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219)
제99장 왕천후의 오판
“금탑의 일행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왔나? 이제 시작이로군.”
휘하 능력자의 보고에 왕천후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자신에게 힘을 준 엘 카즈란 존재는 조심하라고 했지만 오래전부터 중국이라는 대국을 움직여 온 그에게 있어 몇몇 인물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김준성을 비롯한 강이나의 무위는 세계 10강과 견주거나 그보다 우위에 서 있다는 보고를 들은 적이 있다. 아들인 왕샤오밍도 고초를 겪었던 만큼 최대한 충돌을 자제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솔직히 말하면 자신이 없었지. 내가 얻지 못한 포스 운용법을 익히고 그 힘을 활용하는 데 능숙할 테니. 하지만 내게 이 힘이 생긴 이상, 이야기는 달라졌다.”
정당한 계약으로 얻은 힘의 존재는 왕천후의 무거운 몸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상대가 제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인간일 뿐이다. 그 한계를 뛰어넘은 ‘권능’을 얻은 자신에게 있어 그들은 맛있는 먹잇감에 지나지 않았다.
“몬스터 문제도 해결되었고, 내 무위도 향상되었으니 더 많은 힘을 손에 넣어야겠지.”
센가쿠 열도부터 시작해서 남중국해와 북한 문제까지.
중국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많았지만 압도적인 힘이라면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아니었다.
“세계는 내 손에서 움직일 것이다.”
걸음을 옮기는 왕천후의 눈이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파아앗!
공간 이동으로 모습을 드러낸 준성 등은 늘어서 있는 이들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미리 약속한 장소인 베이징 거리에는 수많은 능력자들과 군인들이 포위망을 구축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성대한 환영이네요.”
“이 정도는 예상하지 않았나?”
“예상 못 했다고 하면 제가 바보 같겠죠? 유감이지만 충분히 했어요. 그리고 너무 생각대로 상황이 흘러가니 기분이 좋지도 않고요.”
자신을 곤경으로 몰아넣었던 이들이 있는 곳이 마음에 들 리 없었다.
쿠웅!
한껏 인상을 일그러뜨린 이나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딛는가 싶더니, 앞을 가로막고 있는 능력자들을 향해 기세를 발산했다.
콰콰콰콰!
강렬한 살의가 실린 그녀의 기세가 삽시간에 주변을 휩쓸기 시작했다.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던 능력자들은 숨이 턱 막히는 느낌과 함께 거대한 살기 앞에 맨몸으로 노출되어 강렬한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크윽! 크으으!”
“으아아아!”
이나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능력자들은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그 사이로 준성 등이 지나가며 걸음을 옮겼다.
“버텨내지도 못할 것들이.”
“많이 짜증 났나 봐?”
“검을 뽑지 않은 것만으로도 칭찬해 주세요. 솔직히 지금도 손이 근질거려요.”
“하하! 우리가 계획한 걸 알고 있잖아? 여기에서 흥분하면 손해를 보는 건 이나야. 그러니 약간만 성격을 죽이고 참아 줘.”
“물론이에요.”
그의 말을 무시할 거였으면 중국이 뻗대고 나올 때 바로 검을 뽑아들고 쳐들어갔을 것이다.
“왔군.”
어느새 거리의 중앙으로 이동을 마친 준성은 멀리서 소란이 일기 시작하더니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내는 걸 보았다.
화려한 붉은색 옷을 차려입은 각진 얼굴의 중년인과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준성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당신이 왕천후 본부장님이십니까?”
“내가 왕천후다. 제법 유창하게 구사하는군.”
통역 마법을 시전한 것이지만 뼛속까지 중화사상으로 물든 왕천후는 그가 당연히 중국어로 말한 것이라 여겼다.
어깨를 으쓱해 보인 준성은 그의 말을 받았다.
“중국 측의 선물은 잘 받았습니다. 아주 성대하게 준비하셨더군요.”
“만족스러웠다니 다행이군.”
“하지만 서로에 대해 오해가 있는 것 같아 풀고자 합니다. 제법 심도 있는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나쁘지 않지.”
미소를 지은 왕천후가 가볍게 손을 휘젓자, 주변에 있던 호위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자, 할 이야기가 있으면 해보라.”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듣고 싶군요.”
