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224)
제104장 대립
로저 리차즈 대통령과 더글라스는 서로 마음이 잘 맞는 것으로 미국 정계에서 유명했다.
둘의 합작은 대격변 이후 혼란스러운 세상에서도 여전히 ‘패권’을 유지하게 만들었으며, 오히려 자국을 지킬 역량이 부족한 국가들을 의존하게 만들어 영향력을 강화시켰다.
이는 뚝심을 가지고 정책을 밀어붙이는 로저 리차즈 대통령과 더글라스의 움직임이 맞아 떨어져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 흔한 갈등 한 번도 없이 보조를 맞춰 왔지만 갑작스레 찾아와 하는 요구는 더글라스의 표정을 굳게 만들었다.
“지금 하시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네, 더글라스 본부장. 내 말이 지닌 의미가 무엇인지.”
“그런데 지금 그걸 밀어붙이겠다는 말입니까?”
날 선 음성이었지만 로저 리차즈는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신족의 존재로 인류는 대격변 이후 더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지. 이 부분에 대해서 유연하게 대처할 수 없다면 우리는 더 큰 위기를 겪게 될 걸세.”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신이라는 작자 때문에 우리가 위기를 겪어야 한다는 건가? 이대로 가다가는 신족의 위협에 노출되고 말아! 그동안 얻은 정보만 보아도 신족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을 텐데?”
“으음.”
합리적인 결정이었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로저 리차즈는 이런 방식으로 결정을 내리는 이가 아니었다. 더글라스는 몇 번이나 입을 벙긋거렸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이건 의견을 구하는 게 아니라 통보와도 같네.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신의 존재 때문에 인류 전체가 위험에 빠지게 둘 수 없어. 그러니 최선이 무엇인지 본부장도 한번 냉정하게 생각해보게.”
더글라스의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돌려 방을 벗어나는 그였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는 느낌이었다.
지구 신의 적대는 여러모로 준성을 바쁘게 만들었다.
우선 자신의 터전을 강화시키게 하였고, 마법의 체계 또한 다시 한 번 가다듬게 되었다. 신을 상대할 수 있는 마법이 신언밖에 없는 지금, 맥없이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수련이 필수였다.
그리고 그 전에 가장 필요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신을 상대하는 방법이었다.
준성이 찾은 것은 바로 타 차원의 신이었다.
“오늘은 조언을 구할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제가 해줄 조언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충분히 있습니다. 말장난을 할 만큼 상황이 넉넉하지 않으니 바로 용건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세요.”
“이곳 지구에 신이 나타났습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속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준성과 신의 눈이 마주쳤고, 그 속에 진실이 담겨 있다는 걸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역시인가요.”
“아마 짐작하고 있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봤으니까요. 제가 격을 잃어 생겨난 공백을 채울 수밖에 없는 게 세계의 시스템이죠.”
말을 하는 신의 안색은 어두웠다.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설명은 이러했다.
그 전까지 두 개의 세계가 동일한 차원이었기에 한 명의 신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신족에게 패하고 신이 지닌 격을 잃어버리면서 문제가 되었다.
신족이 권능을 탈취했지만 그것이 신의 격을 상징하는 건 아니었다.
공백이 생겨나고 세계에 신이 존재하지 않게 됨에 따라 자연이 섭리대로 움직여 지구에 신이 탄생했다. 이후, 신이 격을 회복하고 신족들이 신의 반열에 올라섰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묻고 싶은 게 뭐죠?”
“지구의 신을 제거하고 싶습니다.”
“신의 소멸이라…… 제게 너무 많은 것을 원하고 있군요.”
“그럼 지구의 신이 뻗을 마수를 벗어날 방법이 있겠습니까?”
준성이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없었다. 결국 상대가 자신을 소멸시키려고 달려든다면 자신도 동일한 방법을 취해야 했다.
“소멸이 가장 어울리는 방법이겠네요.”
“예.”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신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해야만 했다.
온전한 힘을 지닌 신. 그리고 적의 상황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는 존재라면 밑으로 끌어내리는 것도 험난한 과정일 것이다.
“신족은 저를 어떻게 공략했는지 알고 있나요?”
“모릅니다.”
“그들은 장장 십 년 동안 저를 공략했죠. 철저하게 역할을 나눠서. 그 기간 동안 제 신성력이 고갈되었다면 믿기나요?”
“…….”
“그만큼 힘을 기울이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는 일이에요. 이걸 할 수 있다면 조언을 하겠어요.”
“부탁드리겠습니다.”
방법을 들어서 나쁠 것은 없었기에 준성은 정중하게 방법을 부탁했다.
고개를 끄덕인 신도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또 하나 늘어난 적을 상대하기 위해 준성은 분주히 움직였다. 가장 시급한 관계 설정에 공을 들이면서 이나의 권능 단련 훈련도 도왔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들려온 한 가지 소식은 준성을 제법 심각하게 만들었다.
“……결정을 내려야겠지?”
“어쩔 수 없으니까요. 할 수 없다면 과감하게 포기하는 게 좋겠죠.”
“미안해, 당시에는 같이 즐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렸네.”
“그게 어디 준의 책임인가요,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인 거죠.”
이나는 미련 없다는 태도를 보였지만 준성의 마음은 달랐다. 세희에게 시선을 옮긴 그는 마찬가지로 사과를 했다.
“미안.”
“괜찮아요, 아쉬운 마음이 없다면 거짓이지만 모두 각자의 규칙이 존재하니까요.”
“그래.”
셋이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이유는 바로 대학에서 날아온 통지서 때문이다.
휴학을 했지만 계속 학업을 수행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 묻는 내용이었다. 이는 다른 평범한 학생이라면 날아오지 않을 것이지만 준성과 세희, 이나는 다른 학생과 다른 특별한 경우에 속했다.
바로 새롭게 등장한 금탑이라는 세력 때문이다. 신비에 휩싸인 이곳은 A.O. 본부와 대등, 혹은 그 이상의 전력을 보유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규정에도 걸리지 않고 정상적으로 휴학한 셋을 건드릴 이유가 어디에도 없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누군가가 대학에 입김을 행사했다는 것이었다.
“자퇴해야겠지.”
“괜한 빌미거리를 제공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충돌을 원치 않으면 그게 최선이죠.”
“알았어, 그럼 그렇게 하자. 그리고 미안해.”
대학 생활을 하자고 제안한 것은 자신이었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그녀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큰 준성이었다.
준성과 이나가 근래 들어 가장 공을 들이는 것은 개인의 역량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이미 마법과 검술로 각각 절대의 경지에 들어선 둘이 더 강한 힘을 보유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지닌 것들을 승화시켜야 했다.
“가장 중요한 건 권능과 검술의 조화야.”
“그게 가능할까요?”
“불가능할 건 없지. 적이었지만 우리가 격살했던 대신족 있지? 그 경우를 떠올리면 된다고 생각해.”
이나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그렇게 강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준성이 말하는 신족은 완 제이드였고, 그는 자신의 힘과 권능을 하나로 결합하는 시도를 했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대로 힘을 발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지만 반대로 위력은 강하지 않았다.
“물론 실패 사례를 배우라는 건 아니야. 내가 말한 건 그 시도만큼은 괜찮다는 의미지. 검술과 권능이 조화되면 그건 더 이상 인간의 영역이라 볼 수 없으니까. 그리고 지금 이나가 지닌 권능은 검술과 조화를 하면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잖아?”
“네, 그렇죠. 하지만 쉬울 것 같지가 않아서.”
이나라고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막상 노력한다고 해도 쉽지 않았다. 검술은 후천적으로 얻은 힘이지만 권능은 말 그대로 처음부터 존재한 자연의 섭리였기 때문이다.
“힌트를 얻은 게 있으니 알려 주도록 할게. 조금 어려울지 몰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네, 부탁할게요.”
“단언하건대, 권능과 검술을 조화시키면 그 위력은 신언보다 강력할 거야.”
“정말요?”
“물론 나도 가만히 있지 않도록 노력해야겠지.”
단호한 준성의 어조에 이나도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족은 테라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씨족 사회다. 본래 개체수가 많지 않고 자손이 귀했기에 그들은 서로 단단히 응집하여 다른 종족의 침공에 대비하곤 했다.
가장 오랫동안 살아온 것이 테라였고, 나머지 대신족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형제이자 자매, 남매의 관계라고 봐도 무방했다.
