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22)
광휘의 기사단
대륙 북부의 강자 적탑의 탑주 카로스만과 벨로세크 제국 그랜드 마스터 트루엘은 비밀스러운 만남을 가지고 있었다. 카로스만이 잔뜩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톨리안 국왕을 죽이는데 실패한 것이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몰랐는데 이제야 그 진실이 밝혀졌군.”
트루엘 또한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하니 톨리안 왕국에 마탑주가 나타날 줄 몰랐다. 아마 마탑주의 개입으로 실패한 것이겠지.”
톨리안 국왕을 제거하기 위해 3명의 소드 마스터와 50 명의 기사를 투입했다. 최상급 소드 마스터인 라이어스 공작이 있다고 쳐도 그들을 막아 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데 임무에 실패했다고 한다. 애초에 어려운 임무가 아니었다. 서부에서 조금 강력하다지만 마법 후진국에 불과한 국왕 ‘따위’를 제거하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간단한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임무에 실패했다. 이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의 도움이 있었다는 걸 뜻한다. 그리고 그것이 이번에 새로 나타난 마탑주의 등장일 확률이 높다. 별일 아니긴 하지만 실패는 실패다. 앞으로 그들이 나아감에 있어 흠이 될 것이고, 그들이 모시는 마스터의 신뢰를 잃게 되는 원인이 될 것이다. 아니, 신뢰를 잃지 않더라도 다른 이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트루엘이 기광을 뿜어냈다. 그랜드 마스터에 이른 그의 전신에서 은은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그까짓 일로 마스터의 신뢰를 잃을 수 없다. 내가 직접 가서 톨리안 국왕의 목을 따 오겠다.”
그런 그의 행동을 카로스만이 제지했다. 그에게 다른 생각이 있었다.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 톨리안 왕국으로 성국의 기사단이 들어섰지. 신탁이 내려 성녀를 찾는다고 하니 그것을 조금만 이용하면 된다.”
트루엘의 눈에 이채로움이 서렸다.
“성기사들을?”
카로스만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것도 성국에서 상위권에 들어가는 광휘의 기사단이 톨리안 왕국에 들어섰다. 그들을 이용하여 새로 등장한 마탑주의 실력을 알아본다. 그리고………”
카로스만의 두 눈에 강렬한 불꽃이 일렁였다. 그 또한 이런 사소한 일의 실패로 스스로 흠이 생겼다고 생각하니 트루엘 못지않게 화가 나 있던 것이다.
“그 실력을 알아본 뒤 직접 처리하는 거다. 우리 둘이서 말이지.”
트루엘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이 열혈의 마탑주도 자신의 생각과 동일했던 것이다. 그 또한 동의의 끄덕임을 보였다.
“나와 같은 생각이라 좋군.”
두 사람은 서로 보며 다시 한 번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8클래스 마법사와 그랜드 마스터가 주시하는 가운데 광휘의 기사단은 톨리안 왕국의 수도 베르디스에 도착해 있었다.
“허허 허 ………”
레도프 국왕은 난감한 표정을 지은 채 눈앞에 위치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초로에 접어든 외모에 순백의 복장을 하고 있는 평범한 남자. 얼핏 봐서는 인자한 중년인 같았다. 하지만 평범한 모습과 다르게 그의 정체는 가이아 성국의 12대신관 중 1명인 볼레크 대신관이었다.
레도프 국왕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끼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신탁에 내려진 성녀가 본 왕국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입니까, 대신관?”
가이아 성국은 톨리안 왕국과 비슷한 영토에 비슷한 군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신앙심으로 무장한 성군과 왕국의 병사는 그 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났다. 게다가 성국은 대륙 10대 그랜드 마스터 중 하나를 보유하고 있는 실정이었기에 세르디아 대륙에서 차지하는 그 비중은 톨리안 왕국과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그래서 레도프 국왕이 성국의 후작급에 해당하는 볼레크 대신관에게도 말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레도프 국왕의 말에 볼레크 대신관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혹시 다른 곳에 성녀께서 계실까하여 이곳에 오는 동안 주변 국가의 도움을 빌어 샅샅이 수색했습니다. 성녀로 간택되셨다면 아마 지금쯤 강력한 신성력을 내뿜고 계실 터. 그런데 저희가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곳 톨리안 왕국에 계실 확률이 높다는 것을 뜻합니다.”