“원하는 거라, 나는 모든 것을 원한다. 북한도, 조상들의 어리석은 실수로 잃은 연해주도, 센가쿠 열도도, 모두 세상의 중심인 우리 중화인민공화국의 것이다. 우리는 그만한 역사를 만들어 나갈 역량이 존재하지.”
“포스 운용법을 넘겨받는 대가로 북한을 포기하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우리가 독점하는 것도 아니고 세계의 모든 인간들이 볼 수 있는 걸 가지고 넘겨받으려고 한 건 도둑놈 심보이지 않은가? 애당초 강제성도 없었으니 내가 지킬 이유는 어디에도 없겠지.”
“위대한 중화인민공화국을 이끄는 분께서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쓰겠습니까?”
빈정거리며 도발하는 준성의 말에 왕천후는 양팔을 펼치며 대답했다.
“때로는 대의를 위해 약속도 저버릴 줄 알아야 한다. 그 정도 거짓말도 하지 못해서 어찌 큰일을 할 수 있을까. 오늘 너희들을 부른 것도 내 행보에 방해가 될 것인지 판단해 보기 위함이다.”
“판단이라…….”
“제법 쓸 만한 능력을 지녔다고 들었다. 순순히 나를 위해 일한다면 모든 제재를 풀고 거둬 주도록 하겠다.”
“그럴 생각은 없는지라.”
“결국 쓴맛을 봐야 한다는 건가?”
오만한 왕천후의 말에 준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으니 한 번 겨뤄 보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준, 내가 나설게요.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참지 못할 것 같아.”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선 이나가 강한 전의를 드러냈다.
“괜찮을까?”
“저를 어떻게 보는 거예요? 준이 선물한 듀란달도 있으니 시험해 보는 무대로 삼을게요.”
“알았어, 기대할게.”
준성이 물러나고 이나가 앞으로 나서자, 왕천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네가 강이나인가 보군.”
“이 늙은이가 뭐라는 거야?”
왕천후가 구사하는 중국어를 들을 생각도, 의지도 없는 이나에게 있어 눈앞의 인간은 자신을 죽일 년으로 만든 천하의 죽일 놈이었다.
“제법 예쁘군. 세계를 움직일 이 몸의 애첩으로 삼으면 적당하겠어.”
“그 눈, 기분 나빠.”
만국의 공통 언어인 바디랭귀지의 의미는 정확했다. 왕천후의 눈이 음흉한 빛을 띠는 순간, 이나의 기세도 흉흉하게 바뀌었다. 그리고 허공에 손을 움켜쥐자, 찬란한 금빛과 함께 듀란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오…….”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늙은이.”
파앗!
발을 떼기 무섭게 이나의 몸이 튕겨 나가며 왕천후에게 검을 휘둘렀다.
투웅!
이나가 접근하기 무섭게, 진각을 밟은 왕천후의 몸이 대지와 하나가 되어 굳건하게 버텨 나갔다. 그리고 손을 뻗자, 강렬한 기운이 휘몰아치며 쇄도했다.
쩌엉!
이나가 듀란달을 휘두르자, 푸른 오러 블레이드가 왕천후의 힘을 말끔하게 소멸시켰다.
“제법이로군.”
입꼬리를 말아 올린 왕천후는 재차 두 손을 휘두르며 권풍을 일으켰다.
그의 앞을 가로막던 능력자들을 추풍낙엽처럼 쓸어버린 강렬한 공격이었지만 이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귀찮은 선풍기에 지나지 않았다.
“이 늙은이가 아직도 강한 척을 하고 있어.”
쓰쓰쓰!
오러 블레이드가 돋아나면서 강렬한 원을 그리는 순간, 둥글게 뭉쳐져 권풍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황급히 양손을 교차하며 힘을 집중하는 왕천후였지만 오러 서클은 그가 감당하기에 너무나 강력한 공격이었다.
콰아아앙!
“크으으으!”
뒤로 열 걸음 넘게 물러난 그의 양팔은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졌다. 가까스로 균형을 잡은 왕천후의 두 눈에 경악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본 이나가 스산한 미소를 지었다.
“별것도 아니네.”
예전이라면 제법 강한 상대였을지 몰라도 엘리엔과 대련을 하고, 깨달음을 연이어 얻은 이나에게 왕천후는 그리 감흥을 주지 못했다.
“죽여 버리겠다!”
자신이 쌓아온 실력을 처참하게 뭉개 버린 이나의 무위에 왕천후가 불같이 분노하며 그에게 받은 ‘권능’을 발현했다.
콰콰콰콰!