“헤스티아.”
“오셨어요?”
“요즘 바쁘게 움직이는 것 같던데.”
뼈가 실린 테라의 말에 헤스티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런가요? 후후! 오래전 떠나온 세상에 다시 돌아오니 저도 모르게 들떠 있었나 봐요.”
“그것뿐?”
“뭔가 다른 게 있기라도 한가요?”
천연덕스러운 반응에 화를 낼 법도 했지만 테라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예전부터 그것을 위해 나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하지만 거기까지다. 우리의 원대한 목표를 가로막는 적은 설사 너라고 해도 용서할 수 없다.”
“소멸시키기라도 할 것처럼 느껴지는데요?”
“못할 것도 없지.”
“……진심인가요?”
늘 훈풍이 맴돌던 헤스티아의 얼굴에 미소가 지워졌다. 잔잔하지만 의문이 서린 눈빛에 테라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물론.”
“이 정도로 진심일 줄은 몰랐네요. 테라, 당신은 언제나 우리를 위해 움직이는 위대한 지도자로 생각했는데.”
“목적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다. 예전에는 우리 종족의 생존을 위해 강해져야 했다면 이제는 우리가 지닌 것을 지키기 위해야 한다.”
“제 방법은 틀렸고요?”
“쉬운 방법을 두고 어려운 길로 돌아가는 것만큼 어리석은 행동은 없지.”
“하아! 살아남기 위해 모두를 짓밟았더니 이제는 지키기 위해 짓밟아야 하는군요.”
피해자였던 자신들이 가해자가 된다는 건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하지만 테라의 생각은 확고했다.
“그게 자연의 섭리다. 다시 힘없이 도망쳐야 하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겠지?”
“그래도 저는 제 방법을 포기할 수 없어요. 테라, 당신의 방법은 모든 종족을 멸망으로 이끌고 우리마저 멸망시킬 테니까요.”
“얼마든지 자신의 주장을 해도 좋다. 하지만 내 계획을 방해한다면 뒷감당은 네 몫이다.”
“후우!”
그 말을 끝으로 테라의 몸이 흩어지며 사라졌다. 홀로 남은 헤스티아는 설득할 수 없는 그의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로저 리차즈 대통령과 면담을 하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동안 미국 정부와 미국 A.O. 본부의 대립은 점점 심해졌다. 신족과 협력하길 원하는 정부 측과 A.O. 본부의 사이는 너무나 달랐다.
“군부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
톰슨의 보고를 들은 더글라스가 눈을 감았다. 거세게 휘몰아치는 마음을 다잡으려고 했지만 모든 상황은 자신들의 편이 아니었다.
“기업들은?”
“모두 등을 돌렸습니다.”
그들의 지지가 없다면 정부가 함부로 움직일 수 있을 리 없었다. A.O. 본부가 몬스터의 부산물 등을 확실하게 휘어잡고 있었기에 그동안 납작 엎드렸지만 정부가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하나둘씩 대세에 편승하고 있었다.
“그동안 단단히 미운털이 박혔나 봅니다. 새로운 질서에 우리가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걸 보니.”
“배은망덕한 자들입니다.”
“그래 봤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얼마 전까지 우리의 행동에 일희일비하던 저들이지만 상황은 우리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으니 말이죠.”
분통을 터뜨리는 톰슨이었지만 더글라스의 표정은 잔잔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점은 국제 능력자 연맹과 유럽 연합의 움직임입니다.”
그들이 이 파워 싸움에서 자신들의 손을 들어준다면 상황은 단번에 뒤집힐 것이라.
그렇게 예상했던 더글라스는 사흘 후, 전해진 소식에 표정이 창백하게 질렸다.
“영국, 프랑스, 독일의 A.O. 본부가 정부에 예속되었다고 합니다.”
“…….”
그다음 전해진 정보는 충격적이었다. 유럽 각국에도 지금 미국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으며, 대부분의 A.O. 본부가 정부의 압력에 굴복하고 지휘 아래 들어간 것이다.
“나머지 국가들도 조만간 정부 밑으로 속해 개편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망연한 표정을 지은 더글라스의 머릿속은 충격으로 텅 비었다.
어떻게 각국의 정부가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본부장님.”
하지만 더글라스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미국이 무너지면 전 세계가 흔들린다.
이는 비단 국가가 아닌 A.O. 본부에도 통용된다.
비난도 받고 질투의 대상도 되지만 미국 A.O. 본부가 있기에 세계는 대격변의 혼란 속에서 단단히 응집하고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심각하게 흘러가는 상황 속에서 도와주겠다는 준성의 제안에 더글라스가 대답했다.
“이것은 우리의 싸움입니다. 제의는 감사하지만 스스로 나아가겠습니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미국 A.O. 본부마저 무너지면 세계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벌어질 것입니다.”
“언제나 비장의 수단을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해도 정부에서는 함부로 행동하기 힘들 것입니다.”
“힘든 싸움이 될 텐데도 말입니까?”
“예.”
현재 대부분의 유럽 A.O. 본부는 정부에 귀속되었고, 대대적인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잡음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파는 아시아로 퍼져 나가는 중이었다.
유일하게 분란이 없는 곳은 대한민국이었으나, 이러한 움직임에 발맞춰서 조금씩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믿도록 하지요.”
“만약의 상황이 닥치면 그때 부탁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확고한 더글라스의 말에 준성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며칠 뒤.
준성이 들은 것은 미국 뉴욕에 있는 A.O. 본부 건물의 파괴였다.
미국 A.O. 본부의 파괴 이후, 세계는 빠른 속도로 바뀌었다.
우선 대부분 국가의 A.O. 본부가 정부 아래로 소속되었고, 그 여파가 비켜 나간 것은 대한민국과 일본, 그리고 몇 개의 남아메리카 국가가 전부였다.
하지만 남아메리카 국가의 A.O. 본부는 개인 사조직의 성격이 강한 만큼 이전 형태의 조직을 유지하고 있는 건 대한민국과 일본뿐이었다.
그마저도 대한민국은 정계에서 몇 차례 시도를 보이려고 했지만 박근태의 적극적인 움직임과 김기정의 도움, 금탑의 존재로 사전에 차단할 수 있었다.
급격한 변화 속에서 준성은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더글라스를 만난 뒤, 그는 모든 외부 활동을 접어둔 채 수련에 집중했다.
“하아,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검을 놓은 이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권능을 검에 녹아들게 만들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진전은 전혀 없었다.
“많이 힘들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기 힘드니까요. 준이 힌트를 줘도 너무 막연해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고요.”
이나의 더딘 진전에 준성도 몇 차례 도움을 주려고 했다. 하지만 아직 권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 이나에게 그 개념을 이해하는 것조차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내가 도와줄까?”
“언니가요……?”
세희의 말을 듣고 눈을 빛냈지만 끝말은 의문 부호가 그려졌다.
“신성력도 일종의 권능이야. 그걸 발현하는 게 아마 지금 이나가 하는 고민과 비슷한 종류일 테고.”
생각해 보니 신성력은 신과 소통이 가능한 재능을 지닌 여인은 성녀가 되어 단기간에 강력한 힘을 부여받는다.
그 관점에서 보면 신성력도 권능이고, 그것을 발현하는 건 성녀의 몫이다.
“앗! 그러고 보면 그러네요.”
“권능이란 걸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뭔지 감도 못 잡고 있는데요?”
“이미 존재하는 것을 이해하려는 생각 자체가 어렵게 만드는 거야.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돼.”
“그게…… 가능해요?”
“그럼 불가능한 걸 말하겠어? 권능은 신체의 일부처럼 자연스러운 거야. 검사들도 그렇게 말하잖아, 검은 몸의 일부라고. 권능도 신체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게 여겨야 비로소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어. 자꾸 의식하고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면 권능도 어렵게 되고.”
“아!”
간단한 세희의 설명을 듣던 이나가 탄성을 터뜨렸다. 그리고 눈을 감으며 조용히 집중력을 끌어 올렸다.
‘힘내.’
그 모습을 본 세희는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는 허점이 많아 보여도 한번 집중한 이나의 성취는 무시무시하다. 아마 깨달음의 과정이 끝나면 권능에 대한 이해가 지금보다 훨씬 높아질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이나는 전보다 훨씬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마침내 자신이 지닌 권능을 깨닫고, 그것을 활용하는 방법을 체득한 것이다.
