엔의 안부를 묻고 싶은 것도 있지만 타나가 북미 대륙의 몬스터를 처리해 줬으면 해서.”
“그곳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알고 있는데.”
“캐나다의 영토가 워낙 광활하다 보니 고생을 하고 있다고 들었어. 이대로 미국의 신경이 그곳에 집중된다면 힘들어하는 다른 곳이 도움을 받지 못하겠지. 그러니 타나의 힘이 필요해.”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겠어.”
“고마워.”
긴 침묵 끝에 얻어낸 타나의 대답을 듣고 준성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리고 엘리엔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지?”
“맞아, 잘 지내고 있어?”
“잘 지내고 있어, 아주 잘. 그리고 자신의 약점도 차근차근 극복하는 중이고.”
“그래?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준성은 안도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지켜보던 타나가 한 마디 툭 내뱉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에 찾아갈 거야. 그때는 기대해도 좋겠지.”
“그게 무슨…….”
영문을 알지 못한 준성이 뭐라고 더 물어보려고 했지만 저 멀리 공간을 도약한 타나의 모습은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기대해도 좋다니? 단순히 회복한 걸 기다리라는 건가?”
엘리엔이 약점을 극복하고 돌아온다면 기쁜 일이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를 죽이고자 했던 타나의 확언인 만큼 준성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한줄기 찜찜함이 남아 있었다.
강이나는 대한민국 연예계의 폭풍이다.
세계에서 자신만의 매력을 뽐내고,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모습에서 젊은 층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지금은 많이 희석되었지만 제주도에서 일어난 몬스터 웨이브를 단신으로 막아내는 모습은 경이 그 자체였다.
늘 화제를 몰고 다니면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활동을 이어 나가던 그녀가 출연할 토크쇼를 고르고 있다는 소식은 방송계를 주목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당초 연예계에서 은퇴할 의사를 보이던 그녀였기에 이번 방송에서 커다란 폭탄을 터뜨리겠다는 예고만으로도 집중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당연히 각 방송사에서는 어떻게든 그녀를 모시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강이나란 브랜드 파워는 높은 시청률을 끌어모을 수 있고, 이는 곧 광고 판매로 이어지는 현상을 만들어 내니 말이다.
여기에서 T기획사는 여러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그리고 치열한 경합 과정 끝에 이나의 출연 권리를 획득한 것은 S방송사였다.
본래 토크쇼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생방송이라는 파격적인 제안까지 모두 수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대신 기존의 한 시간 방영이 아닌 세 시간 연속이라는 파격 편성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단 한 명의 사람으로 인해 정책을 바꾸는 모습은 비난받아 마땅했지만 그만큼 이나의 이름값이 크다는 걸 반증하고 있었다.
심지어 토크쇼의 기본적인 대본 편성조차 없었다.
오로지 MC들의 즉흥적인 역량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는 여지를 만든 것이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그들 입장에서 불안하고,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일이지만 막상 이나를 보는 순간 그 불만은 저 멀리 사라졌다.
“안녕하세요, 강이나입니다.”
“역시 예쁩니다, 여신이에요. 여신!”
“시간이 지날수록 더 아름다워지는 것 같습니다.”
마치 합을 짜기라도 한 것처럼 이나를 보는 순간, 자연스러운 칭찬을 시작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나가 참석하지 않았지만 기본 대본만으로도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을 만들어 냈다.
그녀의 모델 활동에 대한 것과 남자 친구로 알려진 준성에 대한 질문이 주류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준성이 내 남자라고 확실하게 각인시키고 싶은 욕심이 있었지만 오늘 이 자리는 다른 목적이 있었기에 이나는 충동을 꾹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오늘 이 자리를 찾은 이유가 있으시다면서요?”
“맞아요, 사실 어떤 형태로 세상에 알려야 할지 고민이 많았어요. 그러다가 제가 연예계에 활동을 하고 있고, 그동안 저를 사랑해 주시는 팬분들께 많은 것을 받은 만큼 먼저 알리고 응원을 부탁드리는 게 옳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무엇입니까?”
“시범을 보여 드릴게요.”
MC의 반문에 이나는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나이프를 들었다. 빵을 자르는 작은 칼이었지만 그녀가 들기 무섭게 예기가 감돌았다.
“정말 무섭습니다, 이게 능력자인가요?”
“저 지금 떨리는 거 보이시죠?”
“사실 저는 A.O. 본부에서 규정하는 능력자가 아니랍니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그들을 보며 싱긋 웃은 이나가 나이프를 들었다. 그리고 나이프 끝에서 푸른 기운이 맺히는가 싶더니 이내 오러 블레이드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쓰쓰쓰!
