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233)
제113장 영웅이 수난기
지구 신을 바라보며 준성은 손에 움켜쥔 것을 매만졌다. 당장 제련제강의 마법을 시전하여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적대적인 태도를 읽은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왔다고 했지? 그런데 계속 이렇게 적대하는 모습을 보이면 곤란한데. 일단 앉아, 그리고 대화를 나눠 보자.”
허공에 손을 젓자, 준성의 뒤로 하얀 의자가 생성되었다. 앉으라는 제스처에 엉덩이를 붙였다.
“여태까지 내가 한 행동을 보면 그런 의심을 살 수밖에 없지. 뭐, 사과라도 해야 하나?”
“이곳을 찾아온 이유에 대해 말해 주면 된다.”
적이 될 거라고 공언하던 상대가 나타난 마당에 예의를 차릴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면야. 우선 내가 찾아온 이유는 간단하다. 그동안 쌓인 오해를 어느 정도 풀고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해?”
“세계의 불순물인 너를 제거하는 건 내 입장에서 당연하지. 너로 인해 세계의 규칙이 흔들리고, 혼란이 벌어진 걸 감안하면 당연한 것 아닌가?”
“그다지.”
말 한 마디 수긍하는 것조차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지구 신을 바라보는 준성의 태도는 신중했고, 날이 서서 분위기를 날카롭게 만들었다.
“인간이란 것은 자기 멋대로 생각하게 마련이니까. 굳이 그걸 이해하지 않아도 좋다. 그래도 알아둬야 하는 건, 내가 지금 가만히 있기에 엘리엔이 무사할 수 있다는 거다.”
“……뭐라고?”
“계약 파기가 되었다고 영향력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란 의미다.”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이며 양팔을 펼치자, 알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이 휘몰아쳤다. 표정을 굳힌 준성은 미간을 지그시 모으다가 손을 내밀었다.
“그 부분은 알겠다. 그래서 내게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하다. 네가 지닌 마법이란 걸 더 이상 세상에 퍼뜨리지 마라.”
태연한 표정으로 내뱉은 요구였지만 그것이 지닌 의미는 가볍지 않았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군.”
“이미 그걸로 세계가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모른다고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데? 안 그래?”
“…….”
준성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마법이 세계에 퍼지면서 발생할 악작용에 대해서 그도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던 것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선 최대한 많은 편을 만들어 두는 것이 최선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 내가 얻을 것은?”
“그렇게 나올 줄 알았지! 인간들은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걸 먼저 알고 싶어 하니까. 그리고 내가 그걸 들어줘야 이행할 마음이 있을 테고. 아닌가?”
“맞다.”
“그래서 네가 받아들일 만한 매력적인 제안을 가지고 왔다. 그것도 무려 세 가지나. 어때, 이 정도면 충분히 들어볼 만하겠지?”
“제안부터.”
“첫째는 아카식 레코드의 이용이다. 차원의 도서관을 이용하지 못해서 답답하겠지? 앞으로 많이 필요할 텐데 기꺼이 눈감아 주지. 둘째는 엘리엔의 계약을 완전 무효화시켜 주겠다. 더 이상 네 신경에 거슬리는 일이 생겨나지 않겠지.”
모두 준성에게 굉장히 유리한 조건이었다. 아카식 레코드 이용 경우, 준성도 모르는 정보를 간직하고 있기에 필요한 순간은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마지막은?”
“네가 이 세계에 머무는 것을 유보해 주겠다.”
“유보……?”
“널 세계의 불순물로 생각하던 걸 거둬 주겠다는 말이다. 그 전에 저지른 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내가 범한 실수로 인정해 주겠다는 뜻이지.”
“…….”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준성으로서는 커다란 마음의 부담 하나를 내려놓을 수 있는 제안이었다.
“그거면 되나?”
“어차피 신족 녀석들과 충돌은 피할 수 없을 텐데, 나까지 신경 쓰게 되면 견뎌내지 못할걸? 기꺼이 부담 하나를 내려주지.”
“지금 당장 결정을 내릴 수 없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수락하고 싶었지만 지구 신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고, 그 진의를 파악하는 작업도 필요했다.
“누가 급한지 잘 알고 있을 테니 물러나 주지. 하지만 내 참을성이 그리 길지 않다는 걸 알아야 할 거야. 젊다는 건 참을성이 부족하다는 의미도 되거든.”