그녀가 수련 삼매경에 빠진 사이, 준성은 영웅이의 무기 제작에 힘을 쓰고 있었다.
기본적인 성능은 타나보다 뛰어났지만 그 능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무기가 약한 상황이었다.
영웅이가 지닌 무기는 이나가 지닌 듀란달과 함께 제작한 환두대도였는데, 이는 기본 무기로 삼되 애용하던 무기 하나를 추가한 것이다.
[창이라면 내가 또 한 실력하지, 주인!]“그래서 준비하는 거야. 이 정도면 비장의 무기 수준 정도는 될 거라 생각하니까. 어때?”
[이런 기운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다.]말을 하는 영웅이의 목소리에는 짙은 희열이 깔려 있었다. 준성이 제작한 창에 서린 기운이 그만큼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당연하지.”
[이 힘은 뭔가?]“신의 힘이라고 할 수 있어. 그 자체만으로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 있지. 아마 이 창의 일격을 허용하면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거야.”
[신마저 죽일 수 있는 창인가? 크크크! 그 정도는 되어야 나와 어울리는 창이라고 할 수 있지! 이 창의 이름은 지었나?]“롱기누스(Longinus)야.”
[뭔지 몰라도 강한 힘이 팍팍 느껴지는군!]자신에게 어울리는 무기를 얻은 것만으로도 영웅이는 만족했다.
“성취가 있었다고?”
짧은 기간 동안 권능과 검술의 조화를 성공했다고 단언하는 이나를 보며 준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만만치 않은 일이라 생각했기에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후후! 제가 누구겠어요? 불세출 천재 검사 아니겠어요? 조금 어렵기는 했지만 힌트를 얻으니 풀어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한껏 업이 된 이나는 그야말로 자신만만 그 자체였다.
“성취는 어느 정도인데?”
“직접 보는 건 어때요?”
“그렇다면야…….”
자신이 원하는 답을 꺼내 드는 이나를 보며 준성은 미소를 지었다. 권능과 검술을 하나로 승화시켰다면 이나는 그 존재만으로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둘은 지하 연무장으로 이동했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마주했다.
“신언, 부탁드려요.”
“신언을 시전해야 할 정도야?”
“그 정도는 되어야 제 성취를 시험해 볼 수 있어요.”
진지한 이나의 표정에 준성도 경시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언은 자신이 지닌 최강의 마법이자,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10클래스 마법이었다. 그것은 신마저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절대적인 위력이었으나, 이나가 자신감을 보인 이상 보여줄 생각이었다.
“시전한다.”
“말해주지 않아도 돼요.”
이나의 대답에 준성은 서서히 힘을 끌어 올렸다.
신언은 말 그대로 신의 언어라고 칭해지는 절대수준의 마법. 그 위력이 너무 강해서 인간의 육체가 감당하기에 만만치 않았다.
서서히 끌어 올려야 하고, 그 시전도 단계적으로 이루어질 만큼 강력했다.
콰콰콰콰!
준성을 중심으로 퍼져 나간 기세가 이나의 전신을 감싸는가 싶더니, 주변의 모든 기운을 증발시켜 나갔다.
그 속도가 빨라 그대로 이어지면 이나가 무력화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준성이 발동한 신언은 발산하는 모든 기운을 ‘제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나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 검을 뽑아들더니, 주변을 향해 휘둘렀다.
파앙!
공간마저 갈라 버릴 듯 빠르게 휘둘러진 검 끝으로 푸른 기운이 실처럼 뿜어졌다. 그것은 평소 이나가 발산하는 오러 블레이드와 다르지 않았지만 그 속에 내포된 힘의 성질은 달랐다.
파직! 파지직!
놀랍게도 이나의 일격에는 준성의 신언을 무력화시키는 힘이 담겨 있었다.
처음에는 치열하게 충돌하며 힘겨루기에 들어갔지만 이내 한 쪽으로 기울더니 신언을 깨끗하게 지워 버렸다.
“…….”
“어때요?”
놀란 표정으로 아무 말도 못 하는 준성을 보며 이나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단해. 권능과 조화를 꾀하라고 했지만 이렇게 신언을 무력화시킬 줄은.”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점에서 착안했어요. 공격을 하면서 상대의 공격을 무력화시키면 어떨까? 해서 나온 거죠. 제 검의 궤적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권능이라면 충분히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는 점도요.”
짝짝짝!
이나가 이뤄 낸 위대한 성과에 준성은 박수를 쳤다.
권능과 검술의 조화는 먹구름이 드리운 현재 상황을 타개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신족도 신도 모두 덤벼 보라고 해요!”
자신만만한 이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세희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서늘한 가을이 지나고 차디찬 겨울이 찾아왔다.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이들에게는 추위를 피할 공간이 있지만 그 공간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당연한 권리는 아니었다.
“추, 추워!”
몸에 넝마를 두른 소녀는 하얗게 피어나는 입김을 보며 추위에 떨었다.
샤워도 제대로 하지 않아 꾀죄죄한 소녀는 한눈에 봐도 거지 그 자체였다. 집도 없고 가족에게 버려진 소녀에게 유난히 추운 겨울날은 지옥이었다.
[간절히 원하면 이뤄질 거야.]자꾸만 의식이 멀어지는 가운데, 꾸벅꾸벅 고개를 끄덕이던 소녀의 마음속에 한줄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추워…… 따뜻하게 해줘…….”
사그라드는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태우며, 간절히 기원했다.
맥없는, 언제나 속으로 외쳤지만 공허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그 외침은 놀라운 상황을 만들어 냈다. 전신을 두드리던 찬 기운이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따뜻한 온기가 그 자리를 대신했던 것이다.
“춥지 않아?”
천근만근 무거웠던 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배고픔도 사라졌고, 통증도 사라졌다. 경악하는 소녀의 뇌리로 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신이 간절히 원한다면 그건 이뤄질 거랍니다.]세계 곳곳에 ‘기적’이 일어났다.
추위에 떠는 이들에게는 온기를, 더위에 지쳐 있는 이들에게 냉기를 가져다주며 세계는 빠른 속도로 기적에 뒤덮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기적’의 중심에는 신족이라 밝힌 종족들에게 있었다.
스스로 신의 일족이라 소개한 그들은 자연스럽게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어 고통에 허덕이는 이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다.
그에 따라 신족을 추앙하는 무리가 빠른 속도로 생겨났다.
인간의 능력으로 행할 수 없는 기적을 만들어내는 존재.
그것은 막연히 그들을 믿고, 의지하게 만들었다.
짧은 시간, 신족을 추앙하고 신으로 모시고자 하는 모임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저마다 각각의 신을 부르짖으며 기적의 혜택을 입는 대상이 되고자 했다.
불의 여신 헤스티아.
물의 여신 엘라임.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아름다움을 지닌 그녀들은 인류를 추위와 더위, 그리고 굶주림에서 해방시켜 줄 것을 약속하고 ‘기적’을 선보였다.
가뭄으로 갈라진 경작지에 비가 내렸고, 갑작스러운 추위로 떠는 곳에는 따뜻한 햇살에 비쳤다.
모든 것 하나하나가 기적으로 연결되었고, 인간 세상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었다.
직접 신의 권능을 선보이는 그녀들을 감히 의심할 자가 어디 있겠는가.
각국의 정부는 발 빠르게 움직이며 신족을 모시는 신전 설립을 약속했다.
이것은 신족이 본격적으로 지구에 뿌리를 내리는 시발점이었다.
신언 수련에 빠져있던 준성은 오랜만에 손님을 맞이했다. 바로 아리스턴을 비롯한 멜리사와 자예프가 준성을 찾은 것이다.
그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A.O. 본부를 도왔던 그들이지만 신족을 받아들이면서 활동 범위가 축소되었고, 대한민국에서만 움직이는 처지로 전락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미끼라는 뜻입니까?”
“그런 셈이지.”
“미끼라, 그래도 인간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나쁘지 않은 거라고 봅니다만.”
아리스턴의 대답에 준성은 속마음과 다른 반응을 내놓았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 하지만 이 모든 게 인간들 사이로 파고들기 위한 수작이라면 어떻게 생각하나?”
“수작입니까?”
“그런 셈이지. 우리도 신족이 본색을 드러내기 전까지 저들이 선사하는 기적에 깊이 빠져들었으니까.”
“…….”