“이, 이게 뭡니까?”
화려한 능력들과 비교해서 볼 것 없는 수수한 광경이었지만 검에 솟아난 푸른 기운을 보는 것만으로 전신이 떨려올 만큼 강렬한 두려움이 전신을 지배해 나갔다. 그것은 생방송으로 지켜보고 있던 시청자 또한 동일하게 느꼈다.
“제 힘은 능력자들과 다른 구조로 발현이 돼요. 이것도 엄밀히 설명하면 능력이라기보다 우리가 흔히 보는 무협 소설에서 나오는 것과 같죠. 검기, 검강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게 실존하는 것이었습니까?”
“무협 소설을 많이 읽어 봤는데 정말 그것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무협 소설 팬을 자처하는 MC의 외침에 이나의 설명이 이어졌다.
“능력자들은 저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발현해요. 그 숫자가 여럿인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죠. 하지만 저는 약간 다르죠.”
파아앗!
이나의 나이프에 서린 오러 블레이드가 점점 더 그 크기를 키워 나가더니, 허공에서 네 줄기로 갈라져서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갔다.
그리고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는데, 첫 번째 줄기는 붉은 불꽃으로, 두 번째 줄기는 순백의 얼음으로, 세 번째 줄기는 연녹빛 바람으로, 네 번째는 화려한 금빛 뇌전으로 바뀌었다가 흩어졌다.
“이, 이게 무슨…….”
“정확히 말해서 저는 마법과 검을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마검사죠. 세상에는 몬스터의 위협에 맞서 능력자만이 아닌 우리도 존재하고 있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 드리기 위해 손님을 초대했어요.”
이나의 말과 함께 무대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세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린 MC들이 저마다 반응을 보였다.
“이분은 그 유명한!”
“제 친언니와 같은 분이에요. 오늘 자리를 위해 어렵게 초대를 했어요.”
“한세희라고 합니다.”
MC들이 세희를 보고 오두방정을 떨기 전, 어느새 진행자가 된 이나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지금부터 언니는 보기 힘든 재미있는 현상을 보여 드릴 거예요. 어떠한 조작도 없으니 안심하고 보셔도 될 것 같네요.”
이나의 눈짓을 받은 세희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에 MC들이 뭐라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녀를 중심으로 푸른 기운이 휘몰아치기 시작하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주시했다.
우웅! 우우우웅!
오색영롱한 빛이 휘몰아치면서 지면에 보랏빛 기이한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잠시 후,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다.
야외에서 이뤄진 촬영장 위로 검은 먹구름이 드리우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르릉! 꽈광! 꽈과광!
“안 돼! 모두 장비 보호해!”
오늘 일기예보는 하루 종일 맑음이었기에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대비하지 못한 스태프들은 우왕좌왕했다.
그들의 귓가로 세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비를 맞는 일은 없으니까요.”
“어, 어어?”
분주하게 움직이던 스태프들은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가 반투명한 무언가에 막혀 흩어지는 걸 볼 수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촬영장에서 약간 떨어진 장소였다.
무섭게 장대비가 쏟아지는 촬영장과 다르게 불과 백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은 여전히 화창한 날씨였다.
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란 말인가?
어안이 벙벙한 시선이 둘에게 집중되었다. 특히 이번 현상을 일으킨 것으로 추정되는 세희는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허공에 손가락 하나를 뻗어 가볍게 휘저었다.
꽈릉! 꽈과과광!
“히익!”
무시무시한 천둥이 연이어 지면을 강타하니, MC들과 스태프들이 혼비백산하여 분분히 물러섰다. 하지만 방어막에 가로막힌 천둥은 그대로 흩어졌다.
다시 한 번 손가락을 돌리자, 검은 먹구름은 빠른 속도로 흩어졌다. 그리고 화창한 날씨로 돌아오자 방금 전 장대비를 쏟아 붓던 모든 현상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언니는 저와 다른 힘을 지닌 분이시죠. 제가 마검사라면 언니는 진리를 탐구하며 자연의 섭리를 조종할 수 있는 자, 마법사랍니다.”
“금탑의 마법사 한세희라고 해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고, 곧 세상에 드러날 금탑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세요.”
다시 한 번 손가락을 젓자, 대기에 녹아 있던 마나가 저마다 색을 띠며 모습을 드러냈다.
몽환적은 분위기 속에서 미소 짓고 있는 세희와 이나의 모습은 현실인지 꿈인지 모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날, 대한민국 인터넷은 폭발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