무시무시한 기세가 그의 주변에 피어나기 시작했다.
“크크! 크크크!”
왕천후의 전신 근육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르더니, 마치 이십대로 돌아간 것처럼 젊어졌다.
평범하지 않은 현상에 이나가 눈을 빛내며 감탄사를 흘렸다.
“어라, 이건?”
“권능이야, 조심해.”
준성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이나는 피식 웃었다.
“물론이에요. 그런데 좀 멍청하네.”
“죽어라, 계집!”
말을 할 틈도 없이 달려든 왕천후가 이나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조금 전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와 압도적인 힘 앞에 이나도 함부로 대응을 하지 못하고 물러나고 막아내기에 급급했다.
그럴 때마다 왕천후는 더욱 기세를 끌어올려 이나를 밀어붙였다.
“이나가 위험하지 않을까요?”
세희가 우려를 드러냈지만 준성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오히려 아주 현명하게 대처하고 있어. 예전의 다급한 모습은 보이지가 않네.”
제삼자가 보기에는 이나가 일방적으로 밀리는 듯했지만 실제로는 왕천후가 발휘하는 힘이 끝을 보이길 기다리고 있었다.
“크으! 크으으!”
약 한 시간여 동안 맹공을 퍼붓던 왕천후의 몸이 눈에 띄게 둔해졌다. 어느새 여유를 되찾은 이나는 그를 보며 빈정거렸다.
“권능을 이렇게 멍청하게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네.”
힘의 증폭 방식은 완 제이드와 흡사했다. 하지만 잠력을 끌어 올린 방식은 종래에 파탄을 보이기 마련이었다.
“이런 반쪽짜리도 권능이에요?”
“글쎄, 내가 보기에도 굉장히 약해 보이네.”
“보아하니 이성도 유지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이렇게 이용당하는 걸 보면 내 마음도 약해질…… 줄 알았지?”
퍼억!
화살처럼 쏘아진 그녀가 휘두른 검이 그대로 왕천후의 어깨를 후려쳤다.
“크아악!”
어깨뼈가 부러지면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나는 개의치 않고 검으로 왕천후를 강타했다.
“내가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거든? 그니까 좀 맞자. 아주 많이.”
퍼억! 퍽! 빠아악!
“끄으! 끄으으! 끄아악!”
살벌한 파육음이 울려 퍼졌고, 검 면으로 강타당할 때마다 왕천후가 몸을 뒤틀면서 고통스러운 비명을 터뜨렸다.
일방적인 구타는 한동안 이어졌다. 잘 다진 핏덩이가 된 왕천후를 본 준성이 이나에게 물었다.
“스트레스 좀 풀렸어?”
“네, 후우! 이제야 좀 살겠네.”
그의 위기를 알아차린 중국의 능력자들이 몰려들었지만 세희가 구사한 마법에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근데 이건 어떻게 하죠?”
“필요한 건 모두 얻었으니 굳이 데려갈 필요는 없겠지. 확실히 망가뜨렸지?”
“네, 권능은 붕괴되었고 포스 운용도 제대로 못할 거예요. 그 정도는 해야 저를 건드린 대가를 치른 거죠.”
“잘했어.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할 것 같아.”
“벌써요?”
왕천후는 더 팰 수 없지만 다른 먹잇감이 많았기에 눈을 번뜩이던 이나는 눈에 띄게 실망했다.
“너무 예상대로라 섬뜩할 정도거든. 지금 금탑이 공격당하고 있어.”
“……그럼 어서 가도록 해요.”
“스트레스는 다음에 풀도록 하자. 반격은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알았어요.”
이 모든 상황은 준성이 말했던 대로였기에 고개를 끄덕인 이나가 냉큼 그의 곁으로 달라붙었다. 세희도 마법을 캔슬하고 다가오자 그대로 매스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목적지는 신족이 공격하고 있는 금탑이었다.
처음 중국이 뻣뻣한 자세로 나올 당시, 세희와 이나는 중국이 저리 나오는 이유를 짐작하지 못했다.
이미 한차례 쓴 맛을 본 적 있던 중국 A.O. 본부였다. 준성에 대한 실력을 알고 있다면 보여 줄 수 없는 태도였다.
이에 준성은 저들이 그리 나오는 이유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바로 중국 A.O. 본부와 신족의 결탁이었다.