자조 섞인 아리스턴의 중얼거림에 멜리사와 자예프는 쓴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본색입니까?”
아리스턴 대신 멜리사가 나서서 대답했다.
“간단해요, 신족이 선사하는 기적은 무한한 게 아니에요. 자신들이 지닌 힘을 바탕으로 비현실을 현실로 만드는데, 이 과정이 쉽지 않은 건 아실 거예요. 그럼 그 힘은 어디서 조달할까요?”
“다른 곳에서 공급을 받는다?”
“네, 그리고 그 공급처는 혜택을 받는 이들의 눈에서 소외된 곳일 확률이 높아요.”
“결국 다른 이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누군가가 이익을 본다는 의미로군.”
“맞아요, 이곳 인간들이 구축한 자본주의와 비슷한 체제죠.”
누군가가 많이 가지려면 누군가는 빼앗겨야 한다. 유한한 자원 속에서 이 원리는 당연하게 이어지고, 그것은 신족이 행하는 기적도 마찬가지였다.
“신족의 권능에 길들여진 인간들은 나태해지고, 그들을 추앙하기 바빠지죠. 그런데 그걸 알고 계시나요? 신성을 얻은 신족은 추앙하는 인간들이 많아질수록 더 강한 힘을 얻게 될 거란 걸.”
“음!”
염려하고 있던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 내자, 준성은 침음을 흘렸다.
신의 존재란 것은 아는 이가 많고 믿음을 보내는 숫자가 많을수록 명확해지고 강력한 힘을 얻게 된다.
이 과정에서 ‘신’이라는 것 자체도 특정한 누군가를 정하지 않고 막연한 개념으로 놓아둠으로써 흩어질 수 있는 신성을 한 곳으로 흘러들게 만든 것이다.
만약 다른 의미의 신을 사람들이 믿게 되면 새로운 신의 탄생을 맞이해야 할지도 몰랐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신족의 숫자가 많아 믿음이 분산된다는 점이에요. 사실상 인간들의 믿음이 주는 힘의 변동 폭은 크지 않다는 점이죠. 그래도 주의는 해야 해요.”
“그럼 인간 세계로 들어선 이유가 뭐라고 봅니까?”
“간단해요, 인간들을 방패로 삼기 위함이죠.”
“그들이 무엇이 아쉬워서?”
“이 세계는 당신도 있고, 드래곤과 신도 존재해요. 그리고 신의 기사라는 여인들도 존재하니 신족들로서도 조심할 수밖에 없죠. 단순한 추측에 지나지 않지만 제가 생각하는 건 그래요.”
모두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사실들이었지만 경험을 토대로 해주는 조언은 준성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안 그래도 그 부분에 대해 도움을 얻고자 하네. 이미 우리 스스로 무엇을 한다는 건 무리라는 걸 잘 알고 있지.”
끼어든 아리스턴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한 번의 실수로 동료 대부분을 잃으면서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우리가 신족을 상대할 만큼 힘도 없어 거의 쓸모가 없지만 그래도 신족의 노예가 된 종족을 해방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 신족도 위험하지만 그들을 따르는 이들도 있으니 힘을 빌려 준다면 그들을 토벌하고 싶네.”
“그 부분은 A.O. 본부와 연계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꺼이 도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그것으로 충분하네.”
지금까지 해온 것과 달라지는 것은 없었지만 준성의 도움을 받는 것은 신족과의 전쟁에 참여한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아리스턴은 크게 만족하는 표정이었다.
전보다 한없이 소박해진 그들의 바람에 준성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신족의 움직임이 세계 전역을 뒤덮기 시작하면서 준성이 생각한 것은 대한민국부터 확실하게 자신의 영역으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미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국가들은 신족의 손에 떨어졌고, 남은 것은 아시아 몇 개국과 아프리카, 남아메리카가 있었지만 그곳들 중에서 힘을 쓸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신족의 공격은 이미 시작되었지.”
“이런 방식일 줄은 몰랐는데, 예상하고 있었습니까?”
“전혀, 한 가지 분명한 건 이렇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무의미하다는 점이겠지.”
쓴웃음을 지은 정기정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가 신족의 공격을 언급한 이유는 간단했다. 직접 쳐들어와서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누르는 방식이 아니었던 것이다.
신족은 각국에 파고든 인맥을 바탕으로 정기정이 일궈 놓은 T그룹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는 수출 위주인 T그룹에 큰 타격을 입혔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경쟁 회사의 등장과 각지에서 범람하는 음해는 T그룹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대한민국 언론에서는 이 상황을 보고 T그룹의 추락이 대한민국의 경제 위기를 일으킬 거라 전망했다.
“압박을 받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네.”
“다른 드래곤들도…… 입니까?”
“그런 셈이지. 나같이 회사를 크게 일궈 낸 것이 아니지만 각자 위치에서 큰 위기에 봉착해 있지.”
“이런 방식으로 드래곤들을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할 줄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자네는 우리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저라면…… 안전한 곳으로 피할 것을 권하겠습니다.”
“안전한 곳? 지금 이 세계에 안전한 곳이 있다고 생각하나?”
“이곳, 대한민국이라면 충분히 안전합니다. 제가 있고, 절대 질 수 없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곳이면 신족의 위협에 대응이 가능합니다. 무리한 저항보다 안전을 도모하는 걸 추천하겠습니다.”
“안전이라,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로군. 한번 이야기를 나눠 보도록 하겠네.”
정체를 감추기 위한 위장이었지만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만들어온 터전이었다. 유희라기보다 또 다른 삶과 같았기에 설득하는 과정이 쉽지 않으리라.
“정체가 노출되어 있으니까요. 지금 하나라도 당하면 상황은 더욱 어려워질 겁니다.”
듣기 싫은 말이지만 그게 사실이었기에 이야기를 듣는 정기정의 얼굴은 어두웠다.
신은 세희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전보다 훨씬 풀어져 있는 표정만 보더라도 자신의 의도가 먹혀들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겪어 본 권능은 어떤 느낌이었나요?”
“대단했어요. 제가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대답하는 세희의 표정은 약간의 몽롱함마저 서려 있었다. 그만큼 신이 건넨 권능은 그동안의 무력감을 씻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 힘을 계속 손에 쥐고 싶지 않나요?”
“갖고 싶어요, 언제까지나 그 힘을 갖고 세상을 누비고 싶지만…….”
말끝을 흐린 세희의 얼굴에 경계심이 묻어 나왔다. 신은 그녀의 표정에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진정으로 원한다면 응하면 되는 거예요. 적합자인 당신이 거절하면 저도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으면 되죠.”
“…….”
별다른 미련을 두지 않는 듯했기에 세희의 마음은 더욱 복잡하게 꼬여만 갔다.
‘만약 내가 그 힘을 손에 넣는다면 준성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내게 너무 좋은 제안은 받아들이기 힘들어.’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후회가 남았다. 권능을 갖고 신족을 상대하는 데 쓸 수 있다면 저들을 토벌하는 것은 마냥 어려운 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준성이 이 결정을 두고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해서는 그녀도 확신을 할 수 없었다.
“하아!”
“어려울 수밖에 없어요. 저도 적합자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지 않네요. 그럼 이건 어떤가요? 좀 더 강한 권능을 부여하도록 하겠어요. 그러면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더 많겠죠? 그 후에 확실하게 결정을 하는 것으로 해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가 크게 양보한 것임을 세희는 모르지 않았다.
약속을 하고 우유부단하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며 세희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확실한 대답을 부탁하겠어요.”
“네…….”
당장 어려운 결정을 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세희는 크게 만족한 표정이었다.
“얼마 남지 않았군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신은 그 자리에서 세희에게 권능을 부여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 신족에 대한 대응은 어떤 방향으로 할 거예요?”
커다란 성취를 이뤄낸 뒤, 이나는 준성을 보며 의문을 드러냈다.
세계 전역이 신족의 입김 아래 들어간 상황에서 그들과 전쟁을 치르는 것은 꽤나 큰 난관에 직면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일단 우리 전력을 최대한 가다듬어야 해.”
“우리 전력이요?”
“드래곤과 시크릿 코드를 말하는 거야.”
“신은 없네요?”
“아직 확실한 우리 편이라고 보기 어렵거든. 기본적인 유대는 갖고 있지만 그 이상 칭하는 건 힘들잖아?”
