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222)
제102장 신의 권유
“어라? 다시 보는 얼굴이네.”
칼리는 이나의 얼굴을 보며 미소 지은 채 손을 흔들어 보였다.
자신을 놀리는 느낌에 눈썹을 꿈틀한 이나의 손이 움직였지만 준성이 옆에 있었기에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재미없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금세 시들해지는 칼리였다. 힐끔 그녀를 보다가 헤스티아에게 시선을 옮긴 준성이 입을 열었다.
“이쯤이면 모습을 드러낼 거라 생각했지.”
“이렇게 의도가 읽히는 건 좋은 일이 아닌데요.”
난감한 표정을 짓는 헤스티아였지만 난감함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 이면에는 강한 자신감이 깔려 있음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인간의 힘을 빌리고자 하는 신족이 드래곤을 찾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되겠지. 물론 전쟁을 치른 사이끼리 제안을 주고받을 만큼 매력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우리를 기다린 이유가 뭔가요?”
“좀 더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이전에 들은 이야기만으로는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어.”
“이야기라…….”
애매모호한 미소를 지은 헤스티아는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다가 카슈트론과 정기정에게 시선을 두더니, 순순히 속내를 털어놓았다.
“제가 말했던 그대로예요. 저는 드래곤에게 동맹을 제안하러 왔어요.”
“종족의 명운을 걸고 싸웠던 상대를 찾아와서 동맹을 맺는다는 게 말이 안 되는데.”
“그건 드래곤과 이야기를 나눌 부분이라고 생각되네요.”
“우리는 이미 그와 뜻을 함께하기로 약속했다.”
준성의 말을 끊고 개입을 차단하려던 헤스티아였지만 정기정의 한 마디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모은 그녀였지만 이어지는 칼리의 말이 분위기를 뒤흔들었다.
“뭘 그렇게 고민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 뒤집어 버리면 돼. 고작 이 정도 전력에 연연해서는 안 되는 걸 모르는 거야?”
“후, 드래곤과 동맹을 맺으려는 이유는 정확하게 말해서 이름을 빌리기 위함이에요.”
“헤스티아!”
“지금은 우리의 진심을 보여줘야 해. 그러지 않으면 누구도 설득할 수 없으니까.”
소리 지르는 칼리를 만류한 헤스티아의 시선이 준성에게 고정되었다.
“드래곤의 이름을 빌린다는 건 무슨 의미지?”
“우리의 진군을 멈추기 위해서예요.”
“……저번에 말한 그 내용이군.”
“네, 사실 드래곤의 이름으로 더 이상 우리에게 압박을 주는 건 불가능해요. 하지만 이곳에 온 동족들이 소멸된 건 드래곤의 힘이 작용했죠. 이 정도라면 충분히 명분을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우리는 이용만 당하고 있으라는 의미인가?”
자신들을 마음대로 이용하겠다는 말에 정기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전력의 차이는 인정하더라도 그리 유쾌한 사실은 아니었다.
“현재 드래곤은 그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드래곤 입장에서도 우리의 추격을 받지 않고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하지만 모든 신족이 동의하지 않을 텐데?”
헤스티아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전력이 분열되는 건 당신들에게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꽤 유용한 정보군.”
한 가지 확실한 건 신족이 하나로 뭉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현실에 만족하려는 자와 이곳 지구를 점령하려는 두 세력으로 나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헤스티아는 급진보다 온건 쪽에 속해 있었고, 이해관계가 일치한다면 지속적으로 협력을 가져가는 것도 나쁜 판단은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드래곤에게 할 이야기를 해버렸네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리도 의견의 일치를 봐야겠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인가요?”
“바로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사안이니까.”
“그래도 생각해 볼 문제라고 여긴 걸 만족해야겠네요.”
“그런 셈이지.”
헤스티아가 거짓을 말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여러 곳의 의견을 들어 봐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신은 배제될 가능성이 높았다.
“제법 긴 이야기가 될 거라 생각했는데 간단하게 해결됐네요. 드래곤과는 서로 풀 것이 많았는데.”
“이야기가 잘됐다니 나쁘지 않군.”
“준! 저들을 이대로 보낼 거예요?”
옆에서 지켜보던 이나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것을 들은 칼리는 입가에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왜? 이대로 보내지 않으면 우리를 어떻게 해보려고?”
“못할 것 같아?”