준성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지구 신이 가볍게 손을 휘젓자, 둘만 존재하던 공간이 어그러지며 빠른 속도로 소멸되어갔다.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는 그의 귓가로 지구 신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그럼 어디 유익한 고민을 해보라고. 내가 지치지 않도록 하고.”
그 말을 끝으로 지구 신의 모습은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거하게 고민거리 던져 주고 가는군.”
지구 신이 등장하면서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마나 전체가 뒤덮인 대한민국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한순간이지만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신족의 존재가 파고들지 못한 상황에서 기름을 부은 격이 되어 버렸다.
“……어쨌든 이런 제안을 받게 되었어.”
준성은 지구 신과 나눴던 이야기를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를 듣던 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저마다 생각에 빠져들었다.
“대체 왜 이런 제안을 가지고 온 걸까요?”
“내 생각에는 리엔을 이용하려던 건 더 이상 큰 효력을 발휘하기 힘들 거라 여겨서일 거야. 사용하기 힘든 패를 던져 주고, 나를 회유해서 신족과 전투를 치르게 만드는 것이 좋다고 여겼겠지.”
“준의 생각은 어떻고요? 저는 준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결정했으면 좋겠어요.”
이나는 복잡한 생각을 던져두고 준성을 무조건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세희는 어떻게 생각해?”
“서방은 이 제안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해?”
“나쁘지 않다고 봐. 지구 신의 손에 놀아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어차피 신족과 전투는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 그러면 실리를 취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그렇다면 좋겠지만, 지구 신이 순순히 약속을 지킬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야.”
“그것도 고려하고 있어. 우선 중요한 건 리엔의 안전이니까.”
“그럼 나도 상관없어.”
“미안하다, 나 때문에.”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엘리엔은 고개를 숙였다. 모든 일이 자신으로 인해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니 입이 열 개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타나의 생각은 어때?”
“나쁘지 않지만 액면 그대로 믿으면 곤란하다, 주인. 그 부분까지 주의한다면 얻을 게 있겠지.”
결론은 주의를 하되, 얻는 것이 크니 받아들이자는 쪽이었다. 자신이 생각하던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가자 준성은 내심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신 문제는 어떻게 할 거예요?”
지구 신과의 문제를 일단락 지었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사안은 남아 있었다.
이나의 우려에 다른 이들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신의 존재를 직접 실감한 순간, 대한민국도 미국과 유럽의 국가들처럼 신을 모셔야 한다는 강렬한 열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금탑이 존재했으며, 이 추세가 이어지면 A.O. 본부가 힘을 상실하고 정부 조직으로 편입, 서방 국가들과 비슷한 흐름이 이어질 것이다.
꽤나 심각한 문제였지만 준성은 싱긋 웃으며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간단하잖아? 신의 존재를 다른 신으로 인식하게 만들면 돼.”
“그게 가능해요?”
“불가능할 건 없지.”
준성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렸다.
그가 제시한 방법은 사람들이 지구 신의 존재를 다른 신으로 착각하게끔 유도하는 것이다.
이럴 때 가장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 바로 신관이다.
평소에는 각자의 삶에 충실하던 신관들은 세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포교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 신성력이 생겨나며 기적을 펼치는 순간, 모든 관심을 독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세희가 지은 신명은 바로 전생의 이름 ‘세레나’였다.
자애와 치유의 여신으로 이름을 높이면서 일약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존재가 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여신 세레나의 위명이 퍼져 나갔지만 세희의 한숨은 늘어만 갔다.
“얻는 것보다 소모되는 게 더 많아서 적자야, 서방.”
신도는 늘어나지만 문제는 기적을 이행하면서 소모되는 신성력의 양이었다.
“참아야지, 별수 있겠어?”
“에휴!”
준성의 달램에 세희는 풀 죽은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드래곤이 준성에게 받은 부탁은 간단했다. 각지의 정부 소속 능력자들과 맞서고 있는 반 능력자 연맹을 지원하는 일이었다.
첨예하게 이어지던 대립이 점점 정부 측으로 기울었지만 드래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협력을 하면서 전황은 팽팽하게 이어졌다.
꽈광! 꽈과광!
“모두 도망쳐라.”