“으음…….”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으며 레도프 국왕은 눈을 감았다. 성국에 협력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지원을 해야 할지 막막했던 것이다. 게다가 성녀라니! 대륙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성녀가 성국에 들어서게 된다면 성국의 힘이 비약적으로 상승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가까이 있지 않지만 다른 국가의 힘이 강해진다는 것은 곧 다른 국가가 상대적으로 약해진다는 걸 의미했기에 레도프 국왕의 마음이 짐짓 착잡했다. 그러한 국왕의 심정을 여러 왕국을 돌아다닌 볼레크가 모를 리 없었다. 레도프 국왕의 성국의 힘이 강해지는 걸 염려하고 있는 건 모르지만, 성기사단에게 얼마만큼의 지원을 할지 고민 하는 것은 알고 있던 것이다. 그는 안심하라는 듯 차분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그리 많은 지원은 필요 없습니다. 단지 저희 성기사단이 왕국 어느 지방에 접어들었을 때 주변을 안내해 줄 가이드만 있으면 됩니다.”
“가이드?”
볼레크의 말에 이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을 짓는 레도프 국왕. 그런 레도프 국왕의 표정을 보며 여느 국왕과 다를 바 없다고 느끼며 볼레크는 몇 번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성녀께서 뿜어내시는 신성력은 여타 다른 신관과 달리 어마어마한 양이고, 아직 통제가 되지 않기에 일정 범위에만 들어가면 느낄 수 있습니다. 때문에 많은 지원을 필요치 않지요.” “그렇군요.”
레도프 국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기사단이 각 지방에 접어들 때마다 가이드를 붙여 주기만 한다면 왕국으로서 부담이 갈 이유가 없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레도프 국왕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혹, 신탁의 내용을 알 수 있습니까? 아무래도 제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테니 말입니다.”
이왕 돕기로 한 것, 최대한 협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야 성녀가 있건 없건 그들의 볼일을 최대한 빨리 보고 빨리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흔쾌히 도움을 주겠다는 레도프 국왕의 말에 볼레크 또한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신탁의 내용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르디모스 대신관이 말해 주었던 해석에 대해 부연 설명도 덧붙여 주었다.
“……이런 내용입니다. 해석으로 보아 대륙 서부에 존재하는 몬스터 랜드 근처에 성녀께서 계실 확률이 높다고 파악되었습니다.”
“음!”
볼레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도프 국왕이 생각에 잠겼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는 속으로 경악하고 있었다. 볼레크가 말한 내용 중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곳, 그리고 단 1번의 이해도 받지 못한 곳, 그들의 해석이라면 최근 그렇게 변화한 곳을 레도프 국왕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심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하고 있었다.
‘설마 마탑주와 성녀가 연관되어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들이 마탑주의 등장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터. 이를 어떻게 한다…….’
아직 이 눈앞의 신관은 거기까지 생각하지 안 했던 듯 했다. 일단 엘에게 연락을 하여 말을 건넬 생각을 한 레도프 국왕은 볼레크에게 말했다.
“각 영지에 최대한 협력하라는 지시를 내려놓을 테니, 오늘은 푹 쉬십시오.”
볼레크는 레도프 국왕의 제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신성력이 충만한 몸이었지만 그는 기사가 아닌 신관이어서 육체가 단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랜 여정으로 피로가 제법 쌓인 상태였다. 미리미리 쉬어 두어야 최대한의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 걸 잘 아는 볼레크는 레도프 국왕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전하.”
레도프 국왕이 짐짓 미소 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대륙에 평화를 가져 을 성녀님을 모시는 일입니다.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겠지요.”
볼레크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성국은 전하의 도움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드디어 끝이다!”
엘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기쁨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탑을 설립하면서 동시에 계획했던 계획, 트를 벨리 전체에 결계를 치는 작업이 마침내 끝난 것이다. 결계를 치는 데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7클래스 마법사인 엘과 6클래스 마법사 실피르가 무려 1년 동안 꼬박 작업을 한 것이다. 하기야 그도 그럴 것이 트를 벨리의 크기는 무척 크다. 어지간한 도시 하나가 들어설 수 있는 계곡 전체에 결계를 치는 데 고작 1년이 걸린 거라면 도리어 빠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곳은 안전할 거야.”