이러한 의혹 제기는 왕천후와의 충돌이 일어날 때까지 확신을 갖지 못했으나, 금탑을 향한 기습 공격은 모든 사실을 깨닫게 만들어 주었다.
“신족의 공격이면 위험하지 않을까요?”
우려 섞인 세희의 목소리에도 준성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분명 위험하지. 하지만 그 정도 수준에 불과해. 이 정도 수준에 불과하다면 말이야.”
“무슨 뜻인가요?”
“대신족을 제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야.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벌써 신족이 충분한 전력을 갖춰서 공격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는 전혀 아니거든. 아마 소수 신족의 독단적인 행동일 확률이 높아.”
“아…….”
“저들의 계략이 무섭다는 말을 들었지만 아직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신족에게 밀릴 정도는 아니야. 그때까지 충실하게 전력을 깎아둬야지. 이미 준비도 해놨고.”
“그럼?”
“아마 내가 준비한 선물을 맞이하고 있을 거야.”
준성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중국 A.O. 본부와 협력했지만 그들의 존재는 엘 카즈에게 있어 단순한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다.
잠깐의 시간을 벌어 주면 그것만으로도 족한 쓰다가 버리는 패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기에 중국 A.O. 본부의 요구에 응한 준성 일행이 자리를 비우는 걸 보며 곧장 행동에 옮겼다.
“인위적으로 몬스터 필드를 구현한다고? 이건 쉽게 볼 일이 아니지.”
엘 카즈가 김준성이란 인간의 거점인 금탑 파괴를 계획한 이유는 완 제이드의 소멸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그라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인간의 계획에 드래곤과 칼버족 녀석들이 움직였다. 그 구심점이 김준성이라는 걸 알아차린 이상, 속전속결로 녀석의 거점을 무너뜨리고 제거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기존의 몬스터 필드 내 탑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정체불명의 탑은 한반도 전역을 알 수 없는 힘으로 뒤덮고 있었다. 이 부분도 조사가 필요했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탑에 도착한 엘 카즈는 이상 기류를 접해야만 했다.
“역시 말대로군.”
“드래곤…….”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와 함께 몇몇 인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엘 카즈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자신의 감각에 걸려들지 않았는데 드래곤이 어떻게 지척까지 접근할 수 있단 말인가.
“이래서 인간을 얕보는 녀석들은 이런 최후를 맞아. 그러니 제 주제를 알고 설쳐야지.”
혀를 차는 것은 골드 드래곤 아델카나였다. 대놓고 깔아뭉개는 그녀의 행태에 엘 카즈의 표정이 구겨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는 너도 제법 무시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난 생각을 바꾼 지 오래거든? 흥!”
바스리엘의 빈정거림에 아델카나는 바로 반박했다.
“곧 죽어도 자존심은 버리지 않지.”
“잡담은 거기까지. 우리의 목적을 이룬 뒤에 해도 늦지 않는다.”
분위기를 환기한 정기정은 엘 카즈를 바라보았다. 신족이 지닌 무위는 대단했지만 동족 여럿이 포위하고 있는 이상 패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신족?”
“네놈들이 여럿이라고 날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지 마라!”
양손을 활짝 펼친 엘 카즈에게서 강렬한 힘이 뻗어 나갔다.
준성 등이 중국에서 탑으로 돌아올 무렵, 전투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엘 카즈는 신족답게 강했지만 여러 차례 전투로 경험을 쌓은 드래곤들은 그를 차근차근 몰아붙였고, 마침내 제압 직전까지 몰아넣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허공을 가르는 강력한 브레스가 본체를 덮쳐 가자, 비명과 함께 빛이 되어 폭사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덕분에 신족 하나를 제거할 수 있게 되었군.”
“기왕이면 확실하게 하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이죠.”
피잉!
준성의 손을 떠난 보랏빛 화살은 엘 카즈가 폭사한 자리를 향해 날아가다가 그대로 부서졌다. 그 잔해는 사방으로 뻗어 나가 그대로 강렬한 폭발을 일으켰다.
콰광! 콰과과광!
빈 허공에 일어나는 폭발처럼 보였지만 그다음 일어난 현상은 놀라웠다.
키에에에!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더니, 이내 잠잠해지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에 정기정을 비롯한 다른 드래곤들이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건……?”
“이 신족의 권능이라고 보면 됩니다. 저번에 소멸시켰던 동족을 시간 역행으로 되살리는 걸 봤습니다. 맥없이 당한 것도 자리를 떠나면 부활하기 위한 포석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강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었군.”