“당연하지.”
둘의 눈이 허공에 부딪치며 강렬한 불꽃이 튕겼다. 당장 달려들 것처럼 몸을 들썩이자, 헤스티아가 먼저 제지하고 나섰다.
“칼리!”
“이럴 때는 눈감아 줘야 하는 거야. 인간이 저렇게 날뛰는데 기회도 안 주고, 칫!”
혀를 차며 물러난 칼리는 아예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헤스티아는 차분한 눈으로 이나를 직시하며 말했다.
“우리가 힘이 없어서 예의를 차린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에요. 서로 원활한 협상을 위한 것이니 다음에 볼 때는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줬으면 좋겠네요.”
“뭐? 뭐? 너 지금…….”
“돌아가요, 칼리.”
“괜히 따라왔네, 입맛만 버리게.”
이나의 말을 듣지 못한 척, 흘려버린 헤스티아는 칼리와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지금은 참을 때야, 다음 기회를 노리자.”
“준…….”
이나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이나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그동안 준성을 따라다니면서 일을 보조했던 그녀로서는 섭섭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걸 느낀 준성은 간략하게 설명했다.
“신족을 편들려고 하는 게 아니야. 다 필요가 있어서 그런 거니 이해해 줄 수 없겠어?”
“무슨 필요인데요?”
“그 둘은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우리를 적대하는 것 같지 않았어. 상황에 따라서는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다고 본 거야. 그런데 수틀린다는 이유만으로 판을 뒤엎기에는 사안이 크잖아.”
“저도 알아요. 다만 제가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해서 그래요.”
“미안, 나도 부주의했어. 한 가지 분명한 건 전투를 벌였다면 우리 둘이서 그 둘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어.”
“에? 준이 있는데도요?”
그저 그들을 활용하기 위해 놓아준 거라 생각했던 이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미 완전체로 신이 된 이들이야. 내가 전력을 발휘하더라도 힘들어.”
“드래곤도 있잖아요.”
“그들이 마냥 우리의 동맹이라 생각하면 안 돼. 전황이 불리해지면 언제든지 몸을 뺄 수 있어.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이나가 권능을 완전히 습득해서 제 것처럼 활용하는 건데, 아직 그건 아니잖아?”
“…….”
“탓하려는 게 아니야. 다만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좀 더 강해져야 해. 나도 그렇고, 이나도 마찬가지야.”
“노력할게요. 대신족을 상대한 적이 있어서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나 봐요.”
“같지만 격은 다르니까. 확실하게 힘을 얻거나 전력의 우위를 점하기 전까지는 신중을 기할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저도 노력할게요.”
“그래.”
이나의 기분이 풀린 것을 확인한 준성은 안도했다.
“그리고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있어.”
“일이요?”
“저들이 손을 내밀었다고 해도 유리한 위치를 버릴 이유는 없잖아. 그러니 가장 중요한 걸 손에 넣으려고 해.”
준성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마주 본 타나와 엘리엔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둘 모두 말이 많지 않았거니와, 호감도 품고 있지 않았기에 언제나 냉기류가 맴돌곤 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엘리엔이었다.
“너는 언제까지 그렇게 따를 생각이지?”
“계약에 따를 뿐,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닌데?”
“지금 그의 머릿속에 있는 계획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을 텐데.”
“위험해도 필요하다면 해야만 하는 일. 나는 임무에 충실하면 돼.”
무감정한 타나의 말을 듣는 순간 엘리엔은 그녀가 인간이 아닌 골렘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처음부터 생명을 위하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은 만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임무에 따를 수 있을 것이다.
“넌…… 언제까지 그를 따를 생각이지?”
“계약에 명시된 그 순간까지. 나와 승부를 내고 싶어서 그래? 그렇다면 당장 겨뤄도 상관없는데.”
“그렇게 나를 싫어하는 이유가 뭐지?”
“그냥, 이라고 하면 믿지 않을 거지? 넌 내 전 주인이었던 엘리미스를 죽이려고 했다가 뒤늦게 사랑한다면서 이곳까지 왔어. 난 그 태도가 이해되지 않고 가증스럽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가증스럽다고?”