강력한 힘이 전방을 휩쓸자, 한창 유리한 고지를 점하던 정부 소속 능력자들이 멈칫했다. 그 틈에 반 능력자 연맹은 안전하게 후퇴를 할 수 있었다.
“이것도 못할 짓이군.”
바스리엘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리자, 듣고 있던 아델카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 힘이 좀 생기니까 다 쓸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어?”
“그동안 귀찮게 군 녀석들이니 상관없지 않나?”
“우리가 부탁받은 내용이 뭔지 기억해 둬. 그렇게 날뛰다가 신족 녀석들이 뛰쳐나오면 복잡해지는 건 우리들이라고?”
“알고 있으니 이렇게 조용히 하고 있는 거다.”
“그래도 좀이 쑤시긴 해. 얼마나 강해졌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데 말이야. 안 그래, 카를로니안?”
딴에는 주의를 돌리려고 한 말이지만 반 능력자 연맹 능력자들을 후퇴시킨 정기정은 표정을 굳히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 기회가 생긴 것 같다.”
“뭐?”
파아앗!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렬한 힘이 그들을 덮쳐 왔다. 정기정이 손을 뻗으며 마나를 운용하자, 반투명한 막이 모든 드래곤의 전신을 휘감았다.
꽝!
둔중한 소리와 함께 자리에 모여 있던 세 드래곤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뭐, 뭐야?”
“아무래도 신족인 듯하다.”
정기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빛이 번뜩이며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정기정과 아델카나, 바스리엘을 노려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네놈들은 드래곤이군.”
“엘 카스일…….”
모습을 드러낸 신족을 본 정기정의 음성이 낮게 깔렸다. 엘 카스일은 아직도 기억에 남을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닌 신족이었다.
대신족에 버금가는 힘을 지닌 그는 상대하기 벅찬 존재였다.
“어떻게 할 거야, 카를로니안?”
“순순히 물러날 수 있게 두지 않을 거다. 우리가 익힌 용언을 활용할 무대가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지는군.”
“나쁘지 않네. 힘을 얻었다면 강한 녀석과 상대해 보고 싶었으니까. 바스리엘, 원하던 상황이 왔으니 한번 날뛰어봐, 알았지?”
“물론.”
날카로운 눈으로 엘 카스일을 노려보던 바스리엘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한 상황에서 신족을 만났다면 그들은 물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용언을 습득하고 인공 드래곤 하트가 동체에 자리를 잡으면서 저마다 자신감을 가졌다.
그 전까지 신족에게 패배하고, 그들을 당해낼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지금은 ‘한 번쯤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자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대신족에 버금가는 엘 카스일과 대결을 벌이면서 그 생각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꽈광! 꽈과광!
아델카나가 시전한 바람의 힘이 사방에 휘몰아치면서 엘 카스일의 진로를 방해하고 그 틈을 타고 바스리엘의 화염이 덮쳐갔다.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공격 패턴이지만 그 위력은 그야말로 천양지차. 이전의 드래곤을 생각하고 자신만만하던 엘 카스일은 이렇다 할 기회를 잡지 못한 채 뒤로 물러나기 급급했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고!”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은 아델카나가 목소리를 높이며 전의를 다졌다. 그것은 정기정과 바스리엘도 마찬가지였으나, 그들의 발목을 잡은 것은 시간이었다.
“물러날 때가 됐다, 아델카나.”
“왜!”
“이곳에 계속 머물면 신족들이 떼로 몰려올 걸 알면서 있을 생각인가? 용언이 먹혀든 것만 보아도 오늘은 충분한 수확을 거뒀다.”
“쳇! 알았다고.”
입술을 삐죽이던 아델카나가 뒤로 물러났다. 고개를 끄덕인 바스리엘도 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스파앗!
“…….”
푸른빛에 휩싸인 세 인영이 사라질 때까지 엘 카스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표정을 굳힌 그는 드래곤이 사라진 자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 녀석들은 대체…….”
한순간이지만 완전히 압도되었던 광경을 떠올리며 그의 기세가 사납게 휘몰아쳤다.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지만 악마 신은 준성을 보고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반겨주었다.
“갑자기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건지?”
“할 말이 있어서. 여유가 좀 되나? 다른 일로 바빠 보이던데.”
“얼마든지. 걱정하지 마시고 오시면 됩니다.”