신족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정기정의 얼굴에 찝찝함이 서렸다. 만약 준성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놓쳐 버리고 앞으로 수많은 위기를 자초했을 테니 말이다.
“좋게 해결되었으니 인상을 펴는 게 어떻습니까?”
“그러고 쉽지만 막상 상황을 지켜보니 마음이 편치 않군.”
“자승자박입니다. 제 권능을 믿고 있다가 허망하게 소멸했으니 신족의 오만함이 부른 소멸이지요. 앞으로 이럴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래야겠지. 도와줘서 고맙네.”
“오히려 제가 고맙습니다.”
서로 필요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동맹 관계는 더욱 견고해질 것이란 걸 둘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준성을 도발한 대가는 컸다.
중국 전체를 손에 틀어쥐고 움직이던 암중배후 왕천후였지만, 모든 능력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강이나에게 당한 처참한 패배는 그의 입지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설상가상으로 어떤 술수를 부렸는지 능력의 발현 회로가 모조리 파괴되면서 더 이상 예전의 무위를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모처에 틀어박혀 시간을 벌고자 했지만 왕천후의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동안 충견 노릇을 하던 중국 공산당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면서 왕천후를 압박해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내부 밀고로 체포된 그는 웃고 있는 초로인을 보며 분노를 터뜨렸다.
“네놈! 장가오창!”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니 참으로 반갑습니다, 왕천후 본부장님.”
“네놈이 어떻게…… 주석! 그 녀석을 불러오라!”
“주석께서는 해외순방 일정이 바쁘신지라 제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급이 떨어져도 양해해 주시길.”
양해를 구했지만 왕천후 앞에 선 장가오창도 7인의 상무위원으로, 당 내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권력가였다.
“본부장님의 약한 모습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만, 본부장님의 위기는 다른 누군가의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주석께서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어 보이십니다.”
“뭐라? 네놈이 누구 덕분에 지금 자리에 오른 것인데!”
“약육강식이란 게 이럴 때 쓰는 말 아니겠습니까? 능력을 잃은 본부장님은 더 이상 우리에게 큰 위협이 되지 못합니다. 정중히 모시도록.”
“놔라! 장가오창! 네놈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공안의 억센 손길에 끌려가는 왕천후의 서슬 퍼런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장가오창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A.O. 본부를 손에 넣는다면 남는 장사겠지. 왕천후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으니 그 정도 사과도 하지 못할까.”
왕천후가 처참하게 망가질 거란 사실은 그가 여전히 건재하던 사흘 전에 전달받았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이어지는 전개는 확실한 왕천후의 몰락이었다.
언제나 그의 그늘 아래 있어야 했던 공산당은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내부에서 잡음이 일겠지만 A.O. 본부를 손에 넣고 움직일 수 있는 걸 감안하면 결코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마스터 김준성에게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고 전하게. 우리는 왕천후처럼 어리석게 대할 생각이 없다는 걸 포함하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원하는 정보를 전달해 준 김준성에게 고마운 마음이 컸다.
대한민국은 발칵 뒤집혔다. 중국으로 향한 이나 일행이 중국 A.O. 본부와 벌였던 전투 장면이 고스란히 세상에 공개된 것이다.
그중 가장 백미는 세계 10강의 강자라 불리는 중국 A.O. 본부장과 이나의 대결이었다.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초월한 둘의 대결 장면과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강자를 제압하는 이나의 무위는 현실인지 영화인지 구분이 가지 않게 만들었다.
적진 한가운데에서 중국 A.O. 본부장을 제압하고, 달려들려던 능력자들을 묶어 놓은 세희의 마법 또한 환상 그 자체였다.
이후,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고 알려진 것은 중국 정부의 정중한 사과와 북한에 대한 권리를 김준성 일행에게 넘기겠다는 선언이 있고 나서였다.
좀처럼 보기 힘든 중국 정부의 사과와 북한에 대한 권리 이양은 그들의 존재를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국민들은 그들을 중국으로 내몰았던 정치권을 질타하면서 어떻게든 합의를 봐서 북한에 대한 권리를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희생해야만 하는 자리에 나설 이는 적었고, 기존에 원만치 않은 관계를 유지했던 만큼 찾아가서 원하는 걸 얻어올 이는 없었다.
준성도 그들이 적극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먼저 나설 생각은 없었다.