“자신의 감정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네가 사랑을 느낀다는 게 말이 돼? 지금 당장 그를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
날이 선 물음에 엘리엔은 입을 다물었다. 그 말마따나 지금 자신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가슴 깊숙한 곳에 뿌리내린 증오를 지워 버린 후, 차가워진 머리로 판단했을 때 정말 준성을 사랑했던 것인지 아니면 미안한 마음과 동경하는 마음을 착각했던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 고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아직까지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결정은 계약이 끝나는 순간에 하도록 해. 지금은 우리가 맡은 임무가 먼저야.”
“……알겠다.”
먼저 신을 따른 타나는 자신을 움직이는 지휘관과 같았다.
고민만 늘어난 엘리엔의 얼굴에 짙은 근심이 드리웠다.
자신의 생각에 빠져 있었기에 그녀는 볼 수 없었다.
타나의 무표정한 얼굴에 한 줄기 미소가 스치고 지나간 것을.
이전부터 공들인 계획은 생각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준성과 이나가 향한 곳은 신족이 이동해 온 차원 이동 통로였다.
이곳으로 오기 전, 간략하게 설명을 들었던 이나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차원의 통로를 망가뜨려요?”
“돌아갈 길이 사라지면 당황하게 마련이니까. 그렇게 되면 이야기를 하더라도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지.”
“협력한다고 했던 건요?”
“아직 동맹을 맺은 건 아니잖아. 우리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과 동등한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건 달라.”
“하지만…….”
차원의 통로는 준성조차 망가뜨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신족들은 그것을 빠른 속도로 복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에 실효성에 대해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무슨 복안이라도 있는 거예요?”
“바로 이나 네가 있잖아.”
“저요?”
“네가 지닌 권능이면 차원의 통로를 훨씬 엉망진창으로 망가뜨릴 수 있어. 움직이는 적에게 적용하기 힘들지만 고정된 물체를 향해 시전하는 건 어렵지 않잖아.”
“맞아요.”
“그걸 유도한 거야, 그럼 갈까?”
“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는 사실에 이나는 미소를 짓고 차원의 통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상 기류가 맴돌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준, 이건……?”
“선객이 있어.”
말을 하는 준성의 표정에 굳어 있었다.
차원의 통로는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했는데, 신족이 지구의 침공을 결정하자마자 공간 자체를 비틀어서 이목을 완전히 감춰 놓았다.
그것을 발견하는 건 준성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이미 이곳을 방문한 이들은 그마저도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공간 자체가 부서져서 완벽하게 형태를 드러낸 걸 보고 이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준, 이건?”
“엄청난 힘이 공간을 강타했어. 그러니 견뎌 낼 재간이 없지.”
“대체 누구일까요?”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아. 먼 거리에서 단숨에 공간을 붕괴시켰으니까. 그리고 이 힘은…… 누구인지 알고 있지?”
준성의 반문에 이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마나의 향기는 누구인지 짐작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타나에요, 그리고 리엔 언니도 있겠죠?”
“선수를 빼앗겼어. 들어가 보자.”
“네!”
이나와 함께 안으로 들어간 곳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순백의 공간이었다. 티 한 점 존재하지 않아 마치 무의 공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끝이 보이지 않아 공포를 유발했지만 준성과 이나는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전투는 벌어지지 않은 것 같은데요?”
“셋 중 하나야. 압도적인 힘으로 신족을 소멸시켰거나, 아니면 지키고 있던 신족이 물러났거나. 그것도 아니면 지키고 있는 신족이 없었을 수도 있겠지.”
정황상 두 번째나 세 번째가 유력했다. 완전한 신으로 거듭난 신족이 제대로 된 저항조차 못 하고 소멸되었다는 것 자체가 믿기 힘들었다.
더 안으로 진입하던 이나와 준성의 눈에 보인 것은 두 인영이었다. 그들의 정체를 간파한 이나가 눈을 반짝이며 목소리를 외쳤다.
“타나! 리엔 언니!”
“……!”
고개를 돌린 둘이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는 것이 보이자, 이나가 다급한 어조로 준성에게 말했다.
“준! 사라져요, 쫓지 않을 생각이에요?”
“지금은 할 말이 없어.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이니까.”
답답한 그의 태도에 이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럴 때 준성이 좀 더 강하게 나가 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만약 그때 엘리엔을 좀 더 강하게 붙잡았다면?
오늘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저는 쫓아갈 거예요. 리엔 언니와 여자 대 여자로 할 이야기가 있어요. 괜찮죠?”