흐뭇함이 가득 담긴 눈으로 엘은 트를 벨리를 훑었다. 엘이 친 결계는 단순한 결계가 아니다. 남들이 가지지 못한 지구의 수식을 이용해 결계에 강력한 방어 마법을 중첩하여 걸었다. 어디 그뿐인가? 일정한 마나 흐름을 약간 비틀어 엘과 실피르를 제외한 다른 마법사가 마법을 전개할 때 상당한 제약을 받게 하였다. 만약 상대가 이곳을 침입하려면 제 힘을 온전히 발휘하기 힘들 것이다.
“수고하셨어요, 엄마.”
엘은 실피르를 보며 빙긋 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결계를 치는 데 족히 2배의 시간은 더 걸렸을 것이다. 엘의 인사에 실피르가 웃음을 지었다.
“뭘 이 정도 가지고 그러니? 앞으로 우리가 살 곳이니 이 정도는 당연한 거지.”
실피르의 안색은 무척 초췌해 보였지만 작업이 끝났다는 것에 대해 기쁨이 가득한 모양이었다. 그녀 또한 엘이 계획한 결계의 위력을 어느 정도 알고 있던 것이다. 그 외에 결계에는 여러 가지 능력이 있다. 지금 가장 큰 기둥을 세우는 데 성공했으니 앞으로 할 일은 세세한 작업뿐이다. 엘의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는 점점 다가오는 성기사단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가장 큰 일을 끝냈으니 이제 남은 건 간단한 일뿐이야. 아직 시간이 어느 정도 있어서 다행이야.’
디벨 상단은 성실하게 엘의 눈과 귀가 되어 주고 있다. 때문에 엘은 가이아 성국에서 파견된 성기사단이 행군에 행군을 거듭하여 이곳 톨리안 왕국에 접근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두르자.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훗날 후회할 수도 있으니 ………”
자리에서 일어난 엘이 결계를 손보려고 할 때, 마탑 쪽 에서 카이나가 달려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급함이 서려 있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엘은 순간 의미 모를 불안감이 일었다. 다가온 카이나가 차분하게 숨을 고르며 엘에게 입을 열었다.
“주인님, 왕궁에서 마법 편지가 왔어요.”
“왕궁이라………”
작게 중얼거린 엘은 실피르에게 시선을 옮겼다.
“엄마, 먼저 들어가서 쉬세요.”
실피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렴.”
“그럼…….”
엘의 몸이 흐릿해졌다. 블링크를 전개한 것이다. 실피르와 카이나는 불안한 시선으로 엘의 사라진 모습을 쫓고 있었다. 마법 편지란 비상시에 연락받을 수 있도 엘이 창조해 낸 통신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부디 큰일이 아니었으면…….”
실피르가 중얼거렸다. 그 옆에 서 있는 카이나도 두 눈에 근심을 가득 담고 있었다.
엘은 마법 편지를 볼 필요를 못 느꼈다. 이 시기에 엘을 필요로 하는 비상이라고 하면 딱 한 가지뿐이다.
‘세레나…. !’
블링크로 단번에 집무실에 도착한 엘은 통신구 채널을 왕궁 채널과 일치시킨 뒤 곧장 통신 수신을 보냈다.
파직! 파지직!
듣기 싫은 수신음과 함에 잠시 후 통신 채널이 일치되었다는 신호가 보였다. 엘은 통신구의 구동어를 외쳤다.
“통신 온!”
띠리링!
푸른색 통신구가 점점 투명해지면서 그 자리에 레도프 국왕의 모습이 나타났다. 엘은 레도프 국왕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그러자 레도프 국왕도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탑주님.”
왕국 회의가 끝나고 근 몇 달 만에 만나는 것이기에 두 사람은 서로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본격적인 대화에 들어갔다. 엘이 레도프 국왕에게 물음을 던졌다.
“하실 말씀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국왕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지 확신을 했기에 마법 편지를 확인하지 않고 곧장 통신을 받았습니다.”
엘의 말에 레도프 국왕의 표정이 대번 굳었다. 그리고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엘에게 물었다. “그, 그렇다면….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입니까?
레도프 국왕의 말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엘. 국왕이 귀족들을 그들이라 칭할 리는 없다. 역시 세레나의 문제가 확실하다.