“틀린 말은 아니네요. 세희 언니만 아니었으면 내쳐도 상관이 없을 텐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믿음이 가지는 않으니까.”
“이래저래 어렵네요. 힘을 합치는 문제도요. 누구도 쉽게 믿을 수가 없으니.”
간단하게 적 아니면 내 편이라는 논리가 먹혀들면 얼마나 편할까. 그것이 불분명하기에 이나로서는 아쉬울 따름이었다.
“어쩔 수 없지. 최대한 우리 편을 늘리는 방향으로 선회할 수밖에. 당분간은 조용히 침묵을 지킬 생각이야. 그래도 충돌이 벌어질지 모르니 수련은 게을리하지 말고.”
“제가 그럴 것 같아요? 다시는 그런 굴욕 따위는 겪고 싶지 않아요. 만나기만 해, 다 쓸어버릴 테니.”
칼리를 만났던 순간은 이나에게 굴욕 그 자체였다.
다시는 그런 수모를 겪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신족은 수평적인 사회다.
종족의 안위가 걸린 대소사는 대신족이 결정을 내리지만 그 외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 가능했다.
지구의 침공을 결정한 테라는 강경한 입장에 속하지만 어느 집단이건 극단적인 성향의 이들은 존재하는 법이다.
“이것이 네가 말하던 지배인가!”
“무슨 잘못된 점이라도?”
날 선 상대의 외침에 테라는 표정 변화 없이 반문했다.
“이건 진정한 지배가 아님을 너도 잘 알고 있잖나! 왜 우리가 광대처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하찮은 인간들의 존경을 이끌어내야 하지?”
“진정해.”
상대가 열을 낼수록 테라의 음성에는 고저가 사라지고 있었다.
“이대로는 만족할 수 없다. 아직도 숨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을 신과 드래곤 녀석들을 처리하고 진정한 지배를 하겠다. 테라 너도 그걸 반대하지 않겠지?”
“그 모든 걸 혼자 하겠다고?”
“그럴 리가. 내가 아무리 과격해도 그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다.”
한발 물러선 그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 있었다.
“뜻이 맞는 녀석들과 힘을 합치려고 한다. 혼자서 간다고 하면 불안에 떨 것 같으니 여럿이서 확실하게 눈에 거슬리는 녀석들을 처리해 주지.”
“나쁘지는 않은데, 누구부터 처리할 생각이지?”
신과 드래곤 모두 거슬리는 적들임이 분명했다. 자신이 손을 쓰지 않고 그 녀석들을 제거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는 녀석이라면 적당하게 이용해 먹는 게 가능했다.
“인간 주제에 우리 동족을 제거했던 놈! 그 녀석부터 제거하겠다.”
“건투를 빌겠어, 엘 카스일.”
대신족에 버금가는 힘을 지녔으나 성격이 급하고 생각이 깊지 못해 일반 신족의 위치에 머물렀던 이가 바로 그였다.
“흐흐! 기대에 보답하지.”
신족 외에 모든 존재를 벌레만큼도 취급하지 않는 엘 카스일은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판에 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세희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준성의 눈길에 멈칫했다. 그에게 말을 하지 않고 일을 벌이다 보니 여러모로 마음에 걸리는 점들이 존재했다.
“왜 그래요?”
“뭔가 달라진 것 같은데?”
“달라…… 져요?”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기세가 좀 더 안정된 느낌이야. 요즘 수련을 하고 있어?”
“저도 강해져야 하니까요.”
신에게 권능을 부여받은 뒤, 세희는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거대한 힘에 자신이 집어삼켜질 것 같았기에. 조금이라도 힘이 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노력이 있어야 했다.
“나쁘지 않아. 금탑의 관리도 중요하지만 본신의 무위도 필요하니까.”
“공격에는 큰 도움을 줄 수 없어요.”
“그럴 수밖에 없지. 원래 성향 자체가 그러니까. 내가 세희에게 기대하는 건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버텨 줄 수 있는 방어력이야. 그러니 공격력에 크게 집착할 필요는 없어. 단점을 극복하기보다 장점을 극대화하는 게 좋으니까. 알았지?”
“네.”
“섭섭하게 여기지 말고.”
행여나 세희가 기분 나쁠까 싶어 손을 꼭 잡으며 말하는 준성이었다.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인 그녀는 잠시 준성의 눈을 바라보다가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궁금한 게 있어요. 신이 된다는 건 어떤 느낌인가요?”
“신이 되는 것?”
“네, 신이요. 10클래스의 경지는 반신의 경지라고 말했잖아요. 그게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어요.”
“…….”
질문을 하는 의도가 알 수 없었기에 준성은 잠시 세희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설명을 해주었다.
“말 그대로 신이야.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전지전능한 기분이야. 실제로 무력에 국한되지만 그 힘은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으니까.”
신언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신이다.
의지나 내뱉은 말로 자연의 섭리를 비틀어 버릴 수 있는 존재.
“그런데 왜…….”
뒷말은 듣지 않아도 뻔했다. 미소를 지어 보인 준성은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내가 더 이상 인간일 수 없으니까. 신이 되면 내 개인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세상의 모든 일을 자연의 섭리로 지켜보게 돼. 그러다가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게 되겠지. 어머니도, 세희랑 이나도. 그리고 금탑의 모든 이들까지.”
그러면서까지 신이 되기 싫었다. 그랬기에 신언을 시전하면 육체에 큰 충격을 주면서 힘겨워하는 처지에 이르렀지만 준성은 후회하지 않았다.
“그것도 얼마 전까지만. 괜히 고집을 부려서 이런 일을 자초한 면도 있다고 생각해, 하하!”
“…….”
웃음을 짓는 준성이지만 그것을 마냥 좋게 받아들일 수 없는 세희였다.
신에게 권능을 부여받은 이상 자신은 반쯤 제안을 수락한 것과 같았다. 지금이라도 거부할 수 있겠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 주는 이 충족감은 저버리기 힘든 유혹이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아니에요, 별거 아니에요.”
“표정이 좋지 않아 보여. 말하기 힘든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내 도움이 필요할 때는 망설이지 않고 말해.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럴게요.”
미소 짓는 세희의 모습이 처연하게 느껴진 건 자신만의 감정이길 바라는 준성이었다.
세계 각지 A.O. 본부가 정부 휘하로 속속 재편될 무렵, 강대국 중 유일하게 본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건 바로 일본 A.O. 본부였다.
본부장인 하나다 유지로는 세계 10강의 능력자이자, 정치권력까지 암중으로 지배하고 있었기에 자리를 공고히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 돌아가는 상황은 예전만 못하다는 걸 느꼈다. 정치권 곳곳에서 세계의 흐름과 맞물려 A.O. 본부를 개편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이에 하나다는 발 빠르게 움직여 사전 차단에 나섰지만 끊이지 않고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중이었다.
이 흐름이 인위적이라는 걸 짐작하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배후에는 신족이라 불리는 존재가 있다는 걸 직감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신이라 지칭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강하다는 이야기였고, 지금 이렇게 권력을 유지하고 있지만 신족이 움직이는 순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의 행보를 걷게 될 것이다.
방어 결계가 겹겹으로 시전되어 있지만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공간 이동으로 모습을 드러낸 준성을 본 하나다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지, 날 죽이러 오기라도 한 건가?”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인가? 일본 본부장.”
둘은 초면이지만 서로 웃으면서 대할 수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부하들을 시켜 자신을 습격하려고 하던 하나다와 계획을 모조리 무산시킨 준성은 서로를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불가능했다.
“제거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지금 상황 돌아가는 게 좋지 않으니 좀 더 매력적인 제안을 하고 싶어서.”
“매력적인 제안?”
“요즘 압박을 심하게 받고 있을 텐데? 신족들이 빠른 속도로 치고 들어오고 있기도 하고.”
“…….”
바로 정곡을 찌르고 들어오는 준성의 말에 하나다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하려는 제안은?”
“지금의 자리, 지키도록 도와준다면 어때?”
그것은 현재 하나다가 가장 바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런 호의를 베푸는 걸 순순히 믿을 만큼 순진하지도, 녹록하지도 않았다.
“왜 도우려는 건지 물어봐도 되겠나?”
“간단해, 당신이 신족의 수작에 넘어가게 되면 이쪽도 제법 곤란한 처지에 놓이니까. 서로 이해관계가 일치한다면 지금이라도 손을 잡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한번쯤 튕기며 간을 보고 싶었지만 현재 상황은 하나다가 오기를 부릴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상대는 수틀리면 그냥 물러나면 되니까.