뼈 있는 준성의 말이 들려 왔지만 개의치 않고 자리를 권하는 그였다.
맞은편에 앉은 그를 보며 악마 신은 준성이 찾아온 연유를 물어 보았다.
“이제 찾아온 이유를 말씀하시길.”
“지구 신과 교감이 있었나.”
“……무슨 말씀이신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지만 그 부분에 대해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준성도 이미 짐작이 갔기에 더 캐묻지는 않았다.
“한 가지만 묻지. 넌 이 세계를 지배하고 싶나?”
“그걸 묻는 이유가 뭔지 먼저 알고 싶군요.”
“간단해. 이 세계에 미련이 없다면 우리는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테니.”
“신족, 지구의 신, 그리고 당신까지. 이 세계는 상대해야 할 적이 너무나 많지요.”
어깨를 으쓱한 악마 신의 말에 준성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으으! 으으으!]앓는 소리를 흘린 영웅이의 두 눈에서 푸른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섬뜩할 만큼 강렬한 것이지만 그것을 마주한 타나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입가에 한줄기 미소마저 서려 있었다.
[죽여 버리겠다!]여유가 날 때만 되면 자신을 찾아와서 시도 때도 없이 굴려 대는 타나 때문에 이미 영웅이는 악에 받쳐 있었다. 섬광이 번뜩이며 환두대도가 매섭게 휘둘러졌으나, 타나는 이미 뒤로 물러나 있었다.
터엉!
그리고 이어진 공격.
[끄아악!]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진 영웅이는 곧장 자리에 버티고 서서 방어 태세를 취했다. 한 번 기선을 빼앗기면 그 다음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난폭한 공격이 이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공격을 펼치지 않았다. 영웅이는 자신이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의 반사 신경을 떠올리며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드디어 이 몸의 방어가 완숙의 경지에…….]“여기는 무슨 일?”
[뭐?]꽝!
[꽥!]타나의 시선이 다른 곳에 향해 있다는 걸 알아차린 영웅이는 고개를 돌렸다가 그대로 일격을 허용하고 연무장 구석을 뒹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타나의 고개는 고정되어 있었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엘리엔이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다.”
“별로 대답해 주고 싶지 않은데.”
“준성에 관한 것이다. 지구 신과의 동맹에 대해서 네게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뭔데?”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지만 준성과 연관이 있다고 하자, 타나는 마지못해 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제안을 어떻게 생각하지?”
“나쁘지 않아. 무작정 견제당하는 것보다 손을 잡는 게 나으니까. 그로서도 우리를 적대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단지 그것뿐?”
“처음부터 주인을 제거하려고 마음을 먹었었어. 달콤한 제안을 내밀었다고 해도 믿지 않아. 실력으로 헤쳐 나가야 할 문제야.”
“…….”
썩 믿음직하지 못한 대답에 엘리엔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타나는 그 이상의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던 거였어.”
“뻔한 걸 물어보는 게 이상한 거야.”
타나는 처음부터 믿을 것이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것은 엘리엔도 실감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에 양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
“도와준 건 고맙게 생각한다.”
“말보다 보답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보답?”
“저거.”
타나가 가리킨 곳에서 형편없이 뒹굴었다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영웅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럼에도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한 엘리엔이 고개를 갸웃하자, 타나가 용건을 꺼내 놓았다.
“훈련시킬 때 도움을 청하고 싶어서. 내 공격만 막다 보니 패턴이 고착화되는 것 같아. 좀 더 다양한 검을 겪어 보게 만들고 싶은데.”
모처럼 단 휴식에 젖어 있던 영웅이는 화들짝 놀랐다. 이나라면 모를까 엘리엔도 타나 못지않은 무자비한 손속의 여인이었다.
[안 돼! 받아들이면 안 된다!]하지만 엘리엔은 그의 기대를 당당히 저버렸다.
“다양한 상대를 만나보는 건 실전 경험에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
“부탁해도 될까?”
“어렵지 않은 일이다. 내 질문에 대한 보답이다.”
[으으으!]당사자의 의견은 듣지도 않고 결정을 내리는 그녀들의 행태에 영웅이는 치를 떨었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야, 서방.”
돌아오는 준성을 보며 세희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귀찮게 굴 수 있는 적 하나를 치우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어.”