“……..그렇습니다.”
그러자 레도프 국왕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어찌하여…… 성녀가 될 여자를 데리고 있는 것입니까…….
그로서는 이런 말을 할 수 밖에 없다. 그의 입장에서 엘은 왕국에 꼭 데리고 있어야 할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엘이 성녀를 데리고 있음으로써 그는 필연적으로 성국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막강한 신앙심으로 무장한 성국과 척을 지게 될 시에는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픈 골칫거리를 떠안는 것과 같다. 엘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제가 사랑하는 여인입니다. 그래서 저들에게 내줄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상대는 성국입니다. 신앙심으로 무장한 수십만의 성군을 거느리고 있는…… 제국에 밀리지 않는 강국이 바로 성국입니다. 탑주님이 7클래스 마법사라고 해도 그것은 무리입니다.”
그 말이 엘의 가슴에 너무나 무겁게 다가왔다.
성국!
오로지 신만을 바라보며 굳은 신앙심을 가지고 죽음도 불사하는 그들은 상대하기에 너무나 벅찬 이들이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다. 언젠가 결심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가족을…. 반드시 지켜 내겠다고. 성국이 아무리 강하다고 하여도 지켜 낼 것이다. 엘의 눈에 굳은 결의가 떠올랐다. 그리고 레도프 국왕을 향해 입을 열었다.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 것 하나 지키지 못하는 이가 남자라고 할 수 없으니까요. 전하께서는 부디…. 중립을 지켜 주십시오. 제가 전하께 바라는 건 그것뿐입니다.”
“음!
엘의 굳은 결의를 느껴서일까? 레도프 국왕은 침음을 흘리며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레도프 국왕이 무언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 이며 입을 열었다.
“제가 할 일은 그것뿐입니까?
“그렇습니다.”
“좋습니다. 그 정도는 해 드릴 수 있겠군요.
그 말에 엘은 고개를 깊게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엘은 이것만으로 족했다. 현재 레도프 국왕이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중립이다. 그래야 엘은 톨리안 왕국과 충돌하지 않고, 성국에 모든 집중을 쏟을 수 있으니 말이다.
“이것이 도움이 될는지 모르겠지만….
레도프 국왕은 엘에게 성국에 대한 것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엘은 그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 였다. 설명이 끝났을 때 엘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부디 무사하길 빌겠습니다. 어쨌거나 탑주님은 저희 왕국의 소중한 일원이니까요.
어디까지나 사람으로서 엘이 아닌 탑주로서 엘을 걱정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엘은 그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자신을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나 기쁜 것일 줄이야.
팟!
통신이 끊겼다. 그리고 엘은 몸을 돌려 이제는 골든 벨리라 불리는 곳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스스로 다짐을 되새겼다. 골든 벨리를 내려다보는 엘의 모습은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할 강렬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엘, 그가 드디어 결심을 굳힌 것이다.
“본 왕국은 성국에게 최대한 협조하되 그 지원은 어디 까지나 성녀를 찾는 것에만 국한할 것입니다.”
“……!.”
볼레크는 레도프 국왕의 말에 의문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레도프 국왕이 풀어서 제대로 말해 주었다.
“그러니까 본 왕국은 어디까지나 성녀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만 지원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제야 레도프 국왕의 말을 이해한 볼레크. 그가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물었다.
“그렇다는 건, 혹시 모를 불상사가 생길 경우 지원을 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까?”
그에 레도프 국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근심이 담긴 어조로 볼레크 대신관을 달래듯 말했다.
“그렇습니다. 현재 본 왕국은 세 개의 파벌로 형성되어 그 균형이 하나만 무너져도 위태로운 지경입니다. 어제 하루 종일 심사숙고하여 내린 결정이니 다른 말은 듣지 않겠습니다.” 제법 설득력이 있는 말이다. 볼레크도 톨리안 왕국으로 오면서 그 사실을 성국으로부터 자세하게 전해 들은 바다. 무언가 미심쩍은 면이 있었지만 그는 성국의 힘을 믿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만 해 주어도 감지덕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알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길을 떠나 보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십시오. 부디 대륙의 평화를 가져올 성녀를 찾으시길.”