애당초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어떤 방법으로 도울 수 있지?”
“신족들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게 만들어 주지. 그리고 신족이 침입하면 격퇴시켜 주는 조건이라면 만족할 수 있으려나.”
신족의 개입을 차단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다에게는 감사하며 받아들일 일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그리고 고맙다.”
“별말씀을.”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수월하게 풀려가는 상황에 준성도 미소를 지었다.
“일본을 끌어들인 이유가 있나요?”
질문을 하는 이나의 목소리는 부정적이었다. 그동안 일본 A.O. 본부가 준성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생각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가 있는 인접국이기도 하고 신족의 입김이 닿지 않았으니까. 적으로 돌아서게 되면 가장 귀찮게 굴 수 있으니 지금쯤 손을 써두는 게 나아.”
“그래도요. 한 번 칼을 들이밀었던 녀석들인데.”
다른 차원 출신이지만 대한민국의 교육을 받고 그들의 행동을 본 이나였기에 일본에게 굉장한 적대감을 보였다.
“잘 컨트롤해야지. 그 정도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고 봐.”
“칫! 감정기복이 심해서 미안하네요.”
“그런 건 아니고. 우리도 언제까지 대한민국에 국한될 수는 없으니까. 일본으로 영역을 넓히면 더 많은 수를 만들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그리고요?”
뒷말이 본심임을 느낀 이나가 준성을 보며 재촉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끝까지 대답을 듣고자 하는 이나의 모습에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방패막이도 필요하잖아.”
“역시 준이에요!”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좋아하는 이나를 보며 준성은 어깨를 으쓱했다.
뭔가 부끄러운 기분이었다.
제104장 새로운 용언
드래곤은 장고 끝에 준성의 제안을 수용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세계 각지에 퍼져 있는 그들은 제법 오랜 시간 확실하게 자리를 잡아 놓았지만 신족의 위협에 노출된 상황에서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정기정과 비슷하게 각지에서 전해지는 압박감에 고민하던 그들은 신족들이 자신들의 거취를 파악하고 있다는 말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잘 부탁해.”
아델카나가 준성을 보며 말했다.
골드 드래곤인 그녀는 일곱이 전부인 드래곤을 앞장서서 이끄는 역할을 맡았다. 이번 결정이 이루어지고 난 뒤 신속하게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도 아델카나의 공이 크다고 정기정은 말했다.
“이곳은 안심하고 지내도 될 겁니다.”
“그거야 계속 들어온 말이니까. 신족 녀석들도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한 것 같기도 하고.”
완전한 신이 되어 권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모습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드래곤들도 포스를 운용한 몇 가지 마법을 시전할 수 있지만 그것뿐, 권능에 당해 낼 재간은 없었다.
준성은 예전부터 그 부분이 궁금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드래곤은 신의 권능까지 넘볼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의 드래곤은 전쟁에서 패했다고는 해도 너무나도 약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드래곤이 지닌 가장 큰 무기는 뭡니까?”
“무기? 우리의 무기라면 강력한 육체지.”
“육체?”
“드래곤본은 우리를 가장 확실하게 지켜주는 무기니까. 몇 가지 마법이 있지만 그건 잔재주에 불과하고 브레스가 가장 큰 파괴력을 지니고 있어.”
“그럼 용언도 모르는 겁니까?”
“용언? 보니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라는 것 같은데, 드래곤들의 언어야 있어. 그런데 지금 들어보니 다른 의미인 것 같은데.”
“…….”
아델카나의 반문에 준성은 생각에 잠겼다.
보아하니 이곳의 드래곤은 용언이라는 걸 모르는 게 분명했다.
드래곤의 가장 큰 무기이자, 자연의 섭리마저 간섭할 수 있는 이 힘은 금탑주 시절, 드래곤을 중간계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다.
신언에 준하는 이 힘을 전수해도 되는 걸까.
잠시 고민에 잠겨 있던 그는 그동안 쌓아온 믿음이라면 한 번쯤 시도해 볼 만한 일이라고 결정을 내렸다.
어느덧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느끼며 준성이 말문을 열었다.
“용언이라는 걸 배워 볼 생각 없습니까?”
신의 얼굴에는 불편한 기색이 감돌았다.
조용히 자신의 힘을 키워 나가며 언제든 이어질 수 있는 테라의 습격에 대비하던 나날이었다. 그런 와중에 더 이상 자신의 수족이 아니게 된 존재의 등장은 반가워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오랜만입니다, 위대한 신이시여!”
불길한 검은 기류가 주변을 물들였다. 지그시 찌푸린 미간을 펴지 않은 채, 신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곳에는 무슨 일이죠?”
“그동안 회복에 힘쓰느라 안부 인사를 전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거동이 가능해졌으니 위대한 신을 위해 일하고자 합니다.”
“그 말을 믿기에는 그동안 당신이 보여준 행동이 믿음직하지 않네요.”
“킥킥! 제가 믿음직하지 못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말로 하는 행동은 그리 믿음직하지 못하네요.”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쏴아앗!
악마가 자신의 가슴 언저리로 손을 옮기자, 검은 기류가 휘몰아치면서 작은 구가 만들어졌다.
그것을 본 신의 눈이 저절로 커졌다.
“이 정도면 믿음의 증표가 되겠습니까?”
신은 조용히 악마가 내미는 것을 받아들었다. 이건 악마의 근간을 이루는 코어로 존재 자체를 소멸시킬 수 있는 물건이었다. 이것이 파괴되면 자신 또한 죽음을 맞이하지만 같이 소멸할 마음이라면 언제든지 악마를 제거할 수 있는 생명줄이었다.
“마음이 바뀐 이유가 뭐죠?”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반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신이시여! 현재 상황은 우리에게 매우 좋지 않습니다. 신족은 이 세계에서 신의 행세를 하고 있고, 또한 새롭게 탄생한 신은 자신의 세계에 침입한 우리들을 불쾌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걸 모르지는 않아요.”
신족도 문제였지만, 지구의 신도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김준성이라는 인간이 가장 큰 걸림돌이 아닙니까?”
“…….”
신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현재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그의 존재는 신의 입장에서 반드시 정리해야 할 일 순위였으니까.
“제가 하고자 하는 건 모든 일이 해결될 때까지 도움을 드리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일이 있거든 뭐든지 시켜만 주십시오.”
“당신이 이렇게 믿음을 보인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겠죠.”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낮게 웃음을 지은 신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킥킥!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그 믿음에 부응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당신의 그 웃음이 끝까지 나를 만족시킬지 지켜보도록 하겠어요.”
“후회는 없을 것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악마를 휘감은 검은 기류가 강렬해지면서 그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동안 그 광경을 지켜보던 신은 그가 움직일 것을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그런 일도 없겠죠.”
그것이 어떨지는 오직 당사자만 알고 있을 뿐이다.
세계의 절반 이상을 감시할 수 있게 된 공간 이동 탐지기는 참으로 많은 정보를 가져다주었다.
곳곳에서 능력자들이 시전하는 공간 이동도 있었지만 신족의 것으로 추정되는 공간 이동도 많았다. 그리고 최근 들어 준성과 이나를 신경 쓰게 만드는 움직임이 있었다.
“한번 가보는 건 어때요?”
“함정일 수도 있어.”
이나의 권유에 준성은 부정적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준이 일본을 한편으로 끌어들인 것 때문일 수도 있어요. 단순한 탐색이라면 저들의 전력을 줄일 기회가 없잖아요.”
“그건…… 확실히 맞는 말이야.”
순순히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준성이었다.
얼마 전 확실하게 일본을 끌어들인 자신의 행동이 저들의 심기를 건드렸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함부로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이유는 자칫 신족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드는 격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럼 이건 어때요? 우리가 가는 게 힘들다면 미끼를 투척하는 거예요.”
“미끼?”
“있잖아요, 아직 약한 주제에 온갖 센 척은 다 하는 튼튼한 미끼가.”
지이잉!
그 순간 공간 너머에 대기하고 있던 영웅이가 몸을 거세게 떨었다.
그리고 그 떨림은 정답이었다.
연신 비명을 지르는 영웅이를 보며 준성은 침묵했고, 욕을 먹은 당사자인 이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함정은 아니네요.”
“가서 구해 줄까.”