아쉽지 않냐는 세희의 물음에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지금 정도가 딱 좋아. 우리를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고, 우리도 다가가지 않는 지금 수준이. 이나도 잘 해결됐어?”
“물론이죠, 조금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물어뜯던 것들이 제게 할 말이 있겠어요? 수틀리게 만들면 어떻게 되는지 전 세계에 보여줬는데요. 앞으로 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스케줄이 빼곡하던 이나도 중국으로 가는 것을 계기로 모조리 비울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금탑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데 역량을 기울일 거야. 바빠질 테니 힘을 빌려 줘.”
“물론이에요! 제게 맡겨 줘요.”
“힘낼게요.”
이나와 세희가 힘찬 어조로 대답했다.
신족의 의식은 더 이상 이 땅의 종족 구성원으로 머무는 단계를 벗어나 그들 스스로가 세계이자, 세계의 지배자로 올라서는 것을 말했다.
신을 무너뜨리고 권능을 손에 넣은 신족은 종족의 한계를 초월하여 신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들 개체가 지닌 힘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 있는 차원의 것이었다.
의식에 모인 것은 아홉의 대신족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신족이 아닌 완전한 신으로 격상하여 하나의 주신을 비롯한 여덟의 대신이 되어 각기 세계의 일부분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리고 태초부터 신족을 이끌고 지금의 영광을 이끈 첫 번째 대신족, 슈 키리사는 자심의 이름을 버리고 스스로의 이름을 테라(Terra)라 칭했다.
테라는 그들 손에 끌려 내려간 전 신(神)이었다.
그는 신성을 얻고, 진정한 신의 반열에 올라선 대신들을 바라보았다.
오늘 이 날만을 기다려 온 그들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것은 마침내 주신의 반열에 올라선 테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신의 일족인 자신들의 목표는 아직도 존재했다.
“테라의 이름으로 명한다. 지금부터 우리는 또 다른 우리의 세계를 손에 넣고자 한다.”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대신들의 귓가를 울렸고, 그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완전한 신이 된 그들의 침공이 개시되는 순간이었다.
준성은 오래전부터 신족의 차원 이동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들이 차원을 넘나드는 원리에 호기심을 가진 것이 아니다.
‘과연 신족들은 차원 이동이 무산되면 미아로 전락할까?’
이 방법이 먹혀든다면 신족을 상대하지 않고서 난적을 손쉽게 제거할 수단을 손에 쥐게 되는 셈이었다. 그에 따라 준성은 신족이 차원 이동하는 방법을 예의 주시했고, 그 위치를 알아내고자 했다.
그리고 신족 대부분은 지브롤터 해협에서 서쪽으로 향한 북대서양 부근에 모습을 드러내어, 이것은 그들이 이용하는 차원 이동 원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걸 알아낼 수 있었다.
키이잉!
차원 이동이 이루어지기 전, 먼저 모습을 드러낸 준성은 공간이 갈라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손을 뻗었다.
문이 완전히 열리기 전 좌표를 무너뜨려 신족의 존재를 지워 버리기 위함이었다.
준성의 마법은 신족이 시전하는 차원 이동에 간섭을 시작하여, 좌표를 바꿔버리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일그러진 좌표로 이동하게 되면 신족은 저 깊은 땅이나 산과 일체화가 되어 그대로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변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준성이 무너뜨린 좌표가 순식간에 복구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파직! 파지직!
“이건…….”
표정을 굳힌 준성은 본래 상태로 돌아가려는 좌표를 다잡으려고 했지만 이는 그의 의지가 발현되기도 전, 먼저 완성되고 말았다.
차원을 무너뜨리는 데 이어 신족의 차원 이동마저 저지하지 못한 준성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자연의 섭리라고?”
마법이 자연의 섭리를 비튼다면 신족의 차원 이동은 자연의 섭리 그 자체였다. 이를 인위적으로 조종하려면 신언을 사용하지 않고서 불가능했다.
신족의 강림을 저지하려는 생각밖에 없었던 만큼 준성은 무리를 하지 않고 안정적인 후퇴를 선택했다.
“차원 이동 자체가 인위적인 현상이 아닌 섭리라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준성의 몸이 빛에 휩싸이며 그대로 자취를 감추었다.
“읏!”
신성을 모으던 신이 돌연 머리를 감싸 쥐며 신음을 흘리자, 곁에 있던 크랙이 깜짝 놀라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하아, 하아!”