여러 의례적인 말을 주고받은 뒤 볼레크는 왕궁을 벗어났다. 그리고 광휘의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하이덴 백작에게 말하였다. 그는 하루 만에 바뀐 레도프 국왕의 태도에 미심쩍음을 느끼고 있었다.
“하루 만에 달라진 국왕의 태도를 보아 무언가를 숨기고 있을 터, 그렇다는 것은 성녀가 톨리안 왕국에 있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네. 최선을 다해 성녀를 찾도록 하게나.”
볼레크의 말에 하이덴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알겠습니다, 대신관님. 휴식을 취했으니 톨리안 왕국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하이덴이 자신감 어린 어조로 대답했다. 그렇게 광휘의 기사단은 톨리안 왕국 동부부터 시작하여 차근차근 성녀를 찾는 작업을 시작해 나갔다. 볼레크가 톨리안 왕국에 성녀가 있다는 것을 거의 확신 했기에 성기사들은 하나하나 꼼꼼히 체크를 하다시피 하여 왕국 곳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그렇게 동쪽부터 서서히 서쪽으로 향하여 왕국 서부 영지인 루비어스 백작령에 도착하는 것은 1달여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테란델 후작령을 모두 수색해 본 볼레크는 로웰린을 청한 뒤 홀로 자리하여 중얼거렸다.
“톨리안 왕국을 모두 수색해 보았다. 이제 남은 곳은 이곳뿐. 이곳도 아니라면 더욱 서쪽에 있는 몬스터 랜드로 가야 한다.”
이쯤 되면 자신이 잘못 판단한 게 아닐까 생각해 볼 법도 싶지만 볼레크는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무언가 짚이는 게 없었다면 레도프 국왕이 하루 만에 그렇게 다른 태도를 보일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로웰린이 방 안으로 들어 왔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검술 수련을 하고 온 터라 그녀는 가벼운 경장 차림을 하고 있었다. 로웰린이 방 안에 들어서자 볼레크도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갖추었다.
“아닙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오게 되어 도리어 제가 죄송합니다. 저는 성국의 볼레크라고 합니다.”
“성국의 열두 기둥이신 대신관님의 이름은 누누이 들어왔답니다.”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그들은 본격적인 대화에 들어갔다. 볼레크는 자신의 용건을 꺼냈다. “아마 국왕 전하께서 명령을 내리셨을 것으로 압니다. 현재 저희는 성녀님을 찾아 대륙을 떠돌고 있습니다. 협력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로웰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성녀님을 찾는다는데 당연히 협력해야겠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아낌없이 하겠어요.” 그녀의 시원스러운 태도에 볼레크가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백작님.”
그리고 볼레크는 로웰린의 지원 아래 루비어스 백작령을 샅샅이 누볐다. 약 3일 동안 루비어스 백작령 전체를 누빈 볼레크는 약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톨리안 왕국에 성녀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톨리안 왕국에 존재하는 모든 영지를 다 둘러보았다. 하지만 성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즉, 성녀가 왕국 영토 안에 없을 확률이 높은 것이다. 볼레크 대신관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끙! 골치 아프군. 내 예상이 틀릴 줄이야.”
그런 볼레크의 모습을 본 로웰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좀 더 많은 지원을 했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오히려 백작님에게는 매우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볼레크가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그는 로웰린을 책망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아니, 적극적인 지원에 오히려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볼레크가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응?’
그리고 문득 느낄 수 있었다. 루비어스 백작가의 집무실이 다른 귀족가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집무실은 엘이 다른 귀족가에 꿀리지 말라고 새로 보수해 준 것이었다. 볼레크의 뇌리에 의문이 생겨났다.
‘이상하군. 루비어스 백작령은 내가 알기로 무척 가난한 영지인데…… 이 정도 집무실은 테란델 후작령과 다른 공작령에서밖에 보질 못했는데……’
그러면서 볼레크의 시선이 로웰린에게 향했다. 로웰린은 볼레크가 자신을 바라보자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물었다.
“무언가 하실 말씀이 계신가요?”
“아아, 백작님의 집무실이 다른 귀족가와 다를 바가 없어서 말입니다. 아니, 도리어 두 공작가와 비견되는 집무실을 가지고 계시군요.”
“아아.”