“네, 저렇게 아파할 줄은 몰랐는데 왠지 모르게 미안하네요.”
졸지에 함정 여부를 가리는 미끼로 투척된 영웅이는 신족 둘과 치열한 접전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일방적인 구타를 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탄탄한 동체는 그 충격을 고스란히 전달했고, 덕분에 처절한 비명을 지르면서 연신 이나의 욕을 하는 중이었다.
함정이 아니란 걸 확인한 둘은 곧장 공간 이동을 통해 전투 현장으로 향했다.
며칠 전부터 두 신족의 움직임이 감지된 곳은 훗카이도와 사할린 섬 사이였다.
유빙이 떠다니는 곳에서 영웅이는 신족의 공격을 요리조리 피해 다녔지만 적중할 때마다 오두방정을 떨며 비명을 질러 댔다.
“이번 전투는 이나 네게 맡길게. 상대는 완전한 신이 되었다고 해도 금탑 시절 드래곤보다 조금 더 강한 수준이야. 저들을 감당할 수 없다면 대신족은 상대할 수 없어.”
“알겠어요. 잘 지켜봐요, 그동안 했던 수련이 헛된 게 아니란 걸 보여 줄 테니까.”
자신감 넘치게 대답하는 모습에 준성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나와 대치한 두 신족은 홀로 나선 인간 여인을 보며 비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고작 인간에 불과한 것이 자신 둘을 상대로 혼자서 나선 것이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밑에서 분노가 들끓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다음 이어진 첫 충돌에서 그 생각은 완전히 날려 버릴 수밖에 없었다.
파앙!
북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빛의 공격이 그대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 틈을 비집고 듀란달이 쇄도했는데, 자칫 잘못하면 본신에 큰 타격을 입을 만큼 강력한 힘이었다.
“인간……!”
“이 정도로 놀라서는 곤란한데.”
마주 선 이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도발적인 그녀의 행동에 두 신족의 눈에 살기가 서렸다.
“대체 어느 정도로 강해지면 자신들을 신이라고 칭하는지 궁금했어. 그 실력을 내게 한번 보여주지 않겠어?”
“제 주제도 모르는 년.”
“죽여 달라고 빌게 만들어 주마.”
“얼마든지!”
전투적으로 바뀐 두 신족을 보며 이나는 기꺼이 응했다.
준성과 이나가 사라진 금탑의 영역으로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구축한 감시망에 걸려들지 않는 완벽한 잠입이었다.
빛이 아닌 검푸른 기운이 전신을 감싸는가 싶더니, 이내 순백의 빛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였다.
감시망을 파훼하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엘 카스일이었다.
“인간은 자신들이 완벽하다고 생각하면 방심을 하지. 이곳이 녀석들의 터전인가.”
준성을 제거하겠다고 테라에게 말했지만 앞뒤 가리지 않고 멍청하게 달려들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엘 카스일이 가장 먼저 행하고자 한 것은 인간들이 구축해 놓은 요새를 허무는 일이었다.
지켜주는 성벽이 사라질 때 느낄 당혹감과 분노, 그리고 무력감은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다음 자신의 힘으로 천천히 요리를 하면서 위대한 신족에게 대항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도록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이상한 기운이군. 신성력과는 다르지만 포스보다 더 맑아.”
금탑의 영역에 퍼져 있는 마나에 엘 카스일은 잠시 멈칫했다.
강해지는 것에 미쳐 있는 그로서는 포스보다 더 강한 힘의 존재가 무엇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인위적으로 끌어들여 자신의 것으로 삼았을 때, 거센 반발이 일어나면서 사방에 튕겨 나가는 걸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건…….”
포스보다 더 순수하고 강렬한 힘.
이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다면?
엘 카스일의 얼굴에 짙은 탐욕이 서릴 무렵, 강렬한 힘의 파동과 함께 한 인영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신성하다는 느낌이 절로 드는 순백의 기운은 신족의 것과 확연하게 달랐다.
“넌 누구냐?”
“제가 누구인지보다 당신이 누구인지 더 궁금해요. 신족이겠죠?”
“맞다, 내 이름은 엘 카스일. 제 주제도 모르고 우리에게 까부는 녀석들을 혼내주려고 왔다. 보아하니 너는 인간인 것 같은데 지닌 기운은…….”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여기서 알아야 할 점은 당신이 침입자라는 거예요. 지금이라도 정중하게 사과하고 물러난다면 용서하겠어요. 그럴 생각이 있나요?”
단호하게 말을 끊는 세희였지만 엘 카스일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짙어졌다.
“내가 그럴 거라고 보나?”
“인정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잘 알겠군.”
“그 결정…… 후회하게 될 거예요.”
세희의 얼굴에 표정이 지워졌다. 그리고 감정마저 완전히 배제된 그녀의 상태는 무(無) 그 자체였다.
동시에 그녀의 전신을 휘감은 신성력이 더욱 강렬해졌다.
파앙!
공간이 갈라지면서 매서운 충격파가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단순한 신경전에 불과한 공방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무위를 보이고 있었다.
처음 이나의 한 수에 당황한 모습을 보이던 신족들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을 수습한 뒤 차근차근 이나를 압박해 나갔다.
자연스러운 무위의 발휘와 권능의 발현이 어우러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나의 얼굴에는 여전히 여유가 맴돌았다.
그 이유를 준성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슬슬 시작인가.”
지금까지는 상대의 힘을 파악하기 위한 탐색전.
신족들은 어떨지 몰라도 이나의 생각은 그러했다. 그리고 그녀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는 순간, 지금과 확연하게 다른 힘이 발현되었다.
쩌엉!
둔중한 충격과 함께 힘이 허공에서 상쇄되었다. 조금 전까지 우위를 점하고 있었기에 공격을 가하던 신족, 론 제스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튕겨 냈어?”
“말도 안 돼! 권능이야!”
옆에 있던 론 카들리가 외쳤지만 눈에 보인 현상은 분명히 상쇄했다.
“그 정도로 놀라면 곤란하다고.”
자신의 힘이 확실하게 먹혀든 것을 본 이나가 목소리를 높이며 달려들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두 신족이 지닌 권능이 무엇인지 파악한 이나였다.
방금 전 공격을 펼친 론 제스는 상대의 힘 자체를 약화시키는 디버프 권능을 지니고 있었고, 그 옆의 론 카들리는 공격 강화라는 버프의 권능이었다.
함께 다니면 상대는 약하게 만들고 자신들의 힘은 더욱 강화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닌 셈이다.
분명 위협적이지만 두 힘이 어떤 방식으로 발현되는지 알았기에 빈틈을 파고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
따앙! 따다당!
저돌적으로 전진하는 이나를 보며 론 제스가 디버프를 걸었지만 그녀에게 밈ㄹ려들던 디버프가 그대로 튕겨 나갔다.
“이런!”
방금 전에도 먹히지 않은 권능을 다시 발현하다니. 빛의 힘과 권능을 조화시킨 것은 대단한 성과였지만 그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했다.
입꼬리를 말아 올린 이나의 시선과 론 제스의 눈이 마주했다.
“그러니 상대를 잘 봐가면서 해야지.”
허공을 가른 이나의 검이 단숨에 론 제스를 베어 갔지만 뜻을 이룰 수 없었다.
틈을 파고든 론 카들리가 가까스로 공격을 튕겨 낸 것이다.
쩌엉!
“칫! 귀찮게 구네.”
명검 듀란달의 능력은 충격을 상쇄시키고, 이나의 뜻대로 오러의 발현과 발출이 자유롭게 만들었다. 론 제스의 디버프를 튕겨내고 론 카들리로 대상을 바꾸는 순간, 이나의 검이 허공에 떠오르면서 달려들었다.
콰콰콰콰!
강렬한 오러가 푸른 불꽃을 만들어 내면서 쇄도하는 모습은 모골이 송연하게 만들었다.
의지가 있는 것처럼 대상을 향해 달려드는 검은 쉽게 피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론 카들리는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격에 버프를 걸었다.
산조차 날려 버릴 수 있을 공격이었지만 은밀하게 파고든 한 줄기의 힘이 론 카들리의 버프를 완전히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이, 이 권능은…….”
“늦게 알아차린 것도 죄라면 죄야.”
화들짝 놀란 론 카들리는 공격을 피하려고 했지만 버프가 해제된 공격은 오러 파이어에 집어삼켜졌고, 도망치려던 목을 훑고 지나갔다.