“할 말이 있다면 내가 막을 수는 없지.”
“……곧 올게요.”
말을 남긴 이나가 빠른 속도로 타나와 이나의 뒤를 쫓았다.
전력을 다해 속도를 높여 움직이니, 시야에서 사라졌던 둘을 쫓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다고 여겼던 이나의 등장에 타나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엘리엔은 눈에 띄게 동요하는 기색이었다.
“리엔 언니!”
“…….”
“대답하지 않을 거예요? 왜 그러는 건데요? 의도적으로 피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요?”
성큼성큼 다가오며 거리를 좁히는 이나의 모습에 타나가 엘리엔을 보며 말했다.
“할 이야기가 있어 보여. 난 이만 돌아갈 테니 대화를 나누도록 해.”
스파앗!
그 말을 끝으로 타나의 몸이 빛과 함께 사라졌다. 그것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다가온 이나가 엘리엔을 빤히 직시했다.
“왜 대답을 피하는 거예요?”
“아직 서로 할 이야기가 없으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후우!”
단호한 그녀의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쉬는 이나였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하지만 지금 말을 한다고 한들 설득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언제까지 이럴 건데요?”
“대답할 수 없다.”
“그래서 계속 대립각을 세우겠다고요? 지금 언니의 행동이 어떤 건지 알고 있나요? 계속 이렇게 행동하면 우리보다 언니가 더 곤란해져요.”
“나도 모르지 않아.”
대답하는 엘리엔의 얼굴에는 답답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계약에 얽매여 있어 입을 열 수 없었다. 자신을 구속하는 강제력은 다른 누구도 아닌 신의 권능이었으니 말이다.
그녀가 곤란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 정도는 이나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내막이 존재하고, 준성은 그 부분을 짐작하는 것까지. 그럼에도 쫓아온 이유는 확신을 얻기 위함이었다.
“한 가지만 말해 줘요. 언니는 예전에 내가 알고 있던 리엔 언니가 맞죠?”
그 속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함께 웃고 슬퍼하면서 즐겁게 시간을 보냈던, 짧은 순간이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다.
“……맞아.”
“그럼 됐어요. 준은 원하지 않았지만 내가 고집을 부려서 따라왔거든요. 언니가 우리를 배신하려는 생각이 없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요.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분명히 알아둬야 해요. 계속 시간을 끌다가는 언니가 사랑하는 남자는 내가 독차지할 거란 걸.”
협박 섞인 말에 엘리엔은 미소를 지었다. 잠시나마 준성을 놓고 티격태격하던 순간을 떠올리게 만드는 말이었다. 한결 풀어진 안색으로 이나의 강적을 언급했다.
“그 전에 세희부터 넘어야 하는 거 아닌가?”
“흥! 내가 마음만 먹으면 그건 일도 아니에요.”
허세였지만 그 정도는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엘리엔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힘겹게 말을 하였다.
“다음에 만날 기회가 생기면…… 모든 걸 털어놓겠다.”
“기다릴게요.”
스파앗!
빛에 휩싸인 엘리엔의 몸이 사라질 때까지 이나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나가 엘리엔의 뒤를 쫓을 무렵, 홀로 남은 준성은 어떤 방식으로 차원의 통로를 폐쇄한 건지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겉으로는 멀쩡했지만 공간 속 차원의 통로는 철저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준성조차 이나의 힘을 빌려 파괴하더라도 이 정도는 힘들 거라 여길 만큼 말이다.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어.”
직접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지만 소기의 목적은 이룬 셈이기에 준성은 적잖이 만족했다. 하지만 그다음 이어진 상황은 그에게도 꽤나 큰 당혹감을 심어 주었다.
“이런.”
“꽤나 거창하게 일을 벌였네요.”
공간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 아닌 헤스티아였던 것이다.
평소 미소를 머금으며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지만, 지금은 표정을 지운 채 냉정하게 주변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준성에게 좋지 못했다. 차원의 통로를 파괴하기 위해 이곳으로 왔지만 직접 파괴하지 않은 시점에서 오해를 살 수도 있던 것이다.
‘쓸데없는 오해를 사게 되었군.’
가뜩이나 헤스티아와 나쁘지 않은 관계를 이어 나가고 있는 시점에서 더더욱 그랬다.
“제가 그런 게 아니라면 믿겠습니까?”