“맞아. 출신이 악마니까 믿음을 주는 것 자체가 어렵잖아? 나는 서방이 선택한 방법이 가장 낫다고 생각해.”
“아직 변수가 많아서 확실하다고 말하기에 어려워.”
“결정을 내린 게 아니었어?”
“그쪽도 고려할 게 많을 테니까. 내 제안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고 결정을 내리면 다시 연락을 주겠다는 선에서 이야기가 끝날 수밖에 없었어.”
준성의 제안은 서로에게 가장 이상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는 것이었다.
아군보다 적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적이라고 칭하기에 복잡한 존재. 그것이 바로 악마 신의 현재 위치였다. 애매하기 그지없는 그를 치우는 것이 가장 이상적임을 누구도 모르지 않았다.
“너구리같네.”
“나름대로 계산이 서 있겠지. 그게 복잡하다는 게 여러모로 함정이지만.”
“그래도 긍정적이라 다행이네. 하나를 치우면 그 다음은 좀 더 편해지지 않겠어?”
“그걸 노리고 있는데 어떻게 될는지.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시점에서 최대한 노력을 해보자.”
“내가 옆에 있으니 마음 놓아도 좋다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하는 세희를 보며 준성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반 능력자 연맹은 세계 전역으로 전선을 넓히면서 국지전을 벌였으나, 하나로 통합된 능력자들은 각자 영역을 철저하게 방어하면서 그들을 압박해 나갔다.
그 결과 팽팽하던 전황은 차츰 정부 소속 능력자들에게 기울어 갔다.
준성의 부탁을 받은 드래곤이 각지에 출몰하며 도움을 주었지만 그것만으로 기울어진 전황을 뒤집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스페인의 전황은 반 능력자 연맹에게 있어 최악으로 기울고 있었다.
처음 전투는 팽팽함 그 자체였다. 오히려 반 능력자 연맹이 압도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한 능력자의 등장은 전황을 송두리째 뒤엎었다.
“바울이다!”
그의 정체를 알아차린 능력자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바울이라는 이름은 과거 세계에서 가장 강했던 열 명의 능력자 중 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구사하는 어스퀘이크(Earthquake)는 다수를 상대함에 있어 최적화된 능력이었다.
쾅!
두 손이 지면을 두드리자 땅이 갈라지며 능력자들을 덮쳐 갔다. 이리저리 흩어지며 어스퀘이크 여파에 벗어나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 틈을 파고든 것은 돌덩이처럼 묵직한 바울의 주먹이었다. 주변의 이목을 흐려 놓은 뒤, 귀신같이 약점을 파고드는 공격은 스페인에서 일어난 몬스터 웨이브에서도 그 위력을 입증했다.
“물러나! 도망쳐!”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걸 알아차린 반 능력자 연맹은 후퇴를 시도했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바울은 입매를 비틀며 중얼거렸다.
“불가능한 일이다.”
쾅!
다시 한 번 능력을 발현하자, 후퇴하는 경로의 지면이 뒤집혔다. 도저히 걸어서 도망칠 수 없을 만큼 길이 엉망으로 망가졌던 것이다.
“A.O. 본부가 망가진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쪽도 사정이 있다 보니.”
독 안에 갇힌 쥐와 같은 신세가 된 그들을 보며 바울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딛으며 사냥을 시작하려고 할 때, 그의 감각을 비집고 파고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피슛!
“크으…….”
눈치를 채고 발 빠르게 물러났지만 완벽하게 피하지 못하면서 부상을 입은 바울의 두 눈이 섬뜩한 빛을 뿌렸다. 그리고 공격의 진원지로 향하는 순간, 그의 표정이 급변했다.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인간이 눈앞에 멀쩡하게 서 있던 것이다.
“네놈이 어떻게 이곳에 있는 것이냐?”
“…….”
상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걸음을 옮겨 도망치려던 반 능력자 연맹 능력자들이 후퇴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줄 뿐이었다.
한숨 돌릴 틈을 얻자, 그들은 공간 이동으로 속속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바울은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남자 때문이었다.
“죽어서 사라졌다고 하더니 반 능력자 연맹에 가담한 것이냐! 더글라스 브라운!”
“정부의 개가 되어 신족을 받드는 네가 할 말은 아니다, 바울.”
죽었다고 알려졌던 전 미국 A.O. 본부장, 더글라스는 바울을 직시하며 스산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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