크게 숨을 몰아쉬던 신은 이윽고 안정된 표정을 되찾았지만 안색은 어두웠다. 그는 크랙을 향해 시선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신족이 강림하고 있어요. 이제껏 강림했던 것과 차원이 다른 숫자로요.”
“위험한 것 아닙니까?”
“위험해요, 이 세계의 안위를 위협할 만큼.”
“그렇게…… 많은 숫자가 오는 겁니까?”
“숫자는 알 수 없어요.”
고개를 저은 신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했다. 그 말 속에서 여태까지의 등장과 무엇이 다른지 알아차리지 못한 크랙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의 신족은 어디까지나 저를 향해 도전하는 자들에 지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지금의 그들은 완전체가 되어 나타났어요.”
“완전체?”
“더 이상 신족이 아닌 ‘신’이라고 해야겠지요. 온전히 제 권능을 발현할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한 거예요.”
“그런 말도 안 되는!”
경악한 크랙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에요. 일반 신족이라면 가장 낮은 급의 신 정도일 테니까. 크랙은 어서 그에게 가서 알리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설사 준성에게 알린다고 하더라도 무슨 방법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준성의 역량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사라지는 크랙을 보며 신은 눈을 감았다.
“완전한 힘을 갖춘 ‘그’가 나타나면 어떻게 될지…….”
뒷일은 신조차도 생각하기 싫은 것이었다.
다급한 모습으로 크랙이 준성을 찾았지만 이미 신족의 강림 사실을 알고 있는 그는 좋은 말로 다독여 돌려보냈다. 하지만 크랙의 말에서 ‘완전한 신’이 되었다는 것은 심상치 않은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들이 온전한 신이 되었다는 것은 권능을 제 것처럼 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미였다.
이는 개개인의 힘에 권능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는 걸 의미하니, 여태까지 상대한 신족보다 상대하는 것이 더 까다로울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신족들이 강림했어.”
준성은 세희와 이나에게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전쟁인가요?”
“아직은 아니야.”
“왜요?”
전의에 불타던 이나의 표정이 팍 식으며 반문했다.
“저들이 무모하게 달려들다가 이미 상당수 동료들을 잃었는데 무리를 범하겠어? 아마 상황을 지켜보다가 조금씩 마수를 드러내겠지.”
“그래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끔 두는 건 나쁘지 않을까요?”
조용히 듣던 세희가 우려를 드러냈다. 그 부분은 준성 또한 생각하는 바가 있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 하지만 말이야, 신족을 적대시하는 세력이 마냥 약하지만은 않아.”
“우리랑 드래곤, 그리고 신이 전부 아닌가요? A.O. 본부는 신족 휘하에 있을 다른 종족들을 막아내는 게 고작일 것 같고.”
고개를 갸웃한 이나가 묻자, 세희가 보탰다.
“타나도 있잖니. 그리고 리엔 언니도 있고…….”
“아아, 그쪽도 제법 큰 힘이 되긴 하죠. 그래도 부족하지 않나요? 방금 완전한 신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잖아요.”
“방금 말한 것 외에도 하나가 더 있어. 판세를 뒤집어 버릴 만큼 큰 것이.”
“뭐죠?”
“아직 드러난 게 아니니 참고 지켜봐.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미소 지은 준성은 끝까지 둘에게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신족에 대한 소식은 드래곤, A.O. 본부, 그리고 각국 정부로 빠르게 번져 나갔다.
그럼에도 세상은 아무런 동요 없이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당장 혼란이 빚어져 경제와 사회를 비롯한 모든 것이 어지럽혀지는 걸 그들은 원치 않았다.
사회지도층에 속해 있는 정기정은 폭풍전야처럼 고요한 지금의 평화가 무엇 때문에 만들어졌는지 알고 있었다.
바로 ‘돈’이었다.
기득권을 지닌 그들이 보다 안전하게 자본을 빼돌리고, 앞으로 바뀔 세상에서 더 큰 권력을 움켜쥐고자 만들어진 ‘시간 벌기’에 지나지 않았다.
당장 모든 존재가 소멸 혹은 노예로 전락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러한 행태는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T그룹 회장보다 드래곤을 이끄는 지금 위치가 더 중요했다.
“이 기회에 드래곤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자고?”
“예,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요.”
“나쁘지 않다라.”
턱을 매만지는 정기정의 얼굴에 불편함이 묻어 나왔다.