말을 하면서도 준성은 별다른 가능성을 걸지 않았다. 장소에서 적나라하게 들켰는데 상대가 믿어줄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다음 나온 대답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믿어요.”
“진심입니까?”
“이래 보여도 진실을 파악하는 데 제법 능력을 지니고 있거든요. 비슷한 목적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행동으로 옮긴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겠네요.”
미소 지으며 대수롭지 않은 듯 말을 하는 모습에 준성은 안도와 동시에 강렬한 위기감을 느꼈다.
만약 자신이라면 지금 상황에서 헤스티아처럼 행동할 수 있었을까.
아니었다. 거침없이 상대를 몰아치고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 온갖 술수를 동원했을 것이다. 지금 헤스티아가 보인 행동으로 준성은 아량에서 졌고, 그녀의 혜안을 확인하게 된 셈이다.
“왜 그러시죠?”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젓는 준성을 보고 헤스티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적으로 만들면 꽤나 힘든 강적이 될 것 같아서.”
“후후, 그런 말은 저도 제법 기분이 좋게 만들어 주네요.”
낮게 웃는 모습에 준성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진심을 보인다면 호감을 사고, 더 깊은 속내를 꺼내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다고 이런 의도를 갖고 있다는 걸 모른 척하겠다는 건 아니에요. 우리는 믿음을 보여 주려고 했는데, 그 부분은 유감이에요.”
준성으로서는 뭐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신족이기에 적대하는 게 당연했지만 헤스티아를 적으로 돌린다면 수면 깊이 가라앉아 있는 신족의 자취를 쫓는 것은 더욱 힘들어진다.
“그러니 제 부탁 하나 정도는 들어줄 수 있겠죠?”
“부탁?”
“크게 무리가 가는 건 아닐 거예요.”
반문하는 준성을 보며 헤스티아가 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세희는 깊은 꿈에 빠져 있었다.
준성과 이나가 외부 활동에 여념이 없는 동안, 그녀는 금탑과 대한민국 전역을 관리하면서 거점을 확실하게 방어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 과정은 험난하고 고생뿐이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걸로도 감지덕지였다. 지금에 와서 이 정도 희생은 당연했고, 더한 일도 할 수 있었다.
그런 그녀가 고단한 몸을 침대에 묻기 무섭게 잠에 빠져들고, 멀어졌던 의식의 끈이 잡히면서 살며시 눈을 떴다.
“……여긴?”
이 장소를 세희는 모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힘들었던 몸이 멀쩡해지고, 난조를 겪던 컨디션마저도 말끔하게 회복시켜 주는 곳. 바로 신이 만든 공간이었으니 말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초대해서 미안해요. 자리에 앉겠어요?”
세희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흔들의자에는 신이 앉아 있었다.
자리를 권하자, 세희가 걸음을 옮겨 의자에 앉으며 영문을 물었다.
“이렇게 부르실 줄은 몰라서……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불렀어요. 아무래도 그가 듣는다면 좋은 영향을 끼칠 것 같지 않아서. 우선 적합자에게 먼저 일러두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요.”
“제게요?”
“맞아요. 저는 언제나 당신에게 감사하고 있어요. 제안을 받아들여 줌으로써 제 신격을 되찾고 다시 한 번 도약을 꿈꾸게 해줬으니까요.”
“신을 모시는 것이 제 숙명이라는 걸 모르지 않아요. 그러니 그 말씀은 과찬이에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다시 한 번 목표를 향해 움직일 수 있게 해준 것만으로도 만족해요. 다만, 제가 너무 지친 게 문제지만…….”
“지치다니요?”
다시 신격을 되찾고 예전의 힘을 되찾아 가는 중인 신이 지쳤다는 말에 세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전으로 모든 것을 되돌리기에는 너무나 먼 곳을 왔다고 생각해요. 제 존재 자체가 이 세계를 위협하는 계기가 되었고, 신족들은 저를 노림으로써 세계와 격리시키고 있으니까요. 제 존재 자체가 위협인 된 셈이죠.”
“…….”
세희로서는 그 부분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신족이 의도적으로 그런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래서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제게요?”
신이 부탁을 한다는 사실에 세희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 내용이 결코 범상치 않을 거란 걸 은연중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 말을 듣는 순간, 그녀의 눈이 놀라움으로 크게 뜨였다.
“혹시 적합자는…… 신이 될 생각이 없나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