볼레크의 말에 로웰린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랑스러움이 담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사실 이건 이번에 왕국에 새로 설립된 마탑주님께서 해 주신 집무실이랍니다.”
“마탑주? 이번 왕국 회의 때 등장했던 마탑주를 말하시는 겁니까?”
“네, 그분과 저는 꽤 친한 사이라고 할 수 있어서요. 너무 후줄근한 집무실이라면서 통째로 고쳐 주셨지요. 저에게는 정말 고마우신 분이죠.”
“마탑주…… 마탑주라………”
작게 중얼거리며 볼레크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문득 두 눈을 크게 떴다.
‘분명…… 왕국 곳곳을 누볐음에도 마탑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는 것은 마탑이 다른 곳에 위치했다는 것. 그리고 신탁 해석에 있지 않던가. 마법에 차단된 곳에 있을 것이라고…. 그래, 바로 그곳이다. 마탑! 그곳에 성녀님이 계시다!’
결론은 빠르게 도출되었다. 톨리안 왕국에 광휘의 기사단이 가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런데도 성녀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어딘가에 위치한 마탑에 있을 확률이 현격히 높다는 걸 의미한다. 볼레크의 눈이 번뜩였다. 그리고 로웰린에게 물었다
“마탑! 그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에? 마탑요?”
로웰린이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녀는 단번에 볼레크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는 마탑으로 가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성녀가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로웰린의 뇌리에 수많은 생각에 교차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결정을 내린 그녀가 빠르게 대답했다. 무
언가 좋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마탑……. 그러고 보니 마탑의 위치를 모르네요. 탑주님은 제게 그것도 안 가르쳐 주셨거든요.”
“그렇군요…… 볼레크가 아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친분이 있다면서 마탑의 위치를 모르는 게 이상했으나 어차피 알아도 순순히 대답할 확률은 적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로웰린을 바라보며 말 했다.
“며칠 동안 신세를 끼쳤습니다. 저희는 이만 떠나겠습니다.”
“다른 왕국으로 가시는 건가요?”
로웰린이 한 가닥 기대를 품고 말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그녀의 기대를 산산이 부숴 버리는 것이었다.
“아니, 마탑을 찾으려고 합니다. 아직 그곳에는 가보지 못했으니까요.”
그 말과 함께 볼레크가 집무실을 벗어났다. 저택을 벗어나는 성기사단의 모습을 보며 로웰린이 불안감에 가득 찬 어조로 중얼거렸다.
“설마…… 엘님이 성녀를……설마, 아니겠지.”
고개를 저으며 불안감을 해소하는 로웰린.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녀의 예감은 정확했다. 엘은 성녀로 선택된 세레나를 데리고, 성국과 일전을 벌일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택을 벗어난 볼레크가 하이덴에게 물었다.
“톨리안 왕국에 마탑이 들어섰다고 하는데 그 위치를 아는가?”
그 말에 하이덴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쉽게도 마탑주가 나타났다는 말만 들었지, 마탑이 어디에 들어섰다는 것은 어디에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흠! 그렇군. 내 예상에는 그 마탑에 성녀가 있을 것 같네. 헌데 그 마탑을 찾지 못하고 있으니 …….”
“그것이라면 제가 대신관님께 할 말이 있습니다.”
“음?”
볼레크가 말해 보라는 듯 하이덴을 바라보자 하이덴이 자신이 생각하던 바를 털어놓았다. “사실 대신관님이 성녀님께서 톨리안 왕국에 계실 거란 느낌을 받으셨을 때 저 또한 그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루비어스 백작령에서 성녀님을 찾지 못했을 때 혹 마탑에 성녀님이 계시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탑이 어디에 위치했을까 신탁의 해석에 따라 마탑의 위치를 추적해 보았습니다. 물론 성녀님이 마탑에 계시다는 가정 하에 말입니다.”
“오오! 정말 멋지네! 그래, 그래서 마탑은 어디에 있는 것 같나?”
볼레크가 환희에 하이덴이 웃으며 품속에서 지도를 꺼내들었다. 그것인 톨리안 왕국의 영토가 그려진 지도였다. 하이덴은 왕국 서부를 짚었다. 그곳은 루비어스 백작령 이었다.