“인간 세상에 있을 당시 신분을 드러내자는 게 아닙니다. 신족이 세상을 어지럽히게 되면 그 대안으로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내자는 것이죠. 언제까지 인간의 눈을 피해 전투를 벌일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신족과의 전쟁은 그러한 여유까지 바랄 수가 없습니다.”
“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고민이 필요한 문제 같네. 신족과 전쟁으로 신경이 곤두서는 상황에서 우리 종족의 존재를 드러내는 게 어떤 여파를 끼칠 수 있을지 짐작하기 힘들 테니까.”
“알겠습니다. 더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겠습니다.”
드래곤의 등장은 곧 혼란에 빠질 인간 사회에 있어 반드시 필요했다.
한때나마 신족과 대등한 무위를 보인 그들이 뒤에 있는 것만으로도 인간들은 용기를 갖고 대항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소극적인 모습은 그리 좋지 못했다.
“오늘 찾아온 건 이걸 물어보기 위한 것도 있지만 다른 것도 있습니다. 신족과 전쟁을 벌일 때 어땠는지 듣고 싶습니다.”
“신족과의 전쟁이라…… 그리 유쾌한 기억은 아니지.”
“어땠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종잡을 수 없었다고 보면 맞겠지.”
“예?”
예상치 못한 말에 준성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정기정이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말 그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네. 처음 우리와 충돌할 때는 정면승부를 고집했지.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가 폴리모프를 해제하지 못하도록 유도하더니, 그들의 지배 아래 들어간 종족을 방패막이로 사용하더군. 승리하기 위한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그게 바로 신족의 전쟁 방식이라고 볼 수 있겠지.”
“그럼 예상하는 것조차 힘든 겁니까?”
“그들은 이전에 승리한 방법을 처음에는 사용해 보지. 가장 최근에 승리를 거둔 전쟁은 누구와 겨뤘는지 알고 있지 않은가?”
“신은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일 테니까. 그래도 가장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건 그분이라는 사실에 변함이 없네.”
“대비하고 싶어도 승리하기 위한 방향을 추구한다고 하니 짐작하기가 힘드네요.”
“그만큼 까다로운 자들이지.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쉬이 짐작이 가지 않는군.”
한숨을 내쉬는 준성을 보며 정기정도 덩달아 표정이 어두워졌다.
“킥킥! 예상했던 대로 그들이 넘어왔습니다.”
낮고 음산한 목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밝은 빛이 존재하는 공간 속에는 두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 두 여인이 서 있었다.
방금 전 웃음을 흘린 검은 머리 청년은 악마였다. 준성에게 소멸의 위기를 겪을 뻔한 후, 모처로 몸을 피한 그는 세계의 지붕으로 불리는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아아! 모든 건 예상대로네요. 이렇게 흘러갈 줄 정확하게 알아차린 당신의 혜안은 놀랍군요.”
악마의 말에 반응한 것은 은빛 머리칼의 청년이었다. 살짝 머금은 미소만으로 마음을 홀려 버리게 만들 정도로 호감이 가는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러면 우리의 계약은 유효한 것입니까?”
“물론이지요.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분을 신뢰하고 있어요.”
“다행입니다. 아아, 정말 다행이야. 요즘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이들이 많아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애써 모은 힘도 모두 잃고 말았지요.”
웃음을 지으면서 악마의 시선은 떨어져 서 있는 녹빛 머리 여인, 엘리엔에게 향했다.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악마는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청년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렇게 힘을 잃은 상황에서 믿어주는 것은 당신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동맹이 유지되는 한, 제가 약속을 어기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킥킥! 물론입니다.”
“그런데 방법은 있는 것인가요?”
“시간이 해결해 줄 것입니다. 그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위대한 신이시여!”
악마에게 신이라 칭해진 청년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지구의 신이었다.
본래 세계의 의지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고 자아가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이면 차원의 신이 격을 잃음에 따라 탄생하게 되었다.
오래전 탄생한 지구와 달리 이제 갓 태어난 그에게 악마의 도움은 반가운 것이다.
그 감정은 고스란히 얼굴 위로 드러났다.
“물론입니다. 두 세계는 각각의 차원으로 나뉠 것이고, 당신은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 신이 될 것입니다.”
“킥킥! 킥킥킥!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환하게 펼쳐질 미래를 상상하며 악마는 지금 이 순간의 무력감을 즐겁게 즐길 수 있었다.
[11권에서 계속>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