슈악!
“크륵! 크르르!”
뭐라 말을 하려고 했지만 론 카들리는 비틀거리며 물러나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곧이어 한 줌 빛으로 화한 몸은 그대로 허공에 흩어졌다.
“이제 하나 남았네?”
권능과 일체화된 검술은 신마저 무너뜨릴 수 있었다. 자신의 무위가 확실하게 먹혀든다는 사실은 이나의 입가에 미소가 맺히게 만들었다.
듀란달을 잡아 든 이나의 시선이 론 제스에게 향했다. 조금 전까지 자신감을 보이던 그녀의 눈동자는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일개 인간이 디스펠(Dispel) 권능을 지니고 있을 줄은.”
“눈치챘네? 뭐 이쯤이면 눈치채는 게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상관은 없어. 어차피 제거할 건데 알아차려 봤자 늦은 거지.”
둘이었을 때도 우위를 점하지 못했는데 하나면 답은 뻔했다.
“…….”
여유가 넘치는 이나를 보며 론 제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당장 찢어죽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디스펠은 권능 중 최상위에 속한 것이다. 자신이 지닌 것으로 어찌할 수 없었기에 물러서는 게 최선이었다.
파앗!
마음의 결정을 내린 즉시 론 제스의 몸이 튀어 오르며 공간을 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상대의 의도를 꿰뚫고 있는 이나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도망치는 전개는 너무 식상해!”
“크으!”
인상을 일그러뜨린 론 제스가 디버프를 걸고 빛의 공격으로 튕겨내려고 했지만 듀란달은 가볍게 그것을 부숴 버리고 파고들었다.
재차 도약하며 움직이려던 론 제스의 몸은 마치 보이지 않는 실에 묶인 것처럼 멈칫하더니, 쇄도하는 듀란달에게 일격을 허용했다.
“끼아아악!”
정확하게 가슴을 파고든 듀란달에서 강렬한 오러의 불꽃이 일어나며 론 제스의 몸을 태워 버렸다.
소멸하는 모습을 본 준성이 가볍게 숨을 고르는 이나를 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수고했어.”
“완전히 내가 제압한 것도 아닌데요. 준이 돕지 않았으면 성취감이 있었을 텐데.”
론 제스를 제거하는 마지막 순간, 준성이 개입을 했다. 만약 그가 붙들지 않았다면 신체 부위 하나를 내주더라도 공간 이동으로 도망쳤을 것이다.
“오늘은 경험을 쌓는 단계일 뿐이야. 다음부터는 오늘같이 상황을 낙관할 수 없어.”
“그렇죠. 알긴 아는데…….”
도망치는 상대를 완벽하게 제압할 수 없는 사실이 이나로 하여금 아쉬움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권능의 발현이 자연스러워. 좀 더 가다듬어서 상대가 예상치 못한 순간 발동하게 하자.”
“네, 오늘 대결에서 많은 걸 깨달았어요. 이제 신족 하고 전투를 벌여도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는 생각에 이나도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헤스티아가 테라를 찾은 것은 엘 카스일이 휘하 신족을 데리고 떠날 무렵이었다.
초강경파로 분류되는 그는 언제 폭발할지 알 수 없는 시한폭탄과 같았다. 당연히 그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던 그녀로서는 대놓고 움직이는 행동을 감지할 수밖에 없었다.
“테라, 왜 엘 카스일을 보낸 거죠?”
“더 이상 불만을 억누를 수 없게 되었으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당신이라면 그를 막을 수 있다는 걸 모를 줄 알고요?”
“내가 왜 엘 카스일을 막아야지?”
“지금의 질서는 당신이 원하는 전개가 아니었나요? 그런데 분란이 일어날 만한 요소를 지켜보고 있는 거죠?”
“간단해. 엘 카스일은 내가 하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야.”
테라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자연히 헤스티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말은 그를 이용해서…….”
“적대하는 녀석들을 치워 주면 좋지. 물론 성공할 거라 생각하진 않아. 아마 큰 피해를 입고 돌아오거나 모두 소멸할 테니까. 그런 녀석들이 사라지면 내가 움직이는데 더 편해지지 않겠어?”
“그들은 동족이에요!”
“앞으로 만들어질 신계에 녀석들 같은 분란 종자는 필요하지 않아.”
“…….”
냉정한 테라의 말에 헤스티아는 할 말을 잃었다.
“더 이상 당신은 예전의 테라가 아니군요.”
“신이 되려면 내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해. 엘 카스일은 치워야 할 정리 대상에 불과했고. 헤스티아 너도 명심해. 나와 반목하는 건 용서하지만 내가 하려는 일에 방해물이 되는 건 이야기가 다르니까.”
그 말이 진심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여차하면 자신 또한 엘 카스일처럼 버리는 패로 쓰일 수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입술을 깨물며 치미는 분노를 억누른 헤스티아가 대답했다.
“……그러죠.”
몸을 돌리고 멀어지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테라가 중얼거렸다.
“그렇게 되지 않게 노력해.”
모두를 위해서라도.
테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엘 카스일은 지금의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대신족이 아니기에 팔대신의 반열로 평가받지 못했지만 자신의 힘이라면 능히 그들과 견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무력하게 무너지는 순간, 그 믿음은 송두리째 흔들렸다.
표정 한 점 드러내지 않고 자신을 제압한 눈앞의 여인은 인간이 아니었다.
한때 모든 동족이 힘을 합쳐 상대해야만 했던 전지전능한 존재와 닮아 있었다.
“너, 너는 신……?”
“나는 신이 아니에요. 그저 신을 모시는 한 사람일 뿐.”
“헛소리 마라! 네가 이렇게 정체를 감추고 있을 줄이야. 완전히 당해 버렸어.”
“…….”
목소리를 높이는 엘 카스일을 보며 세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상대는 제거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완벽하게 그를 소멸시키고자 손을 내미는 순간, 완전히 사라졌던 얼굴에 당혹감이 번져 가며 멈칫했다.
‘방금 전 이건…….’
엘 카스일을 제압하고, 강적 하나를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은 좋았다.
하지만 이게 순수한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 낸 결과가 아니었다.
대마법사라고 하나 그 힘만으로 신족을 상대하는 건 어렵다. 그런데 어떻게 힘을 발휘해서 압도적인 힘으로 신족을 제압했을까.
바로 신이 준 힘이었다.
그것까지는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세희를 멈칫하게 만든 이유는 방금 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인 손 때문이었다.
보이지 않는 의식에서 신족을 제거해야 한다는 맹렬한 적의가 들끓었다. 그들을 적대하고 있지만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외칠 만큼 감정이 큰 건 아니었다.
‘이건 내가 아니야.’
고민은 길었고 결정을 내리는 건 짧았다.
여기서 신족을 제거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자신이 지닌 힘이 아니고, 누군가에게 받은 힘이다. 대가 없는 호의는 없고, 자신은 그것을 마음껏 발휘했으니 이제는 대가를 치를 차례다.
그 대가가 무엇인지는 어렴풋 짐작이 되었다.
“보내 드리겠어요.”
“……뭐라고?”
“운이 좋은 날로 생각하시길.”
파앗!
그 말을 끝으로 세희의 몸이 빛에 휩싸이며 그대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엘 카스일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오늘의 대결로 고고하던 자존심이 무너지고, 체면도 무너졌다. 돌아가 봤자 돌아오는 건 패잔병 대접일 뿐이겠지만 지금은 살아남는 게 중요했다.
“다음에는 반드시, 반드시 이 빚을 갚아주겠다.”
그 다짐과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엘 카스일을 쓰러뜨렸지만 흔적은 아무 곳에도 남지 않았다.
세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오는 준성과 이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와요, 갔던 일은 잘 해결됐나요?”
“당연하지! 내가 싹 다 쓸어버렸어, 언니!”
“정말? 그동안 열심히 수련을 했으니 드디어 빛을 보나 보다.”
“그런 셈이지. 내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데. 이제 신족 하나둘쯤은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어.”
세희의 칭찬에 이나는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상대가 방심하고 준성의 도움이 약간 있었지만 이제 더 이상 짐으로 취급받지 않아도 되었다.
“다른 일은 없었고?”
“네, 없었어요.”
준성의 물음에 세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왠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진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크게 의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음에 느껴진 이상 기류는 그의 표정을 딱딱하게 굳도록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