“신탁의 내용 중 분명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끝이되 끝이 아닌 곳, 단 한 번도 이해받지 못한 곳.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하이덴의 손이 서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의 손이 멈춘 곳에는 오크 포레스트(Orc Forest)와 트를 벨리(Troll Valley)라 쓰인 곳에 멈췄다. 하이덴이 말을 이었다.
“끝이되 끝이 아닌 곳. 그리고 단 한 번의 이해도 받지 못한 곳이라면 이 두 곳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리고 둘 중 마탑이 있을 만한 곳은…….”
하이덴의 손이 트를 벨리로 향했다. 그는 자신감에 찬 어조로 말했다.
“사실 저도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심증이 확실케 하는 사실이 있었습니다. 바로 작년 몬스터 침공 때 트롤 벨리에서 트롤들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떠도는 소문으로는…. 이곳이 사람들이 살기에 최고의 낙원이라는 골든 벨리라 불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군!”
볼레크의 두 눈이 밝게 빛났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으나 하이덴의 말을 들으니 이곳보다 신탁에 더 잘 맞는 곳은 없는 듯했다. 볼레크가 말했다.
“정말 뛰어난 해석이었네. 어서 이곳으로 가 보지. 이 곳이라면 성녀님이 계실 것 같네.”
자신의 의견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에 하이덴이 밝은 표정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대신관님.”
그렇게 광휘의 기사단은 톨리안 왕국에 들어선 지 2달의 시간이 걸려서야 트롤 벨리로 향하기 시작했다.
“후! 어느 정도 끝난 건가…….”
엘은 결계에 마지막 마법을 중첩시키며 중얼거렸다. 성국의 기사단이 톨리안 왕국에 들어선지 2달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엘은 성기사단을 막기 위해 넓게 펼쳐진 계곡 전체에 다시금 마법을 새기고 다녔다. 이는 엘이 새로운 발상으로 만든 것으로, 확인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엘에게 든든한 방어막이 되어 줄 것이 분명했다.
“성국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어. 하지만 그 피해는 최소화해야겠지.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사이로 변한다면 힘들어지는 건 나니깐 말이야.”
그러면서 엘은 앞으로 성국을 어떻게 상대할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띠이이잉!
그 찰나, 엘이 계곡 입구에 설치해 놓은 알람 마법이 작동하였다. 그러자 굳어지는 엘. 그가 계곡 입구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읊조렸다.
“왔군.”
그와 함께 엘의 몸에 새하얀 빛이 생겨났다. 그가 마법을 전개하였다.
“텔레포트(Teleport)!”
스팟!
빛이 폭사하며 엘의 몸이 사라졌다.
엘이 도착한 곳은 계곡 입구였다. 이제는 골든 벨리라 불리는 이곳에 들어서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이곳에는 현재 100명의 사람이 들어서고 있었다. 순백의 신관 복장을 한 이와 새하얀 성갑을 차려입은 그들은 다름 아닌 성국에서 파견된 볼레크와 광휘의 기사단이었다. 계곡 위에서 그들의 모습을 본 엘이 천천히 그들에게 접근했다.
“저들인가, 성국에서 파견된 이들이……?”
그와 함께 엘이 그들에게 점점 다가오자 날카로운 감각을 지닌 하이덴이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볼레크를 붙잡았다.
“누군가가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하이덴이 앞으로 나서 외쳤다.
“누군지 모르지만 숨어서 지켜보지 말고 앞으로 나서십시오!”
웅혼한 신성력이 은은하게 퍼지며 계곡 전체를 뒤흔들다시피 하였다. 강력한 신성력의 힘을 느낀 엘이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블링크 마법을 전개하여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 상공에 나타났다. 허공에 멈춰 선 엘이 순간 100쌍의 시선이 꽂혔다. 볼레크는 눈앞에 나타난 청년이 범상치 않은 인물임임을 느꼈다. 그리고 재빨리 앞으로 나서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저는 성국에서 파견된 볼레크라고 합니다. 당신은 누구신지요?”
엘이 볼레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하였다.
“저는 이곳에 위치한 금탑의 탑주 엘리미스라고 합니다. 저의 대지인 이곳에 성국의 인물들이 무슨 볼일로 오신 것입니까?”
세레나를 누구에게도 내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엘과 반드시 성녀를 찾아야 하는 성국의 인물들. 그들이 마침내 트를 벨리, 이제는 골든 벨리라 불리는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